< -- - 7. -- > * 78화 *
어쨌든 이야기는 일단락되어, 르마쿠르 자매도 알 유세피나의 저택에 머물며 진석을 도와 도적단 사카르의 행방을 찾는데 협력하기로 했다. 진석은 사카르가 분명 평소엔 도심 어딘가에 일반 시민으로 녹아들어 있을거라는 자신의 추리를 설명했고, 알 유세피나와 르마쿠르 자매도 일견 앞뒤가 맞는 타당한 생각에 동감을 표했다. 그 뒤 세 여자는 대지의 눈을 찾는데 가장 큰 공을 세우는 쪽이 러셀의 정실이 되느니 마느니 하는 소리를 떠들어 댄 것 같지만... 못들은 셈 치고 넘겼다. 떡줄 사람은 생각도 없는데 김칫국만 팔팔 끓이는구나. 진석과 르마크르 자매는 일단 정보를 모으기 위해 서로 갈라져 거리로 나섰다. 수확이 있건 없건, 하루 이틀로 끝날일은 아닌듯 하니 우선 저녁식사때가 되면 다시 저택으로 돌아오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알 유세피나는 세간에서 신분을 감춘 몸. 저택 밖으로 나갈 수 없었으니 혼자 남겨졌다. 잠시 여러가지를 궁리하던 그녀는 나지르를 방으로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고개를 숙이며 정중히 알 유세피나의 방으로 들어서는 나지르. 국왕이자 자신의 사촌오빠 알 파지드가 붙여준 이 남자는 정말로 훌륭했다. 외모도 그렇지만, 일 처리도 깔끔하고 매사에 유능했다. 게다가 아름다운 무희들이 저택안에 넘쳐나는데도 불구하고 단 한 번도 헛된곳에 눈을 판다거나하는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매사가 자로 잰듯 반듯했다. 흡사 욕구가 거세된 사람 같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믿음직했다. 자신의 욕망마저 억누른채 자신이 맡은 일에 임할 수 있는 인재는 흔한게 아니니까. 알 유세피나는 고개를 끄덕여 나지르의 인사를 받으며 말했다.
"나지르. 내 부군이 되실 러셀님을 돕고 싶다. 사람을 풀어 거리에서 사카르에 대한 정보를 모으도록. 늦었지만 놈들이 훔쳐간 대지의 눈을 되찾아야겠어."
"......"
평소대로라면 바로 시원스레 대답을 하고 명령을 실행에 옮겼을 나지르지만, 지금은 어째선지 눈을 바닥에 내리깐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알 유세피나는 처음보는 그의 태도에 의아함을 느꼈다.
"나지르?"
"그 명령은... 불가합니다. 대지의 눈은 되찾아 드릴 수 없습니다."
"하아?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눈을 들어 황당해하는 알 유세피나를 빤히 바라보는 나지르. 알 유세피나는 아무 대답없이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기만 하는 나지르를 한참이나 마주보았다. 알 유세피
"...나지르."
"네."
"그대는 유능하고 현명한 자다. 아무 이유도 없이 내 명령을 거부한건 아닐테지."
"......"
한참을 나지르의 대답을 기다리는 알 유세피나. 그러나 알 유세피나의 시선을 묵묵히 받아들이며 입을 굳게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나지르. 한참이나 그런 대치가 이어졌는데, 알 유세피나는 먼저 화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체 뭐야! 내 명령을 따르지 못하겠다면, 이유라도 말하란 말이다!"
"...알 유세피나님. 대지의 눈을 찾는건 포기하십시오."
"너어!"
나지르에게 달려들어 그의 멱살을 쥐는 알 유세피나. 나지르의 이런 불경한 태도는 처음이었다. 물론 그도 남자. 처음봤을때는 두렵고 꺼림찍한 상대였으나 오랜 시간 옆에서 충실히 자신의 요구나 시중을 수행하는 모습에 점차 신뢰하게 되어, 지금은 자신의 제일가는 심복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그가 이런 행동을 취하다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는... 할 수 없습니다."
"왜, 대체 왜! 그냥 도적들을 쫓아 내가 잃어버린 물건을 찾겠다는 것 아니냐! 이 명령의 어디가 잘못되었다는 거냐?!"
늘 무표정하던 나지르의 얼굴에 처음으로 그늘이 드리워졌다. 어딘가 슬픈듯한, 반쯤은 체념한 얼굴. 한참 뭔가를 고민하던 나지르는 결국 무겁게 잠겨있던 입을 열었다.
"사카르가 대지의 눈을 훔쳐간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그것은... 알 파지드 폐하의 의지였습니다."
"......"
나지르의 입에서 흘러나온 터무니 없는 소리. 생각치도 못했던 이야기에 순간 알 유세피나의 사고는 마비되었다. 방금 나지르가 뭐라고 한거지? 이 녀석, 대체 무슨 헛소리를 하는거야? 이 나라의 국왕인 자신의 사촌 오라버니와 대지의 눈이 대체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나지르... 너, 대체 무슨 헛소리를..."
"헛소리가 아닙니다. 알 파지드 폐하는 알 유세피나님이 대지의 눈을 낙찰받았다는 사실을 알고는, 일부러 그 소문을 저잣거리에 흘리게 하셨습니다. 네, 대지의 눈이 도적단의 먹잇감이 되도록 유도한것은 바로 알 파지드 폐하십니다."
"오라버니가...? 어, 어째서 그런 일을..."
