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8. -- > * 96화 *
'젠장! 젠장젠장젠장! 몇번이고 찜찜하던 예감의 정체가 이거였단 말인가? 아니 그보다 애당초 이딴걸 어떻게 피하라고! 다시 로드해서 여기까지 온다고 쳐도 용의 포효부터가 도저히 피할 방법이 없... 어라?'
분명 콰아아아 하고 자신에게 브레스가 쏟아지는 소리가 들리긴 하는데... 어째 아무렇지도 않다? 뭔가 이상한 느낌에 슬쩍 눈을 떠보는 진석. 용의 아가리에서 쏟아진 맹렬한 불길이 주변을 가득 메우고 있었지만 자신의 몸 주위에 푸르스름한 원구형의 방어벽이 형성되어 브레스를 전부 흘려보내고 있는게 아닌가? 그리고 방어벽과 공명하듯 왼쪽 어깨에 장착한 어깨보호대 에스카마도가 맹렬히 빛을 발하고 있었다.
"아... 아아. 맞다."
얻은지 얼마 안된 물건이라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에스카마도에는 하루 1회 한정, 자신의 잔여 체력 이상의 공격이 가해질 경우 어떠한 종류의 공격이든 막아준다는 특수기능이 붙어있었다. 이 푸르스름한 방어벽이... 에스카마도에 특수기능으로 붙어있는 브로켈이라는 마법인가? 아무리 그래도 용의 브레스 웨폰까지 아무렇지않게 막아내다니, 대단한데?
"아니. 대단한데~가 아니잖아! 한 번이야 어떻게든 막았지만 한 번 더 브레스를 쏜다면..."
그땐 진짜 끝이다. 게다가 지금 자신의 체력은 아무 손상 없이 완전한 상태. 그럼에도 브로켈이 발동되었다는 것은, 저 브레스 웨폰은 자신의 잔여 체력따윈 무시하는 실상 일격사에 가까운 공격이란 이야기다. 그렇지 않아도 브로켈의 범위 밖에 있는 주변의 돌들은 용이 토해낸 불길에 녹아내려 반쯤 마그마화 되어있었다. 샛노란 폭염이 쏟아져 땅바닥이 지글지글 끓어오르는걸 보고 있자니 아무리 게임이라지만 이런걸 맞고 살아남길 바라는건... 솔직히 무리겠지. 잠시후 언제까지고 계속될 것 같은 브레스는 서서히 멈췄다. 브로켈 역시 브레스가 중단되자 천천히 사라졌고 에스카마도에서 발해지던 빛도 사그라들었다.
'...이, 이젠 어쩌지?'
한 번 더 브레스를 쏘면 끝인데. 스턴은 간신히 풀렸지만 그 외의 디버프들은 아직 대부분이 유효한 상태. 도무지 저 집채만큼 거대한 용머리를 쓰러트리거나 싸워 이길 자신이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식은땀을 흘리며 전전긍긍 하고 있는데 용머리는 이제 자신의 일을 다 마쳤다는듯 허공에 서서히 흩어져 사라지기 시작했고 맹렬히 타오르던 깃발들의 불꽃도 동시에 사그라들더니 꺼졌다.
"어랍쇼?"
순식간에 정적이 찾아온 공동 안. 방금전까지 유령 전사들과 싸우거나, 용의 머리가 나타나 포효를 내지르고 브레스 웨폰을 쏘던 난장판이라곤 믿기지 않을만큼 고요했다. 브레스가 남긴 영향으로 주변에서 녹아 타오르는 돌들이 아니었으면 아무일도 없었다고 해도 믿겠다. 맥이 탁 풀린 진석은 헛웃음을 지으며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하."
이, 이게 끝인가? 방금 그게 전부였던건가?
'뭔가 되게 허무한것도 같지만... 의외로 까다로운 동굴이었군. 만약 갈림길에서 우측을 택하지 않고 좌측길로 먼저 내려가버렸다면 이 에스카마도를 얻지 못했을거고, 그러면 용의 포효에 이른 브레스 웨폰 콤보에 통째로 녹아내려 죽었을테지. 아니 그보다 마법금속으로 만들어진 무기 란비언이 없었다면 유령 전사들을 상대하지도 못했을테고.'
