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베라 - 부회의 방랑자-89화 (89/155)

< --   - 8.   -- >         * 89화 *

"아이고 고마우셔라."

샌드웜은 분노에 차서 명백한 적의를 품고 땅 위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지만, 진석의 입장에선 상대가 안전한 곳에서 나 죽여줍쇼 하고 제발로 뛰쳐나온 꼴이니 되려 반가울 지경이었다. 란비언과 흑철단검을 칼집에 꽂고 빠르게 뒤로 물러나며 샌드웜의 눈을 향해 투척용 단검 두자루를 뽑아 던졌다. 하지만 몸통 근처에 가긴 커녕 미친듯이 휘둘러대는 촉각들에게 가로막히고 말았다.

"지젤! 언월도 좀 빌려줘!"

"뭐?!"

"단검으로 저걸 언제 끝장내? 얼른! 이쪽으로 던져!"

진석은 나머지 두자루의 투척용 단검도 샌드웜의 눈을 향해 잽싸게 던지며 지젤쪽을 향해 그렇게 외쳤다. 한자루는 촉각에 튕겨나갔지만, 다른 한자루는 촉각의 틈새를 빠져나가 샌드웜의 왼쪽 눈에 정확히 명중했다. 단검을 집어던진 힘이 어찌나 강했는지 수박만한 눈알이 퍼억하고 터지며 녹색의 액체가 콸콸 쏟아져내렸다. 촉각이 엉망진창이 되고 한쪽 눈마저 잃은 샌드웜은 완전히 이성을 잃고 기묘한 괴성을 지르며 진석쪽으로 마구잡이로 돌진해왔다. 촉각을 마구 휘둘러대며 돌진하니 모래가 사방으로 미친듯이 튀어올랐다.

"큿... 받아!"

이 언월도는 딱히 이름은 없지만 그간 쭉 함께해온 애병. 자신에게 대장기술을 전수해준 아버지가 생일 선물로 직접 만들어준 무기였다. 이것을 타인의 손에 넘겨줄 일이 생길거라 생각하진 못했지만... 지금은 상황이 상황 아닌가. 지젤은 자신에게 손을 뻗는 진석쪽을 향해 언월도를 힘껏 던졌다. 하지만 너무 힘이 들어가서였을까? 언월도의 궤도는 진석의 머리위로 한참 뜨고 말았다. 샌드웜은 모래를 파도처럼 밀어내며 진석에게 들이닥치는 상황. 아차 싶었다. 하지만 진석은 높이 뛰어오르기 힘든 모래바닥에서도 라파가의 대쉬를 이용, 훌쩍 점프해 머리위로 지나가는 언월도를 붙잡고, 그 즉시 체중을 실어 촉각을 휘둘러오는 샌드웜에게 내리치기를 가했다. 퍽 하고 아주 시원스레 썰려나가는 촉각. 꾸물텅거리는 촉각의 절단면에선 검은 점액이 찍찍 뿜어졌다.

"좋은데?"

기본적인 무력이 높으니 언월도를 그저 힘껏 휘두르는것 만으로도 맞는 샌드웜 입장에선 하나하나가 전부 치명타였다. 관리가 잘 되어 날이 예리하게 벼려진 언월도는 조그마한 단검보다 써는맛이 월등했다. 그야말로 묵직한 손맛이 느껴졌달까.

'예전 생각 나네.'

지금이야 단검을 쓰지만, 이전 장수 플레이때 창을 한 번 써본적이 있었다. 그때의 기억을 되살려 언월도를 사정없이 휘둘러 촉각들을 동강동강 베어냈다. 기세좋게 달려들었던 샌드웜은 진석의 맹공에 되려 당황해서 주춤거리며 뒤로 움찔움찔 밀려나기 시작했다. 이제 11개나 되는 촉각 중 멀쩡한건 단 두 개 뿐이었다. 사람으로 치면 팔다리가 죄다 부러지거나 잘려나가고 손가락 서너개만 멀쩡히 남은 꼴이랄까.

"그놈의 다리 많기도 많네!"

촉각의 대부분이 공격에 썰려나가 엉망진창이라지만, 그런 촉각이라도 채찍처럼 마구 휘둘러대고 있으니 쉽사리 본체까지 접근해 몸통에 치명타를 꽂아넣을수가 없었다. 진석은 샌드웜의 왼쪽눈이 멀었으니 사각을 노릴 생각에 언월도를 크게 한 번 휘둘러 촉각들을 튕겨낸 후 측면으로 빠르게 돌아갔다.

"기이이...!"

정면에 있던 진석이 보이지 않는 사각으로 이동하자 당황하는 샌드웜. 상황이 이렇게까지 되니 지능이 낮은 샌드웜의 머리로도 더는 안되겠다는 판단이 섰다. 도망칠 채비를 하고자 땅속에 파고들어가려는 자세를 취했다. 촉각들은 당했어도 원래 머리 지느러미를 사용해 땅을 헤집고 다니는 놈이니 저대로 놔두면 금새 도망가 버리리라.

"어딜!"

진석은 샌드웜이 땅속에 도로 파고들려하자 저항이 느슨해진 촉각들 틈을 뚫고 라파가의 숏대쉬를 응용해 허공에 뛰어올랐다. 깜짝놀란 샌드웜이 몸을 일으키며 늘어져있던 촉각들을 휘두르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진석이 크게 내리친 언월도의 날이 샌드웜의 몸통을 세로로 길게 쪼개었다.

"기이이이잇-!"

언월도의 날이 샌드웜의 몸통을 쫙 쪼개자 안에서 기괴한 보라색 내장이나 질퍽한 체액과 내용물들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부르르 떠는 샌드웜. 진석은 언월도를 꽉 쥐고 몸을 한 바퀴 빙글 회전시키며 다시 한 번 온힘을 실은 참격을 가했다.

"으랏차차! 십문자 베기가 별거냐!"

