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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베라 - 부회의 방랑자-87화 (87/155)

< --   - 8.   -- >         * 87화 *

진석은 이후 닷새간 더 머물며 아라파를 떠날 준비를 했다. 다른 준비는 진즉 마쳤지만 피터슨의 메모를 해독할 학자를 찾는데 시간이 좀 걸렸던 것이다. 일단 왕궁에 머물며 여전히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는 잔여세력을 보이는대로 때려잡아 주고 르마쿠르 자매를 상대하거나, 틈틈히 알 유세피나와 관계하며 보냈다. 그리고 엿새째의 아침. 방에서 쉬고있던 진석에게 시종이 전달해준 그 메모의 해독된 내용은 생각치 못하던 것이었다.

"이건... 던전인가."

메모의 내용은 아라파에서 그리 떨어지지 않은 비더하임이라는 나라의 어느 외진 산지를 가리키고 있었다. 비더하임이 위치한 지역은 아라파에서 북동쪽, 바위와 산야가 가득한 황무지 투성이의 척박한 땅으로 초지도 적고 황량해 얼핏 쓸모없는 땅이라 생각될수도 있지만 실은 그 반대였다. 이 지역의 산악지역엔 온갖 종류의 풍부한 광물들이 널리 분포하고 있었다. 광업쪽의 기술을 좀만 개발하면 이 황무지는 그야말로 노다지였다. 뿐만아니라 노천광도 여기저기 있어 그것만으로도 다른나라와 교역할 충분한 수단이 되었다. 아무튼 메모에 적혀있는 이 산지에는 수많은 몬스터가 서식하고 있어 대단히 위험한 동굴이 하나 있는데, 그 동굴의 가장 깊은 심부에서 어떠어떠한 비보를 찾을 수 있을거라나. 뭐 대충 그런 내용이었다. 그런데 이 어떠어떠하다~는 부분은 글자를 너무 엉망으로 흘려써놔서 제대로 해독을 할 수 없었다는 첨언이 적혀있었다.

"결국 어떤 비보인지 특정은 할 수 없다만... 좌우지간 그 동굴에 비보가 있긴 있다는 이야기네."

그리고 처음 계획한대로 육로를 통해 그란델 왕국의 데오그라즈나 메디니아의 갈론으로 돌아가려면 어차피 비더하임을 지나기도 해야 한다. 진석이 비보를 차지할 생각이 있다면 얼마든지 이곳에 찾아가 볼 수 있었다.

"던전이라."

리베라의 세계엔 방랑자 플레이를 하는 이들의 모험을 위한 던전도 여럿 존재했다. 단순히 동굴같은것만이 아닌, 인위적인 구조물이나 건축물도 당연히 던전에 속했다.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가장 유명한건 마왕을 자칭하는 앰버게스라는 마족이 만든 10층 짜리 지하 미로였는데, 여간한 준비론 1층도 돌파하기 어려울 정도로 상당한 난이도를 자랑한다고 본적 있었다. 대신 10층까지 전부 답파하면 게임의 밸런스를 깰 정도로 강력한 무구나 장비를 보상으로 얻을 수 있다던가. 하지만 쭉 군주와 장수 플레이를 해온 진석은 아직 던전에 도전해본 경험이 한 번도 없었다. 그리고 던전이라는게 어서옵쇼 하고 어디 눈에 쉽게 띄는데 생기는것도 아니고 매게임 마다 찾기 힘든 랜덤한 위치에 생성되었으니 일부러 찾지 않는 이상은 마주칠일이 없기도 했다. 난이도 역시 천차만별로 그냥 단순한 짐승이나 몬스터 몇을 잡으면 끝나는 짧고 간단한 던전도 있는가 하면 앞서 말한 지하 미로처럼 복잡하고 난이도가 높은 던전까지 그 종류도 다양했다.

"그래서 이걸 도전해봐야 하나 말아야 하나."

몬스터가 득실댄다는건 둘째 치더라도, 비보가 있다는게 신경쓰이지만... 무슨 비보인지 모른다는게 걸린다. 기껏 고생고생하면서 클리어했는데 통 쓰잘데 없는게 나오면 얼마나 허탈하겠는가. 쓸데없이 사서 고생하지 말고 천천히 유람이나 하면서 돌아가는게 낫지 않을까?

