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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베라 - 부회의 방랑자-98화 (98/155)

< --   - 8.   -- >         * 98화 *

진석이 고민하는 사이 파나히는 진석의 머리를 콱 껴안아 자신의 가슴 사이로 파묻게 했다. 여느 인간 여자와는 전혀 다른, 이두박근이 탄탄한 굵은 팔이 머리를 붙잡아 죄니 꼼짝할수도 없다.

'근데 가슴이... 부드러운게 아니라 단단해! 어째서 가슴같은 곳까지 쓸데없이 튼튼한거냐?'

그래도 근육처럼 딱딱한게 아니라 탄력이 넘치는 고무같은 느낌이랄까. 이것도 나름대로 신선한게 맛을 들이면 나쁘지 않을지도... 가 아니지. 진석은 파나히를 떼어놓으려고 했지만 그녀는 진석을 한층 꽉 껴안아왔다.

'억. 지, 질식하겠다. 가슴에 파묻혀 질식이라니. 그것 참 행복한 죽음...'

아니 자꾸 헛소리나 할때가 아니지. 얘 진짜 힘이 장사다. 이거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숨이 막힌다. 안되겠다 싶어 억지로 힘을 써서라도 밀어내려 했는데 파나히는 갑자기 훌쩍거리더니 눈물을 뚝뚝 떨구기 시작했다.

"거힛말이지... 지힌짜로 다들 죽흔거야? 왜에?"

하이고. 헤롱헤롱 다음엔 엉엉 울기냐. 그래봐야 와인 조금 마신게 전부인데 술버릇 엄청 더럽네 이녀석. 하지만 우는 애를 억지로 떼어놓기도 뭐하고... 진석은 파나히를 밀어내려고 했었지만 생각을 바꿔 되려 그녀를 감싸안으며 등을 토닥여줬다.

"그래그래. 힘들었지."

"으, 으아아아앙."

파나히는 자신을 다독여주는 진석을 꼭 끌어안은채 엉엉 목놓아 울었다. 아 쫌. 이런건 진짜 싫다고. 하지만 어쩌랴. 이런 상황에서 매정하게 팽개칠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그렇게 히끅거리며 5분 쯤 계속 울어대던 파나히는 곧 기운이 빠졌는지 진석의 옆에 드러눕나 싶더니 왠걸, 금새 곯아떨어져 버렸다. 진석은 푸휴 하고 한숨을 쉬며 몸을 일으켰다. 파나히가 계속 끌어안고 부벼댔던 탓에 머리카락이 엉망진창으로 헤집어져 있었다. 머리를 툭툭 정리하며 옆에 잠든 그녀를 내려다보니... 눈물로 엉망이 된 얼굴 그대로 낮게 코를 골며 잠들어 있었다.

"이것 참 귀찮은걸 주웠구만."

차라리 개나 고양이를 줍고 말지 이것참. 치료해줘 밥 먹여줘 술주정까지 받아줘. 대체 뭐야 이게? 아주 무상 봉사활동을 제대로 하고 있다. 투덜거리면서도 왜건에서 모포를 가져다 파나히에게 덮어주고 아까 하던 식사후의 뒷정리를 계속하는 진석. 식기를 치우며 파나히를 어떻게 해야할지, 그리고 자신의 행선지는 어디로 향해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다음날 아침. 파나히는 왠지 모르게 띵한 머리를 부여잡고 깨어났다. 평소엔 자고 일어나면 상쾌했는데, 오늘은 정신이 멍한게 도무지 눈을 뜨기 힘들었다. 하지만 어떻게든 눈을 비비며 정신을 차리고 나니 코앞에 불쑥 잔 하나가 내밀어졌다.

"아..."

"좋은 아침. 잘 잤어?"

눈 앞에서 모락모락 김을 피워올리는 나무잔. 파나히는 무심코 잔을 받아든 다음 그것을 내민 상대를 바라보았다. 어제 자신을 쓰러트리고도 되려 치료해준 인간 남자. 러셀이었다. 파나히는 고개를 살짝 숙여보이며 잔을 받아들었다.

