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8. -- > * 95화 *
이러니 저러니 해도 일주일은 쏜살같이 지나갔다. 새벽같이 통근버스를 타고 출근해서 하루종일 몸을 쓰며 일하다 녹초가 되어 퇴근하는 저녁. 평일엔 일을 마치고 자취방에 돌아와 씻고 자기 바빴다. 물론 컴퓨터로 웹서핑 정도는 해도, VR기어는 전혀 켜지 않았다. 그리고 금요일. 퇴근 후엔 진석이 일하는 파트의 직원 회식이 있었다. 뭐 이런 회식자리가 썩 좋은건 내키는건 아니었지만 술과 고기가 공짜 아닌가. 몸을 쓰는 일터다보니 다들 잘 먹는터라 이따금 생기는 이런 회식자리에선 아무리 먹어대도 뭐라는 사람 없었다. 되려 은근히 잘 먹는걸 과시하는 분위기마저 있었달까? 그러니 괜히 눈치같은거 안보고 편안히 먹어도 괜찮았다. 고깃집에서 1차 회식후 하우스 맥주를 파는 호프로 2차까지 따라간 진석. 몇몇 직원들은 3차를 가자느니 노래방을 가자느니 떠들어댔지만, 슬슬 자리를 파하는 다른 직원들에 섞여 진석도 슬쩍 빠져나왔다.
자취방에 돌아와선 씻기는 커녕 옷도 제대로 안 벗고 그대로 뻗어 잠들었다. 하루종일 고된 일을 하고 술까지 배불리 마셨더니 너무 피곤하고 다 귀찮았던 것이다. 그리고 쿨쿨거리며 실컷 자다 목이 타서 눈을 떠보니 방안은 훤히 밝아져 있었다. 시계는 아침 9시를 조금 넘긴 시간을 알리고 있었다. 냉장고로 달려가 물부터 잔뜩 들이키고,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며 정신을 차렸다. 그런데 어째 몸에서 어제 회식때 먹은 고기냄새라던가 끈적한 알콜향이 나는것 같아 우선 샤워부터 하고 나왔다. 숙취는 없었지만 왠지 얼큰한게 먹고 싶어져 중국집에 짬뽕이라도 시켜먹을까 했는데 생각해보니 아직 이른 시간이라 문을 안 열었겠다 싶었다. 그냥 라면을 끓여 TV 앞에서 먹었다. 설거지를 하고 나니 대충 10시.
"자 그럼 볕도 좋고... 빨래해야지. 으으."
빨래래봐야 속옷이나 양말 위주다. 빌트인 드럼세탁기에 빨랫감을 몽땅 쏟아 넣고 세탁기를 돌렸다. 빨래를 돌리는 와중 가볍게 방청소도 했다. 평일엔 일하느라 밖에서 지내고 원룸 자취방에 돌아와선 그저 잠만 자는데도 청소 할때마다 구석구석에서 먼지나 머리카락, 체모 같은게 잔뜩 나왔다. 도대체 어디서 이만큼이나 생겨나는거야? 방구석에서 저절로 돋아나는게 아닐까 하는 바보같은 생각마저 들었다. 청소를 마치고 TV를 보며 잠시 시간을 보내다보니 세탁기가 다 돌아갔고, 탈수된 빨랫감을 건조대에 널고 나니 왠지 모르게 지쳤다.
"어째 갈수록 느는건 살림뿐이구만. 게임이라면 가사 스킬 랭크라도 올랐을텐데."
컴퓨터에 전원을 넣고 게임 정보 사이트에 들어가 리베라에 대한 뉴스나 다른 유저들의 글을 좀 읽었다. 뭐 별다른 뉴스는 없었다. 다른 유저들의 플레이 내역을 좀 읽다가 VR기어를 켰다. 몇몇 버그나 오류수정을 위한 패치가 있었기에 잠시 기다려야 했다. 기다리는 동안 게시판에서 정보상 피터슨에 대해 검색해봤다. 몇 건의 글이 나왔지만 별 다른 정보는 없었다. 미녀 인간 노예를 데리고 있는 라케르투스 족 정보상 NPC가 있어서 특이했다는 감상 정도?
