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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베라 - 부회의 방랑자-100화 (100/155)

< --   - 9.   -- >         * 100화 *

"넌... 뭐냐?"

"그건 제가 묻고 싶은 말인데요."

애거스트 공화국의 변경 도시 트라니안. 번화가에 위치한 어느 여관 건물의 근처.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뒷골목. 진석은 검은 장발의 한 낯선 청년과 대치하고 있었다. 진석의 손에 들린 두 자루의 단검. 그리고 청년의 손에 들린것 역시 두 자루의 단검. 진석과 청년은 마치 거울을 보는 것 처럼 둘 다 똑같은 바일리 델 비엔토의 기본형을 취하고 있었다.

"이 자식."

"저는 그쪽 자식이 아닌데요. 기분 나쁘니 반말 하지 마시죠."

말투도 심기에 거슬린다. 뭐 좋아. 이렇게 된 이상 할 일은 하나 밖에 없지 않은가. 실력행사다. 진석은 청년은 쏘아보며 말했다.

"실컷 두들겨 패놓고 그 다음 물어봐주지."

"제가 할 말을 대신 하는군요."

청년도 지지않고 진석을 마주보며 대꾸했다. 그리고 잠시 노려보던 둘은 동시에 서로에게 탄알처럼 쏘아져 나갔다. 두 사람의 입에선 동시에 같은 외침이 튀어나왔다.

"라파가-!!!"

약 2주 반 전의 저녁. 진석은 아이린의 집에 도착해 그녀와 몸을 섞고 있었다. 운 좋게도 그녀의 남편 시무스는 아침나절에 나갔다고 했다. 레인저로서 정례 업무 보고를 위해 근처의 요새로 갔기에 돌아오려면 확실히 며칠은 걸린다고 했다. 속으로 쾌재를 부른 진석은 저녁 식사를 마치자마자 아이린을 끌고 침대로 들어갔다. 아이린도 어머 얘도 참 급하기는 같은 소리를 하면서도 못이기는 척 진석의 리드에 몸을 맡겼다.

그리고 벌써 다섯번째의 사정. 아이린은 진석을 꽉 끌어안은채 자신의 내부를 채우는, 남편이 아닌 타인의 정액을 아무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다. 거부감은 커녕 그 입술에선 연신 희열에 찬 신음성이 흘러나오는게 겨우 두번째임에도 그녀는 낯선 남자와의 관계를 적극적으로 즐기고 있는것이 분명했다. 사정을 마친 진석이 재차 허리를 움직이려 하자 아이린은 진석의 이마에 맺힌 땀을 상냥히 닦아주며 말했다.

"후후, 저번하고 똑같구나. 몇번이나 사정해도 지치지 않는게... 하지만 뭐가 그렇게 급해? 밤은 기니까 천천히 하자구, 응? 그보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좀 얘기해줘. 난 여기서 변변한 말동무도 없이 지내니까 심심하단 말야. 그리고 저기 벗어놓은거, 저번엔 못보던 어깨 보호대나 건틀렛도 그렇고, 왜건이 말 한 필로 바뀌어 돌아온것도 그렇고. 폐촌이라고만 생각했던 이더스 마을이지만... 거기서 분명 뭔가 일이 있었던거지?"

"아... 네, 뭐."

하긴 아이린의 말대로다. 급할건 없지. 진석은 그녀의 몸안에 삽입되어 있던 자신의 물건을 천천히 빼내고, 자세를 바꾸어 침대위에 누운채 아이린에게 팔베개를 해주었다. 아이린은 자연스레 진석의 품에 쏙 안겨왔다. 눈을 빛내며 이야기를 기대한다는 듯 이쪽을 올려다보는 폼이 귀여워 입맞춤을 해버렸다.

"아이참. 이야기 부터 해달라니까, 응응... 하아. 키스 좋아하는구나? 역시 혀놀림이 보통이 아닌데."

"아니 아이린씨가 귀여워서 그만."

"얘는~ 나, 나는 너보다 연상인데~ 그런 기특한 소리를 하면... 기분 좋잖니!"

꺄아거리며 진석의 품에 파고들어 장난을 치는 아이린. 진석은 히죽거리며 아이린과 달라붙어 서로 맨살을 부벼대다,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며칠전에 아이린씨에게 식료를 받아서 이더스 마을로 갔었지요. 제가 찾는건 스마이쉬 산에 있다는... 어느 동굴이었어요."

진석은 스마이쉬 산의 동굴을 탐사하며 본것과, 몬스터들과 싸웠던 일을 설명했다. 아이린은 몬스터들의 이야기가 나오자 진석에게 바짝 달라붙어 입까지 반쯤 헤에 벌린채 집중해서 들었다. 동굴 심부에 도착하여 어마어마한 숫자의 라케르투스 족 유령 전사들과 싸우던 도중, 허공에 용의 형상이 나타나 브레스를 뿜어왔다는 이야기를 할땐 깜짝 놀라며 진석의 몸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괜찮은거야? 다친곳은?"

다쳤을리가 있냐. 그보다 이렇게까지 몰입해서 이야기를 듣다니, 이야기를 하는 쪽이 더 즐거울 지경이다. 진석은 아이린의 어깨를 감싸안으며 말했다.

"아뇨. 어지간한 집 두세채쯤은 가볍게 지워버릴 위력이었는데 맞았다면 다치는걸로 안 끝났겠죠. 죽었을거에요. 하지만 저 에스카마도라는 어깨 보호대 덕에..."

진석이 어깨 보호대 에스카마도에 숨겨진 힘인 보호마법 브로켈에 대해 이야기하자 아이린은 호기심과 불신이 반반씩 섞인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러셀, 내가 이런 산속에 틀어박혀 살림이나 한다고 놀리는거 아냐? 나도 젊어서 도시에 살 적엔 모험가라는 무리를 몇번 봐왔지만... 이건 솔직히 다 믿긴 힘든걸. 설마 지어낸 얘기인건 아니겠지?"

"에이, 내가 뭐하러 거짓말을 해요. 못믿겠다면 이걸 봐봐요."

침대에서 내려가더니 테이블 위에 벗어두었던 적룡의 건틀렛 플라메우스를 끼고 주먹을 쥐어보이는 진석. 그러자 주먹의 틈새로부터 불꽃이 새어나와 온 주먹이 불덩어리처럼 활활 불타올랐다.

"와, 대단... 아니. 이거 혹시 마법?"

"아니 거참. 속고만 살았어요?"

진석은 아이린이 눈을 가늘게 뜨며 못믿겠다는 표정을 짓자 건틀렛을 벗어두고 침대위로 올라가 그녀의 몸 위로 올라탔다.

"꺄아~ 뭘 하려고? 응?"

"뭐긴요. 사람을 솔직하게 믿어주질 못하니 혼을 내줘야죠."

"그런... 아아앙."

