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8. -- > * 92화 *
주홍색 불꽃이 타오르는 벽난로 안의 장작불. 진석은 아이린과 벽난로 바로 앞에 커다란 숫사슴 가죽을 두 장 겹쳐 넓게 깔아놓고 함께 누워있었다.
"응응. 그래서 지금은 스마이쉬 산으로 가는중이라고?"
"네. 뭔진 알 수 없지만 일단 정보를 손에 넣은 이상 확인해 봐야 하니까요."
긴 정사를 마치고 아이린이 지쳐 골아떨어지자 진석은 슬쩍 떠날까 하다 곧 마음을 바꿨다. 이미 시간은 한참 흘러 밖의 해가 이미 산머리에 걸려있었기 때문이다. 산의 밤은 빨리 찾아온다. 아이린의 말대로라면 그녀의 남편은 오늘내로 돌아오지 않을테니 기왕 이렇게 된거 여기서 멋대로 하루 신세를 지기로 마음먹었다. 우선 대충 옷을 챙겨입고 밖에 나가보니 말들이 풀을 뜯으러 제멋대로 돌아다녔는지 마차가 저 멀리까지 나가있었기에 다시 데려다 집 앞에 세워두었다. 집 안으로 돌아와 아이린의 몸에 남은 정사의 흔적을 적당히 치워주고 진석도 쉬엄쉬엄 화염화살의 수련이나 하면서 대충 두어시간쯤 지났을까. 아이린이 잠에서 깨어났다.
아이린은 벌써 날이 저문것에 화들짝 놀라며 굉장히 서둘러 저녁을 차려주었다. 산중 생활을 하느라 별것 없을 줄 알았는데 잠깐 사이에 의외로 여러가지를 차려내었다. 빠르게 화덕에 불을 넣더니 그새 빵도 굽고 산딸기로 만든 잼도 내왔으며 빵에 곁들여 먹을 치즈와 간소한 채소로 버무린 샐러드, 그리고 염장보관하던 햄과 꽤 오래 묵혀둔걸로 보이는 술까지 내왔다. 거기에 낮에 먹었던 스튜도 다시 살짝 끓여서 테이블에 올리니 나름대로 풍성한 저녁상이 되었다. 사실 별 대단한 음식은 없는 소박한 식단이었지만 아이린의 요리 스킬이 닿은 덕인지 맛도 좋았고 먹는 족족 버프효과가 떠올랐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치우는 걸 도운 후, 진석은 아이린과 벽난로 앞에 앉아 술을 한잔씩 더 하며 자신을 그란델 태생의 모험가라고 적당히 속였다. 그리곤 플레이 이후 겪었던 일들을 적당히 각색해 들려주었다. 우연히 해안동굴에서 흉측한 몬스터와 싸웠다던가, 못된짓만 골라하는 폭력단의 무리를 혼쭐 내줬다던가, 아라파의 하디카에선 우연히 조직간의 항쟁에 휩쓸려 난리였다던가. 그러다 어떤 비열한 르케르투스족 악당을 해치우고 얻은 정보를 따라 가치있는 무언가를 찾아 스마이쉬 산으로 가는 길이라고 둘러댔다. 아이린은 진석의 이야기를 하나하나 재미있다는 듯 주의 깊게 들으며 눈동자를 반짝였다.
"호오, 대단하네. 젊어보이는데 꽤나 여러가지로 큰 일을 겪어왔구나. 하지만 혼자서 괜찮아? 스마이쉬 산은 위험할텐데 역시 동료라던가 필요하지 않겠어?"
"사실 몇 번이고 동료들과 동행한적이 있었지만 이런저런 문제로 지금은 다 헤어져서... 혼자 다니는게 편하더라구요."
"후후. 혹시 그 동료들 여자 아니었어?"
"에... 뭐."
아이린의 말에 진석의 머릿속엔 지금까지 함께 했던 여성들의 목록이 주르륵 스쳐지나갔다. 에나부터 시작해서 제이스, 아르데나, 엘리야, 레오노르, 르마쿠르 자매와 셀린에 이어 알 유세피나까지. 진석이 뭔가를 떠올리는 표정을 짓고 있자 아이린은 쿡 하고 웃으며 손을 뻗어 진석의 볼을 가볍게 꼬집었다.
"그럴것 같았어. 이렇게 미남인데 애인 몇 명 정도 없었을리 없지. 나한테 한 것도 그렇고, 솜씨를 보아하니 여자 꽤나 울리고 다녔겠는데?"
"...딱히 부정은 못하겠네요."
