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8. -- > * 90화 *
비덴하임의 국경마을에서 스마이쉬 산과 이더스까지 가는 중간엔 달리 마차촌 같은게 없었다. 쇠락한 서부 시대의 변경마을과 풍경을 연상시킬 정도로 원체 황량한 곳이기도 하고, 이쪽 방면으로는 물자나 인력의 이동이 거의 없는 모양이었다. 날이 저물때까지 이동하던 진석은 어느 야트막한 산 중턱에 이르러서야 겨우 수풀이 조금 돋아있는 작은 공터를 발견하고 왜건을 멈춰세웠다.
"와 여긴 진짜 흙먼지랑 바위, 산 밖에 없네. 황무지가 이래서 황무지구나."
이래서야 말 먹이도 걱정이다. 말들도 필요 최소한도는 풀을 뜯게 하던가 준비한 물과 건초를 먹여야한다. 물이야 왜건에 어느정도 있다지만 먹이가 문제다. 말들도 굶기면서 무리하게 강행군을 시키면 컨디션이 빠르게 나빠지다 어느순간 뻗어버리고 만다. 그란델 쪽을 오갈때는 초목이 사방천지 흔해빠져서 말 먹이 따윈 별로 신경 안쓰고 적당히 끌고 다닐 수 있었는데... 바로 얼마전까지 아라파의 사막을 건널때도 낙타들에게 하루에 한 번은 콩과 물을 먹였었다. 사막에 이어 여기도 정말 황량하다보니 정말 별게 다 걱정스럽다.
"뭐 거리상으론 내일 하루종일 가면 저녁때쯤 이더스인가 뭔가하는 마을에 닿을테니까 하루만 버텨보자."
말들을 다독이며 그나마 풀이 돋은곳에 묶어놓고 지면을 가만 살펴 보니... 이거 뭐 풀들도 말라빠져서 거의 검불이나 다름없다. 근데 말들에겐 원래 수분이 많은 생풀보단 건초를 먹이는게 좋다던가 뭐라던가.
"모르겠다. 없는데 어쩌랴, 알아서 이거라도 먹어라."
말들은 진석의 말을 알아듣는건지 아니면 정말 먹을게 없어서인지는 몰라도 비쩍 마른 검불들을 뜯어먹기 시작했다. 말들이 풀을 뜯는걸 확인한 후 가까운 나무로 가서 장작으로 쓰기 위해 손으로 가지를 끊어냈다.
"...뭐야 이게."
나뭇가지가 무슨 과자조각마냥 빠삭 빠삭 소리를 내며 뚝뚝 부서진다. 나무도 어지간히 말라붙은 모양이다. 뭐 잘타긴 하겠군. 진석은 나무 한 그루를 거의 해체하다시피 해서, 장작을 한아름 만들어 한쪽에 잘 쌓아놓고 화염화살을 시전해 불을 피웠다. 바싹 마른 나뭇가지들은 쉽게 불이 붙어 타닥타닥 마른 소리를 내며 타올랐다.
"그리고 저녁밥은 영양 만점의 흑빵과 물. 와아."
이거 생각해보니 뭐 해먹을것도 아니고 불을 피울 필요도 없었군. 계절도 한창 여름이라 불 옆에서 잘 필요도 없이 그냥 왜건 안에서 자면 된다. 에이, 그래도 기왕 피운 모닥불이다. 어두운것보단 나으니 그냥 그러려니 하자. 그나저나 비더하임의 국경마을에서 보급을 한다고 했었는데... 이쪽의 상점들은 그란델의 러프야드보다도 더 활기없고 품목수도 극단적으로 적었었다. 식료도 빵과 물이라는 정말 최소한의 것만 보급할 수 있었다.
