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외전, 니히자인 평원전 -- > * 99화 *
약관의 나이임에도 검술과 전략에 누구보다 뛰어난 재능을 보인 휘태커 남작가의 차녀 루스. 어찌나 그 능력이 출중했던지 또래의 남자 기사들 중에서도 그녀 하나를 당할 자가 없었다. 아름다운 외모, 차분하면서도 강직한 성품, 그리고 뛰어난 세검술까지. 어느샌가 루스에겐 꽃의 기사라는 별명마저 따라 붙었다. 귀족가의 영애임에도 왕에게 충성을 맹세한 기사가 된 그녀는 일군을 이끄는 지휘관으로서 하멜뷔에른 왕국의 정규군을 이끌고 평원에서 적군과 대치하고 있었다. 상대는 벨리언 왕국군. 이것은 그녀의 첫 출전이었지만 저들은 정말 상상도 못할정도로 더럽고 비열한 무리. 절대로 질 수 없었다.
사건의 발단은 지금으로부터 약 2개월 전. 벨리언 왕국과 인접한 변경의 마을이 도적떼에게 습격을 당해 피해가 심각하다는 장계가 올라온 것이 그 시작이었다. 해당 지역을 맡고 있던 관리는 즉시 병력의 지원을 요구했다. 장계에 보고된 도적떼의 수는 약 일백. 백관이 모인 대전에선 다른 중요한 일의 논의가 많았던 터라, 이 일을 그냥 평범한 도적들의 준동으로 보고 주변의 다른 영지에서 삼백의 병력을 파견하도록 명령을 전파한 후 다음 안건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1개월 후. 해결될 줄 알았던 상황은 되려 악화되었다. 삼백이나 되는 병력이 고작 일백의 도적떼를 당하지 못하고 기만과 유인책에 걸려 각개격파당해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던 것이다. 변경 지역은 그 도적떼에 의해 쑥대밭이 되었다. 수많은 마을이 불타 사라지고 셀 수 없이 많은 양민들이 죽거나 노예로 붙잡혀 끌려갔다고 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중앙에서도 더 이상 가벼운 사안이라 여기고 넘어갈 수가 없게 되었다. 주변 영지에서 대충 끌어모은 병력을 파견하는게 아닌, 중앙에서 제대로 된 지휘관과 더불어 일천의 정규군을 추가 파견했다.
하지만 하멜뷔에른 측에서 정규군을 움직여 변경쪽으로 이동하자 접경국인 벨리언 왕국측에서 바로 항의 서신이 날아왔다. 어째서 우리 국경쪽으로 군대를 이동시키느냐, 선전포고도 없이 전쟁을 일으키겠다는 것이냐, 우리도 이러한 상황을 좌시하지 않겠다. 그런 종류의 내용이었다. 저들은 타국내의 군대 이동상황을 정탐하고 있었단 말인가? 그것부터가 뻔뻔한 일인데 이건 뭐 적반하장이다. 하지만 이런일로 일일이 타국과 마찰을 일으킬 순 없는 일. 하멜뷔에른 측에선 오해이며 도적들을 소탕하기 위한 일이라고 해명 서신을 보냈으나 벨리언 측에선 믿을 수 없다며 이천이나 되는 대군을 국경에 배치해왔다.
벨리언의 태도가 이상했지만 이것은 도적들을 소탕하면 해결되는 일. 부대의 지휘를 맡은 콜린 자작은 나름대로 유능한 무관. 누구나가 콜린 자작이라면 도적 일백쯤은 금방 소탕할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변경에 도착한 콜린 자작은 부근에서 대기중이던 잔여 병력과 합류했다. 그리고 상황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듣기 위해 날이 저문 후 잔여 병력의 대장을 막사로 불러들였다가, 그대로 살해당했다. 잔여 병력의 대장이라 생각했던 남자가 갑자기 무기를 빼어들고 습격을 가해온 것이었다. 콜린 자작뿐만 아니라 부대를 움직일 권한이 있는 참모나 기사들 역시 불의의 공격에 별 저항 못하고 몽땅 살해당했다. 사실 그는 잔여 병력의 대장이 아닌 살해한 병사들의 옷을 빼앗아 입은 도적떼의 두목이었던 것이다.