아이린을 끌어안고 간지르듯 목덜미와 가슴을 애무하다, 이내 허리를 부여잡고 재차 삽입하는 진석. 그녀도 두 다리로 진석의 허리를 감아 안으며 진석의 행위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그 다음은... 읏. 어, 어떻게 됐어?"

"저 건틀렛을 얻곤 동굴을 나오는데..."

다음은 거인족 소녀 파나히와 만난 이야기를 한 진석. 어줍잖게 시비가 붙어 싸우기도 했지만 이래저래 하다가, 여비와 소개장을 챙겨줘서 그녀가 나중에 자신이 아는 사람에게 찾아가 일 할 수 있도록 주선해주었다고 했다. 거기까지 이야기를 들은 아이린은 묘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흐응. 거인족 소녀라. 어때, 예뻤어?"

"어라. 이거 질투?"

"그럴리가. 나는 이미 결혼한 몸인걸. 웃... 러셀이 어디서 어느 여자랑 뭘 하건 나랑 상관없... 흐읏!"

진석은 최대한 하복부를 밀착해 자신의 음경을 안쪽으로 찔러넣어 자궁구를 찍어누르며, 손가락 하나를 세워 아이린의 엉덩이 사이를 꾸욱 만졌다. 예상못한 자극에 숨을 몰아쉬며 당혹스런 표정을 짓는 아이린.

"저, 저기. 그쪽은."

"왜요. 이쪽의 경험은 아직 없어요?"

짖굿은 표정으로 묻는 진석. 아이린은 잠시 머뭇거리다 얼굴 붉히며 대답했다.

"...응. 결혼하기 전에 사귀었던 사람중에 이쪽으로 하자고 권한 사람도 있었지만 역시 뭐랄까. 무서워서."

"그럼 제가 이쪽의 첫경험을 받아가도 될까요? 유부녀의 처녀라니. 묘한 울림이 있네요. 음, 좋은 어감인데."

"러셀군. 저질이야."

"에이, 그런 저질하고 이런짓까지 하고 있으면서."

진석은 거칠게 허리의 움직임을 재개하며 아이린을 꼼짝못하도록 끌어안고 항문쪽을 계속 자극했다. 한참이나 괴롭힘 당하던 그녀는 결국 진석이 여섯번째의 사정을 한 뒤에 헐떡이며 마지못해 승낙했다.

"하아, 하아... 아, 알았어 그러면. 한 20분 정도만 기다려줄래? 그... 이쪽으로 하려면 뭐랄까. 준비가 필요하니..."

"그 정도야 당연히 기다려야죠. 이야 기대되네요."

"아우 정말 남자들이란. 왜 이런 이상한걸 좋아하는거야? 넣으면 안되는곳에 꼭 넣고 싶어하고."

입술을 쭉 빼고 투덜거리며 욕실 안쪽으로 모습을 감추는 아이린. 진석은 그 뒷 모습을 보며 히죽거렸다. 왜긴 왜야. 남자란 한꺼풀 벗겨놓으면 죄다 변태기 때문이지. 벽난로에 장작을 더 넣는다거나 침대자리를 정리하며 잠시 기다리다보니 곧 아이린이 엉덩이쪽을 가리고 주춤거리며 나왔다. 진석은 침대에 걸터앉아 옆자리를 탁탁 두드리며 말했다.

"자자. 어서 이쪽으로 와요."

"으응... 어떻게 준비를 한다고 하긴 했는데. 이거 정말 괜찮을지 모르겠네."

해선 안될 선이야 진즉 넘었는걸. 뭘 이제와서. 진석은 우물쭈물하는 아이린을 붙잡아 침대위에 뒤돌아 눕게 했다. 아이린은 엎드려 누운채로 얼굴을 자신의 양 팔 사이에 파묻은채 두 다리를 버둥거렸다.

"아~ 역시 부끄러워! 엉덩이로 한다니. 그이는 커녕 누구하고도 해본적 없는데에에."

정말 귀여운 사람이다. 진석은 그녀의 허리를 들게하고 두 다리를 벌려 안쪽이 훤히 드러나게 만든 후 동글동글한 엉덩이를 슥슥 매만지며 말했다.

"우선 손가락부터 넣어볼께요. 힘빼고... 어라? 뭔가 발려있네요."

"그게... 유, 윤활제로 쓰일만한 연고를 미리 발라왔으니까. 이쪽에 러셀의 물건이 들어간다면 보통 큰 일이 아닐테니 아플것 같기도 해서."

머리를 파묻은채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꾸하는 아이린. 확실히 준비성도 좋다. 진석은 웃으며 손가락 하나를 넣어보았다. 의외로 스무스하게 들어갔다. 힉 하며 엉덩이를 가볍게 떠는 아이린.

"어때요?"

"으으읏. 엄청 이상해. 굳이 말하자면... 아니. 너무 적나라한 표현이니까 역시 관둘래. 이제 이쪽으로 그런일을 할건데 의욕이 달아날만한 말은 그렇겠지."

처음부터 상대가 무작정 애널로 쾌감을 느끼길 바라는건 무리다. 최소한의 시간을 들여 천천히 확장시키거나 어느정도 길을 들이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에나와 뒤쪽으로 관계할때는 미약을 썼었는데... 에라 모르겠다. 진석은 손가락을 하나 더 넣고 예민한 촉감을 사용해 최대한 아이린에게 쾌감을 주려 노력했다. 하지만 두 개가 들어가니 아무리 윤활제가 발려있다고 해도 확실히 빡빡했다. 그래서 그녀의 질육 안쪽에도 손가락을 슬쩍 넣어 민감한 내부를 부드럽게 자극했다. 질과 항문을 동시에 애무 당하면 항문쪽이 괴롭더라도 질쪽의 쾌감에 어느정도 묻힐터. 또 앞쪽의 자극을 뒤쪽의 것과 혼동하여 심리적으로 좀 더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것도 같았다. 한참을 애를 써서 양쪽을 열심히 자극하자 질육에서 질척거리며 물기어린 소리가 났다. 아이린은 허리를 이리저리 비틀며 흐으응 하고 억눌린듯한 신음성을 냈다.

"아으... 그, 응흣. 하아, 하앗... 이제 넣... 넣어보지 않을래?"

"그럴까요? 좀 더 느긋히 할까 했는데 아이린씨가 괜찮겠다면야."

진석은 짐짓 여유를 부리듯 말했지만, 사실 아이린의 몸속에 성난 자신의 물건을 넣고 싶은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했다. 아까 겨우 몇 번 사정한걸론 성에 차지 않았던 것이다. 진석은 위로 한껏 치켜든 아이린의 엉덩이를 잡고 자신의 물건을 아이린의 뒤쪽에 가져다 대었다. 조금전까지 손가락 두 개가 드나들고 있었던 덕인지 살짝 벌어진 그녀의 항문은 움찔움찔 떨리고 있었다. 그곳에 귀두의 앞부분을 딱 밀착시키는 진석.

