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베라 - 부회의 방랑자-97화 (97/155)

< --   - 8.   -- >         * 97화 *

'이게 진짜!'

안에서 죽어있는 전사들과 이 여자애의 관계는 몰라도, 어찌어찌 그들을 찾아 여기까지 온것 같은데... 다 죽었다는 말을 들었으니 당황스런 심정은 이해할 수 있다. 허나 그렇다고 해도 무기까지 휘둘러 오다니? 아무리 거인족 코디악이 인간보다 성정이 거칠다고 해도 이건 아니지. 도를 넘어섰잖냐! 진석은 맞잡고 있던 주먹을 놓고 안쪽으로 파고들며 모닝스타를 쥔 그녀의 손목을 장타로 후려쳤다. 예상치 못한 반격에 깜짝 놀라며 들고 있던 무기를 놓치는 소녀. 진석이 후려친 충격에 모닝스타는 저쪽으로 날아가 쿠웅 하고 묵직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너, 너어-!"

무기를 놓치자 이번엔 철제 버클러를 쥐어들고 그 전면으로 진석을 강타하려드는 소녀. 끈질기네 정말! 진석은 인상을 구기며 자신에게 날아드는 버클러를 되려 앞차기로 뻐엉 걷어차 밀어내버렸다. 흡사 말이나 소가 전력으로 걷어차는 것 같은 충격에 허억하며 뒤로 촤아악 밀려나는 거인족 소녀.

"무슨 인간주제에 힘이 이렇게...!"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짓는 그녀에게 진석은 쯧 하고 노골적으로 혀를 찼다. 기골이야 장대하지만 거인족 기준으로는 어차피 어린애일터. 그러니 여기서 이걸 콱 쥐어패기도 뭐하고. 아니 이런 덩치라면 한두대쯤 때려줘도 상관 없을것 같긴 하다만... 진석은 그녀를 뒤로 한채 자리를 떠나며 말했다.

"거 싸가지 하고는. 못 믿겠으면 직접 들어가 보던가!"

알게 뭐냐. 그냥 상관하지 말자. 제 눈으로 확인해 보라지. 하지만 소녀는 으으 하고 이를 갈더니 바닥에 떨어진 모닝스타를 주워들고 막 자리를 벗어나려는 진석의 앞으로 달려와 길을 가로막았다.

"또 뭐야? 방해 안할테니까 들어가던지 말던지 네 맘대로 하라니깐?"

"싸우던 도중에 도망가다니! 역시 인간 따위. 죄다 거짓말쟁이에 겁쟁이야! 남자라면 피하지 말고 덤벼!"

그리곤 등에 짊어진 짐배낭을 바닥에 휙 던져놓곤 기세 좋게 모닝스타를 버클러에 탕탕 부딪히며 어서 덤벼보라는 듯 손짓으로 이쪽을 도발해왔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벙찌는 진석.

'코디악 족에 대해서 잘 아는건 아니지만... 거인들은 원래 이런 성격인건가? 앞뒤 분간을 못하는건지 성미가 급한건지. 아아 짜증나네.'

아니 애당초 왜 시비가 붙은건지도 모르겠다. 알려달라는대로 아는 사실을 일러줬을뿐인데 화를 낸건 저쪽이잖아? 이쯤되면 어린애고 뭐고 세상의 엄격함을 가르쳐 줄 필요가 있겠다. 진석은 앞섶을 가리는 진홍색의 망토자락을 어깨 너머로 펄럭 걷어 넘기며 말했다.

"후회할거다 너."

"웃기시네! 입만 살은 인간에겐 안져!"

바락바락 지지않고 대답하는 꼴이 입만 산건 딱 네쪽이잖냐! 뭐 그렇다고 이런일로 무기를 써서 피를 보긴 좀 그러니 그냥... 그냥 딱 한 대만 패주자. 단 전력으로! 교육적 체벌이다! 진석은 시클론과 라파가를 함께 사용하며 동시에 암살자의 망토로 투명화를 걸었다.

"헉?!"

