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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베라 - 부회의 방랑자-105화 (105/155)

< --   - 9.   -- >         * 105화 *

돈지랄이다. 그 외에 무슨 표현이 어울릴까. 정말이지 시원한 돈지랄을 했다.

'으으, 내가 정신이 나갔지.'

원래 노예 경매라는건 플레이어의 소지금을 소모하기 위해 만든 컨텐츠인건 맞다. 정말 어마어마한 자금을 이토록 허무하게 써버리는것이 노예 경매다. 어떤 형태로건 게임이 중반부를 넘고 후반부에 달하면 플레이어의 소지금은 대부분 크게 누적되기 마련. 노예 경매는 플레이어의 자금을 소진시키며 게임 플레이의 경향을 다각화 시키기 위해 정말 대놓고 만들어진 부분이었다.

군주 플레이의 경우엔 나랏돈을 자기 돈처럼 쓸 수 있다지만 나라를 제대로 운영하기 위해 돈이 필요한 곳은 얼마든지 넘쳐났다. 그런데 군주란 기본적으로 아쉬울게 없는 입장이고, 말 한두마디면 대부분의 것은 손에 넣을 수 있으므로 일부러 사치라도 부리지 않는 이상 도리어 사적인곳엔 돈을 덜 쓰게 되어 있었다. 진석의 경우엔 작정하고 사치를 누렸던 몇 번 이외엔 남는 자금으로 착실히 정병을 양성하고 지역의 개발을 시행하거나 기술의 연구에 투자했었다.

장수 플레이를 했을때는 비슷하긴 했지만 조금 달랐다. 게임이 진행되며 공을 세우고 지위가 높아질수록 영지와 재산은 늘어나기 마련. 허나 영지 발전과 투자라는건 생각보다 간단하진 않았다. 원래 발전이란게 넓은 지역과 사회 전 분야에서 골고루 시행되어야 의미가 있는거지 자기 마을 하나, 도시 하나에만 돈을 들이붓는다고 끝나는건 아니었다. 물론 막대한 현금이 돌면 단기적인 효과야 거둘 수 있을테지만 장기적인 관점에선 썩 효율이 좋다고 할 순 없었다.

예를들어 광산을 뚫는다고 해도 현물이나 마찬가지인 금이나 은이라도 파내는게 아닌 이상 보통의 광물은 고정적인 판매처나 사용처가 없으면 그저 재고. 게다가 광물의 수요가 갑자기 늘지도 않을텐데 공급만 늘어봐야 되려 그 시세만 떨어질터. 도시의 안팎을 정비해 화려하게 꾸민다고 해도 그만큼 물가나 세금 역시 자연히 오를테니 인접한 지역의 주민들의 경제력 차이가 크다면 이쪽으로의 이주민이나 관광객이 단번에 늘리도 없었다. 이러다보니 장수플레이는 군주플레이만큼 대국적으로 투자한다거나 공공을 위해 사용하는 일은 의외로 적었다. 그래서 남는돈은 기껏해야 사병을 육성하거나 유흥따위로 쓸데없는곳에 소모했었다.

'그리고 사람이란게 먹고 살만하면 잉여 자금을 자기 좋을데다 낭비하게 되어있거든. 아예 왕같은 절대자라면 모를까, 어중간한 귀족층이나 부르주아들은 그런 경향이 더 심해서.'

물론 학교, 병원, 고아원 등에 기부하거나 예술가나 기술자에게 후원하며 돈을 상대적으로 가치있게 쓸수도 있었다. 하지만 부를 쥔 자들의 대다수는 온갖 사치와 향락을 즐기고 이런식으로 노예 따윌 사며 돈을 낭비하기 마련이었다. 공공에 투자해 이름도 모를 시민들이 누릴 편의나 의미도 잘 예술과 기술따위에 대한 후원보다는 그저 자신의 안락과 말초적인 쾌감이 더 중요했으니까.

'...아무튼 다음부턴 이런짓은 하지 말아야지. 어휴.'