세로로 길게 쪼개져있던 샌드웜의 몸통에, 가로 방향으로 휘둘러진 언월도의 후속타가 직격했다. 퍼어억 소리가 나며 십자로 갈라지는 커다란 상처. 언월도의 날을 따라 샌드웜의 살점과, 내장, 고약한 색의 체액들이 모래바닥으로 후두둑 흩뿌려졌다. 아무리 집채만한 거체라도 몸통이 두 번이나 양단되는 강격엔 버틸 수 없었다. 연격을 맞고 애매한 자세로 서있던 샌드웜은 서서히 기울어 바닥에 쿵 하고 쓰러졌다. 십자로 쩍 벌어진 커다란 상처에선 샌드웜의 내장이나 끈적거리는 온갖것들이 하얀 모래위로 줄줄 흘러내렸다. 아직 부들거리며 움찔거리는게 숨은 붙어있는듯 했지만 입은 상처가 워낙 어마어마하니 그것도 시간문제일듯 했다.

"어휴... 엉망진창이네."

그리고 전신에 묻은 샌드웜의 체액을 털어내지도 못하고 그저 혀만 차는 진석. 지젤과 아네트는 어쨌거나 샌드웜을 쓰러트렸다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러셀 진짜 대단하다, 그치 언니?"

"...응. 그러네."

이제야 좀 진정이 된 낙타들을 끌고오며 그렇게 말을 걸어오는 아네트. 하지만 지젤의 머릿속은 좀 복잡했다. 보통의 인간 전사라면 아무리 숙련되어있다고 해도 겨우 몇자루의 냉병기로 샌드웜을 잡는다는건 어불성설. 확실히 저 남자는 보통인물이 아니었다. 단순히 실력만 뛰어난거라면 상관없겠지만... 어젯밤의 회화가 마음에 거슬렸다. 지젤의 머릿속에선 과연 저 남자를 이렇게 계속 따라다녀도 되는걸까 하는 생각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진석은 어제 수통에 보충해뒀던 물로 대충 몸을 행군다음 옷을 갈아입고, 죽은 낙타에게서 짐을 떼어내었다. 쓸모없는 것들은 죄다 버려 짐의 무게를 가능한 줄인 다음 한쪽 낙타에는 르마쿠르 자매가, 다른쪽 낙타엔 진석이 타고 짐을 실어 이동을 계속했다. 이후엔 별 다른 불상사 없이 테베이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미 늦은시간이 되어 있었기에 오늘은 그냥 테베이에서 머무르고 가는게 나을 것 같았다. 일행은 꽤 호사스러워 보이는 고급 숙소에 방을 잡았다. 진석은 방 두 개를 빌려 자매들과 따로 자려고 했지만 아네트의 강력한 주장으로 결국 큰 방 하나를 빌려 셋이 같이 묵게되었다. 방을 잡자마자 진석이 먼저 한 일은 지하의 공용 목욕탕으로 가 씻는것이었다. 자매들도 그 뒤를 따라 씻고 올라왔다.

"으응... 하아. 어... 그나저나 언니는 안할거야?"

숙소 지하의 공용 목욕탕에서 씻고 올라오자마자 아네트는 진석을 덮쳐 침대에서 뒹굴기 시작했다. 진석은 씻자마자 또 땀 흘릴 짓을 하는거냐고 투덜거리면서도 결국 아네트를 안고 몸을 섞기 시작했는데, 지젤은 어째 옆에서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진석의 몸 위에 올라타 한창 기승위로 허리를 놀려대던 아네트는 평소처럼 동참해오지 않는 언니 지젤의 모습에 의아함을 느꼈다.

"응? 아니... 나, 나는 잠깐 바람 좀 쐬고 올테니까."

지젤은 아네트의 권유를 무시하고 둘을 뒤로 한채 방을 나섰다. 복도를 걸어나가며 생각에 잠기는 지젤. 지금 여기서 태평하게 섹스나 하기엔 역시 어젯밤의 대화가 너무 신경쓰였다. 아네트는 쿨쿨 자느라 듣지도 못했고, 워낙 단순한 아이라 어제 그의 이야기를 듣다 중간에 끊겼다는것도 이미 다 까먹었을테지만 자신은 달랐다.

'세계를 지키거나 멸망시킨다거나. 그 양쪽이 다 자신의 손에 달려있다라니. 도대체 이게 무슨 이야기일까. 그 이후론 한 마디도 더 안해주니 알 수가 없지만... 그저 농담으로 치고 넘어가기엔 뭔가 이상해.'

처음부터 이 이야기를 묻지 않았더라면 지금 자신도 저 안에서 아네트와 같이 재미나 보고 있었겠지. 허나 잘 생각해보면 배에서 재회해 아라파에 갔을때도 이상한 점이 있었다.

'마법을 사용해서 여자의 모습으로 가장하고 있었다니. 보통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잖아. 그리고 그 변신 마법은... 대체 누가 걸어준거지?'

지젤이 아는 진석은 전사지 마법사가 아니었다. 즉, 그에겐 자신들이 모르는 또 다른 협력자나 어떠한 소속 세력이 존재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었다. 그렇다면 러셀 저 남자는 그들의 일원으로서 행동한다는게 분명하겠지. 이번의 일처럼 대지의 눈을 회수하는것도 실은 그 개인이 아닌 집단의 목적이리라. 그렇다면 중요한건... 그가 속한 집단의 목표가 무엇이냐 하는거다. 세상을 지킨다와 멸망시킨다 양쪽이라니? 이런 모순된 말이 어디있는가. 그리고 보상이라. 분명 자신에게 양쪽 다 보상이 있다면 어떻냐고 물었었다.

'...말도 안되는 가정이지만 혹시... 러셀은 세계를 멸망시키려는 쪽과, 반대로 지키려는 쪽 사이에서 줄타기라도 하고 있는걸까? 어느쪽의 보상이 자신에게 더 이득이 될까 저울질을 하면서 말야.'

