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베라 - 부회의 방랑자-80화 (80/155)

< --   - 7.   -- >         * 80화 *

에라드 상회. 시라즈의 중앙 시장에 자리잡은지 올해로 16년이 된 소매상. 취급품목은 딱히 정해진 것이 없었다. 상회의 주인인 론소 펠미라는 40대 초반의 남자로, 주로 곡류를 취급했지만, 실상 매입할 수 있는 한 모든 상품을 다뤘다. 시장의 경기와 정보에 유독 예민한 그는 시세보다 저가인 상품이라면 뭐든 구입해 반드시 좋은 값에 되팔았다. 두고 있는 직원은 고작 두 명 밖에 없었고 가게도 겉보기엔 허름했지만 에라드 상회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틀림없이 론소가 굉장한 알부자일거라 확신했다.

그리고 신출귀몰한 도적단 사카르가 활동한지도 역시 16년째가 되었다. 어딜봐도 평범하기 그지없는 소매상 론소 펠미라는 바로 그 사카르의 두령이었다. 지금으로부터 16년전, 시라즈엔 다른 도시와 마찬가지로 도적 길드가 자리잡고 있었다. 하디카의 어둠속에 자리잡고 다른 조직들과 세력다툼을 해오던 도적 길드는, 세 조직의 연합에 밀려 괴멸직전의 상황까지 밀리고 만다. 당시 길드의 장이자 지병으로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어있던 나바 펠미라는, 얼마 남지 않은 수하들에겐 해산할것을 명하고 자신의 두 아들에겐 새 삶을 살아갈것을 당부하며 유명을 달리한다.

장남인 아밀 펠미라는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도적 일을 그만두고 새로운 삶을 찾아 여행을 떠난다. 하지만 차남 론소 펠미라는 몇 남지 않은 수하들과 함께 절치부심하기로 작정하고 평범한 상인을 가장해 도시에 남는다. 길드의 재산을 처분해 에라드 상회를 차리고 사카르라는 새로운 형태의 도적단을 조직한다. 그는 우선 상인으로서 시장에 녹아들고 그 안에서 경기나 동향을 읽었다. 상인 조합에 가입해 인맥을 형성하고 온갖 정보를 끌어모았다. 표면상의 소매상 일을 열심히 하며 수하들에 대한 관리나 준비도 잊지 않았다.

그러던 와중 드디어 희소한 고가 상품의 운송 정보를 손에 넣었다. 끝까지 아버지에게 충성하며 길드의 최후를 지키던 암살자들과 실력있는 12인의 수하들. 그들을 정보대로 미리 운송 경로에 매복시켰다가 수송단을 덮쳐 모두 살해했다. 그리고 목표물을 빼돌려 사전에 준비해 둔 자신의 양곡 수레에 옮겼다. 커다란 곡식 포대엔 옷이나 무기, 뭐든 감출 수 있었다. 수하들은 일꾼으로 위장시켰다. 애당초 사막 한복판에서 벌어진 일. 너무나 쉽고 간단해 허무할 정도였다.

론소의 목표는 길드의 재건이었다. 아버지는 세 조직 연합에 밀려 패배했지만 자신은 옛 길드의 영광을 되찾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무엇보다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다. 소매상의 일을 꾸려나가며 틈틈히 사카르의 활동도 진행했다. 돈이 모이는대로 차명을 사용해 하디카의 자산들을 구입하고 경비대나 관리들과의 인맥도 쌓아갔다. 론소는 아버지를 존경했지만, 아버지가 했던것과 같은 단순한 힘의 싸움만으론 연합을 이룬 조직들을 깰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신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길드를 재건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2년이 지난 어느날, 형인 아밀이 여행에서 돌아왔다.

의지 할 수 있는거라곤 겨우 12인 뿐인 수하들. 그런 와중에 피붙이인 친형이 돌아왔으니 론소는 그의 귀환이 너무나도 반가웠다. 그런데 형 아밀의 품에는 한 어린 아기가 안겨있었다. 여자아이였다. 아이의 이름은 라나 펠미라. 아밀의 딸이었다. 론소는 형이 2년간 여행을 하는동안 대체 무엇을 하다 돌아온것인지, 이 아이는 어떻게 얻게 된 것인지 궁금했으나 아밀은 그에 관해선 입을 다물고 아무 대답도 해주지 않았다. 결국 론소도 그에 관해선 더이상 묻지 않기로 했다. 대신 아밀을 사카르의 일에 끌어들였다. 처음엔 사카르의 활동을 극구 거부하던 아밀이었으나, 앞으론 여자와 아이만은 죽이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결국 사카르의 일에 힘을 보태게 된다.

