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7. -- > * 85화 *
결과부터 말하자면, 일은 막힘없이 계획대로 다 잘 풀렸다. 하룻밤사이 급조해서 짜낸것치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 잘 진행됐다. 우선 세 조직연합. 그들은 대부분이 자멸하거나 사살당했으며 투항한 생존자는 약 백오십 가량. 하지만 머지않아 전원 처형될 예정이었다. 그리고 놈들이 부정하게 축적해온 막대한 재산은 몽땅 압류되어 알 유세피나의 것이 되었다.
그리고 알 파지드 국왕은 암살자를 자원한 아밀의 손에 죽었다. 아밀은 국왕을 등뒤에서 찔러 죽인 후 계획대로 알 사아드의 이름을 열렬히 외치다, 나지르의 손에 목숨이 끊어졌다. 그나마 쓸데없는 고통을 주지 않기 위해 심장을 찔러 일격사 시켰다고 했다. 이것만큼은 계획에 있어 불가피한 희생이었다. 알 파지드 국왕이 죽은 후 나지르는 남은 근위대를 이끌고 알 유세피나의 저택으로 향했다. 거기서 진석, 알 유세피나, 그리고 근위대 잔여 병력 일백과 합류한 후 왕궁으로 들이닥쳐 국왕의 서거 소식을 공표하고 그 배후를 알 사아드 대군이라 지목했으며 왕과 동행했던 백명이나 되는 근위대 병력이 고스란히 그 증인이 되었다. 동시에 이백의 근위대를 이용해 왕궁을 무력으로 장악했다. 물론 뜬금없는 소식에 반발하는 대신이나 귀족들도 있었고, 근위대에 저항하는 왕성내의 잔여 병력도 일부 있었으나 그들은 진석이 손속을 두지 않고 반역자와 한패라 지목하며 남김없이 쓸어버렸다. 완전히 정지해버린 왕궁의 모든 권한은 알 유세피나와 나지르가 쥐었다.
알 유세피나는 왕궁내에 남아있던 왕족이나 귀족들, 대신들을 한데 모으고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 물론 신체의 비밀을 밝힌것은 아니었다. 조금 전 도시 밖에서 암살당한 전대의 국왕 알 파지드는 바로 자신 알 유세피나를 차기 왕위 계승자라 여겨왔기에 지금까지 알 유세프라는 가상의 인물을 만들고 지켜온거라며 왕위 승계에 대한 정당한 권한을 주장한 것이다. 물론 무력으로 완전히 제압당한 왕궁내에서 이 주장에 반박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왕권은 그렇게 얼렁뚱땅, 그야말로 삽시간에 알 유세피나의 손에 넘어가 버렸다. 다들 목에 칼을 들이대진 상황이고 그나마 저항하는 자들은 진석이 봐주는 것 없이 바로바로 참살해버렸으니 두 눈 벌겋게 뜨고 당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물론 사전에 접촉해두었던, 국왕 알 파지드와는 반대쪽 세력이었던 사림파에 속한 귀족들이나 대신들은 알 유세피나의 주장에 가세하여 그녀를 지지하며 힘을 더했다. 이 승계작업에 방해되는 알 파지드의 부인이나 가족들은 이후 모조리 유폐해버렸다. 알 유세피나의 가족들에게도 역시 병력을 보내 쓸데없는 짓을 하지 못하도록 저택에 연금조치를 취하도록 했다.
하루만에 왕이 암살당하고 지금까지 베일에 감추어져있던 새로운 왕족 알 유세피나가 등장해 여왕으로 등극했으나 시민들의 반응은 의외로 담담했다. 그들의 관심은 하디카에서 일어난 대규모 소요 사태에 쏠려있었고, 정치에 관심이 있을만한 상인들이나 유력자들은 론소의 공작으로 일의 전말에 대해 대강이나마 눈치채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론소의 입김을 받은 그들은 자연스레 새로운 여왕을 지지했고, 왕궁내에서의 일을 잘 모르는 시민들 사이에서도 암살의 배후라 알려진 알 사아드를 비난하는 여론은 있었을지언정 새 여왕에 대한 별다른 반발은 일어나지 않았다. 게다가 세 조직 연합을 쓸어낸건 백성들을 위한 알 유세피나 여왕의 공작이었다는 설도 은연중에 떠돌아, 어둠속에 숨어 서민들의 고혈을 빨던 조직들에게 반감을 품던 이들은 새로운 여왕에게 마냥 지지를 표했다. 물론 이것도 론소가 손을 쓴 공작 중 일부였다.