엘리야의 집 안. 여전히 너저분한 소파에 진석과 두 명의 인물이 더 앉아 있었다. 블랙 옥션에서 총합 사만 사천 골드를 주고 사온 두 노예였다. 삼만 골드라는 금액은 갈론의 블랙 옥션 역사상 단일 품목으로는 가장 큰 액수라고 했다. 종전까지의 최고기록은 이만 삼천 골드였다나.

'왼쪽이 만 사천, 오른쪽은 삼만짜리인가.'

묘인족과 마족의 젊은 두 여성. 둘은 경매장에서 처음 봤을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애정이 듬뿍 담긴 시선을 한채 진석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원래 진석이 가지고 있던 금액은 총 삼만 팔천. 두번째의 마족 처녀를 구입하기엔 돈이 달렸음에도 경쟁자였던 뚱뚱한 노인의 기를 꺾기 위해 일부러 큰 액수를 불렀었다. 압도적인 찬사를 받으며 경매는 끝이 났지만 지불할 금액이 모자랐던건 당연했다.

'결국 미리안에게 손을 벌렸군. 으이구 한심.'

시간을 조금 되돌려 몇시간 전. 진석은 우선 가지고 있던 총액인 삼만 팔천 골드를 지불하고, 경매장 측엔 나머지 금액을 가져올테니 잠시 기다려달라는 이야기를 전했다. 한 두푼짜리 거래도 아니니 경매장에선 흔쾌히 응했다. 그리고 야밤에 말을 타고 갈론을 벗어나 교단까지 달려갔다. 서류더미에 파묻혀 일을 하는 미리안에게 찾아가 한심하게도 돈을 요구했다.

"러셀 오빠에게라면 돈 따위 얼마든지 내어드릴 수 있지만... 사용처 정도는 물어봐도 되겠죠? 어디에 쓰시려구요?"

"그게... 노, 노예를 좀 사는데 돈이 모자라서."

한심하게 쳐다보지나 않을까 걱정했는데 미리안은 되려 푸근하게 웃으며 두 말 않고 뭔가의 서류를 한 장 작성해 건네주었다. 헤세스 약품 통상에 가져가면 즉시 일만 골드의 현금을 건네 받을 수 있다고 했다. 그녀는 더 필요하냐고 물었지만 진석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차라리 대놓고 비웃거나 한심하게 여기는게 낫지... 마치 어린애가 자기 갖고 싶은 물건 때문에 서투른 거짓말로 돈 타내는걸 다 알면서도 속아 넘어가주는 엄마같은 눈빛이라니. 그, 그런 따스한 시선으로 쳐다보니 더 부끄럽잖아! 크으윽!'

더군다나 미리안의 외모때문에 열 살 짜리 어린애한테 용돈을 타 쓰고 있는 느낌이라 두 배로 부끄러웠다. 하지만 자신이 당장 미리안 이외에 그 어디서 육천골드라는 커다란 금액을 구하겠는가. 미리안은 허둥지둥 방을 빠져나가는 진석의 등 뒤로 한마디 던져왔다.

"너무 깊게 생각하진 마세요. 지금까지 해주신 일에 비하면 이런건 정말 사소한 거니까. 오히려 저는 기분이 좋은걸요. 오빠가 제게 처음으로 부탁을 해주셔서, 후후."

그 쓸데없이 따스한 배려가 이쪽엔 되려 부담스럽게 느껴진다고! 하지만 진석은 아무 대꾸도 못하고 사원을 빠져나왔다.

'아무래도 이번 플레이는 미리안한테 꽉 붙잡혀 휘둘릴 모양인가보다. 에휴.'

그리고 사원에서 내려와 돈을 받은 다음, 다시 블랙 옥션으로 향했다. 진석이 돈을 가지러 다녀오는 시간동안 다른 손님들은 이미 다 빠져나갔기에 넓은 저택은 꽤나 썰렁했다. 남아 있는것은 저택의 내외부를 지키는 경비인력과 진석을 기다리던 몇몇 직원뿐이었다. 잔금을 치른 다음 진석은 저택 안쪽 깊은곳으로 안내되었다. 노예들의 복종마법에 대해 결정할 차례였다.

