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9. -- > * 103화 *
진석은 그대로 엘리야를 테이블위에 엎어놓은채로 한 번, 소파로 자리를 옮겨서 다시 한 번, 그녀를 침실로 안아옮겨서 또 한 번 몸을 섞었다. 전날의 과로로 지쳐있던 엘리야는 그것만으로도 기절하듯 뻗어버렸고 진석은 쩝 입맛을 다시며 그녀를 남겨둔 채 침실을 빠져나왔다.
'엘리야는 진짜 체력이 약하긴 약하구나. 겨우 세 번으로는 한 것 같지도 않지만... 잠든 사람을 붙잡고 계속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할 수 없지.'
엘리야의 옷가지와 서류가 널려있는 소파를 적당히 치우고 몸을 묻는 진석. 다리를 쭉 뻗어 편안히 앉은채 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어디보자. 클립튼 일행에 대한건 미리안에게 일러뒀으니 일단 됐다 치고... 다음일이 또 뭐가 될진 모르겠지만 요 며칠동안은 그 밑준비나 해둬야겠지. '
우선 포션이나 다름없는 약. 그건 일단 헤세스 약품 통상에서 가져온 저것이면 충분할 것이다. 다음은 장비.
'가죽갑옷은 반쯤 걸레가 되어서 도중에 버렸었고... 에스카마도와 플라메우스를 얻었다지만 이걸론 부족해. 돈은 충분히 챙겨왔으니 한 번 상점이나 잘 둘러봐야지. 지젤에게도 부탁한건 있지만 뭐 시일이 얼마 안 지났으니 아직 완성은 안됐을테고. 설령 완성을 했다고 해도 찾으러 갈만한 짬은 없으니.'
그리고 마지막은... 역시 동료다. 믿고 등을 내어줄만한 누군가가 필요했다.
'내가 플레이어로서 능력을 십분 발휘한다고 해도 혼자서 모든걸 다 할 순 없는 노릇. 게다가 모데로인가 뭔가 나와 똑같은 바일리 델 비엔토를 쓰는 그 놈... 일대일로 다시 붙는다면 무슨일이 있어도 반드시 숨통을 끊어놓을 생각이지만, 그 녀석 주변의 다른 동료들이 하나라도 더 가세한다면 인정하기 싫지만... 내가 진다.'
모데로와 싸울때 그에게 동료가 붙는다는걸 가정해 1대 2의 상황을 상정해보는 진석. 우선 기사 클립튼. 완전무결의 기사라고 까지 불린 남자이니 모데로보다 약하진 않을거다. 적어도 모데로와 비슷하거나 그 보다는 강할 수도 있으니 그만한자가 가세하면 당연히 밀린다. 다음은 마법사 리들리. 옆에서 자신에게 디버프를 걸거나 빈틈을 노리고 뭔가 공격마법이라도 써오면 이 역시 불리. 진석이 데오그라즈의 호텔에서 제이스와 처음 만나 전투를 벌였을때 이래저래 고생했던것도 협공을 당했기 때문이다. 전투시 역할을 크게 셋으로 나누자면 탱커와 딜러, 서포트로 나눌 수 있을텐데 전사는 보통 탱커 역을 맡고 마법사는 딜러쪽에 가깝다. 빅 본의 조무래기들이 탱커로서 목숨을 버려가며 덤벼드는 틈을 노려 제이스가 뒤에서 홍염탄을 쏴댔으니 진석은 무기도 부서지고 마법을 피하기 위해 이리뒹굴 저리뒹굴 했었던 것이다.
'아무튼 그 다음은 비엔족의 활잡이 여자였던가. 왠지 얄밉게 생겨가지고선... 젠장. 잡히기만 해봐라. 그 건방진 입에서 살려달라는 소리가 나올정도로 인정사정 없이 능욕 해줄테다.'
허나 그녀 역시 보통이 아닌듯 했다. 보통 활보다 훨씬 커다란 대궁을 자유자재로 다루었고, 시클론을 써서 도망가는 자신에게 화살을 한 대 맞추기까지 했으니. 방심할 수 없는 상대임은 틀림없다.
'마지막은 에이미라는 신관 아가씨였나? 일행 중 제일 어리버리한것 같지만 어차피 성직자는 일선에서 싸우는것도 아니고 뒤에서 서포트를 맡는게 본업이니. 모데로에겐 축복과 회복을 해주면서 나에겐 디버프를 걸어대면 이것도 골치아프지.'