그렇게 생각해보면... 이거 뭔가 얼추 말은 된다. 하지만 어째서 그런것을 고민 하고 있는거지? 당연히 지킨다는게 정답아닌가? 세상을 멸망시킨다면 아무리 좋은 보상이라도 그걸 대체 어디다 써먹겠는가. 아니면 설마...

'사실 러셀은 세상을 지키려는 쪽의 사람이고, 멸망시키려는 세력엔 위장으로 잠입해서 그 뒤를 치려고 기획중이라거나? 혹은 그 반대일지도... 아니. 이건 너무 상상이 지나쳤나.'

허나 지젤의 추리는 분명히 진실에 닿고 있었다. 실제로 진석은 허신을 이 세계에 불러내려는 헤세스모데우스 교단에 속한채, 그들의 일을 도우면서도 뒤를 칠까 말까 여전히 고민중에 있었으니까. 그러나 그런 사정을 모르는 지젤로선 지금까지 별 생각 없이 쭐래쭐래 쫓아다니던 진석의 진짜 정체에 대해 불안감을 품게 된 것이었다.

'아무리 괜찮은 남자라도... 정체모를 터무니 없는 일에 관여하고 있는것 같으니 이쯤에서 헤어지는게 정답이겠지만... 역시 아네트는 납득하지 못하겠지. 아네트는 러셀이 진짜로 마음에 든 것 같으니까. 내버려두면 정말 결혼이라도 불사할 기세라서.'

역시 언니다보니 미우나 고우나 동생의 일이 걱정됐다. 일단 지금이야 좋다고 이렇게 함께 움직이고 있지만 과연 언제까지 저 남자와 동행해야할까? 자신들 입으로 같이 어디까지고 따라가겠다고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상대 나름이지. 처음부터 몰랐으면 모를까, 저런 묘한 이야기를 듣고나니 도무지 러셀에게 믿음이 가지 않았다. 신경질적으로 입술을 잘근잘근 깨무는 지젤.

'세상을 구하려는 쪽이라면... 도울수도 있을테지만. 아아, 역시 모르겠어.'

그렇게 고민하는 지젤과 달리, 진석의 머릿속은 태평했다. 아네트를 침대 위에 엎어둔채 뒤에서 그녀를 마구 찔러대며 생각했다.

'지젤은 어젯밤 대화이후 머릿속이 나름대로 복잡해진 모양이군. 이러다 날 정 못 믿겠고 불안하다 싶으면 아네트를 데리고 떨어져 나가겠지. 사실 그렇게 되라고 일부러 그런식으로 흘려준거니까.'

어차피 이 바보 자매를 계속 데리고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지젤이나 아네트 성격으론 세계를 말아먹겠다는 교단의 목적에 협력해 줄 것 같지도 않았고, 엘리야처럼 적당히 속여서 가입시킨다고 해도 제이스나 아르데나 같은 기존 여성진과 마찰을 일으키거나 반발을 살건 안봐도 너무 뻔했다. 그러니 교단에 돌아가기 전까진 뭔 핑계를 대서라도 떨궈야 할 터. 그래서 어젯밤 그런식으로 이도 아니고 저도 아닌 애매한 이야기만 흘려준 것이었다. 그 뒤 나머지는 지젤의 상상력대로 멋대로 부풀려 생각할테니. 게다가 평소라면 얼씨구나 좋다 하고 아네트와 함께 알몸으로 끼어들었을텐데 핑계를 대며 자리를 빠져나간걸 보니 불안감을 불러 일으키려는 자신의 이야기가 먹히긴 먹혔구나 싶었다.

'그리고 나야 둘 중 한 명만 상대하면 훨씬 편하지. 어디 맛좀 봐라.'

진석은 아네트의 뒤에서 허리를 마구 놀리며, 검지 손가락 끝에 침을 발라 그녀의 항문에 스윽 밀어넣었다. 꽉 다물어진 좁은 입구에선 강한 압력이 느껴졌다.

"아... 그, 그쪽은! 혹시 몰라 깨끗히 씻고 왔으니 상관없긴 하지만... 적어도 마음의 준비가, 앗, 아아앙!"

"그러고보니 너 이미 이쪽 경험도 있다고 했지? 대체 안해본건 뭐야?"

"그게... 응. 으... 이, 임신 정도일까?"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냐."

손가락을 쑤욱 밀어넣으며 안쪽을 꾹꾹 눌러대는 진석. 아래쪽에서 자신의 성기가 아네트의 질내를 드나드는 촉감이 전해졌다. 그 드나드는 타이밍에 맞춰 내괄약근을 꾹꾹 누르며 자극하자 아네트는 허리를 움찔거렸다.

"러, 러셀의 아이라면... 가지고 싶을지도."

숨을 헐떡헐떡 몰아쉬면서도 그런 말을 해오는 아네트. 진석은 뒤에서 그녀를 껴안고 가슴을 주무르며 대답했다.

"아~ 그러고보니 알 유세피나 임신시키고 왔는데."

"...뭐? 언제 그런... 힉!"

엉덩이에 손가락을 하나 더 밀어넣으며 음경도 자궁구에 닿을때까지 끝까지 밀어넣었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말을 잃고 진한 쾌감에 빠져드는 아네트.

"하지만 너나 나는 종이 다르니까 어쩔 수 없잖아. 인간과 델 그로도 사이에서 혼혈이 나올리가 없고. 아무리 몸을 섞어봤자 허무할 뿐이니... 역시 그만 헤어지는게 낫지 않을까? 적당히 델 그로도 족 미남이나 찾아서 결혼하라고. 축의금 정도는 듬뿍 보내줄테니까."

"이... 이런 타이밍에 그런 짖궂은 이야기를..."

"이런 타이밍이란 뭔데? 응? 평소라면 지젤이랑 둘이서 잘도 날뛰었지만 혼자 남으니 별거 아니구만. 겨우 뒷쪽을 가볍게 자극하는 정도로 앙앙거리기나 하고."