복종마법은 여러가지로 복잡한 부분이 있었다. 우선 옥션에서 노예들에게 거는 복종 마법을 쓰기 위해선 세가지의 준비가 필요했다. 첫번째는 고도로 설계된 마법진. 두번째는 마법을 사용하기 위한 재료. 세번째가 마법사였다. 이 셋 중 어느 하나만 빠져도 복종마법은 사용할 수 없었고, 마법진의 설계와 마법사는 옥션 측만이 독점을 하는 기업비밀이었기에 외부 그 어디에서도 이것을 악용할 순 없었다... 라는 설정이 있었다. 뭐, 게임의 밸런스를 위한 조치랄까. 하긴. 이걸 강제로 탈취해서 마구 사용할 수 있다면 게임이야 편해지겠지만 여러가지로 엉망진창이 되겠지. 하지만 어떻게든 옥션측의 복종마법 시스템을 탈취해보려고 시도한 플레이어들이 없었던건 아니지만 성공했다는 사례는 못봤다. 일례로 군주 상태에서 내놓으라고 압박하면 아예 그 나라에서 모든 옥션이 철수해버린다거나 하는식으로 이쪽도 꽤나 강경한 모양이니.

좌우지간 복종마법에서 필요한 세가지 요소 중 첫번째인 마법진은 보통 옥션측이 보유한 구조물을 이용해 그 내부에 만들었다. 건물 전체에 귀속되는 형태의 특수마법진이라, 이 마법진이라는 고정적인 장소가 아니고서야 마법의 시전자체가 불가능했다. 그리고 두번째는 재료. 이 재료로는 보통 두 가지가 이용되었다. 마정석이나 인간의 영혼. 인간의 영혼은 말 그대로 산사람을 말했고, 마정석이란 산성화산암에서 산출된 특수한 고온형 석영을 의미했다. 자연의 마력이 담겨 있으나 상온 상압하에서 방치시 마력은 산화하고 석영 역시 저온형 석영으로 변이하므로 산출 후 빠른 마법적 처리가 필요한 특수 광물이었다. 군주 플레이 시 마법 기술을 연구해 최종 테크 단계까지 올리면 마정석을 이용한 사격형 무기나 대포와 같은 포격형 무기인 마도포를 제조할 수도 있었다. 물론 대륙을 거의 통일할때쯤이나 되어서야 가능한 초고도의 테크고, 제조 비용도 엄청나서 쉽게 양산 할 수 있는 무기는 아니었다. 그리고 마지막 마법사들 역시 철저히 옥션측에 속한 비전마법사들이었다.

그리고 복종마법 역시 셋으로 나눌 수 있었다. 첫번째는 충성의 마법. 이것은 노예에게 거는 복종마법 중 가장 온건한 것으로 주인을 향한 절대적인 충성심을 강제로 이끌어내는 마법이었다. 재료로 마정석만이 필요했는데 정신계열 마법임에도 부작용을 일으킬 확률이 없는 안전한 마법이었지만 개체에 따라선 시일이 오래 경과할 경우 마법이 자연해제될 위험성도 있어 1년에 한 번 가량은 필수적으로 체크를 받거나 혹은 마법 그 자체를 갱신해야 했다.

두번째는 속박의 마법. 역시 마정석만을 소모하며 어떤 매개물을 대상으로 해서 그 대상에 노예를 종속시키는 마법이었다. 예를 들어 어느 반지에 속박의 마법을 걸고 거기에 노예를 연결하면, 그 반지를 끼는 자가 해당 노예를 지배 할 수 있는 방식이었다. 노예를 자신이 부리는게 아닌 선물용, 거래용으로 구입할때 속박의 마법을 사용하곤 했다. 이 역시 안전한 편이고 충성의 마법처럼 해제될 일은 없었지만, 매개물이 분실될시엔 노예를 통제할 방법이 없는데다 혹 매개물이 파괴될시엔 마법 역시 깨진다는게 문제였다.

