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7. -- > * 84화 *
피보라를 불러일으킨 토르멘타의 폭풍같은 연타. 진석은 고스란히 피를 뒤집어쓰며 남은 사내들을 노려보았다. 자신을 향한 공포에 질린 시선.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어도 지금 밖은 수백명이 뒤엉켜 싸우는 전쟁터가 아니던가. 어차피 그들에게도 도망갈 길 따윈 없었다. 비명에 가까운 처절한 기합으로 애써 공포를 몰아내며 덤벼드는 그들.
"안쓰럽구만."
진석은 그들이 쥐어짜낸 용기를 일축하며 단검을 휘둘렀다. 상대와 자신의 기량을 정확히 파악못하고 덤벼드는건 용기가 아니라 만용이다! 사람의 살속으로 파고 들어간 날카로운 검면은 얇디 얇은 가죽을 베고 근육을 가르며 혈관을 끊는다. 깊숙히 찔러진 칼날은 신경을 끊고 장기를 꿰뚫는다. 용기나 근성같은 정신적인 가치로는 도저히 버틸 수 없는 치명적인 일격이 생명을 앗아간다.
"히, 히이익!"
결국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자는 도망자가 되고 만다. 지금 밖은 더 엉망진창일텐데? 허나 그걸 알면서도 눈 앞에서 동료들이 차례차례 무력한 모습으로 쓰러지는 절망을 이겨내지 못한것이다. 진석이 손을 뻗자 허공에 화염의 화살이 나타나 그 무력한 등을 연달아 찔러 태운다. 비명을 내지르며 앞으로 고꾸라지는 사내. 히익 히이익 고통과 두려움에 찬 괴성을 내뱉는 사내에게 다가가 목에 검날을 한 번 찔렀다 빼는것으로 모든 괴로움에서 해방시켜준다.
'이 짓도 한 두번이지 반복되니 그냥 노동이구만 노동이야.'
또 한바탕 했더니 전신이 피가 잔뜩 배어 엉망진창이다. 피로 질척하게 물든 손. 그나마 피가 덜 튄 손등쪽으로 이마를 훔쳐닦으며 후우 한숨을 내쉬고 비어있는 의자에 턱 걸터앉는 진석.
"왜 이렇게 늦어 이거."
신호. 진석이 기다리는 그것은 아직도 오지 않은것 같았다. 칼에 묻은 피를 새하얀 식탁보에 아무렇지 않게 닦아내며 다시 생각에 잠기는 진석.
"알 파지드 왕을 실각시키겠다고?"
시종일관 냉정해 보이던 얼굴에 금이 가고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이 떠오른다. 득의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옆에 앉은 나지르의 어깨를 탁탁 두드리는 진석.
"그래. 왕의 사촌동생인 이 알 유세프님과, 그쪽 사카르가 서로 협력하는거야."
"...미쳤군. 정말 미쳤다고 밖에 볼 수 없어."
그렇지 않아도 라나가 사라져 발칵 뒤집혀 있던 사카르다. 낮에 거래를 하기로 하고 돌아갔던 진석이 나타나 라나를 무사히 데려다 준것까진 좋았으나, 그 다음 꺼낸 이야기는 정말로 터무니 없는 것이었다. 세 조직 연합을 부수는 날, 왕을 떨어트리겠다니. 겨우 내일 모레다. 남는 시간이라곤 내일 하루뿐인데 하루 사이에 준비를 해봐야 뭐 얼마나 가능하단 말인가? 이런 미친 이야기는 거절해야했다. 거절하는게 정상이었다.
"댁이 거절하겠다면 나 역시 세 조직 연합의 회합건은 취소야. 대지의 눈을 찾건 못찾건 사카르를 다 죽여서 이 계획에 대해 입막음을 할 수 밖에 없지. 잘 생각하는게 좋을거야. 이 가게 밖엔 이 알 유세프님을 호위하러 따라온 무서운 근위대 아저씨들이 잔뜩 몰려와 있으니까."