알 사아드 대군은 처형되었다. 르마쿠르 자매는 진석에게 명령 받은대로 테베이에 있는 알 사아드의 저택으로 다짜고짜 처들어가, 번개불에 콩 볶아먹듯 그가 제대로 변명할 기회도 주지않고 반역자라며 목을 베었다. 그리고 근위대를 동원해 알 사아드의 친족들과 측근들을 싸그리 몰살하고 지시대로 사림파에 속한 관리들을 도시의 다음 책임자로 임명했다. 그녀들의 뒤를 따른 근위대들은 대군마저 참살해버리는 그 극단적인 태도에 경악하면서도 결국 충실히 명령을 따랐다. 알 사아드가 동생이면서도 자신을 제끼고 왕이 된 알 파지드에게 원한을 품고 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었던데다가, 일의 전말이 실제 어떻게 되었건간에 일단 반역자로 지목된 알 사아드의 편을 들어줄자는 없었던 것이다.
그 외에 유력한 왕위 계승권자로 변경 지역에 머무르고 있는 알 파지드의 동생, 왕제 알 후드라가 남아 있었지만 확인 해 본 결과 그는 이전부터 왕권다툼에는 관심도 없었으며 변경에서 보내는 현재의 유유자적한 생활에 만족하는 것으로 보여 일단은 처리를 보류해두기로 했다. 물론 감시를 붙여 불온한 동향을 보이는지의 여부는 항시 확인해두기로 했다.
하루만에 왕위를 찬탈하고, 한동안은 반발세력을 억누르느라 정신이 없었다. 특히 사병을 보유한 반대파의 귀족들이 말썽이라 진석은 근위대를 이끌고 그야말로 미친듯이 뛰어다녔다. 한 일주일새 자신의 손으로 직접 죽인 사병들만해도 수백은 가볍게 넘어갔다. 손에 피가 마를틈이 없었지만 이미 판을 벌인 이상 거칠게 없었다. 왕도 죽였는데 이제와서 귀족들 나부랭이 쯤이야? 그야말로 철저히 힘으로 찍어눌렀다. 대동한 근위대를 동원할 필요도 없는 압도적인 무력. 귀족이고 뭐고 불온한 행동을 보인자들은 정말 개잡듯 패죽였고, 본보기 삼아 일부러 반 병신으로 만든채 살려둔 자들도 수두룩 했다. 정 안되겠다 싶은 자들은 그야말로 삼족을 멸하고 재산과 귀족의 직위도 팍팍 몰수해 버렸다. 반대로 이쪽을 지지하는 세력들과 사림파엔 힘을 실어주었다. 세 조직 연합과 반대하는 귀족들에게서 몰수한 막대한 돈과 재산을 아낌없이 풀고 새로운 우대 정책들을 공표했다. 그렇게 정신없이 열흘쯤 지나고 나니 수도의 상황은 서서히 안정화되었다.
나지르는 지금까지의 공을 인정해 재상으로 임명하고, 그가 자신의 연인과 함께 할 수 있도록 알 유세피나가 지금껏 기거하던 저택을 그에게 넘겨주었다. 근위대는 친위대로 이름을 바꾸고 왕족 전체가 아닌 오로지 알 유세피나 여왕만을 위한 전속 호위군으로 바꾸었다. 사병을 보유하고 있던 반대측의 귀족들은 진석의 실력행사로 모조리 몰락했고, 일천의 정예군이 왕성을 호위하는 한 이제 수도내에서 그녀를 해할 수 있는 물리력따윈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론소에겐 공석이 된 재무차관의 자리를 내어주고 여왕의 조언자인 상담역을 맡겼다. 더불어 왕의 암살 및 새 여왕의 등극에 관한 정보 일부를 사전에 상인 조합에 흘려주어 그들이 손해를 보지 않고 되려 큰 시세 차익을 독점케 해준 공으로 상인 조합의 새 조합장으로도 추대되었다. 상인 조합이라는 거대한 이익 집단 전체가 아주 간단히 친 여왕 세력으로 기운것이다. 휘하의 사카르 9인은 바노르를 중심으로 지금까지 세 조직 연합이 차지하고 있던 하디카의 이권들을 모조리 수습하여 도적길드를 재건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이들은 하디카의 뒷면을 지배하는 것 뿐만 아니라, 여왕에게 반기를 드는 세력에 대한 정보도 차차 모아나갈 예정이었다. 새로운 여왕에게 저항하는 이들이 치를 댓가는 당연히 핏값뿐이었다. 알 유세피나가 지배하는 새로운 아라파의 체제는 이렇게 공고히 굳어갔다.
