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9. -- > * 104화 *
경매는 쓸데없는 사설따위 없이 바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첫번째로 올라온 노예는 한 명이 아니라, 두 명이었다. 열서너살 가량으로 보이는 유사인종 페야족의 아이들이었다.
'이야, 처음부터 쎈데.'
페야족은 대륙 북부에서도 최북단의 한랭지에서 거주하는 유사인종이다. 한랭지에서 살다보니 열손실을 막기위해 모공이 작고 피부와 모발의 색소가 적어 하얗다 못해 창백한 느낌이 든다... 라는 설정이라던가 뭐라던가. 진석도 자세한건 잘 몰랐다. 뭐 그냥 한마디로 페야족은 하얗고 매끈한 피부와 아름다운 외모를 가졌다는것. 새하얀 피부색과 더불어 귀가 요정의 그것처럼 비교적 가늘고 긴 형태인게 인간과 구별되는 외모상의 특징이었다. 실제로 단상에 올라온 두 아이는 백자 도자기처럼 새하얀 피부에 백금발이라는 플래티넘 블론드를 하고 있었다.
'와... 거 귀엽긴 진짜 귀엽네. 그쪽 취향이라면 정말 군침을 질질 흘릴만한 애들인걸.'
둘 다 곱게 단장하고 화사한 옷으로 꾸며놓은터라 흡사 프랑스 인형이 연상될 정도였다. 이번의 플레이에서 본 어린아이들 중 가장 귀여운건 미리안이었지만, 그 미리안마저 평범한 아이로 보일만치 귀여운 아이들이었다. 하지만 정면을 향한 두 아이의 눈동자는 공허한게 틀림없이 정신계 마법으로 제압해둔게 분명했다. 경매사는 단상에 올라와 있는 두 아이를 가리켜 보이며 말했다.
"페야족의 친남매입니다. 이란성 쌍둥이로 나이는 둘 다 13세. 둘 다 깨끗합니다. 시작가는 이천 골드입니다."
깨끗하다는 말의 의미는 간단했다. 아직 아무도 성적으로 손을 대지 않았다는 것. 어차피 이런 어린 아이들의 이용처는 딱 하나 밖에 없었다. 주인의 육욕을 만족시켜줄 성노. 오직 그것뿐이었다. 경매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곧 여기저기서 패널을 치켜들며 입찰가를 외쳐댔다.
"여기, 이천."
"나는 이천 이백!"
"이천 오백 내겠소."
외모만 보자면 정말 천사같은 아이들인데 남매가 세트로 팔려가서 누군가의 변태성욕이나 만족시켜줘야 한다니. 처지가 참 딱하고 불쌍하긴 했지만... 진석은 이들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한참간의 치열한 입찰 경쟁 끝에 남매는 결국 시커먼 코트를 걸친 어느 장년의 신사에게 8천 골드에 낙찰되었다. 경매사의 카운트 뒤 낙찰이 확정되자 경매장내엔 그를 향한 가벼운 박수가 울려퍼졌다. 진석도 못이기는척 두어번 손뼉을 쳤다.
'밤일 이외엔 아무 가치도 없는 어린 아이들인데 팔천씩이나 쓰다니. 아무리 블랙 옥션이라도 이거 처음부터 꽤 센걸? 내가 견족 바울의 노예를 샀을땐 시작가가 천이었고 고작 삼천에 낙찰받았었는데. 거참.'