"......"
몇 시간 전만 해도 자신이 한 번 거래의 주도권을 쥐었던 상대다. 하지만 이건 뭔가. 입장이 완전히 역전되었지 않은가. 이 남자를, 목숨을 내놓아야 할만큼 어려운 일에 이용해 먹으려 했건만... 이젠 그 반대로 이쪽 전원이 목숨줄을 붙잡힌채 승낙 외엔 아무런 선택기가 없는 상황에 빠져버렸다. 힘겹게 마른침을 삼키고 말문을 여는 론소.
"계획은... 있는건가?"
안경알 너머로 빛나는 론소의 눈빛. 론소는 사카르의 두령이자 동시에 상인이었다. 지금 이 남자의 제안은 오로지 모 아니면 도인 단판 승부의 도박판 같은 거래. 기왕 주사위를 굴릴 수 밖에 없다면... 모든 판돈을 쓸어넣는게 나았다. 실패해서 죽더라도 그쪽이 후회는 남지 않을터.
"있지. 단, 그쪽에서 한 명 암살자로서 희생해줄 사람이 필요해."
그렇게 말하는 진석의 태도는 대단히 진지했다. 이 남자 역시 이 위험한 도박에 필사적으로 자기 자신을 내던지고 있다는 의미이리라. 론소는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있네. 계속 이야기 해 보게."
"우선 내일 모레 레스토랑에서 회합이 일어날때 근위대를 동원해 놈들을 쓸어버려주지."
"근위대? 그렇군. 이쪽의 알 유세프님이 협조해 주시는건가."
슬쩍 나지르를 바라보는 론소. 하지만 나지르의 표정은 아무런 변화없는 무표정이었다. 대신 대답을 하며 말을 잇는 진석.
"그래. 왕족은 외출시 근위대를 대동하지. 그리고 알 유세프는 우연히 그 레스토랑 근처를 지나다 소란에 휘말려들 예정이야. 평소보다 좀 많은 근위대를 대동한채 말이지. 알 유세프는 근위대의 고문이니 근위대 일이백쯤 더 대동하는건 그리 어려운일이 아니니 말이야."
"하지만 그것과 국왕이 무슨 상관이지? 이 소요 사태로 국왕을 끌어낼 수 있을리가..."
"끌어낼 수 있어. 딱히 감추려는건 아니지만... 알 유세프와 국왕 알 파지드간의 개인사는 단순히 말 몇마디로 설명하기 복잡한 구석이 있어. 알 유세프가 소란에 휘말려 폭도들에게 납치되었다는 소식을 전하면, 그는 반드시 스스로 병력을 이끌고 나서게 되어있다고. 국왕은 개인적으로 알 유세프에게 강한 호감이랄까... 언제나 곁에 두고 싶어할 만큼의 그런 친밀감 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거든."
"...이해하긴 어렵지만 그렇다고 하니 그 부분은 믿어줄 수 밖에. 하지만 국왕이 스스로 근위대 병력을 이끌고 나온다면 그 수 역시 만만치 않을터. 그 한가운데서 국왕을 당당히 암살하겠다고?"
"그날 국왕이 끌고 나올 수 있는 근위대 병력은 아주 적을걸? 왜냐하면 자신의 형 알 사아드 대군이 반란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는 비보를 접하고 은밀히 근위대 병력의 태반을 보내 그를 잡아오도록 명령 내릴테니까. 물론 이런 대규모의 병력 이동, 왕궁에서도 모를리가 없지만 거사의 타이밍에 잘 맞춘다면 별 문제 없을거야."
"뭐...?"
"허나 국왕은 알 사아드의 반란 조짐이나 뭐 그딴 이야기는 전~혀 몰라. 이건 어디까지나 근위대의 고문인 알 유세프가 일방적으로 내린 지시일 뿐이지. 월권이나 다름 없는 행위지만 왕이 절대적으로 신임하는 사촌동생의 명령. 왕족의 충실한 수하들인 근위대가 이에 불복할 수 있을거라 생각해?"