너무 터무니없는 이야기에 허탈한 표정을 지은채 나지르의 멱살을 놓고 휘청거리며 두세걸음 물러나는 알 유세피나. 나지르는 입다물고 죽을지언정 거짓말을 할 타입의 인간은 아니다. 국왕이자 자신의 사촌 오빠인 알 파지드가 어째서 그런 일을 했는지 그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지르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분명 진실일터. 나지르는 제자리에 그대로 선채 슬픈 얼굴을 하고 말을 이어갔다.
"아직도 모르셨습니까. 알 파지드 폐하는... 알 유세피나님을 사랑하고 계십니다."
"...?!"
나지르의 말에 경악으로 물든 얼굴을 한채 뒤로 물러서다 제자리에 풀썩 주저앉는 알 유세피나. 너무 놀라 몸의 힘이 풀린것인지 두 다리가 덜덜 떨리고 있었다.
"나, 나를... 사랑? 오라버니가? 아니 대체 그... 왜... 무슨, 어째서..."
예상을 초월한 갑작스런 이야기에 제대로 된 말조차 내뱉지 못하는 알 유세피나. 나지르는 바닥에 쓰러진 알 유세피나를 부축하여, 그녀를 의자에 앉힌 다음 그녀의 옷 매무새를 다듬어주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알 파지드 폐하와 알 유세피나님의 나이 터울은 꽤 많이 나지요. 그분은 알 유세피나님이 갓 태어났을때부터 멀리서 쭉 지켜보고 계셨다고 합니다."
알 파지드의 나이는 올해로 마흔. 알 유세피나와는 무려 열네살 차이가 난다. 그는 알 유세피나가 어려서부터 커오는것을 쭉 지켜보았다. 당연하게도 알 유세피나가 정상적인 여자와는 다른 몸이라는것도 알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아는 이들은 모두 그녀를 꺼려했다. 심지어 피붙이 가족조차 알 유세피나를 박대했다. 왕족의 일원이기에 의식주만은 부족할게 없었지만, 언제나 외톨이 신세.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했다. 애정의 편린조차 접하지 못하고 성장했다. 알 파지드는 그녀의 고통을 먼 발치에서 전부 지켜보고 있었다.
"알 유세피나님이 철들 무렵, 알 파지드님은 어느날 문득 자신이 알 유세피나님을 사랑한다는것을 깨달았다고 했습니다. 아름답지만 단 하나의 흠 때문에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하고 자라온 가련한 사촌 여동생. 처음엔 단순한 동정이었지만, 어째서인지 마음속에서 떠나질 않았다고 합니다. 생각하면 할수록 마음속에 자리잡은 알 유세피나님의 모습은 점점 커지기만 했다고 이야기 하시더군요."
"오라버니가... 나를..."
하지만 아라파의 국법은 엄격하다. 왕족간엔 사촌은 커녕 먼 친족간에도 결혼은 불가. 알 파지드는 알 유세피나를 짝사랑하는 마음을 가슴속에 묻어두고, 형제들을 젖히고 국왕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왕실에 가장 큰 이득을 안겨 줄 수 있는 정략결혼을 선택한다. 그리고 국왕의 자리에 오른 그가 한 행동은 알 유세피나를 자신의 보호아래에 두는것이었다.
"이 저택은 알 유세피나님을 보호하기 위한 공간 따위가 아닙니다. 가둬두고 자유를 구속하는 감옥이지요. 그리고 저는... 알 파지드 폐하가 보낸 간수나 다름없습니다. 알 유세피나님의 모든 요구와 수발을 들어주되 그 일거수 일투족을 보고하라는 명을 받았지요. 알 파지드 폐하는 자신이 알 유세피나님을 가질 수 없으니, 차라리 누구에게도 넘겨줄 수 없다는 생각으로 이곳에 영영 묶어두기로 마음먹으신 겁니다."
"그런... 말도 안되는..."
상냥하던 사촌 오라버니. 나라의 으뜸가는 존재. 신의 섭리를 대행하는 자, 위대한 아라파의 국왕. 다른 이들은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박대해왔지만, 오직 그만은 자신에게 친절했다. 국왕의 자리에 오른 뒤엔 손수 찾아와 이 모든것을 자신에게 선물처럼 안겨주었다. 순진하게도 그것들이 선의이자 호의라고만 생각했는데. 상상도 못했던 진실에 알 유세피나의 눈에선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자신은 구속을 자유라 착각하고 가련한 무희들을 괴롭히며 부질없는 애정이나 갈구하던 바보였다.
"소유자의 소원을 들어준다는 대지의 눈. 허나 그냥 누군가가 지어낸 이야기일 뿐이겠지요. 그런 편리한 물건이 있다면 어느 바보가 그것을 경매장에 내놓고 팔겠습니까. 그저 값을 더 받고자 부풀렸을 뿐인 허황된 꿈결같은 소리. 하지만 알 파지드 폐하는 그런것이라고 해도 대지의 눈이 알 유세피나님의 손에 들어가길 원하지 않았습니다. 만에 하나, 정말로 만에 하나라도 알 유세피나님의 몸의 결함이 사라진다면. 그래서 이 저택밖으로 빠져나가 다른 누군가와 사랑을 하게 되고 그의 아내가 된다면. 알 파지드 폐하는 그런 일은 용납할 수 없었겠죠. 알 유세피나님은 언제까지고 이곳에서 알 파지드 폐하의 완전한 소유물로 남아있어야 했습니다."