요 열흘가량 아라파의 수도 시라즈엔 그야말로 피바람이 불었지만, 일반 시민들의 삶과는 관련이 없는 일이었기에 거리의 모습은 여느때와 변함없었다. 태평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정말 그간 무슨 일이 있었던건가 의문이 들 정도였다. 하늘은 여전히 푸르며 오후의 햇살 역시 쨍쨍하기만 했다. 하지만 진석은 양 옆에 달라붙은 르마쿠르 자매때문에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니들은 덥지도 않냐. 좀 떨어져라."
"헤헤- 싫은걸. 이제 겨우 그 아줌마를 떼놓고 셋만 오붓하게 된걸."
"그리고 어젯밤... 너무 좋았어. 역시 우리 둘을 동시에 상대로 쓰러트릴 수 있는건 온 대륙을 통틀어도 러셀뿐일거야."
그간 제대로 쉴틈도 없이 알 유세피나를 새로운 여왕으로 추대하는 작업을 해오다가, 겨우 마무리가 나자 어젯밤 르마쿠르 자매는 보상을 외치며 진석의 방으로 들이닥친 것이다. 하긴 이러니 저러니해도 한동안 시키는대로 쭉 따라준것은 사실이므로 진석은 페레나의 가게에서 이후 두번째로 그녀들과 잠자리를 했다.
'정말 쭉쭉 빨아먹혔지.'
남자의 자존심이나 근성이라던가 여러가지로 겨우겨우 버텨내긴 했지만, 그간 러셀을 생각하며 금욕을 해온 르마쿠르 자매는 정말 대단했다. 탐욕스럽다 못해 아주 게걸스럽게 달려들어 진석의 몸위에서 방아를 찧어대는데, 좀체 만족할줄도 모르고 계속 엉겨붙는게 나중엔 하다하다 그녀들이 무서워질 정도였다. 진석은 사람이 섹스를 하다 공포를 느낄수도 있는거구나 생각했다. 어휴, 이 무슨 40대 가장이 의무방어전 치르는것 같은 소리냐. 절레절레 고개를 젓는 진석.
'이것들하고 같이 다니다간 제명에 못 살것같아.'
양팔에 달라붙은채 하트를 뿅뿅 날려대며 엉겨붙는 르마쿠르 자매를 번갈아 바라보며 한 숨을 내쉬는 진석. 지금 셋은 잠시 왕성에서 빠져나와 라나의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론소에게 라나의 상태가 영 좋지 못하다는 말을 듣고 여유가 생긴 김에 잠시 안부라도 확인해 볼 겸 가는길이었다.
"지금이야 그렇다 쳐도, 가서는 좀 떨어져 있어. 상대는 아버지가 죽은 어린애니까."
"어차피 곧 죽을 사람이었다면서? 이만하면 충분히 가치있게 죽은게 아닌가 싶은데. 되려 자랑스러워 해야 하는거 아냐?"
아무렇지 않게 대꾸하는 지젤. 역시 전사의 일족 델 그로도다보니 인간과는 생각하는 관점이 좀 다른것 같았다. 진석은 그녀에게 대답했다.
"그건 네 생각이고. 이건 경우가 다르지. 그리고 가족을 잃은 사람 마음이라는게 그렇게 금세 수습이 될것같아?"
진석의 말을 듣더니 으음 하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아네트.
"으음. 만약 지젤 언니가 죽으면- ...러셀은 내가 독차지 하는거네? 히힛."
그 말을 듣곤 진석과의 팔짱을 푼채 아네트에게 다가가 엉덩이에 힘찬 발차기를 먹이는 지젤. 평소같으면 한 번 걷어차고 말았을텐데 연달아 뻥뻥 계속 걷어차는걸 보니 다분히 감정히 실려있었다.
"요게 터진 입이라고! 언니한테! 그게 할 소리야?"
"마, 말도 못하냐 뭐! 아퍼엇! 그만 걷어차!"
"으이그! 차라리 내가 널 죽이고 러셀을 독점하고 말지!"
길거리 한복판에서 투닥거리기 시작하는 지젤과 아네트. 진석은 그녀들을 내버려두고 그냥 갈길을 갔다. 진석과 한참 떨어지고 나서야 정신을 차린 르마쿠르 자매는 후다닥 뛰어와 등뒤에서 졸졸 따라왔다.
