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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베라 - 부회의 방랑자-94화 (94/155)

< --   - 8.   -- >         * 94화 *

무슨일이 일어나는건지 몰라 순간 긴장하는 진석. 하지만 빛은 서서히 증발하듯 사라지고 벌체의 시체가 있던 자리엔 자그마한 물건만이 하나 남겨졌다. 진석은 그쪽으로 다가가 남겨진 물건을 집어들고 살펴보았다. 뭔가했더니 이것은 숄더 가드, 즉 어깨보호대였다. 한 쌍이 아닌 한 짝으로, 왼쪽 어깨에 둘러멜 수 있는 어깨보호대로 긴 가죽끈이 달려있어 가슴에 사선으로 메어 고정시키는 형태였다.

- 에스카마도

방어력 : 40

설명 : 강철 겹비늘로 이루어진 어깨 보호대. 더할 나위 없이 튼튼해 보인다. 공격시 대상에게 소유자 전체방어력의 (5%) 만큼의 추가피해를 준다. 하루 1회 한정, 소유자의 잔여 체력을 상회하는 공격을 받을 시 이를 완전히 방어하는 마법을 자동으로 시전한다. 횟수는 자정에 리셋된다.

특징 : [내구극한], [추가피해], [특수기능 - 브로켈]

우왓, 이거 땡잡았다. 특수기능이 붙어있다니 꽤나 좋은 방어구인데? 게다가 어깨방어구 하나로 방어력 40이라니. 이 어깨보호대 하나가 거의 경금속갑 수준의 방어력이라는 얘기다. 반색하며 즉시 에스카마도를 왼쪽 어깨에 장착하는 진석.

"게다가 방어력이 높을수록 추가피해도 줄 수 있고..."

자신의 방어력이 100이라고 가정하면, 그의 5%인 5만큼의 추가데미지가 공격시 적용된다는 이야기. 중갑같은걸 입으면 유리하겠는걸? 허나 그보다 중요한건 특수능력 이었다.

"자동 방어 능력이라."

하루 1회 뿐이긴 하지만, 잔여 체력을 상회하는 공격을 받을시 이를 완전 방어하는 마법이 자동으로 시전된다니. 슈팅게임으로 치자면 잔여 목숨이 하나 더 붙어 있다는것과 다름 없다. 이건 정말 마음에 들었다. 자신이 피해를 입어 체력이 간당간당 위태로울때 최후의 일격을 한 번은 무조건 무효화 시킨다는 이야기니...

"하지만 하루 1회가 뭐야. 기왕 방어해주는거 넉넉하게 열댓번쯤 해주던가."

하긴 아이템 성능이 그랬다간 게임의 밸런스가 왕창 깨지겠지.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지금까지 입수한 특별한 방어구라곤 암살자의 망토 정도인데, 이건 투명화가 핵심인 물건이라 실상 방어력과는 무관한 장비였다. 하지만 이 에스카마도는 확실히 소유자를 지키기 위한 방어능력에 특화된 물건인것이다. 게다가 전체방어력에 비례해 적지만 공격시 추가피해도 줄 수 있고, 1일 1회 한정이지만 위급시 완전 방어 능력도 제공한다.

"이제서야 뭔가 좀 제대로 된 방어구를 하나 입수했구만."

뜬금없이 전투를 벌였지만 확실한 소득이 있었으니 기분은 좋다. 어깨에 장착한 에스카마도를 바라보며 뿌듯한 미소를 짓는 진석. 메뉴를 열어 스테이터스 창을 확인해 보았다.

- 이름

러셀 헤이든

- 종족

인간/남성

- 스테이터스

- 체력 : 219(+30) / 315

- SP : 201(+20) / 225

- 공격력 : 115(+16)

- 방어력 : 70(+65) + 2

통솔 20(+2) / 무력 46(+2) / 민첩 41(+2) / 지력 35(+2) / 정치 20(+2) / 매력 40(+2)

- 액티브 스킬

바일리 델 비엔토[A랭크] / 약학[B랭크] / 화염화살[A랭크]

- 패시브 스킬

해부학[C랭크] / 식물학[C랭크] / 예민한 촉감[B랭크] / 회피의 심득[E랭크] / 투척[E랭크] / 세인트 베네딕션[D랭크] / 승마술[E랭크]

무기를 안 든 상태로도 공격력은 131에 방어력은 137이라. 게다가 늘어나거나 상승한 스킬들도 그렇고 처음 시작했을때와 비교해서 생각해보면 이거 꽤 장족의 발전이다. 아 좋았어. 오늘은 열심히 일했으니 이제 돌아가자. 돌아가서 푹 쉬고, 가는길에 아이린씨의 집에 들러 가능하다면 한 번 더 질펀하게 불륜섹스나 저질러 볼까 게헤헤. 남의 떡이 더 맛있다더니 정말 그 말대로라니깐~

"...이 아니잖아! 아직 왼쪽 갈림길이 남았는데."