진석은 아이린과 좀 더 이야기를 나누며 술을 마시다 서로 애인처럼 껴안은채로 함께 벽난로 앞에서 잠을 청했다. 엄연히 남편이 있는 유부녀와 이래도 되나 싶지만 애시당초 진석 자신이 시작한 것도 아니고 아이린이 원해서 이렇게 된거니 할 말 없다. 게다가 뭐 넘어서 안될 선이야 낮에 실컷 넘다 못해 질릴정도로 했으니 이제와서 끌어안고 자는것쯤 뭐 어떠랴? 진석은 벽난로의 온기와 품에 안긴 아이린의 따스한 체온을 느끼며 편안히 잠들었다.
'나도 하다하다 별짓을 다 하는구나. 게임이라지만 남의 아내랑... 나 원 참.'
그리고 다음날 아침. 진석은 아침밥이 준비되는 소리와 음식 냄새에 눈을 떴다. 급하게 차려냈던 어제 저녁과 달리 아침 메뉴는 좀 더 풍성했다. 앞치마를 두르고 자신을 위해 열심히 음식을 차려내는 아이린의 모습을 지켜보자니 어딘가 모르게 매력적으로 느껴졌달까? 감사히 아침식사를 마치고 더 이상 여기 머물 이유도 없으니 슬슬 떠날 채비를 하는데 아이린이 진석을 붙잡고 물어보았다.
"저기 내가 달리 해줄 수 있는건 없고, 혹시 식료는 충분하니?"
"아 그러고보니... 별로 없네요. 왜건에 실어둔건 빵 약간 하고 물뿐이라서. 이더스 마을에 들러서 보충할 생각이었는데 이미 폐촌이 됐다고 하니..."
이더스 마을이 망한줄을 몰랐으니 식료가 모자랄거란 생각은 못했었다. 아이린은 그럴줄 알았다는듯 빙긋 웃으며 말했다.
"잘됐네. 잠깐만 기다려 볼래?"
아이린은 주방 안쪽으로 들어가더니만 창고에 들어가 뭔가 이것저것 잔뜩 꺼내와 테이블 위에 쌓아놓기 시작했다. 우선 천보로 덮은 바구니. 아침 식사로 먹고 남은 음식들을 알뜰히 모아 점심용 도시락으로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어제 저녁과 오늘 아침에 굽고 남은 빵 잔뜩, 작은 도기에 든 잼, 말린 고기들과 큼직한 치즈덩이. 집 뒷쪽 텃밭에서 키운듯한 양배추와 숲에서 채집한듯한 야생과일 약간, 더불어 술병들과 물통까지. 이거라면 진석 혼자서 아마 열흘쯤은 충분히 보낼 수 있을듯 했다.
"여긴 다른건 없지만 식료라면 많이 비축해두고 있으니까. 이 정도면 이더스 마을까지 가서 며칠간 살피고 돌아오는데 충분할거라 생각하는데. 모자라니? 더 줄까?"
"아, 아뇨. 감사합니다. 이거 참 여러가지로 폐를 끼치네요."
겸양의 말에 후후 웃으며 이쪽으로 다가와 진석의 머리를 토닥토닥 만져주는 아이린. 그녀는 진석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쥐고 눈을 똑바로 마주보며 말했다.
"혼자니까 너무 무리는 하지 말고. 위험할땐 과감히 달아날줄도 아는게 진짜 용기니까."
이건 뭐 왠지 한참 어린 동생을 대하는 것 같은 태도다. 어쩐지 낯부끄러워 살짝 빨개지는 진석의 얼굴. 진석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아이린은 이쪽으로 한 발 다가와 까치발을 하더니 얼굴을 가까이대곤 볼에 살짝 입술을 맞췄다.
"자 그럼 조심해서 가. 너라면 스마이쉬 산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갈때 여기 또 들러도 좋으니깐. 아, 물론 그이가 있으면 어제같은 일은 못해주겠지만... 따뜻한 밥 정도는 얼마든지 차려줄께. 부담없이 찾아오렴. 알았지?"
그렇게 말하며 상냥히 웃는 아이린을 보고 있자니 이런게 유부녀의 포옹력인가 싶은 생각이 든다. 음... 어째 아이린 같은 여자라면 곁에 두고 싶을지도... 하지만 이미 임자 있는 여자지, 쳇. 진석은 내심 쓴웃음을 지으며 아이린이 내어준 물자를 왜건에 옮겨 싣고, 그녀의 배웅을 받으며 산 정상의 통나무집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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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촌이라고 이야기는 들었지만 이건 진짜 어디 귀신이라도 튀어나올것 같은 꼬락서니구만."