타국과 인접한 국경쪽엔 아무래도 외국과의 교역을 위해 어느정도는 발달한 도시가 있기 마련인데. 이제와서 생각해보니 르마쿠르 자매들과 뻑하면 섹스한답시고 정신이 팔려 중간에 길을 잘못 들었던것 같았다. 도중에 북쪽길이 아니라 남쪽길로 갔어야 했는데, 쯧쯔. 비더하임에 들어서면 로더만이라는 도시가 나올줄 알았는데 왠 조그마한 마을이 나왔었으니. 얼른 두 자매와 헤어질 생각에 후다닥 보급해서 나왔던터라 뭐 그냥 그런가보다~ 했는데 이제와서 다시 생각하니 길을 잘못들었던게 확실한 것 같다. 정말 참 여러가지로 바보짓을 했다.
"하긴 로더만이라는 도시에 들렀으면... 아네트가 여관이라도 발견하고 헤어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하루 더 묵고 가자고 졸랐을지도 모르지. 그냥 잘됐다고 생각하자."
야외에서 돗자리 대용으로 쓰던 접힌 방수천을 꺼내 모닥불 근처에 휙 던져놓는 진석. 방수천을 방석 삼아 불 앞에 앉아 묵묵히 빵과 물을 마셨다. 사실 공복도만 채우면 되니 음식의 맛이나 질은 별로 문제될게 없었다. 만들어 진지 오래되었는지 꽤나 딱딱해진 흑빵덩이을 손으로 뜯어 입에 넣고 대충 몇 번 씹다 물로 흘려넘기기를 반복했다.
"이건 뭐 밥을 먹는다는 느낌이 아니라 진짜 그냥 연료 채운다는 기분인데."
공복도가 어느정도 채워지자 진석은 빵을 먹는것을 중단하고 남은걸 잘 싸서 왜건안쪽에 실어두었다. 그리고 모닥불에 나무토막 몇 개 더 던져넣고 나니 이제 할 일이 없었다.
'일행이 있으면 적당히 잡담이라도 하거나 뭐 밤일이라도 하겠지만...'
방수천을 넓게 펼치고 주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로 바람에 날리지 않도록 귀퉁이를 누른다음 벨트를 풀어 옆에 던져두고 벌러덩 누웠다. 불 옆에 가만히 누워 이따금 장작이나 하나씩 던져넣고 있자니 별별 잡생각이 다 떠올랐다.
'바보 자매가 육로를 통해 페레나까지 돌아가려면... 다른곳에 새지않고 곧장 질러간다고 해도 거의 3주 가까이 걸린텐데. 남쪽으로 가서 배타고 가라고 할걸 그랬나?'
아니다. 뭐 알아서 부지런히 가겠지. 그나저나 아까 낮엔 르마쿠르 자매를 딱 떼어놓고 나니 홀가분 한 것 같더니만 날이 저물고 혼자 불 앞에서 궁상떨고 있으니 뭔가 괜히 썰렁한 기분이다. 어... 아네트만이라도 곁에 남겨둘걸 그랬나? 아네트 본인 말대로 그녀는 대장기술이 없으니 지젤한테 딱히 도움이 될것도 아닌데... 에이, 됐다. 보내놓고 나서 이런 생각해봐야 떠나간 차 뒤에서 손 흔드는 꼴이지. 이번 방랑자 플레이에선 쭉 여자를 옆에 달고 다녔더니 누가 곁에 함께 하는게 습관이 된 모양이다.
'그나저나... 미리안과 교단이라.'
르마루크 자매에겐 마치 자신이 교단을 따르는척 하면서도 실은 그 음모를 저지하러 잠입해있는 정의의 사도처럼 비춰져버렸는데... 이거 미리안과 맞서게 된다면 그녀와 어떻게 싸워야 할지가 고민이었다.
'수호자들은 어찌어찌 다 떨궈내고 미리안과 일대일의 싸움을 한다고 쳐도 으으음. 무슨 능력이 있는지 알기나 해야 대비를 하던가 뭔가 방법을 찾지. 분명 도적들의 손에 죽고나서 부활했을때 단신으로 도적들을 찾아내어 몰살시키고, 자기 가문과 자신을 신부로 들이려 했던 상대방 가문까지 다 박살내버렸다고 했었지?'
물론 그 일 자체야 진석도 할 수 있는 어렵지 않은거지만 열살짜리의 몸으로 하룻밤 사이 해냈다는게 중요했다. 언제나 꼬박꼬박 존댓말을 하며 예의바르게 구는 미리안이라지만 분명 굉장한 전투능력을 감추고 있으리라.