지휘관을 잃은 부대내엔 기다렸다는 듯 여기저기서 불길이 일어났다. 잔여 병력으로 가장한 도적떼들이 부대 내 여기저기에 방화를 저지른 것이다. 그리고 혼란에 빠진 하멜뷔에른 왕국군은 정체 모를 부대의 야습을 받는다. 벨리언 측의 이천 병력이 국경을 넘어 진군해온 것이었다. 지휘관도 잃고 방화로 혼란에 빠져있던 일천의 병사들은 너무도 허무하게 그 대부분이 목숨을 잃었다. 일천이나 되는 병력 중 살아남아 도망친것은 겨우 수십명 뿐이었다.
그리고 이 상황의 장본인인 도적떼의 두목은 바로 진석이었다. 진석은 벨리언 왕국의 백작위를 지녔을 뿐만 아니라 이 지역의 모든 군권을 책임지고 있는 장군이었다. 도적떼로 가장해 하멜뷔에른 변경을 약탈하고, 급히 소집되고 있는 병력들을 어렵잖게 각개 격파하고, 하멜뷔에른 왕국군의 잔여 병력으로 가장해 암살과 더불어 화계와 기습으로 천삼백이나 되는 병력을 별 손실 없이 잡아먹은 것이었다. 이천 병력이 진군한 하멜뷔에른의 변경은 벨리언 왕국이 집어삼켰다. 주변 마을의 거주민들은 진석이 이끈 부하들이 죽이거나 노예로 끌고갔지만 처음부터 노린것은 개척이 마무리 되어가던 이쪽의 기름진 농경지들. 주민이나 소작농따윈 얼마든지 이주시키면 그만이었다.
벨리언 왕국과 진석에게 속았다는것을 깨달은 하멜뷔에른 측은 선전포고를 하고 즉시 소집가능한 병력을 몽땅 동원하여 진군시켜왔다. 하지만 벨리언 측은 하멜뷔에른 측이 먼저 병력을 이끌고 국경을 침범하였기에 반격한 것이라고 공표하며 추가 병력을 보내 진석을 지원해왔다.
하멜뷔에른 측이 급히 끌어모은 정규병력은 총 사천. 벨리언 왕국군은 진석이 이끌고 있는 이천에 추가병력 삼천을 더한 오천이었다. 그리고 하멜뷔에른 측의 방위군엔 꽃의 기사 루스도 포함되어 있었다. 양측의 부대는 전장으로 삼을만한 근처의 니히자인 평원에서 대치하게 된다.
전장은 크게 보아 둘. 언덕과 숲지가 일부 끼어있는 북쪽의 전장과, 완전히 평원뿐인 남쪽의 둘이었다. 루스는 남쪽의 전장에 속해 최전선에서 오백명의 창병대를 이끌게 되었다. 그리고 개전 첫 날. 듣던것과 달리 벨리언 측 병력의 실력은 형편 없었다. 제대로 붙어 싸우긴 커녕 진을 세워 방벽에 의지하고, 밀집대형을 유지하며 전면엔 방패병을 앞세워 시종일관 자리를 지키거나 그도 안되면 병력을 뒤로 물리며 버티기에 바빴다. 이쪽에서 추격하려면 궁병대로 거리를 벌리거나 소수의 기병대로 견제해오며 쓸데없는 소모전만 벌였다. 하지만 누가봐도 하멜뷔에른 왕국군의 우세. 이쪽도 사상자가 적은것은 아니었지만 소극적인 상대의 모습에 사기만큼은 뚜렷히 올라갔다. 그리고 날이 저물어 양군이 북을 울리며 서로의 진영으로 퇴군할 즈음, 상대측에서 호위병을 잔뜩 대동한 검은머리의 기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다름아닌 진석이었다.
"어이! 그쪽의 여기사! 네가 꽃의 기사라고 불리는 루스인가?"
"그렇다. 그쪽은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나? 나는 조셉 백작. 내가 콜린 자작인가 뭔가하는 병신의 목을 땄지. 쥐새끼 죽여봤어? 쥐는 죽을때 정말로 찍 하는 단발마를 내는데, 내가 그놈 목을 딸때도 그거랑 똑같은 소리가 나더라니깐. 하하하!"