"그렇다면..."
"그래. 사카르에서 보내준 암살자를 남겨진 근위대 속에 잘 심어둔다. 왕이 알 유세프의 구출을 위해 얼마 안되는 근위대를 직접 이끌고 정신없이 허둥지둥 나설때... 바로 곁에 있는 위장한 암살자가 왕의 목을 친다. 알 사아드 대군 만세! 그렇게 외치면서 장렬히 산화해주는거야."
맙소사. 듣다보니 이건... 이건 확실히 가능한 이야기다. 물론 지금은 글자 그대로 탁상공론일 뿐이지만 계획대로만 흘러가 준다면 국왕 암살의 혐의는 자연히 알 사아드에게 향할테고, 짧으나마 공백이 생긴 왕궁의 실권은 상황을 주도한 알 유세프가 쥘 수 있을터. 원래 왕위 찬탈이라는건 장황한 계획을 세워 벌어지기보단 순간적인 해프닝이나 사소한 사건의 틈을 타 벌어지는 경우가 더 많다. 게다가 알 유세프는 수도내에선 근위대라는 병권을 쥐고 있지 않은가. 더불어 재무차관으로서의 금력으로 정치적으로 중립에 있을 자들을 설득해두면 아주 불가능한 이야기만은 아니다.
'게다가 알 유세프의 옹립을 돕게되면... 단순히 도적길드 정도가 아니라 왕의 수하로서 곁에서 그 세력을 이어나가고 키울 수 있다.'
존경했던 아버지 이상의 결실을 거둘수 있는것이다. 세 조직 연합의 괴멸과 하디카의 장악은 물론이거니와, 왕의 측근까지도 될 수 있는 기회다. 물론 현재로선 단순히 말뿐인 계획. 이게 성공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일이란 어디서 어떻게 꼬일지 모르는 법이다. 하지만...
"...승낙하지."
안경을 치켜올리며 고개를 끄덕이는 론소. 어차피 이런 이야기까지 다 듣고나서 거부해봐야 돌아오는건 죽음밖에 없을터. 결과를 장담할 수 없는 도박이라도... 이긴다면 모든것을 얻는다. 위기는 언제나 기회가 될 수 있다. 바로 지금처럼.
"자 그럼. 악수라도 할까."
새삼 손을 뻗는 진석. 론소도 손을 내밀어 진석의 손을 맞잡고 악수를 나눴다. 이제 좋건 싫건 한 배를 탄 몸이다. 알 유세프의 왕위 찬탈을 위해서 자신도 가진바 모든것을 동원할때였다. 그 점을 논의하러 알 유세프에게 직접 말을 걸려는 찰나, 진석이 론소에게 말을 걸었다.
"아참, 그러고보니 대지의 눈 말인데. 그건 이제 돌려주지 않겠어? 어떻게 생긴 물건인지 궁금해서 말이야."
"그, 근위대다!"
"대체 뭐야! 근위대가 여긴 왜? 크으윽!"
"도... 도망쳐!"
밖에서 들려오던 소란에 그런 외침이 섞여 있었다. 상념에서 깨어나는 진석. 그렇군. 기다리던 신호가 왔다. 근위대의 난입이 바로 그 신호였다.
"슬슬 퇴장할때인가."
저들이 당황하는 것도 당연하다. 경비대와 근위대는 창설 목적부터가 다르다. 경비대가 경찰이라면 근위대는 군대인것이다. 그것도 왕족을 호위하는게 목적인 정예군. 장비나 훈련도부터가 일반 경비대와는 비견할바가 못된다. 물론 왕 가까이에서 호위를 맡는 몇몇은 나지르 처럼 외모를 중시해서 뽑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극히 일부. 대다수는 잘 훈련된 무인인것이다. 일개 깡패 수준의 폭력조직들이 감당할 수 있는 전력이 아니었다.