'하긴 허신인지 뭔지 아무리 수상쩍고 이상한 신이래도 신은 신. 신에게 직접 선택받아 능력을 내려받았으니 이러니 저러니 해도 보통은 아닐터. 음 이거 또 괜히 고민되네. 그냥 착실히 명령에 따를까?'
대지의 눈 회수라는 두번째 명령도 완수했고 돌아가기만 하면 되는 참이다. 얼마나 더 이런걸 모아오게 할런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건 미리안이 자신을 신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란델을 손에 넣고 전쟁을 일으켜 제물인지 뭔지를 잔뜩 모아대기 시작하면 허신의 강림도 빨라질테고 그러면 얌전히 미리안에게 협력하는게 엔딩을 보기엔 더 쉬운길일건 분명.
'나도 진짜 우유부단 하네.'
뒷통수를 벅벅 긁는 진석. 에이, 모르겠다 어떻게든 되겠지. 나중일은 나중에 생각하고 잠이나 자자. 손을 뻗어 불 위로 장작을 왕창 쏟아넣고 쭈욱 다리를 뻗으며 편하게 누웠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별이 가득했다.
'가상의 세계라지만 참 잘도 구현해 놨단 말이야. 조용하고 고즈넉하니 잠 잘오겠다.'
이따금 타닥탁 장작타는 소리만 들려오는게, 그러고 한참을 가만히 누워있으니 슬슬 잠이 온다. 스르르 눈을 감고 막 잠에 빠지려는 찰나 아주 멀찍이서 바람결에 섞여 뭔가 다다닥 하고 네발 달린 동물이 뛰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게 하나라면 그냥 야생동물이겠구나 하겠지만 발소리가 여러개 겹쳐 우르르르 하고 몰려오는거라면 얘기가 다르다.
"...으, 뭐야?"
막 잠이 들려는 찰나였지만 수상한 소리가 들려오니 안 일어나볼수도 없고. 짜증이 솟구쳤다. 눈을 부비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벨트를 둘러메었다. 그 와중에도 어디서 들려오는건지 모를 동물들의 발소리는, 분명 먼곳에서 들려오는 거긴 했지만 조금씩 커지고 있었다.
"쓰... 몬스터인가."
이런 외진곳에서 캠핑중인데 어둠속에서 뭔가 우르르 요란스런 소리가 들려오니 생각나는건 그것밖에 없었다. 뒷춤에서 투척용 단검을 꺼내들고 왜건쪽으로 다가가 주변을 경계했다. 혹시라도 말이 죽거나 다치면 당장 이동하기가 곤란해지니 만약을 대비해 말들을 보호하며 싸울셈이었다. 말들도 어째 긴장한 셈인지 푸륵거리고 고개를 흔들며 잔뜩 불안한 기색을 내보였다.
'이런데서 나올만한 몬스터라면 뭐지? 늑대무리? 아니면 혹시 트리트인가?'
트리트는 부족단위로 집단을 이루어 사는 인간형 몬스터였다. 한 마디로 간단히 설명하자면 쥐인간. 인간보다 평균신장도 머리 하나 가량 작고 덩치도 왜소한 편이지만 인간에 준하는 지능이 있었다. 그리고 트리트의 진정한 강점은 개개인의 무력이 아닌 집단을 이루는것에 있었다. 작고 왜소한 상대라도 한 번에 여럿, 수십이 한꺼번에 덤벼들면 그 기세에 밀려버리기 쉽상이다. 인간에게 적대적인 트리트들은 폭발적인 번식력을 앞세워 이따금 대집단을 이루어 치안이 허술한 변경이나 시골 마을을 약탈하곤 했었다.
'뭐든간에 오기만 해봐라. 박살을 내주지.'
사방을 경계하며 어둠너머를 살피는 진석. 정체불명의 발소리는 꽤나 근처까지 다가왔나 싶더니 점차 멀어지기 시작했다.
'...어라?'