왠지 모르게 현실도피를 하고 말았군.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정신을 차리는 진석. 하지만 오늘은 일단 철수해야 할 것 같았다. 메뉴를 열어 게임상의 시간을 확인해보니 벌써 오후 3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어차피 횃불도 거의 다 타버렸고... 지금부터 동굴에서 빠져나가 산을 내려가는데만도 거의 두시간은 걸릴텐데 앞에 뭐가 더 있는지 모르는 이상 무리할 필요는 없지."

게다가 모르긴 몰라도 방금 상대한 벌레 몬스터보다 더 강한 적이 나오면 나왔지, 그보다 약한 상대가 나올것 같진 않았다. 현재 잔여 체력치는 약 6할. SP는 화염화살과 라파가를 각기 한 번씩 썼을 뿐이니 여유로웠지만 무리할 필요는 없었다. 진석은 일단 동굴의 위치를 확인하고 에스카마도를 손에 넣은걸로 만족하고 철수하기로 마음먹었다. 돌아나가는 길엔 횃불이 없으니 화염화살을 허공에 띄워 횃불 대용으로 삼았다.

"아 그나저나 제조키트가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산에서 내려가는 길에 가능한 약초라도 채집해 약이라도 몇개 더 만들 수 있었을걸."

현재 보유한 약품은 하급 체력회복제 세 개와 SP회복제 한 개뿐. 이거면 어지간한 적은 상대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썩 넉넉한 수량이라고 하긴 힘들다.

"맞다. 아이린씨가 전직 약재사라고 했었지? 그럼 제조키트 정도는 있었을테고 혹시 남는게 있다면 얻어올수도 있었을걸 생각을 못했네. 에라이."

투덜거리며 갈림길을 벗어나는 진석. 나가는 길에 힐끔 뒤를 돌아보았다. 아까 들어가다 멈췄던 왼쪽 갈림길. 아까도 들어가던 도중 그랬었지만 역시 저쪽은 뭔가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뭐, 내일 확인해보자."

낯선 장소고, 방금 생각치도 못하게 벌레와 싸우느라 신경이 곤두선 탓이겠지. 진석은 그렇게 생각하며 동굴을 빠져나갔다.

산에서 내려가는 길에 그런대로 눈에 보이는 약초를 몇뿌리 뽑아서 돌아온 진석. 별 대단한건 발견하지 못했지만 해독작용을 하는 두 가지의 약초를 발견할 수 있었다. 하나는 잎사귀가 효과가 있는거고, 다른 하나는 뿌리가 약효가 있는것이었다. 가공해서 약의 형태로 만드는게 제대로 된 효과를 내겠지만 뭐 대충 날로 씹어먹어도 그런대로 약간은 효과를 기대할 수 있으리라. 혹시 모르니 이것들은 파우치의 빈 공간에 쑤셔넣어두었다.

마을로 돌아와서는 말들을 풀어 주변에 드문드문 돋은 잡풀들을 뜯게하고, 미리 만들어 뒀던 장작들로 불을 피워 저녁 준비를 시작했다. 지니고 다니던 작은 팬에 기름을 약간 두른 후, 말린 고기를 썰어넣었다.

"그러고보니 이건 무슨 고기지? 사슴고기인가?"

모르겠다. 좌우지간 고기면 됐지 뭐. 고기는 종류를 가리지 않고 다 맛있는 법. 고기님 만만세다. 기름을 머금은 고기가 적당히 익어갈때쯤 양배추를 잔뜩 썰어 넣고 함께 볶았다. 너무 익히면 양배추의 식감이 다 죽으니 살짝만 익힌 후 소금 후추로 간을 하고 먹어보았다.

"...음~ 애매하다."

