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7. -- > * 83화 *
"정지! 이 앞은 알 유세프님의 저택, 일반인은 출입 엄금이다!"
"자자. 이거."
진석은 앞을 가로막는 근위대 병력에게 품에 들어있던 명패를 꺼내 보여주었다. 금새 태도가 바뀌어 척 경례를 하며 길을 열어주는 그들. 진석의 등에 업혀있던 라나로썬 아까부터 몇 번이나 반복해서 본 모습이었다.
"...저기... 그쪽은 대체 뭐하는 사람이에요?"
"글쎄, 뭘까."
라나로선 정말이지 이해불가한 남자였다. 론소 삼촌이 이런 정체 모를 남자에게 큰 일을 맡겨버리는것을 보곤 이건 아니다 싶어 혼자 몰래 빠져나와 뒤를 미행했지만... 어처구니 없게도 거리의 불량배들에게 봉변을 당할뻔하고, 타이밍 좋게 이 남자가 나타나 되려 자신을 도와준거 아닌가. 라나가 아무리 센척해봐야 이제 겨우 열네살 짜리 여자아이. 구해졌다는 안도감에 한참이나 엉엉 목놓아 울어버렸다. 그것도 상대의 품에 꼭 안긴채로. 실컷 울고 좀 진정되고 난 뒤엔 자신의 행동이 부끄럽고 창피해서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지만... 그는 그냥 피식 웃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더니 치료해주겠답시고 자신을 업고 어딘가로 멋대로 향하기 시작했다. 어쨌거나 위험에서 도와준데다가 치료를 해주겠다는데 마땅한 거절의 말도 떠오르지 않고, 아무말못하고 업힌채 따라왔는데 이건 대체 무엇일까. 언제나 통행이 엄격히 제한되는 왕족의 저택쪽으로 마구 향하는게 아닌가? 거기다 앞을 가로막는 병사들을 가볍게 물리기까지. 라나로선 진석의 정체가 궁금해질 수 밖에 없었다.
"래, 래스커라고 했죠? 관리 같은 높은사람... 이에요?"
"래스커는 가명이야. 내 이름은 러셀 헤이든. 관리도 높은 사람도 아니고 그냥 대지의 눈이 필요한 사람이랄까."
이렇게 말하니 더더욱 알 수 없었다. 평범한 사람이 무슨수로 병사들을 족족 물리고, 왕족의 저택엔 또 무슨일로 간단 말인가? 라나로선 불안하긴 했지만 그래도 이 러셀이란 남자가 해를 끼치려는건 아니겠지 싶어 일단 가만히 있었다. 어차피 자신을 어떻게 하려했으면 아까 얼마든지 할 수도 있었을테고, 이대로 따라가면 이 남자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겠다는 계산도 있었다.
"그나저나 너 날 왜 따라온거야."
"...!"
아, 알고 있었단 말인가? 자신이 미행을 했다는것을? 아니 하긴 그러니 타이밍 좋게 나타나 자신을 구해준거겠지. 하지만 어떻게? 대체 언제부터 미행을 눈치챘던거지? 머릿속에 온갖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올랐지만 라나는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
"내가 요새 미행을 하도 당하다보니 누가 내 뒤에 따라붙는거 눈치채는덴 이골이 나 있거든? 너같은 꼬맹이의 미행도 눈치못챌까봐."
그렇지 않아도 잔뜩 부어오른 볼이 화끈거렸다. 낮에 바노르 아저씨와 함께 덤볐다가 졌을때도 그랬고, 아까 봉변당하다 구해졌을때도 그렇고. 이 남자에겐 도무지 어떻게 해볼수 없겠구나 싶은게 마치 보이지 않는 높은 벽 같은게 느껴졌다. 처음부터 어린아이인 자신이 뭘 시도해볼 상대가 아니었음을 겨우 깨알았다. 론소 삼촌을 설득해 대지의 눈을 탈취하는데 참여했던일로, 자신이 뭐라도 된양 기고만장해 착각하고 있었구나 싶었다. 부끄러워졌다. 말 없이 진석의 등에 고개를 파묻는 라나.
"뭐 됐어. 어차피 내가 뭐하는놈인가 캐보려고 했던걸테고, 그나저나 다 왔네. 저기야."