와하하 하고 왁자지껄 웃어제끼는 진석과 주변의 호위들. 뿌득. 루스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콜린 자작은 훌륭한 귀족이었다. 귀족으로서 왕에게 충성의 의무를 다하고 영민들에게도 선정을 베풀었다고 알고 있었다. 그런 사람이 죽어서까지 모욕을 당하다니! 하지만 저것은 누가봐도 도발이었다. 입은 더러운 말을 뱉으며 웃고 있었지만 눈은 날카롭게 이쪽을 가늠하고 있었다. 루스는 감정에 치우쳐 일을 그르치지 않기로 마음먹곤 퇴각 신호대로 말 고삐를 꽉 쥔채 자신의 진영으로 돌아갔다.
"아~ 그냥 가냐? 하멜뷔에른 왕국은 다 저 모양이라니깐! 하긴 꽃은 감상용이지. 꽃의 기사는 개뿔, 여자따위가 전장에 나와서 무슨 쓸모가 있겠어?"
뒷통수로 쏟아지는 매도의 말을 무시한 루스. 하지만 가슴속에선 생전 처음 느껴보는 분노와 증오가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진석의 도발은 그걸로 끝나지 않았다. 며칠이나 대치가 계속되었지만 진석은 매일 양측의 진에서 퇴각의 북이 울릴때마다 루스의 앞에 나타나 갈수록 심해지는 도발을 해왔다.
"그것도 칼질이라고 하냐? 나원참. 꽃의 기사라~ 아랫도리에 있는 꽃을 벌려주고 얻은 별명인가?"
"이 더러운놈이 계속 입을 함부로 놀리는구나!"
더 참지 못한 루스의 호위기사 중 한 명이 분노해서 달려나갔다. 루스는 제지하려고 했지만 이미 늦었다. 호위기사는 빠르게 말을 몰아가 손에 든 창으로 차징을 시도했다. 그리고 격돌의 순간, 진석은 뭔가 번쩍 하나 싶더니 대검을 휘둘러 일격에 그 호위기사를 말째로 베어버렸다. 사람과 더불어 말까지 양단해버리다니, 생전 처음보는 어마어마한 참격이었다. 이렇게 된거 내심 자신의 호위기사가 이기길 바라던 루스였지만 그 모습엔 안색이 파리해질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조셉 백작이라고 밝힌 저 자는 그저 입만 산 상대가 아니었던것이다. 만약 자신이 도발에 넘어갔다간 저 꼴이 되었을수도 있으리. 진석은 피를 뒤집어쓴채 히죽히죽 웃으며 루스에게 말했다.
"아차차. 실력을 보여주고 말았네. 어여쁜 아가씨가 이걸 보고 겁낼까봐 조심조심 했었는데, 끌끌."
"이놈...!"
달려가서 단숨에 목을 꿰뚫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것도 아니었지만... 자신은 이쪽의 창병대 오백을 움직이는 지휘관. 격정에 휘둘려 적의 장수와 섣불리 대결을 벌여서야 안될일. 루스는 또다시 분노를 억누르고 퇴각했다. 어차피 이쪽의 전황은 하멜뷔에른 군이 우세해 있었다. 벨리언 왕국측은 자신들이 먼저 전쟁을 일으켜 놓은 주제에 어찌된 일인지 계속 소극적으로 나오는터라 사상자의 수는 저쪽이 좀 더 많은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날 저녁, 군략 회의가 열리고 루스는 작전에 대한 명령을 받았다. 벨리언 왕국 측 병력의 기세가 생각보다 약하고 방어적으로 나오므로 이 이상 소모전을 펼칠것이 아니라 내일은 북쪽과 남측 전장 두 곳 다 총력전으로 나서 상대를 전면에서 깔끔하게 패퇴시키자는 내용이었다. 사실 계략도 뭣도 아닌 그저 단순한 지시였다. 하지만 루스는 그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내일은... 더 이상 퇴각따윈 없어. 반드시 끝까지 물리쳐주마!'