"근데 암살자의 망토라면서 이건 색이 왜 이렇게 튀는 진홍색인거야? 검은색이나 뭐 좀 눈에 덜 띄는 색으로 만들것이지."
투덜대며 파우치에서 암살자의 망토를 끄집어내 옷 위에 걸쳐입는 진석. 시체로 가득한 레스토랑의 홀을 지나 문으로 다가갔다. 문 밖에선 병장기가 부딪히는 소리와 온갖 비명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왔다.
"3분이라..."
얼마 남지 않은 SP까지 소진한다면 그보다 좀 더 투명화를 유지할 수 있다. 하지만 시클론을 쓸 생각이니 그냥 3분내에 여기서 벗어나는걸 목표로 해야겠군. 문의 손잡이를 벌컥 열어제끼며 동시에 투명화를 걸었다. 스르륵. 진석은 자신의 몸이 반투명해지는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타인이 보기엔 분명 완전한 투명으로 전혀 보여지지 않을터. 시클론을 걸고 수백명이 얽혀 싸우는 거리 한복판으로 빠르게 몸을 날렸다.
'그러고보니... 다른 녀석들은 잘 하고 있으려나 모르겠네.'
론소가 알려주길, 사실 대지의 눈은 병으로 몸져 누운 아밀의 방에 있다고 했다. 대지의 눈을 자신만 아는곳에 숨겨두었다는것은 그저 론소의 거짓말이었다.
'태연하게 자신과 조직 전부의 목숨을 걸고 거짓말을 하다니. 대단한 양반이라니까.'
진석은 그렇게 생각하며 바노르의 안내를 받아 그와 함께 아밀의 집 안으로 들어섰다. 그냥 주택가 어디에나 있을법한 아담하고 평범한 단층 단독주택이었다. 내부역시도 별다를것 없는 일반적인 가정집이었다. 딱히 도적들의 거처라는 느낌같은건 없었다. 바노르의 뒤를 따라 안쪽의 한 방으로 들어서자, 침대에 누운 삐쩍 마른 남자와 그 옆의 의자에 앉아 있는 라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 바노르 아저씨."
"나도 왔어."
바노르의 뒤에서 쏙 고개를 내미는 진석. 라나는 움찔하더니 정말 마지못한다는 태도로 쭈뼛거리며 대답했다.
"네... 와, 왔네요."
그때 침대에 누워있던 피골이 상접한 남자에게서 기어들어가는 것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손님... 인가."
"네. 이거 밤중에 실례가 많습니다. 러셀 헤이든이라고 합니다. 그쪽은 론소씨의 형 아밀씨 맞으시죠? 저는 그쪽 협탁위에 있는 대지의 눈의 정당한 주인입니다."
"아... 그렇습니까..."
그리고 잠시간의 침묵. 뭔가를 생각하던 아밀은 라나와 바노르를 바라보며 말했다.
"바노르... 라나를 데리고 나가있어주게..."
"...알겠습니다. 자, 라나?"
"그, 그치만!"
뭔가 말하고 싶어하는 라나였지만 결국 바노르의 손에 붙들려 방 밖으로 끌려나갔다. 방 안에 단 둘이 남겨진 진석과 아밀. 진석은 침대 옆에 놓여있던 의자에 털썩 걸터앉으며 말했다.
"초면에 이런말은 예의에 어긋나겠지만... 솔직히 오래 살긴 힘드실 것 같군요."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저 약의 힘으로 간신히 버티고 있을 뿐..."
아밀은 말하는것도 힘든지 한참이나 숨을 고르고나서야 말을 이었다.
"내가 죽는건... 아무 상관없지만... 라나가 슬퍼할 걸 생각하니... 조금이라도 더 버텨야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그나저나 딸의 고집으로 대지의 눈을 훔쳐내서... 그쪽에겐 정말 미안하게 됐습니다..."
