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9. -- > * 102화 *
'아야야... 험한꼴을 당했구만.'
말을 타고 밤의 가도를 내달리며 이를 악물고 오른쪽 어깨에 박힌 화살대를 꾹 붙잡는 진석. 이렇게 엉망진창으로 당한건 게임을 처음 시작했을때와 군주 플레이를 하다 반란을 겪었을때, 그리고 연합국에 포위되었던때 정도일까. 그리고 이런꼴이 되고서야 겨우 생각났다. 한동안 여러곳을 돌아다니고 많은 일을 하느라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완전무결의 기사 클립튼. 분명 자신이 아라파로 출발하기 전, 미리안이 다른 수호자들에게 주의하라고 했던 인물이었다. 자신이 할 일에 관한 것도 아니었고 딱 한 번 스치듯 들었을뿐이라 잊고 있었지만 이런 처지가 되어서야 그 이름과 칭호가 겨우 생각나다니. 한심하다.
"크윽."
힘을 주어 단번에 화살을 뽑아내자 안쪽으로 굽어진 화살촉 때문에 살이 잔뜩 뜯겨져나가며 피가 울컥 흘러내렸다. 화살대를 분질러 던져버리는 진석. 마차역에서 말을 훔쳐 도시를 벗어난 진석은 동쪽으로 진로를 잡고, 곧바로 메디니아의 수도 갈론을 향해 가기로 했다. 원래대로라면 그란델의 페레나시에 들러 르마쿠르 자매를 한 번 본 후 느긋이 교단으로 갈 생각이었으나 클립튼 일행과 마주한 후 생각이 바뀐것이었다.
'클립튼인지 나발인지, 처음부터 그놈들에게 솔직히 이야기를 털어놓고 협력을 구했다면 교단을 없애는데 도움을 받을 수 있었을테지만... 이렇게 서로 험한꼴을 한 번 본 이상 내가 간과 쓸개를 다 내놓고 투항하지 않는 이상 그들이 날 신뢰해줄거라고 보긴 어렵겠지. 그럴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거니와 애당초 그들에게 협력했다 한들 도중에 배신이 발각되면 나만 위험해지는거고, 그쪽과 손을 잡는 리스크에 비해 내가 얻을 수 있는 대가도 없어. 또 놈들이 있는 이상 내가 미리안의 목을 친다 한들 교단의 세력을 온전히 빼앗고 유지하는것도 쉽지 않을터. 녀석들의 목적은 교단 그 자체니 이쪽을 끝까지 노려올테니 말야.'
아무튼 이놈들 두고보자. 어차피 지금의 자신은 어느 모로 봐도 훌륭한 악당이다. 그것도 세계멸망을 꾀하는 사교무리의 중진. 그러면 악당답게, 용사님들을 철저히 괴롭혀 줘야겠지.
'지금까지는 그냥 나 혼자 움직이는게 편해서 딱히 교단의 힘을 끌어 쓰지 않았다만, 이렇게 된 이상 조직의 힘을 아낌없이 팍팍 써주지. 미리안에게 놈들의 존재에 대해 보고 후 인상착의를 바탕으로 수배부터 걸어주겠어.'
교단의 힘이 미치는 나라는 두 곳. 메디니아와 그란델 왕국. 진석 개인이 아라파 왕국도 움직일 수 있었지만 그들이 대륙 서부까지 갈 일은 없을테니 알 유세피나의 힘을 이용할 필요는 없었다.
'흔한 경우는 아니지만 정말 중요한 범죄자나 탈주범들은 외교사절을 통해 타국에서도 지명수배를 걸 수 있으니까.'
단, 그 일행 중 리들리라는 마법사가 걸린다. 암살자의 망토의 능력인 투명화를 강제 해제 시킨것만 봐도 꽤나 강력한 마법사 같은데... 만약 그가 변신이나 광학 계열의 마법을 쓸 수 있다면 일행들을 다른 모습으로 위장시킬 수 있을거다. 허나 그가 그런 마법을 익혔는지 어떤진 모르니 수배는 무조건 걸고 볼거지만. 지명수배에 걸리는 것 만으로도 행동반경은 좁아지며 일상 생활에조차 여러가지 제약이 따른다.