종합해보면 이 다섯 각자를 하나하나 떼어놓고 상대한다면 모를까, 둘이나 셋만 되어도 혼자서는 어떻게 손써보기 어렵다. 그러니 그들을 다시 한 번 상대한다면 자신에게도 힘이 될 조력자가 필요했다. 하지만 당장 써먹을 수 있는 제이스나 아르데나, 다른 수호자들은 죄다 그란델에 묶여있는 참이고 레오노르 공주의 찬탈건이 아직 마무리 되지 않은 상황이라 이쪽으로 부른다는건 무리.
'그렇다면...'
임시로 노예라도 구입해서 부려볼까? 많아봐야 번잡하기만 하니 여럿을 구입할 필요는 없다. 상황에 따라선 하나로도 충분, 혹은 두셋 정도면 된다. 쓰고 버리는 일회용 버리는 패로 생각하고 순간적인 방심이나 빈틈을 불러일으킬 정도만 되어도 그 값어치를 다 하는 셈이다.
'내 쪽에서야 노예따위 아무리 죽어나가도 상관없지만 클립튼 일행은 그렇지 않을테지. 다섯뿐인 소수의 일행이니 그 중 누구 하나만 죽거나 부상을 입어도 전력에 큰 손실을 입을터.'
그리고 어차피 상황을 보아하니 다음 임무도 자신 혼자 맡을것 같다. 뭐 이 넓은 대륙에서 클립튼 일행과 금방 마주칠 일은 없을테지만, 만에 하나 다시 마주친다면 역시 단독으로는 위험하다.
'시험 삼아 한 명 정도만 사서 데리고 다녀볼까나?'
기왕 노예를 사서 부린다면 전투노예가 좋을테지만, 지금 진석에겐 가장 고급의 노예를 구할 수 있는 블랙옥션쪽의 연줄은 전혀 없었다. 완전 회원제에 비정기로 열리는게 블랙옥션이었으니까. 그렇다고 미리안에게 알아봐달라자니... 안 그래도 바쁜거 뻔히 아는데 이런걸로 일일이 찾아가서 부탁하기도 왠지 겸연쩍다. 뭐 이 정도는 적당히 처리하자.
"읏차."
생각을 정리한 진석은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돈주머니를 챙겨 엘리야의 집을 나섰다. 말을 타고 갈까 했지만 그리 먼곳도 아니고 말을 끌고 다니며 묶어둘 곳 찾기도 귀찮았기에 그냥 걷기로 했다.
중심가를 돌아다니다 깔끔해보이는 무구점을 찾아 가죽 흉갑을 구입한 진석. 방어력을 생각한다면 역시 금속제 무구가 좋겠지만 무게때문에 작게나마 민첩성이 감소한다거나 혹은 움직임이 불편했다. 그래서 그냥 가죽제품을 구입했다. 진석이 구입한 가죽 흉갑은 옷 위에 덧 입는 조끼와 같은 형태로 가슴부위에 얇은 흑철판이 대어져 있었다. 가죽의 질과 처리가 좋은건지 움직임도 부드러웠고 방어력도 괜찮은, 나름 좋은 물건이었다. 가죽 흉갑을 구입한 후엔 새로운 부츠도 구입했다. 지금까지 쭉 신고 다닌 가죽부츠가 꽤 지저분해지고 닳은 탓이었다. 기왕 사기 시작한거 옷가게에 들러 여벌의 옷도 몇 벌 구입한 다음 노예 경매장을 찾았다. 일반 옥션은 오전중에 진즉 경매가 종료된데다가 다음의 개최는 다음주부터로 예정되어 있었고, 실버 옥션의 경매가 남아있긴 했으나 내일 오후 8시부터였다. 진석은 입장권 겸용인 고가의 카탈로그를 미리 구입한 다음 늦은 점심식사나 할 겸 근처의 식당으로 들어갔다.
'어디보자...'