앞쪽으로 몸을 스윽 기울이며 덤벼올 것 같은 자세를 취하던 진석이 눈앞에서 스륵하고 사라져버리니 깜짝 놀라는 거인족 소녀. 뭐지? 마법인가? 허리춤의 벨트에 단검집을 메고 있더니만 사실은 마법사였던 건가? 어디로 간거지? 그렇게 당황하는 찰나의 순간. 시간상으론 1초나 될까 말까한 짧은 틈이었지만 시클론과 라파가로 순간적인 가속을 받은 진석이 달려들어 정권을 내지르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꽉 모아쥔 적룡의 건틀렛 플라메우스의 주먹 틈새로 불길이 화르륵 새어나왔다.

"커허억!!"

뻐어억! 어정쩡한 자세를 취하고 있던 소녀의 명치께에 붉은 화염이 서려있던 진석의 주먹이 제대로 꽂혀들어갔다. 너무나 강렬한 충격에, 몸에 걸치고 있던 브리건딘의 전면부 철판들은 우그러지거나 찢겨져나갔다. 뒤쪽 허공으로 붕 뜨는 그녀의 몸. 여느 건장한 성인 남성 이상의 체중이 나가는 몸이건만 무슨 트럭에라도 치인듯 공깃돌처럼 뒤로 날아가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그리고 그대로 침묵.

"...이런."

너, 너무했나? 놀란 진석이 잠시 상태를 지켜보자니... 눈을 완전히 까뒤집은채 꼼짝 없이 뻗어있는 꼴이 일격으로 의식을 잃어버린 모양이다. 갑자기 건틀렛에서 불길이 새어나오는 바람에 엇 하고 순간 정신이 팔려 마지막에 힘이 좀 덜 들어간채로 쳤는데 그 정도로도 저 꼴이라니. 정말 혼신의 힘을 다 해 쳤으면 브리건딘까지 꿰뚫고 그대로 몸속에까지 주먹을 박아 넣어버렸을지도 모르겠다. 하긴 자신의 힘이면 어지간한 나무나 바위도 가볍게 꺾거나 부술텐데 맨몸뚱아리엔 오죽하랴.

'그보다 이 건틀렛 불이 다 나오다니. 깜짝 놀랬네. 특정 속성이 붙은 무기를 써보는게 처음인건 아니지만 그냥 이대로도 불이 나올 줄이야.'

진석은 건틀렛을 낀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해보며 바닥에 쓰러진 거인족 소녀에게 가까이 다가가보았다. 그런데 얘 얼굴이 백짓장처럼 하얗고 미동이 없는게...

"주, 죽었나? 아니 설마 아무리 그래도 거인족이고 갑옷도 입고 있었는데 주먹 한 대 맞고 죽을리가... 아 숨은 쉬는구나."

깜짝 놀라 가까이 달라붙어 상태를 확인해보니 미약하나마 그래도 숨은 붙어있었다. 하지만 꼴을 보니 순간적으로 받은 충격이 너무 커서 심각한 쇼크 상태에 빠진 모양이다. 이런 상태라면 흉골이 박살났거나 내장까지 데미지가 갔을지도 모르겠다.

"아이고 나 참."

할 수 없지. 죽일 생각이 있었던 것은 아니니... 소녀의 목을 받쳐들고 고개를 뒤로 젖힌다음 파우치에서 하급 치료제를 꺼내어 입 안에 털어넣는 진석.

"진짜 병주고 약주고 하네."

응급처치로 약을 먹이고 잠깐 지나니 하얗게 질려있던 얼굴엔 어느정도 혈색이 돌아왔고 호흡도 조금 안정된 것 같았다. 아직 정신이 든건 아니지만 이거라면 뭐 생명에 지장이 생기진 않겠군. 다행이다. 진석은 그녀를 내버려두고 돌아가려고 하다가...

"...그렇다고 패서 죽기 직전까지 만들어 놓고 팽개친채 가버리기도 뭐하잖아."

으으, 내가 뭐하는짓이야 이게? 투덜거리며 정신을 잃은 거인족 소녀를 등에 걸처메는 진석. 하지만 상대의 키가 크니 업는것도 쉽지 않았다. 낑낑거리며 몇차례나 고쳐 메어야 했다. 그 상태로 바닥에 굴러다니는 모닝스타와 버클러, 짐배낭을 챙겼다. 그런데 짐배낭은 뭐가 들었는지는 몰라도 진짜 무거웠다.

"으윽. 이, 이대로 산길을 내려가야 하나?"

아무리 능력치가 높아도 힘든건 힘든거다. 아니 따지고 보면 내가 얘를 챙겨줄 필요도 없는데 뭐하러 사서 고생을 해? 역시 귀찮으니까 버리고 가자!