"는 개뿔! 까짓거 내가 접수해주지. 쓸모가 있고 없고는 일단 손에 넣고 판단하자."

게다가 의도한건 아니지만 알 유세피나에게까지 자신의 아이를 갖게 만든 후의 진석은 미리안과 교단의 일을 돕는것에 대해 조금 회의적이 되어 있었다.

'생각해보면 벌써 나라 두 개가 내 손안에 들어온거나 다름없는데... 내가 뭐가 아쉬워서 세계를 말아먹는 일에 계속 협조를 해야하지? 흠, 아라파가 대륙 남서쪽에 위치해서 그렇지 그란델 근처에 위치했더라면 두 나라의 병력을 한꺼번에 동원해서 교단과 메디니아를 힘으로 압살할수도 있게 된건데.'

헤세스모데우스 교단의 퀘스트는 교단에 협조하여 세상을 멸망시키건, 혹은 그에 반대해서 세상을 구하던 양쪽 어느 방향으로건 클리어 가능했다. 지금까지는 교단에 협력하는 노선으로 움직이고 있었지만 이제 슬슬 뒷통수를 치는것에 대한 욕심도 고개를 든 것이었다.

'하지만 아직도 내가 미리안을 이길 수 있을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단 말이지. 겉보기에야 열살짜리 꼬맹이지만 틀림없이 지금까지 상대한 적들을 다 합쳐놓은것 보다도 강할걸? 설령 아르데나가 괴물의 모습으로 변신해서 날 곁에서 돕는다고 해도 어째 미리안에겐 상대도 안될거라는 느낌이 들어. 이 게임을 오래 해온 플레이어로서의 확실한 감이랄까.'

지나친 과대평가일지 몰라도 상대를 얕잡아보다 당하는것보단 나았다. 이런 생각까지 하는 와중에도 아직까지 교단에 협력한다, 반기를 든다 딱 한쪽을 결정한건 아니었지만... 자신에게 힘이 될만한걸 모아서 나쁠건 없었다.

'이번에 손에 넣은 저 암살자의 망토같은것 말이지.'

가방 옆에 고이 접혀있는 진홍색 망토를 바라보는 진석. 이전 라나를 인질로 붙잡고 바노르에게서 반강제로 뜯어낸 물건이지만 확실히 성능은 훌륭했다. 투명화와 시클론을 동시에 건 진석이라면 근접전에선 정말 당해낼 자가 없을것이 분명했다. 자신과 대련할때 평수를 이루던 드레비안이라도 암살자의 망토를 쓰면 어렵잖게 꺾을 자신이 있었다.

'문제는 하루에 꼴랑 3분짜리 라는거니까...'

저것만으론 부족했다. 전에 생각해둔것처럼 쓸만한 무구를 구하기 위해 테베이에 들러 경매장에 방문해보고 비더하임으로 향하는 경로를 구상했다. 지도창을 연채 이동할 지역에 대해 확인해 보고 있는데 갑자기 밖이 뭔가 소란스러럽다 싶더니 문이 열리며 알 유세피나와 르마쿠르 자매가 방안으로 들이닥쳤다.

"러셀님! 떠나실거라구요?!"

알 유세피나는 다짜고짜 달려들어 진석을 붙잡고 믿을 수 없다는듯 따져물었다.

"그런데?"

"대체 왜... 어째서죠? 뭔가 맘에 들지 않는게 있으신건가요? 마, 말씀만 해주시면 다 고칠테니..."

뒤따라온 르마쿠르 자매는 두세발자국 떨어진곳에 서서 그 모습을 바라보며 자기들끼리 말을 주고 받았다.

"아줌마 필사적이네에-"

"왜 그렇게 당황해? 애시당초 러셀은 대지의 눈이란걸 찾으러 왔을뿐이고, 이제 목적을 이뤘으니 돌아가는건 당연하잖아?"

고개를 돌려 르마쿠르 자매를 노려보는 알 유세피나. 르마쿠르 자매에겐 며칠내로 아라파를 떠날테니 언제든 떠날 수 있도록 준비해두라는 말을 해놨었는데 저 둘이 알 유세피나에게도 그 이야길 흘린 모양이었다. 진석은 흥분한 알 유세피나를 붙잡고 옆의 의자에 앉히며 담담히 설명했다.