블랙 옥션에서 매매되는 노예들의 평단가는 아무래도 도시마다 차이가 있는편이다. 갈론은 다른 나라의 수도에 비해 비록 규모는 작지만 엠퍼슨 메디컬 아카데미나 헤세스 약품 통상의 본사가 위치한 곳이라 그런지 물가가 꽤 센편이라 노예들의 몸값도 한참 뛰는 모양이었다. 이래서야 맘에 드는 노예가 나왔을때 어느정도의 지출은 각오해 둬야 할 것 같았다. 페야족 아이들을 낙찰받은 신사는 직원의 안내를 받아 경매장을 빠져나갔고 단상엔 두번째의 노예가 올라왔다. 풍성하고 탐스러운 갈색 머리칼을 등허리까지 내려오도록 길게 기른 대단한 미소녀였다. 알몸에 캐미솔 같은것 하나만 걸치고 있었는데 재질이 뭔진 몰라도 아주 얇아 속이 다 비쳐보였다. 저래서야 안 입은것만 못하다. 아니, 안이 훤히 다 비쳐보이는게 도리어 더 선정적으로 느껴졌달까.
"최근 몰락한 귀족 집안의 여식입니다. 올해로 16세로, 깨끗한 몸입니다. 시작가는 천오백입니다."
문득 알 유세프의 눈에 들기 위해 아라파에 무희로 위장하고 있을때가 떠올랐다. 그때 진석이 댄 거짓 프로필과 딱 똑같은 처지의 아가씨였다. 차이가 있다면 그녀의 손과 발엔 구속구가 채워져 있다는 걸까. 게다가 절망과 수심 가득한 표정으로 무기력하게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그럼에도 그 미모는 전혀 퇴색하지 않았다. 페야족 아이들은 아직 어리니 자신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무슨 반항을 할지 몰라 마법으로 제압해둔 것 같았지만 이쪽은 본인이 처한 입장을 잘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긴, 갓 노예가 된 자의 이런 절망 어린 모습을 지켜보는것도 손님들 입장에선 그야말로 깨알같은 재미나 볼거리라고 할까. 악취미라면 참 지독한 악취미지만 원래 인간이란 남의 불행도 손쉽게 유흥의 대상으로 여기는 법이다.
'저만한 외모면 매력이 최소 40 초반은 넘기는것 같은데... 소, 솔직히 끌리긴 하지만 역시 패스.'
결국 그 아가씨는 육천 팔백골드라는 가격으로 비대한 몸집의 젊은 청년에게 낙찰되었다. 자신이 낙찰받은 노예를 바라보며 연신 히죽거리고 혀를 날름대는 모습을 보니 그녀가 앞으로 겪을 일이 심히 안쓰러워졌다. 두 건의 경매를 지켜본 진석은 여기 갈론의 블랙 옥션에 대해 대충 감을 잡았다.
'두 건만 봤지만 뭐 대충 짐작이 가는군. 여기 평단가는 6~8천 정도인가? 이만하면 예산이 달리거나 하진 않겠군.'
뒤이어 세번째, 네번째까지도 별 다른 전투 능력을 갖추지 않은 평범한 성노만이 나왔기에 패스한 진석. 그리고 다섯번째는 드디어 기다리던 첫 전투노예가 단상에 올랐다. 거인, 코디악 족의 성인 남성이었다. 제멋대로 자란 장발 머리칼 속에 반쯤 가려진 눈동자가 형형히 빛났다. 터질듯한 근육과 몸 여기저기 새겨진 상처만 봐도 분명 강력한 전사라는건 확실했다.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그의 기도가 생생히 느껴졌으니까. 신장이 3미터에 달하는 그가 한 걸음을 옮길때마다 단상에선 쿠웅 쿠웅 바닥이 울리는 소리가 났다. 손과 목엔 각기 철제 구속구가 채워져 있었고, 그 구속구는 서로 굵은 쇠사슬로 연결되어 있어 행동을 제약했다. 눈빛이나 행동거지를 보면 딱히 마법으로 제압해둔 것 같지 않았는데 태도는 의외로 고분고분 했다.
'허어. 딱히 정신계열 마법을 걸어둔 것 같지도 않은데 거인족 전사가 저리 얌전하다니, 뭔가 빼도박도 못할 약점이라도 잡혀서 팔려온걸까.'
사회자는 유려한 손짓으로 거인족 전사를 가리키며 그를 소개했다.