진석은 적당한 음식을 주문한 다음 카탈로그를 펼쳐보았다. 경매에서 팔릴 예정으로 기재된 노예들의 상세한 프로필과 외양을 묘사한 그림, 시작가와 예상 입찰가 등이 실려있었다. 예상 입찰가 따위를 일부러 적어놓은것은 경매에 참가한 손님들의 주머니에서 더 많은 돈을 끌어내기 위함이다. 예를 들어 시작가가 300골드고 예상 입찰가가 500골드라면, 그보다 더 많이 준비하면 했지 순진하게 딱 500골드만 준비해서 오는 손님은 없을테니까. 더 돈을 챙겨오라는 의미였다. 그리고 그 돈은 경매장측의 수입이 될 터. 파라락 하고 카탈로그를 넘기는 진석.
'이 카탈로그에 있는건... 일단 스물 한 명인가.'
물론 이 목록에 실린 노예가 전부인건 아니었다. 경매도 일종의 여흥이니 팔기로 예정된 노예들은 전부 싣진 않은것이다. 중간중간 목록에 없는 노예를 하나씩 섞어 출품하기도 하고, 흐름을 봐서 손님들의 흥이 올랐을 시점에 가장 돈이 될만한 상등품의 노예를 내보낼게 뻔했다. 카탈로그에 있는게 스물 하나라면 아마 여분으로 너덧명 정도는 기재하지 않고 사이사이에 섞어서 내보낼것 같았다.
'게다가 목록에 있는 노예들 중에 전투에 도움이 될만한 녀석은 고작 셋인가.'
목록에 실린 스물 한 명 중 총 일곱명이 그런대로 전투능력을 갖추고 있긴 했으나 진석이 봤을때 그 중 그나마 쓸만한건 그 중 절반인 셋이었다. 첫번째는 올린스턴 왕국 대투기장의 검투 부분에서 20연승을 거두었으나 원 주인의 빚 탕감을 위해 때문에 팔려왔다는 검투사 노예. 기본적으로 과묵하고 주인에게 순종적인 만큼 호위로 쓰면 좋을거라는 추천사가 쓰여있었다. 진석이 보기에도 괜찮은 물건이었고 예상 입찰가 역시 꽤 높았다.
두번째는 벨리언 왕국의 군관이었으나 세간의 이목을 속이고 수년간이나 살인을 저질러온 쾌락살인범. 한차례 교수형에 처했으나 형 집행 도중에 밧줄이 끊어져 살아남았기에, 사형에 처하는 대신 노예로 팔려왔다고 되어있었다. 이따금 교수형을 집행할때 살아남는 경우는 이런식으로 죽이지 않고 무기징역에 처한다거나 노예로 처분하는 등 다른쪽으로 처분하는 나라들도 있었다. 죽음의 신이 한 번 거부한 자니 최소한의 자비를 베푼다는 일종의 미신이랄까. 체포할때도 많은 사상자를 냈을만큼 검술 실력 만큼은 일품이라고 적혀있었다. 애당초 쾌락살인범이라니 성격에 문제가 있을테지만 살인범이건 뭐건, 복종 마법을 걸면 명령에 충실한 노예가 되니 그런건 상관없었다.
첫번째와 두번째는 둘 다 남자였으나 마지막 세번째는 여자였다. 그것도 아라파 출신의 무희. 허나 검무나 추고 시중이나 들 줄 아는 단순한 무희가 아닌, 호위로 쓰는것이 가능한 투희였다. 단, 그녀는 이전에 모시던 주인을 살해했다고 되어있었다. 사정은 모르겠지만 무희가 섬기는 주인을 살해하는것은 아라파에선 꽤 크나큰 중죄. 처형당하지 않고 노예로 팔려왔다니 꽤나 운이 좋은 경우였다.
'가장 안전빵은 첫번째인가. 투기장에서 20연승이나 했다면 뭐 실력은 검증이 끝난거고. 두번째는... 연쇄살인마라. 수년이나 들키지 않고 그짓을 계속 해왔다면 나름대로 머리회전 만큼은 셋중에서 제일 좋지 않을까 싶은데. 허나 복종 마법으로 충성을 강제한다고 해도 쾌락살인의 버릇같은건 쉽게 사라지지 않겠지. 머리가 좋은만큼 멋대로 행동할 가능성도 있다는 이야기.'