"가련한 내가 언니의 무자비한 폭력에 시달리고 있는데 도와주지도 않고 그냥 가버리다니... 너무해, 훌쩍."
아네트가 흑흑거리며 거짓으로 우는 시늉을 하자 지젤은 혀를 쯧쯧차며 말했다.
"러셀이 같이 거들어서 때리지 않은걸 다행으로 생각하지 그래?"
"아냐! 러셀은 분명 언니보다 나를 더 좋아한단 말이야! 그 증거로 어젯밤에도 내가 언니보다 두 번이나 더 했지롱."
그... 그딴걸 일일이 세고 있었냐? 진석은 질렸다는 표정을 지으며 둘을 돌아보며 말했다.
"밖에선 적당히 해라 이 바보 자매."
"우왓, 알 유세피나의 폭언이 러셀한테 옮았어."
딱 잘라내듯 말하는 진석의 발언에 움찔하는 지젤. 하지만 아네트는 고양이같은 미소를 샐쭉 띄우며 말했다.
"흐흥- 난 그래도 좋은걸. 어젯밤에도 같이 정을 통하던 상대에게 거침없이 냉대하는 나쁜 남자라니. 나쁜 남자- 아 왠지 울림 좋다. 저게 사실은 부끄러워서 그러는거라구! 상대에게 좋아하는걸 들키지 않으려고 일부러 차갑게 구는거랄까? 틀림없이 속 마음은 따스할걸."
"그... 그런건가?"
대단하다. 망상도 이만하면 병이다. 할 말을 잃은 진석의 양 팔에 아까처럼 다시 달라붙는 르마쿠르 자매. 이래서야 또 원점이다.
"아 떨어져 좀. 거의 다 왔어."
"뭐 어때. 겨우 팔짱인걸."
에라 모르겠다 맘대로 해라. 진석은 양 옆에 지젤과 아네트를 매단채로 라나의 집 앞마당에 들어섰다. 마당 한켠엔 만들어진지 얼마 안된 간소한 무덤과 묘비가 세워져 있었다. 풍장이나 화장을 주로 하는 아라파에서 무덤이란 꽤나 드문 풍경이었다. 그리고 그 앞에 처량한 자세로 쪼그리고 앉아있는 라나의 작은 등이 보였다. 그렇지 않아도 왜소한 체구가 더욱 작아 보였다. 진석은 두 자매를 떼어두고 혼자 라나의 뒤로 다가가 말을 걸었다.
"어이, 꼬맹아."
"......"
양무릎을 가슴앞에 모은 자세로 앉은채 미동조차 없는 라나. 한참을 기다려도 아무 반응이 없길래 진석은 그녀의 앞으로 자리를 옮겨 자세를 낮추고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어휴."
엉망진창이었다. 눈동자는 멍하니 비어있었고 얼마나 울었는지 퉁퉁 부은 눈가엔 말라붙은 눈물자국이 가득했다. 게다가 그간 제대로 끼니도 챙겨먹지 않은건지 근 열흘 사이에 쪽 마른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진석은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얌마, 이제 정신 차려야지. 밥도 안 먹었지?"
"......"
그제서야 겨우 고개를 들어 진석을 바라보는 라나. 하지만 만사 다 귀찮다는 표정이었다.
"됐어... 상관없잖아. 내버려둬..."
그러더니 다시 고개를 숙이고 가만히 있는데, 이래서야 딸내미도 지 아빠 뒤를 따라갈 판이다. 진석은 뒤에 서있던 지젤과 아네트를 바라보며 말했다.
"좀 도와줘. 얘 좀 씻기고 뭐 좀 먹여야겠다."
지젤과 아네트가 고개를 끄덕이며 이쪽으로 다가오려는 찰나 라나는 앙칼지게 소리를 쳤다.
"내버려두라니깐! 됐으니깐 가! 저리 가버려!"
'아니 이 녀석이...'