"그럼 아이린씨의 엉덩이 처녀 감사히 받아가겠습니다."

"엉덩이 처녀가 뭐야! 이상한 말을... 히극!"

어줍잖게 사정봐주면서 넣으려다간 힘을 주거나 해서 걸리적 거릴것 같아 일부러 단숨에 밀어넣었다. 진석이 손가락으로 열심히 사전작업을 한 덕에 안팎으로 윤활제용 연고가 골고루 묻어서일까, 진석의 물건은 귀두부분이 아무 저항없이 쑥 들어갔다. 머리부분이 들어가고 나서야 깜짝놀란 아이린이 엉덩이에 힘을 주어 괄약근으로 진석의 물건을 조여왔다.

"아... 러, 러셀. 이거 진짜 이상해. 아까 손가락이랑은 비교도 안되게..."

"자아."

진석은 뒤에서부터 아이린을 안아든채 배면좌위의 자세로 전환했다. 아이린은 자신의 체중이 실린덕에 진석의 물건을 그 뿌리까지 완전히 삼키게 되었다.

"으, 으흑. 정말로... 뱃속에 뭔가 들어왔다는 느낌이 들어. 앞쪽으로 할때와는 전혀 느낌이 다르네."

인상을 찌푸리는 아이린. 진석은 두 손을 뻗어 한 손은 그녀의 가슴을, 한손은 그녀의 다리 사이로 뻗어 부드럽게 애무를 해주었다. 항문에 삽입하긴 했지만 바로 움직이는건 무리일것 같으므로 그냥 삽입한채로 애무를 해서 적응시키며 성감을 높일 생각이었다. 아이린도 진석의 생각을 눈치챘는지 그냥 이쪽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은채 애무를 받아들였다.

"하아. 러셀. 읏. 이쪽으로 여자랑 관계하는거... 처음 아니지?"

"뭐 솔직히 말하자면 두번째인데요."

그렇게 대답하며 아이린의 유두를 왼손의 엄지와 검지로 꾸욱 꼬집고, 오른손의 중지로는 단단히 선 클리토리스를 슬슬 비비다 꾸욱 누르는 진석. 아이린은 어깨를 움찔하다 하아 하아 낮은 숨을 뱉으며 고개를 뒤로 돌려 진석을 바라보았다.

"우으으. 못된것만 배워가지곤. 나쁜 남자야 진짜."

"칭찬으로 듣죠."

"저번에도 했던 얘기지만... 지금의 그이를 만나기 전에 널 만났다면 좋았을걸."

아이린은 다른것보다 산속에 갇혀 산다는 답답함이 제일 큰 것 같았다. 평화롭지만 자극이 없는 무료한 일상. 그래서 결혼 생활 최고의 위험이자 자극제라고 할 수 있는 나 같은 불륜 상대가 되려 엄청나게 끌리는 모양인거겠지. 진석은 씨익 웃으며 허리를 조금 뒤로 뺐다.

"그럼 슬슬 움직일게요."

"아 잠깐, 아! 아으, 으으응!"

배면좌위는 원래 한쪽이 주도해서 움직이긴 힘든 자세. 진석은 아이린을 안은채로 허리를 아주 짧게 흔들듯 움직이며 그녀의 뒤쪽에 깊이 삽입된 자신의 물건을 움직였다. 하지만 역시 불편했기에 아이린을 그대로 앞쪽으로 숙이게 만들어, 후배위로 전환한 다음 깊게 넣었다 빼었다를 반복하며 애널 섹스를 했다. 아이린은 생경한 자극에 고통인지 쾌락인지 모를 신음을 흘리며 몸부림 쳤지만 점차 익숙해졌는지 달뜬 호흡을 뱉으며 진석의 움직임에 맞춰 자신 역시 허리를 움직였다. 진석은 자신의 행위에 맞춰주는 아이린을 뒤에서 껴안고 그녀의 두 가슴을 주무르며 귓가에 속삭였다.

"저도 아이린씨 같은 사람이라면 좀 더 일찍 만나고 싶었을지도... 사랑해요."

흠칫. 진석의 말에 아이린의 몸에 힘이 들어가며 뻣뻣하게 굳는게 느껴졌다. 이 아이... 지금 날 보고 사랑한다고... 사실 아이린 자신은 그저 불장난이었다. 상대에게 남편보다 널 먼저 만났으면~ 같은 말을 하긴 했지만 반쯤은 선심성으로 던지는 말이었다. 남자들은 이런식으로 여자가 자신에게 반한것처럼 구는 태도를 아주 좋아하니까. 허나 아이린은 태연히 불륜을 저지르고 있었음에도 여전히 자신의 남편을 사랑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사람하나 없는 산중에서 그와 함께 살리 있겠는가. 어차피 이 러셀이라는 청년과의 관계는 일시적인 것. 기왕 저지르는 불장난이라면 화끈하게 저지를 생각일 뿐이었다. 하지만 막상 상대의 입으로 사랑한다는 소리를 들으니 마음속에 뭔가가 덜컥 하고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물론 성행위로 호흡이 가빠져 심장의 박동은 아까부터 빠른채였지만, 그것과는 다른 종류의 두근거림이었다.

'사랑한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들어본게 언제였지.'

자신의 몸에 삽입한채, 이곳저곳을 애무하고 주무르며 욕망을 채우기 위해 여체를 갈구하는 진석이 어쩐지 점점 의식되는 아이린. 어차피 긴 인생에서 잠깐 스쳐지나가는 상대라 생각했기에 불륜으로 맺어진 부정한 관계임에도 마치 동생이라도 대하듯 태연한 태도로 마주할 수 있었지만... 막상 사랑한다는 말을 직접 듣고보니 지금까지의 의연한 모습으로 이 남자를 대할 수 있을것 같지 않았다. 그가 자신에게 하는 행위와 쾌락이 어째선지 더할 나위 없는 행복감으로 치환되었다.

"마... 마주보고 하지 않을래? 키스해줘."

진석은 묵묵히 아이린의 요구대로 정상위로 자세를 바꾸어 그녀를 강하게 끌어안으며 입을 맞추었다.

'호오. 그냥 한 번 해본 소린데 갑자기 표정도 그렇고 태도가 다른사람처럼 변하네?'

사랑한다는 말, 당연히 진심으로 한 말이 아니었다. 저번에도 그렇고 아이린이 남편전에 너를 만났다면~ 같은 소리를 하니 이쪽도 한 번 슬쩍 떠본거였다. 하지만 반응이 의외로 좋은걸? 진석과의 키스를 마친 아이린은 시트자락을 꾹 쥐고 아직 익숙하지 않은 애널 섹스의 자극을 어떻게든 받아들이려 애쓰고 있었다. 그 모습이 참 귀엽달까 기특하달까. 진석은 안쪽 깊은곳에서부터 사정감이 치솟는걸 느꼈다.