날이 밝고 전군에 평소보다 넉넉한 식사를 보급하게 한 후, 개전의 북이 울렸다. 하지만 이게 어찌된 일인가. 병사들 사이에서 하나 둘 쓰러지는 자가 나오기 시작했다. 전부가 그런것은 아니었지만 열명이 있으면 그 중 두셋은 안색이 창백해진채 쓰러졌다. 뜬금없는 사태에 진중엔 공포가 전염되었다. 루스의 창병대 뿐만 아니라 다른 부대쪽도 마찬가지. 하멜뷔에른 왕국군 전체에 똑같은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마치 이때를 노렸다는듯 지금껏 소극적으로 수비위주로 임하던 벨리언 왕국군이 전군을 동원해 이쪽을 공격해왔다.
"싸, 싸워라! 적을 물리쳐라!"
병장이나 하급 군관들이 기세를 불러일으키려 애썼지만 소용 없었다. 쭉 방어태세를 굳히며 힘을 비축해오던 벨리언 측 병사들은 혼란에 빠진 하멜뷔에른 군을 마구 치고 들어왔다. 전 병력의 2할 가까이가 의문의 사태로 전투불능에 빠진터라 제대로 된 대응이 될리 없었다. 총력전으로 나서자는 어제의 회의 내용이 무색하게 상황은 반대로 역전되었다. 하지만 루스는 물러서지 않고 필사적으로 싸웠다. 선두에 나서 검을 휘두르고 병사들을 격려했다. 루스의 지휘가 닿은곳은 부분적이나마 고무되어 반격을 펼쳤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못했다. 루스의 앞에 검은 머리의 기사, 현재는 벨리언 측 전선의 총대장인 조셉 백작, 진석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후후. 애쓰고 있구만. 어때, 오늘은 나랑 좀 놀아줄 생각이 드나 몰라?"
"조셉 백작...!"
루스가 진석이 벨리언측의 총대장이란 사실을 알았으면 바로 덤벼들었을테지만, 그녀는 그 사실은 몰랐다. 그저 상대가 일군의 지휘관 일거라 생각했을뿐. 그러니 저자에게 발이 묶여 한곳에서 지지부진할 때가 아니었다. 말머리를 돌려 자리를 떠나려 했다. 전선을 넓게 활용하며 최전선의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리고 유격전을 펼쳐야... 하지만 그녀의 상념을 깨듯, 진석은 왠 젊은 여자를 데리고 오게 했다. 옷이 다 찢어지고 행색이 엉망진창인게 난행을 당한 흔적이 역력했다. 진석은 대검을 그 젊은 여자의 목에 들이대며 루스에게 말했다.
"그쪽도 제법 깜찍한 짓을 하더만. 뭐 네가 보낸것 같진 않지만 창녀들을 잠입시켜 이쪽의 정보를 캐내려 하다니..."
전선에서 몸을 파는 창녀들은 어렵잖게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전황이 마무리 되어 한쪽의 승리가 굳혀지고 약탈이 끝나 병사들의 주머니에도 돈이 채워졌을때나 등장하지, 한창 군이 대치중인 상황에 창녀들이 보인다는것은 드문일이었다. 이것은 하멜뷔에른 측 지휘부가 상대측의 전력이나 책략을 탐색하기 위해 나름대로의 계략을 쓴 것이었지만 여기사인 루스에겐 일부러 알리지 않은 사실이었다. 루스는 자신을 절망어린 눈동자로 바라보는 창녀때문에 막 돌리려던 말머리를 멈춰세웠다.
"잘 봐둬라. 이 여자는 너 때문에 죽는거니깐."
"그... 그만둬!"
진석은 대검을 휘둘러 단숨에 창녀의 머리를 베어버렸다. 너무 순식간이라 어떤 고통도 없었으리라.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하는 순살의 일격이었다. 진석은 나름의 자비를 베푼것이지만, 루스의 눈엔 상대가 무고한 여성을 살해하는 악귀같은 자로 보였다. 지금까진 상대에 대한 분노를 차가운 이성으로 꾹꾹 억눌러오던 루스였지만... 일부러 자신 앞에서 민간인을 해치며 도발해오는 만행에서까지 등을 돌리고 싶지 않았다.
"조셉 백자아악! 하멜뷔에른 왕국의 기사 루스 휘태커가 당신에게 도전한다!"