잔뜩 긴장하고 있었는데 이게 뭐냐. 아니, 혹시 뭔가의 기만책? 진석은 소리가 멀어져도 긴장을 풀지 않고 한참 주변을 경계했다. 하지만 발소리는 곧 어둠 너머 저 멀리로 사라져 버렸고 말들도 평온한 기색을 되찾았다.
"......"
왠지 맥이 탁 빠지는 진석. 몬스터라도 덮쳐오는건가 싶어 잔뜩 긴장했는데 허무하기 그지없었다. 떨떠름한 표정으로 주변을 좀 둘러보다 다시 모닥불 옆으로 가 방수천 위에 주저앉았다.
'뭐였던거야 대체?'
우르르 하고 몰려다니던 동물들의 발소리가 뭔지 알 수 있는 도리는 없지만... 좌우지간 말썽이 생기지 않은건 다행이다. 싸워서 질리는 없지만 도중에 말들이 다치거나 했다면 여러가지로 귀찮아졌을테니. 하지만 기껏 오던 잠은 깨끗히 달아나 버린터라 진석은 불가에 앉은채로 꾸벅꾸벅 자다 깨다를 반복하며 밤을 지새웠다.
날이 밝고 자리를 정리한 진석. 잠이 덜깬 눈을 부비며 왜건을 몰고 산을 넘었다. 식사는 마부석에 앉아 말을 몰며 어제 저녁과 같이 흑빵과 물로 대충 때웠다. 산이라지만 지세가 낮은데다 마차가 다닐정도의 길은 닦여있었기에 별 문제는 없었다. 산 아래쪽은 굉장히 메마르고 황량했는데, 정상으로 올라갈수록 하나 둘 나무들이나 초목들이 눈에 띄게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상즈음에 이르렀을때 길 저편 작은 나무 숲 사이에서 연기가 솟아오르는게 보였다.
'어라? 연기?'
혹시 저기서 머물고 있는 다른 여행자라도 있는걸까? 길을 따라 왜건을 몰고 숲 안쪽으로 들어서자 곧 자그마한 통나무집이 한 채 눈에 띄었다. 연기는 그 집의 굴뚝에서 솟아오르고 있었다. 집 마당에 있는 장작을 패는 그루터기라거나, 뭔가의 약초같은걸 밖에 널어놓고 말리는 생활감 있는 모습을 보니 분명 사람이 살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런 허허벌판 같은 산중 한가운데서도 누가 살긴 사는군.'
그냥 지나칠까 하다 호기심이 들어 왜건을 집 마당에 멈춰세우고 내렸다. 그런데 왜건에서 내리자마자 집 안에서 문을 열고 누군가가 밖으로 나왔다.
"어라. 그이가 돌아 온 줄 알았더니... 손님?"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꽤나 예쁘장하게 생긴 여성. 물기에 젖은 손을 앞치마에 닦으면서 나오는 폼이나 행색이 딱 전형적인 주부였다. 그녀는 별일이라는 표정을 하며 마당으로 나와 뻘쭘하게 서있는 진석에게 다가왔다.
"와아. 다른 사람이 여기까지 오긴 오랜만인데. 여행자니?"
싱긋 웃으며 친근한 말투로 진석에게 질문을 던지는 그녀. 진석은 고개를 두어번 끄덕이며 대답했다.
"아 네. 산을 넘는 길에 이런곳에 왠 집이 있길래 뭘까 하고 그만. 혹시 제가 방해됐나요?"
"아니아니 전혀. 그나저나 여행자였구나. 혼자서 여행이라..."
그녀는 왠지 모르게 요리조리 진석의 모습이나 왜건을 살펴보았다. 그러더니 덥썩 진석의 손을 쥐고 안으로 잡아 이끄는게 아닌가?
"뭐 모처럼 보는 외지인이니까, 그냥 돌려보내기도 뭐하네. 밥은 먹었니? 안에서 뭐라도 먹고 가지 않을래? 그보다 이름은 뭐니? 뭐 때문에 여행하는 중?"