사랑했지만 손에 넣을 수 없기에 영원토록 곁에 두고 그저 지켜보려 했는데. 희박한 확률이지만 사랑하는 상대가 자유를 찾아 자신이 마련한 안락한 둥지에서 떠나갈지도 모른다니. 결코 있어선 안될일. 알 파지드의 짝사랑은 이미 비뚤어진 소유욕이 된지 오래였다. 그는 사람을 써서 저잣거리에 대지의 눈의 수송일정을 흘려 도적떼를 꼬이게 만들었다. 원래 경매장에서 낙찰받는 고가의 상품 이송 정보는 당연히 극비. 도적따위가 함부로 알 수 없는 정보였으나, 결국 이러한 경위로 이야기가 새어나가 도적단 사카르에게 노려지고 또 빼앗긴 것이었다.
"그리고 저는 알 파지드 폐하의 모든 의중과, 알 유세피나님이 속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충실히 명령에 따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왜...? 왜 그런거야 나지르...?"
눈물을 주륵주륵 흘리며 슬픔과 원망이 섞인 눈동자로 나지르를 올려다보는 알 유세피나. 그 시선에 나지르는 탄식하듯 자신의 비밀을 고백해왔다.
"저는... 이성을 사랑하지 못합니다. 갑작스러운 이야기라 믿으실수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제가 사랑하는 것은 같은 남성입니다."
"...뭐?"
"아시다시피 제 신분은 낮습니다. 하급 무관의 집안, 그것도 막내인 사남으로 태어났지요. 철이 들때쯤 제 정체성을 깨달았지만,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못한채 아버지의 뜻대로 군문에 자원했습니다. 제 검술 실력은 정말 변변찮았지만 외모가 번듯해 보기 좋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알 파지드 님을 근처에서 모시는 근위병이 되었습니다. 근위병은 왕의 위엄을 대변하는 상징물 같은 존재이기도 하니 일부는 체격이나 외모를 우선해 뽑기도 하는터라... 제 얼굴이 눈에 띈것은 정말로 운이 좋다고 밖엔 할 수 없는 일이었죠. 그리고 대단친 않지만 사소한 공을 몇세우다보니 어느새 장교의 자리에까지 올랐습니다. 그렇게 저는 알 파지드 님을 매우 가까운곳에서 모시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정말 우연한 계기로 같은 근위대 내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와 함께하는 모습을... 알 파지드 폐하에게 발각당했지요."
보수적인 사상을 유지하는 아라파에서 동성애란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물론 인간의 모든 성적열망을 충족할 수 있는 대 환락가 하디카에선 가능한 일이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유희. 하디카가 아닌 바깥에서까지 대놓고 밝힐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하디카 안에서는 가능하지만 그 밖에서는 안된다니. 정말로 이해할 수 없는 이중적인 잣대지만 이것이 아라파 사람들이 가진 통념이었다. 하디카에서 즐기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공언할 경우, 악마가 씌였다며 사회적으로 멸시와 천대를 받거나 심지어 무차별적인 공격과 폭행을 당하기도 했다. 그렇게 죽더라도 어디가서 하소연조차 하지 못했다. 더군다나 근위대 장교라는 자가 그런 모습을 국왕에게 들켰으니 이건 목이 달아나도 변명의 여지가 없는 상황이었다. 물론 알 유세피나도 무희들을 데려다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도구로 사용했지만 그것은 그 대상인 무희들과 알 유세피나, 그리고 국왕인 알 파지드만이 아는 비밀. 왕족의 저택 은밀한 침소안에서 벌어지는 일에 간섭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알 파지드 폐하가 거래를 제안하시더군요. 너의 비행은 눈을 감아주겠다. 대신 내 사촌 여동생 알 유세피나의 집사로 들어가 그녀의 수발을 들며 일거수 일투족을 내게 보고해라. 그렇게만 한다면 너와 네 연인은 무사할것이다. 그리고 저는 그 제안을 거부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그런거였어...?"
사정을 알고 나니 나지르에게도 일말의 동정심이 일어났다. 자신이나, 아름다운 무희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던 이유도 납득이 갔다. 나지르도 그냥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 명령에 따랐을 뿐인것이다.
"처음엔 그저 연인을 지키기 위해 따른 명령이었지만... 오랫동안 알 유세피나님의 곁에서 시중을 들며 알게되었습니다. 알 유세피나님이야 말로 누구보다 괴로워 하고 있었다는것을.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한 괴로움을 그저 곁에 무희를 쌓아두는것으로 해소하고 있었다는 것을. 모든게 갖추어진 풍족한 저택이지만, 정작 알 유세피나님의 마음속엔 공허함 뿐이라는것을. 쭉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긴 시간동안 곁에서 모시는동안 저는 알 유세피나님이 진심으로 웃는 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했었습니다. 하지만 오늘 아침 보았습니다. 러셀이라는 낯선 남자에 대해 말을 꺼내실때의 알 유세피나님은 처음으로 진심에서 우러나온 미소를 짓고 있었습니다."
"......"
이 남자는 그 긴 시간동안 곁에서 날 관찰하며, 지켜보고 있었다. 과연. 그랬구나. 나는 오늘 이전까진 단 한 번도 진심으로 웃는일 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구나. 나지르의 말은 분명 사실이었다. 아무리 아름다운 무희를 곁에 둔들 이것은 상대를 강제하여 기르는 인형놀이나 다름없는 짓. 사촌 오빠인 알 파지드가 자신에게 한 일을, 자신 역시 무희들을 상대로 반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아, 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이었던가. 이 얼마나 바보같은 작태였던가? 타인의 인생을 강제로 옭아둘 자유 따위 아무에게도 없는것을.