루스는 호위들도 다 팽개치고 단기로 말을 몰아 진석에게 육박했다. 살기등등한 기세에 주변에서 싸움을 벌이던 잡병들도 움찔하고 놀라 옆으로 흩어졌다. 진석은 피식 웃으며 대검을 고쳐 잡고 마찬가지로 말을 몰아 달려들었다.
"좋아! 도전을 받아들이겠다! 아무도 이 싸움에 끼어들지 마라!"
루스의 기본기는 세검을 바탕으로 한 펜싱이었다. 힘보다는 기교를 살린 세련된 검법. 하지만 전장이나 마상전에선 불리했다. 게다가 지금 들고 있는것은 특별히 루스에게 맞춰 경량화하고 끝을 날카롭게 만든 그녀 전용의 롱소드였다.
'상대는 대검... 역시 마상전은 불리해. 말을 노리자!'
말과 말이 서로에게 부딪힐정도로 육박했을때, 루스는 몸을 바짝 숙여 대검의 참격을 머리위로 흘려보냈다. 거칠게 휘둘러지는 대검의 기세에 머리카락의 일부가 잘려나갔지만 신경쓰지 않았다. 몸을 일으키며 상대가 탄 말의 눈을 베어냈다.
"허! 제법!"
진석은 루스가 자신의 공격을 흘려내고 말을 공격한 것을 놓치지 않고 똑똑히 확인했다. 눈이 베어져 미친듯이 날뛰는 말을 버리고 땅으로 뛰어내렸다. 루스는 말을 반전 시켜 짧은 거리나마 기동력을 살려 진석에게 돌격해왔다.
"그 목! 받겠다!"
"하, 그딴 소리 하기에 백년은 멀다고 아가씨."
번쩍! 진석의 검에서 다시 빛이 뿜어졌다. 질겁하는 루스. 이 빛은 본적 있었다. 자신의 호위 기사가 저자에게 도전했다 말째로 베어졌던 바로 그 참격때와 같은것. 루스도 급히 말을 버리고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방금전까지 자신이 타고 있던 말은 세로로 양단되었다. 믿을 수 없었다. 이건... 인간의 기술이 아니었다. 대체 저자는 뭔가? 놀란 루스가 멈칫한 사이 진석은 히죽거리며 허리춤에서 SP회복제를 꺼내 마셨다. 이 기술은 간격안에만 들어온다면 풀 플레이트 메일을 입고 방패를 든 적이라고 해도 갑옷과 방패까지 통째로 베어낼만큼 강력했지만... SP의 상당량을 소모하는 기술이라 남발하기엔 힘들었다. SP회복제를 마신 진석은 질려있는 루스에게 까딱까딱 손짓하며 도발했다.
"뭐야. 아직 전희도 안했는데 벌써 겁을 먹으면 어떻게 해?"
"이... 당신만큼은 내가 쓰러트리겠다!"
루스는 마음을 다잡고 투지를 불러일으키며 진석에게 덤벼들었다. 과연 꽃의 기사라는 이명을 얻을만큼의 빠르고 화려한 난격이 진석에게 쏟아졌다. 진석은 일부는 대검으로 막아내고 일부는 몸에 두른 단단한 갑주로 적당히 받아내며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고보니 네쪽의 병사들 말야. 왜 쓰러졌는지 궁금하지 않아?"
"뭐...?!"
허공에서 춤추던 루스의 칼이 순간 멈칫했다. 아까 그 의문의 사태... 그것마저 이 남자가 뭔가 손을 쓴거란 말인가? 진석은 후우 한숨을 돌리곤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닦으며 태연히 말을 이었다.
"이야기를 좀 더 거슬러 가서... 병사수는 우리측이 조금 더 우위임에도 왜 수비를 굳히고 있었는지는 궁금하지 않아?"
"네... 네놈들같이 무도한 자들은 전선에 설 용기도 없으니 그런것 아니더냐!"
"땡. 똑똑한 기사님이라더만 이거 순 깡통이구만. 이쪽 전선에 있는 우리측 병력은 현재 삼천. 여기 남쪽과 윗쪽의 북쪽 전선에 딱 반씩 나뉘어 배치되어 있지. 자 그럼 여기서 한 번 더 질문. 나머지 이천은... 어디로 갔을까요?"