"다들 잘 아실 거인족의 강력한 전사입니다. 참고로 그가 마지막으로 싸웠을땐 맨손으로 장정 열다섯을 때려 죽였습니다. 시작가는 사천입니다."
사천이라, 과연 시작가가 쎄다. 시작가가 좀 높자 사람들 사이에선 웅성임이 일었으나 곧 하나둘 손을 드는 사람들이 나왔다. 하지만 진석은 입찰에 참가하지 않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거인족의 숙련된 전사라면 더할나위 없는 전력이긴 한데...'
문제는 거인족 노예를 관리하려면 보통 귀찮은게 아니라는거다. 우선 먹고 입는 문제만 해도 보통 노예보다 훨씬 돈이 많이 들것이다. 먹기도 많이 먹고 옷도 일일이 주문제작 해줘야 할테니. 게다가 이동할때도 문제. 저런 체구로는 평범한 말도 못타니 반드시 왜건이나 마차를 타야할텐데 덩치가 크니 그것 역시 이래저래 불편할게 뻔했다.
'고정적으로 한 곳에서 거주하면서 호위나 경비로 쓰는거라면 딱이겠지만.'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움직여야 할 진석으로선 이래저래 불편함만이 가중될 상대다. 문득 비더하임의 스마이쉬산 동굴에서 봤던 수많은 몬스터의 시체가 떠올랐다. 정식 전사도 아닌 대장장이 셋이 그 정도였는데... 한 눈에 보더라도 제대로 된 전사라면 어떨까? 거인족의 전투능력이 탐나긴 했지만 결국 이번에도 입찰을 하지 않기로 했다. 뭐 아직 아홉이나 더 남았으니 전투노예가 하나둘 정도는 더 나올거라는 생각이었다. 결국 이 거인족 전사는 구천 이백 골드에 오페라 가면을 쓴 어느 젊은 여성에게 낙찰되었다. 차림새나 태도를 살펴보니 그녀는 아마도 여느 귀족가의 여성같았다.
'...설마 성노로 쓰려는건 아니겠지.'
애시당초 거시기 사이즈가... 맞나? 거의 사람 팔뚝만할텐데. 아니 또 모르지. 확장이라는 계열도 얼마든지 있으니까... 가 아니지. 머리를 휘휘 저어 쓸데없는 생각을 쫓아내는 진석. 거인족 전사의 뒤를 이어 여섯번째와 일곱번째 경매엔 연달아 남자 노예들만 나왔기에 둘 다 패스했다. 각기 대단한 미소년과, 여자로 착각할 정도로 곱상한 미남이었지만 어차피 남자놈들 내가 알게 뭐냐 하고 흘려넘긴 진석. 헌데 두 쪽 다 여자들만 입찰할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적극적으로 참가하는 남자들도 많았다. 알 유세피나의 충실한 수족인 나지르와 마찬가지로 동성애자라도 되는걸까. 아니면 맛만 좋으면 성별따위 상관없다는 걸까. 어느쪽이건 별로 깊게 생각하고 싶진 않았다. 경매사는 일곱번째 경매가 끝나고 단상 한 가운데로 걸어나오며 회원들을 향해 말했다.
"벌써 준비된 품목의 절반이 팔려나갔군요. 그럼 예정대로 잠시 휴장하고 계속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곤 뒤로 돌아 장막 너머로 사라지는 그. 경매사가 안으로 들어가자 기다렸다는 듯 장막 안쪽에서 입었다기 보다는 벗었다에 가까운 미남미녀 노예들 십수명이 줄을 지어 나와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간단한 공연을 선보였다. 하지만 공연을 보는 사람은 별로 없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금까지 경매에 나온 노예에 대해 서로 이야기를 나누거나 흡연이나 용변을 위해 밖에 다녀오고 있었다. 진석도 공연쪽엔 별 관심이 없었지만 딱히 할것도 없었기에 얌전히 자리에 앉아 춤을 추는 여자 노예들의 몸매 감상이나 했다. 그렇게 한 10분쯤 지났을까? 공연이 끝나고 자리가 정리된 후 경매사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그럼 경매를 재개하겠습니다."