여자와 아이를 죽이지 않게 된 시점부터 사카르는 세간에 알려지게 되었다. 귀신같이 나타나 목표물을 탈취하고 사라지는 그들. 하지만 여자와 아이를 살려준다 한들, 그들의 정체가 발각당하는 일은 결코 없었다. 13년간 그 누구에게도 붙잡히지 않은채 도시의 어둠속에서 길드의 재건을 위한 준비를 해나갔다. 시간이 흐르며 점차 막대한 자금이 모여갔다. 론소는 요령좋게 약탈품을 처분해 나갔고, 하디카 중심가의 한 축은 어느새 론소의 차명재산이 되어있었다. 넌지시 부탁 한 마디만 하면 도시의 경비대를 동원할수도 있었고 장차 여러가지 일을 도와줄 고위 관리들과의 끈도 많이 만들어두었다. 상인 조합에서도 역시 안정적인 지위에 올랐다. 이제 남은건 인력이었다. 자신을 제외하고 12인의 부하들로 시작한 사카르는, 중간에 형을 더해 13인이 되었었으나 이런저런 일을 거치며 이제 10인으로 줄어있었다. 자금과 뒷배가 만들어졌으나 단 10명만으론 일을 도모 할 수 없었다. 실력이 뛰어나고 믿을만한 자들을 모으려고 했다. 적당한 자들만 모으고 나면 세 조직 연합에게 복수를 하고 길드를 재건할 셈이였다. 하지만 그런 준비를 해나가던 찰나 아밀이 병에 걸렸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약이나 신관의 힘으로도 완치가 불가능한 불치병이었다. 론소는 힘겨워했다. 길고 긴 세월을 공들여 이제 겨우 길드를 재건할 준비가 되어가던 참에 형이 불치병에 걸리다니. 아낌없이 돈을 써 치료를 하려고 했으나 가능한것은 연명뿐이었다. 반년이면 죽는다는 병을 그나마 비싼약을 써가며 1년 가까이 끌어왔다. 그러던 어느날, 출처가 불분명한 고가의 화물 이송 정보를 손에 넣게 된다. 테베이의 경매장에서 낙찰된 대지의 눈이라는 보옥의 운송 소식이었다.

대지의 눈엔 한가지의 소문이 붙어있었다. 소유자의 소원을 이루어 준다는 믿지못할 이야기. 허나 그것은 어차피 거짓일터. 유명한 보석이나 장신구엔 그런 사연이나 이야기 하나둘쯤 흔히 붙어있었다. 론소는 대지의 눈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하지만 그와 달리 대지의 눈에 희망을 건것이 바로 아밀의 딸 라나였다. 올해로 겨우 14살이 된 자신의 조카. 엄마 없이 아빠 아밀과 험한 남자들 사이에서 자라나 되바라졌지만, 론소의 눈엔 그저 자신의 딸처럼 귀엽기만 했다. 그리고 라나는 자신의 아버지 아밀을 살리기 위해 삼촌 론소에게 대지의 눈을 탈취할것을 제안한다. 소유자의 소원을 들어준다는 이야기가 라나를 자극했던 것이다.

처음엔 조카의 제안을 터무니없게 여기던 론소였지만 필사적으로 애원하는 라나의 간절한 부탁을 결국 무시할 수 없었다. 딱히 기대하거나 믿는것은 아니었지만 만에 하나 대지의 눈이 정말로 소원을 들어 줄 수 있다면... 그렇다면 자신의 형 아밀도 병에서 회복될터. 형만 회복된다면 바로 다시 길드 재건 작업에 착수 할 수 있었다. 허나 이들이 아무리 실력자들이고 신출귀몰한 도적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해도 이젠 다들 제법 나이도 먹었고 그 숫자도 형 아밀을 제외하면 고작 9명 뿐. 게다가 고가의 화물을 운송하는 호위들은 만만치 않을터, 쉽지 않은 일이 될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라나는 삼촌 론소에게 사카르의 작업에까지 자신을 끼워달라며 자원한다.