'지명수배자의 상대는 경비나 병사들. 맡은바 임무를 수행할 뿐인 평범한 사람들인데, 클립튼이란 놈 성격을 봐선 아무 양심의 거리낌 없이 쓰러트리거나 하진 못할테니... 게다가 상황에 따라선 일반 시민들도 조심해야 할테고. 교단에 접근하려 하면 할수록 점점 행보가 고되어질걸.'
그리고 지명수배만 걸고 땡칠 줄 알고? 교단엔 남는게 돈이니 모험가 길드를 통해 현상금을 걸거나 용병들을 왕창 고용해 뒤를 쫓게 해주마. 교단이 주구로 부리는 여러 도시들의 폭력조직들도 마찬가지. 그 조직들 역시 교단의 눈으로서 클립튼 일행을 찾아내거나 감시하게 만들 수 있다.
'정의를 실천하는 용사님들~ 인가. 용사라고 해봐야 거 말만 좋지 뭐. 아무리 강력한 소수라고 해도 압도적인 머릿수와 금력 앞에선 쉽게 이길 수 없는법. 한두명이 다 해먹을 수 있다면 조직이나 군대같은걸 뭐하러 만들겠어?'
신에게 선택을 받고 그 권능을 하사받은 미리안 조차도 교단을 세우고 수족들을 만들어 오랜 세월에 걸쳐 준비를 했다. 하물며 상대는 겨우 다섯명. 과연 고작 다섯으로 어디까지 할 수 있을까?
'지명수배나 현상금은 시작일 뿐이고... 가능한 모든 수를 동원해서 괴롭혀주마. 오늘의 빚은 배로 되갚아줄테니까!'
진석은 말의 옆구리에 박차를 가하며 더 빨리 달리게 했다. 타도해야 할 명확한 대상이 생겼다는 사실에 가슴속 깊은곳에서 시커먼 의욕이 들끓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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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대지의 눈. 과연, 이번에도 수고하셨습니다."
진석이 건네준 대지의 눈을 받아든 미리안은 만족스럽다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리고 대지의 눈을 책상에 내려놓은 미리안은 진석을 바라다 보며 물었다.
"그런데... 하디카에서 휘파람새를 맡고 있던 원로 미겔슨에게서 대강의 보고는 받았습니다만, 시라즈에서도 화려하게 여러가지 일을 벌이셨던 모양이더군요."
여러가지 일이라. 물론 알 유세피나의 일을 말하는 거겠지. 미겔슨도 사태의 추이 정도는 미리안에게 쭉 보고 해왔을것이다. 고개를 끄덕이는 진석.
"그냥 조금 손을 거들었달까."
"후후. 이쪽에선 수호자 전원을 동원하고 여러 준비를 한 끝에 이제야 공작가의 전권과 귀족들의 지지를 손에 넣은 레오노르 공주를 막 여왕으로 추대하려는 참입니다만... 아라파에선 그것을 단 보름여만에 끝내셨을줄은."
"운이 좋았어 운이."
아무렇지도 않게 툭 내뱉는 진석을 바라보며 싱긋 웃는 미리안. 이 남자는 자신이 얼마나 엄청난 일을 한건지 그 무게를 자각하고 있는걸까? 자신의 감은 분명 틀리지 않은 모양이다. 확실히 그에겐 단순한 운 이상의 무언가가 작용하고 있었다. 제이스가 그를 처음 데려와서 평범한 어린아이로 가장해 떠봤을때부터... 말로는 설명 못할 무언가가 느껴졌었다. 정치적인 방식으로만 일을 진행중인 그란델과는 달리 아무리 무력을 사용했다지만 한 나라의 왕위 찬탈을 그렇게 단기간내에 후다닥 해치워버리다니. 그것도 달리 외부에서 누군가 그를 돕거나 지원해준것도 아니다. 단신으로 이루어낸 일이다. 이 터무니 없는 성과를 보고 있자니 자신이 그간 그란델에 해온 공작이나 물밑작업들이 바보같이 느껴질 정도였다. 역시 이 남자, 러셀은 허신의 강림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인물이었다.
"폭풍의 지팡이때도 그랬지만 갈수록 사람을 놀라게 만드시는군요, 오빠는."