여덟번째로 나온 노예는 조인족 후건의 수컷이었다. 새의 머리와 두 쌍의 크고 작은 날개를 가진 인간형 수인족. 팔과 다리, 머리와 날개, 그야말로 전신에 엄중한 구속구가 주렁주렁 채워져 있었는데 눈이 가려져 있는터라 진행을 돕는 직원들의 손에 질질 이끌려 나왔다.
'허, 후건은 꽤나 희귀 종족일텐데? 나도 설명으로만 봤었는데 실물은 여기서 처음보네.'
진석은 후건족이 아주 높은 고산지대에 서식한다는 것 정도만 알지 그외에 아는것은 전혀 없었다. 게임을 오래 했다지만 내용이 워낙 방대한터라 모든걸 다 파악하고 있는건 아니었으니까. 경매사는 약간 과장된 몸짓으로 후건을 소개하며 말했다.
"조인족 후건입니다. 아시다시피 입수하기 매우 어려운 희귀 상품이죠. 시작가는 오천 골드 입니다."
이거이거, 여덟번짼데 벌써 시작가 오천짜리가 나오다니. 경매란 기본적으로 뒤로 갈수록 비싼 상품이 나오는 법인데 벌써 이러면 앞으로 얼마나 더 비싼걸 내놓겠다는거야? 꽤나 높은 액수에 아까 거인족 전사가 나왔을때보다 더 큰 웅성거림이 들렸지만 이내 입찰하는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저거 뭐 어디다 써먹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잘 모르는 종족이니 패스해두자.'
그리고 진석은 조인족 후건의 외양이 별로 맘에 안들었다. 새대가리에 인간몸이라니? 게다가 손은 인간의 것과 흡사했지만 두 다리는 흡사 새의 다리와 같은 모양이었다. 뭐랄까, 하피 비스무리한 생물체랄까. 확실히 사람보다는 몬스터에 가깝다는 느낌이 컸다. 조인족은 결국 시작가의 딱 두 배인 일만 골드에 하얀 연미복 차림의 노인에게 낙찰되었다. 현재까진 오늘 최고가. 장내엔 제법 큰 박수가 울려퍼졌다. 그 노인의 얼굴엔 흥미롭다는 표정이 그득한게, 뭔가 연구나 조사 목적으로 구입한게 아닌가 싶었다.
'해부라도 하려는건 아니겠지? 설마 일만 골드나 주고 산 희귀 종족의 노예의 배를 가를리가... 에이, 하긴 내가 알게 뭐냐. 배를 가르건 탕을 끓여먹건.'
후건이 직원들의 손에 이끌려 들어가고 나자, 경매사는 안면에 웃음을 띄운채 경매를 계속해서 진행했다. 뒤이어 아홉번째와 열번째 노예가 나왔지만 역시 진석이 관심을 가질 대상은 아니었기에 그냥 넘겼다. 그런데 이제 남은건 겨우 넷인데 전투노예로 쓸만한건 어째 통 나오지 않았다. 뭐 이런날도 있는거긴 하다만 진석은 좀 초조해졌다. 그냥 거인족 전사를 구입하는게 나을뻔 했나 하고 생각할 즈음 경매사의 목소리가 회장안을 울렸다.
"이번에도 또 하나 희귀종족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수인종에 해당하는 묘인족 펠레스 입니다."
경매사가 손을 뻗어 장막 안쪽을 가리키자 아까 후건만큼이나 많은 구속구를 단 누군가가 안쪽에서부터 끌려나왔다. 입에 채워진 재갈과 목에 걸린 사슬 목걸이. 팔엔 무거운 금속 수갑틀이 채워져 있었고 손목 위쪽으론 검은 가죽 자루까지 씌워져 있었다. 다리에도 사슬이 채워져 있어 움직때마다 찰랑거리는 소리가 울렸는데 그 걸음걸이가 자뭇 신경질 적이었다. 재갈 때문에 제대로 다물어지지 않는 입술 사이로 연신 씩씩거리는 성난소리가 흘러나왔다.