론소는 불같이 화를 내며 그녀의 제안을 일축했다. 하지만 라나는 포기를 모르고 론소에게 계속 매달렸다. 자기 아버지를 구하는 일이고 스스로 꺼낸 이야기니 책임을 질거라며, 너무나 끈질기에 설득을 해왔다. 어쩌면 정말로 어린아이 다운 치기였다. 론소는 결국 라나를 사카르로서 받아들이고 함께 대지의 눈을 탈취하는 작업에 참가시켰다. 물론 라나는 어려서부터 암살자나 실력있는 도적들 사이에서 자라난 아이로, 여느 평범한 또래들과는 달랐다. 여염집 처자들이 뜨개질이나 요리를 배울때 라나는 사카르의 사이에서 어깨너머로 칼을 잡는 방법이나 사람을 쓰러트리는 방법을 배웠다. 결국 호신삼아 배웠던 투척술로 대지의 눈을 수송하던 호위들의 제압에도 공을 세웠다. 이렇게 대지의 눈은 탈취되어 사카르의 손으로 넘어간다.

하지만 정작 탈취한 대지의 눈은 그냥 별다를것 없는 어른 주먹만한 크기의 보옥이었다. 사용법이나 소원을 이룰 방법 따위 아무도 알지 못했다. 라나는 대지의 눈을 곁에 둔채 하루종일 아버지 아밀의 병수발을 들며 대지의 눈에게 기도했지만 아밀의 병세는 매일같이 깊어질 뿐. 하루하루 의미없는 시간만이 흘러갔다.

그러던 와중, 론소는 부하를 통해 전혀 뜻밖의 소식을 전달받게 된다. 어제 사카르를 칭하는 정체불명의 남자가 하디카 외곽 여러곳에서 소란과 난동을 피웠다는 것. 이게 어찌된 일인가. 자신의 부하들은 아니었고, 짐작가는 자도 전혀 없었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별 일 아니었다. 긴 세월 암약해온 사카르의 이름은 널리 알려져 있었으니, 언젠가 사칭을 할 정신나간 놈이 나타날지도 모른다는건 예상하고 있었다. 어차피 그딴 식으로 날뛰다보면 이 바닥에선 오래 살긴 힘들터. 론소는 그 미친놈을 무시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전해들은 라나의 행동은 달랐다. 기껏 훔쳐낸 대지의 눈으로도 아버지의 병이 낫지 않는데, 감히 아버지와 삼촌이 만들고 지금껏 이끌어온 조직의 일원을 사칭하는 자라니. 어디서 굴러먹다 온건지 모를 개뼈다귀 같은 놈, 용서할 수 없었다. 작신 두들겨 두 번 다시 허튼짓을 하지 못하도록 만들어야 했다. 라나는 자신에게 투척의 기술을 가르쳐준 노회한 전직 암살자, 바노르와 함께 하디카로 나서보기로 했다.

목덜미를 살짝 스치는 숏커트. 어딘가 기가 드세보이지만 아직은 어린티가 남아있는 소녀의 얼굴. 팔다리가 훤히 드러난 가벼운 차림의 라나의 피부는 햇빛에 그을린 건강한 빛깔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어딘가 음울한 분위기마저 감도는 하디카 외곽의 거리를 아무렇지 않게 걸어나가며 자신의 뒤를 따라오는 바노르에게 물었다.

"바노르 아저씨. 대체 어떤놈일까요."

머리 사이사이로 새치가 희끗희끗한 노년 초입의 남자. 얼굴에 주름이 깊게 패인 바노르는 올해로 딱 50세가 되었다. 숄과 머플러를 절충한듯한, 허리 중간즈음까지 내려오는 진홍색 망토를 두른 바노르. 그는 전대의 길드 마스터 나바 펠미라때부터 일해오던 암살자로 현재는 나바의 아들인 론소의 오른팔로서 충성을 다하고 있었다. 그 실력만큼은 의심할 나위 없이 사카르 중에선 단연 최고였지만 이젠 그도 많이 늙어있었다. 바노르는 흐음 하고 잠시 생각을 하다, 자신보다 두세걸음 앞거나가고 있는 라나의 등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글쎄다. 시덥잖은 사기꾼일거라 생각하지만... 그보다, 두령도 그냥 내버려두라고 했는데 굳이 라나 네가 그놈을 찾으러 나설 필요가 있나 싶구나."

"안돼요. 그딴 쓰레기를 놔두면 아빠나 삼촌, 바노르 아저씨들이 지켜온 사카르의 명성에 먹칠하는 격이니까. 꼭 두들겨 패서 시라즈에서 쫓아낼거에요."

