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베라 - 부회의 방랑자-101화 (101/155)

< --   - 9.   -- >         * 101화 *

클립튼 벤슬리. 불과 얼마전까진 그란델 왕국의 해밀턴 공작가에서 종사하던 기사로, 그란델 왕국에선 완전무결의 기사라고까지 불리던 이였다. 그가 이런 일행과 그란델 왕국에서 멀리 떨어진곳을 헤메고 있는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수개월 전. 불의의 사태로 정체모를 괴물에게 납치당했다던 레오노르 공주가 공작가로 귀환했다. 이미 죽은사람 취급받던 그녀가 무사히 돌아왔으니 공작가는 한바탕 난리가 났었다. 공작가 측에선 물론 잘된 일이었다. 하지만 여성의 상처란 단순이 몸이 다치거나 목숨이 위협받는것 이외에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 그래서일까, 자세한 전후사정은 오로지 그녀의 아버지만이 전해 들었다. 허나 공작가에 귀환한 그녀의 모습은 평소와 달라진게 없었기에 다들 그저 그녀의 안위가 무사함에 안심했다. 레오노르 공주가 전과 달라진거라면 딱 하나 뿐이었다. 정체불명의 사내 셋을 대동했다는 것. 그 셋은 헤세스모데우스 교단의 수호자 드레비안과 맥, 그리고 머서였다.

레오노르 공주는 그들이 자신을 위기에서 구출해준 유능한 모험가들이며, 무능한 기존의 호위들을 해고하고 이들을 대신 호위로 삼겠다고 밝혔다. 레오노르 공주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들은 공작가의 큰 은인. 거부할 이유는 없었다. 어차피 기존의 호위기사들은 진즉 그 책임을 물어 파면했었으니 그들에겐 은상을 내리고 앞으로 레오노르의 호위기사로서의 소임을 부탁했다.

그리고 불온한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것은 레오노르 공주의 귀환 이후 부터였다. 가문내에서 오랫동안 해밀턴 공작에게 충성을 해오던 가신들이나 같은 왕당파 소속의 귀족들, 관리들이 하나둘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거나, 혹은 왕당파의 지지를 철회하고 귀족연맹쪽으로 돌아섰다. 해밀턴 공작은 귀족연맹의 술수라고 생각하고 데오그라즈로 가서 필사적으로 판도를 뒤집으려 애썼지만 무용지물이었다. 누군가 뒤에서 상황을 조정하기라도 하듯 해밀턴 공작의 모든 노력은 무위로 돌아가고 왕당파는 해밀턴 공작 하나만이 남게 되었다.

이상할 정도로 불리하게 돌아가는 상황에 지친 해밀턴 공작. 휴식을 위해 본가가 있는 해밀턴 시로 돌아가려하나, 귀환 도중 의문의 세력에게 암살을 당하고 만다. 평소라면 완전무결의 기사 클립튼이 호위로 붙어있어 암살따위 당하지 않았을테지만 레오노르의 중요한 일이 있다는 요청으로 클립튼을 하루 먼저 저택으로 돌려보낸것이 화근이었다. 게다가 레오노르가 기껏 불러들인 클립튼을 대동하고 하루종일 돌아다닌곳은 도시 밖 인적없는 들판부근이었다. 그녀는 그렇게 소풍이라도 나온듯 하릴없이 클립튼을 끌고 다녔다. 주군의 곁을 벗어나 헛되이 시간을 낭비한 사이 마치 누군가 짜고 노린듯 해밀턴 공작이 암살을 당해버렸으니, 클립튼의 충격은 이만저만 큰게 아니었다.

하지만 상황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레오노르 공주는 암살의 배후로 클립튼을 지목한 것이다. 그는 클립튼이 오래전부터 자신과 결혼하고 싶어했으며, 이를 거부한 자신의 아버지를 돈을 주고 고용한 암살자들로 죽이고 저택에 미리 돌아와 자신을 겁간하려 했으나 교단의 수호자들인 세 명의 호위들 덕에 겨우 위기를 모면했다고 증언했다. 클립튼은 순식간에 공작 살해와 강간미수의 누명을 쓰고 붙잡혀갈 위기에 처했으나 그때 나타난것이 모데로와 에이미, 그리고 클립튼의 오랜 친우인 마법사 리들리였다. 셋은 공작가의 병사들을 물리치고 순순히 체포에 응하려던 클립튼을 구해 해밀턴시를 탈출했다.