고작 열 네살. 뭐 컸다면 나름 컸다고 할 수도 있는 나이지만 라나는 엄마도 없이 홀아버지 손에 자라온 아이였다. 게다가 평범한 집의 아이들과는 달리 또래의 친구도 없이 험악한 전직 암살자와 도적놈들 틈바구니에서 커온터. 그런 아이가 유일한 친가족이었던 아버지를 잃은것이다. 자신의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스스로의 안위보단 혼자 남겨질 딸을 걱정하던 자상한 아밀이었다. 그런 상냥한 아버지가 대지의 눈의 힘을 빌어 이제 겨우 되살아났다고 생각했는데... 같이 할 수 있었던건 겨우 하루뿐이었다. 단 하루뿐인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라나를 홀로 남겨둔채 거사는 진행되었다. 앞으로 다시 함께 살아갈 수 있을거라 생각했던 아버지가 다음날 뜬금없이 시체가 되어 돌아왔으니 라나가 받은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하지만 그래서 뭐? 내가 이제와서 상냥하게 이 꼬맹이의 상처나 어루만져줄 필요가 있나? 내가 아동복지사라도 되는줄알아?'
진석은 라나가 상처를 받았다는걸 알면서도 그것을 개의치 않았다. 다시 한 번 르마쿠르 자매에게 말했다.
"뭐해? 일단 데리고 들어가서 씻겨."
"필요없어! 하지말라니깐! 나한테 상관하지 말고 가!"
진석은 고래고래 악을 쓰는 라나의 멱살을 움켜쥐고 억지로 붙잡아 세우며 그녀를 노려보았다.
"야 꼬맹아. 사람 짜증나게 만들지 말고 잘 들어. 어차피 네 아버지의 수명은 앞으로 일주일 뿐이었어. 네 아버지는 일주일 동안 병석에 누워 병에 신음하다 죽기보단, 너와 하루라도 가치있는 시간을 보내고 죽는걸 선택한거야."
"뭐... 뭐라고?"
"그러니까, 대지의 눈은 애시당초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는 만능의 도구가 아니었다고! 사용자의 남은 수명을 모두 빨아먹는 대신 그에 상응하는 댓가를 지불할뿐인 흉악한 물건이야! 네 아버지는 남은 일주일분의 수명을 지불하더라도, 너와 단 하루라도 제대로 된 행복한 추억을 남기길 원했어. 그런데 너는 지금 이게 대체 꼴이 뭐냐?"
"나, 나는..."
"그렇다고 네 곁에 진짜 아무도 남아있지 않다고 생각해? 론소 삼촌이나 바노르 영감은? 그 사람들은 널 아끼지 않거나 사랑해 주지 않든? 네 아버지 아밀은 자신이 없어진다 해도 그들이 널 잘 돌봐줄거라 기대했어. 심지어 나에게도 널 잘 부탁한다고 당부하더라! 그러니 똑바로 서. 이렇게 궁상이나 떤다고 죽은 사람이 돌아오는건 아니야."
"으... 으흑... 하지만..."
진석이 윽박지르며 쏟아내는 말을 듣다 뚝뚝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는 라나. 진석은 엉엉 울기시작하는 그녀를 르마쿠르 자매에게 넘겨주었다. 두 자매는 라나를 데리고 집안으로 들어갔고, 마당에 혼자 남은 진석은 아밀의 무덤을 내려다 보며 중얼거렸다.
"하아, 게임주제에 사람 피곤하게 만들지 말라고. 이런 일은... 정말 싫어."
르마쿠르 자매가 라나를 씻기는 동안 진석은 근처의 식당에서 여러가지 음식을 사다 차려주었다. 두 자매가 라나를 씻기면서 무슨말을 했는진 몰라도 라나는 꽤 침착하진게 아까와는 달리 진정 되어있었고 진석이 차려놓은 식사도 군말 없이 먹기 시작했다. 아네트는 라나가 식사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진석을 바라보며 지젤과 속닥거렸다.
"내가 그랬지? 속 마음은 따스하다고."
시끄러! 안 따스해! 낯 간지러운 소리 하지마! 하지만 지젤도 고개를 끄덕이며 라나를 향해 말했다.
"그래그래. 아까 욕실에서 몇 번이나 얘기한 내용이지만 러셀은 큰 가슴을 좋아하거든. 러셀의 마음에 들고 싶으면 영양이 있는걸 잔뜩 먹고 어서 커져야 할걸?"
어이, 니네 욕실에서 애한테 뭔 소릴 한거냐? 진석이 르마쿠르 자매를 노려보자 둘은 태연한 태도로 중얼거렸다.
"왜? 그냥 우린 우는 아이를 진정시켜주려고 어젯밤에 있었던 얘기를 조금 해줬을 뿐인데..."
"응응- 원래 야한 얘기는 죽어가던 사람도 벌떡 일으키는 법이거든. 게다가 바로 어젯밤의 생생하고도 따끈따끈한 체험이니까 히힛, 뭐 어린애에겐 자극이 조금 강했으려나?"