'하지만 그러기엔... 내가 사람이 너무 좋지~ 사내놈이었으면 뒈지건 말건 내버려 두고 갔을테지만 여자에다가, 거인족 기준으론 아직 어린애잖아? 으이구, 내가 병신이지.'

거인족 소녀를 업은채 끙끙거리며 그대로 길을 거슬러 산을 내려가기 시작하는 진석. 뒤에 남겨진 동굴의 풍경은 그저 아무일 없었다는듯 고요할 뿐이었다.

기절한 파나히 막시온은 과거의 기억을 꿈처럼 되돌려 보고 있었다. 그녀는 올해로 18살이 되는 거인족의 소녀. 하지만 거인종 코디악의 수명은 인간보다 1.5배는 되기에, 최소한 20살은 되어야 성인으로 인정을 해주었다. 즉 그녀는 거인의 기준으로는 아직 채 성인이 되지 못한 미성년자. 그런 그녀가 홀로 길을 떠난데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 원래 파나히는 그녀의 가족인 아버지, 삼촌, 그리고 오빠와 함께 대륙 북부의 히릴 산맥쪽에서 자리를 잡고 살고 있었다. 파나히의 가족인 막시온 일가는 부락에서 손꼽히는 대장장이 집안이었다.

그리고 파나히의 아버지에게는 오래전부터 대장장이로서의 소박한 꿈이 하나 있었다. 작업에 필요한 원료나 광석을 그저 상인에게 매입하거나 남에게 공급받는것이 아니라, 채굴에서부터 정제까지 스스로 해보고 싶다는 것. 즉 그는 광물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캐보고 싶어했다. 하지만 광산이라는건 그 어디에서나 주요 시설로 꼽히는 곳. 일꾼으로 부리는거라면 모를까, 거인족 대장장이가 맘대로 캐가라고 공개해주는 일 따윈 없었다.

결국 그는 남의 광산에 들어가 작업을 하는게 아니라 처음부터 자신만의 광산을 뚫어볼 순 없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인간의 지질학자에게 거금을 주고 부족이 기거하는 부락 근처에 광물이 날만한 곳을 탐사해달라는 의뢰를 한다. 지질학자는 그의 의뢰대로 광물이 나올만한 지역을 몇 곳 선정해주었다. 하지만 광산이란 광이 나올만한 맨땅을 무조건 판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광산 하나를 뚫기 위해선 기반 준비부터 어마어마한 돈과 노동력이 필요했다.

그러던 와중 여느때와 같이 정기적으로 인간의 마을에 광물을 매입하러 다녀왔던 파나히의 삼촌이 풍문을 하나 주워듣게 된다. 1년전 쯤 비더하임이란 나라의 이더스 마을이란 곳이 폐광이 되었는데, 지금은 몬스터 소굴이 되어있다는 것. 헌데 사실 몬스터가 출몰한 이유는 광산을 뚫다 광부들이 우연히 뭔가의 보물을 발견했고, 마치 그 보물을 지키듯 몬스터들이 함께 출몰한 것이라나. 그야말로 선술집에서 주정뱅이들이나 떠들법한 전혀 근거 없는 뜬소문이었다. 하지만 파나히의 삼촌은 그 이야기에 확신을 가지고 파나히의 아버지에게도 그 이야기를 알린다.

이야기를 전해들은 파나히의 아버지는 단박에 이더스 마을이라는 곳으로 떠나볼 결심을 한다. 몬스터가 있다면 위험하겠지만 자신들은 거인족. 어지간한 상대는 위협조차 될 수 없다. 게다가 폐광이라고 해도 광산의 구조를 마음대로 살펴 볼 수 있다는 것 자체에 크게 흥미가 끌렸고, 소문대로 보물까지 발견할 수 있다면 새 광산을 뚫는데에도 큰 도움이 될 수 있을테니 그야말로 일석이조. 더할나위 없이 좋은 일이었다. 그렇게 자신의 동생과 아들을 대동한채 길을 떠나기로 마음먹는다. 하지만 아직 성인도 되지 못한 어린 딸 파나히는 데려 갈 수 없었으니 그녀만은 집에 남겨두기로 했다. 더군다나 몬스터가 출몰하는 폐광에 간다는 말을 해서 쓸데없는 걱정을 시키고 싶진 않았기에, 그저 잠시 여행을 다녀온다는 이야기만을 해주었다. 이따금 집안의 남자들이 함께 광물을 매입하러 집을 비우는 일이 아주 없는것도 아니었기에 파나히는 여느때와 같은 일인가 보다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홀로 남겨졌다.