골목을 빠져나오니 눈앞엔 거대한 저택이 펼쳐져 있었다. 라나로썬 처음보는 왕족의 대저택. 하디카의 고급 창관들이 그녀가 아는 가장 화려하고 규모가 큰 건물들이었지만, 이 저택은 그런곳들과는 달리 외관에서부터 기품이 느껴졌다. 사막에 접한 도시임에도 아름답게 잘 꾸며진 정원과 꽃밭, 그리고 문외한인 라나의 눈에도 느껴지는 본채의 건축미. 이런게 정말 높은 신분의 이들이 기거하는곳이구나 하는 느낌이 확 와닿았다. 진석은 라나를 업은채로 저택앞을 지키고 있던 경비병에게 가 역시 명패를 보여주고 별 제지없이 가뿐히 안으로 들어섰다.
"러셀 오... 오빠는... 설마 귀족같은거... 에요?"
웅장한 저택의 분위기에 압도된 라나. 이런곳을 거리낌없이 자유롭게 출입하다니. 설마 이 남자는 높은 신분인게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고귀한 혈통을 타고난 인물일까? 그런 추측을 했다.
"땡, 넌 참 상상력이 빈곤하구나. 가슴만큼이나 빈곤해."
"가슴은 상관 없잖아! ...요."
"너 편식하지? 가려먹지 말고 밤에 일찍자라. 그러면 잘 큰다던데."
"...서, 성희롱이야..."
"아니 키 말인데? 무슨 생각을 하는거야? 쬐깐한게 까져서."
등에 업힌 라나를 적당히 놀리며 넓은 정원을 지나 저택으로 들어선 진석. 안에서 일하던 고용인들은 진석이 저택내의 중요한 손님인걸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정중히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며 그 앞을 지나갔다. 진석은 그들의 인사를 대충 받아넘기며 라나를 업은채 바로 2층의 침실로 들어갔다. 하지만 안은 아무도 없이 텅 비어있었다.
"이것들은 다 어디갔어? 자 아무튼 거기 앉아봐."
라나를 침대 위에 앉혀놓곤 방 한켠에 굴러다니던 자신의 짐가방에서 체력회복제를 꺼내는 진석. 하급치료제를 쓸까 하다가 라나의 얼굴을 한 번 슬쩍 돌아봤다. 말도 안되게 호사스럽고 넓은 방안을 여기저기 정신없이 둘러보는 그녀. 막 맞았을때도 보다 지금이 한층 더 부어있었다. 쯧 하고 혀를 차며 중급치료제를 꺼내는 진석. 한쪽에서 수건도 하나 집어들어 라나의 옆에 앉으며 말했다.
"자 약 바를거니까 가만히 있어. 이쪽보고."
"...네."
진석이 시키는대로 가만히 앉아 이쪽을 향하는 라나. 진석은 손에 치료제를 조금 덜어 로션이나 스킨 바르듯 그녀의 얼굴에 잘 펴발랐다. 손길이 얼굴을 스칠때마다 가볍게 움찔움찔 떠는 라나. 두번 세번 반복해서 약을 골고루 바른 후, 남은 3분의 1 가량의 약은 마시게 했다.
"자 남은건 그대로 마셔. 이제 한 일이십분 있으면 금방 나아질거야."
수건으로 손을 닦는 진석. 라나는 병에 든 약을 받아 마시곤 잠시 우물쭈물하다가 살짝, 정말로 아주 살짝 고개를 숙이며 답례 인사를 했다.
"그... 고맙습니... 다."
"됐어 됐어. 앞으론 괜히 위험한 짓 한다고 나서지마. 네 삼촌이나 아빠, 아니면 바노르라는 양반이 알면 얼마나 걱정하겠냐. 애는 애답게 노는게 제일이야. 아 그나저나 결국 밥도 못먹었네. 배 안고프냐? 기왕 온김에 밥이나 먹고 가."
진석은 르마쿠르 자매나 알 유세피나를 찾아보러 라나를 남겨두고 방을 나서려 했다. 문을 열려고 손잡이에 손을 뻗는 찰나, 벌컥하고 바깥쪽에서 문이 열리며 뭔가의 이야기를 나누던 알 유세피나와 나지르가 나타났다.