"뭐 지젤의 말이 맞아. 처음부터 아라파에 온 목적은 대지의 눈이었고... 목표를 달성했으니 내가 하던 일을 마저 끝내러 가야지."

"그런... 그런거라면 제가 도울테니까요. 아라파의 전력을 다해서라도 무슨일이든 도울테니까 떠난다는 말씀만은..."

울상을 지으며 애원해오는 알 유세피나. 진석은 르마쿠르 자매를 바라보며 눈짓을 했다.

"너희들은 나가있어. 그리고 이야기가 끝나는대로 떠날거니까 준비해서 아래에서 기다려."

"히힛- 알았어. 가자 언니."

아네트는 알 유세피나를 향해 꼴 좋다는 표정을 지으며 지젤과 함께 문을 닫고 방을 빠져나갔고, 진석과 알 유세피나는 둘만 남겨졌다. 의자에서 일어나 허리에 단검과 파우치가 달린 검은 들소 가죽 벨트를 차며 짐을 챙기는 진석. 알 유세피나는 그 모습을 보며 어쩔 줄 몰라했다.

"뭘 그렇게 안달복달해? 내가 지금 떠나고 영영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고 한것도 아닌데."

"그, 그러면...?"

진석은 손을 뻗어 알 유세피나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 주고 조금 상냥한 어조로 대답했다.

"꽤 오래걸리긴 하겠지만... 내가 해야할 일이 끝난다면 언젠간 다시 돌아올테니까.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하지만! 러셀님이 떠난다면 저 역시 모든걸 버리고라도 러셀님과 함께 하고 싶..."

"명령이야. 넌 여왕으로서 이 아라파를 통치해. 자세한건 말해줄 수 없지만 내가 하는 일이라는건 언젠가 이 나라의 힘을 필요로 할지도 모르니까... 그때를 대비해서라도, 날 위해 하는일이라고 생각하고 내정을 다지고 병사를 늘려. 나지르와 론소는 둘 다 유능하고 믿을만한 사람들이지만 그들만으론 부족해. 워낙 단시간내에 무력으로 강제해 세운 정권이라 여전히 기반이 불안하니 직접 인재를 찾아 등용하고 네 편을 더 늘려. 특히 네 곁에 호위로 세울만한 사람을 몇 두는게 좋을지도 모르겠군. 뭐 그건 론소의 부하인 바노르와 상담해 보는게 좋겠네."

물론 그냥 적당히 둘러대는 소리였다. 끝까지 미리안을 거들어 허신을 강림시킨다면 이럴일은 없으리라. 물론 그 반대라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었지만. 좌우지간 미래를 대비한 포석이나 밑밥을 많이 깔아놔서 나쁠건 없었다.

"러셀님..."

진석의 말을 다 듣곤 고개를 숙인채 한참이나 뭔가를 고심하다 겨우 마음을 진정시켰는지 주먹을 꽉 모아쥐며 고개를 드는 알 유세피나.

"아... 알겠어요. 원하신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지만 표정과 목소리엔 아쉬움이 가득하고 그러쥔 주먹은 가늘게 떨리는게, 머리론 진석의 말을 이해해도 가슴으로는 납득하지 못한것 같았다. 진석은 알 유세피나를 가볍게 껴안고 그녀를 다독여주었다.

"그리고 아무것도 남겨놓지 않고 가는건 아니잖아? 그렇게나 열심히 힘썼으니 아마 얼마지나지 않아 뱃속에 아이가 들어설텐데."

"......"

"기껏 돌아왔는데 반역이라도 일어나 엉뚱한 놈이 권좌를 차지하고 있다던가 하는 꼴은 나있지 않도록, 아라파와... 아이 양쪽 다 잘 부탁해."

진석의 그 말에 결국 알 유세피나의 눈동자에 물기가 어렸다.

"그럴게요. 기다리고 있을테니까. 부디..."

가볍게 겹치는 입술. 짧은 입맞춤 후 진석은 짐을 챙겨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곧바로 방을 빠져나왔다. 방에 홀로 남겨진 알 유세피나는 입술위에 남겨진, 서서히 식어가는 그의 체온을 느끼며 한참이나 멍하니 서있었다. 고개를 떨군 그녀는 왼손에 낀 실크장갑을 벗고 약지에 끼워진 은반지를 내려다보았다. 진석이 끼워줬던 그 반지는 제자리에서 얌전히 빛나고 있었다.