"크흐... 그으읏."
황갈색의 머리칼을 가진, 그야말로 고양이 상을 한 여자였다. 호박색을 띤 두 눈은 유달리 커다란데다가 턱이 갸름한게 굉장히 귀여운 인상이었다. 나이는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쯤 되어 보인달까? 거기다 머리위엔 쫑긋한 고양이 귀 한 쌍이 달려있었고 다리 사이로는 1미터쯤 되는 길이의 꼬리가 달려있는게 보였다. 하지만 꼬리의 털이 바짝 곤두서있는게 굉장히 화가 난 모양이었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다 찢어죽이겠다는 듯 살기를 뿌리며 이따금 몸을 버둥거렸지만 움직임을 제약하는 구속구와 옆에서 제지하는 직원들의 힘에 눌려 꼼짝 못하고 구경거리가 되었다.
"역시 희귀 상품입니다. 귀나 꼬리를 빼면 인간과 별 다를바 없어보이지만 신체 능력이 흡사 야생 동물이나 다름없이 대단하며, 역시 깨끗한 상태입니다. 시작가는 오천입니다."
묘인족이라. 아까 조인족 후건처럼 설명 정도로만 알고 있었지 실제로 보는건 처음이었다. 특유의 귀여운 외모때문에 제법 인기가 있는 편이었으나 등장 개체수가 적은 소수 부족이라 이런 종족이 있다는걸 아예 모르는 유저도 많았다. 정보 게시판에서 묘인족 탐색법, 사냥법 및 잡아서 길들이는 방법 따위의 내용을 연재한 유저의 글을 얼핏 본 기억이 있었다. 물론 별 관심은 없어서 제대로 읽진 않고 그냥 글 제목이나 본 정도였지만.
'고양이라 이건가. 실제로도 한 번 길러보고 싶긴 했는데... 어디 게임에서라도 길러볼까.'
게다가 분노에 차서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씩씩거리고 있어서 그렇지 생긴건 정말 귀엽다. 꼼지락거리고 움직이는 귀나 꼬리 역시 고양이를 의인화 했다는 느낌이 팍팍 들었다. 전투에 도움이 될지 어떨진 모르겠다만 신체 능력이 야생 동물 수준이라면 뭐 어떻게든 써먹을 수 있겠지? 진석이 가장 먼저 패널을 들었다.
"여기 오천."
"네 84번 손님, 오천 부르셨습니다."
진석을 지목하며 가격을 말하는 경매사. 하지만 진석이 첫 입찰을 시작하자 주변에서도 하나둘 패널이 들어올려지며 가격이 점차로 뛰기 시작했다. 잠시 기다리고 있자니 가격은 아까 순식간에 만 단위 까지 올라갔다. 가격이 만 단위를 넘어가자 입찰수는 확 줄어 세명만이 남아 서로 일이백 단위로 가격을 높이며 경쟁했다. 결국 일만 이천까지 올라간 입찰가. 마지막으로 가격을 제시한 음침한 인상의 남자는 자신의 제시가를 따라올 자가 없어보이자 히죽 승리의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리고 그제서야 패널을 들어오리는 진석.
"만 삼천."
"만 삼천, 만 삼천 골드 나왔습니다!"
입찰이 열기를 띄자 덩달아 목소리를 높이며 살짝 흥분한 어조로 외치는 경매사. 하지만 진석의 속은 별로 좋지 않았다.
'우씨... 만 삼천 골드면 지금 엘리야가 사는 집 정도는 열채도 더 사겠다. 이거 너무 비싼데?'