"가, 감사합니다."

"숙취에 좋은 차야. 쭉 마셔."

그의 권유에 잔을 받아들자마자 얼결에 한 모금 마셨다. 큭! 어, 엄청 쓰다! 정말 웩 하고 헛구역질이 나올 정도로 기가막히게 쓰다. 하지만 숙취에 좋은 차라니 할 수 없지. 눈물을 찔끔거리며 억지로 한 모금 더 삼키고나서 보니... 어째 몸이 썰렁하다? 파나히는 그제서야 자신의 몸을 내려다 보았다. 상체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알몸이었다. 아랫도리는 모포가 덮어져 있지만 맨살이 모포에 스치는 느낌이 났다. 아래쪽도 옷이 전부 벗겨져 있는 모양이었다. 분명 속옷 한 장 남기지 않고 다 벗겨진 완전한 알몸 상태인듯 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머리맡에 자신의 옷이 잘 개어져 있었다. 확실히 팬티도 맨 위에 올려져 있었다. 조금 당황해서 러셀을 바라보니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빙긋 웃어보였다.

"이야 어제 대단했다구. 설마 네 쪽에서 먼저 그렇게 요구해올줄이야."

"......"

어? 어어어? 자, 잠깐. 나는 아무 기억이... 없는데? 아니 그러고보니 방금 준 차도 숙취에 좋은거라고 했었지. 내가 술을 마셨던가? 잘 생각해보니 분명 밥을 얻어먹은것 까진 기억난다. 그리고 중간에 빵을 급히 먹다 사레가 들리고 와인병을 건네 받아서... 서, 설마. 그 후 술에 취해서 뭔가 저질렀단 말인가? 파나히의 얼굴이 조금 헬쓱해졌다.

"제가... 무, 무슨짓을 했죠?"

진석은 쑥스럽게 웃어보이더니 파나히의 앞에 다가와 앉아 그녀의 손을 마주잡으며 말했다.

"뭘 이제와서 부끄러워 하고 그래. 어젯밤 그렇게 거칠게 해놓구선. 난 처음이었는데... 책임져줄거지?"

"네? 아, 아으으? 책임?"

파나히는 멍청한 표정을 지으며 벙쪄버렸다. 혼란에 빠진 파나히. 이... 이게 다 무슨 소리야. 내가 술에 취해서 이 남자를 덮치기라도 했단 말인가? 나, 남녀간의 그런일은 평소 생각조차 해본적이 없는데? 게다가 이 남자는 인간이고 자신은 코디악인데? 종족이 다른데도 그게... 되, 되는건가? 얼굴이 붉어지는 파나히. 그녀는 자신이 알몸인것도 아랑곳 않고 모포를 휙 걷어내며 무릎을 꿇은채 머리를 숙여보이며 말했다.

"죄... 죄송해요! 제가 뭘 저지른건지 모르겠지만... 채, 책임 지겠습니다아!"

'우왓, 화끈한데. 보통 여자애가 술에 취했다가 알몸으로 깨어나면 꺄아악~ 부터 나와야 될텐데. 알몸 보이는 것 쯤은 별거 아니라 이건가? 호방한 거인족이라 그런가 뭔가 반응이 달라도 한참 다르군.'

그런 파나히를 내려다보며 피식피식 웃는 진석.

"네가 책임을 져주겠다고? 도대체 어떻게?"

"그... 저... 여, 역시 책임이라면 겨, 겨, 결혼이라던가..."

너무 성실한 대답이 나오네. 얘 생각보다 이쪽으로는 순진하구나. 이러니 되려 놀릴 생각도 쑥 들어가버리잖냐. 진석은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나며 말했다.

"장난이야 장난, 책임은 무슨. 옷이나 입어."

"...에?"

또 다시 멍청한 표정이 되는 파나히.

