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7. -- > * 81화 *
50세를 먹을때까지 생전 패배를 몰라온 바노르다. 애당초 본업이 암살자라 정면승부를 할 일이 없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자신이 몸 위에 덮어쓰고 있는 이 진홍색의 암살자의 망토 덕분이기도 했다. 전대의 길드 마스터가 자신에게 주었던 물건. 길드 내 최고의 암살자에게 대대로 전승되던 망토. 착용자를 잠시간 투명한 모습으로 바꾸어주는 진귀한 마법 장비. 하지만 그조차 저 사내에겐 먹히지 않은것이다. 라나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지금은 저 남자에게 거슬릴 수 없었다. 어차피 자신은 살만큼 살았다. 자신이 죽는건 상관없었지만 아직 채 자라지도 못한 라나가 이런 시궁창같은 뒷골목에서 살해당하게 내버려 둘 순 없었다. 진석은 기절해서 의식을 잃은 라나를 붙들어안은채 바노르에게 질문했다.
"우선 첫번째. 나는 어떻게 찾았지?"
"...당신이 소란을 피웠다던 선술집의 여급에게서 들었소. 솔투스의 사무실로 향했다기에 가봤더니 마침 거기서 나오고 있더군. 거기서부터 뒤를 쫓았소."
"흠. 그럼 두번째. 사카르는 나를 어떻게 하고 싶은거지?"
"이쪽 두령의 결정은 '무시한다'요. 단지... 그 아이, 라나만큼은 발끈해서 댁을 찾아나섰다가 이렇게 된거지만..."
역시! 생각대로야! 상황이 예상되로 진행되었다는것에 진석의 기분은 꽤나 좋아졌다. 데오그라즈와 교단을 오갈땐 정말 여러가지로 여기저기서 휘둘렸었는데, 이번엔 자신의 예측대로 상대측에서 행동하다니. 맨날 쌈박질이나 해대고 여캐들이나 괴롭히는게 전부였는데 나름 장족의 발전이구나. 스스로가 대견해진 진석. 문득 미리안이 생각났다. 그녀도 이런 느낌으로 배후에서 수호자들을 조정하고 음모를 진행시키는걸까 싶었다.
"두령이란 작자가 날 무시한다~ 고 결정했으면 따라야지. 대체 이 애는 뭐야? 당신 딸이라도 되나?"
"...두령 친형의 딸이요. 아직 어린애의 섣부른 행동이었으니 부디 용서해주시오. 이렇게 사과드리겠소."
바닥에 머리를 박으며 큰절하듯 사과해오는 바노르. 하지만 진석은 시큰둥 했다.
"뭐 댁한테 절 한 번 받고 끝내줄 생각은 없고... 그나저나 방금 그 투명화 되는건 뭐지? 마법인가?"
"그건... 그것은..."
자신이 걸친 암살자의 망토를 내려다보며 말을 잇지 못하는 바노르. 라나의 목숨을 위해서라면 이까짓 것, 당연히 내줘야겠지만... 그래도 수십년 이상을 함께 해온 소중한 장비다. 게다가 길드 마스터가 자신에게 직접 준 것이고, 전통에 따라 대대로 전승되던 물건 아니던가. 바노르도 사람이니 마음속에 망설임이 드는건 어쩔 수 없었다.
"어허. 대답하셔야지."
진석은 라나의 품속에 손을 넣더니 나이프를 하나 끄집어 내어 라나의 목덜미에 가져다대고 있었다. 바노르는 마음속으로 전대의 길드 마스터에게 사죄한 후 두르고 있던 망토를 벗어 바닥에 툭 내려놓았다.
"이거요. 암살자의 망토. 이걸 두르면 잠시동안 몸을 투명화시킬 수 있소."
"호오?"
진석의 눈이 번뜩 뜨였다. 오 이런 세상에. 이런데서 생각치도 못하게 저런 마법장비를 보게 될줄이야. 진석은 바노르에게 손을 휘휘 저어보이며 말했다.
"당신, 뒤로 물러서. 한 이십보쯤 뒤로 가시지."