별거 아닌것 같지만 사소한 운이 적용한 덕에 어찌저찌 무사히 클리어했다고 할 수 있을것 같다. 한숨 돌린 진석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 녹아서 끓어오르는 바닥을 피해 제단쪽으로 다가섰다. 제단위에 올려진 상자속에 뭐가 들어있는지 확인 해볼 참이었다.
'도대체 여기 뭐가 들어있길래 이딴 악랄한 함정이 있었는지 확인이나 해보자.'
덜걱. 상자를 열고 안을 보자니... 흑철보다 희귀한 소재인 적철로 만들어진 건틀렛 한 짝이 들어있었다. 팔꿈치까지 다 감싸던 무겁고 두꺼운 아네트의 강철 건틀렛과는 달리, 손목까지만 감싸는 비교적 실용적인 모양새의 건틀렛. 한 눈에 봐도 건틀렛에선 뭔가 강력한 기운이 느껴지는게 보통 물건이 아닌듯 했다.
"건틀렛이라... 어깨보호대 에스카마도도 그렇고 여긴 어째 방어구만 나오는 곳인가. 나야 좋지만."
상자에서 건틀렛을 꺼내들고 자세히 살펴보는 진석.
- 적룡의 건틀렛, 플라메우스
공격력 : 6
방어력 : 12
설명 : 적철로 만들어진 건틀렛. 더할 나위 없이 튼튼해 보인다. 건틀렛을 착용한 손으로 가하는 모든 공격이 화속성을 띈다. 소유자는 모든 종류의 화염피해를 절반만 받는다. 하루 1회 한정, 적룡 아르도르의 브레스를 소환 할 수 있다. 단, 소환의 반동으로 자신의 체력과 SP의 50%를 소모한다. 잔여 체력과 SP가 한쪽이라도 50% 미만일시 사용 불가. 횟수는 자정에 리셋된다.
특징 : [내구극한], [화속성], [화염내성], [특수기능 - 브레스 웨폰, 아르도르의 폭염]
"......"
한참 멍하니 있던 진석은 바보같이 실실 웃기 시작했다.
"허... 허허."
이건 진짜 더할나위 없는 최상급의 장비다. 하, 이래서 모험가 플레이 하는 사람들이 던전을 파는거구나. 허나 진석은 적룡 아르도르가 대체 뭐하는 용인진 모른다. 뭐 라케르투스족의 조상이라도 되는걸까? 알게뭐냐. 아무튼 공격시 화속성 부여에, 모든 종류의 화염 피해를 절반밖에 안 받는 화염내성과, 방금 맞았던 것과 같은 브레스 웨폰까지 직접 쓸 수 있다. 비록 그 반동으로 체력과 SP를 절반이나 까먹어버리긴 하지만, 브레스의 무시무시한 위력을 생각해보면 이건 엄청 싼 댓가다.
"어지간한 성벽이나 건물조차 이거 한 방이면 깨끗히 녹여버릴 수 있을텐데 체력이랑 SP 절반까지는 것 따윈 진짜 별거 아니지. 회복제만 마시면 회복되는거."
정말 비보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 물건이다. 생각해보니 라케르투스 족 유령 전사들이 나타난것도 그렇고... 이 공동에 들어오기 전 방에 새겨져있던 라케르투스의 언어도 그렇고, 뭔가 이들 부족과 관련된 장소이긴 한 모양이자만...
"그딴거 내가 알게뭐냐. 아이템만 챙기면 됐지."
지체없이 적룡의 건틀렛 플라메우스를 오른손에 끼우는 진석. 손 전체에서 뭔가 후끈한 열기가 느껴지는 것 같은게, 묵직한 힘이 솟는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리저리 둘러보며 한참 히죽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바닥에서 우르릉 하고 진동이 느껴졌다.
"어랏?"