자신의 책상에서 일어나 진석에게 다가가 그 무릎위에 천연덕스럽게 올라앉는 미리안. 이제 미리안이 자신의 무릎에 걸터 앉는 정도는 진석도 자연스레 받아들였다.
"그런데... 왜 하필 육로로 귀환하셨죠? 당연히 배로 돌아올거라 생각했는데 예상보다 늦어져서 무슨일이 있는건가 했다구요."
볼을 뿌웃 부풀리며 진석을 올려다보는 미리안. 진석은 왼손으로는 미리안의 머리를 쓰다듬고, 오른손에 든 물건들을 그녀의 눈앞에 들어보이며 대답했다.
"이것들을 찾으려고. 우연히 비더하임의 어느 동굴에 이런 물건들이 처박혀 있다는 정보를 얻게 됐었거든. 그래서 육로를 통해 오느라 좀 늦어졌어."
진석에게서 어깨 보호대 에스카마도와 적룡의 건틀렛 플라메우스를 건네받곤 고사리 손으로 그것들을 조물거리며 이리저리 살펴보는 미리안. 이내 조금 놀란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와아. 이런 물건들을 구해오시다니. 놀랍네요."
두 개의 장비를 도로 건네주는 미리안. 확실히 미리안은 사람의 마음이나 감정뿐만 아니라 아이템에 깃든 힘의 본질을 파악하는 능력도 있는 모양이었다. 하긴 그러니 폭풍의 지팡이니 대지의 눈이니 하는것들을 가져오라고 지정하는거겠지.
'그리고 플라메우스로 소환하는 적룡의 브레스 웨폰, 아르도르의 폭염은... 원래 고이고이 숨겨두고 미리안의 뒤를 치게된다면 비장의 한 수로 쓰려했건만. 클립튼인가 뭔가 하는 놈들에게 도망칠때 이미 드러냈으니 할 수 없지. 그것도 번화가 한복판에서 써버렸으니까... 미리안의 정보망이라면 애거스트 공화국에서 있었던 일련의 사태를 따로 보고 받을수도 있고, 어줍잖게 숨기다가 의심을 사느니 그냥 솔직히 그대로 보여주는게 나을테지.'
진석은 받아든 물건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자 미리안은 진석의 가슴에 턱 손바닥을 얹으며 말했다.
"이런일이라면 얼마든지 허락해드릴테니까... 다음부터는 제게 미리 일러주세요. 그게 아니라면 설마 제가 필요한 물건의 탐사 정도도 허락하지 않을만큼 쪼잔해 보이나요?"
자신은 세계멸망을 재촉할 이유가 없으니 좀 더 여유롭게 플레이 하고 싶어서 그랬다고 말할수도 없고. 진석은 그냥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 뭐 이번은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터라... 다음부턴 가능하면 행선지 정도는 미리 밝히지."
"응. 꼭 그래주세요. 생각보다 오빠의 귀환이 늦어져서 걱정하고 있었는걸요. 안 그래도 무리해서 혼자 먼곳에 보냈으니 무슨일이 생겨도 직접적으로 도울 수 있었던것도 아니라 내심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렇게 말하며 진석의 품에 밀착해 애교떠는 강아지마냥 몸을 부벼오는 미리안. 예전같으면 움찔했을테지만 이제 꽤나 익숙해진 일이라 진석도 태연히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반짝반짝 금사처럼 빛나는 머리카락은 명주실 만큼 가늘고 부드러웠다. 눈을 꼬옥 감고 그 손길을 느끼는 미리안. 진석은 한참이나 미리안의 머리를 쓰다듬다 나직히 말문을 열었다.
"그보다 중요한 이야기가 있어."
"듣고 있어요. 말씀해 주세요."
"이 교단을 노리는 무리가 있더라."
눈을 팟 하고 뜨며 진지한 표정으로 진석을 바라보는 미리안. 잠시 침묵을 지키던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며 입을 열었다.
"혹시... 클립튼이라는 남자 아니었나요."
역시. 다 알고 있구나. 하긴 해밀턴 공작의 암살 후 계획대로 누명을 쓰고 붙잡혔던 클립튼이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탈출했다는 일 정도야 미리안도 당연히 보고받아 알고 있었을터.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가는 진석.