모데로와 에이미는 솜브라 교단 출신의 전사와 성직자. 그림자와 균형의 신 솜브라. 그를 섬기는 비전교단 솜브라는 예로부터 어둠속에 숨어 세계의 균형을 중재하는 곳이었다. 그림자는 빛과 어둠 둘 중 하나만으로는 유지되지 못한다. 빛이 강하면 어둠에게 힘을, 어둠이 강하면 빛에게 힘을. 그렇게 어느 한쪽도 강성해 지지 못하도록 중간에서 평형추처럼 세계의 밸런스를 유지하는것이 균형의 신 솜브라를 섬기는 이들의 사명이었다. 그리고 솜브라 교단측에선 예전부터 헤세스모데우스 교단의 준동을 감지하고 있었다. 그것이 지금까지는 세계의 균형을 깨지는 않을정도였기에 묵과하고 있었지만, 그란델 왕국에 적극 개입하는 모습을 감지하고 이 이상은 안되겠다고 판단. 모데로와 에이미를 뭔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이 틀림없는 해밀턴시로 파견한것이었다.

리들리는 엉성해 보이는 외관과는 달리 고도로 숙련된 마법사. 클립튼과는 어려서부터 동문수학한 친구였다. 비록 중간에 서로 검과 마법으로 그 길이 갈렸지만, 둘이 절친한 사이라는것은 변함없는 사실이었다. 그런 리들리가 아는 클립튼은 주군을 살해한다거나 여성을 강간하려들 파렴치한이 아니었다. 애당초 그에게 완전무결의 기사라는 별명이 어떻게 주어졌겠는가? 뭔가 일이 단단히 잘못되었음이 틀림없었다. 그는 누명을 쓴 친구의 곤경을 돕고자 어떻게든 손을 써보고 싶었지만 역시 혼자서는 무리였다. 그리고 그때 리들리의 앞에 나타난것이 모데로와 에이미였다. 셋은 힘을 합쳐 압송중인 클립튼을 구해내고 그란델 왕국의 힘이 미치지 않는 커드머스로 도주한다.

모데로와 에이미는 클립튼과 리들리에게 자신들은 솜브라 교단에서 온 이들임을 정식으로 알리고, 메디니아와 그란델 왕국에 헤세스모데우스 라는 교단의 마수가 뻗어져 있음을 알려준다. 그리고 솜브라 교단이 키워낸 전사와 성직자인 자신들의 사명은 헤세스모데우스 교단을 물리치고 세계의 균형을 지키는 것. 그렇게 모든것을 솔직히 털어놓고 한 나라 제일의 기사로 손꼽히던 클립튼의 동참을 구한다. 사정에 대해 들은 클립튼은 조국인 그란델 왕국을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 이를 승낙, 친우 리들리와 함께 헤세스모데우스 교단을 저지하기 위한 여정에 나선다.

이 와중 커드머스에서 체류하는 동안 우연히 여러 부족간의 다툼에 휘말려, 이를 해결하고 명궁 스텔라를 동료로서 얻게된다. 스텔라는 처음엔 단순히 클립튼의 외모에 끌렸지만, 시간이 지나며 그의 성품에 점점 빠져들어 정말로 그를 사모하게 된다. 그리고 스텔라 역시 이 일행의 목적을 듣곤 전력으로 협조하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일행은 애거스트 공화국으로 이동. 이곳에 있는 어느 폭력조직이 헤세스모데우스 교단의 끄나풀이라는 정보를 얻고 여기에서부터 그들을 무너트려갈 방법을 찾아가기로 하던 참이었다. 그리고 우연히 머물기로 결정한 여관에서 진석과 모데로는 상대가 같은 기술을 지닌 전사임을 서로의 감으로 눈치채고 싸움에 이르러, 현재.

클립튼. 그 좌우에 각각 앉아있는 리들리와 스텔라. 모데로와 그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에이미. 그리고 다섯명의 일행과는 달리 혼자 동떨어져 있는 진석. 여섯명은 여관의 식당 테이블에 둘러앉은 채였다. 이야기를 다 듣고난 진석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완전무결의 기사 클립튼이라... 하. 어쨌거나 이야기를 들어보니 교단측의 공작은 잘 된 모양이군.'