"알겠소."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나 시킨대로 뒤로 물러나는 바노르. 진석은 라나를 공주님 안기로 안아든채 암살자의 망토가 놓인곳까지 다가가, 라나를 옆에 눕혀 놓곤 망토를 집어들어 바로 옷 위에 걸쳐입었다.
- 암살자의 망토
방어력 : 5
설명 : 하루에 단 3분간 투명화가 가능해지는 망토. 시간은 자정에 리셋된다. 3분간의 기본 시간을 다 소모할 시, 초당 SP 4를 소모해 투명화를 계속 유지 할 수 있다. 착용시 소유자의 민첩이 상승한다.
특징 : [투명화 가능], [민첩+2]
'오오.'
맨날 거지같은 단검이나 들고 다니다 쓸만한거라곤 겨우 란비언 하나뿐이었는데, 이제서야 뭔가 좀 장비다운 장비를 하나 건졌다. 그렇지만 하루에 3분뿐이라는건 굉장히 짜긴 짜다. 이게 무슨 컵라면이나 울트라맨이냐? 3분이 뭐야 3분이. 하지만 3분을 다 소모한 후에도 SP를 소모하는 댓가로 잠깐이나마 투명화를 더 유지할 수 있고 민첩도 2나 오른다. 숄이나 머플러에 가까운 형태의 진홍색 망토라 좀 많이 튀어보이긴 하지만... 그래도 치렁치렁 긴게 아니라 허리 중간까지만 내려오는데다, 이만하면 나름대로 훌륭한 물건이다.
"이야 이거 좋은 물건인데. 잘 받아두지. 그리고 하나 더 궁금한게 있는데..."
"잠깐. 그전에 하나만 약속을 해주시오. 라나는 죽이지 않겠다고."
진석의 말을 가로막고 그런 부탁을 해오는 바노르. 진석은 손을 휘휘 저으며 대답했다.
"뭐, 얘? 안죽여 안죽여. 이런 꼬맹이 죽여서 뭐에 쓰겠어? 꿈자리 뒤숭숭하다고. 더불어 일단은 댁도 죽일생각 없으니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하셔. 대지의 눈, 그거 댁들이 가지고 있지?"
바노르는 그제서야 상대방의 목적을 눈치챘다. 그거였구나, 대지의 눈. 이 사내는 자신들이 훔쳐낸 대지의 눈을 되찾기위해 스스로를 사카르라 떠벌이며 소란을 피워 이쪽을 유인했던 것이다. 론소 두령은 이 자를 무시한다는 옳은 결정을 내렸지만, 아직 어린 라나는 그 진의을 알아채지 못하고 호기에 나섰다가 제대로 걸려버린 것이다.
"...그렇소. 그게 당신의 목적이었던건가?"
"그래. 그것만 내놓는다면... 이 아이를 돌려주지. 너희들이 대지의 눈을 훔쳐가서 내가 아주 큰 곤경에 처했단말야."
손가락을 까닥거리며 말하는 진석. 하지만 바노르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나는 권한이 없소. 난 그저 일개 단원일 뿐이니까. 대신 날 보내준다면 지금 당장 두령에게 확인해서 물건을 가져오도록 하지."
"뭐... 좋아. 이야기가 빨라서 좋군.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테니 잽싸게 다녀와. 쓸데없이 동료를 데리고 와서 허튼짓따윌 하려고 하면 이 애는 죽는다는걸 잊지말고."
"알겠소. 최대한 빨리 다녀오겠소."
몸을 돌려 모퉁이 넘어로 달려 사라지는 바노르. 발걸음 소리가 탁탁탁 하고 멀어지는게 확실히 자리를 떠난 것 같았다. 진석은 주변에 떨어져있는 금화주머니와 나이프들을 회수해, 그나마 조금 깔끔한 자리로 라나를 옮겨다 벽에 기대게했다. 자신도 그 앞에 털썩 주저앉은채 손가락 사이로 나이프를 빙빙 돌렸다.