"그래. 클립튼이란 남자와 조력자 네 명이 더 있더군. 애거스트 공화국의 변경도시 트리니안에서 우연히 마주쳐서 크게 당하고 붙잡힐뻔 했지. 겨우겨우 도망쳤어."
진석의 말에 핫 하고 깜짝 놀라는 미리안.
"어쩌다 그런일이...?"
"에 뭐어... 좌우지간 하나같이 다들 보통이 아니더라. 인상착의를 일러줄테니 손을 써서 지명수배를 걸고 현상금도 걸지? 현상금 사냥꾼이 쫓게 만들고 실력있는 용병도 고용해서 보내자고."
"그렇게 하지요. 하지만 애거스트 공화국이라... 중앙이나 귀족이 통제하는 왕정과 달리 도시별로 민회와 의원들이 있다보니 손을 쓰기 귀찮은 곳인데."
"이쪽에서 부리는 애거스트 공화국쪽의 조직에서부터 뭔가 캐내볼 생각인 모양이던데. 그쪽도 적당히 대비를 해두는게 낫지 않을까."
"그점은 걱정 마세요. 그쪽의 조직들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니까. 녀석들은 빅 본 만큼도 이용가치가 없으니까요. 하지만 헤세스 약품 통상의 애거스트 공화국 쪽 지사엔 손을 써둬야겠군요. 하아. 정말 어쩌다가 이 클립튼이라는 작자를 놓쳐서는."
이마에 손을 짚으며 한숨을 쉬는 미리안. 진석은 그런 미리안에게 자신이 보고 들은 클립튼 일행에 대한 정보를 모두 일러줬다. 흥미롭게 진석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미리안. 그리고 그녀의 눈빛이 가장 이채를 띈 부분은 역시 솜브라 교단에 관한 부분이었다.
"솜브라 교단이라. 하, 보잘 것 없는 잡신의 찌꺼기들이..."
불쾌한 표정을 짓는 미리안. 진석은 미리안이 이런 표정을 짓는것을 처음 보았다. 그야 늘 싱글싱글 웃는낯에 누구에게나 존대를 해오던 미리안인데 다른 교단에 관한 이야기를 듣자 마자 이런 모습이라니. 미리안은 진석이 자신을 빤히 바라본다는 것을 깨닫곤 흠흠 하고 헛기침을 하더니 말했다.
"뭐 아무튼 그들에 대해선 제가 손을 써보겠습니다. 그리고 지금 막 돌아오신 참이라 죄송하지만 다음일의 부탁을..."
엑. 곧바로 또 다음일이냐? 속으로 한숨을 내쉬는 진석.
"...드리고 싶지만 아직 제가 찾던 정보가 들어오려면 사나흘 쯤 시간이 있으니까요. 짧은 기간이지만 휴가라도 드릴까요? 사원에서 푹 쉬시거나 갈론에서 한 숨 돌리시는건 어떨까요. 제시나 아르데나, 그리고 다른 수호자들은 아직 모두 데오그라즈에서 레오노르 공주를 도와 공작중이라 만나 볼 수 없겠지만 엘리야 씨는 갈론에 돌아와 있습니다. 물론 엘리야 씨도 곧 다음일의 채비로 곧 외국에 내보낼 예정이지만 한 번쯤 얼굴을 보는것도 괜찮겠지요."
흠, 엘리야라. 엘리야는 진석이 직접 교단으로 끌어들인 상대. 문득 그녀와 마지막으로 숲에서 관계했던 일이 떠올랐다. 뭐 나름대로 적응은 잘 하고 있는걸까?
"그나저나 사나흘이라..."
쾌속선을 타도 페레나나 데오그라즈까지 다녀올 시간은 안되겠지만 휴식을 취하기엔 충분한 시간이다. 하긴 애거스트 공화국의 트라니안에서 최대한 빠르게 교단으로 돌아오느라 여러가지 정비가 필요하기도 했다. 하다못해 투척용 단검도 똑 떨어져 있었고, 트라니안의 여관에선 빨래를 맡겼다가 그대로 도망나왔던 탓에 갈아입을 옷도 몇 벌 없었다. 고개를 끄덕이는 진석.