그것이 지금으로부터 약 2년 전. 파나히는 처음 몇 달은 별 걱정하지 않고 지냈다. 그들에게 불상사가 생겼다는건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본디 대장장이 라고 해도 충분히 숙련된 거인족 전사 셋. 그들을 당해내려면 군대라도 끌고 와야 할테니 그저 여정이 길어지는구나 생각했다. 하지만 1년 가까이 아무 소식이 없자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파나히는 묵묵히 집을 지켰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계절이 몇 번이나 바뀌어도 가족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어깨너머로 배운 변변찮은 대장기술로 사소한 무구 수리일을 하며 집을 지키던 그녀였지만 더 이상은 가만히 기다릴 수 없었다. 혼자 남겨져있던 파나히는 짐을 챙겨 가족을 찾아 길을 떠나기로 했다. 수개월간 이곳저곳을 떠돌며, 여비가 떨어지면 대장간을 찾아 날품을 팔아 돈을 모으고, 사람들에겐 계속 거인 전사 세 명이라는 특이한 일행을 찾아 물었다. 대부분은 헛수고였지만 이따금 여관이나 술집의 종업원 중에선 커다란 대검을 메고 있던 아버지를 기억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의 희미한 증언에 따라 겨우겨우 이더스 마을에까지 다다랐다. 이곳에 도착하고 나서야 파나히는 가족들의 목적지가 바로 스마이쉬 산의 폐광이었다는걸 깨달았다. 아버지가 새 광산을 파고 싶어한다는 것 정도는 잘 알고 있었으니까.

파나히는 그 즉시 폐광으로 들어가 구석구석을 탐사했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가장 깊은 갱도의 무너져내린 곳에서 땅속에 반쯤 파묻혀있던 기묘한 상자를 하나 발견하긴 했지만 내부는 텅 비어있었다. 사실 진석이 현재 착용하고 있던 에스카마도는 파나히의 아버지가 여기서 발견한 것이었다. 그들은 텅빈 폐광의 무너져내린 곳에서 우연히 에스카마도를 발견 후, 소문은 소문일 뿐이었나 하고 돌아가려 했지만 산의 동굴에서 흘러나와 폐허가 된 마을까지 침범한 몬스터들을 발견한다. 그들은 에스카마도를 찾은 것 처럼 분명 어디 다른곳에 몬스터들이 지키는 진짜 보물이 있을거라 판단, 산을 뒤져 몬스터들의 소굴인 동굴을 발견하고 그들을 물리치며 안을 탐사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갈림길에서 오른쪽의 길로 향한 이들은 공동 안에서 대량의 야광석 더미를 발견하고 이것들을 팔아서 돈을 마련할 수 있을까 하며 정신을 판 사이 여러 벌레들의 기습을 받는다. 아들은 땅속에서 기습해온 벌레에게 두 다리가 잘려 쓰러졌고, 동생쪽은 다리를 잃고 습격당하는 조카를 몸으로 지키려다 그대로 몸통이 물려 두토막 난채 사망. 마지막으로 남은 파나히의 아버지는 에스카마도의 능력으로 기습에서 한 차례 목숨을 건지고 벌레들 중 한 마리의 눈과 송곳니를 자르는데까진 성공했지만 결국 거기까지. 자신이 상처입힌 벌레에게 에스카마도를 장착하고 있던 팔을 통째로 집어 삼켜지고 힘이 다해 숨을 거둔다. 그렇게 에스카마도는 벌레의 위장속으로 들어가, 진석이 그 벌레를 물리치기 전까지 잠들어 있게 되었다.