'으, 이런짓은 성격에 안 맞아서 싫다니까.'

하지만 어떻게 해서건 적당히 둘러대놔야 알 유세피나를 떼어놓고 이곳을 벗어날 수 있을게 아닌가? 진석은 스스로도 닭살이 돋는걸 꾹 눌러 참으면서도 그녀를 남겨두고 방을 벗어나 왕성 건물을 나섰다.

'어떻게 보면 이게 먹튀구만 먹튀.'

안뜰엔 먼저 나간 르마쿠르 자매가 낙타에 짐을 실어둔채 기다리고 있었다. 진석이 내려오자 아네트가 시시덕거렸다.

"옷, 생각보다 금방 내려왔네? 그 아줌마 성격이라면 러셀을 붙잡아놓고 한두시간 쯤 작별섹스라도 하는건 아닐까 했는데."

"아니 뭐 이미 그런게 필요없을 정도로 충분히 했었으니깐."

"뭐... 어, 언제 그렇게 했어?"

"언제는 무슨. 너네들하고 안할때는 알 유세피나랑 잤는데."

평범한 여자들이라면 이런 이야기 기분 나빠할테지만 르마쿠르 자매는 태연했다. 되려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다.

"하긴 보통 남자라면 우릴 상대하지도 못할텐데 틈틈히 저 아줌마까지 다 상대해주고. 응응. 역시 대단하달까."

"그리고 이제는 우리가 독점 할 수 있으니까. 후후."

진석은 픽 콧방귀를 끼며 가방을 낙타의 등에 실었다.

"독점같은 소리 하네. 누가 거저 해준데? 돈 내 돈."

"헤헤-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이런 미녀 자매의 헌신적인 봉사 보통이라면 맛보지 못한다구?"

"그럼그럼. 그런 의미에서 우리 둘을 만난 러셀은 행운아야."

"야 말은 똑바로 하자. 봉사는 내쪽이 하는거 같은데? 너네들 동시에 상대하는거 힘들어 죽겠다고. 섹스가 아니라 중노동이야 중노동. 이건 뭐 차라리 나가서 막일을 뛰고말지. 그런 의미에서 당분간은 섹스 금지."

낙타에 오르며 르마쿠르 자매에게 딱 잘라 말하는 진석. 지젤과 아네트도 마찬가지로 낙타에 올라타다가 진석의 말에 에엑 하고 볼멘 소리를 냈다.

"어, 언니. 러셀이 진심인것 같은데."

"하긴 우리가 생각해도 좀 심하게 했었지? 한 번 하면 너나 나나 거의 열댓번씩은 했던것 같은데..."

"아니면 혹시 매너리즘 아닐까? 진수성찬도 반복해서 먹으면 지겨울텐데, 마찬가지로 아무리 우리 기술이 좋아도 이렇게 몇 번이나 경험했으니 슬슬 질릴만도 하고..."

"끄응. 그러면 할 수 없지. 이쪽은 평생 쓸 일이 없길 바랬지만... 뒤쪽의 처녀를 줘서라도..."

"엑. 언니 그쪽은 아직 미개통이었어? 난... 주, 줄게 없는데. 그쪽도 예전에 몇 번 경험해 버려서."

"언제? 용병일 했을때?"

"응. 헤헤- 같이 용병일 뛰던 동료중에 활잡이가 하나 있었는데 곱상하게 생긴게 은근히 여러가지로 밝히더라구. 하도 조르는 바람에 그만. 근데 생각만큼 그리 좋진 않더라."

진석은 낙타를 탄채 뒤를 따르는 두 자매의 회화를 들으며 한 숨을 쉬었다. 저 바보들도 알 유세피나처럼 언제고 적당히 떼어놓아야 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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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타는것도 기술을 요하며, 아예 승마술이라는 스킬이 따로 존재했다. 물론 승마술이 없다고 말을 타지 못하는건 아니었지만 말을 능숙하게 제어하긴 힘들뿐더러 마상에서의 행동에 여러가지 제약을 받게 되었다. 특히 승마술이 없는 상태에서의 마상 전투는 패널티가 너무 커서 힘들다 못해 불가능에 가까웠다. 진석이 그란델과 교단을 오갈때도 쭉 마차를 애용한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승마술이 없는터라 그냥 말을 타면 패널티가 생기지만, 마차라면 패널티가 없는데다 짐이나 사람도 많이 실어나를 수 있었기 때문에. 하지만 지금 탄것은 말도 마차도 아닌 낙타였다. 처음엔 어떨까 싶었는데 막상 타보니 낙타도 의외로 안정적으로, 말보다 체고가 좀 높다는것만 빼면 별 문제 없었다.