경쟁 상대를 다 물리쳤다고 생각하던 음침한 인상의 남자는, 뜬금없이 진석이 마지막에 입찰경쟁에 참가하자 눈가를 일그러트리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리고 부들거리는 손을 들어 새로운 가격을 제시했다.
"마... 만 삼천 오백."
"만 삼천 오백! 대단하군요. 더 없으십니까?"
아무래도 한계 예산이 간당간당한 모양인데 무리하기는. 진석은 쯧쯧 혀를 차며 패널을 들어보였다.
"만 사천."
진석이 더 높은 가격을 부르자 앞쪽의 의자 등받이를 쿵 내려치는 음침한 인상의 남자. 하지만 분해할뿐 더 이상의 예산은 없었는지 추가 입찰은 포기했다.
"자 만 사천. 만 사천. 더 없으십니까? 축하드립니다. 84번 손님께 낙찰되었습니다."
만골드에 이어 오늘 최고가 갱신. 진석에게도 박수갈채가 쏟아졌지만 정작 본인은 그냥 시큰둥 했다.
'박수는 개뿔. 너무 낭비가 크다고.'
이거 설마 단순히 도시 물가 뿐만 아니라 내 소지금에 맞춰 가격대가 조정되는거 아냐? 그런 의심을 품는 진석. 사실 진석의 생각은 정확했다. 물론 도시별 물가가 기준이 되긴 하지만 플레이어의 재산에 따라 옥션의 기준가나 입찰에 참여하는 손님들의 예산 역시 유동적으로 바뀌었으니까. 잠시 기다리자 검은 정장 차림의 직원이 다가와 진석에게 목소리를 낮추고 작게 속삭여왔다.
"낙찰 축하드립니다. 물건을 확인하러 가시겠습니까?"
보통 이렇게 큰 돈을 쓰고도 경매에 계속 참가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대부분은 자신이 낙찰받은 노예를 빨리 확인하고 싶어하는 법이기에, 직원들은 그 안내를 담당했다. 하지만 진석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마지막까지 경매를 보고 싶어서."
"알겠습니다. 그럼 경매가 끝난 후 다시 모시러 오겠습니다."
정중히 고개를 숙여보이고 물러가는 직원. 경매장 내의 사람들은 진석이 이미 노예를 하나 낙찰을 받고도 퇴장하지 않고 남아있는 모습에 술렁이며 놀라워 하는것 같았다. 언뜻언뜻 귓가에 스치는 말소리 중엔 '젊은 녀석이 돈이 얼마나 많길래', '대단한데', '무리하는거 아닐까', '그냥 구경이나 계속 하는거겠지' 따위의 이야기가 섞여 들려왔다. 진석은 턱하니 다리를 꼬고 거만한 자세로 의자에 몸을 묻었다. 경매사도 진석이 퇴장하지 않고 여전히 경매를 지켜보는 모습에 이쪽을 바라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슬쩍 고개를 숙여보였다.
'내 돈 내가 쓰겠다는데 뭔 상관이야 이 변태놈들아. 그리고 저건 왜 쪼개는거야 징그럽게.'
경매는 계속 진행되었다. 열 두번째와 열 세번째도 이종족의 아름다운 성노들이 나왔고 둘 다 만골드를 훌쩍 넘겨서야 입찰되었지만, 결국 진석이 낸 만 사천을 넘어서진 않았다. 그리고 드디어 마지막. 오늘의 마지막 상품인 열 네번째의 노예가 단상에 끌려나왔다. 장미색의 화려한 이브닝 드레스를 걸친 젊은 여성. 잡티 하나 없는 하얀피부를 강조하는듯한 암청색 머리칼과 그림자처럼 새카만 눈동자. 그리고 그와 대비되는듯한 붉으스름 하고 윤기가 도는 입술. 아름답긴 하지만 왠지 모르게 요사스럽다는 느낌이 드는 외모였다. 그런데 시선이 멍하니 정면만을 응시하는 폼이 그녀 역시 뭔가의 정신계열 마법으로 제압당한게 확실해 보였다. 그리고 그녀의 관자놀이 조금 위쪽, 머리카락 사이로는 진회색의 뿔 한쌍이 솟아있었다. 한 뼘 정도의 길이. 둥글게 굽은데다 자잘한 마디가 가득한게 흡사 양 뿔을 연상시키는 모양새였다.