진석을 지긋이 바라보며 사과해오는 아밀. 그 모습에 진석은 사실 이 아밀이란 남자는 도적질이나 할 사람은 아니겠다고 느꼈다. 하지만 그런것, 아무래도 좋은 이야기다. 다 죽어가는 양반의 신세타령을 들어주려고 온건 아니니까. 진석은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며 아밀에게 대답했다.
"뭐 됐습니다. 빙빙 돌았지만, 어쨌거나 찾게 됐으니까. 그럼 바로 가져가도?"
"그렇게 하십시오..."
아밀의 허락을 받고, 진석은 침대 옆 협탁위에 올려져있던 대지의 눈에 손을 뻗어 집어들고 자세히 살펴보았다. 어른 주먹만한 크기의 완전한 원형 보옥. 호박 보석처럼 전체적으로 누르스름한 빛깔을 띄고 있었는데, 그 한 가운데 안쪽에선 골프공만한 크기의 검은 무언가의 기운이 미미하게 움직이거나 이따금 소용돌이 치고 있었다.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자니 괜시리 그 안에 빨려들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진석은 아이템의 자세한 설명을 확인해 봤다.
- 대지의 눈
설명 : 사람의 욕망을 바라본다는 심연의 보옥. 소유자의 남은 수명을 모조리 흡수하는 대신, 그 남은 수명에 상응하는 소원을 이루어준다. 자신의 남은 생명을 희생해서라도 반드시 소원을 이루고 싶은 자만이 사용할 수 있다. 단, NPC 전용으로 플레이어는 사용 불가하다.
특징 : [소원 기능 / 사용제한 - 플레이어 사용 불가]
"...어?"
이게 소원을 들어준다고? 진짜로?
거리엔 부상자와 시체가 넘쳐났다. 처음엔 삼십뿐이던 경비대도 상황이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가자 재빨리 온 도시에서 이백명 이상이 증원되어 싸움을 벌이는 세 조직 연합의 일원들을 몰아부치기 시작했고, 반대쪽에서도 갑자기 삼백에 가까운 되는 근위대가 나타나 경비대와 더불어 그들을 양면에서 포위한채 사정없이 도륙을 내기 시작했다. 게다가 이 주변 몇블럭은 아침부터 이들이 일반인을 다 쫓아내고 거리를 싹 비워놨으니 무고한 시민이 휘말릴 걱정도 없었다. 근위대와 경비대가 아닌 다른자들은 전부 폭력조직의 일원이었다. 손속이나 자비를 둘 필요따위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혼란에 빠져 저희들끼리 싸우던 세 조직 연합의 조직원들은 그야말로 일방적으로 학살당할 따름이었다.
그들의 수는 총 육백에 달했지만, 이미 세 패로 나뉘어 한참이나 서로를 죽이며 싸웠기에 양면에서 협공하는 경비대와 근위대에게 협력해서 저항한다는 생각따윈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근위대와 경비대는 양쪽을 합쳐 오백이 넘었는데, 이들은 이백도 안되는 숫자가 셋으로 나뉜데다가 사방이 다 적인 상황었으니 수습이 안되는건 당연했다. 그나마 일부는 포위가 비교적 약한 경비대쪽 방향으로 필사적인 돌파를 하려 했지만 경비대도 허수아비는 아닌지라,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증원되어 도망치려는 자들을 철저히 막아내고 있었다.
'투명화에, 시클론과 라파가를 병행해서 썼더니 뭐 빠져나오는건 일도 아니군. 막아서는 상대도 없고 라파가의 2단 대쉬면 2층 건물까지도 뛰어오를 수 있는데 못 빠져나오는게 더 이상하지.'
진석은 정말 눈깜짝할 사이에 전쟁터나 나름없이 변한 그곳을 빠져나와, 알 유세피나의 저택으로 향했다. 지금 나뉘어 움직이는 패는 총 넷.
'우선 첫번째는 나. 이쪽의 상황은 예상대로 잘 되었고, 경비대와 근위대가 양면을 포위했으니 세 조직 연합의 잔당 소탕도 별로 어렵지 않을터.'