"아무일 없었어. 네 술버릇이 하도 엉망진창이라 장난 좀 쳐본거니까. 그나저나 너 어디가서 절대 술 마시지 마라."

그리고 맨 처음 건네준 나무잔에 담긴 차 역시도 실은 저번에 수집한 해독초의 뿌리를 끓인것 뿐으로, 숙취 해소와는 아무 상관 없이 그냥 지독히 쓰기만 한 것이었다. 이래저래 아침부터 놀림을 당한 파나히.

"...네, 네에."

아무일도 없었다니 다행이긴 하지만... 뭐가 뭔지 도대체 모르겠다. 내 술버릇이 엉망진창이라고? 뭘 어쨌길래? 파나히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옷을 하나씩 챙겨입었다.

'으음. 개인적으로는 슬렌더한 쪽이 좋지만... 저렇게 근육이 탄탄한 몸매도 나쁘지 않은데? 물론 얘는 거인족이다보니 골격이 심할정도로 튼실해서 좀 부담감이 들지만.'

옆에 서서 파나히가 옷을 입는걸 쭉 지켜본 진석은 미리 준비한 아침 식사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살짝 구운 빵 사이에 치즈와 잼, 남은 양배추를 넣은 것 뿐인 간단한 것이었다. 눈을 빛내며 빠르게 받아드는 파나히. 먹는걸 진짜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짧은 식사를 끝낸 후 진석은 모포와 방수포를 걷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넌 이제 어쩔거야?"

"어쩌다뇨?"

자리를 치우는 것을 돕다 말고 눈을 꿈뻑거리는 그녀. 진석은 이제 다 꺼져가는 모닥불을 발로 지근지근 밟으며 말했다.

"내가 동굴안에서 발견한 유골 말야. 틀림없이 네 가족들것이 맞을텐데. 어쩔래?"

"아..."

"뭐 회수하겠다면 그 정도야 도와주지."

더 이상의 위험은 없을것 같지만 혹시 남아있는 벌레라도 더 나올지 모르니깐. 일가족이 같은 장소에서 몰살되는건 좀 아니잖아. 그냥 여기서 그럼 안녕~ 하고 헤어지기도 어색하고. 어려운일도 아니고 그 정도쯤 못 도와줄것도 없었다.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파나히는 눈을 내리깔며 대답했다.

"...고향에 묻어주고 싶어요. 원래 코디악은 싸우다 죽은 자리가 자신의 무덤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그래도... 집에 돌아가게 해주고 싶으니까."

진석은 고개를 끄덕이곤 방을 나가더니, 밖에서 큰 자루에 담긴 무언가를 가지고 들어왔다.

"실은 그럴것 같아서 어제 너 잘때 미리 회수해왔지. 무기나 갑옷은 너무 무거워서 놓고 왔다만."

어차피 플레이어는 안 자도 상관없으니, 진석은 어젯밤 파나히가 술에 취해 뻗어져 잘때 뒷정리를 해놓곤 화염화살의 랭작이나 할 겸 산책삼아 동굴에 다시 다녀왔었다. 가족을 찾아 고생고생해서 여기까지 왔으니 그냥 자신의 말 한 마디만 듣고 납득한채 돌아갈리 없잖은가. 보나마나 유해라도 회수하고 싶어할건 뻔했으니까.

"아아. 가... 감사합니다."

울 것 같은 표정이 되어 유골주머니를 받아드는 파나히. 몇번이고 연거푸 반복하여 진석에게 고개를 숙여보였다. 눈물을 찔끔거리고 있는게 보였다. 2년 만에 재회한 가족의 모습이... 이런 형태라니. 그야 눈물정도는 당연히 나오겠지. 진석은 파나히에게 다가가 그녀를 다독여줬다. 결국 파나히는 어제 술에 취했을때처럼 진석의 품에 안겨 또 다시 한참을 엉엉 울었다.