하루를 꼬박 더 소모하고 이튿날 점심 경 이더스 마을에 도착한 진석. 약 70여채의 건물들이 세워져있던 이더스 마을의 모습은 그야말로 참담했다. 대부분이 목조였던 이곳의 가옥들은 사람들이 떠난지 몇년만에 심하게 풍화되고 쇠락해, 여기저기 무너지고 부서져 있었다. 어딘가 한군데씩은 다 망가져 있어 멀쩡한 건물이라곤 도통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저기가... 스마이쉬 산인가."
이더스 마을의 뒤편으로 우뚝 솟아있는 거대한 산. 마을 밖으로 스마이쉬 산으로 향하는 길이 쭉 이어져있었는데, 아마 이 길은 이전에 마을주민들이 주력 생계수단으로 삼던 광산과 연결되는 길이리라.
"산에선 몬스터가 출몰한다고 했으니 그 주변에 자리를 잡고 탐사하긴 그렇고, 상태가 양호한 건물이라도 찾아볼까."
왜건을 몰아 황량한 마을 안쪽으로 들어서는 진석. 단층 목조 주택들은 너무 엉망이라 들어갈 엄두도 안났다. 한참을 둘러보니 그나마 마을 중심지에 세워진 회관으로 보이는 석조건물이 가장 상태가 양호했다. 회관앞에 왜건을 세우고 안으로 들어가보았다. 이 회관은 아마도 뭔가 사무적인 용도로 쓰였던듯 책상이나 의자가 많았고, 책장들 사이론 오래되어 누렇게 뜬 서류철이나 먼지낀 책들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천장이나 구석진곳은 거미줄로 엉망진창이었지만 그냥저냥 머물만은 할것 같았다.
"게다가 여기라면 땔감 걱정할 필요도 없이 의자나 책상을 부숴서 쓰면 되고."
그래 결정했다. 여기를 임시 캠프로 삼자. 그렇게 작정한 진석은 입구에서 가까운쪽의 방으로 들어가 집기나 잡동사니들을 구석으로 치우고, 버려진 나무 책상과 의자들을 몇개 부숴 한쪽에 장작삼아 잘 쌓아두었다. 밤엔 바닥에 방수천을 깔고 창가쪽에 불을 피우면 그런대로 쾌적한 잠자리가 될듯했다. 그러고나니 공복도 게이지가 꽤 떨어져 있길래 왜건으로 돌아가 아이린이 준 음식을 먹었다. 빵에 잼을 바르고 치즈를 끼워 풋내나는 과일과 함께 먹었다.
"그나저나 양배추는 어디다 쓰지?"
다른건 대충 먹으면 됐는데 양배추는 어째 처치가 좀 곤란했다. 이런 황무지에서는 귀한 채소인데 버릴수도 없고. 아 나중에 말린 고기랑 볶아볼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식사를 마친 진석은 말들을 회관 한쪽에 잘 메어둔 뒤, 허리에 벨트를 차고 암살자의 망토를 두른 뒤 여기까지 오는 도중에 미리 만들어 두었던 횃불을 챙겨 스마이쉬 산에 오를 준비를 마쳤다. 뭐 횃불이라고 해봐야 적당히 굵은 나뭇가지 끝에 쓸모없는 옷이나 천조각을 잔뜩 감고 기름을 먹여둔 것 뿐이지만.
"어디보자. 메모에 따르면..."
우선 스마이쉬 산의 남서쪽 편에 있는 붉은 바위 무리를 기점으로 산 중턱까지 일직선으로 쭉 올라가라고... 좋아. 진석은 길을 따라 스마이쉬 산으로 향하며 메뉴에서 지도창을 열고 쭉 확대해서 부근의 지형을 살폈다. 길이 나있는 광산의 입구는 정남향으로, 붉은 바위 무리를 찾으려면 길대로가 아니라 여기서 왼쪽 방면으로 향해야 할 것 같았다. 진석은 지도를 확인하며 길을 벗어나 주변을 살피며 걸었다.
간략한 설명으로 위치를 알리는 문장을 따라 이리저리 헤메며 한시간쯤 꼬박 산을 올랐을까? 메모의 설명도 이제 마지막 문장으로, 나무들 사이 잘 보이지 않는 내리막 샛길을 따라 오분쯤 쭉 따라 들어가면 동굴의 입구가 나온다고 되어있었다. 그런데 샛길을 내려가자마자 진석은 주변에 흩어진 커다란 뼈의 잔해를 발견할 수 있었다.