뭔가 이도저도 아닌 맛. 소금을 쳤으니 간은 충분히 되어 있었지만 고기부터가 보존을 위해 말린 고기라 꽤 뻑뻑했고, 양배추 역시 날로 기름에 살짝 볶았을 뿐이라 별다른 맛이 없었다. 여기다 뭔가 쟤료를 한두가지쯤 더 가미해서 볶았다면 맛이 살아날법도 한데... 하지만 뭐 이거저거 따질 처지도 아니니 그냥 우걱우걱 입에 밀어넣었다.

"공복도만 채우면 됐지."

꾸역꾸역. 빵과 함께 볶은 고기와 양배추를 다 먹어치웠다. 대충 뒷정리를 하고 어슬렁거리던 말들을 데려다 다시 묶어놓고 나니 해가 산 너머로 모습을 감추었다. 하늘이 어둑해지고 있었다.

"별로 한것도 없는 것 같은데 또 하루가 갔군. 시간 잘 간다."

진석은 왜건에 실려있던 방수천과 모포, 그리고 아이린이 준 술병을 하나 꺼내들고 회관안으로 들어갔다. 바닥에 방수천을 깔고 벽에 기대어 앉으며 모닥불에 장작을 두어개 더 던져넣었다.

'그러고보니 이걸로 며칠째지? 대지의 눈 회수 명령으로 교단을 떠난게...'

술병을 따고 병째로 한 모금 마시는 진석. 무슨 술인가 했는데 와인이었다. 하긴 아이린의 집에서 머물때도 그녀가 내온 술은 와인이었지. 아이린이 와인을 좋아하는걸까?

'아니아니. 술이 뭐냐가 중요한게 아니지. 그보다 어디보자. 맨처음 배를 타고 이동했던게 약 2주. 그리고 시라즈에 머무르고 아라파를 떠나는데까진 약 한 달. 아라파를 벗어나 비덴하임에 도착해서 여기까지 오는데 대충 일주일. 합이 총 7주. 헉. 그럼 벌써 두 달 가까이 된거야?'

진짜 시간 잘 가는구나! 만약 내일내로 동굴의 탐사를 마치고 이동에 전력을 다한다고 해도 그란델이나 교단까지 돌아가는데 앞으로 대충 3주는 걸릴터. 아니 그보다 약 7주 가량이나 게임속에서 시간을 보냈으니... 게임의 하루는 현실의 10분이니, 현실상 시간으로도 벌써 8시간 가량 흘렀다는 이야기다.

'이런, 너무 푹 빠져서 시간이 이렇게 지난줄도 몰랐네. 할 수 없지. 일단은 여기서 저장하고 좀 쉬어야겠다. 재한이 새끼 문병갔다 아까 점심나절에 집에 돌아오자마자 시작했으니... 완전 저녁이겠구만.'

진석은 술병을 내려놓곤 자리에 누워 저장을 하고 메인메뉴로 돌아갔다. 그리고 서둘러 게임종료. 게임을 종료한 후 헤드기어를 벗자 어두컴컴한 방안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으... 아이고고 허리야. 게임을 할땐 몰랐는데 배도 고프고 오줌보도 터지겠고."

어둑한 집안의 불을 켜곤 화장실부터 들어가 볼일을 보고 나온 진석. 그리곤 오늘 장봐온 인스턴트 식품과 반찬들로 적당히 저녁상을 차렸다. TV를 켜고 그 앞에서 저녁을 먹고나니 시간은 10시 반을 넘어서고 있었다.

"아 또 이렇게 일요일이 가는구나. 아 월요일 싫어."

내일 또 출근해서 한 주 동안 일할 생각을 하니 벌써 생각만으로도 고되다. 한 숨을 내쉬며 바닥에 퍼질러 눕는 진석. 그리고 바닥에 누운채 한참이나 핸드폰으로 몇몇 인터넷 사이트나 친구들의 SNS를 확인해 본 진석. 잠깐 본 것 같은데 그새 11시가 훌쩍 넘었다. 진석은 세상 만사 다 귀찮다는 듯한 태도로 몸을 일으켰다.

"귀찮아도 설거지는 해야지만서도... 누가 좀 대신 해줬으면."

자취생활이 제법 몸에 익긴 했어도 귀찮은건 귀찮은거였다. 이럴땐 차라리 집에 있을때가 그립긴했다. 그야 집에 있으면 엄마가 밥차려주지, 빨래도 해주지, 청소까지 해준다. 그것만으로도 집은 넘치도록 편안한 곳이었다.