다그닥 다그닥. 말발굽 소리를 내며 황무지를 따라 나아가는 한 필의 말. 말이 지나가는 길의 뒤쪽으론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말 위엔 진석이 올라타고 있었다. 진석은 폐촌 이더스 마을에서 파나히와 헤어져 동쪽으로 향했다. 파나히는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북쪽으로 향했다. 헤어지기 전 그녀와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고향에 돌아가서 가족들을 묻어주고... 그 이후엔 뭘 할거야?"

영차하며 짐배낭을 고쳐멘 파나히는 한참 울어서 빨개진 눈으로 진석을 마주보며 대답했다.

"어줍잖지만 아버지나 삼촌이 하던 대장간 일을 이어서 할까 하는데요. 그치만 할 줄 아는거라곤 무기 날 세우는거나 냄비 구멍 때우는 정도 뿐이라서... 쉽진 않겠지만요."

"그걸로 밥 벌이가 돼?"

잠시 대답못하고 머뭇거리다가 이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좌우로 젓는 파나히. 하이고. 하긴 칼 가는거랑 냄비 때우기만으로 돈이 된다면 그게 더 이상하겠군.

'대장기술이라... 그렇다면 역시 같은 대장장이에게 맡긴다던가? 마침 내가 아는 장인이라면 한 명 있지. 바보 자매 중 언니 쪽 지젤.'

하지만 이 아이를 그쪽에 보냈을때 뭐 득이 될만한게 있을까?

'...아니. 득은 개뿔! 엄한 애 하나 인성만 망가질라. 얘가 변태 자매의 독에 물들어 남자는 힘으로 깔아누르는거다~ 따위의 사상을 주입당해봐라. 어떻게 되겠어?'

그것 참... 생각만 해도 진짜 끔찍하다. 파나히는 앞으로 더더욱 자라날거다. 코디악에 걸맞는 2미터 수십 이상의 강골을 가진 거인의 육체로. 그런 몸뚱아리를 가지고 변태 자매를 따라 남자 사냥을 한다면... 이야 이건 진짜 재앙이다. 생각만으로도 어지간한 공포영화보다 더 무섭다. 그, 그런일이 생기게 할 순 없지.

"고향에 가서 가족들을 묻어주고 난 뒤에는... 차라리 서쪽으로 가지 않을래?"

"서쪽이요?"

"그래. 아라파로. 사막이라 끔찍하게 더운 나라긴 하지만 내가 아는 사람이 좀 있거든. 거인족인 너라면 거기서 할 만한 일이 있을텐데."

론소나 바노르 쪽에 붙여 도적길드 쪽의 일을 돕... 는건 힘들겠군. 거인이잖아? 은밀한 일을 하기엔 너무 눈에 띈다. 아, 그렇다면 알 유세피나에게 붙여두는게 괜찮겠다. 마침 그녀에게 믿을만한 호위를 들여놓으라고 권했던게 바로 자신아니던가. 지금 당장이야 덜 자란채니 미숙하지만 2, 3년만 더 지나도 무슨 대나무 자라듯 쑥쑥 자라날터. 거인족 호위라면 더할 나위 없는 최고의 보디가드다. 어쨌거나 알 유세피나는 나 좋다고 자청해서 아이까지 밴 여자니까 이런 호위 하나쯤 보내둬도 괜찮겠지. 파나히도 고향에 돌아가서 별 가망없는 대장간 일이나 하는것보단 그쪽이 더 끌렸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게요. 확실히 제대로 배운것도 없는 대장장이 일 보다는 다른쪽의 일을 찾는게 나을것 같기도 하니까. 게다가 대결에서 이기고도 아무 댓가도 받지 않은데다, 여러모로 도와준 은인인 러셀씨의 권유라면... 좋겠지요."

"좋아 그럼. 소개장을 써줄테니까... 아 혹시 뭔가 적을만한 필기구 가지고 있니?"

"네. 목탄하고 종이 약간 정도라면."