"뭐야 이건?"
흙속에 반쯤 파묻혀있는 뼈의 골격만 보자면 곰이나 뭐 그런것 비슷한 크기의 생물체인데 그렇다고 곰은 아닌것 같고... 설마, 이게 바로 그 몬스터인가? 샛길을 따라 걸어가며 주변을 잘 살피자니 마찬가지로 비바람에 풍화된 여러 뼛조각들이 여기저기 널려있었다. 누군가 오래전 이 샛길을 지나며 몬스터들을 물리친 것 같았다.
"설마 이미 누군가 이곳의 조사를 끝마쳐서 텅 비어있습니다~ 뭐 이런 결말은 아니겠지."
대지의 눈을 회수하고도 기껏 육로를 택해 여기까지 온 이유는 이 동굴의 탐사를 위해서다. 그런데 초장부터 벌써 다른 누군가가 지나간 흔적이 이렇게 적나라하게 남겨져있다니. 망할...
"...그래도 혹시 모르니 일단 들어가서 확인은 해봐야지."
샛길을 쭉 따라갈수록 여기저기 보이는 뼈의 잔해는 늘어만갔다. 어림잡아 20에서 30여구쯤? 뼈의 크기만 봐도 이 몬스터들은 거의 다 자란 곰 수준으로 보통 덩치가 아니었을것 같은데 이렇게나 많이 쓰러트려놨다니. 앞서 이곳을 지나갔던 자는 상당한 실력자였던 모양이다.
'아, 저건가?'
샛길의 끝에 다다르자 거대한 바위암벽 사이로 뚫려있는 시커먼 동굴의 모습이 드러났다. 입구의 너비는 폭이 5에서 6미터에 높이는 4~5미터쯤? 동굴의 주변을 이루고 있는 암벽이나 여기저기 널려있는 바위들은 철이 많이 섞여 있어 그런지 붉은기가 돌았다. 진석은 챙겨온 횃불에 불을 붙이고 횃불은 왼손, 오른손엔 흑철단검을 꺼내든채 동굴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무서울 정도로 고요한 동굴 내부. 진석이 걷는 소리만이 바위벽에 부딪혀 낮게 울려퍼졌다.
'얼씨구? 여기도 있네.'
뼈의 잔해는 동굴 안쪽에서도 발견되었다. 아직 동굴 초입인데도 싸움이 제법 치열했었던지 뼈들이 아주 무더기라고 할만치 잔뜩 쌓여있었다. 그런데 뼈무더기 사이에 섞여, 반으로 쪼깨진 방패가 하나 눈에 띄였다. 금속으로 된 테두리가 심하게 녹슨 큼직한 방패였다.
"허어..."
잘 보니 방패의 크기가 큼직하다를 넘어서 어째 비정상적으로 컸다. 사람이 들면 거의 전신을 가릴 수 있는 카이트 실드 수준이랄까. 보통 이런건 전장에서 화살이나 석궁을 막는 방패병들이 운용할때나 볼 수 있는 물건인데. 몬스터와 싸울때 들고다닐 물건은 아니다. 그 점이 이상해서 잘 살펴보니... 손잡이가 이상할 정도로 크게 만들어져 있었다. 사람이 아니라 그보다 덩치가 훨씬 큰 상대가 쓸걸 상정하고 만들어진 것 같달까나.
'이거 사이즈가... 혹시.'
거인종인 코디악 족의 무구? 거인족 전사들이 이 동굴을 탐사하기라도 했단 말인가? 하긴... 코디악 족의 강력한 전투력이라면 이 수많은 몬스터의 잔해와 지나치게 큰 방패의 존재도 설명이 된다. 코디악 족은 평균 신장만 해도 2미터 50이다. 큰 개체는 3미터에 달하니, 온몸이 근육 덩어리인 그런 거인들이 휘둘러대는 무기는 그야말로 흉기 그 자체겠지. 곰만한 몬스터고 뭐고 그들이 휘두르는 도끼나 대검에 맞으면 일격에 끝일거다.
'아니아니, 코디악 족의 능력에 감탄할때가 아니지.'
그들이 진작 이 동굴을 탐사해버렸다면... 이건 진짜로 허탕치는 격이다. 그렇다고 여기까지 먼길을 왔는데 안 들어가 볼수도 없고.
"으휴."
진석은 재차 걸음을 옮겨 동굴 안으로 계속 들어가기 시작했다. 안쪽이 털렸거나 어쨌거나 자신의 눈으로 확인해 볼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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