"육신의 흠결로 남자를 두려워하며 곁에 여자밖에 두지 못하는 알 유세피나님. 그리고 남자이면서도 같은 남자를 사랑하는 저. 한 켠에선 동질감을 느꼈던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알 유세피나님은 처음 보는 남자에게도 마음을 열고 드디어 한 발 앞으로 나아가셨습니다. 저는... 저는 더 이상 알 유세피나님을 속일 수 없을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모든 진실을 말씀드린겁니다."
"나지르..."
제자리에 우뚝 선 채 슬픈 표정만을 짓고 있는 나지르. 겉으로 눈물을 흘리고 있는건 아니었지만, 마음속으론 그도 울고 있을터. 나지르 역시 약점을 잡혀 이용당했을 뿐인 불쌍한 남자. 그리고 자신에게 내쳐질 위험을 감수하고 진실을 알린것은... 지금까지 지켜봐온 알 유세피나라는 인간을 믿기 때문이겠지. 그런 나지르의 믿음을 져버릴 수 없었다. 알 유세피나는 손을 뻗어 나지르의 손을 마주 쥐었다.
"나지르. 고마워. 내게 진실을 알려줘서."
"아닙니다. 좀 더 빨리 말씀드리지 못하고 지금까지 속여와서 죄송합니다. 저는 정말... 비겁한 인간입니다."
"그렇지않아.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한 선택이었잖아. 당신은 내가 아는 누구보다 용감한 사람이야."
말 없이 고개를 숙여보이는 나지르. 알 유세피나는 눈가에 고여있던 눈물을 닦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러셀님에 관한것... 보고할거야?"
"...하지 않겠습니다. 함께 지내도록 하십시오. 제게 알 유세피나님의 미소를 앗아갈 권리따윈 없으니까요. 하지만 드러내셔선 안됩니다. 알 유세피나님에 대한 모든 보고는 저를 통해서 올라갑니다. 제가 발설하지 않는 이상 발각될 일은 없지만, 정말 만에 하나라도 이 사실이 알 파지드 폐하의 귀에 흘러들어간다면 분명 그는 목숨을 잃을게 분명합니다."
그리고 저 역시 목이 달아나겠죠. 나지르는 그 말은 꾹 삼켜넘겼다. 하지만 말하지 않아도 그런 사실쯤, 알 유세피나도 잘 알고 있었다.
"사촌 오라버니... 아니, 알 파지드 국왕."
알 파지드의 이름을 읊는 알 유세피나의 눈매가 싸늘해졌다. 늘 사촌 오라버니라 부르던 친근한 호칭은, 이제 그냥 이름으로 바뀌어 버렸다. 유일하게 자신에게 큰 호의를 베풀어준 고마운 친족. 정말 믿었는데. 그렇게나 신뢰하고 따랐는데. 차라리 자신을 좋아한다고 대놓고 말이라도 하는게 나았을것을. 그랬다면 법률을 어기는 일이 될지언정, 그에게 배우자가 있을지언정, 서로 다른 관계가 되었을지도 몰랐을텐데. 자신의 일방적인 욕망을 위해 이런식으로 자신을 가둬두고 사육하고 있었을줄은 정말 몰랐다. 자신이 무희들을 상대로 똑같은 짓을 하고 있었다는 것도 소름끼치도록 후회스럽고 화가 났다. 알 유세피나의 미간이 좁혀졌다. 곧 그녀의 입에선 나지르가 상상조차 못하던 말이 흘러나왔다.
"...실각시키겠어! 알 파지드 국왕을 밀어내고, 내가 이 나라의 정점에 설거야."
"무... 무슨 말을 하시는겁니까?!"
대경실색하는 나지르. 갑작스러운 반역 선언. 놀라는건 당연했다. 하지만 알 유세피나는 차분한 어조로 나지르에게 설명했다.
"아무리 잘 숨기려고 한들 사람이 하는 일이야. 잘 위장해서 한동안은 러셀님을 감춘채 무사히 지낼 수도 있겠지. 하지만 언제고 발각당할지도 몰라. 나지르 말고도 혹시 다른 눈이 더 있어 알 파지드에게 보고를 할지도 모르지.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될까? 나지르나 나나, 다 끝이야. 불안감에 떨며 반쪽짜리 행복으로 만족하며 살 수는 없어. 차라리... 알 파지드가 날 새장속에 갇힌 새라고 생각할때, 그 뒤를 찔러주겠어. 허울뿐인 직위라도 내겐 재무차관의 금력과, 근위대의 고문이라는 병권이 있어. 물론 그리 큰 힘은 아니지만 다 쓰기 나름이지. 난 이것들을 바탕으로 알 파지드를 몰아낼거야."
"아, 알 유세피나님..."
"도와줘 나지르. 네 협력이 필요해. 아니, 날 도와줄 건 오직 그대밖에 없어. 나지르도 언제까지 연인과 갈라진채 이런 생활을 할 순 없잖아? 내가 자유를 줄께. 이 나라에서 동성간의 사랑도 인정받도록 바꾸어나갈께. 하디카에선 가능한 일이 정작 그 밖에선 안된다니. 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잖아? 그러니... 제발 도와줘. 이렇게 부탁할게."
나지르에게 머리를 숙이며 간절히 부탁하는 알 유세피나. 나지르는 상상도 못했다. 그저 하루하루 비뚤어진 욕망에 취해서 살아가던 가련한 여자의 내면에 이런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을줄은. 눈을 감고 잠시 숙고하던 나지르는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떴다. 그 러셀이란 남자가 나타난 이상 어차피 엎질러진 물이었다. 살아있는 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한 번 정도는 끝까지 가보고 싶었다.