파나히는 베낭에서 가죽 쪼가리로 둘둘말아 연필 비슷하게 만든 기다란 목탄펜과 짐에 눌려 약간 구겨진 종이를 꺼내어 건네주었다.

'어디보자. 아무리 그래도 바로 왕궁으로 보내는건 무리가 있겠지. 느닷없이 여왕에게 소개장을 전해달라고 하는것도 말이 안되고. 뭐 론소가 에라드 상회의 운영도 계속 할거랬으니 그쪽으로 보내면 되겠군.'

진석은 론소가 받아볼걸 상정하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 거인족 소녀의 이름은 파나히 막시온. 나 러셀 헤이든이 보증하는 인물이니 잘 챙겨주고 알 유세피나의 호위로 붙여주라는 내용을 적었다. 치밀한 성격의 론소인만큼 혹시 소개장의 진위를 의심할지도 모르니 자신이 알 유세피나에게 건네준 물건은 은반지니 본인에게 물어 직접 확인해 보라거나, 바노르에게 받은 망토는 잘 쓰고 있다는 등의 꽤 뻔뻔한 문구들까지 적어두었다. 당사자가 아니고서야 모를 이런 내용들까지 적어뒀으면 의심할리 없겠지.

"이걸 가지고 아라파의 수도 시라즈의 시장으로 가서 에라드 상회를 찾아가면 돼. 론소라는 사람 앞으로 온 편지라고 전해줘. 뭐 밀납이나 봉투가 있는건 아니니까 안을 읽으려면 그렇게 할 수도 있겠지만, 가능하면 보지 말라고."

"아뇨. 절대 안볼게요. 그보다 정말 너무 신세를 많이 져서... 어, 어떻게 갚으면 좋을지."

진석이 건네주는 소개장을 받아들고 쩔쩔메는 파나히. 갚긴 뭘 갚어. 하다못해 데려다 부하로서 쓰기엔 아직 덜 성장했기에 그녀의 능력이 달리고, 그렇다고 이제와서 동침이라도 하자고 할 수도 없고. 아니 같이 자자고 하면 거인족답게 되려 흔쾌히 응할 것 같지만... 됐다. 나쁜 마음을 먹고 뭔가 해버릴 것 같았다면 진즉에 실컷했지 이제와서 무슨.

"됐어. 뭔가 갚고 싶거든 나중에 아라파로 가서 그만큼 열심히 일하면 돼. 까먹지 마. 에라드 상회의 론소야. 소개장을 전해주면 그 다음은 그쪽에서 알아서 해줄테니까."

"네. 실망시키지 않게 열심히 할께요."

그리고 헤어지려다가 지도창을 열어 보자니, 파나히가 향하는 가장 가까운 북쪽의 마을까진 말로도 최소 사나흘 거리. 파나히는 무기에 갑옷까지 걸치고 묵직한 짐배낭에 유골자루까지 든채 걸어서 출발하려고 했다. 진석은 막 떠나려던 파나히를 불러세우곤 물었다.

"잠깐만. 너 앞으로 계속 걸어서 갈거야?"

"그런데요? 지금까지도 쭉 걸어다녔고..."

"짐 같은건 안 무거워? 그리고 여비나 다음 마을까지의 식량은 충분해?"

"아뇨... 없지만 뭐 지금까지 온 것 처럼 어떻게든 될거라고 생각해서."

머쓱하게 헤헤 웃는 파나히. 아이고 내가 못산다. 터프한건지 멍청한건지 원. 끄응 하며 한 숨을 내쉰 진석은 파나히에게 잠깐 기다리라고 말한 후 왜건에서 한가득 짐을 덜어낸 후, 말을 떼어내기 시작했다. 진석이 왜건에서 말들을 떼어내자 파나히는 이쪽으로 다가와 물었다.

"뭐하시는 거에요?"

"뭐하긴. 말 타고 가."

어마어마한 덩치와 체중을 지닌 거인족들이 말을 탈 줄 알리는 만무. 그러나 꼴이 딱해서 짐이라도 싣고가라고 말을 내어주기로 했다. 하지만 파나히는 필사적으로 손을 저어보였다.