"그럼... 낼께요."

"응. 싸줘. 네가 원하는대로, 내 안에..."

익숙하지 않은 뒤쪽으로의 행위라 절정에 달할 정도의 자극을 느끼진 못했지만, 아이린은 진석을 두 팔과 두 다리로 꽉 껴안았다. 자신의 몸 안쪽 깊숙한 곳에 정을 토해내는 사내의 감각이란 어째서 이렇게... 사랑스러운걸까. 짧은 사정 후 둘은 꼭 껴안은채 다시 한 번 진득한 키스를 나눴다.

아이린의 첫 애널 섹스 경험을 받은 진석은, 이후로도 밤을 새다시피 하며 그녀가 지쳐 떨어져 나갈때까지 관계를 하곤 서로 꼭 안은채로 잠들었다. 그리고 다음날 느즈막히 일어나 점심에 가까운 아침을 먹고 천천히 짐을 챙기며 떠날 준비를 했다. 그런 진석의 뒤로 아이린이 다가와 등을 끌어안았다.

"벌써 가려구? 하루 이틀쯤은 더 있다가도 괜찮은데..."

아쉬움이 뚝뚝 묻어나는 말투. 슬쩍 돌아보자니 그녀는 마치 비맞은 강아지 같은 얼굴을 하고 이쪽을 올려다 보고 있었다.

'이런 눈빛엔 내가 또 약하지.'

결국 진석은 짐을 팽개쳐두고 아이린을 벽으로 몰아붙인채 거칠게 범했다. 마치 강간이라도 하는 양, 옷을 강제로 발가벗기곤 마구잡이로 애무하고 제 좋을대로 삽입했다. 아이린은 저항은 커녕 한마디 불만도 없이 진석의 행위를 고스란히 받아들였다. 그러길 두어시간. 진석은 아이린의 안에 잔뜩 사정한 후, 서로 끌어안은채 침대에 누웠다. 양쪽 다 땀투성이라 끈적했지만 불쾌하긴 커녕 되려 기분 좋았다. 아이린은 진석의 가슴팍에 볼을 댄채 한참이나 거칠어진 호흡을 토해내다 겨우 말문을 열었다.

"러셀... 이제 떠나면 다시는 이곳에 올 일 없겠지?"

"아마도요. 앞으로 제가 해야 할 일은 몇 개월, 아니 몇 년에 걸쳐도 끝날지 어떨지 모르는 일이니까요."

"하아, 그렇구나. 아쉽네. 너무 아쉬워..."

그렇게 끊어진 둘의 대화. 한동안 말없이 안고만 있었다.

"...어쩔 수 없지. 어제 들려준 이야기나, 내게 보여준 저런 장비들만 봐도 러셀이 실력있는 모험자라는건 잘 알겠으니... 하지만 몸 조심 해야 돼. 목숨은 하나 뿐이니까. 이건 지난번에도 했던 말이라 기억하고 있겠지? 위험할땐 과감하게 도망갈줄도 아는게 진짜 용기라구."

"고마워요. 그럴게요."

그리고 자연스러운 딥키스. 한참이나 서로의 타액을 교환 한 후에, 아이린은 몸을 일으켜 진석에게서 떨어졌다.

"우으응. 뭔가 후련하네. 미안해, 내 고집때문에 갈길 바쁜 사람을 붙잡아둬서."

"별 말씀을요."

"그보다... 그이가 이번에 돌아오면 슬슬 아기라도 만들자고 해볼까? 몸매가 망가지는게 싫어서 이래저래 핑계를 대고 있었지만, 참 바보같은 소리지. 이웃 하나 없는 이런 산속에서 그런거나 신경쓰고 있고."

"아이 하나 둘 쯤 낳아도 아이린씨는 여전히 예쁠거에요."

"또 그렇게 기특한 소리를 해주긴... 후후. 그래, 첫 아이의 이름은 러셀이라고 지어볼까나?"

엑. 그건 왠지 싫은데. 불륜상대의 이름을 자식 이름으로 짓는다니. 무, 무슨 감성이냐 그게. 진석이 떨떠름한 표정을 짓자 아이린은 손을 내저으며 아하하 하고 웃었다.

"얘도 참~ 뭘 그런 표정을 다 짓고 그래."

"그러면 저도 언젠가 딸을 낳는다면 아이린이라고 지을까봐요."

"에... 그, 듣고보니 뭔가 싸하긴 하다. 아하하."

진석은 아이린과 마주앉아 한참 노닥거리다, 천천히 옷을 챙겨입고 짐을 쌌다. 아이린도 자신의 옷을 챙겨입더니 말없이 주방 안쪽으로 들어가 진석이 이동하는데 필요할 식료품을 한짐 가득 챙겨나왔다.

"여러가지 넣었어. 왜건이 아니라 말에 실어야 하니 저번처럼 양껏 챙겨 줄 순 없었지만 이 정도면 가까운 마을까지 가기엔 충분할거야."

"정말 고마워요. 아참. 그보다 이거 받으세요."

가방안에서 장신구 주머니를 꺼낸 진석. 여자의 모습으로 가장해 아라파로 향할때 받았던 물건이었다. 꽤 비싼 물건들임에도, 결국 제대로 착용한적도 없이 알 유세피나에게 은반지 하나를 꺼내 주었던게 전부였다. 진석은 그 주머니를 아이린의 손에 쥐어주었다.

"이게 뭐야? ...아니."

주머니를 열어보곤 온갖 화려한 장신구가 들어있자 깜짝 놀라는 아이린. 반지나 목걸이, 팔찌, 귀걸이, 브로치, 머리핀... 그야말로 없는 장신구가 없었다. 게다가 광택이나 색을 보니 전부 진짜 금이나 은이었고 보석들 역시 진품이었다. 아이린은 고개를 저으며 장신구 주머니를 진석에게 돌려주려 했다.

"이런건 받을 수 없어! 가져가렴!"

"그저 작은 성의에요. 받아준다면 언젠가 반드시 또 들를께요. 하지만 받지 않는다면... 두 번 다시 오지 않을거에요."

"...치, 치사한걸. 그렇게 말하다니... 정말 여자 꽤나 많이 울렸을거야. 욘석, 적당히 하고 다녀."

결국 아이린은 미소를 지으며 주머니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저번과 같이 두 손으로 진석의 볼을 감싸쥐곤 한참을 토닥거리더니, 이번엔 볼이 아닌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잘 가. 기다릴께."

"네. 그럼 또 언젠가."

자신의 배낭과 아이린이 챙겨준 식료 주머니를 들고 통나무집을 나서는 진석. 짐을 싣고 말에 올랐다. 아이린은 문가에 서서 가볍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진석도 크게 손을 두어번 흔들어 보인다음 말을 몰아 숲을 벗어나 산을 내려갔다.