"...부탁이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저는 알 유세피나님의 집사. 얼마든지 하명하십시오. 미력하나마 저 역시 끝까지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알 유세피나와 나지르가 그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때, 진석은 시라즈의 거리를 하릴없이 헤메고 있었다. 정말 아무 생각도 계획도 없이 그냥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있었다.
'뭐 지젤이랑 아네트는 알아서 할테고...'
두 자매는 페레나에 자리를 잡기 전에 함께 대륙 여기저기를 함께 여행했었고, 아네트는 용병 경험도 있다고 했다. 사카르는 아라파 내에선 잘 알려진 도적들이라고 하니 분명 그녀들이라면 크건 작건 뭐든간에 정보를 건져오긴 할 것이다. 하지만 자신은 아무생각도 없었다.
'그야 도적놈들 정보를 캐러 나온건 처음이니까.'
저번 데오그라즈의 왕궁을 털때처럼 막막했다. 아니, 왕궁은 숨어있는것도 아니고 그냥 제자리에 고정된 대상이다. 숨어들 방법만 알면 털수 있었고 실제로 실행해서 목표를 완수했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십수년간 발각당하지 않고 도적질을 해온 놈들을... 내가 무슨 수로 찾아?'
그러고보니 엘리야 생각이 났다. 이럴때야말로 엘리야가 있으면 엄청나게 큰 도움이 될텐데. 사람의 뒤를 쫓거나 정보를 수집하는 그녀의 능력은 탁월했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데오그라즈에서 제이스, 아르데나와 함께 사전공작에 참가하고 있을터. 이제와서 불러 올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하아... 난감하네.'
게다가 시라즈는... 엄청 덥다. 아직 6월임에도 태양의 열기가 살갗을 찔러대는 것 같다. 이런 더위까지 구현하지 말라고! 물론 습기가 없는 사막의 더위라 그늘로 들어가면 한결 낫다만 정보를 모으겠답시고 나오자마자 쉬러 들어간다는것도 웃기고. 하지만 딱히 행선지가 있는것도 아니니 길거리만 여기저기 헤메는 상황.
'아, 안되겠다. 뭐라도 좀 마실까.'
게임상임에도 따가운 직사광선을 한참 직격당하고 있자니 목이 탔다. 적당히 길가에 보이는 아담한 식당으로 들어갔다. 사막지대인 아라파에선 수분 섭취를 위해 중국의 얌차처럼 끼니 사이사이에 가벼운 간식과 차를 즐기는 일이 잦았다. 이런 식당에서도 당연하다는듯 적당한 먹거리와 음료를 팔았다. 진석은 주문을 받으러 온 점원에게 간단한 마실것을 주문했다. 그늘속에 들어오니 살 것 같았다. 겨우 볕에 있냐, 그늘 속이냐 하는 차이인데 이렇게까지 차이가 느껴진다는게 신기할 정도다.
'자자... 막무가내로 돌아다닐게 아니라 뭔가 행선지라도 정해보자.'
진석은 턱을 괴고 사람들과 낙타가 지나다니는 시라즈의 거리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상대는 도적. 자신의 추리가 맞는다면 그것도 오랫동안 도시의 어둠에 스며들어 왔을 놈들이다. 게다가 이놈들을 찾고자 하는 시도는 자신이 처음이 아닐것이다. 병사들도 그들을 찾으려 했을테고, 머리가 좀 도는 관리들 역시 똑같이 찾으려 시도 했을터.
'하지만 독심술이라도 쓸 수 있는게 아닌 이상 일반 시민으로 위장한 놈들을 찾을 수 있을리가 없지.'
처음부터 들키지 않기 위해 시민의 모습으로 숨어있을 놈들이다. 막무가내로 정보를 캐고 다녀야 놈들은 더욱 깊은 그림자속에 몸을 숨길터. 안타깝지만 이쪽에서 먼저 찾는다는건 불가능에 가깝다고 봐야했다.
'그러면 놈들을 유인해봐?'
값어치 있는 화물의 정보를 날조해 뿌리고, 상단으로 위장해 놈들이 나타나길 기다린다거나... 음. 이건 시도해 볼만 할 것 같다.
'하지만 이건 알 유세피나의 도움이 필요하겠군. 그리고 사카르 놈들이 어느 경로로 정보를 얻느냐에 따라 안 걸려들수도 있고, 위장을 눈치챌 수도 있겠는데...'
그래도 무작정 거리를 헤메는것보단 분명 나은 방법이리라. 진석은 머릿속에 유인책을 남겨두었다. 그때 주문한 음식과 차가 나왔다.
"흠. 일단 먹으면서 생각할까."
쟁반에 담긴 차와 다과를 착착 내려놓곤 곧바로 또 다른 손님의 주문을 받으러 가는 점원. 어차피 이름만 보고는 뭐가 뭔 음식인지 몰라 적당히 주문했더니, 손가락 두마디 만한 춘권 비슷한 것과, 차이 같은 음료가 딸려 나왔다. 차이는 터키에서 흔히 마시는 단 홍차라고나 할까. 우유대신 설탕을 엄청 넣는데... 과연 찻잔옆에 각설탕이 여러개 곁들여져 나왔다.
"이건 빵이야 뭐야?"
집어 들어 살펴보자니 파이 반죽 같은걸로 감싼 내용물을 잘 구워 슈가파우더를 뿌린것이다. 깨물어 먹어보니... 안에는 설탕에 졸인 과육이 들어있었다.