"그런! 지금까지도 폐를 많이 끼쳤는데 이 이상 뭔가 받으면 저는..."

진석은 떼어낸 말을 끌고 파나히 쪽으로 다가가 이마에 촙을 먹였다. 이야 간만이다 이거. 촙을 얻어맞고 어리둥절해 하는 표정을 짓는 파나히의 손에 말의 고삐를 들려주곤 왜건에서 덜어두었던 짐을 말등에 실었다.

"말등에 실은건 식량이야. 네 먹성이 좋아도 뭐 대충 다음 마을에 갈때까지 먹을 분량은 되겠지. 그리고 이건 여비."

짤랑거리는 묵직한 주머니를 하나 내미는 진석. 파나히는 엉겹결에 그것을 받아들었다.

"대충 금화 백닢쯤 될까? 그거면 아라파까지의 여비도 충분하겠지."

"배, 백닢! 바... 받을 수 없어요 이렇게 큰 돈은!"

"아 받으라고."

다시 한 번 촙. 파나히는 거의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하... 하지만... 저, 저기 러셀씨는 저한테 왜 이렇게 잘 해주시는거죠? 저는 초면부터 일방적으로 싸움이나 건 무례한 상대였을텐데."

왜냐고 물어도 글쎄. 여, 여자라서? 하긴 파나히가 남자였어도 이렇게 도와주진 않았을것 같다. 음 난 왜 이렇게 여자에 약할까. 하지만 이런 장면에서 그런 멋대가리 없고 멍청한 소리나 나불거릴 순 없는 노릇이고.

"남을 돕는데 일일이 이유 같은게 필요하겠어? 아까도 말했듯 나중에 아라파에 가서 열심히 하면 되는거니까. 난 그거면 충분해."

파나히는 진석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이 인간 남자는... 다른 인간들과는 확실히 달랐다. 수개월뿐인 여정이었지만 파나히는 인간들 사이를 떠돌며 나름 이꼴저꼴, 여러가지 일을 겪었고 고생도 많이 했다. 인간들이 거인족인 자신에게 보이는 반응은 대부분 두가지였다. 탐욕 혹은 두려움. 거짓말에 속기도 했고 실컷 부려지고 이용만 당하다 쫓겨나기도 했다. 동굴 앞에서 이 남자를 만났을때 자신이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던것은, 가족에 대한 불상사를 접한 충격도 있었지만 지금까지 쌓여온 인간에 대한 불신이 폭발했다는 이유도 있었으리라. 그러나 그는 너무나 태연히 자신을 도와주었다. 자신이 보아온 추잡한 다른 인간들에 비하면 러셀이라는 남자는... 그야말로 성자나 다름없었다. 다른 인간이라면 몰라도 이 남자라면 정말 신의를 다하고 따라도 좋으리라. 파나히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진석은 그렇게 파나히에게 소개장과 말 한 필, 그리고 식료의 대부분과 금화 백닢을 내어주었다. 자신도 쓸데없는 짐은 다 버리고 최소한의 것만을 지닌채 왜건을 버리고 말에 올랐다. 괜한짓을 했나 싶기도 하지만 뭐... 좋은게 좋은거지. 하지만 남은 식료의 태반을 파나히에게 건넨탓에 자신도 닷새나 걸리는 동쪽의 마을까진 향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진석이 잡은 진로는 남쪽이었다.

'할 수 없지. 다시 한 번 아이린씨의 집에 들러 식료를 얻어가는 수 밖엔. 음~ 역시 남편이 없었으면 좋겠는데.'

참 나도 뻔뻔해졌구만. 진석은 임자있는 유부녀와 이런저런짓 할 생각에 히죽거리며 말의 옆구리에 박차를 가했다. 말은 히이힝 하고 울더니 곧바로 속도를 내어 휑한 황무지의 가도를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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