'하지만 마차를 쭉 타고 다녀서 그런가 짐을 많이 못 싣는다는건 별로군.'

그래도 낙타는 덩치가 큰 만큼 생각보다는 물건을 많이 실을 수 있었지만 역시 마차만은 못했다. 물론 낙타가 끄는 수레도 있었지만 모래로 가득한 사막지대를 지나려면 바퀴가 달린 수레는 괜히 이동속도만 잡아먹으므로 포기했다. 그리고 사막에서의 밤을 보낼때 중요한건 다름아닌 땔감이었다.

'지금이야 계절상 한여름이니 뭐 천막치고 모포만 잘 덮고 자도 충분하겠지만.'

겨울이 왔을때 사막의 밤은 금새 영하까지 뚝뚝 떨어져 방한대책이 없을 경우 저체온증으로 사망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도시간을 이동하는 상단들은 아예 밤을 보내기 위한 땔감 수레를 따로 끌고다니기도 했다. 진석도 혹시 몰라 하룻밤을 보낼만한 땔감 한 뭉치를 구해 낙타의 옆구리에 메어뒀었다.

"얼마나 더 가야돼?"

고개를 돌려 우측에서 따라오는 지젤에게 묻는 진석. 그녀들은 저번 거사때 테베이에 한 번 다녀왔기에 대강 길을 알터. 지젤은 볕을 막기 위해 푹 뒤집어 쓴 후드를 걷어올리며 대답했다.

"글쎄... 아마 한 시간쯤 더 가면 시라즈랑 테베이를 오가는 상단들이 공동으로 쓰던 쉼터가 있던것 같은데. 사구가 죄다 거기가 거기같아서 잘 구분이 안가네."

"한 시간이라."

게임이라지만 사막을 이동하는건 생각이상으로 꽤나 괴로웠다. 진석도 볕을 막기 위해 미리 준비해둔 터번과 겉옷을 둘러입고 있었던터라 꽤 답답하고 더웠다.

'이런것까지 쓸데없이 현실적으로 안 만들어도 된다고.'

하지만 어쩌랴. 도보로 돌아가겠다는건 본인 생각이었으니 사막을 벗어날때까진 그저 꾹 참을 수 밖에. 하지만 사막의 기후에 괴로워하는 진석과 달리 두 자매는 그다지 힘들어 하는것 같지 않았다.

"그러고보니 너희들은 안 더워?"

"응? 글쎄. 그냥저냥?"

고개를 갸웃하며 아무렇지 않다는듯 대답하는 지젤.

"델 그로도는 원래 북부출신이잖아? 추위라면 몰라도 왜 더위에까지 강한거야?"

"나한테 왜냐고 물어도..."

자신도 이유를 모르겠는지 딱히 대답을 하지 못하는 지젤.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아네트도 어깨를 으쓱하며 볼을 긁적일 뿐이었다. 괜시리 심통이 나는 진석.

"으으 추위도 더위도 안타다니? 델 그로도 따위 정말 싫어."

"우왓, 갑자기 종족 혐오 발언이라니 너무해."

깜짝 놀라며 손을 내젓는 지젤. 진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 역시 그건 좀 너무 나갔지? 그럼 범위를 좁혀서... 르마쿠르 자매 정말 싫어."

"아하하, 지금 덥다고 투정 부리는거야? 귀여워라."

아네트는 진석이 더위에 짜증을 내며 투덜거리자 되려 깔깔 웃었다. 눈살을 찌푸리는 진석.

"아니 그러니까 그런게 싫다고. 내가 애도 아닌데 귀엽다가 뭐야 귀엽다가."

"흐응- 밤에 보면 몸은 정직하면서 말은 괜히 그렇게 퉁명스럽게 한다니깐. 하지만 난 러셀의 그런점도 좋아. 헤헤."

"나도."

"...됐다. 너희하고 얘기하고 있으면 나까지 바보가 되는것 같아."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낙타의 운행에 집중하는 진석. 하지만 등뒤에서부터 르마쿠르 자매의 대화가 들려왔다.