"왕제 알 후드라는 자신의 영지에서 머무르는데 만족하는것이 분명하고, 사림파는 현재의 국왕에게 불만을 품고 있어 충분히 협조해 줄 것 같습니다."
"좋아. 알 사아드 대군도 동생인 알 파지드가 자신을 젖히고 왕위에 오른것을 원망하고 있다는걸 모르는 이가 없으니 일을 잘 꾸며서 그에게 혐의를 뒤집어 씌우... 앗."
"...뭔 소리야 이건 또."
아무도 없는 줄 알고 침실문을 열었는데 떡하니 진석이 서 있는거 아닌가. 깜짝놀라 입을 다무는 알 유세피나. 나지르의 표정도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아무리 자신이 모시는 알 유세피나가 부군으로 삼고 싶어하는 대상이라지만 이런 반란에 관한 이야기, 그의 귀에 들어가 좋을게 없었다. 알 유세피나와 자신만이 그림자속에서 은밀히 진행시키려 했건만 하필 딱 들켜버릴줄이야.
"아... 그게 저... 응? 그보다 저 아이는 누구죠?"
허둥지둥 둘러댈 말을 찾다가 방 안에 앉아있던 라나를 발견한 알 유세피나. 하지만 진석은 대수롭지 않다는듯 라나를 돌아보며 대답했다.
"응 뭐어, 저래보여도 사카르의 일원인데."
"네?!"
이건 또 무슨소린가. 황당해하는 알 유세피나와 나지르. 십수년간 꼬리를 밟히지 않고 활동을 해온 사카르다. 그런데 어디 저잣거리에서 흔히 볼법한 평범한 어린아이를 데려다놓고 사카르의 일원이라니? 이건 농담일까 아니면 뭔가 근거가 있는 소리일까? 진석은 둘에게 어깨를 으쓱해보이며 말했다.
"진짜라니깐? 이 사람들이 속고만 살았나. 자세한 이야기는... 밥이라도 먹으면서 해볼까? 그리고 방금 너희 둘이 하던 이야기도 좀 더 들어보고 싶고."
"그건... 그."
"러셀님. 잠시 이쪽으로..."
알 유세피나가 당황스러워하자 진석을 이끌고 방 밖으로 나서는 나지르. 진석은 순순히 그와 방을 나서 복도 한쪽에 서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뭐 얼핏 들었을 뿐이지만... 뭐야. 너희들 국왕을 상대로 뭐라도 해보려는거야? 아니면 단순한 정쟁?"
대답대신 힐끗 방쪽을 바라보는 나지르. 문이 닫혀있고, 알 유세피나가 따라나오지 않는것을 확인한 후에야 진석을 바라보며 대답헀다.
"...긴 사정이 있는 이야기다보니 이해가 되실진 모르겠지만, 최대한 간략히 추려 설명해드리겠습니다."
나지르는 진석에게 알 유세피나의 상황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알 유세피나가 자신의 몸 때문에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그리고 국왕인 알 파지드가 알 유세피나에게 어떤 마음을 품고 있었고 무엇때문에 이런 저택을 마련해 준 것인지. 또 나지르 자신은 어떻게해서 알 유세피나의 집사이자 알 유세프라는 위장 신분을 행세하게 되었는지. 그야말로 모든걸 털어놓았다. 나지르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들은 진석으로선 생각치도 못하던 것들이었다. 사소한 맥락은 빼놓고 딱 중요한 부분만 간추린 이야기였음에도 상황을 파악하기엔 충분했다. 진석은 알 유세피나가 자신을 부군으로 삼고자 하는 마음이 진심이며, 알 파지드가 그녀를 속이며 지금까지 저택에 가둬온 것에 대한 분노, 그리고 현재 진석과의 관계가 발각될 경우에 대한 두려움으로 알 파지드를 권좌에게 밀어낼 계획을 세우는 참이라고 밝혔다. 이야기를 다 듣고난 진석은 벙쪘다.