"집안일이라..."

싱크대에 그릇을 쏟아넣고 물을 트는 진석. 수세미에 액상 세제를 뿌리고 그릇들을 벅벅 문지르자 하얀 거품이 잔뜩 일어났다.

"결혼하면 좋으려나?"

게임상에서 마지막으로 접한 이성은 아이린이었다. 아이린은 이미 결혼을 해서 남편이 있는 유부녀. 자신은 그녀와 불륜을 저질렀었다. 남편인 시무스가 자신의 레인저 일을 위해 마운틴 혼 종의 늑대로 변신, 우두머리로서 무리를 통솔하고 위엄을 세우느라 암컷들과 관계하는것 때문에 화가 나 자신도 불륜을 저질러 보고 싶었다던 퍽 어처구니 없는 이유. 자신이 주도한 것은 아니었다. 아이린이 먼저 자신을 속이고 마비차를 먹여 관계하게 됐었으니까. 꽤 예쁜데다가 사람을 대하는 태도도 포근하고, 이래저래 잘 챙겨주는 점이 맘에 들었었다. 그런 아내가 있다면 좋겠지만...

"...아서라. 현실이 그렇게 만만하겠냐."

게임은 게임. 현실은 현실이다. 결혼을 하고 싶거든 졸업하고 취업부터 해야지. 아니, 그전에 결혼을 논할만한 애인이나 먼저 사귀어야 할터.

"애인은 커녕 내일 출근할 일부터가 지겨운데 내 처지에 무슨..."

그렇다. 남중 남고를 나온 진석은 지금까지 현실의 여자완 별 접점도 없었고, 대학 동기들을 통해 소개팅이라도 받고 싶어도 현재는 휴학중에다가 일을 하고 있었으니 시간적으로 여유롭지 못했다. 물론 시간을 내려면 주말에라도 만남을 주선해볼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소중한 주말을 포기하면서까지 당장 연애가 절박한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지금 코 앞에 다가온것은 월요일. 일터에 나가면 주말이 오기전까진 또 하루종일 수많은 짐들에 치여 허덕거려야 한다.

"현실은 참... 화사한 잿빛이구만."

설거지를 마친 진석은 욕실에 들어가 씻고 나와 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잠자리에 누워 여느때처럼 리베라에서의 플레이 내용을 복기해 보았다.

'이번엔 꽤 길게 여러가지를 했는걸. 교단에서 레오노르 공주를 약으로 세뇌시키고 임신시킨다음... 미녀 무희를 좋아한다는 알 유세프의 눈에 들기 위해 여, 여자로 변해서 배를 타고 아라파로 가다 중간에 셀린과 르마쿠르 자매를 만났지. 아라파에 도착해선 정체를 감추고 생활하던 후타나리 알 유세피나에게 접근하는데 성공했지만, 대지의 눈은 엉뚱하게도 도적단 사라크에게 뺏긴 상태. 그거 찾는답시고 하디카에서 소란을 피워 론소와 라나, 바노르 등을 만나고... 세 조직연합인지 뭔지 무너트린다고 하는 계획에 알 유세피나의 왕위 찬탈건을 끼워맞춰 결국 알 유세피나가 여왕이 되게 만드는데 성공. 이후엔 완전한 여자의 몸을 얻은 알 유세피나에게도 의도치 않게 아이를 가지게 해놓곤... 피터슨의 메모를 따라 아라파를 벗어나 비더하임의 동굴로.'

정말 꽤나 길구만. 대충이나마 이렇게 쭉 정리해놓고 보니 쓸데없을 정도로 파란만장하다는건 잘 알겠다. 의도한건 아니지만 정말 산전수전 다 겪었다. 여객선에선 해적들과도 싸웠고 아라파에선 여러 조직들이나 귀족들의 사병과도 엄청 싸워댔다. 이래저래 리베라 세계의 인구수 감소에 큰 공헌을 하고 있구나. 아, 그러고보니 그란델 쪽의 상황은 어떠려나? 꽤 시간이 지났는데 미리안의 계획대로 레오노르 공주는 여왕의 자리에 올랐을까? 7주 정도면 슬슬 배가 불러오려나? 아직 멀었나? 진석은 자리에 누운채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천천히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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