그리고 두번째는 수도 시라즈의 이웃 도시 테베이로 향한 근위대였다. 현재 테베이의 주인은 국왕 알 파지드의 형 알 사아드 대군으로, 르마쿠르 자매를 선두에 붙여 조금전 오백의 근위대가 파견된 것이다. 르마쿠르 자매에게도 임시로 근위대를 이끄는 장교이자 칙명을 전달하는 사자의 역할을 맡겼다. 칙명의 내용은 알 사아드가 국왕의 암살을 사주했고 확실한 증거가 나왔으니 이에 체포에 응하거나 불복할 시 즉각 처결하라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왕이 암살당한 상황에서 칙명이라니? 누가 칙명을 내린단 말인가?
'물론 그야 당연히 알 유세피나의 이름으로 보낸 칙명이지. 낄낄. 테베이에는 아무리 빨라도 내일 오전에나 닿을터. 그때쯤이면 왕궁은 이쪽이 장악했을테니, 틀린 말은 아니게 되거든.'
세번째는 론소와 휘하의 사카르였다. 론소는 이날 발생할 대규모 소요사태와 국왕의 서거 및 왕위찬탈이라는 정보를 알고 있으니 상인 조합에 이 사실을 일부 흘려 그들에게 시세 차익을 독점할 수 있게 해줌과 동시에 은근히 알 유세프에 대한 지지를 이끌어내는 공작을 했다. 알 유세프가 국왕이 된다면 상인들에 대해 세금관련 및 우대 정책을 해줄거라는 식의 이야기를 흘린것이다.
애당초 무역의 거점으로 부를 쌓아올린 아라파다. 단합된 상인들의 힘은 결코 얕볼 수 있는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사카르의 단원들은 바노르를 선두로 비협조적일 대상이나 정적들에 대한 암살을 시행했다. 어차피 도심의 이목과 경비대는 전부 하디카쪽에 쏠려있는 일시적 치안 공백의 상황. 이러한 혼란이야말로 암살을 저지르기엔 최적의 상황이었다. 기존의 국왕을 지지하거나, 알 유세피나가 집권했을때 반대쪽에 설만한 유력자들을 최대한 암살하며 바삐 움직였다.
'수는 적지만 그래도 십수년 이상 치열한 실전을 통해 연마된 단원들이니까. 어줍잖은 호위들론 이들을 전혀 막을 수 없겠지.'
마지막 네번째는 국왕을 유인해 동문 밖으로 끌어낸 나지르였다. 세 조직 연합의 회합 장소에서 사태가 발생하자마자 나지르는 왕궁으로 입궐해, 국왕을 만났다. 그리고 그에게 거짓 상황을 전달했다.
'알 유세피나가 자신의 만류도 거부하고 하디카로 구경을 나갔다가, 그만 폭도들과의 싸움에 휘말려 납치되었다는 것. 알 유세피나를 납치한 폭도들은 동문 밖으로 달아났기에 긴급한 도움이 필요하다고 알린거지.'
사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말도 안되는 이야기다. 알 유세피나가 나지르의 만류를 거부하고 하디카로 나갔다는 것까진 그렇다고 쳐도, 근위대에게 호위를 받을 그녀가 겨우 폭도에게 납치된단 말인가? 게다가 폭도들이 그녀를 납치해 도시 밖으로 도망친다니. 대체 왜? 앞뒤가 안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나지르의 보고 직후, 하디카에서의 소요 사태에 대한 전갈도 올라와 국왕은 그 말을 믿을 수 밖에 없게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알 유세피나에 대해선 짝사랑을 넘어서 소유욕을 느끼던 알 파지드 국왕이다. 평생토록 곁에 두고 소중히 지켜보려 한 '자신의 여자'가 쓰레기같은 놈들 손에 납치되다니. 알 파지드는 분노했다.