'이거 잘됐어. 이제 대지의 눈만 회수하면 이 도시도 땡이다. 알 유세피나고 르마쿠르 자매고 뭐고... 슬쩍 도망가도 되겠지?'
진석은 알 유세피나의 재력도 탐났고, 르마쿠르 자매를 수하로 두고 부리고 싶은 생각이 없는것도 아니지만... 역시 세 여자 다 자기 주장이 너무 강했다. 곁에 두고 지내기는 커녕 같이 있다보면 틀림없이 그녀들에게 휘둘릴 것 같았다. 그래서 사카르에게서 대지의 눈을 회수하고 나면 몰래 도시를 빠져나가는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르마쿠르 자매와는 정말 우연히 마주치게 됐을 뿐이고, 알 유세피나야 뭐 아라파에 또 올일도 없을텐데 뭘. 남은 저희들끼리 치고박던 말건 알 바 아니다. 나이프를 가지고 놀며 이런저런 궁리를 하는 찰나 기절해있던 라나가 으음 하고 신음성을 흘리며 정신을 차렸다.
"으... 으응... 바노르 아저씨..."
"그 양반은 지금 집에 갔네 요 꼬맹아."
"어으... 으, 으읏?!"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정신을 차리는 라나. 하지만 눈을 떠보니 바로 앞에 있는것은 낯선 진석의 모습. 라나는 펄쩍뛸듯 놀라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등 뒤는 물러날 곳 없는 벽이었다. 당황해서 주위를 돌아보는 그녀에게 진석은 피식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싸움은 진즉 끝났어. 네 쪽이 졌다. 그 뭐냐, 바노르? 그 양반은 널 구하러 잠시 돌아갔어."
"뭐... 뭐라고?"
진석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듯 불신의 표정을 띄우는 라나. 진석은 손목의 스냅으로 나이프를 휙휙 돌려보이며 말했다.
"네가 인질로 잡혀서 말야. 네 목숨을 댓가로 이 망토하고 대지의 눈을 받기로 했지."
"그, 무슨! 안돼! 돌려줘!"
진석을 향해 막무가내로 와락 덤벼드는 라나. 허참, 이 꼬맹이가 아직 정신을 덜차렸군. 암만 야무지게 보여도 아르데나보다도 두어살이나 더 어려보이는 꼬맹이다. 진석은 멱살을 잡으려 덤벼드는 라나의 공격을 가볍게 흘리며 붙잡아 끌어당겼다. 그리고 왼쪽 팔로 그녀의 목을 조이듯 감싸며 제압하곤 말했다.
"어린게 진짜 무서운걸 모르고 함부로 까부는데? 너 진짜 한 번 혼나볼래?"
비어있는 오른손으로 회수했던 나이프를 하나 꺼내들어 손가락 사이로 휘리릭 돌려보이다 척하고 라나의 얼굴 앞에 겨누는 진석. 하지만 라나는 전혀 주눅들지 않은 태도로 버럭거렸다.
"찌를테면 찔러! 더러운 놈, 네가 날 인질로 잡아서 그렇지 바노르 아저씨는 원래 네깟 놈에게 질 사람이 아니야! 아저씨의 망토도 내놔!"
"아 그러셔?"
진석은 나이프를 도로 내려놓곤, 라나의 옷 속으로 맨손을 쑤욱 집어넣었다. 눈앞에 칼이 들이대져도 꼼짝않던 라나였지만 이번엔 대경실색했다.
"꺄아악! 무슨짓이야?!"
"이런짓."
발육이 더딘건지, 지극히 평탄한 라나의 가슴. 진석은 조금의 굴곡도 없이 평면이나 다름없는 라나의 가슴을 손바닥으로 슥슥 훑었다.
"우와 뭐냐 이건. 완전 평야네 평야. 아무리 꼬맹이라도 좀 처참한데?"
"다, 닥쳐! 미친새끼야! 손 빼! 변태자식!"
"거참 어른한테 말버릇이 이게 뭐냐? 자 지금부터 건방진 꼬맹이의 훈육에 들어갑니다잉."