"잠깐, 그럼 우리가 바보라는 얘기인가?"

"하지만 넌 바보 맞잖아."

"아 정말 너무한다 언니... 여린 소녀 가슴에 그런 폭언을..."

"누가 소녀야? 그런점이 바보라는거야."

"에헤헤- 그럴까나? 하지만 되려 그게 남자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포인트라고 생각하는데? 일부러 나풀거리는 치마 입고 팬티도 슬쩍슬쩍 보여준다거나, 그런것도 다 나름 계산해서 하는 행동인데."

도, 도대체 어디 사는 누구에게 어필을 하겠다는거냐? 그리고 뭐? 계산? 어디서 택도 없는 소리를... 하여튼 저렇게 천연덕스러울 정도로 뻔뻔스러운거 하나는 부러웠다. 진석은 지젤, 아네트와 함께 시덥잖은 대화나 나누며 사막을 건넜다. 백열하던 해도 저 멀리 솟은 모래 언덕으로 서서히 기울어지고 있었다.

쉼터라고 해서 어떤곳일까 했더니 과거 어느 건물들이 지어져있던걸로 보이는 너른 터였다. 한 십여가구쯤 들어서 있던듯한 작은 마을 규모의 공터랄까? 여기저기 반쯤 허물어진 돌벽이나 드문드문 깔려있는 포석들이 보였다. 확실히 뭐 이 부근은 모래가 아닌 흙바닥인데다가 돌벽을 바람막이 삼아 하룻밤 정도는 묵어갈만해 보였다. 그리고 진석과 르마쿠르 자매뿐만 아니라 상단으로 보이는 수레들도 저쪽에 서른대 가까이 모여 북적거리고 있었다. 수레에 꽂힌 깃발을 보니 오늘 이곳에 모여있는 상단은 총 넷으로, 자기들끼리 한 곳에 모여 서로 정보를 교환하거나 간단한 물물의 거래를 하고 있는것 같았다.

"이런데서도 정보 교환이나 서로 장사도 하는 모양이군."

진석이 낙타에서 내리며 혼잣말을 중얼거리자 지젤이 대답했다.

"응. 저번에 지날때도 꽤 모여있더라. 물론 그땐 근위대를 오백이나 끌고 왔던터라 분위기가 살벌했었지만."

"근데 저 천막은 뭐... 아."

공터 외곽쪽엔 작은 천막이 예닐곱개쯤 세워져 있었는데 처음엔 상인들이 잠을 자려고 세워놓은건줄 알았더니 남자들이 번갈아가며 드나들고 천막 틈새로 헐벗은 여자들의 모습이 보이는게...

"매음중이구만. 아니 뭐 이런데서도 몸을 다 파나."

단순히 상단과 더불어 함께 이동하는 창녀들인지, 아니면 상단에서 보유한 노예들에게 매춘을 시키는건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사막 한복판에서까지 저짓을 하다니. 어째 여자들이 좀 딱했다. 하지만 아네트는 낙타에서 짐을 내리며 아무렇지 않다는듯 말했다.

"원래 매춘같은건 아무데서나 하는거 아니야? 나 용병일 할땐 정말 별 돼지우리 같은데서도 하는걸 봤는데. 심지어 파리나 벌레가 들끓는 더러운 화장실에서도 잘만 하던걸."

"야 쫌... 그만하자."

진석은 너무 원색적인 이야기에 정색했지만 아네트는 되려 배시시 웃어보였다.

"괜찮아. 저기 다녀오고 싶으면 다녀와도."

어랍쇼? 아무리 성에 개방적인 아네트라도 대놓고 창녀에게 가고 싶음 가라니. 갈 생각이 있는건 아니지만 너무 파격적인거 아냐? 진석이 의아해하자 아네트는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히힛- 시간내에 빨리 싸고 가라며 별 반응도 없이 뚱하게 누워있는 직업여성의 헐렁헐렁한 아랫도리에 잔뜩 실망하고 돌아오면 언니랑 내 몸이 얼마나 대단한건지 새삼 느끼게 될테니까 말이야."

"......"

정상적인 사고를 기대한 내가 바보지. 진석은 아네트를 무시하고 짐을 내리며 적당한 돌벽 옆에 자리를 잡고 천막을 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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