밝은 태도로 질문을 마구 쏟아내고 재잘거리며 진석을 집 안으로 데려가는 그녀. 진석은 어어 하고 엉겹결에 안으로 끌려들어가며 대답했다.
"그... 러, 러셀이라고 하는데요. 뭐 좀 찾을게 있어서 이더스 마을로 가는 중이구요."
집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뭔가 좋은 냄새가 확 풍겼다. 고소하면서도 식욕을 자극하는 냄새. 스튜라도 끓인건가? 안의 꾸밈새는 외관만큼이나 소박했지만 손때 묻은 가구들이나 해가 드는 창가에 나란히 놓인 작은 화분들은 나름 푸근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그리고 반대편 벽엔 온갖 동물들의 가죽들이 주르륵 커튼처럼 걸려있기도 했다. 그녀는 진석을 벽난로 앞의 테이블 자리로 안내하며 떠들었다.
"음음. 러셀이라고 하는구나. 나는 아이린. 그보다 이더스 마을로 간다고? 거기엔 어째서?"
아이린은 식기를 꺼내더니 벽난로에 걸려있는 솥에서 맛있어 보이는 스튜를 듬뿍 퍼담으며 진석에게 질문했다. 잠깐 대답을 미루고 생각에 잠기는 진석. 아이린이라고 했지? 왜 이런곳에 살고 있는건진 모르겠지만... 처음 보는 상대도 거리낌없이 집안으로 데리고 들어서 식사대접을 해주려는걸 보니 그녀는 어지간히 오지랖이 넓거나, 오지 생활에 질려 말상대라도 필요했던 모양일까? 그냥 스쳐가는 상대니 딱히 속이거나 할 필요는 없겠지. 진석은 솔직히 대답했다.
"이더스 마을에 인접한 스마이쉬 산에 볼일이 있어서요."
멈칫. 국자를 솥에 집어넣던 아이린의 동작이 멈추더니, 진석을 이해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너 혹시 뭐 착각하거나 잘못 알고 있는거 아니니?"
"착각이요?"
"그래. 내가 알기로 이더스 마을은 이미 오래전에 거주민이 다 떠났는걸? 그것도 스마이쉬 산 때문에."
"...네?"
아이린은 어리둥절해 하는 진석의 앞에 한가득 눌러담은 스튜 접시와 수저를 내려놓곤 앞치마를 벗으며 말했다.
"정말 모르나 보구나? 그게 한 삼사년 전이었나? 원래 이더스 마을은 스마이쉬 산 부근에 있는 작은 철광으로 먹고 살던 곳이었는데... 원래 파내려가던 광맥이 고갈되어버려 여기 저기 갱도를 뚫어 잔여 광맥을 찾으려 했지만 전부 실패. 철광수입 하나에 의지해서 먹고 살던 사람들은 다들 다른 곳으로 떠나기 시작했어. 게다가 광맥이 동난 뒤부턴 이상하게도 스마이쉬 산에서 자꾸 흉흉한 몬스터가 자주 출몰해 사람에게 피해를 끼치기도 했다던가. 그 덕에 마을을 떠나는 사람들은 더 늘어났고... 원래부터 큰 마을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전성기때는 삼사백명 정도 살고 있었던 곳이었는데 지금은 확실히 아무도 안 살고 있어."
"......"
그건 몰랐다. 원래 철광으로 먹고 살던 곳이었는데 광맥이 마른 후 주민들이 떠나가기 시작했고 산에선 몬스터가 출몰하기 시작해 이제는 텅텅 비었다고? 지금 찾아가는 던전과 뭔가의 관련이 있는걸까? 진석이 생각에 잠기자 아이린은 그의 어깨를 툭툭 치며 접시를 가리켰다.
"사정은 모르겠지만 우선 식기전에 먹고 생각하렴. 맛은 자신 있으니까."
"아... 자, 잘 먹겠습니다."
스튜를 조금 떠서 입에 넣어보는 진석.
'오?'