"그럼 살것도 있고 하니 잠깐 갈론에 내려가서 머물지. 아 그리고 좀 지원받았으면 하는게 있는데."
"네. 뭐가 필요하시죠? 얼마든지 말씀해주세요."
진석은 여러가지 약품의 지원을 받고싶다고 말했다. 게임을 처음 시작할때는 미약을 만들어 쓸 생각에 약학을 찍고 수련 겸 자신이 직접 약을 만들기도 했지만, 교단의 힘을 빌리기로 작정한 이상 이제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대륙 제일의 약품 회사인 헤세스 약품 통상 아닌가. 엄청나게 비싼 약품들이라고 해도 교단의 수호자인 진석은 그것들을 얼마든지 쓸 수 있었다. 미리안은 진석의 무릎위에서 일어나 자리로 돌아간 다음 책상에서 양식서를 두 장 꺼내어 뭔가를 적고, 쪽지를 한 장 더 뽑아 역시 뭔가를 써서 진석에게 내밀었다.
"갈론의 헤세스 약품 통상의 본사로 내려가서 로비에 이 서류들을 내면 알아서 수속을 도와드릴거에요. 오빠를 임시로 물류팀의 관리담당자로 해둔다는 내용이니 필요한 만큼 얼마든지 가져다 쓰세요. 그리고 그 쪽지는 엘리야 씨가 머무는 갈론의 자택 주소."
제이스도 이사님이신데 나는 겨우 물류팀 담당자냐. 그리고 엘리야의 자택 주소? 진석이 미리안을 바라보자 그녀는 다 안다는듯 배시시 웃었다.
"오빠가 제시 뿐만 아니라 엘리야 씨에게도 손을 댔다는 것쯤은 저도 알고 있으니까요. 어차피 며칠간 갈론에서 머물거라면 거기서 기거해주세요. 그럼 제가 다시 연락을 드리기도 편할테니까."
"......"
내, 내가 엘리야한테 손을 댔다는걸 너는 또 어떻게 알고 있는거야? 제이스가 얘기한거냐? 아니면 설마 엘리야 본인에게 들었나? 내심 당황스러웠지만 가능한 티내지 않고 서류와 쪽지를 받아드는 진석. 미리안은 장난스럽게 윙크를 해보였다.
"너무 무리는 하지 마시구요. 다음일에 지장이 생기지 않을 정도만 해주세요."
나... 남의 아랫도리 사정에까지 간섭하지 말라고! 남사스럽게! 어린애 주제에!
진석은 자신의 방 침대밑에 숨겨두었던 돈을 좀 챙기고, 말을 타고 메디니아의 수도 갈론으로 향해 헤세스 약품 통상의 본사에 들렀다. 로비의 직원들에게 미리안이 준 서류를 건네자 일은 일사천리였다. 직원들은 진석을 안내해 본사 건물 지하의 약품창고를 개방해주었다. 우선 최상급의 치료제와 SP회복제 30개 들이를 한박스씩 챙겼다. 종합 해독제와 질병 치료제 등 쓸만한 약품들도 여러가지를 골고루 챙겼다. 진석이 챙긴 약품 상자 하나하나가 죄다 금괴에 견줄만큼 어마어마하게 비싼것들이었지만 이 물품들의 담당자가 진석이니 누구도 제지하거나 방해하는 사람은 없었다. 필요한만큼 약을 양껏 챙기고 돌아가는 길엔 목에 거는 형태의 직원 카드도 하나 건네 받았다. 카드를 건네준 직원이 다음부턴 이것만 제시하면 얼마든지 건물내에 출입 할 수 있을거라고 알려주었다.
'쓸데없는데서 현대적이군.'
게다가 도난이나 분실을 걱정할 필요도 없는게, 약품창고나 연구실 등 주요 시설에 출입할때는 반드시 중무장한 보안팀을 거쳐야하며 카드의 소유자와 보안팀측에 기록된 신상정보를 서로 대조한 뒤 확인이 되어야 들여보내는듯 했다.
'자 아무튼 약도 잔뜩 받았고. 이걸 덜렁덜렁 들고 다니기도 그러니 일단 엘리야의 집에라도 가볼까?'