알 파지드는 나지르에게 명해 당장 소집가능한 근위대를 이끌고 예상대로 직접 추적을 개시했다. 애시당초 알 유세피나에 관한 진실은 왕족들과 나지르 같은 극소수의 인원 이외엔 아무도 모르던 사실. 나지르를 알 유세피나의 집사로 둔 이후, 나지르와 같이 근무하던 근위대의 인원들은 죄다 국경으로 전출시켰을 정도로 알 유세피나에 대해선 보안을 유지하려 애써왔었다. 평범한 유괴나 납치였다면 휘하의 무관에게 맡겼을테지만, 상황이 이렇다보니 알 유세피나의 일에 대해선 달리 일을 맡길자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나지르 혼자에게 맡겨둘수만도 없었다. 알 파지드 자신의 손으로 구해내야했다.
'하지만 일천의 근위대 중 소집가능한 것은 고작 일백.'
알 유세프로 가장한 나지르가 삼백은 하디카에, 오백은 거짓 칙명서를 대동해 테베이로 보내버렸다. 일백 가량은 항시 알 유세피나의 저택과 그 부근에 상주하고 있었으니, 당장 가용가능한 병력은 고작 일백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분노로 상황을 냉철히 파악할수 없던 알 파지드는 이상하다는것도 느끼지 못하고 나지르의 인도를 따라 허둥지둥 동문밖으로 빠져나갔다. 자신의 바로 등 뒤에 따라붙은 근위병이 실은 암살자라는 것도 모른채. 그리고 그 암살자는 다름아닌 라나의 아버지, 아밀이었다.
"이럴수가..."
방금전까지 비쩍 마른채 다 죽어가는걸로 보이던 아밀은 쌩쌩히 건강해 보이는 모습으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것은 기적, 그야말로 기적이었다.
'하지만 한 순간의 환상일 뿐이지. 기적은 무슨.'
시간을 되돌려 그보다 조금 전, 진석은 대지의 눈이 진짜로 소원을 들어준다는걸 확인하곤 꽤나 놀라워 했다. 잠시간의 생각 끝에 대지의 눈을 회수해 돌아가려던 마음을 고쳐먹고 아밀에게도 그간의 사정과 자신의 계획을 빠짐없이 일러주었다. 물론 라나와의 일도 정직하게 이야기 해주었다. 마지막으로 대지의 눈이 가진 진짜 힘에 대해 일러주었을때, 흐릿하던 아밀의 눈빛에 한 줄기 힘이 돌아오는 것을 보았다. 아밀은 다 갈라진 입술을 열어 진석에게 말했다.
"이 계획에 따르면... 사카르에서 한 명... 희생할 사람이 필요하다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긴 하지만... 설마 당신."
침대에 누운채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아밀. 아밀은 대지의 눈에 자신의 얼마남지 않은 수명을 걸고, 국왕을 암살하는 일을 맡을 생각이었다.
"어차피 나는... 곧 죽을 몸... 동생을, 그리고 사카르를 위해서라면... 그 일. 제가 하겠습니다..."
"......"
원래 국왕을 암살하는 일은 바노르가 맡기로 했었다. 론소와도 그렇게 이야기 했고, 바노르 역시 흔쾌히 승낙했다. 마지막 일이 한 나라의 국왕의 목을 따는 일이라니. 바노르는 암살자로서 이만한 일거리는 더 없을거라며 허허 웃었다. 하지만 아밀은 기왕 누군가 희생해야 한다면 어차피 목숨이 간당간당한 자신이 하는것이 나을거라 판단한 것이다.
"합리적인 판단이긴 하겠지만... 라나는 괜찮겠습니까?"
"바노르와... 동생이 지금까지 해온것처럼... 잘 돌봐줄것이라 믿습니다... 그리고 그쪽도..."
스윽 고개를 들어 진석을 바라보는 아밀. 방금전까진 다 죽어가는 환자의 눈빛이라곤 믿기지 않을정도의 무언가가 그 안에서 빛나고 있었다. 회광반조. 촛불도 다 타기 직전이 가장 밝다고, 지금 아밀은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수명을 불사를 자리를 찾았다는 사실에 마지막 빛을 발하는 것 같았다.