아이린의 집에서 떠나온 진석은 황무지를 가로질러 바로 쭉 동쪽으로 향했다. 몇 곳의 마을이나 도시를 거치며 중간중간 보급을 하고 최단 코스로 비더하임의 국경을 벗어났다. 그 동안 딱히 별일은 없었다. 굳이 꼽자면 승마술이 D랭크로 올랐다는 것 정도? 비더하임을 떠나 이틀가량 더 달려 산을 하나 넘자 눈 앞에 넓은 초지가 펼쳐졌다.

'커드머스인가.'

커드머스. 예전 제이스를 붙잡고 데오그라드에서 탈출했던 진석이 향후의 진로로서 갈등했던 방향 중 하나다. 유목민족이자 유사인종 비엔으로 이루어진 국가. 사실 나라라기보단 거의 영역에 가깝다는 느낌이었지만...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게 펼쳐진 푸른 대초원엔 한여름의 싱그러움과 생명력이 그대로 흘러넘치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초원 중앙에 위치한 수도 마히간 이외엔 딱히 도시고 마을이고 없잖아? 초원 내에선 부족 단위로 여기저기 옮겨다니는 놈들이니.'

그래서 보급문제가 곤란했다. 공백지를 건너오는 통에 식량과 물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하지만 여기서 전전긍긍 하고 있어봐야 할 수 없는 노릇. 진석은 말을 몰아 대초원으로 진입했다. 바람을 따라 진한 풀냄새, 아니. 초원의 향기가 느껴졌다.

'한동안 황토색 투성이의 흙내 풍기는 황무지만 보다 초록색을 보니 훨씬 낫군.'

말도 흙먼지나 먹으며 돌아다니다 초원에 오니 더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승마술이 D랭크에 올라 말의 컨디션이나 기분을 어느정도는 짐작할 수 있게 되었는데, 확실히 움직임이 이전보다 훨씬 좋았다.

'저기... 저 멀리 뭔가 보이는 것 같은데.'

말을 여유롭게 몰며 좀 나아가다 보니 저 멀리 뭔가 이동하는 무리의 모습이 보였다. 비엔들의 부족일까? 탁 트인 평원에서 눈꼽만한 크기로 보이는거라면 정말 어마어마하게 먼 거리겠지만 지금은 뭐든 좋다, 잘 됐다. 비엔들이 인간들에게 적대적이건 아니건 상관없다. 말이 통하면 돈을 주고 물자를 사면 되고 아니라면 두들겨 패서 빼앗으면 그만이다. 어찌됐건 보급이 필요한 상황. 진석은 저 멀리 보이는 무언가를 향해 힘차게 말을 몰아 달려가기 시작했다.

무려 두시간여를 말을 몰아 진석이 마주한 것은 인간의 상단이었다. 수레만 해도 16대나 되는, 총원 육십에 가까운 대상단이었다. 호위로 보이는 이들이 서른하고도 너댓. 일꾼으로 보이는게 스물가량. 나머지 다섯명은 이들을 총괄하는 상인들로 보였다. 그들은 진석이 접근하자 처음엔 경계했으나, 혼자이고 두 손을 흔들어 보이며 적의가 없음을 알리자 수레를 멈추고 진석과 마주했다.

머리가 새하얗게 새고 수염까지 길게 기른 노인이 곁에 호위를 대동한채 나섰다. 진석은 자신을 여행자라 밝히고 비더하임에서부터 여기까지 왔는데 마침 식량과 물이 떨어져가던 참이라 구입하고 싶다는 의사를 비췄다. 노인은 자신의 이름을 알론조라 밝히고, 오래전부터 친교를 나눠오던 이 부근의 부족들에게서 양모와 양탄자를 잔뜩 구입해 대륙 북부로 팔러 가던 참이라고 했다. 수도 마히간에서 장사하는 이들이 파는것보다는 각 부족들과 직거래를 하는것이 훨씬 싸다나. 그러면서 차라리 자신들과 동행해서 근처에 있는 인간의 나라인 애거스트 공화국까지 이동하자는 제안을 해왔다.

탁 트인 대초원이라고 해도 위험이 없는것은 아니었다. 알론조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비엔들은 기본적으로 인간들에게 우호적이나, 다 그런것은 아니고 일부는 적대적인 자들도 있어 타 부족을 습격하거나 대초원에 들어온 인간들의 상단을 털어 먹고 사는 도적떼 같은 자들도 있다고 했다. 북부까지 이동하며 공백지를 지날때도 마찬가지. 이미 서른이 넘는 호위가 있긴 했지만 손이야 늘면 늘수록 좋은거고 일당도 지급할테니 이쪽에 합류하라는 이야기였다.

진석은 돈이 필요한건 아니었으므로, 일당은 거부했지만 합류에는 응했다. 밥만 얻어먹을 수 있다면 충분하다고 솔직히 밝혔다. 뭐 원래 목적은 커드머스를 쭉 가로질러 곧바로 페레나 시로 가는거였지만, 이들을 따라 북쪽에 있는 애거스트 공화국 까지 가는것도 나쁘진 않았다. 그래봐야 뭐 기껏 며칠 더 돌아가는거니까. 그런데 기존의 호위들 중에 성미가 급해보이던 한 사내는 이렇게 얼굴만 번드르르 하게 생긴 샌님이 무슨 호위일을 돕겠냐며 깐죽거렸다. 하지만 진석이 빙긋 웃으며 순식간에 단검 네자루를 투척해 그의 발치에 다다닥 연속으로 꽂아 넣자 식겁해서는 바로 입을 다물었다.

그 후로 약 일주일여. 진석은 상단의 호위로서 그들과 함께 행동했다. 일꾼들 중에 요리사가 끼어있어 적지 않은 인원임에도 꼬박꼬박 괜찮은 식사가 나왔다. 혹 알론조가 일러준대로 도중에 적대적인 비엔 부족이 공격해 오지 않을까 했지만 그런일은 없이 무사히 대초원을 벗어날 수 있었다. 대초원을 지나 이틀쯤 더 지나 애거스트 공화국의 변경도시 트라니안에 닿을 수 있었고, 진석은 물자의 보급을 위해 시장쪽으로 향하는 상단일행과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그리고 하루 묵어가기 위해 번화가의 적당한 여관을 찾아 들어갔다. 한동안 제대로 된 잠자리에서 자지도 못했고 씻지도 못했으니 꼴이 엉망이었다. 방을 잡곤 주인에게 돈을 쥐어주고 빨래를 부탁한 다음 여관내의 욕탕으로 가 시원하게 씻고 나왔다. 그리고 식당에서 식사를 하며 혼자 적당히 한 잔 마시고 있을때, 식당 안으로 한 무리의 남녀가 들어섰다. 총원 다섯명의 일행. 리더격으로 보이는 중갑을 입은 젊은 미남자. 자기 키만한 기다란 지팡이를 든 마법사로 보이는 호리호리한 사내. 어느 신을 섬기는건진 모르겠지만 차분한 회색톤의 법복을 입고 있는 트윈테일의 귀여운 아가씨와, 대궁을 메고 있는 활달해 보이는 비엔족의 여성. 마지막으로 긴 흑발을 한 약간 음침한 인상의 젊은 청년이었다. 장발머리를 한 그 청년은 허리춤에 두 자루의 단검을 차고 있었다.