말등에 약품이 가득 들어찬 가방을 싣고 미리안이 건네준 쪽지의 주소를 따라 엘리야의 집으로 향한 진석. 엘리야의 집은 도심 북동부의 고급주택가에 있었다. 중심가는 여러차례 지났어도 고급주택가쪽은 초행이라 조금 헤멨지만, 곧 그녀의 자택에 도달 할 수 있었다. 아담한 마당이 딸린 단층벽돌집이었다. 이쪽 주택가에선 비교적 작은축에 속하는 집이었지만 여자 혼자 살기엔 충분히 넓어 보였다. 대문이 열려있었기에 마당안으로 들어가 한쪽에 말을 묶어두고 약품 가방을 챙긴 뒤 집의 현관을 탕탕 두드렸다.
"계십니까. 택배입니다."
하지만 정적. 다시 한 번 문을 세게 두드리며 같은 대사를 반복했다. 그러자 문 안쪽에서 뭔가 우당탕 하더니 맥빠진듯한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자, 잠시만요오."
그리고 한참을 더 기다리고 나서야 문은 겨우 열렸다. 문을 살짝 열고 고개를 빠꼼 내미는 엘리야. 자다 일어나기라도 한건지 머리는 죄다 헝클어져 있었고 위에 걸친 와이셔츠도 단추가 짝이 안맞게 끼운데다 잔뜩 구겨진게 허겁지겁 입은 티가 풀풀 났다. 엘리야는 진석을 보곤 반쯤 감긴 눈을 한 번 더 부비고 나서야 아 하며 겨우 이쪽을 알아보았다.
"아, 러셀씨! 오랜만이에요!"
"아뇨, 택배입니다."
"에에?"
진석은 문을 열어 젖히곤, 엘리야의 등을 떠밀며 강제로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서 보자니 엘리야는 위쪽에 와이셔츠만 걸쳤을 뿐 아래쪽은 속옷 한 장 외엔 아무것도 입지 않고 있었다. 얼굴을 붉히며 셔츠 자락을 아래로 끌어당겨 가리는 그녀.
"자! 잠깐만요!"
"택배입니다. 배달품은 나. 반품은 불가."
"무... 무슨 소리에요?"
문을 닫고 엘리야를 한 팔로 껴안곤 질질 끌듯 안쪽 거실로 들어가는 진석. 집 안의 풍경은 꽤나 지저분했다. 테이블이나 소파 위에 왠 서류나 책들이 잔뜩 쌓여 여기저기 굴러다니고 있었고 한쪽엔 최근에 잉크병을 엎은 자국이 생생했다. 엘리야의 것으로 보이는 옷도 아무데나 널려있었다.
"어휴. 집안 꼴이 이게 뭐야?"
"아으... 지, 지저분해서 남한테 보이고 싶지 않았는데. 어제까지만 해도 나름 바빴다구요. 일반적인 업무와, 교단쪽의 일이 동시에 들어오는 바람에... 새벽나절에 겨우 끝내서 서류 전달을 마쳐놓곤 돌아와서 쓰러지듯 잠들었는데. 갑자기 누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깨어보니 이렇게 러셀씨가 막무가내로 들이닥치고."
대답을 하며 옷가지나마 주섬주섬 거두는 엘리야. 옷을 치우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니 그 사이사이 속옷들도 눈에 띄었다. 약품 가방을 한쪽에 내려놓곤 호오~ 하며 바닥에 굴러다니던 분홍색 팬티를 집어들어보는 진석.
"이건 제법 귀여운데? 분명 내가 저번에 본 기억으론 굉장히 수수한 속옷만 입던걸로..."
"도, 돌려줘요!"
얼굴이 빨개져선 속옷을 뺏으려 다가오는 엘리야. 엘리야는 팔을 뻗어 자신의 팬티를 빼앗으려 했지만 진석은 되려 높이 치켜들어 그것을 방해했다.
"뭐하는거에요? 이리 내놔요!"
"알았어, 자."
소파위로 팬티를 휙 던지는 진석. 엘리야가 아 하며 그쪽으로 고개가 돌아가자 진석은 뒤에서 엘리야를 덥썩 끌어안았다. 히익 하며 깜짝 놀라는 엘리야.