이 규칙적인 진동은 분명 느껴본적이 있다. 이전, 갈림길에서 우측으로 갔었을때 마주친 벌레 몬스터가 땅을 파고 이동할때 냈던 진동이 이것과 비슷했는데. 그런데 문제는 진동이 하나가 아니라... 여러개다. 게다가 그것들이 분명 전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다!
"끝난게 아니었어?"
당황한 진석이 제단에서 떨어지며 물러섬과 동시에, 바닥에서부터 제단을 콰르릉 무너트리며 길다란 여러개의 형체가 콰악 솟구쳐올랐다. 돌과 흙먼지 사이로 사납게 빛나는 녹색의 눈동자들. 수십개가 동시에 번쩍번쩍 빛났다.
"이건! ...설마 또 벌레냐?!"
문제는 이번엔 한마리가 아니라 무려 다섯마리나 된다는거다. 그나마 네마리는 이전에 상대했던것보다 몸통 굵기나 길이가 조금 작은편이었는데, 가운데 자리잡은 한 놈은... 대장이라도 되는지 다른 벌레들보다 몸통 굵기나 길이가 두 배는 되었다. 전에 상대해서 쓰러트렸던 벌레의 몸통 굵기만 해도 두아름은 되었는데 이놈은 족히 세아름은 더 되어보이고 몸 길이도 거의 20미터에 가까운것 같다. 저런게 땅속을 헤집고 다닌다니 지반이 무너져 내리지 않을까 걱정스러울 정도다.
"가아아아아!"
"카아앗!"
"샤아아아!"
벌레들은 대장으로 보이는 가장 큰 놈이 괴성을 지르자 다들 따라서 듣기 싫은 흉측한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섯놈이 동시에 구불텅 구불텅 헤엄치듯 이쪽을 향해 돌진해오는데 바닥의 돌 파편이 파바박 튀어날리는게 보통 매서운 기세가 아니다!
"이런 망할!"
전엔 거인의 대검을 들고도 한 마리를 겨우 잡았었는데 이번엔 다섯마리라니? 이거 자칫하다간 기껏 좋은 아이템 얻자마자 써보지도 못하고 벌레의 간식거리가 될 판이다. 진석은 바로 몸을 돌려 아직도 브레스의 열기로 지글거리며 끓고 있는 쪽으로 내달렸다. 그리고 바닥을 폴짝폴짝 뛰어넘어, 녹아내린 땅바닥을 장애물 삼아 벌레들과 거리를 벌렸다. 그러자 놈들은 다섯마리가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땅바닥으로 파고들더니 지면아래로 이동하며 진석을 추격해왔다.
'징글징글한 놈들... 다섯마리를 동시에 상대하는것도 무리고, 땅속을 자유롭게 이동하는 것들이니 이 깊은 동굴 안에선 도망도 불가. 그렇다면...!'
촤아악. 한쪽으로 달려가 동굴벽을 등지고 선 진석. 적룡의 건틀렛 플라메우스를 낀 오른손을 힐끗 내려다보곤, 손바닥을 펼쳐 땅바닥을 뒤흔들며 다가오는 벌레무리를 향해 내밀었다.
"얻자마자 브레스 웨폰의 시험 사격이군. 체력이나 SP는 충분하니까."
하지만 발동되는 타이밍이라던가, 실제 사용시 범위나 위력이 정확히 얼마인지는 모르는게 문제다. 허나 벌레놈들이 그런 사정 봐줄리도 없고 지금은 가진걸 써보는 수 밖에! 때마침 녹아내린 지역을 지난 놈들은 다같이 땅을 뚫고 지면 위로 모습을 드러내었다. 진석은 왼손으로 오른손 손목 아래쪽을 견착하듯 잡고 크게 외쳤다.
"첫발 개시다! 나와라 아르도르의 폭염!"