거친 남자들 틈바구니에서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난 라나는 자신의 아버지 아밀과삼촌인 론소, 그리고 사카르의 일원마저 모두 제 가족처럼 사랑하고 따랐다. 하지만 오냐오냐 하며 받아준 탓인지 자기 주장이 강하고 말괄량이끼가 돋보이는 아이로 커버렸다. 대지의 눈 건만 해도 그랬다. 세상에 어느 열네살짜리 여자아이가 아버지를 구하겠답시고 수송 화물을 털자는 제안을 하고 실제로 참가까지 해서 칼을 휘두른단 말인가? 물론 그녀가 해를 입지 않도록 모두 주의에 주의를 기울였었지만 내심은 다들 조마조마 했었다. 사카르 모두에겐 그야말로 딸과 같은 아이다. 만약 그녀가 누군가에게 해꼬지를 당하는 일이 생긴다면, 그자는 십수년간 이 사막의 땅에서 전설적인 도적단으로 이름을 날려온 사카르 전원의 분노를 감당해야 하리라. 라나는 사카르에겐 정말로 소중한 존재였다.

"저기맞죠? 저 술집, 분명 저기에 오늘도 그자가 또 나타났다고 그러던데."

치브갈리에 속한 하디카 외곽의 작은 선술집. 진석이 이틀 연속으로 나타났던 바로 그 가게였다. 바노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 사카르의 다른 단원들도 놀고 먹는게 아니라 단련에 힘쓰거나 도심 여기저기의 정보를 모았다. 개중 한 단원이 전해준 정보에 의하면 조금 전 저 가게에 사카르 사칭범이 또 나타나 작은 소란이 생겼다고 했다. 마침 여급이 쓰레기라도 버리려는건지 빈병과 잡동사니가 담긴 작은 나무상자를 들고 가게에서 나와 옆쪽의 골목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라나가 바노르에게 눈짓을 했고 둘은 순식간에 골목으로 달려들어가 그 여급을 붙잡고 한쪽에 몰아세웠다.

"뭐... 뭐에요? 무, 무슨 용무?"

여급은 낯선이들이 나타나 자신을 골목 안쪽으로 몰아붙이자 소스라치게 놀랐으나, 어린 소녀와 나이든 남자인걸 보곤 조금 안도했다. 정말 재수없는 경우지만 이따금 치안이 안좋은 이런곳에선 여자를 붙잡고 으슥한데로 끌고 들어가 겁탈하거나 상해를 입히는 변태들도 있었는데 상대가 소녀와 나이든 남자니 그런건 아닌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 갑자기 미안해요. 뭣 좀 물어보고 싶어서."

라나는 웃는낯으로 사과하며 여급의 손에 뭔가를 쥐어줬다. 딱딱하고 작은 무언가, 손바닥을 내려다 보니 빛나는 은화 두 닢이 손에 쥐어져 있었다. 여급은 상대들이 정보를 얻고 싶어 온 자들임을 알곤 긴장을 풀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이 가게 말인데... 아까 이상한 남자 나타나지 않았었어요?"

"......"

어제 오늘 이틀 연속으로 나타나 자신을 희롱하고 치브갈리와 뭔가 담판을 짓고 사라진 그 남자를 말하는것이리라. 그가 아까전 자신에게 했던 일을 떠올리니... 여급의 얼굴은 조금 붉어졌다. 남성 경험이 많은 그녀다. 그런 자신을 간단한 손가락 놀림으로 금새 절정에 달하게 만드는 굉장한 솜씨는... 아, 아니지. 그런걸 떠올려서 뭐한단 말인가. 어쨌거나 그 남자에 관한 일을 이들에게 말해도 되는건가 아니면 입을 다물어야 하나? 뭐 딱히 입단속을 하라는 이야기는 없었는데... 잠시 고민하던 여급은 받아든 은화를 주머니에 집어넣으며 대답헀다.

"이, 있었어요. 어제랑 오늘 두 번이나 온 남자인데... 잘생긴 외모에 흑발을 하고..."

거기까지만 말하곤 흠흠 거리며 딴청을 피우는 여급. 라나는 정보료를 좀 더 달라는 것임을 깨닫고 그녀의 손에 은화를 두 닢 더 쥐어줬다.

"자. 그래서 그 남자는 어디로 갔죠?"

"음... 이런거 함부로 말해도 되려나. 어, 어디가서 내가 말했다고 하지 말아요? 그게... 아무래도 솔투스의 사무실로 간 것 같아요. 간지는 얼마 안됐어요. 한 15분에서 20분쯤 됐을까."