"아앙- 심술쟁이이... 하, 하지만... 나는 그런 러셀도 좋은걸. 읏."

아네트는 진석의 움직임에 맞춰 스스로 허리를 흔들어오며 하복부에 힘을 주어 진석의 물건을 절대로 놓치지 않겠다는듯 강한 질압으로 꽉 물어쥐었다. 한층 높아진 압력과 자극에 윽 하고 낮은 신음을 흘리며 사정감을 느끼는 진석.

'아무래도 얘는 언니쪽이랑은 달리 여간해선 떨어져 나갈것 같지 않고... 에이 나도 모르겠다. 맘대로 하라지. 어떻게든 되던가 말던가.'

군살하나 없이 매끈한 아네트의 허리를 꽈악 감싸안는 진석. 아네트의 고개를 옆으로 돌리게해 그녀와 입을 맞추며 중얼거렸다.

"슬슬 첫 발 낸다."

"응응, 으응... 얼마든지."

고개를 끄덕이며 발갛게 물든 얼굴로 좋아하는 아네트. 진석은 아랫도리를 최대한 끝까지 찔러넣으며 아네트의 안에 사정을 했다.

-----

이후의 여정은 별 일 없었다. 당초의 목적인 테베이의 경매장에도 들러보았지만 진석의 생각과는 달리 이곳은 보석이나 장신구를 위주로 취급하는터라 달리 살만한 물건이 없었다. 그렇게 테베이를 떠나 일주일간에 걸쳐 이 도시 저 도시를 거치며 아라파의 국경부근까지 이동했다. 국경지역까지 오니 영원히 끝날것 같지 않던 열사의 사막도 서서히 그 자취를 감추고 자갈이나 바위 가득한 황무지로 그 풍경이 바뀌어갔다. 국경의 도시에 도착했을때 진석은 낙타들을 팔고 말 두마리가 끄는 왜건을 구입해 갈아탔다. 낙타를 팔고도 차액이 모자라 금화를 수십닢이나 더 지불해야 했지만, 한동안 낙타를 타고 다니다 왜건으로 갈아타니 왠지 모르게 안정감있고 편안하게 느껴졌다.

'오오. 역시 바퀴 달린게 좋다니까.'

그간 낙타를 타고 다니느라 E랭크 짜리 승마술을 얻긴 했는데, 그딴거 알게 뭔가. 왜건은 무게 생각 안하고 짐을 잔뜩 실을 수 있지, 천막이 포장되어 있으니 땅바닥이 아닌 안에서 잠을 잘수도 있지. 이래저래 역시 이쪽이 더 좋았다. 이 국경도시에서 목적지인 비더하임의 국경까지는 약 사흘거리. 그 사이는 공백지라 당연히 마차촌 같은것도 없었기에 시장을 돌며 보급을 잔뜩 한 후에 여유롭게 도시를 벗어났다.

"그나저나 러셀... 언니랑 싸우기라도 했어? 요새 어째 둘이 좀..."

러셀과 함께 마부석에 동승한 아네트는 목소리를 줄인채 진석에게 소근거리며 물어왔다. 아네트는 테베이에서 부터 지젤이 진석을 멀리하고 있음을 눈치챘다. 전 같으면 반드시 함께했을 잠자리도 이래저래 핑계를 대며 빠졌고, 아네트가 기껏 끌어들여 관계했다 하더라도 겨우 한두번 하는둥 마는둥 하다 그만두었던 것이다. 게다가 딱히 필요한 대화가 아니고서야 둘이 이야기를 나누는 빈도도 확 줄어들었다. 이런 상황이니 아무리 아네트가 태평한 성격이라고 해도 둘 사이에 흐르는 이상을 눈치채지 못할리 없었다. 하지만 진석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정말 모르겠다는 듯 태연하게 대답했다.

"글쎄? 내가 지젤이랑 싸울리가 없잖아. 나는 뭐가 문젠지 잘 모르겠는데? 아니면 지젤쪽은 이제 내가 질렸나보지."

"그럴리가... 분명 언니는 나랑 달리 좀 덜 밝히고 자제심도 있긴하지만... 끙- 이상하네."

턱을 괴며 잘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 아네트. 아네트는 모르는 일이었지만 시라즈와 테베이 사이의 쉼터에서 머물렀던 밤, 진석이 지젤에게 했던 말은 마치 서서히 퍼져나가는 독처럼 그 자리에 못박힌채 그녀의 마음속에 끝없는 의문과 불안감을 피워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지젤은 아네트만 아니었으면 진작에 진석을 떠났으리라. 하지만 아네트가 진석을 너무 좋아하고 따르니 적당한 이유없이 헤어지자고 주장하기도 어렵고 쉽게 납득시킬수도 없을터라 할 수 없이 동행하고 있는 참이었다.

"응- 아 몰라! 역시 답답해서 안되겠어. 직접 물어볼래. 언니!"

아네트는 마부석과 왜건 안쪽을 연결하는 천막을 휙 걷어내곤 짐칸 안쪽으로 들어가며 지젤을 불렀다. 뒤쪽에 앉아 멍하니 흘러가는 풍경을 바라보던 지젤은 깜짝 놀라며 아네트를 돌아보았다.

"어, 왜?"

"저기 있지. 혹시 나 모르게 러셀이랑 싸웠었어?"

"......"

대답없이 고개를 젓는 지젤. 아네트는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싸운것도 아니면... 요새 러셀이랑 왜그래? 뭐가 문제야? 한동안 셋이 같이 잘 지냈었는데 테베이에서 부터 언니 좀 이상해."

"내가 이상하다니..."