허나 그러한 사실을 알리 없었던 파나히는 폐광 바로 앞에 진을 치고 몇번이고 더 광산을 뒤져보았다. 하지만 역시 소득은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아침, 분명 아무도 살고 있지 않을 마을쪽에서 연기가 오르다 꺼진것을 우연히 목격한다. 깜짝놀라 마을쪽으로 향하던 그녀는 아주 먼 발치에서 누군가가 스마이쉬 산쪽으로 향하는것을 발견하고 무작정 뒤를 쫓지만 결국 놓치고 만다. 정체 모를 누군가가 사라진 방향을 이잡듯 뒤져 결국 왠 몬스터들의 뼈가 사방에 널린 동굴을 발견. 하지만 뭐가 있을지 모르는 곳, 쉽게 들어가지 못하고 망설이던 차 막 동굴에서 빠져나오는 진홍 망토를 두른 인간을 발견하고 말을 걸었다. 그리고...

"...으응."

파나히는 눈을 떴다. 오랫동안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았는지 거미줄이 쳐진데가 때가 타 지저분한 천장이 보였다. 오렌지색 불길이 넘실거리는 내부. 타닥거리며 모닥불이 타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조금 들어 주변을 둘러봤다. 방 한쪽에 엉망진창으로 놓여있는 집기들과 그 옆쪽에 쌓여있는 장작더미. 의자나 책상같은 가구들을 부숴만든 장작들이었다.

"여긴 어디..."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이미 어둡다. 그렇다면 지금은 이미 저녁? 나는 분명 누군가의 자취를 따라 산에 올랐었는데.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일으키는 파나히. 하지만 욱신, 가슴에서 망치로 얻어맞은듯한 어마어마한 충격이 울려퍼졌다. 고통이 머릿속을 채웠다. 커헉 하고 숨이 턱 막힌다. 뭐지 하고 가슴팍을 내려다보니... 제멋대로 벌려진 웃옷 앞섶 안쪽엔 자신의 맨 가슴이 훤히 드러나있다. 탄탄한 근육과 동산처럼 부풀어 서있는 두 개의 가슴. 그리고 그 가슴 사이, 뭔가의 낙인처럼 시커멓게 찍혀있는 주먹 모양의... 멍.

"아."

그제야 떠올랐다. 동굴 앞에서 인간 사내를 만나고 그와 시비가 붙어 싸웠던 일이. 동굴안에서 유골이 된 거인족의 시체를 발견했다느니, 터무니 없는 말을 하는 남자의 태도가 화가 나서 그만 참지 못하고 싸움을 벌였다. 하지만 자신이 어떻게 된건지 그 이후 기억이 없다. 마치 칼로 잘라낸듯 그 앞뒤의 기억이 깔끔히 비어있다.

"......"

기억이 없다고 해도 상황의 추측은 할 수 있었다. 내가... 설마 내가 진건가? 그 인간 남자에게? 이 방안의 풍경은 평범한 방이 아니라 아마도 폐허가 된 이더스 마을의 어느 건물 안으로 보인다. 게다가 방 한쪽에 놓여있는 자신의 무기들과 배낭. 자신이 그에게 패배하고, 그가 의식을 잃은 자신을 여기까지 옮겨온거라면 말이 된다. 가슴에 선명히 새겨진 이 검은 멍자국이 그 추측을 증명하는 증거이리라.

"하아..."

숨을 들이마시고 내쉴때마다 가슴속 깊은곳이 욱신거리며 울리는듯한 고통. 믿을 수 없지만, 그리고 인정할수도 없지만... 내가 졌구나. 진 모양이구나. 한심하다. 나는 대체 이런곳에서 뭘 하고 있는거지. 고개를 떨군채 낙담하는 파나히. 그때 밖에서 발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가 안쪽으로 들어섰다.

"어, 이제 깼네. 오래도 기절해있구만."

"아... 당신은."

자신과 싸웠던 인간 남자다. 그는 손에 식재료와 요리도구, 술병을 들고 있었다. 그는 태연히 안으로 들어와 모닥불 앞에 들고있던 것들을 늘어놓더니 이쪽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물었다.

"자 우선은 일단 서로 통성명부터 해볼까. 내 이름은 러셀 헤이든. 그보다 가슴은 좀 어때? 아직 아퍼?"

"...나는 파나히... 막시온. 가슴은 아직... 아파요."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는 파나히.