'이건 또 무슨... 내가 밖에서 대지의 눈을 찾겠답시고 뽈뽈거리고 돌아다닐동안 얘랑 알 유세피나는 이런일을 꾸미고 있었단 말이지? 아 이것 참...'
어떻게 해야 좋을까. 어차피 자신은 그냥 대지의 눈만 회수해서 돌아가면 그만이지만... 꼴을 보아하니 알 유세피나는 진심인 모양이다. 진석 자신이 사라지더라도 반기는 반기대로 들테고, 그 이후엔 진석을 찾으려 들겠지. 진실을 알자마자 반역을 실행에 옮기는 알 유세피나의 화끈한 행동력이라면 자신을 찾아내고 곁에 두기 위해 정말 무슨짓을 할지 모른다.
'그러니까 납득이 안간대도. 뭐 한 번 잠자리 한걸로 이렇게까지... 아놔 정말.'
그렇지 않아도 대지의 눈을 찾기 위해 내일 모레엔 하디카의 회합장소에 가서 수백명의 적들 한가운데서 거하게 한 판 벌여야 할 참이다. 그런데 알 유세피나는 뒤에서 반역의 음모를 시작하고 있는 참. 그냥 보옥 하나 훔치면 되겠거니 하며 털레털레 온것뿐인데 일이 왜 이렇게 된건지 모르겠다. 끄응 하고 생각에 잠겨있던 진석은 머리를 벅벅 긁으며 말했다.
"그... 승산은 있긴 한거야?"
"정면으론 불가합니다. 왕위 계승전에서 밀린 왕의 형 알 사아드 대군과, 사림파라는 불만세력이 있다해도 신의 대행자라는 왕의 권위는 쉽게 퇴색하지 않지요. 그래서 저희는 암살을 시도해볼까 모색중입니다."
"암살이라..."
문득 자신이 걸친 암살자의 망토를 내려다보는 진석.
'아니아니아니, 아니지. 그래도 이건 아니야. 이건 내가 안해. 안할거야.'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진석. 그런데 문득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내일 모레 벌어질 회합의 건을 여기에 써먹을 수 없을까~ 하는 생각.
'...아무리 그래도 한 나라의 국왕이잖아. 겨우 폭력조직의 일에 끌어들이는건 무리... 잠깐. 아까 잔당을 소탕할때 알 유세피나의 근위대나 르마쿠르 자매를 써먹을 방법을 궁리하긴 했었는데... 별로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놈이지만 피터슨이 그랬었지. 왕족을 죽이는건 생각보다 쉽고 간단하다고. 요는 그거잖아. 국왕이 알 유세피나를 좋아하니까 이걸 어떻게 잘 살려 적당한 시간과 장소에 그를 끌어내기만 하면...'
가만. 이거 잘하면 뭔가 끼워맞춰질 것 같기도 한데? 진석의 머릿속에 짝이 안맞는 퍼즐조각이 굴러다니는 기분이 들었다. 제자리에 서서 턱을 괸채 이런저런 궁리를 해보는 진석. 잠시 그러고 있자니 복도 저편에서 르마쿠르 자매가 2층으로 올라오는것이 보였다.
"으아- 지친다아. 역시 난 언니랑 달라서 험한 육체노동이 안 맞는다니깐. 마차 지겨워어-"
"그럼 뭐가 맞는데? 고상한 하체운동?"
"헤헤, 잘 알고 있네. 아 빨리 이 일을 끝내고 러셀이랑 질펀하게 섹스나 했으면 소원이 없겠... 어라."
진석과 눈이 딱 마주친 르마쿠르 자매. 아네트는 어울리지 않게 수줍은 척 하며 언니인 지젤의 등뒤에 쏙 숨었다.
"어머어머. 난 아무말도 안했어. 몰라몰라."
"...미쳤니?"
뜬금없는 아네트의 행동에 그녀의 엉덩이를 뻥 걷어차서 쫓아내는 지젤. 아네트는 히잉하고 걷어차인 엉덩이를 쓰다듬으며 궁시렁댔다.
"아니 막 들이대는건 러셀이 싫어하는거 같길래 이참에 살짝 노선변경을 해볼까 하고..."
이제와서 되겠냐 그게. 니들 본성은 훤히 알고 있구만 노선변경을 무슨 얼어죽을. 진석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나지르에게 말했다.