눈가를 찌푸리는 지젤. 역시 안되겠어. 아네트는 러셀에게 지나치게 푹 빠져있는터라, 그가 뭘 하는 사람인지 무슨 목적으로 뭘 위해 움직이는지 따윈 신경도 안 쓰는 모양이었다. 내 동생이긴 하지만 얘는 정말 너무 생각이 짧구나. 지젤은 짧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네트. 러셀을 어떻게 생각해?"

"어떻긴? 결혼이라도 하고 싶을 정도로 좋아하는데."

"하아..."

이렇게까지 시원하게 즉답하기냐. 지젤은 잠시 뜸을 들이다 목소리를 좀 낮춰 아네트에게만 들릴 정도로 말했다.

"저기 사실 러셀은... 좀 이상한 일에 몸을 담그고 있는것 같아."

"이상한 일이라니?"

"시라즈를 떠나 테베이에 도착하기 전에 상인들이 모여있던 쉼터에서 하룻밤 묵었을때, 기억나? 그때 네가 잠들었을때 단 둘이 이야기를 했는데..."

"했는데? 뭐?"

궁금해 견딜 수 없다는듯 바싹 붙어앉으며 물어오는 대답을 재촉하는 아네트. 지젤은 거의 속삭이듯 아주 작게 말했다.

"러셀은 자기가 세상을 구하거나 멸망시킬 수 있는 양쪽에 손을 대고 있다던걸. 농담이나 장난같진 않았어. 잘은 모르겠지만, 러셀은 우리가 생각하던거랑은 전혀 다른 위험한 일을 하고 있는것만은 분명해."

"엑... 뭐야 그게."

자신은 진지하게 한 이야긴데, 아네트의 표정은 왠지 뚱했다. 겨우 그런걸 말하려고 쓸데없이 무게를 잡은거냐고 타박하는듯한 얼굴.

"아니 아네트. 잘 생각해봐. 러셀은..."

"러셀은 뭐? 언니가 더 이상해!"

생각치도 못한 동생의 말에 움찔 굳는 지젤. 내가 이상하다니?

"...뭐라고?"

"언니 바보야? 벌써 한참이나 러셀이랑 같이 지내왔잖아. 그동안 우리에게 악의를 가지거나 뭔가 나쁜 마음을 먹고 행동한 적 있어? 오히려 우리가 쫓아다니면서 귀찮게 굴면 굴었어도, 난 러셀에게 부당한 대접을 받은 기억따윈 하나도 없다구."

"......"

아네트의 말에 꿀먹은 벙어리가 되는 지젤. 생각해보니 동생의 말도 틀림은 없었다. 물론 시라즈에서 그가 시키는대로 행동한적은 있지만 그야 자신들이 그의 일을 돕겠다고 자원한거였으니 문제삼을수 없었다. 게다가 일을 돕는 댓가의 선금으로 금괴까지 하나씩 받지 않았던가? 정말 저 남자가 악인이었다면 자신들을 어떤식으로건 이용하거나 혹은 이득을 갈취하려 들었을텐데 지금까지 그런 기색은 눈꼽만치도 없었다. 아직 본색을 드러내지 않은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을테지만... 그렇게 생각하기엔 아라파를 깔끔히 떠난게 말이 안됐다.

러셀이 진짜 사악한 악당이었다면 수중에 들어온 알 유세피나와 아라파를 이용해 뭔가 흉계를 꾸몄을터. 하지만 한 나라를 배후에서 조종 할 수 있음에도 그런것따위 전혀 아쉽지 않다는 듯 자신들만 대동하고 길을 떠난것이 아닌가. 어차피 아네트나 자신이나 러셀의 진짜 실력엔 발끝도 미치지 못한다. 즉 그에게 자신들 따윈, 딱히 이용가치도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동행을 허락하고 이래저래 동생과 자신을 신경쓰는 모습도 보여줬었는데... 좀 더 거슬러 생각해보니 첫 대면때도 자신이 만든 무기의 가치를 인정하고 군말없이 큰 값을 치뤄줬던 남자다. 그런 사람이 세계를 멸망시킨다느니, 잘 생각해보니 어째 말이 안되는 것 같았다.

'나는... 러셀의 말에 휘둘려서... 너무 쓸데없는 생각에 잠겨있었던건가.'

왠지 얼굴이 화끈거렸다. 혼자 엉뚱한 착각에 빠져 바보짓을 하고 있었던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혹시 나, 놀림당한건가? 지젤은 아네트를 놔두고 천막을 열어 진석이 있는 마부석쪽 좌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아네트도 앗 하더니 쪼르르 따라와 천막 사이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저기 러셀."

진지한 태도로 진석에게 말을 거는 지젤. 진석은 고삐를 쥔채 옆을 흘깃 돌아보며 대답했다.

"왜?"

"...단도직입적으로 물을께. 그날밤에 했던말, 어디까지가 진짜야?"

"이래보여도 나는 정직한 사람이라... 거짓을 말한 기억은 없는데?"

"그렇다는건..."

세계를 구하거나 혹은 멸망시키거나. 자세한 건 알 수 없지만 양쪽에 관여되어 있다는것만은 확실한 모양이다. 지젤은 잠시 생각끝에 진석에게 대놓고 물었다.

"혹시 세상을 망하게 하겠다는... 뭐 그런 집단에 소속되어 있는거야?"

'어랍쇼?'

내심 깜짝 놀라는 진석. 자신이 흘린 말 한 마디로 뭘 어떻게 생각했는진 모르겠지만 지젤은 나름대로 정확한 추리를 이끌어낸 모양이었다. 의외였다. 그저 바보 자매라고만 여겨왔는데... 확실히 단순한 동생과 달리 언니 지젤쪽은 머리가 굴러가는 편이라니깐. 이거 재밌네. 잘하면 여기서 둘 다 떨궈 낼 수 있을지도? 진석은 히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어쩔거야?"

"......"

지젤은 또 다시 혼란스러워졌다. 대체 이 남자는...

"아니야! 그럴리가 없잖아! 언니 바-보!"