'호오...'

뭐랄까, 밸런스가 잘 맞아보이는 느낌의 파티다. 전사에 마법사, 성직자와 궁수. 그리고 마지막의 저 녀석도 쌍단검을 쓰는걸까? 도적이라도 되나보지? 그렇다면 정말 여러직업이 골고루 모인 셈이군. 모험가들이라도 되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조끼에 담긴 맥주를 들이키며 그 파티를 곁눈질하는 진석. 그런데 흑발의 청년 역시 진석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뭐야 저놈?'

청년은 진석과 눈을 마주치고도 피하지 않은채 한참이나 이쪽을 마주보며 가늠하는듯 하다, 딴 생각하지 말고 일단 주문부터 하라는 성직자 아가씨의 성화에 겨우 고개를 돌리고 일행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진석은 왠지 기분이 묘했다.

'뭔가 이상한 놈인데.'

말로 딱 집어서 설명은 못하겠지만 그와 마주 바라보고 있자니... 어째 기분이 이상했다. 처음엔 그냥 모험가 파티인가보다 했지만 그게 아니다. 어딘가 다르다. 이게 참 표현을 못하겠는데... 하여튼 묘하다. 기분이 찝찝해진 진석은 먹던것을 대충 내버려두고 종업원을 불러 음식값을 치른뒤 식당을 나서 자신의 방이 있는 2층으로 올랐다. 그런데 뒤에서 누군가 헐레벌떡 달려오는 소리가 들리나 싶더니 나직한 목소리가 진석을 불러세웠다.

"거기요. 당신."

"...?"

뭔가 해서 돌아보니... 방금전의 흑발 청년이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뜬채 계단 위에 올라선 진석을 바라보며 말했다.

"잠시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요? 밖에서. 단 둘이."

"......"

대체 뭘까 이 녀석. 하지만 진석 역시 이 청년에게 말로 표현 못할 묘한 기분을 느낀건 사실이었으므로 호기심이 들어 그를 따라 나섰다. 혹시 몰라 무장은 풀지 않은 상태였으므로 덤벼온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마법같은게 아닌 검을 쓰는 상대라면 그게 누구건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으니까. 잠시 청년을 따라가자 그는 여관 뒤로 돌아가 인적 없는 뒷골목에서 멈춰섰다. 진석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 날 왜 불렀지?"

"그쪽에게서 뭔가 이상한 기분을 느껴서요."

지체 없이 즉각 대답하는 청년. 진석은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하, 우습구만. 나도 그랬는데."

그리고 잠시 끊어진 대화. 둘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그리고 침묵은 이내 차가운 살기로 변했다. 진석은 상대의 분위기가 달라졌음을 느끼고 란비언과 흑철단검을 뽑아들었다.

"넌... 뭐냐?"

"그건 제가 묻고 싶은 말인데요."

청년 역시 허리춤의 두 자루의 단검을 빼들며 그렇게 대꾸했다. 청년의 단검도 평범한 물건은 아닌지, 칼날에 은빛의 기운이 서려있는것이 보였다. 그리고 희한하게도, 대치한 둘은 마치 거울을 보는 것 처럼 둘 다 똑같은 바일리 델 비엔토의 기본형을 취하고 있었다.

"이 자식."

"저는 그쪽 자식이 아닌데요. 기분 나쁘니 반말 하지 마시죠."

정체가 뭔진 모르겠지만... 이 놈. 나와 같은 기술을 쓰는 상대다. 맨 처음 기술을 선택할때 이 기술이 생겨난 비전교단 솜브라인가 뭔가에 대해서는 제대로 안 읽었는데... 느닷없이 여기서 같은 기술을 쓰는 상대를 마주치게 될 줄이야. 후우. 한숨을 내쉬는 진석. 어쩔 수 없다. 눈 앞의 청년을 노려보며 강한 어조로 말했다.

"실컷 두들겨 패놓고 그 다음 물어봐주지."

"제가 할 말을 대신 하는군요."

청년 역시 진석의 눈빛을 피하지 않고 마주보며 대꾸했다. 그리고 또 다시 잠깐의 침묵. 저 멀리에서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나 여러가지 생활소음들이 들려왔다. 둘은 현재 서로의 빈틈을 찾고 있었다. 움직임은 전혀 없었지만, 기와 기가 부딫히는 팽팽한 대치상황. 그리고 일순, 둘은 잘 보이지도 않는 엄청난 빠르기로 서로에게 육박해갔다. 두 사람의 입에선 동시에 같은 외침이 튀어나왔다.

"라파가-!!!"

채챙! 진석의 검날이 청년의 것에 막혀 튕겨나갔다. 라파가가 이렇게 제대로 막히는건 처음이다! 아니 그보다 저 녀석도 분명 라파가를 썼다! 내심 놀라는 진석. 놀란 표정을 짓는것은 상대 청년쪽도 마찬가지였다. 둘은 서너발자국 물러나며 서로를 노려보았다. 진석은 그에게 말을 걸었다.

"너는... 솜브라 교단에 속해있나보지."

"...잘 알고 있군요. 그런데 당신은 대체 정체가 뭡니까? 바일리 델 비엔토는 우리 교단의 비전. 생전 처음 보는 상대가 익히고 있다니 기가 막히군요."

글쎄? 뭐라고 해야할까. 나는 그냥 적당히 고른 기술일 뿐이거든. 진석은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대답해줘야 할 의무가 있나?"

"없죠. 쓰러트려놓고 천천히 듣겠습니다. 오에스테!"

말을 마치기 무섭게 이쪽으로 달려들며 원무를 추며 공간을 넓게 활용해 공격해오는 청년. 진석은 요령좋게 백 덤블링으로 피해넘겼는데, 진석이 한 바퀴 돌아 착지하는 타이밍을 노리고 청년이 재차 라파가를 걸어왔다.

"라파가!"

싸움스타일이 똑같으니 이거 진짜 기분이 굉장히 묘하다. 하지만 느긋하게 라파가를 맞아줄 수도 없지. 진석은 라파가를 써 자신에게 쏜살같이 덤비는 청년을 노리고 토르멘타를 시전했다.

"토르멘타!"

"큭!"

라파가로 진석의 간격안에 뛰어들었기에, 청년은 토르멘타의 범위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보이지도 않을 정도의 초고속 난격을 피해 물러난다는건 불가능했다. 그는 허겁지겁 다음 기술을 시전했다.