"으악 달어. 차도 달고 곁들인 다과도 달고. 뭐야 이거."
다과가 달면 차는 쌉쌀하던가 해야지. 균형이 안맞잖냐 균형이. 이런거 자주 먹었다간 당뇨 걸리게 생겼다. 아 게임이니까 막 먹어도 상관없나. 그렇게 생각하면서 연신 집어먹는 진석. 각설탕을 잔뜩 넣은 차이까지 마시니 입안이 끈적하고 텁텁해졌다. 점원에게 물을 부탁해서 입안을 행궈넘기며 생각했다.
'단맛과 또 단맛이라... 설탕에 또 설탕. 음... 단맛의 다과엔 정 반대의 맛인 쓴 차가 맞다고 생각했는데.'
케이크와 커피라거나. 양갱이나 녹차. 그리고 숨는 도적과 쫓는 추적자. 이것들도 반대의 맛처럼 서로 정반대의 관계군. 흐음. 한 번 추적자가 아닌 반대의 입장, 그러니까 도적의 관점에서 생각해볼까? 내가 이 도시를 거점으로 삼고 활동하는 도적이라면 어떻게 숨으려고 했을까? 어, 그야 뭐... 역시 이 놈들과 비슷한 방법을 썼겠지. 사람들 사이로 위장해서 스며든다. 음... 아니 잠깐. 그러면 이놈들의 정보를 긁어모으며 찾으려고 애쓸게 아니라... 거꾸로 이놈들이 나에게 접근하게 만들수도 있지 않을까? 도적과 추적자가 아닌, 서로 같은 도적과 도적이 되는거다.
"......"
그래 맞다. 위장한 상단을 꾸리는것보다 더 좋은 유인책이다. 놈들을 어둠속에서 끄집어 내기 위해 자신도 도적으로 위장하는것이다. 뭐 간단하다. 사카르의 이름을 빌려 깽판을 치거나 여기저기 잔뜩 떠들고 다니는거다. 내가 사카르다. 나야말로 그 긴 시월동안 한 번도 붙잡히지 않은 도적단의 일원이다. 뭐 이딴식으로 한참 떠들고 다니면 놈들도 마냥 지켜볼수만은 없겠지. 물론 상대측에서도 머리가 돌아간다면 이런 허튼소리나 떠들고 다니는 놈, 그냥 그러던가 말던가 내버려두면 그만이지만... 놈들은 조직. 분명히 게중에서 탐탁찮게 생각해 접근해 오는 놈이 하나쯤은 있을것이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가정일 뿐이라 안 낚일 가능성도 있지만, 안 먹히면 뭐 그냥 그만인걸. 그땐 먼저 떠올려본 위장 상단 유인책이라도 써보면 될테지. 어차피 모 아니면 도. 놈들을 잡기 위해선 이거저거 가능한건 다 실행해봐야 할터.'
진석은 테이블위에 잔돈을 올려놓고 가게를 나섰다. 째앵. 여전히 사막의 햇살은 강렬했다.
"그럼... 하디카나 가볼까?"
대 환락가로 이름 높은 하디카지만 하디카도 하디카 나름이다. 휘파람새처럼 화려하고 멋진 가게들만 있는곳은 절대 아니다. 어느 도시나 마찬가지로 외곽지대엔 음습한 슬럼이 형성되어 있었다. 거기서부터 시작해 볼 생각이었다.
'그러고보니 방랑자로 게임을 막 처음 시작했을때, 돈이 없어서 해밀턴의 환락가 외진곳에서 범죄를 저지르려고 했었지. 어쩌다보니 방향을 선회해서 에나를 강도질하게 되었었지만. 이거 결국 빙 돌아서 다시 비슷한 짓을 하러가는군.'
에이, 아무튼 나는 범죄자다. 지금의 나는 난폭한 무법자다. 사카르의 이름을 사칭하는 수상한 도적놈이다. 진석은 그런 문구를 머릿속으로 몇 번이고 반복해 되뇌이며 하디카 외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시라즈엔 하디카가 있는만큼 그 그림자에 기생하는 조직도 많았다. 하지만 파이가 워낙 큰 만큼 그들은 의미없는 대립보다는 공존을 추구해왔다. 세 개의 큰 조직이 연합을 이루어 하디카를 구역별로 나누어 담당한것이다. 각자 자신의 구역의 속한 가게들에게서 보호세를 상납받거나, 혹은 가게에서 소모되는 온갖 집기나 비품등을 시세보다 비싼 가격에 팔아넘기며 이문을 착복했다. 또는 아예 직접 여러 가게들을 직접 관리하며 운영하기도 했다. 중심지역은 연합인 세 조직이 꽉 잡고 있었지만 외곽지역은 세 조직에서 갈라져나온 하부, 방계조직들이 관리했다. 이들은 전형적인 피라미드식의 수직구조를 이루고 있었기에 위로 올라가기 위해선 더 많은 수익을 거두고 또 상납해야만 했다. 그렇게 하디카 중심지역의 간부급까지 올라간다면 발 아래에 수많은 부하들을 두고 정말 여느 귀족못지 않은 호사스러운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러니 자연히 하디카의 외곽으로 갈수록 밀주나 마약, 인신매매나 노예거래, 혹은 살인청부 등 더 많은 수익을 내기 위한 위험한 사업이 판을 쳤다.
"너 시발 아까 나보고 뭐라고 했냐? 어? 또 말해봐. 말해보라고!"