"오늘의 마지막 물건. 대륙 어디에서도 쉽게 보실 수 없는 상품임을 자부합니다. 마족의 처녀입니다."
마족. 딱히 한 종족이 아니라 다양한 종족을 통칭하는 의미였다. 뱀파이어 같은 언데드나 서큐버스 같은 악마도 넓은 의미에선 다 여기에 포함되었다. 하지만 지금 단상에 올라온 마족의 아가씨는 건축물 형 던전 깊은곳에서나 볼 수 있는 어둠의 주민임이 분명했다. 머리에 난 뿔이 바로 그 증거였다.
'인간이 땅 위에서 해를 쬐고 사는 빛의 종족이라면 이들 마족은 딱 그와 반대로 지하나 던전의 심부같은 어둠속에서 거주한달까. 하지만 마족은 능력치의 편차가 심할텐데...'
이따금 강력한 마족은 마왕이라 불릴 정도로 강한 힘을 지니고 몬스터들을 통솔하며 던전을 지배하지만, 그것도 마족 나름이었다. 달리 큰 능력을 지니지 않은 평범한 마족도 많았다. 단상위의 이 마족 아가씨는 과연 어떤 능력을 지니고 있는건지 알 수 없었다. 가까이 접근하면 플레이어의 권한으로 스테이터스를 확인해서 능력치를 볼 수 있을테지만... 경매 진행중에 손님이 단상에 오르는 행위는 당연히 금지되어 있었다.
'마지막에 와서 찍기인가. 뭐 여리여리한게 육체적 능력이 강할 것 같진 않고, 뭔가 능력이 있다면 역시 마법쪽일까?'
진석이 생각에 잠겨있는동안 손님들 역시 희귀한 노예의 등장에 꽤나 술렁거렸다. 경매사는 아름다운 마족의 아가씨를 가리키며 딱부러지게 말했다.
"시작가는 일만입니다."
허... 진짜 비싸다. 입찰 할 사람이 있을까? 하지만 진석의 생각과는 달리 여기저기서 서로서로 입찰을 해대기 시작했다. 경매는 꽤 치열하게 벌어져 가격은 순식간에 일만 칠천까지 올라갔다. 진석이 언제 끼어들까 하고 눈치를 보는데 맨 뒤쪽좌석에 앉아있던 탐욕스런 인상의 뚱뚱한 노인이 조용히 패널을 들어보였다.
"이만."
경매장 내엔 순간 술렁임이 감돌았다. 이만 골드. 참 터무니 없는 액수다. 아무리 희귀한 노예라지만 결국은 피와 살로 된 몸뚱이 하나. 그것에 이만한 가격이 합당한 것인가? 과연 압도적인 액수의 제시에 다들 웅성거리며 떠들기만 했지 아무도 추가 입찰을 하지 못했다. 낙찰이 거의 확정지어지는 분위기일때, 진석이 손을 들어보였다. 운에 맡기고 한 번 도박을 해볼참이었다.
"이만 이천."
실내엔 다시 한 번 여기저기서 놀라움의 탄식이 흘러나왔다. 아까 만 사천골드에 한 번 낙찰을 받았던 사내 아닌가? 그럼에도 또 다시 이런 최고가를 제시하다니. 만 사천에 이만 이천을 더하면 자그마치 삼만 육천이다. 터무니 없는 금액에 불신의 시선을 보내는 자들도 있었지만 이곳은 입회비만 해도 천골드를 내야 하는 블랙 옥션. 경매가로 장난질을 치는 자가 발을 들일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경매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진석의 입찰을 받아들였다.