그리고 마지막 세번째는 투희. 투희로 불린다는건 최소한의 전투능력은 있다는 이야기지만... 투희가 된다는게 딱히 정해진 선발기준이라도 있는건 아니니, 투희마다 실력의 편차가 심하고 그 수준도 각자 들쭉날쭉했다. 즉 어느정도 뽑기운이 필요한 상대라는 이야기. 운이 좋으면 어지간한 숙련 전사 이상으로 강할 수도 있었지만, 반대의 경우엔 무기 쓰는법만 겨우 익힌 초심자일수도 있었다.
'여자 노예를 사는게 데리고 다니면서 이래저래 사소한 수발을 들게하거나 밤시중도 받을 수 있겠지만 너무 실력이 떨어진다면 안사느니만 못할거라...'
이거 고민된다. 이 셋 중에서 하나를 사야할까? 아니면 카탈로그엔 없는 다른 노예를 노려봐야 할까.
'우씨... 이도 저도 아니면 확 셋 다 사버려? 4만 골드 가량이나 있으니 겨우 실버 옥션의 노예 셋 정도 못살것도 아니고.'
하지만 그러자니 돈이 아깝다. 당장 클립튼 일행과 싸울일이 정해지거나 한 것도 아닌데 노예를 셋 씩이나 들여서 어디다 쓰겠는가. 이런저런 궁리를 하고 있자 아까 주문한 음식이 나왔고 진석은 우선 고민하던것은 잊어버린채 식사부터 했다.
그날 저녁. 진석은 며칠 신세질 답례를 미리하겠다며 엘리야를 데리고 근처의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그리고 함께 식사를 하며 혹시나 싶어 실버 옥션의 카탈로그를 보여주고 엘리야의 의견을 물어보았는데 그녀의 결론은 다음과 같았다.
"어차피 여자 노예를 살 거 아닌가요?"
"......"
달리 할 말은 없었다. 실제로 진석은 하루 사이 꽤 고심을 해봤지만 역시 투희를 사는게 낫지 않을까 하는것만 내내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아니 뭐 기왕이면 다홍치마라고 눈도 몸도 즐거운 쪽이 좋잖아! 게다가 투희를 들이면 엘리야와 함께 침대 위에 올려놓고 셋이 오붓하게 쓰리썸이라도 즐겨볼까 궁리 했다는건 절대 입 밖에 낼 생각 없었다. 엘리야는 진석이 골똘히 궁리하는 모습을 보곤 포크와 나이프로 접시 위의 음식을 잘게 자르며 질문해왔다.
"그보다 갑자기 왠 노예에요? 러셀씨라면 딱히 여자가 궁해서 산다거나 하는건 아닐것 같지만."
"당연하지- 가 아니라, 엘리야 너... 나를 대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거야?"
"에? 뭐긴요. 제멋대로에 호색한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꽤 정확한 평가죠?"
싱긋 웃는 엘리야. 그러더니 얌 하고 입에 작게 자른 고기를 넣고 우물거렸다. 손에 쥔 포크로 접시 위의 고기를 쿡 찍으며 탄식하는 진석.
"너무 솔직하잖아! 나 상처받았어."
"말 한두마디로 상처받을 정도로 섬세한 사람이 남의 집에 들이닥치자 마자 강제로 그런짓부터 할리 없잖아요."
"에이~ 그거야 뭐. 너도 좋았잖아? 그럼 됐지."
"뻐, 뻔뻔해. 정말 놀랄정도로 달라진게 없네요."
"사람이 단기간내에 변하는게 더 무섭지 않냐? 그리고 뻔뻔하다기보단 자기 자신에게 솔직하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 같은데."
진석의 태도에 기가 찬다는듯 피식 웃는 엘리야. 엘리야는 비록 말로는 진석을 타박하고 있었지만 그가 싫어서가 아니라 그냥 친구처럼 편하게 대하고 있는 것이었다. 데오그라즈 토박이였던 그녀는 메디니아의 갈론까지 강제로 끌려와 새로운 삶을 시작한지 오래되지 않은 상황이었고, 이곳엔 일로 알게 된 사람들 이외엔 딱히 친구나 사적인 관계의 지인이 있는것도 아니었으니까. 이래저래 모처럼 찾아온 진석이 내심 반가웠던 것이다. 또 제이스를 의식해 겉으로 드러내는 표현을 하진 않았지만 엘리야 역시 내심 진석에게 어느정도 호감을 가지고 있는게 사실이었니까. 진석은 글라스의 와인을 한 모금 들이킨 다음 말했다.