"시클론!"

'뭣...! 시클론까지 쓰다니. 이 자식!'

시클론으로 가속을 받은 청년은 필사적으로 움직이며 진석의 토르멘타를 튕겨내며 방어하는데 열중했다. 물론 아무리 시클론이라고 해도 다 막을 수는 없어서, 그는 잠깐 사이 몸 군데군데에 크고 작은 상처를 잔뜩 입었다. 하지만 급소에 맞은건 하나도 없었다. 시클론의 힘으로 치명상이 될 공격은 전부 피하거나 막아낸 것이었다. 하지만 분명 진석이 한 발짝 앞서는 상황이었다.

"그거 재밌군. 나도 쓸 줄 알거든? 시클론!"

몇번이고 경험해본, 눈앞에 섬광이 스쳐지나가는듯한 느낌. 하지만 진석이 시클론을 사용하는 것을 본 청년은 자세를 고쳐잡더니, 진석을 향해 크게 외쳤다.

"단사 데 라 무에르떼!"

그리고 화아악. 눈 앞으로 청년이 쏘아져왔다.

'뭐?'

시클론을 사용한 자신은 육체도, 사고도 가속된 상태. 그런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지 못할 빠르기로 덤벼온다고...? 다음순간, 진석은 우반신에 커다란 고통을 느끼며 반사적으로 옆으로 몸을 피했다. 거의 넘어질듯 밀려나가다 겨우 자세를 고쳐잡고 서는 진석. 뭘 당했는진 모르겠지만 피해가 심각했다. 칼로 베인 상처가 우반신 여기저기에 새겨져 있었다. 그래도 가슴쪽은 가죽갑옷을 입은 덕에 상처가 아주 깊진 않았지만, 어깨나 옆구리는 꽤나 심하게 패여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순식간에 몇 번이나 베인듯한 자상이 여기저기에 아로새겨져 있었다.

"크으윽!"

뭐야... 뭐야 이건?! 대체 나 방금 뭘 당한거야?! 진석이 분노에 찬 눈으로 청년을 찾았을때, 그는 자신을 십수미터나 지나친 자리에서 양 팔을 교차시킨 자세로 뒤돌아 서있었다. 청년은 천천히 이쪽을 돌아보더니 진석이 아직도 쓰러지지 않은것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니 설마... 저 녀석. 나보다 바일리 델 비엔토의 랭크가 위인건가? 방금 그건 S랭크의 기술?'

그렇게 밖에 생각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기술이길래 시클론을 건 자신이 눈으로 쫓을수도 없었던건지... 으득. 절로 이가 갈렸다. 나도 사선을 넘어온게 한두번이 아니거늘, 하물며 같은 기술을 쓰는 애송이에게 이렇게 당할쏘냐! 진석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청년을 잠시 노려보다 망토를 펄럭 펼치며 투명화를 걸었다. 진석이 갑자기 눈앞에서 스르륵 사라지자 당황하는 그.

"아닛?!"

라파가! 진석은 투명화로 몸을 감추자마자 청년에게 라파가를 걸었다. 하지만 청년은 진석이 몸을 숨기자마자 자신을 향한 기습이 올걸 예상했는지 몸을 날려 자리에서 벗어났고 라파가는 허무히 허공을 갈랐다.

"투명마법인가요. 그래봐야 라파가의 숏대쉬로 바닥을 차는 소리는 잘 들리니까. 꼴은 흉해도 피하는 정도라면 가능하죠."

자리에서 일어나 싸울태세를 갖추며 어디있는지 모를 진석을 향해 그렇게 말해오는 청년.

'그래 너 잘났다. 그럼 어디 이것도 막아봐라.'

진석은 뒷춤에서 단검을 꺼내든 다음, 화염화살을 시전해 그에게 날림과 동시에 단검 네자루를 연이어 빠르게 투척했다.

"큭! 이렇게 나오는겁니까!"

아까처럼 몸 전체를 날려 단검과 화염화살을 피해내는 청년. 화염화살은 일부러 간격을 두어 순차적으로 날렸지만, 결국 그를 맞출 순 없었다. 그는 네 자루의 단검과 세 발의 화염화살을 어렵잖게 피해냈다. 하지만 그가 몸을 피해 도망치는 경로를 향해 진석이 다시 한 번 라파가를 쓰며 달려들었다.

"토, 토르멘타!"

청년은 진석이 바닥을 차는 소리가 자신을 향한다는걸 깨닫고 토르멘타를 시전해 방어를 굳혔다. 치잇! 혀를 차며 방향을 꺾어 청년의 옆을 스쳐지나가는 진석. 라파가로는 토르멘타를 뚫을 수 없으니 할 수 없었다. 진석은 그에게서 조금 떨어진곳에 멈춰선채 그의 토르멘타가 끝나길 기다렸다.

'내가 쓸땐 몰랐지만 이거 되게 짜증나는 기술일세. 젠장.'

청년의 토르멘타가 끝난 다음 화염화살을 날리고 재차 라파가로 공격을 시도하려 했는데, 그는 토르멘타가 끝나기 무섭게 진석이 있는 방향을 향해 되려 라파가를 걸어오는거 아닌가?!

"라파가!"

'어떻게? 아, 피! 이런 바보같은!"

자신의 몸에서 흘러내린 피가 바닥에 뚝뚝 선명한 자국을 남기고 있었다. 몸에 닿은것까지라면 완벽한 투명화를 제공하는 암살자의 망토였지만 몸에서 떨어져나간 피는 예외였다. 청년은 바닥에 떨어진 핏방울의 흔적을 놓치지 않고 그곳에 진석이 있을거라 판단, 망설임 없이 공격을 가해온 것이다. 하지만 라파가는 단순한 직선 공격. 진석은 몸을 날려 청년의 공격을 피했다. 그리고 찰나의 순간, 어떻게 반격해야 하나 모색을 하는데 골목 저쪽에서 젊은 여성의 외침이 들려왔다. 청년의 일행 중 트윈테일을 한 법복 차림의 성직자 아가씨였다.

"모데로! 시킨 음식 나온게 언젠데 혼자 여기서 뭐하는거야?"

불만 가득한 어투로 화를 내는 그녀. 하지만 청년은 크게 당황해하며 대꾸했다.

"에, 에이미! 이 바보! 안으로 들어가있어!"

"뭐어? 누가 바보라는거야! 네가 더 바보얏!"

모습을 감추고 있던 진석의 눈빛이 이채를 띄었다. 호오... 서로 나누는 대화에 터울이 느껴지지 않는걸 보니 둘이 친한 관계인가 보지? 진석은 히죽 보이지 않는 미소를 띄우며 에이미라고 불린 아가씨에게 빠르게 달려갔다. 모데로도 허둥지둥 그녀쪽으로 향했지만 먼저 움직인 진석이 한 발 더 빨랐다. 진석은 투명화를 풀며 에이미를 뒤에서 붙잡고 그녀의 목에 단검을 들이댔다. 에이미는 뜬금없이 낯선이가 나타나 자신을 붙들고 목에 흉기를 들이대자 질겁했다.