아네트는 천막을 젖히고 안쪽에서 상반신을 쑥 내밀더니 진석을 뒤쪽에서 와락 끌어안았다. 갑작스러운 아네트의 행동에 깜짝 놀라는 지젤.

"아, 아네트?"

"뭐가 세상을 구하고 망하게 한다는거야? 영문 모를 이상한 소리는 그만해! 누군가를 좋아하는데 상대가 무슨 일을 한다던가, 그런건 관계 없잖아! 그냥 그 자체로 좋은것 뿐인데! "

우와, 바보다. 이 녀석 진짜 바보다. 진석은 쓸데없을 정도로 자신을 신뢰해오는 아네트의 태도에 그렇게 생각했다. 되려 진의를 모를 상대방을 경계하는 지젤쪽이 정상 아닌가? 하지만 아네트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러셀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야. 물론 첫 만남때야 그냥 미남이니까 평소처럼 얼씨구나 좋다하고 재미나 볼 생각에 덮쳤을 뿐이지만... 지, 지금은 달라. 진짜로 사랑하고 있다고! 이제 난 러셀이 아니면 안돼. 그러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무슨일을 하건... 그런건 상관없어. 설령 진짜로 세상을 말아먹겠다 한들, 기꺼이 협력할거야! 나는 그 정도로 진심이라고!"

"하, 하하하하!"

갑자기 웃음을 터트리는 진석. 이야 이거 안돼겠다. 내가 졌다 졌어. 지젤쪽은 몰라도... 동생 아네트쪽은 이래서야 정말 뭘 어떻게 해도 떨어지지 않을것 같았다. 그녀라면 틀림없이 생사가 오락가락 하는 상황에 선다해도 목숨을 걸고서라도 자신을 따르겠다며 나서리라. 게다가 설령 세상을 말아먹겠다 한들 기꺼이 돕겠다니. 이렇게까지 나올줄이야. 진석은 한참 웃다 자신을 이상하게 쳐다보는 지젤을 마주보며 말했다.

"아니 뭐. 그래서 지젤 네 추리는 뭐야? 나에 대해 어디까지 생각한거야?"

"그... 그건. 혹시 러셀 당신이 뭔가 흉악한 목적을 꾸미는 집단에 소속된채... 그들에게 협력을 가장하고 뒤를 치려는건 아닐까 하고. 그래야 양쪽에 손을 대고 있다는 말이 아귀가 맞으니깐..."

"...대단한데? 거의 정답인걸."

그 말에 지젤이나 아네트 둘 다 놀란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거짓말이나 둘러대기도 지치니까... 어디 한 번쯤은 진실을 말해볼까.'

진석은 르마쿠르 자매에게 자신의 입장에 대해 그냥 솔직히 털어놓기로 마음먹었다.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도 두 여자가 어떻게 나올지 궁금해졌다.

"나는 허신 헤세스모데우스를 섬기는 교단에 수호자라는 직위로 속해있는데... 이곳의 목적은 간단해. 자신들이 섬기는 허신 헤세스모데우스를 이 세계에 강림시킨다는거야."

생각치도 못하던 진석의 뜬금없는 이야기에 꿀꺽 마른침을 삼키며 되묻는 아네트.

"그, 그러면 어떻게 되는데?"

"어떻게 되긴. 세계는 깔끔하게 멸망."

"엑?! 에엑?! 지, 진짜야?!"

"거, 거봐! 내가 말했잖아 아네트!"

"아니 내, 내, 내가 뭐든 도울수도 있겠다고 말했지마안! 이건 아니잖아앗!"

당황해서 파닥거리는 두 자매. 진석은 그 사이에서 침착히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리고 나는 교단의 우두머리인 대신관에게 완전한 신뢰를 얻고 있는 상태로... 지금까지 해온것처럼 교단의 목적을 계속 도울지, 중간에 배신해서 교단을 박살낼지 고민중이야."

그 말을 들은 지젤과 아네트는 진석에게 찰싹 달라붙더니 동시에 소리를 질러댔다.

"고민할게 뭐 있어! 배신해! 놈들을 죽여!"

"그래! 제정신이라면 세상을 멸망시키는 일 따위 도우면 안되는거잖아! 어쩌려고 그래?!"

"...아 쫌 놔봐. 잡아당기지 마. 옷 늘어난다."

진석은 손을 들어 그녀들을 진정시킨 후 계속 말을 이었다.

"물론 교단을 박살내는게 정상적인 선택이겠지만... 이 대신관이라는 양반이 장난이 아니야. 현재의 나 따윈 몇 명이, 아니 몇십명이 동시에 덤벼들어도 대신관을 못 이길걸?"

미리안의 정확한 능력을 모른다고 해도 이건 좀 과장스러운 표현이었지만, 이 정도는 못박아 두어야 그녀들이 쉽게 납득할테니 일부러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진석의 말에 지젤과 아네트의 얼굴은 싸하게 굳어갔다.

"뭐 그런... 러셀 정도의 전사가 몇십명이 동시에 덤벼도 상대가 안된다고?"

"사실이라면 그냥 괴, 괴물이잖아 그런건..."

정상적인 수단으론 결코 잡을 수 없는 샌드웜 같은 대형 몬스터를 단검과 언월도 한자루로 끝장내버리는 비상식적으로 강한 전사 수십이 한꺼번에 덤벼들어도 상대가 안된다니? 이게 말이 되는가? 대체 그 대신관이란 작자가 얼마나 강하길래?

"그래. 게다가 배신을 하려고 해도 나와 대등하거나, 그에 미치진 못하더라도 꽤 강력한 다른 수호자들도 여럿 있단 말이지. 그뿐만이 아니라... 헤세스 약품 통상이라고 알아?"

느닷없는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는 지젤.

"알지. 어디 산간 오지 벽촌에 사는게 아니고서야 그 커다란 다국적 기업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리가..."