솔투스. 그 이름은 바노르가 잘 알고 있었다. 솔투스는 세 조직 연합 중 가장 자금력이 뛰어난 가르니 켈에 속한 직계 조직으로, 버즌이라는 욕심많은 뚱보가 맡고 있는 중간 조직이었다. 솔투스의 주력사업은 고리대금업이라던가. 중간 조직이라곤 해도 휘하에 크고 작은 하부 조직을 무려 네 개나 두고 있어 세력이 만만치 않은 놈들이었다. 사카르의 이름을 사칭하는자가 그런곳에 갔다면... 목적은 아마도 하나 뿐 이리라. 바노르는 라나를 데리고 골목을 빠져나오며 그녀에게만 들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무래도 놈은 자신을 고용할 고용주가 필요했던 모양이구나. 어제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난리를 친것도, 사카르의 이름을 사칭한것도, 전부 자신을 과시하며 실력을 사줄 이를 구하는 행동이었겠지. 지금 세 조직들의 연합은 불안정한 상황이니까... 셋 중 자신을 더 비싸게 사줄 곳에 투신하겠다 이런 의미였을터."

"하, 듣고보니 정말 짜증나는 놈이네요. 지 실력 자랑은 알아서 재주껏 할 일이지 하필 사카르의 이름을 시장에서 물건 흥정하듯 팔아먹다니... 일단 솔투스의 사무실로 가봐요. 간지 얼마 안됐다니까 잘하면 만날수도 있겠죠. 흠씬 두들겨서 그딴 사기꾼같은 자식 후딱 쫓아내버려요!"

"하지만 라나야, 역시 위험할것 같다만... 정 그렇다면 나 혼자 가마. 내가 처리하지. 넌 가게로 돌아가렴."

가게란 론소가 위장사업체로 유지하는 에라드 상회를 의미했다. 하지만 라나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어떻게 아저씨만 보내고 나 혼자 돌아가요? 그 반대라면 모를까. 안 그래도 요새 바노르 아저씨 좀만 험한일 하고 나면 삭신 쑤신다고 투덜대는것도 다 아는데."

아무리 뛰어난 암살자로 오랜세월 현업에서 도적단을 일을 도우며 종사해왔어도 그의 나이 50이다. 중세 수준의 문명을 유지하는 리베라의 세계에서 나이 50이면 이미 굉장한 늙은이다. 뒷방을 지키고 있어야 할 나이에 이따금 칼을 들고 이리 저리 날뛰어야 했으니 그렇게 힘을 쓰고 난 다음날이면 어째 몸 여기저기가 쑤셨다. 트레이닝은 빼놓지 않고 꾸준히 하고 있었지만 탄탄하던 근육은 분명 날이 갈수록 줄어들었고 관절도 뻑뻑해져 유연함을 잃어가는게 느껴졌다. 하지만 반쯤은 엄살. 바노르는 아직까진 평범한 사람 보다는 몇배는 건장하고 강건한 몸을 유지하고 있었다. 나이 좀 먹은 정도로 약한 소리를 할 순 없다고 생각했다. 멀게만 느껴지던 길드의 재건이 조금만 더 하면 가능할 정도로 눈앞에 다가왔는데 어찌 자신만 빠질 수 있으랴? 게다가 이 아이에게 나이프를 날리고 다루는 기술을 가르쳐준것은 바로 자신 아니던가. 바노르에겐 자신을 놀리는 라나의 태도마저 그저 어린 딸의 재롱처럼 귀엽게 느껴졌다.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래. 그럼 같이 가자꾸나. 하지만 조심해야 한다. 넌 뒤에서 견제를 맡아주렴."

"네, 걱정마세요. 제가 누구에게 배웠는데."

히힛 하고 웃어보이는 라나의 미소. 바노르에겐 소녀의 미소가 사막의 햇살만큼이나 밝게 느껴졌다. 둘은 함께 멀지 않은 솔투스의 사무실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큼지막한 주머니를 든채 막 솔투스의 건물에서 빠져나오는 검은머리의 잘생긴 남자를 발견 할수 있었다. 무언인채 눈빛만으로 서로 신호를 주고 받는 라나와 바노르. 둘의 눈초리가 똑같이 날카로워졌다. 진석은 사무실을 나서며 돈의 사용처에 대해 궁리하던 참이었다.