"이만 이천 나왔습니다. 이만 이천. 이만 이천. 더 이상 없으시면..."
경매사가 경매를 마무리 지어가자 아까 그 탐욕스런 낯의 뚱뚱한 노인은 끄으응 하고 한참 고심하더니 재차 패널을 들어보였다.
"여기, 이만... 삼천!"
"이만 삼천! 대단합니다. 오늘 이 경매장의 역사가 새로 쓰이는군요."
이만 삼천이라. 진석이 낼 수 있는건 이만 사천이었다. 저 노인네의 한계예산이 어디까지인지는 몰라도 진석도 거의 끝에 다다라 있었다.
'에이, 괜히 질렀나? 하나 샀으니 이건 역시 포기하는게... 너무 비싸잖아.'
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왠지 모르게 진석을 기대하는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여기서 끝낼거야? 이게 전부냐? 하는 듯한 의미가 담긴 눈빛들. 심지어 경매사 마저도 묘한 시선으로 진석을 바라보고 있었다.
'뭐... 뭐야 이 인간들.'
에이씨, 그냥 낙찰 받은 묘인족이나 데리고 돌아갈걸 괜히 남아있었나. 하지만... 에라 모르겠다! 좋아. 기왕 시작한거 어디 갈때까지 가보자. 어차피 이 돈도 피터슨을 죽이고 빼앗았던 것. 돈은 뭘 하건간에 그냥 또 벌면 그만이다. 현실의 돈도 아니고 게임속의 재물따윌 아까워 할 필요 없지. 물론 이렇게까지 하고도 저 마족 처녀에게 별다른 능력이 없는거라면 정말 큰 손해이긴 하지만, 일단 지금은 경매에서 이겨보고 싶다는 생각이 더 컸다. 진석은 천천히 패널을 들어보였다.
"이만 사천."
이제 합이 삼만 팔천. 딱 진석이 보유한 전재산이었다.
"오오오!"
주변에서 터지는 탄성들. 점점 올라가는 가격에 경매사는 신이 난 표정이었고 그와 반대되듯 뚱뚱한 노인의 얼굴은 팍 썩어들어갔다. 이제 공은 노인쪽에게 넘어가 있었다. 그는 끄응 하고 머리칼을 쥐어뜯으며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결국 경매사가 진석에게 낙찰선언을 하기 직전 다시 한 번 손을 들었다.
"이... 이만 오천!"
켁. 이번엔 진석의 표정이 썩어들어갔다. 이 미친 노인네. 아직도 여력이 남아있었단 말인가. 뭐 천골드만 더 부르면 게임이 끝날것 같긴 하지만 진석도 이미 예산이 한계에 달한 상태였다.
'아까 묘인족을 안 샀으면 됐겠지만...'
이제와서 무를수도 없고. 진석이 우물쭈물해 하자 한참 열기가 올라있던 회장내의 분위기도 슬슬 식어가는게 느껴졌다. 뭐랄까, 그래 결국 여기까지냐~ 하는 느낌이랄까? 진석이 이만 오천 이상의 액수를 부르지 못하고 있자 뚱뚱한 노인은 이쪽을 바라보며 꼴좋다는듯 갸하하 하고 웃어보였다. 게다가 아까 진석에게 묘인족의 경매에서 졌던 음침한 인상의 사내 역시 진석을 쳐다보곤 히죽거리며 비웃고 있었다. 자신을 비웃는 그들의 상판떼기를 보자 진석의 머리속엔 순간 뭔가가 뚝 하고 끊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 놈들이 날 비웃어?
"이만 오천. 더 이상 없으시면 낙찰을 마무리 짓..."
경매가 끝나려는 순간, 진석은 패널을 번쩍 들어보이며 외쳤다.
"삼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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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틀린 맞춤법은 몇번이고 다시 틀리는군요. 한참 집중해서 글을 쓰다보면 무의식중에 또 써버리는 모양입니다. OT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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