제압한 라나의 귓덜미와 목을 혀로 스윽 핥으며 가슴에 난 두 개의 돌기를 꾹 누르거나 꼬집는 진석. 방금전까지도 괄괄하던 라나는 히익하고 신음성을 내며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하... 하지마아앗! 히이, 히익! 으응, 마, 만지지 말라고옷! 개자식아!"
"연장자에겐 존댓말이 기본 아냐? 응? 그렇게 생각하지 않니?"
가슴을 더듬던 손이 이번엔 쑤욱, 아래쪽 바지춤으로 향했다. 순간 멈칫하고 굳는 라나의 몸. 수초간 굳어있던 라나는 훌쩍거리며 물기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하... 하지... 하지마... 세... 요. 히잉, 흐에에엥."
'끌끌, 꼬맹이는 꼬맹이구만. 이깟걸로 울기는.'
진석은 속으로 키득거리며 라나를 풀어주었다. 후다닥 벽쪽으로 돌아가 구석에 방어자세를 취하고 쪼그려앉는 라나. 얼굴은 발갛게 물든채 눈에 눈물이 고여있었다.
"얼레리 꼴레리, 울었대요."
"이... 씨이... 흑, 끄윽."
메롱메롱하며 라나를 약올리는 진석. 라나는 놀림에 울지도 못하고 이를 악물며 손등으로 눈물을 연신 훔치며 분한 표정을 지었다.
"그 정도로 질질 짤거면 처음부터 센 척 하지 말라고 꼬맹아. 이딴 나이프 함부로 사람 상대로 집어던지지 말고 나이에 걸맞게 인형놀이나 하고 놀아."
"......"
아무말 않은채 울음을 속으로 삼켜넘기며 진석을 죽일듯한 눈으로 쏘아보는 라나. 진석은 히죽 웃으며 그런 라나에게 한걸음 다가섰다. 히잇하며 양팔로 얼굴 앞을 가리는 그녀. 진석은 하하하 하고 웃으며 뒤로 물러났다.
"음 이거 재밌네. 이거 어쩌면 나한테는 애들 돌보는 재주가 있는걸지도?"
뭐라는거냐 미친녀석. 라나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하지만 진석은 실실 웃는낯으로 말을 이어갔다.
"아 그나저나... 너네 대지의 눈은 대체 왜 훔쳐간거냐? 팔아먹으려고?"
"...!"
대지의 눈 이야기가 나오자 깜짝 놀라는 라나. 그걸... 이 자가 어떻게?
"어, 어떻게 그걸..."
"어떻게? 어떻게는 뭔 어떻게야. 그건 원래 내 물건이다 요놈아."
정확히는 알 유세피나의 물건이지만. 하지만 알 유세피나가 자기 입으로 나는 당신의 소유물입니다~ 라고 해왔으니 내건 내거, 니것도 내거의 법칙에 의거 대지의 눈도 진석 자신의 것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니 틀린말은 아니지 뭐. 라나는 진석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말했다.
"그, 그치만... 아빠의 병... 아직 치료 못했는데..."
'흐음...? 병? ...아하. 사카르는 그래서 대지의 눈을 훔쳐간거였구만.'
소원을 들어준다던 대지의 눈이다. 라나의 의견대로 대지의 눈을 강탈해서 아밀의 병을 고쳐보려 했지만, 한 달째 옆에 두고 이렇게 저렇게 해보아도 소원을 들어줄 기미같은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막막했다. 하지만 라나는 아버지 아밀을 포기할 수 없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자신의 가족인데, 겨우 이깟 병 따위에 죽게 놔둘 순 없었다. 그리고 반년이면 죽을거라던걸 벌써 1년이나 버티고 있지 않은가. 어떻게 해서건 대지의 눈의 사용법이나 비밀을 알아내어 병을 치료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 눈앞에 나타난 이 사칭범이 실은 그 물건의 주인이었다니. 이를 어쩌면 좋단 말인가? 이대로라면 꼼짝없이 자신의 신병과 대지의 눈이 교환될 판이다. 아니, 그렇겐 안된다. 라나는 용기를 내어 눈 앞의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아, 아저씨. 이름이 뭐야... 아니, 뭐... 뭐에요?"