이 일행은 아직 진석의 실체를 모르지만, 진석은 운좋게도 리들리의 사정설명을 통해 이들에 대한것과 그 목적마저 다 파악해 버렸다. 결론만 내리자면 이들은 교단의 적이였다.

'하긴... 세계멸망이 그렇게 쉬울리가 없지. 이런 용사 파티 비슷한게 대항하러 나온다 이거지? 이건 퀘스트 디자인의 일부일까? 만약 내가 제이스를 죽이고 교단에 반대하는 길로 갔었다면 아마도 대충 이런 인물들이 내 동료가 되었을 수도 있었겠군.'

진석의 추측은 얼추 맞았다. 진행 상황에 따라 여러가지 달라지긴 했을테지만 플레이어가 세계구원을 선택했을 경우 비록 소수지만 교단에 맞서는 이들이 플레이어의 일행이 되어 힘을 보태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하지만 지금 진석은 이미 두번째 임무까지 완수하고 교단으로 돌아가던 상황. 고로 시스템은 진석이 완전히 교단에 협력하는 세계멸망의 노선에 기울어졌다고 판단, 그에 맞서는 일종의 정의의 구원자들이 이렇게 구성된 것이었다.

'아무튼 나는 나쁜놈이라 이건가. 으으음. 역시 미리안이나 끝까지 도와야 하는 건가? 아니면... 이놈들을 잘 구슬려 이용해먹을 방법은 없을까?'

머리를 굴려보려 했지만 또렷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들의 교단에 대한 입장이나 태도가 어중간하거나 두루뭉술한것도 아니니 파고들 여지가 있는것도 아니고. 파고들거나 협상은 커녕, 자신이 교단의 수호자 중 한 명이라는 것을 이들이 알게되면 전력을 다해 무력화 시키고 정보를 캐내려 들게 뻔했다. 사실 지금은 굉장한 위기상황이었다.

'젠장. 그리고 저 모데로인가 하는 저놈... 보통 능력이 아닌데. 어처구니 없지만 깡스탯치가 거의 나랑 비슷해. 무력과 민첩이 둘 다 40을 살짝 넘어. 게다가 바일리 델 비엔토도 나보다 높은 S랭크. 그러니 쉽사리 꺾을수가 없었지. 젠장.'

모데로는 퀘스트 디자인 상 플레이어인 진석의 대칭점으로 설정된 캐릭터였다. 수호자들의 힘이 강력하면 강력한 만큼, 그에 맞서는 구원자들 역시 그만한 능력이 주어지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아직 다른 녀석들을 다 확인해본건 아니지만... 이 다섯명 전부가 수호자와 비등하거나 그 이상의 능력을 지녔겠지. 아무리 내가 잘났어도 이 상황에서 혼자 싸워이길수는 없는 노릇.'

그렇게 생각한 진석의 머릿속에는 자신을 도와줄만한 이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우선 아르데나를 포함한 교단의 수호자들. 이들은 교단의 동료인 만큼 만사 제치고 자신을 도와주리라. 그 다음은 르마쿠르 자매. 이 두 자매는 진석 자신이 세계를 구원하기 위해 혼자 노력하고 있는것으로 착각한 상황. 하지만 어찌됐건 진석이 원하면 도와줄것은 확실했다.

'그리고... 레오노르 공주와 알 유세피나인가. 레오노르 공주는 개량형 팔시타스로 세뇌당해 날 사랑하는데다가 내 명령을 무엇보다 우선해서 따르라는 지시를 심어두었으니 틀림없고. 알 유세피나도 스스로 날 사모하고 있으니 역시 확실.'

또 누가 있을까. 사라크의 일원들? 론소와 바노르, 라나. 뭐 그들과는 강한 유대가 있는것은 아니지만... 도움을 요청한다면 아마도 도와주지 않을까 싶다. 특히 라나는... 마지막에 왠지 모르게 날 따르는것 같은 모습을 보였으니 될지도. 뭐 지금은 그냥 애라서 전력에 도움이 안된다는게 문제지. 쳇.