'200골드로 할 수 있는 일이래봐야... 아. 뭐 무기나 방어구라도 보러 가볼까? 란비언은 마음에 들지만 흑철단검은 란비언의 페어로선 어째 부족한 감이 있으니... 그러고보니 알 유세피나가 대지의 눈을 낙찰받은게 테베이의 경매장이라고 했었지. 그쪽 경매장이 쓸만한건가? 이번 일이 끝나면 돌아가는 길에 거기나 들러서 마법무구라도 장만해보는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솔투스의 건물을 빠져나와 일단 저택으로 잠시 돌아가기 위해 발걸음을 돌리는 진석. 좁고 번잡한 하디카 외곽의 골목길을 이리저리 빠져나가다, 누군가 뒤에서 살기를 쏘아대고 있다는것을 깨달았다. 뒷통수가 따끔따끔할 정도였다.

'...허, 미행? 이럴땐 빙빙 돌... 필요가 없지. 대놓고 죽이겠다는 분위기가 팍팍 전해져오는데.'

진석은 뒤에 누군가 따라붙었음을 눈치채곤 일부러 점점 더 깊고 외진 골목을 지나, 정말 인적조차 없는 성벽 외곽 부근까지 이르렀다. 이 주변은 거주민도 없고 관리가 전혀 안되는지 여기저기 쓰레기가 가득했고 한쪽에 흐르는 하수와 오물에선 심한 악취가 진동했다. 진석은 그 한가운데에서 우뚝 멈춰서곤 몸을 돌리며 미행이 있을거라 짐작 되는 방향을 향해 말했다.

"아까부터 알고 있었으니 숨지말고 나... 히이익?!"

몸을 돌리며 말하는 순간 눈앞으로 작은 나이프가 너덧개나 날아드는게 아닌가! 아르데나에게 사줬던 본 나이프와 비슷한 작은 나이프들, 급소에 맞는게 아니라면 생명에 지장은 없을 공격이지만 그렇다고 순순히 맞아 줄 수 있는것도 아니다. 기겁해서 손에 든 돈주머니를 바닥에 떨구며 백덤블링으로 그것들을 흘려보냈다.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무슨 케이크 위에 생일초를 꽂듯 전신 여기저기에 나이프가 잔뜩 박힐뻔했다. 순간적으로 공격을 피해내긴 했지만 정말 반사적으로 해낸거라 이런 기습, 두 번은 못 피할것 같았다. 나이프를 피해낸 진석이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있는데 저쪽 모퉁이에서 한 소녀가 모습을 드러나며 말을 걸어왔다.

"어쭈, 그걸 피해? 그냥 맹탕은 아니었나보지?"

깔끔하게 다듬어진 숏커트. 팔다리가 훤히 드러나는 짧은 옷을 입은 소녀의 피부는 사막의 햇살에 탄건지 건강하게 그슬린게, 조금 드세면서도 활기차 보이는 인상이었다. 이목구비가 오목조목한게 나름대로 야무지고 귀여운 얼굴이긴 했지만 머리가 짧다보니 소녀보다는 왠지 소년스럽다는 느낌이랄까? 진석은 그녀를 향해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뭐냐 이건. 미행이 붙었다 싶었더니만 이게 왠 애새끼야."

"애, 애새끼라닛?! 사기꾼 쓰레기 새끼가! 재수없어! 이거나 먹어!"

품안으로 두 손을 찔러넣더니 자세를 낮추고 몸을 빙글 한바퀴 회전시키며 이쪽으로 양팔을 쫙 흩뿌리는 소녀. 순간 쉬쉬쉭 하고 나이프 여러개가 이쪽으로 날아들었다!

'허쭈, 요거봐라? 뭔진 모르겠다만 암만 어린애라도 걸어온 싸움 흘려보낼만큼 내가 호인은 아니지. 엎어놓고 볼기짝을 두들겨주마.'

하지만 지금 진석은 무기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어차피 뒷골목 깡패들 상대로는 맨손으로도 충분했었으니 무기는 전부 저택쪽에 두고 나왔던 것이다. 대신 바닥에 떨둬둔 금화주머니를 쥐고 붕 휘두르며 날아드는 나이프를 전부 튕겨내었다. 채채챙! 금화주머니에 부딪혀 여기저기 날아가 떨어지는 나이프들. 공격을 가볍게 막아낸 진석이 소녀의 볼품없는 공격을 비웃으려는 찰나, 갑자기 등뒤에서 뭔가 섬뜩한 기분을 느꼈다. 이 으슥한 공간엔 분명 자신과 저 소녀 밖엔 없었는데? 뭔진 잘 모르겠지만 분명 누군가 뒤에서 자신을 공격하려한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자신의 감에 따라 뒤쪽을 향해 냅다 금화주머니를 집어던지고 앞으로 몸을 날리는 진석.