짤막한 글들의 내용을 종합해보니 피터슨은 게임을 시작할때마다 랜덤한 도시에 무작위로 자리를 잡는듯 했는데, 진석처럼 그를 쓰러트리고 빼앗은 수첩의 단서로 던전까지 찾아갔다는 사람은 없었다. 리베라 유저가 한두명도 아니니 진석 말고도 피터슨을 죽이고 수첩을 빼앗은 사람이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그런 정보를 게시판에 남긴 사람은 없었다. 진석은 자신이 피터슨과 싸워 쓰러트린 일, 그리고 수첩에서 얻은 정보, 그리고 던전에 대해 간략히 글을 남겼다. 그러고나니 VR기어의 패치가 완료되어 있었다. 자리에 앉아 헤드기어를 눌러쓴 다음 장장 한주만에 다시 리베라의 세계로 돌아갔다.
"...음 되게 오랜만인 기분인데."
눈을 뜨며 몸을 일으켜보니 먼지나 거미줄, 잡동사니가 가득한 어느 방 안. 이더스 마을의 회관 안이었다. 눈앞엔 모닥불이 타오르고 있었고, 자신은 방수천 위에 앉은채였다. 바로 옆엔 딱 한모금 먹은 와인병이 놓여있었다. 와인병을 쥐고 벌컥벌컥 들이키자 달큰한 향기와 함께 텁텁하면서도 쌉쓰레한 탄닌의 맛이 느껴졌다.
"어디까지 했었지?"
와인을 잔뜩 들이킨 후 그대로 잠시 앉아 이전의 플레이 내역을 떠올려보는 진석. 아 맞다. 동굴의 갈림길에서 우측길의 탐사를 마치고 되돌아 나왔었지. 이후 저녁을 먹고 휴식을 취하던 참이었고. 간만에 게임을 하자니 현실과의 스위치 전환이 바로 되지 않았다. 와인을 홀짝거리며 메뉴를 열어 자신의 상태를 확인해 보거나 무기들을 점검해보고, 손가락 사이로 단검을 빙글빙글 돌리거나 가지고 놀며 워밍업하듯 천천히 스위치를 전환시켰다.
"뭐 그럼 오자마자지만 스킵으로."
자리에 누워 시간을 스킵시켜 날이 밝게 만들었다. 수초가 지나자 활활 타오르던 모닥불은 빠르게 사그라들었고 뻥 뚫린 창문으론 밝은 햇살이 새어들어오는게 보였다. 진석은 시간을 간단히 아침으로 되돌린 다음 방수천을 걷어 왜건으로 나갔다.
"왼쪽길이 남았던가. 빨랑빨랑 끝내야지. 안 그래도 돌아가는 길도 먼데 여기서 계속 묶여있을수도 없는 노릇이고."
왜건에 실려있던 음식들을 대충 꺼내 적당히 공복도를 채운 후 다시 산에 올라갈 채비를 마쳤다. 뭐 채비래봐야 적당한 길이의 목재끝에 안입는 옷을 찢어 두르고 기름을 잔뜩 적셔 횃불로 만드는 것 뿐이었지만. 횃불을 만든 후 허리에 벨트를 두르고, 사막의 쉼터에서 구입했던 가죽갑옷을 입은 후 새로 얻은 어깨 보호대인 에스카마도를 장착하고 마지막으로 암살자의 망토를 둘렀다. 그렇게 준비를 마치고 산으로 향했다. 게임상에선 하루지만, 현실로는 장장 일주일만에 다시 가는 길이라 조금 헷갈렸다. 하지만 해독본 메모도 있었고 일단은 한 번 지났던 길이기도 하니 산을 오르는 동안 점차 지난번의 기억이 되살아나며 금새 동굴까지 다다를 수 있었다. 화염화살로 횃불에 불을 붙이고 안으로 들어섰다.
"여전히 살풍경 하구만."