'마지막은 얼마전에 만났던 거인족 소녀 파나히 정도인가? 그녀와의 만남은 짧았지만 이쪽을 신뢰하게 된 것 같고 나름대로 잘 대해줬으니 날 돕기야 하겠지만, 이제쯤 겨우 마을에 들러 유골을 묻지 않았으려나? 게다가 아직 덜 성장해 미숙하기도 하고.'

생각나는 인원은 많지만 막상 당장 전력으로 써먹을만한건... 결국 아르데나와 교단의 수호자들 정도다. 제길. 내가 이렇게 인생을 못나게 살아왔단 말인가 흑흑. 모데로는 진석이 한참이나 혼자 생각에 잠겨있다 으흠 하고 헛기침을 하더니 말을 걸어왔다.

"으흠, 흠. 저기 그래서... 그쪽의 정체는 대체 뭐죠? 솜브라 교단 출신도 아니면서 어떻게 교단의 전사들에게만 전수되는 바일리 델 비엔토를 쓸 수 있는건지 설명 좀 해주세요."

"......"

크으... 결국 또 세치혀를 놀려 말재간과 거짓말로 상황을 벗어나야 하나? 하지만 이 다섯명을 납득시킬만한 이야기라니, 그런 거짓말은 대체 뭐가 있을까? 진석이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궁리하는 찰나 모데로의 옆에 앉은 에이미가 말문을 열었다.

"그러고보니 모데로..."

"응?"

"아주 예전이지만 나 도넌 사제님이 살아계실때 얼핏 들은 이야기가 있는데... 우리 교단에는 오래전에 분열을 일으키고 떨어져 나간 분파가 있다고..."

"뭐? 그건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

"그게... 원래 우리 솜브라 교단은 균형을 지키는게 사명이잖아? 하지만 어둠의 힘에 홀려 타락해서 교단에 커다란 피해를 입히고 떨어져나간 자들이 있었다고... 지금 우리 교단의 성세가 많이 약해진것도 실은 그때의 타격이 너무 커서 채 회복하지 못했던 거라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있거든."

에이미의 이야기를 들은 다른 넷의 시선이 진석을 향했다. 네 정체는 그런거였냐 하는 눈빛이었다.

'하... 뭔지 모르겠지만 둘러댈 말도 없었는데 잘됐군. 뭐 그런셈치자.'

진석은 히죽 웃어보이며 대답했다.

"그래. 그쪽 아가씨 말대로야. 하지만 아가씨가 아는 이야기는 내가 들은것과는 조금 다르군."

"에?"

진석은 의아해하는 에이미와, 나머지 일행을 죽 둘러보며 말했다. 여기가 혓바닥을 놀릴 부분이었다.

"우선 결론만 말하자면... 우리측 생존자는 내가 유일해. 나머지는 다 죽었지."

"뭐, 뭐라구요?"

놀란 표정을 짓는 모데로. 진석은 말을 이었다.

"내가 아는 이야기는 그쪽 아가씨가 한것과 정 반대. 원래 우리측이 균형을 수호하려 애쓰는 쪽이었지만 타락한 반대파가 큰 피해를 남기고 갈라져 나갔다더군. 얼마 남지 않은 우리들은 세간에서 몸을 숨기고 조용히 사명을 다하려 했지만... 그쪽이 농간을 부려 사교의 무리로 낙인찍혀 하멜뷔에른 왕국군에게 토벌당했지."

지금 진석이 하는 이야기는 예전 제이스에게 했던 거짓말을 살짝 응용한 것이었다. 한 번 거짓말을 하기 시작하자 뒷 이야기는 저절로 청산유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당시 나는 무력한 어린애 였지만... 어머니가 내 대신 목숨을 희생한 덕에 오로지 나만이 살아서 탈출 할 수 있었다. 홀로 살아남은 나는 의지할데 없는 고아로 세간을 힘겹게 떠돌며, 기억나는 교단의 비전을 하나둘 떠올려 스스로 익혔다. 그리고 이 기술에 의지해 지금까지 여러곳을 떠돌고 모험하며 그럭저럭 살아왔지. 하지만 오늘 여기서 내 가족과 삶을 망가트린 원수를 만나게 될 줄이야. 눈물나게 반갑군. 너와 첫눈에 싸움이 붙게된것도 이 핏속에 흐르는 뭔가가 작용한 모양이야?"