츠응! 순간 건틀렛에서부터 붉은 빛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뒤이어 몸 내부에서부터 느껴지는 둔중한 반동. 뭐랄까, 마치 커다란 종을 칠때 가까이 있으면 타종 소리가 몸을 울리는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달까? 동시에 체력치와 SP의 절반이 쫙 깎여나갔다. 그리고 진석의 머리 위로 거대한 적룡의 머리가 스르륵 나타났다. 비록 머리와 목 뿐이지만 아까처럼 희끄무레한 유령같은 형상이 아닌 실제 눈 앞에 살아있는것 같은 생동감 넘치는 모습이었다. 벌레들의 몸통따위 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굵고 길다란 목을 따라 두꺼운 비늘들이 촤라락 파도치듯 일어나는것이 보였다. 적룡은 고개를 치켜들며 콧구멍을 한껏 벌린채 스흐으으 하고 잔뜩 숨을 들이켰다. 그 다음 순간,
"카아아아아아아-!!!"
순간 시야가 백열했다. 모든것을 집어삼킬 정도로 커다랗게 벌려진 용의 입안에서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노도의 불길! 아까 자신이 직격당한 브레스도 어마어마한 위력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것은 그에 비할게 아니었다. 훨씬 강렬한데다가 범위도 더 넓었다. 흡사 이 공동 안쪽 전체가 불타오르는 것 같았다. 공기가 순식간에 달아오르며 숨을 쉴때마다 폐부를 쿡쿡 찌를정도의 열기가 전해져왔다. 그렇게 매섭게 작렬하던 불길은 십수초가 지나자 서서히 사그라들었고 적룡의 머리는 자신의 일을 마쳤다는듯 코로 크흥 거친 숨결을 토하곤 허공에 녹아들듯 사라졌다.
"이것 참... 장관이구만."
전방 수십미터까지 부채꼴 모양으로 퍼져나간 브레스. 거의 공동 안쪽 절반 가까운 너비였다. 브레스가 닿았던 지표의 대부분은 녹아내려 부글부글 끓고 있었고, 그 범위안에 들어있었던 벌레의 무리는 어떠한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벌레들은 브레스에 불타는 정도가 아니라 그냥 깔끔하게 증발한 것 같았다.
"하, 죽인다 정말. 여태까지 티격태격 칼싸움이나 하던게 바보같이 느껴지는걸."
하루에 1회 제한에 반동으로 체력과 SP를 절반씩 소모한다는 제약이 있지만 이건... 글자 그대로 필살기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런 장비를 얻다니 끝내준다. 진석은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고 싶은 기분이었다. 적룡이 뿜어내는 브레스 앞에서 버틸 수 있는 상대가 누가 있을까? 이거라면 정말로 해치우지 못할 상대가 없겠다.
'어... 그럼 혹시 이걸로 미리안도 잡을 수 있지 않을까?'
현재 자신이 아는 가장 강한 힘을 지닌 상대라면 역시 미리안 뿐이다. 강력한 적을 상정해보면 그녀가 먼저 떠오른다. 진석은 제자리에 잠시 멈춰선채 머리를 굴려보았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붕붕 저었다.
'아니, 이걸론 부족해.'
이 건틀렛으로 쓸 수 있는 아르도르의 폭염으로 일격에 미리안을 쓰러트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단발뿐인 공격으로는 불확실하다. 자신이 장비한 어깨보호대 에스카마도의 방어마법 브로켈로도 이 브레스를 막아냈었다. 하물며 미리안은 성직자의 최고위직인 대신관. 원래 신성마법은 보조계열이나 회복, 방어에 특화되어있다. 그러니 그녀에게 브레스 한 발 정도 막아내지 못할 수단이 없을리 없다.
'거참... 끝내주는 장비를 얻었다고 생각했는데 미리안의 능력에 견주어보면 결국 또 아무것도 아닌것 같단 말이지.'