원래 적의 숫자는 총 오천, 그리고 아군은 사천. 반씩 나누면 이천오백대 이천이다. 압도적인 차이는 아니니 충분히 격퇴할 수 있는 숫자 차이. 하지만 처음부터 적은 이천오백이 아닌... 천오백이었다? 그러고보니 언제나 밀집대형을 짜 수효의 파악을 어렵게 만들었으며 진이나 방패병을 위주로 수비만 하며 전력을 온건히 보존하는 전술을 펼쳤다. 게다가 지금은 의문의 사태로 병사들이 쓰러지고 혼란에 빠져 싸움이 어려운 상황. 그런데 여기서 상대의 병력 이천이 추가된다면... 루스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서, 설마."
"각기 천씩 나뉘어 양측 전선의 배후로 보냈지. 그리고 너희들의 진으로 흘러들어가는 보급수레 중 일부를 기습해 그 안에 독을 타게 만들었지. 음식이 변질되지 않으며 먹는 상대가 눈치채지 못할 무색무취의 독은 나름 대로 귀한거라... 아무리 나라도 해도 수천병력을 다 쓰러트릴 정도로 대량은 구하지 못해서 있는 만큼만 썼다만. 뭐 나름대로 효과적이더군. 자 그럼 마지막 질문. 그 병력들은 지금 어디로 향하고 있을까?"
보, 보급수레를 기습? 그리고 독? 상대의 군량을 빼앗는다면 몰라도, 그 안에 독을 탄다는 발상따위 루스는 전혀 하지 못했다. 아무리 꽃의 기사니 뭐니 추앙을 받아도 그저 귀족가의 영애, 결국 온실속의 화초였다. 이런 지저분한 싸움방식이 있을거라곤 생각을 못했던 것이다. 게다가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만약 나머지 병력이 지금 이쪽을 향하고 있다면 아군은 양면에서 포위...!
"저, 적습! 배후에서 벨리언 군이 증원!"
병사들 사이에서 그런 외침이 터져나왔다. 깜짝 놀란 루스가 그쪽을 바라보니... 정말로 적의 병력이 넓게 산개하여 이쪽 전장으로 몰려오고 있었다. 포위진이었다. 루스는 자신도 모르게 탄식했다.
"이... 럴수가."
어제까지만해도 총력전을 다짐했었는데, 이게 바로 무슨꼴인가. 안색이 굳어가는 루스를 바라보며 히죽거리던 진석은 대검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이렇게까지 일이 쉽게 잘 풀리다니 다행이야. 딱히 네가 잘못하거나 실수한건 아니야. 되려 몇 번이고 도발을 물리치며 열심히 싸웠으니까. 그저 그쪽 지휘부가 상상이상으로 무능한 자들만 모여있었던 덕이지. 역시 하멜뷔에른보다 벨리언쪽을 선택하길 잘했다니까. 그쪽은 대부분 평화만만세 주의잖아? 반면 이쪽의 왕님은 꽤나 탐욕스럽지만 그만큼 전쟁이 가져다주는 이득을 아주 잘~ 안다고. 일개 백작이 오천병력이나 끌고 나올 수 있는건 다 그 덕이였거든. 자 그럼 수다는 여기까지. 슬슬 결착이나 내볼까."
"크으윽... 이 더러운놈들...!"
이를 바득바득 가는 루스. 아름답던 얼굴이 분노와 증오로 일그러졌다. 진석은 그녀를 조소하며 대검을 휘둘러왔다.
"하! 더러워? 전쟁에 그딴게 어딨어! 쓸 수 있는거라면 개똥이라도 쓰는거지!"
카아앙! 진석의 대검과 루스의 롱소드가 허공에서 충돌했다. 신음성을 토하며 뒤로 물러나는 루스. 루스의 검술만큼은 진석에게 뒤떨어지 지지 않는것이었지만 상황이 열세에 빠져 정신적으로 궁지에 몰려있었다. 이럴때야말로 일군을 통솔하는 자신이 어떻게든 해야하는데 발이 묶여있다. 마음이 조급해지니 검이 흐트러지고 발놀림이 어지러워졌다. 결국 루스는 자신의 장기인 가볍고 빠른 검격을 살리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몰리다 검을 놓치고 진석의 대검 앞에 무릎을 꿇었다.
"주... 죽여라."
"그렇게는 안돼지. 넌 내 전리품이니까."