거기까지 말한 진석은 일부러 모데로를 향해 위협적인 표정을 지어보였다. 이렇게까지 했으니 이 다섯은 누구나 자신의 말을 믿어 의심하지 않을터. 과연 방금까지 자신을 엄청 꺼려하던 에이미는 일행 중 가장 어쩔줄 몰라하고 있었다.

"모, 모데로. 저 이야기가 사실일까?"

"그... 그럴리가 없잖아!"

"하지만 내 이야기가 거짓이라면 내가 어디서 바일리 델 비엔토를 익혔겠어."

"...큭!"

테이블 위론 무거운 공기가 감돌았다. 클립튼 일행은 자신의 일행이 인질로 붙잡힌 상황을 타개했을 뿐인데, 알고보니 상대가 일행 중 일부와 철천지 원수지간이라니. 당사자가 아닌 타인이 함부로 끼어들기엔 어려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진석은 피식 웃으며 테이블을 탁 두드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다 옛날 이야기. 은원따윈... 잊어버리지."

"하아~? 무슨 그런 제멋대로의 소릴..."

기가 차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 비엔족 궁수 스텔라. 진석은 그녀를 흘겨보며 말했다.

"그럼 뭐. 내가 여기서 다시 칼을 빼들고 끝장을 보자며 싸움을 벌였으면 좋겠어? 물론 너희들 숫자가 많으니 내가 지겠지. 하지만 그게 너희들이 원하는 결과인가? 내가 과거의 원한에 집착해 끈덕지게 덤벼들었으면 좋겠어?"

"......"

꿀먹은 벙어리가 되어 입을 다무는 스텔라. 그리고 그제서야 여태까지 아무말 없이 이야기를 듣고 있던 클립튼이 말문을 열었다.

"나는 그쪽이 가진 과거의 은원에 대해 함부로 말할 자격 없는 타인이다만... 그럼에도 다 덮고 넘어가겠다니. 현명한 판단, 훌륭하다."

그리고 살짝 고개를 숙여보이는 클립튼. 스텔라는 클립튼의 옷깃을 잡고 흔들었다.

"크, 클립튼씨! 왜 당신이 머리를 숙여요?"

"이들의 진짜 과거사나 진실은 우리가 알 수 없지만, 양측에 깊은 원한이 있는것은 분명 사실. 그럼에도 불필요한 싸움을 벌이지 않기위해 스스로 모든 원한을 덮고 넘어가겠다는건 분명 존경할만한 태도니까. 이건 전에도 한 번 했던 이야기지만 결국 무력따위는 진정한 해결법이 되지 못해."

뭐... 뭐야 이놈은? 완전무결의 기사라길래 검의 천재 뭐 이런 이미지를 생각했는데 이건 왠 산에서 10~20년쯤 도 닦다 내려온 것 같은 소릴 하고 있네. 하지만 클립튼의 말에 다른 일행들은 그런대로 납득을 하는 것 같았다. 어쨌거나 서로 싸워서 얻을 수 있는건 없는 상황. 누군가 덮어두고 넘어가는게 가장 좋은 상황인데 진석이 스스로 그렇게 나섰으니 클립튼이 보기엔 진석이 현명한 선택을 한것으로 비춰졌으리라. 클립튼은 자리에서 일어나 진석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그런데... 그러고보니 그쪽의 이름도 듣지 못했는걸. 이름이라도 들려 줄 순 없을까?"

갑자기 이름은 뭔 이름 타령이야. 진석은 무심코 여태까지 쭉 써먹어오던 가명을 대었다.

"래스커."

"...그렇군. 래스커라고 한단 말이지."

다음 순간. 클립튼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발도하며 진석에게 롱소드를 휘둘러왔다. 거의 목이 베일뻔한 순간, 진석은 오른손에 낀 건틀렛의 손등 부분으로 겨우겨우 공격을 막아낼 수 있었다. 둘 사이에 있던 의자가 걸리적거리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베였으리라. 헌데 방금전까진 존경한다느니 현명한 선택이라느니 하던 클립튼이 느닷없이 진석에게 공격을 가하자 다른 일행은 다들 기가 막힌 듯 놀랐다.

"크, 클립튼씨?"

"붙잡자. 이 남자, 분명 우리가 쫓는 교단에 관련된 상대다."

"예에?!"

"뭐... 뭐라구요?!"