한 반수저 정도 살짝 떠먹은것 뿐인데 먹자마자 화면 하단에 바로 버프효과 아이콘들이 떠오른다. 굉장한데? 이 아이린이라는 주부의 요리솜씨는 상당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맛도 좋았다. 어차피 게임, 뭘 먹건 공복도만 채우면 상관없었지만 어제 르마쿠르 자매와 헤어진 이후 몇끼를 연속으로 흑빵으로 때우다 따끈한 음식을 먹으니 유달리 맛있게 느껴졌다.
"진짜 맛있네요. 솜씨 좋으신데요?"
"후후, 그렇지? 내가 손맛에는 좀 자신이 있어서."
맞은편에 앉아 양손으로 자기 볼을 감싸쥔채 싱글벙글 웃는 아이린. 진석 자신보다 연상임은 분명했지만 그런 행동은 어째 귀여워 보였다. 그녀는 웃는낯으로 진석이 식사를 하는 모습을 한참 지켜보다 아 맞다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참 내 정신좀 봐. 그러고보니 마실것도 안 내줬네. 차 괜찮니?"
어차피 얻어먹는 처지에 뭐 아무거나 어떠랴. 진석은 입에 넣은 음식을 우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고 아이린은 자리에서 일어나 잠깐만 기다리라며 주방 안쪽으로 들어갔다.
'흠, 그나저나 생각도 않게 밥을 다 얻어먹었네. 그나저나 이 아이린이라는 여자는 뭐하는 사람이야? 아까 분명 처음 마주쳤을때 그이인줄 알았다고 한 걸 보니 남편이 있는 유부녀인건 확실한 것 같고.'
스튜를 다 먹을때쯤에 맞춰서 아이린은 안쪽에서 작은 찻잔을 들고 나타났다. 진석이 싹 비운 스튜 그릇을 치우며 찻잔을 앞에 내어주는 아이린. 찻잔 안에는 연갈색의 액체가 모락모락 따끈한 김을 피워올리고 있었다. 차에서는 뭔가 꽃잎을 끓인 향기 같은것과 뿌리약재를 달인것 같은 씁쓰레한 향기가 반반씩 뒤섞인 묘한 향이 났다.
"감사합니다. 잘 마실게요."
"응? 아냐아냐. 맛있게 먹는게 보기 좋은걸. 차도 좀 뜨겁겠지만 가능한 식기전에 쭉 마셔 쭉. 그래보여도 몸에 좋은거야."
아까와 변함없이 웃는낯으로 식기를 치우며 주방 안쪽으로 들어가는데... 어째 기분이 뭔가 싸하다?
'왜지? 초면의 낯선 상대에게도 식사 대접을 해주는 친절하고 상냥한 사람인데 왠지 모르게 뭔가 안 좋은 예감이.'
에이, 쓸데없는 생각이겠지. 진석은 잔을 들어 차의 맛을 보았다. 약재 향기 때문에 쓰지 않을까 했는데 생각외로 구수하면서도 달큰한게, 이것도 꽤나 맛있었다. 신기한 맛인데 하며 홀짝홀짝 마신다는게 금새 반 잔 가까이 마신 진석. 스튜 덕분에 몇가지 버프효과가 떠올라있던 화면 하단에 뭔가 아이콘 하나가 더 떠올랐다. 또 버프효과인가? 번개모양이 그려져있어 얼핏보면 감전 주의 표시인가 싶은 이 아이콘의 의미는...
"...잠깐. 마비 효과?"
순간 찻잔을 쥔 손에서 찌릿하고 힘이 빠졌다. 그대로 찻잔을 놓치는건가 싶은 순간, 기척도 없이 다가온 아이린이 진석의 손에서 빠져나가려는 찻잔을 대신 움켜쥐었다. 아까전과 변함없이 웃는 낯 그대로를 한 아이린. 그녀는 고개를 스윽 기울이며 진석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대었다.
"어머, 생각보다 효과가 금방듣네."
"아... 아니. 이 차... 설마."
"응. 이래보여도 젊었을땐 도시에서 약재사로 일했었거든. 솜씨 괜찮지?"
아니 이건 대체 무슨... 방금전의 왠지 모를 안 좋은 예감은 이거였단 말인가? 이 여자 대체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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