"지... 지금 뭐에요 이건?"
"이런짓."
엘리야의 귓가에 후우 숨을 불어넣고 왼손으론 엘리야의 가슴을 만지며 오른손을 셔츠의 아래쪽에서 부터 다리사이로 손을 넣는 진석.
"읏! 모, 모처럼 만나자 마자 이게 무슨... 앗. 으, 그... 그런곳 만지지 마세... 히잇!"
"며칠만 신세 좀 지자. 한 사나흘?
"엣, 갑자기 그런... 으응! 아, 안 돼. 싫어어..."
그러고보니 두 달 조금 더 지나 재회한 것이었지만 엘리야는 그새 머리도 꽤 길었고 집 안에 곳곳에 보이는 옷가지들도 전보단 꽤나 세련된 걸 입고 있는듯 했다. 방금전의 속옷만 봐도 달라졌다는걸 잘 알 수 있었다. 게다가 이전엔 쓰지 않던 향수도 쓰는지 목덜미에서 왠지 달콤한 향기가 풍겼다. 하긴 이전엔 미행전문이었지. 미행일을 하며 향기를 폴폴 풍기는 향수를 쓸 순 없었을테니... 엘리야를 뒤에서 끌어안은채 안쪽으로 고개를 기울여 목과 쇄골쪽을 애무하는 진석. 엘리야는 처음엔 몸을 비틀며 저항하려 했지만 진석이 한쪽으로 몰아붙인채 놓아주지 않고 강경하게 여기저길 더듬자 결국 그 손길에 몸을 내어주었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엘리야.
"제, 제시 씨가 알면 싫어할텐데..."
"내가 걔 눈치나 볼 것 같아?"
당연히 그럴리는 없겠지. 원래 제멋대로인 남자니까. 하지만 엘리야 자신도 그렇게 싫진 않았다. 어쨌든 이 남자는 자신의 처음을 가져간 상대이자 새로운 삶을 살도록 이끈 장본인이었으니까. 비록 생각보다 바쁘고 꽤 힘들긴 했지만 그래도 엘리야는 지금의 일과 생활에 만족하고 있었다. 매일같이 빵이나 굽던 이전의 생활이 어쩐지 바보같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그리고 가끔, 정말 아주 가끔이었지만 이 남자가 생각났던것도 사실이다. 사실 몇번인가는 그와의 일을 떠올리며 자위를 하고 잠든적도 있었다.
"어라. 금방 흠뻑 젖었네? 요새 욕구 불만이었나보지?"
"그, 그, 그런건 일일이 말하지 말아요 정말! 델리케이트 하지 못하다니깐!"
"그 소리는 전에도 한 번 들었던 것 같은데. 그보다 이르지만... 넣어도?"
테이블 한쪽에 손을 짚은채 밀어붙여진 자세인 엘리야. 슬쩍 뒤를 돌아본채 잠깐 망설이는 듯 하다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어차피 이 남자는 자신이 응하건 그렇지 않건 자신의 몸을 가질게 뻔한 상황. 굳이 물어보고 동의를 구한건 매너따위가 아닌, 그의 짓궂음이리라. 자신이 동의를 표하자 진석은 셔츠자락을 살짝 걷어 올리고 습기를 머금은 속옷을 내렸다. 엘리야의 가는 다리사이로 스륵 흘러 내리는 팬티. 그리고 단단한 무언가가 그녀의 중심부에 밀착했다.
'아... 뜨거워. 화상이라도 입을 것 같아. 이게 바로 남자의 그것...'
정말 자신이 이런것을 몸 안에 몇 번이나 받아들였었단 말인가? 이전의 일이 다 꿈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엄연한 현실. 단단히 발기한 남성의 성기가 그 끝에서부터 굼실굼실 내부로 파고드는 감각이 그것을 깨우쳐줬다. 진석은 엘리야를 뒤에서 붙잡고 천천히 자신의 물건을 삽입했다. 오랜만에 맛보는 강렬한 쾌감에 흐윽 하고 숨을 몰아쉬며 자세가 무너지는 그녀. 하지만 진석은 엘리야가 쓰러지지 못하도록 꽈악 끌어안은채 그녀의 몸에 삽입된 자신의 것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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