진석은 씨익 웃으며 지젤과 아네트를 번갈아 바라보며 말했다.

"거기, 이름이 재밌지 않아? 헤세스모데우스 교단. 그리고 헤세스 약품 통상."

"서... 설마!"

"그 설마가 설마지. 헤세스 약품 통상은 교단의 소유고, 헤세스 약품 통상이 위치한 메디니아도 실은 교단이 뒤에서 움직이는게 가능한 반쯤은 꼭두각시 같은 나라야."

"......"

지젤과 아네트는 둘 다 입을 쩍 벌린채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이 믿을 수 없는 이야기가... 전부 사실이란 말인가? 자신들을 놀리기 위해 하는 거짓말이 아닐까? 아니 차라리 거짓말이었으면 좋겠다. 허신인지 뭔지를 강림시켜 세상을 멸망시키고 싶어하는 그런 범국가적인 어마어마한 세력이 존재한다니. 제발 거짓말이라고 해줘.

"마, 말도 안..."

"그러니까 이제 내 말의 의미를 이해하겠지? 세상을 멸망시키는 일과, 구하는 것 양쪽 모두에 관련되어 있다고."

지젤은 이제서야 진석이 한 말을 완전히 납득할 수 있었다. 자신의 추리는 옳았다. 그는 실제로 말도 안되는 악의 조직에 속한채... 혼자서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것이리라. 이야기를 다 듣고난 아네트는 한참이나 멍하게 있다가 갑자기 울먹울먹 하더니 다시 한 번 진석을 뒤에서 와락 안았다.

"으아아앙! 러세에에엘!"

"또 왜이래?"

"그, 그치만! 그러면 러셀은 지금까지 아무에게도 말 못하고... 혼자 그런 말도 안되는 집단에 속한채 외롭게 싸워왔다는 이야기잖아!"

아니 뭐 외롭거나 그런건 아닌데... 내가 왕따도 아니고. 게다가 아직까지 구원이냐 멸망이냐 어느 한쪽을 딱 결정한것도 아닌데. 하지만 아네트는 진석의 등에 슥슥 얼굴을 비벼대며 계속 말했다.

"응응. 외로웠지! 괴로웠지! 혼자서 얼마나 힘들었을까... 훌쩍. 앞으론 언니랑 내가 도와줄테니까! 그 이상한 놈들 물리치는데 우리가 협력해줄께!"

지젤도 거들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래! 솔직히 너무 말도 안되는 이야기라 아직 곧이 곧대로 믿기는 힘들지만... 그런일이라면 얼마든지 협력할 생각이 있으니깐."

'이런이런. 단순히 밝히기만 하는 바보 자매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정의감이 투철한걸?'

혹시나 싶어서 진실을 알려준건데, 생각 이상으로 정상적인 반응이었다. 하긴 세상이 망할지도 모르겠다는데 좋아하는게 더 이상하겠지. 그러나 진석은 고개를 선선히 저어보이며 말했다.

"필요없어 너희들 도움은."

"왜?!"

"어째서?!"

동시에 들이대며 반문하는 르마쿠르 자매. 진석은 다시 한 번 그녀들을 밀어내며 대답했다.

"왜긴 왜야. 말했잖아. 나조차 아직 대신관을 어떻게 해볼 수 없다고. 너희들 실력으로는 그 밑에 있는 수호자 하나 상대하지도 못할걸? 도움은 커녕 방해야. 아까 말했었지? 이래보여도 난 진실만을 말한다고. 이건 괜히 하는 소리가 아니야."

"큭..."

분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아랫입술을 깨무는 지젤. 그가 이렇게까지 말한다면... 틀림없이 사실이리라. 괜히 돕겠다고 어설프게 걸리적대다 발목을 잡을바엔 처음부터 끼어들지 않는 편이 나을터. 하지만 아네트는 납득 못하겠다는듯 주먹을 쥐고 허공에 붕붕 휘둘러대며 말했다.

"하, 하지만! 어떻게든 러셀에게 힘이 되고 싶어! 아 맞아. 그럼 우리도 그 교단에 들어가서 몰래몰래 러셀을 돕는다거나?"

"그것도 안돼.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대신관은... 사람의 마음이랄까 그런걸 읽거나 들여다보는 능력이 있는것 같아."

이건 진석 자신의 추측이었다. 하지만 그저 추측이라고만도 할 수 없는게, 미리안이 상대의 의중을 읽는듯한 언동을 하는걸 수차례나 봐온것이다. 자신에게도 그랬고 제이스를 비롯, 아르데나나 엘리야에게도 딱 핵심을 짚는 말을 해서 포섭했다는것을 들었으니까. 이 자매가 어설프게 위장잠입을 하려했다간 되려 무슨 탈이 날지 몰랐다.

"그런 말도 안되는..."

진석은 몸을 돌려 시무룩해하는 아네트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으며 그녀들에게 말했다.

"뭐 돕겠다는 마음이야 고맙지만 이건 내 일이야. 그렇지. 정 돕고 싶다면... 지젤."

"응?"

"날 위해서 무기를 하나 더 만들어줘. 란비언의 짝이 될만한 무기랑, 몸을 지킬만한 방어구가 있으면 좋겠네. 가능한 가볍고 튼튼한걸로."

"...좋아, 알았어. 아버지에게 전수 받은 모든 기술을 살려서 틀림없이 도움이 될만한 무구들을 만들어줄께."

결의에 가득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지젤. 아네트는 안절부절 못하더니 진석의 옷자락을 붙잡고 흔들며 물어보았다.

"저기- 나는? 나는 뭐 도움이 될게 없을까? 응? 뭐라도 할테니깐."

"음, 딱히 없는데."

"으이잉! 어째서!"

"곁에서 언니나 거들어줘. 뭐 만약, 정말 만약이긴 하지만... 너희들의 힘이 필요해지면 그땐 솔직히 도와달라고 말할테니까."

"꼭이야. 꼭? 응?"