"이런?!"

채앵! 분명 아무것도 없는 허공이었는데, 금화주머니가 무언가에 부딪혀 바닥으로 떨어지는게 보였다. 게다가 누군가의 당황한 음성까지 들렸다. 뭐... 뭐지?! 당황하는 진석. 그런데 사사삭하고 누가 움직이는것 마냥 바닥의 모래먼지가 흩날리는게 보였다.

'이건... 투, 투명 마법?'

아무것도 없는데 날아가던 금화주머니가 허공에서 막혀 떨어지고, 딱히 바람이 부는것도 아닌데 바닥의 먼지들이 저절로 풀풀 날릴리 없다. 생각할 수 있는것은 단 하나. 저 소녀 말고도 투명마법 같은것을 사용하는 누군가가 뒤에서 협공을 해왔다는 것이었다. 진석이 뒤쪽에서 나타난 의문의 습격자에게 한눈을 판 사이 앞쪽의 소녀가 재차 이쪽을 향해 나이프를 뿌려왔다.

"흥! 스팅어 샷!"

아까는 주의를 끌기위해 그냥 많이 뿌리는 느낌이었다면, 이번에 던지는 것은 양손에 각각 하나씩 단 두 개 뿐이었지만 급소를 정확히 노려 던진다는게 눈에 보였다. 게다가 이번에 꺼내쥔 나이프의 날에는 뭔가 거무스름한 액체가 발려진것이... 분명 독이나 뭐든간에 해로운 종류의 약물을 발라놨으리라. 앞에서 독나이프를 던지는 소녀에게 눈길을 파는 찰나 뒤에서 뭔가 파바박하고 달려드는 소리가 났다.

'이런 젠장. 앞뒤 협공이라니!'

소녀가 나이프를 던지는 순간에 맞춰 뒤에서 투명마법을 쓴 자가 달려드는 타이밍도 완벽한게, 이거 어째 저들의 손발이 정말 짝짝 잘 맞는다는 느낌이었다. 평범한 상대라면 이 훌륭한 양면 협공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당하기 쉽상이리라.

'이렇게까지 날 죽이겠다는 의지가 팍팍 느껴지다니. 시라즈 와서는 별로 크게 사고친 것도 없는데 왠지 열받네 이거? 시클론!'

자신은 맨손에 상대는 둘. 그것도 절묘한 합공을 가해오는 중이다. 어차피 뒤에서 오는 투명의 상대는 보이지 않으니 어쩔 수 없고, 차라리 정면에서 나이프를 던지는 소녀를 노리기로 했다. 독나이프라지만 시클론을 걸면 겨우 그거 두 개쯤 눈감고도 피할 수 있다. 진석은 순식간에 몸의 움직임과 사고가 가속되는것을 느끼며 소녀쪽으로 몸을 날렸다. 아슬아슬한 간격을 두고 날아오는 독나이프들 사이로 몸을 날려 그것을 피해내고, 바닥을 한바퀴 굴렀다. 그리고 땅을 힘껏 박차고 몸을 일으키며 라파가의 숏대쉬를 썼다.

"헉?!"

눈 앞의 사내가 순식간에 이쪽으로 달려들더니 반드시 맞을거라 생각했던 나이프를 가볍게 피해내고 바닥을 구르나 싶더니 순간 사라져 버린다! 아니, 사라진게 아니다. 순식간에 눈앞에 사내의 형체가 나타나며 복부에 주먹을 날려온다! 라나는 깜짝놀라 뒤로 물러서려고 했지만 이미 늦었다. 시클론과 라파가로 가속된 진석의 공격은 고작 열네살짜리 여자아이가 감당 할 수 있는게 아니었다. 퍼억! 라나는 자신의 복부가 쥐어뜯겨 나가는게 아닌가 하는 착각에 빠졌다. 타격이 너무 강렬하고 아픈게, 전신을 울리는 이 통증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지경이었다. 뱃속을 울리는 일격에 웨엑하고 토사물을 왈칵 뱉으며 바닥에 무릎을 꿇는 라나.

"라, 라나!"