하디카 외곽의 어느 선술집. 퍼억! 덩치가 산만한 남자가 입과 코에서 안면에 주먹을 얻어맞곤 선혈을 뿌리며 한쪽 구석으로 나동그라졌다. 으허어 죽는 소리를 내며 꿈지럭거리는게 한동안은 꼼짝 못할 것 같았다. 주변엔 그렇게 나동그라져 있는 사내들이 다섯명이나 더 있었다. 여섯이나 되는 건장한 사내들이 하나같이 엉망으로 얻어터진채 나뒹굴고 있었다. 그 한가운데에서 실실 웃는 얼굴로 남자들을 발길로 걷어차고 있는 검은 머리의 사내, 진석이었다. 진석은 방금 자기보다 덩치가 두배는 되는 남자를 장난감처럼 날려버리고도 성에 차지 않았는지 바닥에 쓰러진 남자들을 자근자근 밟아댔다.
"병신새끼들. 야 엄살피지 말고 일어나. 내 후장에 주먹을 박아서 그대로 남창굴에 팔아준다며? 해봐. 해보라고!"
퍼억퍽. 진석의 발길이 바닥에서 구르는 남자들을 공차듯 다뤘다. 최대한 덜 치명적인 곳만 골라차며 고통을 주었다. 그야 배나 옆구리를 차다 내장이 터지거나 갈비뼈가 부러지기라도 하면 죽을 수도 있지 않은가. 이놈들을 죽이는건 진석의 목적이 아니었다. 상대도 못 알아보고 덤벼온 뒷골목 깡패놈들을 괴롭히고, 소동을 일으키는게 목적이었을 뿐. 한참이나 씩씩거리며 남자들을 다져댄 진석은 분이 안풀린다는 듯 혀를 차며 근처 테이블의 의자에 걸터앉으며 손가락을 딱 튕겼다.
"어이, 뭐든 좋으니까 술 좀 가져와봐."
구석에서 잔뜩 겁먹은채 덜덜 떨고 있던 여급. 겨우겨우 고개를 끄덕이며 가게 안쪽으로 들어가 술과 나무로 된 막잔을 가지고 나왔다. 얼굴의 주름이라 가리려는 요량이었는지 두껍고 진한 화장을 한터라 확실하진 않았지만, 대충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일까. 이런곳에서 여급으로 일하려니 할 수 없이 짧은 치마와 노출이 심한옷을 입고 있었지만, 그것도 슬슬 안쓰럽게 느껴질 나이대였다.
"저, 여... 여기."
여급은 벌벌떨며 진석이 있는 테이블 위로 술병과 잔을 내려놓았다. 뜬금없이 가게에 들이닥쳐 싸움을 벌이고 혼자 여섯이나 되는 사내를 순식간에 때려눕힌 정체불명의 남자. 나름 슬럼에서의 오랜 생활로 잔뼈가 굵은 여급이었지만 지금의 상황엔 겁이 났다. 그도 그럴것이 진석이 때려눕힌 사내들은 이 가게를 소유하고 있는 폭력조직 치브갈리에 속한 조직원들. 평생 주먹밥을 먹고 살아온 남자 여섯을 아이다루듯 두들겨 놓다니. 게다가 그 몸놀림은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그냥 뭔가 슈슉 파박 하더니 죄다 나가떨어진것이다.
"헤헤, 이리와봐."
"힉!"
진석은 겁을 먹고 여급을 끌어당겨 자신의 무릎위에 앉히고 희롱하기 시작했다. 가슴을 마구 더듬고 허벅지를 쓰다듬었다. 사실 불쌍한 술집 여급 상대로 이런짓은 별로 하고 싶진 않았지만 최대한 무뢰한처럼 보이고 싶었다. 아까 싸움이 벌어지자마자 바 안쪽에서 손님을 상대하던 땅딸막한 주인 양반이 가게 밖으로 빠져나가는걸 봤다. 분명 이 가게를 관리하는 책임자들을 부르러 갔으리. 그들이 돌아왔을때 자신이 좀 더 막되먹은 놈처럼 보이려고 여급을 소품으로 쓰기로 한 것이다.
"아 이거이거. 보기보단 제법 쓸만한데. 나랑 한 번 어때?"
"아... 안돼요! 이, 이러시면..."
얼굴을 잔뜩 붉히며 거부의사를 밝히는 여급. 그러거나 말거나 진석은 그녀를 꽉 끌어안고 떡주무르듯 했다. 폭력이 두려워 그대로 안긴채 꼼짝못하고 희롱당하고 있었다. 그러는 와중, 문이 열리며 밖에서 십여명의 사내가 우르르 안쪽으로 몰려들어왔다. 땅딸막한 가게 주인도 같이 들어온걸 보니 진석의 생각이 맞는 모양이었다. 들어온 사내들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신경질적인 인상의 마르고 키 큰 남자가 가게 주인에게 물었다.
"저 놈 맞아?"
"네. 저놈이 뜬금없이 가게로 들이닥치더니만 구석에 있던 애들한테 시비를 걸고 싸움판을 벌이는 통에..."
"아 거 쫑알쫑알 뭐라는거야!"
진석은 우두머리에게 사정설명을 하고 있는 가게 주인쪽을 향해 따지도 않은 술병을 들어 휙 집어던졌다. 팍삭! 술병은 바닥에 떨어져 산산히 깨졌고, 사내들은 진석의 갑작스런 행동에 놀라 다들 움찔했다. 품에 안고 있던 여급을 팍 밀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나 사내들의 무리로 다가가는 진석.