"이, 이게 무슨?! 꺄아아아악!"

"시끄러. 한 번만 더 소릴 지르면 귀를 잘라버리겠어."

"히, 히익!"

진석이 그녀를 협박하자 모데로는 분노한 표정을 지으며 외쳤다.

"빌어먹을! 에이미한텐 손대지마!"

"닥쳐 애송이. 방금전엔 잘도 해줬겠다."

에이미의 목에 칼날을 찌를듯 들이대며 차갑게 응수하는 진석. 결국 모데로는 두 손을 들어보이며 한 발 물러났다.

"큿... 알았습니다. 내가 졌어요. 그러니 그녀에겐 해를 끼치지 마시죠."

"무기 버려. 땅에 내려놓고 발로 차서 이쪽으로 밀어."

진석이 그렇게 명령하자 순순히 따르는 모데로. 두자루의 단검은 진석의 발치 근처까지 밀려왔다. 에이미는 그 모습을 지켜보곤 벌벌 떨며 울것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모... 모데로."

"난 괜찮아. 가만히 있어."

애써 에이미를 진정시키는 모데로. 진석도 뒤이어 말했다.

"그래. 나도 쓸데없이 아가씨를 죽이고 싶진 않으니... 잠시 이야기나 하자고."

일단 첫번째 질문. 너희 일행은 뭐냐? 진석이 그렇게 물으려던 찰나, 뒤쪽에서부터 분노에 찬 누군가의 외침이 들려왔다.

"너어어! 당장 에이미를 놔주지 않으면 화살로 머리통을 꿰뚫어 버리겠어!"

에이미를 붙잡은채로 반쯤 몸을 돌려 뒤를 바라보는 진석. 골목의 뒤쪽엔 모데로와 에이미의 나머지 일행들이 길을 막고 서있었다. 선두엔 중갑을 입은 미남과, 그 옆에 살기등등한 표정으로 대궁의 시위를 당긴채로 진석을 겨누고 있는 비엔족의 여성. 그리고 몇발짝 뒤쪽엔 지팡이를 들고 선 호리호리한 체구의 마법사가 있었다.

'젠장...'

비명이 안까지 들렸던 모양이다. 하지만 진석은 히죽 웃으며 에이미의 목에 바짝 단검을 들이대 보였다. 히익 하며 눈을 감고 질겁하는 그녀.

"쏠테면 쏴봐. 아무리 비엔이 장거리 무기의 명수라도 내가 손을 까딱 하는것보단 빠르지 않을걸? 여기서 내가 조금만 힘을 주면 이 아가씨 경동맥이 걸레짝처럼 썰려나갈테니까."

진석의 말을 들은 중갑의 사내는 비엔족 여성을 향해 손을 들어보이며 말했다.

"스텔라. 활을 내려."

"하, 하지만 클립튼!"

"어서."

불만 가득한 얼굴로 활을 내리는 비엔족 여성, 스텔라. 하지만 두 눈만은 분노를 담은채 진석을 쏘아보고 있었다. 클립튼이라 불린 남자는 허리의 칼집을 끌러 바닥에 내려놓곤 두 손을 들어 싸울 의사가 없음을 보이며 천천히 진석쪽으로 다가왔다.

"어떻게 된 일인진 모르겠지만 가능하면 말로 해결했으면 좋겠군. 게다가 그쪽, 다친것 같은데 괜찮은가?"

"네 일행덕에 입은 상처야. 댁이 보기엔 이게 괜찮아보여? 아파 죽겠어."

"미안하군. 대신 사과하지. 가능한 치료도 해주겠네."

험악한 상황임에도 흔들림 없는 침착한 모습과, 듣는 사람의 귀에 잘 스며드는 차분한 목소리. 이 남자... 보통내기가 아니군. 그리고 태도를 보아하니 힘으로 상황을 풀기 위해 수작을 부릴 상대같진 않았다. 진석은 흥 하고 코웃음을 치며 에이미의 목에서 단검을 떼어내고 자신의 검집에 넣었다. 그리고 에이미의 등을 떠밀어 모데로 쪽으로 보냈다. 꺄악 하며 모데로에게 달려가 그의 품에 덥썩 안기는 에이미. 진석이 에이미를 풀어주자 스텔라는 재차 활을 들어 진석을 겨누려 했지만, 클립튼이 뒤를 돌아보자 치잇 하고 혀를 차며 무기를 거두었다.

"에이미. 그의 치료를 부탁하지."

클립튼은 무기를 거둔 진석쪽으로 다가와 몸에 난 상처를 이리저리 살피더니, 모데로의 품에 안겨있는 에이미에게 그렇게 말했다. 모데로나 에이미는 뭐라고 반박하려 했지만 클립튼이 고개를 좌우로 젓자 그 둘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에이미는 입을 삐죽 내민채로 진석에게 다가와 상처 부근에 손을 내밀고 주문을 외웠다. 이쪽은 쳐다보지도 않은채 입속으로 아주 작게 중얼거리느라 주문의 내용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잠시 후 그녀의 손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진석의 상처가 대강 아물었다.

'딱 봐도 완치 시켜주는게 아니라 출혈을 막을 정도의 적당한 회복주문만 써줬군. 노골적으로 싫은 티가 팍팍 나는게 꼴도 보기 싫다 이거냐? 젠장, 이런 취급받으니 엄청 열받는데.'

하지만 상황은 1대 5. 그것도 저 청년 하나가 자신과 맞먹을 정도의 실력자다. 그것도 같은 기술을 쓰며, 자신보다도 랭크가 높은 상대. 이번회차의 게임을 시작하고 나서 이렇게까지 몰린 상황은 처음이다. 짜증이 치밀어 올랐지만, 진석은 되려 씨익 뻔뻔하게 웃으며 말했다.

"뭐 좋아. 그나저나... 댁들은 대체 뭐야?"

진석의 물음에 맨 뒤쪽에 서있던 마법사가 앞으로 나섰다. 호리호리하지만 능글맞게 생긴 인상. 그는 넉살좋게 웃으며 진석의 물음에 답했다.

"불의를 타도하는 일행이라고 할까요, 하하."

...뭐?

============================ 작품 후기 ============================

그러고보니 어느새 100회군요. 사실 전 끈기가 별로 없는 편인데.. 모자란 글이나마 읽어주시는 분들 덕에 계속 쓸 수 있었던게 아닌가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OTL

그리고 연참은 무리지만 전부터 한 번 해보고 싶던 한 회 분량 한계치인 50kb 채우기를 해봤습니다. 딱 떨어지게 맞추는것도 묘하게 어렵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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