'어째 태도가 고분고분하네. 게다가 가슴이 훤히 드러난 상태인데 가릴 생각도 안하는걸? 뭐 아무래도 좋아. 자신이 깔끔히 졌다는 사실 정도는 받아들인 모양이군. 하지만 하급이라도 회복약을 한 번 먹었는데 아직도 가슴이 아프다라... 하긴, 혹시나 해서 해부학으로 대강이라도 진료해 볼 셈으로 웃옷 앞섶을 벗겨봤는데 주먹 모양의 멍자국이 저렇게 선명하게 찍혀있었으니. 아마 흉골에 금이라도 간 것 같은데 다 붙지 않은 모양이군. 내 주먹이 세긴 세구나. 아무리 거인족이라도 애 상대로 시클론에 라파가까지 쓴 펀치를 먹인건 너무했나? 하긴 피터슨의 노예였던 세... 세 뭐였더라? 아무튼 그 여자는 똑같은 일격으로 흉골과 갈비뼈 대부분이 완전히 함몰되어 죽었었으니. 으음. 앞으론 주먹을 쓸때도 힘조절을 잘 해야겠군.'

게다가 모습을 잘 살펴보니 호흡할때마다 아주 작지만 살짝 어깨를 떠는게 고통스러운 기색이 보인다. 잠시 생각하던 진석은 파우치에서 마지막 하나 남은 체력 회복약을 꺼내 파나히에게 건네주었다.

"이건...?"

"치료제야. 뭐 효과는 그냥저냥이라 단번에 낫진 않을테지만 일단 먹어. 가슴에 남은 멍 정도야 사라지겠지."

놀라는 표정을 짓는 파나히. 치료제라니? 이런 약품은 하급이라도 대단히 고가의 물건이다. 그런걸 태연히 나눠주다니. 하지만 러셀이라는 이름의 인간 남자는 아무렇지 않다는듯 자리로 돌아가 팬을 잡고 뭔가의 요리를 하기 시작했다. 약을 받아들고 한참 멍하니 있던 파나히는 뚜껑을 따고 약을 마셨다. 쓰면서도 텁텁하고 굉장히 복잡 미묘한 맛이 식도를 타고 넘어갔다. 약을 다 마시자 몇초 지나지 않아 가슴에서 규칙적으로 욱신거리던 통증은 상당히 많이 줄어들었고 가슴에 남아있던 멍자국도 순식간에 희미해져 그 흔적정도만 남았다. 파나히는 빈병을 내려놓고, 자세를 고쳐잡아 앉으며 진석을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여보였다.

"구명의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

어랍쇼? 아까 산에서 막 성질내고 도발하며 싸움을 걸어오던 애 같지 않다. 파나히는 진석이 의아하다는 표정을 짓자 눈을 조금 내리깔며 대답했다.

"제가 졌으니까요. 뭔가를 걸고 한 대결은 아니었지만 목숨까지 구원받고... 대신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하겠습니다."

어이, 여자애가 해선 안되는 가장 위험한 대사중에 하나가 바로 뭐든 하겠다는 말이거든? 진석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질문했다.

"아니 저기... 싸운건 싸운거지만 뭔 소린지 이해를 못하겠네. 파나히라고 했지? 나는 거인족의 규칙에 대해선 잘 모르니까 설명해봐."

파나히는 아차 하더니 알겠다는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저희 코디악은 기본적으로 힘과 무를 숭상해서 이따금 분쟁이 생기면 조건을 걸고 대결을 벌입니다. 내가 이기면 이 일은 이렇게 처리하겠다, 혹은 내가 승리할시 뭘 받아가겠다 하는 식이죠. 대신 승리에 따른 조건이 걸려있는 만큼 상대의 목숨까지 빼앗을 순 없습니다. 허나 그와 반대로 조건을 걸지 않는 싸움은 목숨을 빼앗겠다는 의미. 그런데 아까 낮엔... 무엇도 걸지 않은채 싸워 제가 패배했으니 그대로 살해당해도 할 말 없는 상황임에도 되려 살려주고 치료까지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거참 별 해괴한 풍습도 다 있다. 어찌보면 사소한 거지만 분명 인간과는 뭔가 사고방식이 다르다는것이 확실히 느껴졌다. 진석은 음식을 만들며 다시 한 번 그녀에게 질문했다.

"아니 뭐 그깟일로 일일이 상대를 죽여서 어쩌자고. 내가 피에 굶주린 살인귀도 아닌데. 그보다 넌 도대체 이런 외진곳에서 대체 왜 혼자서 헤매고 있는거야? 뭔가 사연이 있는것 같은데 설명해봐."