"가능한... 라나를 잘 부탁합니다. 아직 철부지지만... 근본은 착한 아이입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자. 이 대지의 눈을 쥐고..."
이렇게 하는게 맞는건진 모르겠지만, '남은 생명을 바쳐도 좋겠다는 각오'로 대지의 눈에 소원을 빌라고 일러주었다. 하지만 아밀은 팔 한짝 꼼짝할 기력도 없었기에 진석이 침대 위 한켠에 대지의 눈을 올려두고, 아밀의 손을 들어 대지의 눈 위에 얹어주었다. 그런데 아밀의 팔은 무슨 바싹마른 고목의 가지같은게 정말 깃털만큼이나 가벼웠다.
'세상에. 잘도 이런몸으로 용케 살아있었구만. 이거야말로 육체의 한계를 초월한 의지력이라는건가.'
아밀은 진석이 시킨대로 대지의 눈 위에 손을 얹은채 눈을 감고 한참을 있었다. 그렇게 한 2, 3분쯤 지났을까? 갑자기 대지의 눈과 아밀의 몸에서 황금색의 은은한 빛이 뿜어지는게 아닌가?
"허..."
놀랍게도 아밀의 몸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거죽만 남아 있던 비쩍마른 몸에 살과 근육이 차오르고 핏기 없이 희던 얼굴과 입술엔 건강한 혈색이 돌았다. 불과 수십초만에 아밀은 빠르게 정상적인 모습으로 돌아왔고 황금색의 빛도 서서히 사라져갔다. 눈을 뜬 아밀이 한 첫번째 말은 의외의 것이었다.
"이걸로... 나는 앞으로 딱 이틀 더 살 수 있겠군요."
"네?"
침대에서 스윽 몸을 일으키는 아밀. 그 모습은 방금전까지 죽어가던 병자라곤 믿어지지 않을만큼 멀쩡했다. 아밀은 손에 대지의 눈을 쥐고 그것을 잠시 들여다보다가 진석에게 내밀었다.
"...이 대지의 눈. 알려준대로 남은 수명을 걸어도 좋다고 생각하며 소원을 빌었더니 어느 순간 내 의식만이 어딘지 모를 어두운 공간으로 빨려들어가더군요. 그리고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내 남은 수명을 알려주며 소원을 말하라고 하던데..."
잠시 말을 끊고 쓴웃음을 짓는 아밀.
"내 수명은 앞으로 일주일 남았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나는 앞으로 딱 이틀만 건강한 모습으로 살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습니다. 과연, 소원은 바란대로 이루어 졌군요."
"......"
"거사는 모레라고 했죠? 그럼 내일 하루는... 내일 하루만큼은 라나와 단 둘이 보내야겠습니다. 이게 내가 그 아이와 함께 할 수 있는 마지막 시간이니까. 소중히... 정말 소중히 해야겠죠."
그렇게 말하며 애써 미소짓는 아밀은, 자식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리플들은 하나하나 빠짐없이 다 보고 있습니다. 부족한 글임은 늘 자각하고 있지만서도.. 으으. 변명은 하지 않겠습니다. 전부 제 역량 부족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이번주는 개인사정 때문에 이래저래 허덕거리면서 쓰다보니 글의 밀도나 내용전개도 느슨하게 흘러간것 같습니다. 특히 7장은 시작부터 여러모로 무리수를 뒀더니 이게 참.. 그래도 오늘 부분은 나름 클라이맥스라고 생각해 짧게 짧게 끊어 시간의 전후를 교차하는 흐름으로 이야기를 써봤습니다만.. 써놓고 보니 영 별로군요. OTL
일일 연재를 멈추고, 얼마간이라도 쉬면서 비축분을 모은 다음 검수한 뒤에 올려야 하나 생각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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