진석은 불안한 표정으로 몇번이고 되물어 오는 아네트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

이렇게해서 진석은 르마쿠르 자매에게 진실을 털어놓고 그녀들의 협력을 약속받았다. 나흘이 걸려 비더하임의 국경마을에 도착한 후 르마쿠르 자매와 진석은 서로 길을 갈라섰다. 더 이상 진석과 함께 행동해봐야 의미가 없으므로 그녀들은 따로 말을 두 필 구입해 페레나의 가게로 돌아가 진석의 무구를 만드는 작업에 들어가기로 했다. 그리고 진석은 혼자 피터슨의 쪽지에서 발견한 던전을 탐사해보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갈림길에 선 아네트는 진석의 곁에서 좀처럼 떨어지지 못하고 어물거렸다.

"아네트, 이제 가야지."

"그치만... 진짜 헤어지기 싫은데. 그냥 언니만 돌아가면 안돼? 어차피 난 대장작업엔 아무 도움도 못되는걸."

진석의 팔에 메달려 진심으로 떨어지기 싫어하는 아네트. 하지만 진석은 그녀를 떼어내곤 지젤쪽으로 등을 떠밀었다.

"그쪽에 돌아가면 페레나시부터 들를테니까. 생떼 그만쓰고 언니랑 돌아가."

"으으- 나 정말 가기 싫은데. 하지만... 알았어. 꼭이야? 페레나부터 와야하니까. 어디 다치거나 하지말고 몸 조심해야돼? 응?"

"아네트 이 멍청아. 네가 그럴수록 시간낭비야. 적당히 하고 얼른 와!"

좀체 진석의 곁에서 떠나지 못하고 꿈지럭거리는 아네트의 꼬라지가 답답했던지 이쪽으로 다가와 그녀의 포니테일을 움켜쥐고 강제로 잡아끄는 지젤. 아네트는 싫어싫어 하며 두 팔다리를 버둥거렸지만 머리채가 통째로 붙잡혀 끌려가는데야 어쩔 도리가 없었다. 진석은 그 틈에 얼른 왜건에 올라 말들을 출발시켰다.

"그러면 나중에 보자고!"

"아아아앙- 가지마! 역시 이렇게 헤어지는건 싫어어어! 나도 데려가아아!"

뒤에서 아네트의 울음에 가까운 외침이 들려왔지만 뒤돌아보지도 않고 왜건을 모는데 집중했다. 아네트의 외침 사이사이에 뭔가 퍽퍽 걷어차는 소리가 섞여있는게, 틀림없이 지젤이 떼를 쓰는 아네트의 엉덩이라도 걷어차고 있는 것이리라.

'결국 어디까지든 따라오겠다던 저 끈덕진 자매를 떼어놓긴 떼어놨구만. 그것도 거짓말이 아니라 진실을 알려줘서 떨궜네. 음... 뭐 하긴 여간한 거짓말로는 쟤들을 떼어놓을 수 없었을테지. 특히 아네트는 더더욱.'

정말 얼렁뚱땅, 생각치도 못하던 상대들에게 진실을 일러준 꼴이 되었지만 이걸로 르마쿠르 자매는 진석을 되려 더더욱 신뢰하게 되었다. 이제 그녀들은 무슨일이라 해도 진석이 요청만 한다면 발벗고 나서서 도와주리라.

'뭐 지젤이 무구를 만드는 것 이외에 저 자매에게 도움받을 일이... 있기나 할까? 어느정도 실력이 있다곤 하지만 둘이 합쳐봐야 수호자 중 맥 하나도 못 당해낼텐데.'

아무튼 간만에 홀몸이 되니 왠지 모르게 굉장히 홀가분했다. 늘 누군가와 함께 동행 하다가 다 떼어놓고 혼자 여유롭게 왜건을 몰고 있자니 묘하게 차분해지는 기분이었달까.

'게다가 밤일쪽도 뭐... 요 나흘동안 너무 해서 어휴. 당분간은 전혀 안해도 되겠어.'

비덴하임의 국경에 닿으면 서로 갈라지기로 합의한 후, 아네트는 그야말로 틈만나면 진석에게 안겨왔던 것이다. 사흘이면 올 수 있는 거리를 나흘이나 걸린것도, 중간중간 두 자매들과 몸을 섞느라 시간을 낭비했기 때문이었다. 아네트뿐만 아니라 지젤 역시도 오해해서 미안했다며 그간 못한만큼 보상하겠다며 한층 더 격렬히 엉겨오는데... 덕분에 어제 저녁엔 그야말로 마지막 한방울 까지 쪽쪽 쥐어짜였다.

'자 그나저나... 여기서 이틀 거리인가.'

품속에서 피터슨 메모의 해석본을 꺼내 펼쳐보는 진석. 목적지는 스마이쉬 산이라고 이 국경마을에서부터 북쪽으로 이틀정도 가야 하는 곳이었다. 스마이쉬 산 바로 근처엔 이더스라는 마을이 있다고 되어있었는데 거길 기점으로 삼으면 될 것 같았다.

'던전 탐사의 경험은 없지만 하루 이틀에 끝나는건 아닐것 같으니... 몇 번 정도는 던전과 마을을 왕복하는 형태가 될지도 모르겠군.'

그나저나 그 동굴에 있다는 비보는 대체 어떤걸까? 그리고 피터슨은 어째서 이 동굴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었던 걸까? 여러가지 생각을 하며 진석은 왜건을 몰았다. 메마른 흙과 바위만이 가득한 황량한 가도를 따라 왜건이 지나가자, 그 자취를 남기듯 왜건의 뒤쪽으로 흙먼지가 풀풀 일어났다.

============================ 작품 후기 ============================

본편과는 별개로 한두편 분량의 짧은 외전이라도 한 번 써볼까 생각중인데 어느 소재가 좋을지 모르겠군요. 역시 외전은 관둘까. OTL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