"아무튼 에 뭐... 그 얘기는 나중에 또 하지. 일단 저녁식사 좀 부탁할까."
"알겠습니다. 그럼."
정중히 고개를 숙여보이곤 르마쿠르 자매를 지나 1층으로 내려가는 나지르. 그의 뒷모습을 보며 지젤이 쩝 입맛을 다셨다.
"정말... 얼굴만 보면 저쪽도 더할나위 없는데."
"아아- 이거봐 러셀. 언니 한눈팔았대요! 나는 러셀 일편단심이니까, 응?"
촐랑촐랑 진석에게 다가와 슬쩍 팔짱을 끼며 가슴을 꾸욱 밀어붙이는 아네트. 지젤은 당황하며 손을 저었다.
"아, 아냐! 나도 러셀쪽이 더 좋으니깐!"
그래봐야 둘 다 됐거든. 그때 복도가 소란스러워져 그런지 알 유세피나가 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뭐야 얼간이 자매. 시끄럽잖아. 그리고 너, 러셀님 불쾌하게시리 그런 더러운 지방덩어리 밀어붙이지 말라고."
"지, 지방덩어리? 이 탱탱하고 싱싱한 가슴이 어디가 지방이라는거야? 축 처진 아줌마 젖이나 걱정하시지!"
왁왁거리며 또 으르렁대는 르마쿠르 자매와 알 유세피나. 이것들은 그렇게 말을 했는데도 도통 발전이 없구나. 진석은 이마를 감싸쥐며 고개를 저었다. 이런 녀석들을 데리고 아까 떠오른 그 계획을... 실행에 옮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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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 한 점 없이 파란 하늘. 쏟아지는 햇살 아래 붉은 선혈이 흩날린다. 생명이 끊어지는 단발마. 아직 목숨이 붙은 자는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지른다. 살의가 끓어오르는 시선이 오고간다. 상대를 가리키는 손가락. 입은 살인을 외친다. 싸우는 자. 당혹감에 우왕좌왕하는 자. 달아나는 자. 뒤쫓고 막아서는 자. 엉망진창이다. 그림으로 그려놓은듯한 혼란. 그야말로 대혼란이다.
"하."
주변 몇블럭에 걸쳐 모인 육백에 가까운 대인원이 뒤엉켜 싸우고 있다. 겨우 삼십가량 되는 경비대는 그들을 제압하려 애쓰지만 소용없다. 그 이십배에 가까운 세 조직 연합의 인원들은 그들의 제지따위 아무 상관않고 그저 눈 앞의 적들을 살해하려든다.
"하하하."
계획대로. 진석은 썩소를 지으며 그런 대사라도 내뱉고 싶은 기분이었다. 너무나 깔끔하게 진행됐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레스토랑의 2층, 커다란 원탁의 방 한가운데 홀로 선 진석. 주변엔 스무명에 가까운 고급스런 옷차림의 사내들이 쓰러져있었다. 하나같이 전부 급소를 당한채 절명. 세 조직 연합의 두목과 간부들이었다. 그들만의 조용한 회합을 위해 보디가드들을 대동하지 않은채 방안으로 들어선게 실수였다. 오랜세월 타인을 지배하는데 익숙해진 그들은 날카롭게 벼려진 진석의 칼날을 막을 수도, 피할 수도 없었다. 진석이 이십여명의 목숨을 모조리 빼앗는데엔 채 2분이 걸리지 않았다.
"죽여! 이 개새끼들!"
"누가 할 소리를! 결국 네놈들이 배신할 줄 알았다!"
"뒈져어어어!"
밖에서 수백명이 뒤엉켜 싸우는 어마어마한 소란이 들려온다. 버즌과 함께 레스토랑에 들어와 1층에서 대기하던 진석. 마침 스크레인이 경비대가 회합을 방해한다는 보고를 하려 들어왔을때, 진석은 즉시 그 둘과 주변에 있던 다른 조직 인원들의 목을 모조리 끊고 2층의 회합장 안에 난입해 두목들과 간부들을 죽였다. 그들의 시체를 적당히 너댓구 창 밖으로 내던지고 바깥쪽에 '놈들이 배신했다'라는 말을 몇 번이나 외쳐댔다. 그 결과가 이거다.