놀란건 진석도 마찬가지였다. 아... 아니 대체 어떻게? 짧은 순간, 진석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이게 어떻게 된거지. 분명 자신의 거짓말은 잘 먹혔었다. 뭐 존경한다느니 어쩌고 저쩌고 하던 태도는 확실히 진짜였다. 그렇다면 어디서 눈치챈걸까?

'아.'

래스커라는 이름. 그러고보니 자신은 이 래스커라는 가명을 너무 자주 사용해왔다. 맨 처음 레오노르 공주와 만나 폭풍의 지팡이를 빼앗을때도 래스커라는 가명을 썼었다. 그땐 레오노르 공주를 아직 납치하지 않았을때. 곁에 해밀턴 공작이 있었을테니... 공주가 자신의 아버지인 해밀턴 공작에게 래스커라는 자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면, 당연히 당시 공작의 호위기사인 클립튼 역시 래스커라는 이름을 들었을 가능성이 있다. 게다가 주무기는 단검, 검은 머리에 대단한 미남이라는 외모의 특징까지도. 아니 가능성이 있는게 아니라 무조건 들었다. 들었으니 이렇게 즉각 반응을 해오는거지! 래스커어어! 이 망할놈! 죽어서도 날 괴롭히다니!

'크윽... 한 가명을 너무 오래 돌려 써먹었어. 이름 같은건 잘 짓지 못해서 그냥 하나 가지고 꾸준히 써먹는 성격이 발목을 잡을줄이야!'

그 사이 다섯명의 일행은 자리에서 일어나 진석을 포위해왔다. 상대들은 제각기 교단 수호자 수준의 능력자들. 게다가 모데로 하나만 해도 자신과 맞먹는다. 승산은 없었다. 어떻게 해야할까? 진석이 고민하는 찰나, 에이미는 진석을 향해 삿대질을 하며 외쳤다.

"당신! 역시 당신들 쪽이 타락한 쪽이었던거야!"

"그래. 에이미 말대로야, 우리쪽이 진짜. 당신은 순순히 잡혀줘야 겠어."

에이미의 말을 거드는 모데로. 그리고 뒤쪽에서 스텔라도 어느새 대궁과 화살을 가져와 진석에게 겨누고 있었다.

"흥. 난 이럴 줄 알았다니까."

그리고 리들리. 그는 넉살좋게 웃으며 클립튼과 자신들의 여정을 설명할때완 달리 정말로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지팡이를 내밀고 있었다.

"클립튼의 말대로 저 남자가 교단과 관계된 자라면... 우리들의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들려줬으니 절대로 놓칠 수 없지."

마지막으로 클립튼도 검을 고쳐쥐며 한걸음 앞으로 다가섰다.

"순순히 항복해라. 그렇다면 목숨만은 빼앗지 않을테니. 어차피 네게 승산은 없다."

조금씩 간격을 좁혀오며 진석을 압박해오는 다섯.

'하... 내가 자처한거긴 하지만 막상 핍박당하는 악당 입장이 되니 이렇게 서글프구만. 뭐 만화나 소설따위라면 이쯤에서 내가 붙잡혀 교단에 대한걸 줄줄 누설하고, 내가 흘린 정보를 말미암아 이들이 교단을 물리치고 세계를 구한다~ 정도의 전개가 되겠지만...'

진석은 옆에 있던 테이블을 뻥 걷어차 다섯명쪽으로 날리며 빠르게 시클론과 투명화를 동시에 걸었다. 아까 모데로와 한 판 뜰때 투명화를 잔뜩 사용한 탓에 잔여 시간이 30여초 밖에 남지 않았지만 탈출하기 위해선 30초건 뭐건 쓸 수 있는건 다 써야했다.

"아, 아차! 저 자 투명화를 쓸 수 있어요!"

다급하게 외치는 모데로. 그러자 리들리가 나섰다.

"내가 막지! 테카서스의 역장!"

리들리가 자신의 지팡이를 바닥에 세게 찍자 그 자리를 중심으로 무형의 힘의 파장이 원형으로 퍼져나갔다. 그러자 막 다섯명을 뒤로 하고 식당을 빠져나가던 진석의 모습이 스르륵 드러났다. 투명화 잔여 시간이 남았는데도 강제로 해제시키다니! 크게 당황하는 진석.

"저기, 저쪽!"