"허. 아저씨라니. 네 눈엔 내가 그렇게 삭아보여? 기분이 팍 상하는디?"
"...오... 오빠."
방금전까지 죽이느네 어쩌네 하던 소녀에게 억지로 오빠라는 호칭을 듣자 피식 웃음만 새어나왔다. 진석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이거 옆구리 찔러 절받기네. 뭐... 래스커라고 불러."
"래, 래스커 오빠. 그... 대지의 눈. 주면... 안돼요?"
"안 돼."
"제발! 아빠의 병만 고친다면 돌려줄테니까! ...요."
그런데 진석의 머릿속엔 근본적인 의문이 하나 떠올랐다. 대지의 눈에 정말로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는 힘이 있긴 한걸까? 진석은 그 점이 의심스러워졌다. 애당초 알 유세피나가 대지의 눈을 구입한 이유도 대지의 눈에 소원을 들어준다는 뜬소문이 붙어 있어서라고 했다. 그 이야기는 대지의 눈을 비싸게 팔아먹고 싶은 전 소유주가 만들어낸 거짓인걸까?
'아니면... 대지의 눈엔 정말로 누구도 모르는 어떤 비밀이 숨겨져있는걸까? 뭐 미리안이 요구한 물건이니 분명 평범한 물건은 아닐것 같지만...'
어쨌거나 대지의 눈의 실물을 직접 보기전까진 모를일이다. 그나저나 바노르인지 이 양반은 언제오려나. 진석은 팔짱을 끼며 라나에게 말했다.
"그보다 그 동안은 네가 대지의 눈을 가지고 있었을거 아냐? 여태까지 병을 치료 안하고 뭐했는데?"
"그건! 그... 사, 사용법을... 아직 몰라서... 요."
눈에 띄게 시무룩해 하는 라나. 진석은 히죽거리며 말했다.
"...흐음. 그래 뭐 좋아. 사람 살리겠다는데 까짓것 못줄것도 없지. 그럼 너는 그 댓가로 나한테 뭘 줄 수 있는데?"
"에, 엣? 어... 음... 대신할만한 뭔가를 훔쳐다 준다거나...?"
너희들이 신출귀몰한 도적단 사카르라는건 잘 안다만 나한텐 부질없는 소리란다. 고개를 좌우로 절레절레 젓는 진석.
"필요없어. 훔친 물건의 댓가로 다른 물건을 훔쳐다 주겠다니 그 무슨 돌려막기냐."
"하지만... 그럼 돈? 론소 삼촌에게 부탁하면 대지의 눈의 값 정도는..."
라나가 아는 삼촌 론소는 어마어마한 부자였다. 그간 소매상 사업도 순조로이 해왔고 사카르의 활동도 쭉 이어온데다가 여기저기 투자해놓으며 묻어둔 돈도 많았다. 삼촌이라면 이 자에게 대지의 눈을 제 값 주고 살 수도 있으리라.
"넌 내가 고작 돈이 아쉬워서 이런짓까지 하며 그걸 되찾으려고 한걸로 보이냐? 생각 좀 하고 말해라."
"우..."
분했지만, 생각해보니 저 래스커라는 남자의 말은... 옳았다. 이렇게까지 해서 되찾으려는 대지의 눈인데 돈으로 살 수 있을리 없겠지. 라나는 마땅히 좋은 댓가가 떠오르지 않아 더 아무말도 못하고 눈치만 봤다. 진석은 다시 나이프를 하나 집어들고 손 안에서 휘릭휘릭 돌려보이며 말했다.
"내가 대지의 눈을 줄테니, 너 나한테 시집올래?"
"......"
뭐? 방금 이 남자가 뭐라고 한거야? 생각치도 못했던 말에 라나의 사고는 마비되었다. 그리고 수초가 지나, 간신히 상대의 말을 이해한 라나는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뒤의 벽으로 바싹 붙었다.