"후우."
또옥. 칼끝에 묻어있던 핏물이 방울져 바닥에 떨어진다. 휘리릭. 손바닥 안에서 돌아가는 두 자루의 단검. 회전하는 칼날에 묻어있던 피가 파바밧 흩뿌려진다. 처척. 벨트의 칼집에 정확히 빨려들어가는 단검들. 거추장스런 타이를 벗어 던지고 정장 소매를 팔꿈치까지 쭉 걷어올린다. 핏물로 젖어 축축해진 앞머리를 쓸어올린다. 이제 남은 일은 탈출뿐이었다. 파우치 한쪽엔 사카르의 바노르에게 빼앗은 암살자의 망토가 고이 접힌채 들어있었다. '신호'만 떨어진다면 이것을 두르고 레스토랑을 뛰쳐나가 이 혼란속에서 몸을 빼낼 생각이었다.
"안으로! 두목이 아직 살아있을지도 몰라!"
"씨발놈들! 잘도 이런 개수작을... 서둘러!"
셋 중 어떤 조직인지는 모르겠지만, 십수명의 인원이 레스토랑 안으로 뛰쳐들어왔다. 제 죽을곳인줄 모르고 범 아가리로 뛰어들어오는구나. 진석은 히죽 웃으며 벨트에서 방금 꽂아넣었던 란비언과 흑철단검을 재차 빼들었다. 안으로 들어온 이들은 이미 시체밖에 없는 안쪽의 풍경에 경악했다.
"다... 다 죽었잖아?"
"도대체! 어느쪽이 먼저 시작한거야앗?!"
혼란에 빠진 그들. 진석은 원탁의 방을 나서 1층으로 내려갔다. 진석을 향하는 흥분한 사내들의 시선. 게 중 리더격으로 보이는 자가 한 발 나서며 질문을 던져왔다.
"넌 누구냐? 어느 조직 소속이지?"
"나? 음. 헤세스모데우스 교단이랄까."
"뭐... 뭐라고?"
뜬금없는 대답에 술렁이는 그들. 진석은 천천히 계단을 다 내려와, 그들을 향해 안면 가득 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니들이 알거 없잖냐. 그나저나 너네들 정말 쓰잘데기 없이 너무 많다고 생각 안하냐? 한 조직당 이백씩이라니. 캬, 밥벌이 존나게 잘되나보다? 이래서야 하디카가 뭐가 되겠어. 안그래도 하디카 외곽으로 조금만 나가보면 거리가 아주 개판이더만. 이래서야 쓰나. 오늘은 대청소의 날이다. 쓰레기가 쌓였으면 깔끔히 치워줘야겠지."
말을 하는 와중에 태연히 사내들에게 걸어나가는 진석. 사내들과 진석은 이제 몇발짝 떨어지지 않는 거리였다.
"대체 뭐라는거야 이 새끼가..."
"어차피 우리 조직원이 아니면 다 적이야! 그냥 죽여엇!"
우와아아 하고 흉흉한 기세를 뽐내며 동시에 덤벼드는 사내들. 진석은 혼자고 자신들은 여럿이니 겁낼게 없다는듯한 태도였다.
"사람은 타는 쓰레기일까, 안타는 쓰레기일까?"
파파팟! 진석의 등 뒤로 세 발의 화염화살이 떠올라 정면에서 달려들던 세 사내의 정면으로 쏘아졌다. 안면이나 가슴에 화염화살을 직격당하고 비명을 지르며 나동그라지는 그들. 진석은 앞으로 뛰어나가며 오에스테의 원무를 추었다.
"크허억!"
"아아악! 내 팔! 내 파아알!"
한 명은 목과 가슴팍이, 다른 한 명은 양팔이 잘렸다. 피를 쏟으며 바닥에 엎어지는 두 명을 뒤로하고 코 앞에 육박한 사내를 체중을 실은 앞차기로 밀어낸다. 뒤로 밀려나며 뒤에서 따라오던 다른 동료와 부딫혀 넘어지는 그. 진석은 자신의 등과 옆에서 날아드는 칼날을 뒤로 하고 앞으로 굴러 발차기에 밀려 넘어진 두 사내의 가슴과 복부에 칼날을 한 번씩 쑤셔넣어준 뒤 몸을 돌려 일어섰다. 막 일어난 진석을 노리고 재차 사방에서 달려드는 사내들.