"놓칠까보냐!"

비엔족 궁수인 스텔라가 재빨리 몸을 돌리며 대궁을 쏘아왔다. 순식간에 몸을 180도 반회전시키며 쏜건데도 화살은 매서운 기세로 날아와 진석의 어깨에 꽂혔다.

"큭!"

이를 악물고 2층으로 뛰어올라가는 진석. 그냥 바로 탈출하는게 가장 좋겠지만 2층의 방 안엔 자신의 가방이 있었다. 다른건 다 버려도 상관없지만 대지의 눈이 그 안에 들어있었다. 진석은 온 힘을 다해 복도를 내달려, 방을 박차고 들어가 가방을 쥐고 곧바로 창문을 깨고 밖으로 뛰어내렸다. 바닥에 착지 후 도시의 어둠속으로 몸을 날리려하는 찰나, 갑자기 몸이 무거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아니, 무거워지는 기분이 드는게 아니라 실제로 무거워졌다! 민첩 스텟이 크게 감소되고 이동속도가 감소되었다는 디버프 아이콘이 속속 떠올랐다.

"뭐얏?!"

뒤를 돌아보니 진석이 창을 깨고 탈출 할걸 예상했는지 여관 밖으로 뛰쳐나온 에이미와 리들리가 진석에게 뭔가의 방해 주문을 시전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길을 따라 클립튼과 모데로가 미친듯한 빠르기로 달려 이쪽으로 육박하고 있었고, 스텔라는 자신이 뛰어내린 창문에서 이쪽으로 활시위를 당기고 있었다.

"이 자식들! 끈질기구만!"

안되겠다. 도시안에서, 그것도 도망가는데 이런 비장의 수를 쓰고 싶진 않았지만... 이대로라면 내가 사로잡힐 판이다! 진석은 몸을 돌려 건틀렛을 낀 오른손을 내밀고 힘껏 외쳤다.

"나와라! 아르도르의 폭염!"

쿠와아. 그 즉시 허공에 거대한 적룡의 머리가 떠올랐다. 동시에 체력과 SP의 절반이 팍 날아가버렸다. 그리고 다음순간, 한껏 벌어진 적룡의 입에서부터 폭풍같은 노도의 불길이 쏘아져 나갔다.

"이 무슨! 피해!"

스텔라는 질겁해서 건물 안쪽으로 피해들어갔고, 클립튼과 모데로는 각기 건물 사이의 골목으로 몸을 날리는것이 보였다. 에이미와 리들리는 뒤로 물러나다 서로 주문을 시전했다.

"프라이그란디스!"

"후무스의 방벽!"

에이미와 리들리의의 앞에는 온갖 기호와 상형문자가 가득한 거대한 빛의 원형과, 두께가 수미터는 되어보이는 토사의 방벽이 솟아올랐다. 이 둘은 서로 겹쳐져 어찌어찌 브레스를 막아내었으나, 마법에 보호받지 못하는 일반 건물들과 거리는 삽시간에 불타고 녹아서 끓어올랐다. 느닷없이 번화가 한복판에 나타나 불을 뿜는 용의 머리에 주변의 시민들은 놀라 비명을 지르거나 울고 도망가는 등 그야말로 아비규환의 풍경이 펼쳐졌다. 진석은 아르도르의 폭염을 소환한 다음 잽싸게 몸을 돌려 자리를 벗어났다. 디버프가 적용해 몸이 몇배나 되는 중력에 눌리는 것 같고 다리도 납덩이를 찬듯 무거웠지만 죽을힘을 다해 도망쳤다. 그리고 아르도르의 폭염도 겨우 십수초짜리였으니 벌 수 있는 시간은 많지 않았다.

'게다가 이 소환으로 체력과 SP도 반 이상 날아가버려서... 디버프까지 당했으니 따라잡혔다간 정말로 끝이다!'

아르도르의 폭염이 불러온 혼란이 컸던건지, 혹은 누군가가 결국 브레스의 영향에 휘말렸는지는 몰라도 헉헉거리며 힘겹게 도망가는 진석의 뒤로는 추적자가 따라붙지 않았다. 진석은 겨우겨우 탈출에 성공했다. 그리고 남문의 근처까지 달아난 다음, 마차역에서 말을 한 필 훔쳐 도시를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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