이만한 아이템을 얻고도 여전히 열살짜리 여자애 하나를 쓰러트릴 자신이 안들다니. 참 골치 아픈 상대다. 역시 괜히 골치아프게 뒤통수 치려들지 말고 얌전히 교단에 힘을 보태는게 옳을까나? 아니 어떻게 미리안만 제거하면 어떻게든 교단의 실권을 강탈할 수 있을것 같기도 한데... 미리안을 해치우고 교단의 수장으로 오른다면 허신인지 뭔지 괴상망측한 것 말고 자신을 섬기는 교단을 세우는거다. 진석교... 아니 러셀교라고 이름 짓고 온 대륙에 신앙을 전파하는거다. 곁에서 수발을 들어줄 신도는 젊고 예쁜 여자만 뽑자. 진석은 밑도 끝도 없이 바보같은 생각을 하며 파우치에서 하급 체력 회복제를 하나 꺼내어 마시며 아직 열기가 가득한 공동을 뒤로 하고 자리를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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횃불은 써버리고 없었기에 화염화살로 길을 밝히며 동굴을 빠져나가는 진석. 지도창을 띄워놓고 걸으며 돌아가는 경로에 대한 구상을 하고 있었다.
'여기서 바로 동쪽으로 향하면 다음 마을까지는 사오일쯤 걸리나... 남쪽으로 되돌아 가서 아이린의 집에 들르는것도 좋겠지만 이번엔 왠지 남편이랑 딱 마주칠 것 같다는 기분이 들어서 찝찝한데. 뭐 육로로 계속 갈거면 동쪽행이고, 최단경로라면 남쪽으로 가서 아이린의 집에 들른 다음, 쭉 남하해서 비더하임의 국경을 벗어나 세이거스 왕국에 진입한 다음 최남단의 항구조시 힐즈타운에서 배를 타는 방법이 있는데. 그러고보니 아라파로 갈때 힐즈타운에서 셀린과 헤어졌었지. 지금쯤 뭐하고 있으려나. 고향에 무사히 돌아갔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동굴의 입구까지 다다른 진석. 화염화살을 꺼트리고 동굴 밖으로 나서니 햇살때문에 눈이 부셨다. 눈을 빛에 적응시키느라 잠깐 멈춰서 있는데 코앞에 불쑥하고 왠 그림자가 하나 나타났다.
"저기."
"아 깜짝이야."
이런 외진곳에서 누군가가 나타나서 갑자기 말을 걸어올거라곤 생각하지 못했기에 흠칫하며 놀란 진석. 누군가하고 상대를 살펴보니... 건장한 여자였다.
'허어?'
이번회차 플레이에서 자신보다 키가 큰 여자는 처음봤다. 진석 본인도 표준보다는 조금 더 큰 키인데, 눈 앞의 여자는 그보다 반뼘정도는 더 큰 키에 어깨가 그야말로 떡 벌어져있다. 그런주제에 인상은 어째 동글동글한게 굉장히 앳되어 보인다?
'...혹시 코디악 족의 소녀인가?'
평범한 인간 여성이 이런 우람한 골격을 타고날리가 없다. 게다가 그녀가 걸친것은 브리건딘. 가죽위에 수많은 작은 철판을 겹쳐서 리벳으로 고정시킨 묵직한 갑옷이다. 오른쪽 허리춤엔 비죽비죽 스파이크가 잔뜩 돋은 볼링공만한 크기의 모닝스타가 달려있고, 반대인 왼쪽 허리춤엔 작지만 단단해보이는 철제 버클러가 메어져있다. 등엔 어지간한 사람 몸집만한 짐배낭이 메어져있는데 갑옷과 무기나 짐이나, 그녀가 몸에 걸친 무게만 해도 상당할 것 같다. 그녀는 진석이 자신을 위아래로 빤히 살펴보자 눈살을 약간 찌푸리며 말했다.
"그쪽 모험가에요? 여기 이 동굴 탐사중?"
방금전은 갑자기 부르느라 제대로 못들었는데, 이번에 그녀의 목소리를 듣자니 확실히 음성에서 어린티가 묻어난다. 거인종인 코디악족은 여자라고 해도 다 자라면 신장이 2미터 하고도 수십센티나 된다. 허나 눈앞의 상대는 분명 코디악 족의 특성이 보임에도 아직 키가 2미터에도 이르지 않는다. 분명 자신보다도 건장하고 우람해 보이지만 생김새나 목소리나 키를 종합해 봤을때, 그녀는 코디악 족에선 아직 어린 소녀인게 확실했다. 이쪽보다 키가 커 살짝 올려다 봐야 하는 상대인데도 어린 소녀라니. 거참 뭔가 말이 웃긴다. 진석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런데. 무슨일?"