"그래그래, 들어와 들어와."
진석의 양팔이 뻗는 간격안에 사내들이 뛰어들며 각자 무기를 휘둘렀다. 칼을 내리치는자, 똑바로 찌르는자, 양손으로 쥐고 내미는자, 제각각이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서 목표가 된채 서있는 진석은 눈을 부릅뜨며 단검을 쥔 양손에 힘을 넣었다.
"참 싸구려 목숨이야. 니네들-"
토르멘타. 찰나의 순간, 공방일체의 초신속 난무가 펼쳐진다. 그리고 그제 저녁부터 어제까지의 일들이 진석의 머리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저께 저녁. 저녁식사 시간. 진석과 알 유세피나, 르마쿠르 자매. 그리고 라나가 끼어있었다. 진석은 식사를 하며 알 유세피나와 르마쿠르 자매에게 라나를 소개하고 하루동안 있었던 일에 대해 간략히 설명했다.
"그리고 세 조직 연합을 한 번에 무너트리겠다는 사카르의 계획을... 알 유세피나, 네 계획에도 써먹을 수 있을것 같은데?"
그걸 말하면 어떻게 하냐는듯한 알 유세피나의 표정. 하지만 진석은 태연히 말을 이어나갔다.
"뭐 어때. 상관없어. 이 중에 달리 배신을 할 상대가 있는것도 아닌걸. 국왕을 무너트리겠다면서? 협력해주지."
"어, 러셀? 방금 뭐라고 했어?"
입에 넣으려던 포크를 멈추고 진석에게 되묻는 지젤. 진석은 히죽 웃으며 지젤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알 유세피나가 현재의 아라파 국왕을 실각시키겠다더군."
"...뭐어엇?!"
"무슨 소리야?!"
여기서 알 유세피나와 국왕 알 파지드, 그리고 나지르의 관계를 설명하려면... 복잡해질것이다. 진석은 딱 잘라 말했다.
"나보고 주인입네 뭐네 엉겨붙는게 귀찮아서 그럼 나라라도 가져다 바쳐보랬더니 알겠다고 바로 쿠테타 계획을 세우던데? 이야 이건 아무리 나라도 진짜 좀 감동받았어."
찡끗 하고 윙크로 알 유세피나에게 눈짓을 하는 진석. 은밀히 꾸미려던 계획이 까발려져 당황해하던 알 유세피나 였지만, 진석이 무슨 의미로 눈짓을 하는건지 눈치채곤 되려 가슴을 펴며 당당하게 말했다.
"그, 그렇습니다! 왕족인 저의 부군되실 분이라면 이... 이 나라쯤 통치하실 수도 있는거죠! 얼마든지 내어드리겠습니다!"
"미쳤네. 이 아줌마 미쳤어."
"아... 아무리 그래도 알 유세피나 당신, 아네트와 러셀을 놓고 티격댄다고 해도... 이런 정신나간짓을 저지를 생각이라니..."
혀를 내두르는 르마쿠르 자매. 저녁식사 자리에서 뜬금없이 국왕 실각 계획이라니, 그것도 겨우 한 남자를 놓고 벌인 다툼에서 주도권을 쥐려는게 이유야? 어처구니가 없을만도 했다. 하지만 진석은 생각하는 바가 있었다.
'여기서 내가 알 유세피나에게 국왕을 실각시키도록 힘을 실어주면... 아라파의 실권은 당연히 음모의 주체인 그녀가 쥐게될터. 그렇게되면 내가 아라파라는 나라를 간접적으로 지배할 수 있게 된다는 이야기. 사카르가 제시했던 하디카의 창관? 하. 그딴건 정말 하잘것 없는거지. 그런것보다 이쪽이 더 탐나는 걸. 일개 창관과 한 나라를 비교할 수 있을리가 있나.'