"...네. 그건 지금으로부터 2년전..."

파나히는 자신이 아는 한도내에서 아버지와 삼촌, 오빠가 왜 집을 떠났고 자신이 어쩌다 여기에까지 이르렀는지를 장황히 설명했다. 요리를 만들며 이야기를 다 들은 진석은 그녀의 사정을 이해했다.

'어린애가 혼자서 가족을 2년이나 아무 기약없이 기다리고, 이래저래 고생하며 여기까지 찾아왔는데 이미 다 죽었다는 소리를 들었으니 이성을 잃고 상황 판단을 못할만도 하지. 듣고보니 딱하구만. 괘, 괜히 불쌍한 애를 패버렸군. 아니 뭐 솔직히 팬것도 아니고 딱 한 대 때린거였지만.'

하지만 그 한 대를 맞고 사경을 헤멨다는게 문제지. 신속히 약을 먹이지 않고 방치했으면 진짜로 죽었을거다. 그런데 진석이 요리를 완성해나가자 파나히가 침을 꼴딱꼴딱 삼키며 이쪽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다는걸 눈치챘다.

'음, 뭐 오늘 저녁밥은 내가 생각해도 괜찮게 된 것 같으니까.'

저번에 먹었던 양배추 고기 볶음은 영 별로라 오늘은 좀 신경써서 만들어 보았다. 사실은 파나히를 업고 산에서 내려오던길에 메추리 둥지를 발견해서 알을 챙겼었다. 둥지안에 들어있던 알은 딱 10개. 작긴 했지만 너덧개를 깨면 달걀 한 개 분량은 될것 같았다. 알을 챙기고 있자니 둥지의 주인으로 보이는 메추리 두 마리가 나타나서 소란을 피웠길래 돌멩이 투척으로 깔끔하게 둘 다 잡아왔다. 뿐만 아니라 식물학으로 돼지감자도 발견해서 조금 캐왔다.

파나히를 방수천을 깐 회관 안쪽에 눕혀두고 가슴팍의 멍을 한 번 살펴본 후엔 밖에 나가 메추리의 털을 뽑고 피를 빼서 손질을 했다. 배를 가르고 내장을 제거한 후 말린고기와 함께 와인에 담궈두었다. 와인이야 몇 병이나 받았으니 여유가 있어 이런 밑준비에 써도 상관없었다. 이후엔 돼지감자를 세척하고 껍질을 벗겨두었다.

와인에 담궈 불려둔 말린고기와 메추리를 불에 굽고, 돼지감자를 살짝 데쳐서 익혔다. 메추리 알로는 오믈렛을 할 생각이었다. 알의 내용물이 적어서 제대로 된 오믈렛이 안될것 같았지만... 알게 뭐냐, 대충 하는거지 뭐. 하지만 애당초 오믈렛을 해 본 경험이 없으니 잘 될리 없었다. 오믈렛보다는 그냥 단순한 계란말이 비슷한게 되었다. 에라 모르겠다 하고 미리 익힌 돼지감자와 양배추를 넣고, 마지막으로 안에 치즈를 잘게 썰어넣어 녹여서 마무리했다.

와인에 재워둔 후 잘 익혀 소금간을 한 고기들. 야채와 치즈가 들어간 계란말이, 그리고 아직 남아있던 빵과 잼을 곁들이니 이런 폐허위에서 먹는것치곤 나름대로 그럴듯한 식사가 준비되었다. 식기위에 정확히 절반을 덜어 포크와 함께 파나히에게 넘겨주니 정말 먹어도 되겠냐는듯한 눈으로 진석과 음식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머, 먹어. 그렇게 무섭게 쳐다보지 말고."

"그럼 감사히."

사실 집을 떠난 이후 파나히는 그다지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했다. 2년간 혼자 생활하느라 집에 남은 돈도 거의 없었고, 자신의 변변찮은 솜씨로 하는 대장간 일의 수입이야 용돈 수준밖에 되지 않았던 것이다. 인간들의 마을이나 도시를 돌며 이따금 돈을 번다고 벌었지만 금방 여비로 써버렸다. 때론 인간이 아니라는것을 노리고 실컷 부려먹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쫓아내는 자들도 있었다. 자신이 저지르지도 않은 일에 대해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경비대에게 위협당해 추방당한적도 있었다. 인간 나이로 18세면 성인취급을 받지만, 거인족 기준으로는 아직 미성년인 그녀가 수개월간 그렇게 떠돌며 생활했으니 식사나 잠자리가 편할리 없었다. 이것도 훌륭한 음식이라곤 할 수 없었지만 집을 떠난 이후로는 이것만도 못한 음식만 쭉 먹어왔다.