어둑한 동굴과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몬스터들의 뼈 무더기. 발길에 채이는 뼛조각들을 툭툭 발로 걷어차며 안으로 들어갔다. 한참을 들어가니 저번과 같은 갈림길이 다시 앞에 나타났다. 오른쪽은 볼일 없으니 당연히 왼쪽으로 들어가는데 왠지 모르게 또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이거 뭐야 자꾸?'
그러고보니... 아라파의 하디카 뒷골목에서 라나와 바노르에게 습격당할 때였던가. 투명화를 건 바노르가 자신의 뒤를 칠때 처음으로 뒷통수가 뭔가 싸한 기분을 느꼈었고, 뒤도 안 돌아보고 금화주머니를 내던진덕에 불의의 일격을 맞지 않을 수 있었다. 근데 여길 들어가고 있자니 그때와 비슷한 기분이 들었다.
'저번주, 아니 게임상으론 어제인가. 아무튼 전에도 여기 들어갈때 뭔가 계속 찝찝했었는데 오늘도 똑같은 기분이 든단 말이지?'
이쯤되면 아무리 둔한 자라도 눈치챌 수 있을터. 이쪽 길 안엔 분명 뭔가가 있다. 그런 확신이 들었다.
'오른쪽 길에도 꽤나 강한 벌레 몬스터가 있었지만 이런 기분은 안 들었단 말야? 그럼 이 왼쪽길에 있는건 뒷골이 서늘할 정도로 훨씬 강한... 그런게 있단 말인가?'
우뚝 멈추는 진석의 발걸음. 순간 이거 계속 들어가도 되는걸까 하는 불안감이 몰려왔다.
'피터슨 이 새끼... 비보는 무슨 얼어죽을. 비명횡사 하는거 아닌가 모르겠네.'
에라이, 못먹어도 고다. 세이브를 안해놨다면 주저했을테지만 지금은 어차피 바로 코 앞 이더스 마을 회관안에 저장이 되어 있는 상태니 죽으면 로드하면 그만이다.
'현실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그냥 뒤돌아 나가는게 똑똑한거겠지만 게임이니 부담없이 들이댈수도 있지. 어차피 뭐 죽기밖에 더하겠냐.'
마음을 고쳐먹고 계속 길을 따라 걸어들어가는 진석. 길은 점점 좁아져 이제 딱 한사람 간신히 지날 정도로 줄어있었다. 길은 묘하게 구불구불하게 휘어지며 산 깊은 안쪽으로 내려들어갔다.
'꽤 긴데?'
어둠속에서 홀로 좁은길을 한참 걷는터라 시간감각이 모호해졌지만, 분명 적지 않은 시간을 걸었다. 한 20분쯤은 계속 걷기만 했을까? 이 좁은 길이 대체 어디까지 이어지는건가 싶을때쯤 꺾어진 앞쪽에서 빛이 새어나오는걸 발견했다.
'드디어 뭔가 나왔군. 근데 빛이 어째 채도가 낮고 침침한게, 야광석 빛이랑 비슷한데?'
좁은길을 벗어나자 넓직한 공간이 나타났다. 가로 세로 20미터에, 높이는 3~4미터쯤 되는 사각의 공간. 벽에는 큼직한 야광석들이 규칙적으로 박혀있었다. 그것만 봐도 누군가 인위적으로 내부에 손을 댔다는 느낌이 들었다.
'여긴 또 뭐야.'
점점히 박혀있는 야광석들 아래로는 벽면이 반듯하게 깎아져 있었고, 뭔가 글씨가 잔뜩 새겨져 있었다. 무슨 글인가 하고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라케르투스족의 언어였다. 사면의 벽 가득 글씨들이 음각되어 있었지만 하나도 알아 볼 수 없었다.
'이런... 또 이딴 지렁이 기어가는 것 같은 글씨라니. 뭐라고 쓴건지 알 수가 없잖냐.'
진석은 투덜거리며 방안을 좀 더 둘러보았지만 별다른건 없었다. 우연히 방 한쪽 구석에서 다 삭아가는 손바닥만한 작은 나무 상자를 발견하긴 했는데, 안은 텅 비어있었다. 그외에 있는거라곤 들어온 길 맞은편에 또 다른 통로가 뚫려있다는 것 정도?