바디블로 한 방으로 라나를 무력화시킨 진석은 그녀의 뒤로 돌아서며 머리채를 쥐었다. 그러자 저쪽에서 좀 늙어보이는 사내가 허공에서 스르륵하고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었다.

"호오 거기 계셨구만. 투명마법인가? 제법 놀랬어."

아랫입술을 꾹 깨무는 바노르. 뭐지 저 사내는. 이 '암살자의 망토'를 사용한 자신의 은신 백스텝은 지금껏 아무도 피해낸자가 없는 사신의 일격이었건만... 그것을 너무나 간단히 간파하고 라나까지 붙잡아 버렸다. 어리석었다. 잘 알지 못하는 상대라 너무 얕잡아 봤다. 역시 라나는 어떻게 해서건 돌려보냈어야 하는데... 진석은 아직도 위액을 토해내는 라나의 머리채를 강하게 비틀어 쥐며 말했다.

"아악, 아, 아파앗!"

"까불면 머리카락이 아니라 모가지를 째로 비틀어버릴테니까 가만히 있어. 그나저나 댁들은 뭔데 내 뒤를 쫓고 습격을 해온거야? 나 지금 기분 엄청 더러우니까 잔대가리 굴리지 말고 솔직히 말해."

"......"

눈빛을 주고 받는 라나와 바노르. 진석은 둘이 눈빛을 주고받는걸 눈치채고 라나의 머리칼을 놓곤 아예 뒷목을 꽉 쥐었다.

"야이 씨발. 니들 눈깔 돌아가는게 보인다? 내가 지금 장난하는것 같아?"

"아아악! 끄으으, 이... 이거 놔아앗!"

공업용 바이스같은 어마어마한 악력으로 가느다란 라나의 목을 죄는 진석. 라나는 목덜미가 생으로 뜯겨져 나가는 것 같은 어마어마한 고통에 몸부림쳤다. 흡사 무슨 육식동물이 목덜미를 물고 늘어지는것 같았다. 라나가 괴로워하는 모습에 크게 당황하는 바노르. 바노르는 다급히 손에 들고 있던 단검을 바닥에 팽개치고 두 손을 들어보이며 말했다.

"그, 그만! 졌소. 항복할테니 그 아이에게 해를 가하지 마시오."

"싫은데? 여기서 확 척추라도 뽑아볼까? 페이탈리티! 하고 말야."

"악! 으아악! 바노르 아저씨!"

너무 아프고 고통스러워 눈물을 질질 흘리며 진석의 팔을 떼어내려고 몸부림 치는 라나. 하지만 무릎이 꿇려진채 뒷목을 내리죄는 진석을 어떻게 당해낼 수 없었다. 바노르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양손을 뒷머리에 올려 완전히 저항을 포기했음을 드러내며 다급히 외쳤다.

"우리가 바로 당신이 사칭한 사카르요!"

"...하?"

그제서야 라나의 목을 죄던 진석의 손아귀에 힘이 빠졌다.

'허... 이게 왠일이야. 이 게임 하면서 도통 계획대로 풀리는일 하나 없더만, 이번엔 왠일로 월척이 걸렸네?'

하지만 라나는 목을 죄는 고통이 사라지자 훌쩍거리면서도 진석을 향해 마구 소리를 질러댔다.

"이 개자식! 찢어 죽일거야! 사지를 도려내고 목을 베어서 들개 밥으로 던져줄테다!"

"야, 너는 분위기 파악 좀 해라. 그리고 어린애가 말을 곱게 써야지? 올바른 언어 습관이 건전한 정서를 함양한단다."

진석은 허리를 굽혀 라나의 목덜미 앞쪽을 붙들어 쥐고, 경동맥을 조여 십여초만에 라나의 의식을 잃게 만들었다. 히끅하고 바닥에 축 늘어지는 그녀의 몸을 붙잡아 들자니 해부학이 C랭크로 상승했다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이걸로도 해부학 랭크가 오르는구나. 하긴 예전엔 전쟁통에 대검으로 적병들 배를 갈라 내장을 쏟아내게 만들다보니 오르기도 했었지.'

그리고 진석이 라나를 기절시키는걸 본 바노르는 이쪽을 향해 필사적으로 부탁해왔다.

"그만, 그만! 그 아이 만큼은 봐주시오, 제발! 우리가 잘못했소. 차, 차라리 내 목을 내줄테니까 제발!"

"댁같은 꼰대 모가지는 필요없거든? 그보다... 사카르라고 했지? 마침 잘됐어. 뭐 잠시 이야기나 나눠볼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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