"아... 아동성애자! 더러워!"
"...아니 씨. 그런 의미에서 한 말이 아니고. 네가 아버지의 목숨을 구하고 싶을만치 갖고 싶은 물건이라면 그만한 댓가는 걸어야 하는거 아냐? 내가 내어주는 댓가로 한 사람 생명을 구할지도 모르는 물건이니 이쪽에서도 그만한 가치는 받아야지. 네 인생말야."
"그런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를..."
"뭐 안되겠다면 대지의 눈은 회수-"
"자, 잠깐!"
손을 내저으며 진석의 말을 막는 라나. 라나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고 오만상이란 오만상은 다 쓴채, 끄응 끙 소리가 새어나올 정도로 한참이나 뭔가를 고민하고 또 고민하다... 정말 힘겹게 겨우겨우 말문을 열었다.
"...아... 알았으니까... 요. 시, 시집... 갈테니깐..."
라나는 이 남자가 누군지도 모른다. 오늘 처음 본 상대이고, 사카르를 사칭하던게 괘씸해 실력행사로 쫓아내려던 상대다. 게다가 조금 전엔 자신에게 파렴치한 짓까지 태연히 저지른 남자다. 그런 상대와 백년가약을 맺는일따위, 상상할수도 없었고 하고 싶을리도 없었다. 하지만 대지의 눈의 소유권을 넘겨 받아서 아버지를 구할수만 있다면... 정말로 아빠를 살릴수만 있다면 그까짓거, 눈 딱 감고 할 수 있었다. 이런 남자의 아내가 되건 뭐건 각오 할 수 있었다. 라나로선 정말 평생의 용기를 다 짜내어 한 대답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자신의 말을 듣고 한참 멍하니 있더니 파하하 하고 박장대소를 터트리는게 아닌가?
"으하핫, 히힛. 야 꼬맹아. 누가 너같이 가슴도 없는 여자를 데리고 살겠냐. 그냥 해본소리야 해본 소리."
"......"
죽일까. 정말 할 수만 있다면 죽이고 싶다. 뭐 이딴 망할자식이 다 있어? 결국 대지의 눈을 건 협상이 무위로 돌아갔다는 생각보단, 놀림당했다는 분노가 더 컸다. 진석을 죽일듯 쏘아보며 바득바득 이를 가는 라나. 그때였다. 골목 저쪽에서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라나!"
"바노르 아저씨!"
모퉁이에서 쑥 모습을 드러내는 바노르. 얼굴에 화색을 띄며 대답하는 라나. 진석은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났다.
"여, 오셨군. 기다리느라 목빠지는 줄 알았네."
그때 모퉁이에서부터 한 사람의 남자가 더 모습을 드러냈다. 머리에 두른 터번. 둥근테의 안경. 품이 넉넉한 펑퍼짐한 흰색 외출복. 묘하게 날카로운 인상을 한 상인 차림의 남자였다. 그는 진석을 발견하자 바로 말을 걸어왔다.
"...자네인가. 사카르를 사칭하고, 대지의 눈을 찾는다는 남자가."
"그래, 래스커라고 부르쇼. 그쪽은?"
상인 차림의 남자는 손을 들어 안경테를 한 번 쓱 추켜올리곤, 잠시 진석을 뚫어져라 바라보다 나직히 대답했다.
"나는 론소 펠미라. 내가 바로 사카르의 두령이라네. 초면이지만 본론부터 말하자면, 자네를 고용하고 싶군."
"...뭐?"
론소를 제외한 진석, 바노르, 라나 셋은 하나같이 놀라 토끼눈이 되어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론소는 무심한듯 태연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인적 하나 없는 거리엔 침묵섞인 시선만이 뒤섞이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이제는 비축분 없이 그냥 하루하루 쓰는대로 올리다보니..
오타나 문맥상 이상한 부분이 늘어도 이해 부탁드립니다.
지적해주시면 확인하는대로 수정하고 있습니다. OTL
앞으론 평일1, 주말2 이런거 없이 그냥 적당히 분량 나오는대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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