'도대체 뭔지 모르겠네.'
비보라는건 대체 얼마나 더 들어가야 나오는거야? 그렇게 생각하며 맞은편의 통로로 들어서려는데 발에 뭔가 달칵 하고 밟히는 느낌이 났다. 뭐지 하며 아래를 내려다보니 통로의 입구 바로 아래쪽의 평평한 사각 돌이 마치 무슨 발판처럼 발에 눌려 안쪽으로 한치쯤 들어가있었다. 동시에 어디선가 덜컹하고 기관장치가 작동되는 소리가 났다.
'이런 씨! 트랩인가?!'
당황하며 멈칫하는 사이 눈 앞에서 드르륵 하고 철창이 내려와 통로를 막아버렸다. 들어왔던쪽의 입구도 마찬가지.
'이, 이건 그냥 바닥의 돌이나 다름없는데 누가 이걸 발판이라고 생각해서 피해서 가냐고? 악랄하다!'
어디서 뭐가 나타날지 몰라 주변의 경계하는데, 벽에 규칙적으로 박혀있던 야광석들 여러개가 바닥으로 툭툭 떨어지더니 그 안쪽에서부터 뭔가 스멀거리며 기어나오기 시작했다. 뭔가 해서 집중해서 살펴보자니 시커멓고 반투명한 젤리같은 부정형의 물질이 구멍사이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 블랙큐브.'
블랙큐브. 다른 유저들의 글로만 들었지 게임상에서 실제 보는건 처음이었다. 블랙큐브는 한 마디로 하자면 검은색 슬라임이었다. 정해진 형태가 없이 흐물거리는 부정형의 생명체지만, 가만히 내버려두면 왠지 모르게 정육면체의 형태를 갖추기에 큐브라고 불렸다. 벽에 박혀있던 야광석을 떨어트리고 거기서부터 흘러나온 블랙큐브들의 숫자는 대략 스물가량. 하지만 이놈들을 우습게 볼건 아닌게 철이나 나무로 된 무기로는 이것들에게 피해를 줄 수 없었다. 몸에서 강력한 고농도의 산과 효소를 뿜어내 다 녹여버렸던 것이다. 사람이 블랙큐브에 닿을 경우 닿은 부위가 산채로 녹아내렸다.
'하지만...'
블랙큐브는 불과 마법 공격에는 전혀 내성이 없어 엄청나게 취약했다. 진석을 감지하고 이쪽으로 꾸물거리며 다가오는 블랙큐브 무리에게 횃불을 슥 가져다대자 놈들은 열을 감지하고 질겁하며 횃불에서 멀어지려 애썼다.
'이것도 트랩이라고. 하!'
코웃음을 치며 화염화살을 시전한 진석. 그것을 블랙큐브의 무리에게 쏘아냈다. 화염화살을 맞은 블랙큐브는 치이익 하고 타들어가, 고약한 냄새를 내며 바람빠진 풍선처럼 삽시간에 쪼그라들었다. 한 마리당 두 발 정도를 맞추면 블랙큐브는 검은 점액질 찌꺼기가 되어 완전히 타죽었다. 진석은 몇 번이고 반복해서 화염화살을 시전해 블랙큐브 무리를 다 쓸어버렸다. 그러고나니 안쪽 공간엔 블랙큐브가 타며 낸 고약한 악취가 진동했다. 흡사 고무 타이어가 타는 냄새 같았달까?
'아오 냄새.'
코를 막으며 손을 휘휘 젓는 진석. 허나 블랙큐브를 다 쓰러트렸음에도 철창은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음... 어떻게 해야하지?'
철창을 가만 보니 오래되어 그런지 좀 녹슬어있다. 발로 차서 우그러트리거나 부서트려? 아니, 아니다. 괜히 그러다 뭔가 잘못 건드리면 기관장치가 무너져 길이 완전히 막힐지도 모른다. 끄응 하며 고민하던 진석은 바닥에 굴러다니던 주먹만한 야광석을 집어들었다. 벽에 뚫린 구멍에 꼭 맞게 깎아진 야광석 덩어리. 진석은 아무 생각 없이 야광석을 벽에 끼워넣었다. 그러자 쿠구궁하고 뭔가 안쪽에서 기관장치가 살짝 작동하는 소리가 났다.