"자세히 설명하긴 곤란하지만 최근에 위험한 무리 하나가 적으로 돌아서서... 혼자서 상대하다 붙잡혀 곤욕을 치를뻔 했거든? 그래서 호위랄까 최소한의 대비랄까. 등을 맡길 상대가 필요해서 노예를 사려고. 제이스나 아르데나도 있지만 걔들은 아직 데오그라즈에서 일하고 있으니."
"위험한 무리라니... 괜찮은거에요?"
조금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 엘리야. 진석은 손을 휙휙 내저으며 대답했다.
"그야 안 괜찮지. 안 괜찮으니까 이렇게 노예라도 살 궁리를 하는거 아니겠어."
"으음~ 그럼 기왕 믿고 등을 맡길 노예를 산다면 역시 블랙옥션에 출품될 전투노예가 낫지 않겠어요? 러셀씨 분명 피터슨의 재산도 다 거둬왔었잖아요? 돈도 많을텐데 어째서 실버옥션의 노예를?"
역시 엘리야는 핵심을 잘 짚어오는구나 생각하는 진석. 하지만 시큰둥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니 거긴 회원제잖아. 참가할 방법이 있어야 말이지. 기존의 회원을 알아야 가입하던 어쩌건 할텐데."
진석의 말에 엘리야는 검지손가락으로 자기 자신을 가리켜 보이며 태연히 답했다.
"저기, 제가 블랙옥션의 회원인데요."
"...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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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야는 실로 다양한 분야의 조사나 분석에 관한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명목상으로 속한 부서야 해외영업쪽이었지만 실제 타국에 갔던건 레오노르 공주의 사전공작을 돕기 위해 데오그라즈에 갔던것 한 번 뿐이고 아직까진 갈론에 머물며 해온 일이 더 많다고 했다. 그리고 지난번엔 갈론에 새로 사업체를 연 어느 대부호의 뒷조사를 위해 교단측에서 그녀에게 블랙 옥션의 회원자격을 준비해줬다고 했었다. 갈론의 블랙 옥션 회장은 시내 중심가에 위치한 일반 경매장과는 달리 고급주택가쪽의 어느 커다란 저택이었는데, 진석은 엘리야의 도움으로 어렵잖게 메디니아의 블랙옥션 회원으로 등록 할 수 있었다. 입회비만 해도 천골드였으나 그 정도는 치를 수 있었다. 원래는 비정기적으로 개최되는 블랙옥션이나, 다음번 개최일은 실버 옥션의 개최와 겹쳐있었다. 내일 저녁 오후 7시. 실버 옥션 보다 1시간 빠른 시각. 블랙 옥션에서 거액을 써줄 씀씀이 큰 손님들이 혹여 엉뚱하게 실버 옥션에 가지 않도록 일부러 살짝 빨리 잡은게 아닌가 싶었다.
'어째 운이 따르는건가. 엘리야가 블랙 옥션 회원에다 개최일도 바로 내일이고.'
실버 옥션 카탈로그 따위, 100골드나 주고 산거긴 하지만 깔끔히 잊어버리기로 했다. 블랙 옥션은 어떤 노예가 출품되는지 알 수 없긴 했지만 뭐가 됐건 실버 옥션 쪽 노예들보단 나을테니까.
'그리고 전투노예라면 한 번 쓰고 버리긴 아까우니... 돈은 얼마가 들어도 제대로 된 걸 사야겠군.'
다음날 아침. 진석은 교단에 들러 자기 방에 있던 잔금을 모두 챙겨 돌아왔다. 가방에 있는 총액을 정확히 세어보니 금괴와 금화를 합쳐 삼만 팔천 골드를 약간 넘었다.
'삼만 팔천 이라... 뭐 어지간히 비싸도 만골드 선이니, 이만하면 충분하겠지.'
그리고 엘리야와 노닥거리다 저녁때 그녀와 함께 블랙 옥션 회장에 가려고 했으나, 느닷없이 헤세스 약품 통상쪽에서 직원들이 찾아오더니만 엘리야는 그쪽에 불려가버렸다. C에서 4번 상황이 일어났다던가, 눈에게 꼬리가 붙었다던가 뭐라던가, 무슨 스파이처럼 은어를 쓰는게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엘리야는 허둥지둥하며 진석에게 여분의 집 열쇠를 건네주곤 새로 들어온 업무를 처리하러 급히 나가버렸다.