"왜. 고만고만한 놈들이 떼로 오면 내가 겁먹고 아이고 살려줍쇼~ 이럴것 같았냐? 꼭 좆도 아닌 것들이 단체로 몰려다닌다니까. 으이그 이 귀여운 새끼들."
"넌 뭐냐. 아무 이유없이 이러는건 아닐테지. 원하는게 뭐야."
진석의 앞을 가로막아 서는 우두머리. 과연, 다른 똘마니들은 진석의 도발에 다들 욕설을 내뱉으며 흥분했는데 이 남자만큼은 홀로 냉정했다. 한낱 뒷골목 깡패들 두목이라도, 어쨌든 두목은 두목이라는 건가. 키득거리며 다시 자리로 돌아가 앉는 진석.
"캬 그래도 어딜가나 말이 통하는 사람이 하나씩은 있다니까. 뭐 별건 아니고... 내가 돈이 급해서 말이야."
"돈?"
그렇지 않아도 신경질적인 우두머리 사내의 인상이 더 구겨졌다. 진석은 그걸보고 양손을 내저으며 웃었다.
"워어어~ 진정해 진정. 언제 그냥 돈 달랬냐? 내가 거지로 보여? 동냥하러 온것같아? 내 말인 즉슨, 내 실력을 팔겠다는거야."
우두머리 사내의 표정은 조금 평정을 되찾았지만, 아직은 이해못하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리..."
"나는 사카르의 일원이다. 이만하면 알아듣겠나?"
"?!"
사내들 사이로 순식간에 동요가 퍼져나갔다. 방금 저 남자가 뭐라고 한거지? 사카르? 십몇년간 단 한 번도 붙잡히지도, 정체가 드러나지도 않은 자들. 시라즈의 뒤쪽 세계에선 반쯤 전설처럼 통하는 이름이다. 이 남자는 지금 자신이 그 도적단의 일원이라고 밝힌건가?
"무슨 개소리를..."
뒤에서 한 사내가 나서며 그런 말을 입밖에 낸 순간 튼튼한 나무막잔이 그의 안면으로 빨려들듯 날아들었다. 빠아악! 코에서 피를 뿜으며 뒤로 나동그라지는 사내. 진석은 휘이 휘파람을 불며 낄낄 웃었다.
"크, 사람이 한 말을 보고 개소리라니. 너도 저기서 골골대는 친구들이랑 같은 병원 침대 쓰고싶냐?"
턱짓으로 한 쪽을 가리키는 진석. 그쪽엔 여섯명의 사내가 끄으으 죽어가는 소리를 내며 바닥에서 뒹굴고 있었다. 우두머리는 입술을 잘근 깨물며 진석에게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갑자기 그런 말을 믿을 수가 있나. 그리고 실력을 팔겠다고 했는데... 도대체 무슨 소린지 모르겠군. 뭘 훔쳐다주거나 하겠다는건가?"
"의뢰는 아무거나 다 받아. 뭘 훔치는것도 좋고 누굴 죽이는것도 좋지. 돈만 내면 다 해주겠어. 하지만 일거리는 딱 하나, 더도 말고 하나만 할거야. 번잡한건 싫거든. 보수는 일의 내용에 따라 상담요지만... 기본가는 천골드라고 생각해."
"처, 천골드?!"
우두머리 사내는 깜짝 놀랐다. 이거 그냥 미친놈 아닌가? 천골드가 뉘집 개 이름도 아니고 이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린가. 사람 하나 죽이는게 얼마나 싼 줄 아는건가? 그쪽의 청부일도 나름대로 다른 조직들과 경쟁을 하다보니 코스트 다운이 많이 됐다. 그래도 제대로 된 시민이나 어느정도 영향력이 있는 상대를 죽이려면 돈과 시간이 좀 들지만, 별 연고 없는 뜨내기를 죽이는거라면 정말 몇 푼 들지도 않는다. 마약중독자들에게 마약을 살 돈 몇푼과 나이프 하나만 쥐어주면 좋아라고 가서 배때기를 쑤셔댈테니. 어쨌거나 부하들을 쓰려트려놓은 솜씨를 보니... 분명 이 남자는 아주 허당은 아닌것 같다. 그러나 자신을 대놓고 사카르라고 사칭하는것은 믿을 수 없었다. 그런 전설적인 도적들 중 하나가 대체 뭐가 아쉬워서 이런곳에서 자신의 실력을 팔겠다고 나선단 말인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남자였다.
"뭐야. 일거리가 없나보지? 이쪽 업계에도 불황의 그늘이 드리우는건가? 앙?"
혼자 농을 내뱉고 낄낄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진석. 그러더니 주머니에 두 손을 푹 찔러넣고 사내들 사이를 헤치며 가게를 빠져나갔다. 하지만 아무도 진석을 막아서지 못하고 순순히 길을 터줬다. 진석은 가게를 빠져나가며 말했다.
"일 없다면 나는 간다. 다른데나 가보지 뭐. 그럼 수고."
"......"
결국 실컷 깽판 치고 제 할말 다 하다가 사라진 그. 뒤에 남겨진 치브갈리의 조직원들은 꿀먹은 벙어리가 되어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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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를 시작한지 딱 한 달이 넘었습니다. 생각난김에 오늘 분량은 조금 넉넉히 잡았습니다.
그나저나 주인공 TS에 후타나리에 동성애에 근친애에.. 7장은 대놓고 여러가지를 집어넣었더니 참 개판이군요. 왜 이렇게 됐을까요. OT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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