'어랍쇼?'
혹시나 싶어 바닥에 떨어진 야광석들을 전부 주워 하나씩 각 구멍에 맞게 도로 끼워넣었다. 서너개를 끼워넣을때마다 뭔가 조금씩 작동하는 소리가 나더니, 마지막 야광석을 다 끼워넣으니 우르릉 하고 철창이 올라가고 길이 열렸다.
"......"
뭐야 이게. 어쩐지 되게 허무하고 바보같은 장치다. 라케르투스 놈들의 감성은 이해할수가 없었다. 하긴 원래 라케르투스는 불이나 얼음에 약하니, 자신이 라케르투스였다면 이런식으로 간단히 블랙큐브를 물리치지 못했을지도 모르지. 진석은 다시 발판을 밟지 않게 주의하며 앞쪽의 길로 나아갔다. 들어올때보다는 조금 넓은편이었지만 여전히 좁다란 길이 쭉 이어졌다. 그렇게 한 5분쯤 나아갔을까? 이전 벌레와 싸웠을때와 비슷한 크기의 커다란 공동이 나타났다.
'여긴 또 뭐냐.'
다른점이 있다면, 이 공동 안에는 야광석이 어마어마하게 많이 박혀 있다는것. 딱히 횃불에 의지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환했다. 이 안의 광도는 나트륨 등을 켜놓은 밝기 정도는 되었달까? 그리고 공동 한 가운데에 크고 작은 돌이 차곡차곡 쌓여진 제단 비슷한 것이 만들어져 있었다.
"저건가..."
제단쪽으로 다가서는 진석. 사각의 제단 사방엔 깃발같은게 세워져있고 그 중앙엔 가로세로 두 뼘쯤 되는 상자가 놓여있었는데, 마치 상자에 손대지 말라는 듯 금줄 비슷한게 같은게 깃발의 깃대를 따라 주위에 빽빽히 둘러쳐져 있었다. 혹시 뭐 다른건 없나 싶어 주변을 좀 더 살펴보았는데 달리 또다른 통로나 눈에 띄는 물건은 없었다. 여기가 동굴의 가장 심부가 맞는 것 같았다.
"그럼 비보는 저 상자안에 들어있는건가."
하지만 묘한 깃발이 세워져있고 금줄로 사방을 둘러놓은게 이건 누가봐도 건들지 말라는 경고의 의미 같다. 진석은 슬슬 꺼져가는 횃불을 바닥에 던져놓곤, 제단으로 다가가 흑철단검과 란비언을 뽑아들고 금줄을 팍팍 베어버렸다.
"앗! 저질러 버렸다~ 여기까지 와서 금줄따위 쳐져있다고 물러설듯 싶냐?"
금줄을 끊어버렸지만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흠, 뭐 그냥 폼이었나보군. 그리고 상자로 다가가 손을 뻗으려는 순간, 갑자기 공동 안에서 우우웅 기묘한 진동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으. 혹시나 했지만 역시 공짜는 없구만. 좋아, 뭐든 나와봐라."
주변을 경계하며 전투자세를 취하는 진석. 그런데 갑자기 제단 사방에 서있던 깃발들이 퍽퍽 소리를 내며 타오르기 시작하더니 저쪽에서부터 희미한 영체들의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어... 엇?!"
우와아아 하며 제단 앞에 서있는 진석을 향해 무작정 달려들기 시작하는 영체들. 잘 보아하니 그것은 라케르투스 족 전사의 차림을 한 유령들이었다! 만도나 둔기 같은 무기를 머리높이 치켜들고 함성을 지르며 달려드는 그들. 희끄무레하고 반투명한 라케르투스 족 전사들의 영혼은 공동 안 여기저기서 나타나 한 가운데에 있는 진석을 노리고 맹렬한 적의를 품은채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 숫자는 무려 일백은 되어보였다.