'뭘 하는건진 모르겠지만 진짜 바쁘긴 바쁜 모양이군. 미리안의 정보망이라는건 이런식으로 운용되고 있는건가.'
하긴 뭐 그 부분은 내 알바 아니지. 진석은 저녁때까지 휴식을 취하다 시간이 되자 구입해둔 새옷들 중 가장 좋은것을 차려입고 블랙 옥션 회장으로 향했다. 그리 머지 않은 곳에 위치했지만 이번엔 혹시 몰라 말을 타고 이동했다. 도착하고 나서 보니 주변엔 꽤 호사스러워 보이는 마차 여러대가 순서대로 줄을 지어 저택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진석도 차례대로 저택안으로 들어서, 큰 정원을 지나 저택 앞에서 일하는 일꾼들에게 말을 맡기고 번호표를 건네받았다. 손님들이 워낙 많다보니 돌아갈땐 이 번호표를 내어주면 그에 해당하는 마차나 말을 되돌려 주는 모양이었다.
'여기 나름의 발레 파킹인가.'
그리고 이제 저택 안쪽에 들어가기 위해선 입구에서 회원증의 제시가 필요했다. 이십여명이나 되는 경비인력이 회원증을 확인하며 회원들을 순서대로 내부로 들여보내고 있었다. 진석도 어제 엘리야의 도움으로 만든 회원증을 제시하곤 안으로 들어섰다. 저택 안쪽은 마치 여느 귀족이 만찬이라도 개최한듯 화려하게 꾸며진게, 호사스러운 음식과 술들이 준비되어 있었고 단정하게 차려입은 여러 하인들이 시중을 들거나 샴페인, 시거따윌 쟁반에 들고 서빙하고 있었다. 블랙 옥션에 참가하러 온 회원들은 주로 끼리끼리 모여 뭔가의 대화를 나누지, 음식이나 술에 손을 대는 이들은 별로 없었다. 이들은 하나같이 쓸데없을 정도로 화려한 차림을 하고 있었는데 개중에선 신분을 드러내고 싶지 않은지 가면같은걸 쓰고 있는 이들도 상당히 많았다.
'한심하군. 부끄러운줄 알면 그냥 오질 말던가. 나? 나는 하나도 안 부끄럽다!'
진석은 그런것 따위 신경 쓰지 않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준비된 음식을 맛보거나 샴페인을 마시고 따로 준비된 흡연실에서 시거도 피웠다. 그런식으로 잠시 시간을 보내다보니 몇몇 하인들이 저택 안을 돌아다니며 곧 경매가 시작된다는 알림을 해왔다. 개회알림을 들은 회원들은 우르르 저택의 지하로 내려가기 시작했고 진석도 사람들의 행렬에 끼어 계단을 통해 지하로 내려갔다.
'지하라... 여기가 경매장인가? 넓구만.'
지하엔 커다란 홀이 마련되어 있었다. 정면엔 단상과 더불어 안쪽에 200여석 정도의 좌석이 마련되어 있었고 회원들은 저마다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자리엔 경매시 자신의 입찰 의향을 알릴 수 있는 작은 패널이 놓여있었는데, 패널의 윗 부분엔 자신이 앉는 좌석 번호와 같은 숫자가 씌여있었다.
'84번이라.'
진석은 적당히 중간쯤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곧 회원들은 모두 지하로 내려와 각기 착석했는데, 대충 둘러보니 대략 백이삼십 정도 되는 것 같았다. 블랙옥션이란게 모든 도시에 다 있는건 아니므로 이중에선 아마 경매에 참가하기 위해 다른 도시에서 찾아온 이들도 제법 될것이다. 잠시 기다리자 단상에서 깔끔한 정장 차림을 한 중년의 남자 경매사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경매사가 나타나자 회장내 여기저기서 들려오던 이야기 소리는 잦아들고 실내는 이내 쥐죽은듯 고요해졌다. 경매사는 정중히 인사를 해보이며 말문을 열었다.
"어서오십시오. 워낙 오랜만의 개최라 기다리신 분들도 많았을거라 생각합니다만, 그만큼 좋은 컬렉션들을 구비해 두었습니다. 오늘의 참가품목은 총 열 넷. 모든분들이 낙찰을 받으실 순 없으실테니 부디 열띤 경쟁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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