퍼억. 루스의 목에 진석의 수도가 내리쳐졌다. 찍소리도 못하고 그대로 기절해서 쓰러지는 루스. 진석은 부하들을 시켜 그녀를 포박시킨 후 자신의 막사로 데려다 놓도록 명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전황을 살펴보자니 증원된 병력들이 하멜뷔에른 군을 앞뒤로 포위하여 일방적으로 몰아붙이고 있는것이 보였다.
"어이 부관."
"넷, 백작님. 하명하십시오."
진석이 손짓을 하자 뒤에서 명령을 대기하던 부관이 즉시 달려왔다. 진석은 부관의 귀에 뭔가를 속삭였고, 부관은 고개를 끄덕인 후 주변의 휘하 제장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명령을 전파받은 그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진석의 지시를 이행했다.
"항복하면 목숨은 살려준다! 항복해라!"
"투항해라! 저항하지 않으면 살려주겠다!"
진석의 지시에 따라 전장엔 항복을 종용하는 벨리언 군 측 병사들의 외침이 울려퍼졌다. 이미 전황은 벨리언측의 승기가 굳어진 상황. 사기가 극도로 떨어져 있던 하멜뷔에른 측 병사들은 지휘관이나 군관들의 독려에도 불구하고 무기를 버리며 대부분이 투항해왔다. 끝까지 목숨을 내던져 싸울것을 독려하는 군관들을 살해하는 자들도 있었다. 하멜뷔에른 측 병력을 투항시키고 끝까지 저항하는 지휘관들 까지 몰살하고 포로들을 한 곳에 모아놓고 수를 세어보니 약 이천가량. 전병력 중 무려 절반이 사상당한 괴멸적인 상태였다. 진석은 포로를 한곳에 잘 모아놓게 한 후 부관에게 지시를 내리며 자신의 막사로 돌아갔다.
"그럼 뒷처리는 맡기지. 나는 지금부터 전리품의 확인을 봐야하니까."
"깔끔히 처리해 두겠습니다. 푹 쉬시길."
벨리언 군은 부관의 지시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더니 한쪽에 잘 모여있는 이천이나 되는 하멜뷔에른 투항병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불안감을 느낀 그들이 웅성이기 시작할때쯤, 그들의 머리위로 화살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벨리언측 병사들이 활을 쏘아대기 시작한 것이다.
"이게 무슨! 우, 우리들은 항복했는데!"
"벨리언 이 개자식들! 이런 더러운짓을 하다니!"
하멜뷔에른 투항병들은 속았다는것을 알고 저항하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무장해제 당하고 일방적으로 궁사에 노출된 그들은 하나둘 속절없이 쓰러지기 시작했다. 이따금 화살을 피한 이들이 포위를 하고 있는 벨리언 측 병사들의 무리로 가까이 달아나긴 했지만 창병들에게 막혀 학살당할 뿐이었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니히자인 평원위엔 하멜뷔에른 장병들의 수천 시체들만이 남겨졌다.
'그런 일도 있었지.'
에나가 살해당하고 제이스를 붙잡은채 러프야드 근교의 숲으로 피했을때. 교단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진석이 제이스를 역으로 속이고 처음 교단으로 향하던 도중. 마차를 몰던 진석은 할 일도 없고, 멍하니 이전의 플레이를 떠올리고 있었다. 제이스를 협박할때 이때의 일을 언급했던게 떠올랐던 것이다.
'결국 며칠동안 잠도 안재우고 실컷 능욕하다가 질려서 병사들에게 던져줬었는데. 그러고보니 그 뒤론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네. 뭐 노리개로 굴려지다 죽었을라나.'
그때 안쪽의 창에서 똑똑하고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창을 열자 어딘가 퉁명스런 제이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얼마나 더 가야하는거야?"
"거의 다왔어. 한 30분쯤 가면 될까?"
저 멀리 러프야드의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좋건 싫건 일단 저기서 보급을 해야지. 그나저나 수배가 걸려있으면 안될텐데.
============================ 작품 후기 ============================
전회차 내용을 언급하신 테르제 님의 의견을 선택해서 일단 한 편 써봤습니다만.. 어떤진 모르겠군요. 다른 내용의 외전은 또 다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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