"자, 장난하냐?!"
이제와서 유령전사들이라니. 그것도 하나둘도 아니고 어림잡아 백이라니. 일당백이라는 말은 흔히 쓰이는 표현이지만 뜬금없이 눈앞에 닥치니 이것 참 기도 안찬다.
'아니 그리고 지금 문제는...'
잘 기억은 안나지만 분명 지젤 왈, 란비언을 만들때 마법금속인지 뭔가를 심지로 사용했다고 들었었다. 그럼 란비언으론 저들에게 타격을 줄 수 있을것 같았지만 흑철단검은 그냥 지극히 평범한 무기다. 아무 처리가 되지 않은 평범한 무기로 유령들에게 피해를 줄 수 있을리 만무하다.
"이익!"
왼손에 들고 있던 흑철 단검을 집어넣고, 바닥에 내려두었던 횃불을 급히 집어드는 진석. 그냥 횃불일 뿐이라도 불이라면 유령을 물러나게는 할 수 있을터. 하지만 이건 임시로 대충 만들었던 횃불이라 이미 다 꺼져가고 있다는게 문제다. 그 사이 라케르투스족의 유령전사들은 우와아아 하고 귀가 웅웅 울리는 메아리같은 함성을 내지르며 진석에게 육박해왔다.
"뒈졌으면 얌전히 저승에나 갈 일이지 뭐냐 이 자식들! 안꺼져?"
과감히 유령들 사이로 뛰어들며 란비언과 횃불을 휘두르는 진석. 헌데 유령이라 그런지 손맛은 전혀 없었다. 맨 선두에서 달려오던 두 유령중 란비언을 맞은 유령은 카악하고 괴로운 외침을 지르며 허공에 산산히 녹아들듯 사라졌고, 횃불에 맞은쪽은 담배연기처럼 후욱 흩어지나 싶더니 잠시 후 재차 다시 형상을 갖추고 덤벼들었다. 란비언은 확실히 데미지를 주지만 횃불은 일시적으로 멈칫하게 만드는 정도의 위력밖에 없는 것 같았다.
'젠장. 이럴때 성직자가 있어야 하는데.'
원래 언데드 계열엔 성직자의 신성력이 즉효다. 수가 많아도 기도로 물리치거나 무기에 축복을 내려 쉽게 상대할 수 있게 해줄 수 있는것이 성직자. 하지만 현재 진석이 아는 성직자라곤 허신의 대신관인 미리안 밖에 없었다.
'망할... 란비언 한 자루로 어느 세월에 잡아!'
진석은 자신을 향해 무기를 휘두르거나 주먹질, 발길질을 해대는 유령들 사이를 요리조리 빠져나가며 란비언과 횃불을 휘둘러댔다. 그나마 상대하기 쉬웠던것은 무기나 횃불이 유령들을 관통했다는것이다. 빠르게 달려나가며 란비언이나 횃불을 쭉 훑어버리면 알아서 비명을 내지르며 사라지거나, 혹은 흩어졌다 다시 모습을 갖추느라 한동안 제자리에서 꼼짝 못했던 것이다. 한참 이리저리 날뛰며 란비언과 횃불을 휘두르는데, 불씨가 간당간당 하던 횃불은 진석이 휘두르는 풍압에 결국 후욱 하고 다 타서 꺼져버렸다.
"이런!"
횃불을 경계하던 유령들이었지만 결국 다 타서 꺼져버리자 얼씨구나 좋다하고 덤벼들기 시작했다. 진석은 횃불을 내던지며 정면으로 달려드는 유령들에게 손바닥을 내밀었다.
"화염화살!"
파파팟! 세발의 화염화살이 불꽃의 궤적을 남기며 유령들에게 명중했다. 위력이 약해서 단발로 소멸시키진 못한듯 했지만 몸이 반쯤 흩어지며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니 마법의 불꽃은 보통 횃불과 달리 확실히 유령에게 큰 타격을 주는것 같았다. 진석은 재차 화염화살을 만들어 몸 주위에 방어벽처럼 띄워놓으며 유령들에게 달려들어 란비언을 휘둘러댔다. 진석의 몸 주변에 화염화살이 둥둥 떠있자 유령들은 함부로 덤벼들지 못하고 되려 거기에 부딫히는게 겁난다는듯 움찔거리며 물러났다.