도대체 애 상대로 무슨 이야기를 한거냐? 어처구니가 없어진 진석이 라나를 바라보자 라나는 왠지 모르게 움찔하더니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숙인채 입안에 꾸역꾸역 음식을 집어넣었다.
"아니 저기... 이 멍청이들이 뭐라고 했는진 모르겠지만 개짖는 소리려니 하고 잊어버려."
"...그, 그치만."
왠지 주저주저하는 라나. 진석은 그녀에게 대답을 채근했다.
"그치만 뭐? 왜?"
"아, 아빠가... 러... 러셀씨한테... 나를 부탁한다고 말했다면서... 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진석의 눈치를 보는 라나. 아니아니아니, 그 부탁이란건... 그런 종류의 부탁이 아니잖냐? 라나는 방금 르마쿠르 자매가 그녀를 씻기며 옆에서 불어넣은 소리때문에 묘하게 엉뚱한 착각을 하고 있는듯 했다. 정색하며 손을 휘휘 내젓는 진석.
"으으 정말. 뭐 착각은 네 자유지만 필요없어. 어차피 난 곧 아라파를 떠날거니까, 너는 나 말고 네 맘에 드는 남자 적당히 골라잡아 잘 먹고 잘 살면 돼."
"어... 떠, 떠날거에요?"
테이블에 코를 박을듯 숙이고 있던 얼굴을 휙 치켜들며 놀란 표정을 짓는 라나. 진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 목적은 어차피 대지의 눈이였는데 되찾았으니 이제 여긴 볼 일 없어. 그나저나 네 삼촌 론소가 엄연한 고관의 자리에 올랐으니 이제 너도 좋은 집안 아가씨라고? 쓸데없이 나이프나 가지고 놀지 말고 몸가짐이나 바르게 하는 법 좀 배워둬. 아직 이른 이야기긴 하다만 바노르 영감 죽기 전에 품에 손주 한 번 안겨줘야 할거 아냐."
"소, 손주라니."
입안에 든 음식을 꿀떡 삼켜넘기며 한층 얼굴을 붉히는 라나. 진석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지젤과 아네트에게 손짓을 했다.
"자 그럼 가자. 그리고 꼬맹이 너는 아까처럼 아빠 무덤앞에서 궁상떨지 말고 끼니 잘 챙겨먹고... 앞으로는 뭔가 하고 싶은 일이라도 찾아봐."
라나는 집을 빠져나가는 진석과 르마쿠르의 뒷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다가 그들이 문을 닫고 나가기 직전 겨우겨우 쥐어짜듯 외쳤다.
"저기! 러셀씨!"
"...응?"
문을 막 닫으려다 멈춰선 진석.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자 테이블에서 일어선 라나가 울상인지 뭔지 모를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며 뭔가 주저주저하다 결심했는지 주먹을 꽉 쥐며 외쳤다.
"가... 가슴! 커지면! 되는거에요?"
뭐, 뭐가?! 뭐가 되는데? 진석은 당황스러웠지만 라나의 기세에 밀려 자기도 모르게 적당히 대답하고 말았다.
"으... 그, 그래."
"...알았어요! 저, 이제 힘낼테니깐! 언젠가는 꼭!"
꼭 뭐? 대체 뭘 힘낸다는거야. 그런 힘 안내도 돼. 아니 제발 내지마. 됐으니까 내지 말아 주세요. 진석은 홍당무처럼 빨개진 얼굴로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라나의 뜨거운 시선을 뒤로 하고 빠르게 문을 닫았다. 그런 진석을 보곤 히죽거리며 조소하는 지젤과 아네트.
"와아- 인기남. 휘익 휙."
"어라. 그럼 이제 쟤도 경쟁상대가 되는건가?"
"에이 언니도, 그럴리가 없잖아. 저런 수직절벽이 커진다는건 물리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깐. 걱정할 필요는 요만큼도 없다구."
"그럴까? 뭐 우리는 가슴이 충분히 커서 다행이다."
아이고 두야. 르마쿠르 자매의 회화를 들으며 이마를 감싸쥐는 진석. 그런 진석의 양팔에 아까처럼 두 자매가 찰싹 달라붙었다.
"헤헷, 어쨌거나 평생 안 놔줄테니깐-"
"그럼. 우린 어디든지 따라갈거야."
으아아아아 싫어어어어.
============================ 작품 후기 ============================
오늘은 일 때문에 바쁠것같아 미리 올립니다. 다들 한 주 힘내시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