알 유세피나를 바탕으로 아라파를 지배하게 되고, 정쟁이나 물리적인 수단을 통해 방해자들을 좀 쳐내고 나면 이전처럼 군주 플레이로 넘어갈 수도 있을터. 물론 지금의 진석이 군주 플레이로 전환할 생각이 있는건 아니었지만, 이러한 '힘'을 손에 넣을 기회를 마다할 이유도 없었다. 밥상은 반쯤 차려져 있다. 조금만 손을 쓰면 달콤한 과실을 자기 입에 넣을 수 있는데 지나칠 필요가 있겠는가? 처음 들었을땐 좀 어처구니가 없기도 했지만 가만 생각해보니 이거 꽤 흥미로웠다. 교단쪽 멤버들은 총출동해서 현재 그란델 왕국을 전복중이고, 자신은 꼴랑 단신으로 여기와서 마찬가지로 왕위 찬탈을 시도한다. 묘하게 도전의식이 불타올랐다. 재밌겠다 싶었다. 진석에게 있어선 역시 재미가 있다는게 제일 중요했다.
'미리안의 계획대로 일이 풀리고 있다면 그란델의 주인이 될 레오노르 공주, 아니 레오노르 여왕도 내 세뇌의 지배하에 있게 되는거고... 아라파와 알 유세피나도 마찬가지. 하, 사교 교단 소속의 일개 떠돌이가 실은 두 개나 되는 나라를 배후에서 지배할 수 있는 흑막이라고 하면 나라도 안 믿어주겠다. 군주의 입장도 아닌데 하나도 아니고 두 개나 되는 나라를 뒤에서 지배한다라... 참 기묘하네.'
아직도 교단의 목적에 협력해 세계를 멸망시킬지 아닐지는 명확히 정하지 않았지만, 이 정도의 힘을 자신의 손아귀에 넣는다면 굳이 세계를 망하게 할 필요가 있을까 싶어졌다. 진석이 게임을 하는 목적은 철저히 자신의 재미. 예정된 파멸을 향해 달리기 보단, 불확실한 미래의 방향쪽이 더 궁금해진 것이다.
'게다가 레오노르가 임신했을 내 후계라... 어떤 녀석이 나올라나. 그래봐야 게임속 캐릭터지만 좀 궁금하기도 하고.'
현실에서는 변변한 연애도 못해봤는데 게임상에선 아빠가 된다니. 뭔가 낯간지러우면서도 묘한, 싫지는 않은 기분이다. 진석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동안 한참을 경악하고 있던 아네트는 알 유세피나를 좀 달라진 시선으로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하, 하지만... 남자 하나를 얻기 위해 그렇게까지 한다는점은 조금 존경스러울지도..."
지젤도 고개를 끄덕이며 아네트의 말에 동의를 표했다.
"확실히 그렇네. 어머니도 아버지를 힘으로 꺾고 손에 넣었다고 했으니까."
"그치- 엄마가 항상 그랬으니까. 맘에 드는 남자가 생기면 콱 힘으로 눌러서 기정사실로 만들어 버리라고."
이 자매의 대가리가 푹 썩은건 그녀들의 어머니 때문이었던거냐! 새삼 가정교육의 중요성에 대해 절감하는 진석. 그리고 지금까지 한 마디도 못하고 어안이 벙벙한채 놀라고만 있던 라나도 겨우 입을 열어 한마디 했다.
"...이, 이제 나 죽는거에요?"
아까 얻어맞은 충격이 뇌로 갔나, 갑자기 뭔 헛소리야. 라나를 돌아보는 진석. 중급치료제를 잘 바르고 먹인덕인지 심하게 부어올랐던 얼굴은 싹 가라앉아 있었다. 진석은 불안한 표정으로 눈만 꿈벅거리는 라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너 아직 어디 아프냐?"
"아니, 그게... 이런 말도 안되는 계획을 듣게 해놓고... 나, 날 그냥 둘리가..."
"그냥 둬야지. 널 어쩔 생각 같은건 없다고? 사카르와는 좋은 협력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걸. 아 그보다 얼른 밥 먹어. 네 삼촌 좀 다시 만나보러 가야겠다."
히죽 웃는 진석. 상황이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건지 파악 못한 라나는 불안한 표정을 지을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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