'원래 불에 약한 놈들이니 유령이 되어서도 겁을 내는구만!'
신이 나서 시클론을 걸고 더 미친듯이 날뛰기 시작하는 진석. 아무도 붙잡을 수 없을만치 빠르게 내달리며 란비언을 한 번 휘두를때마다 유령들 서넛이 산산히 흩어져 사라지는데다가, 주변엔 화염화살까지 빙글빙글 떠돌아 다니니 유령들은 근접도 못하고 무력하게 당하기만 했다. 그렇지 않아도 지금까지 진석이 해온 싸움의 대부분은 죄다 일대 다수의 난전이었다. 아무리 상대의 숫자가 많아도 나름 익숙한 상황. 게다가 상대가 제대로 접근이나 반격도 못하는데 어려울 것 없었다. 일백이나 되었던 유령들이었지만 삽시간에 그 수가 반 가까이 줄어들었다.
"하! 누워서 떡먹기인데? 자자 다들 빨리 성불이나 해라!"
물론 어떤 유령들은 과감히 나서며 무기를 휘둘러 반격해왔지만, 시클론을 건 진석에겐 일부러 맞아주지 않고서야 도무지 적중할 수 없는 공격이었다. 전부 가볍게 흘려내며 란비언으로 반격해 산산히 흩어버렸다. 그런데 순간, 제단의 사방에서 활활 타고 있던 깃발들이 콰아아 하고 한층 더 강렬히 불타오르는것이 보였다.
"뭐, 뭐야?"
뭔가 싶어 제단쪽을 바라보자, 제단의 위쪽 허공에서 엄청나게 거대한 무언가가 뭉게뭉게 형상을 이루기 시작했다. 금새 모습을 갖춘 그것은...
"요... 용머리?"
집채만한 용의 머리 형상이 허공에 떠올랐다. 유령들과 비슷하게 반투명한 영체의 형태였지만 그것은 분명 용의 머리였다. 용의 머리는 눈을 두어번 꿈뻑하더니 이내 진석을 발견하곤 잔뜩 인상을 쓰더니 크와아아아 하고 귀청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뇌성같은 포효를 내질렀다.
"크윽!"
용의 포효가 공동안을 가득메우자... 갑자기 화면 하단에 디버프 아이콘들이 속속 떠오른다! 스턴 상태에 일시적 스테이터스 저하, 공격력 저하, 방어력 저하, 이동 속도 감소, 스킬 위력 감소, 마법 공격력 저하, 마법 저항력 저하... 대, 대체 뭐냐 이 말도 안되는 디버프 종합 선물 세트는? 주, 죽으라는 거냐?! 게다가 용의 포효에 영향을 받은것인지 아직 주변에 잔뜩 남아있던 라케르투스 족 유령 전사들은 무슨 풍선 처럼 퍽퍽 하고 연속으로 터져나가며 전부 한 줌 연기가 되어 사라져 버렸다. 이제 공동안에 남은것은 용의 머리와 진석 뿐이었다.
"크르르... 스흐으으으, 크아아아아-!!!"
포효를 내지른 용의 머리는 갑자기 잔뜩 숨을 들이키나 싶더니 진석을 향해 입을 쩌억 벌리고 목구멍 안쪽에서부터 뭔가를 쏘아내기 시작했다! 진석이 리베라 게임 상에서 용이라는 존재를 보는건 처음이었지만, 용이 입을 벌리고 뭔가를 쏘아낸다면 그것은 하나 밖에 없지 않은가?
"브, 브레스 웨폰!"
용의 포효로 스턴에 걸려 거동이 힘든데다 온갖 디버프가 다 걸린 상태에서 브레스 웨폰이라니! 너무하잖아! 나는 이제 죽었다! 눈을 질끈 감는 진석의 몸 위로 흡사 파도같은 기세의 폭염이 작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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