"마... 맛있네요 이거."

구운 메추리와 손바닥만한 고기덩이를 거의 삼키듯 먹어버리고 계란과 감자를 포크로 찍어 우물거리며 먹는 파나히. 파나히 자신의 짐배낭에도 식료가 있긴 했지만 말라 비틀어진 빵조각과 물, 그리고 육포 한줌뿐. 그나마도 거의 바닥나 있었다. 그런 와중에 따뜻한 음식을 먹으니 너무 맛있었다. 계란도 포크질 몇번으로 먹어치운 파나히는 빵을 잼에 찍어 연신 입에 가져갔다.

'며칠 굶었냐? 되게 불쌍하게 먹네.'

파나히가 먹어치우는 기세에 질린 진석은 자신 몫의 고기와 계란을 좀 덜어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좀 더 먹어. 아 빵도 여기 더 있으니까."

"그럼 염치 불구하고 감사히."

진석이 음식을 양보하고 빵바구니를 통째로 넘겨주자 눈을 반짝거리면서 굉장히 좋아하는 파나히. 진석이 두세입 먹는 동안 파나히는 금새 또 고기와 계란을 해치우고 다시 빵에 손을 대고 있었다.

'진짜 잘 먹네. 거인족이라 그런가? 하긴 완전히 다 자란 거인이라면 밥도 무시무시하게 먹겠군.'

하지만 너무 급히 먹어서일까, 빵조각이 목에 걸려 사레들렸는지 켁켁 잔기침을 하는 그녀. 진석은 마침 옆에 있던 와인병을 건네주었다. 파나히는 그것을 급히 받아들고 내용물을 잔뜩 마셨다.

"꿀꺽꿀꺽... 으, 읏. 이거... 술?"

한참 마시다 사레를 진정시키곤 깜짝 놀라며 입에서 병을 떼어놓는 파나히.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진석을 바라보았다. 빵을 손으로 갈라 잼을 바르며 덤덤히 고개를 끄덕이는 진석.

"그런데? 왜, 무슨 문제라도?"

"아 그게... 저 술 마시는거 처음인데."

"어... 그럼 지금 마셨네. 괜찮아 기껏 와인인데. 그거 뭐 도수도 별로 안 높고. 그거 마저 다 마셔도 상관없어."

파나히는 조금 복잡미묘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손에 든 와인병을 뚫어져라 내려다 보았다. 에이, 와인 정도야 음료수인걸. 와인 도수래봐야 기껏해야 15도. 빈속에 먹은것도 아니고 밥 먹으면서 반주 한잔 한 정도인데 별 일이 있으랴?

라고 생각하던 30분전의 나를 패버리고 싶다. 누가 타임머신 좀 만들어다오, 돌아가서 실행하게. 파나히는 거인답지 않게 와인을 몇 모금 마신걸로 술에 잔뜩 취해버렸던 것이다!

'으윽, 무거워.'

게다가 그냥 술에 취한거라면 상관없지만, 머리에 무슨 스위치가 들어갔는지 그대로 뒷정리를 하던 진석을 덮쳐 쓰러트리고 그 위로 올라탔다. 눈이 뱅글뱅글 돌며 헤실거리는게 제대로 맛이 간것 같았다.

"헤에헤... 왜, 나 살려줬허효?"

야 발음 다 샌다. 혀도 제맘대로 안 돌아가는 모양이다. 진석은 파나히에게 깔린채 어어 하고 잠시 생각하다 대답했다.

"넌 어린애잖아. 죽여서 뭐한다고."

"나 어링애 하닌헤? 가스흠... 이허억케 큰데?"

이미 옷 앞섶이 벌려져 훤히 드러나있던 가슴을 진석의 얼굴앞으로 쓱 들이대며 헤실헤실 웃는 파나히. 가슴 사이에 나있는 멍자국은 희미해져 앞으로 이삼일이면 완전히 사라질것 같았다.

'아니 멍이고 나발이고 그보다 아 이것 참. 얘를 어떻게 해야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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