"그게 저, 사람을 찾으려고 여기까지 왔는데... 안에서 뭔가 발견했어요?"
어딘가 모르게 걱정스런 표정을 지으며 질문을 하는 거인족 소녀. 그녀의 말에 진석의 머릿속엔 동굴 안에 있던 세구의 거인족 전사 시체가 떠올랐다. 아 그렇게 된건가. 뭐 어찌된 영문인지는 몰라도 이 소녀는 그들의 행방을 찾아 어찌어찌 이곳까지 이르러 자신과 마주한 것이리라. 지금 이 소녀가 나타나 이런 미묘한 질문을 해오는 이유는 분명 그것밖에 없었다.
'솔직하게 답을 해줘야 하나? 아니면...'
하지만 뭐 거짓으로 둘러대봐야 그녀가 직접 동굴안에 들어가보면 그만이다. 어렵잖게 유골들을 발견할 수 있을터. 잠시 생각하던 진석은 그냥 진실을 이야기 해주기로 결정했다.
"너... 혹시 너와 같은 코디악족의 전사 세명을 찾는 중이니?"
"아! 그, 그걸 어떻게?"
눈을 동그랗게 뜨며 깜짝 놀라는 소녀. 진석은 이런 소식을 전해주어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아니 그게, 실은 이 안에... 아 이것 참."
막상 말하려니 어째 망설여진다. 소녀는 말을 해야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진석에게 한걸음 다가서며 대답을 재촉했다.
"안에 뭐죠? 어서 말해줘요!"
"끙. 놀라지 말고 들어. 실은 안에서... 세 구의 거인족 시체를 발견했거든. 그것도 죽은지 꽤 지났는지 이미 유골이 된 상태라."
"......"
진석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의아한 표정을 짓는 거인족 소녀. 그녀는 고개를 몇번이고 갸웃거리더니 혼잣말을 중얼거리듯 말했다.
"어... 그럴리가 없는데? 나 놀리는거? 이거 거짓말? 어?"
아랫입술을 부르르 떨며 연신 거짓말이라느니 못 믿겠다느니 하는 말을 중얼거리는데 가만보니 눈동자의 촛점이 살짝 나가있다. 자신의 말에 큰 정신적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진석은 소녀에게 다가서며 어깨를 다독이며 그녀를 진정시키려고 했다.
"자자 진정하고. 그보다..."
"나한테 손대지마! 인간... 이 거짓말쟁이!"
가까이 다가서려던 진석의 가슴을 손으로 퍽 밀쳐내고 씩씩거리는 소녀. 막무가내로 진석을 지나쳐 동굴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하아 이것 참. 진석은 그녀의 옷자락을 붙잡아 쥐며 다시 한 번 말했다.
"굳이 들어가볼 필요없다니까.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봤어."
"시끄러워! 안 속아!"
그러더니 주먹을 쥔 왼손을 뒤쪽으로 부웅 휘둘러 진석의 안면을 후려치려 든다. 아니 이게 진짜? 소녀의 주먹을 콱 맞잡아쥐는 진석.
'네가 아무리 힘이 좋은 거인족이래도 아직 어린애. 내 무력이 48인데 이게 감히 어디서 성질머리야?'
소녀는 힘을 주어 붙잡힌 주먹을 빼내려고 했지만 어찌된 일인지 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손을 뿌리치긴 커녕 눈앞의 인간 남자가 쥔 악력이 점점 강해져 오는게... 아, 아프다?! 아무리 자신이 어리다고 해도 허약한 인간 따위가 거인족과 힘겨루기로 고통을 줄 수 있다니? 소녀는 발끈해선 이익 하고 오른손으로 모닝스타를 뽑아들어 진석에게 휘둘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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