마지막 세번째는 종속의 마법. 이건 주인이라는 대상 그 자체에 강제로 노예를 귀속시키는 가장 강력한 복종마법이었다. 그야말로 몸과 마음을 다 바치는 완전한 복종. 단, 마법을 시전하기 위한 준비물로 인간의 영혼을 필요로 했는데, 낮은 확률이긴 하지만 때때로 마법이 실패해 노예가 죽어버리거나 정신이 붕괴될 위험성이 있었다. 그렇지만 충성의 마법처럼 정기적으로 체크를 받거나 갱신해줘야 할 필요도 없었고, 속박의 마법처럼 매개물이 파괴되거나 분실될 걱정을 할 필요도 없었다. 이전 피터슨의 노예였던 세이라 역시 바로 이 종속의 마법에 걸려있었다.

일반 옥션에선 백골드라는 추가비용을 부담해야 충성의 마법을 걸어주었고, 실버 옥션에선 충성의 마법은 무료. 속박의 마법이나 종속의 마법은 추가 비용을 받았다. 하지만 블랙 옵션에선 이 셋 다 무료였다. 여기선 낙찰자가 노예에게 원하는 복종마법을 선택해서 걸 수 있었다. 진석은 자신에게 의향을 묻는 직원에게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대답을 했다.

"종속의 마법으로."

"알겠습니다. 그럼 이쪽으로..."

진석은 지하로 내려가 경매장이 아닌, 복도를 지나 안쪽의 다른 방으로 안내되었다. 재질이 뭔진 몰라도 시커먼 벽돌로 만들어진 제법 큼직한 방으로, 방 안 전체에 걸쳐 붉은색의 커다란 원형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직원이 안내하준 곳에 가서 마법진 위에 놓여진 의자에 앉았다. 곧 자신이 구입한 묘인족 노예와, 또 다른 인간 노예가 하나 끌려나왔다. 보통 종속의 마법을 위한 제물로는 어떠한 이유로건 상품가치를 잃었거나 오랫동안 팔리지 않은 재고 노예가 쓰이는걸로 알고 있었다. 재료로 끌려나온 노예는 젊은 청년이었는데 부상을 입었는지 양팔과 몸통에 피로 흠뻑 젖은 붕대를 둘둘 감은채였다. 손이 묶이고 눈이 가려진채였는데, 심하게 다쳐서인지 직원이 이끄는대로 끌려나오더니 제자리에 풀썩 주저앉아 힘겹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묘인족 노예는 직원이 마법진 한쪽위에 준비된 구속대의 틀에 움직이지 못하도록 고정시켰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준비가 마쳐지자 저쪽에서 문을 열고 길다란 검은 로브를 둘러쓴 마법사 세 명이 나와 마법진 주위에 둘러섰다. 그리고 제각기 낮은 소리로 웅얼거리며 약 2~3분 가량 주문을 외웠을까? 바닥에 그려진 마법진의 문자 전체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마법진에서 빛이 새어나오자 재료인 인간 노예는 컥 하고 숨을 몰아쉬며 격하게 몸을 떨다 십여초만에 바닥에 쓰러져 절명했다. 마법진의 빛은 한층 거세어지나 싶더니 묘인족 노예와 진석 사이에 기다란 빛의 끈 같은게 생겨났다. 그러길 수십초, 빛은 서서히 사라지고 방은 원상태로 돌아왔다. 옆에서 대기하던 직원 하나가 진석에게 다가와 말했다.

"첫번째가 무사히 끝난것을 축하드립니다. 그럼 계속 이어서 진행하겠습니다."

묘인족 노예와 시체는 방 밖으로 끌려나갔고, 뒤를 이어 마족 노예가 방으로 데려와졌다. 이번에도 제물인 인간 노예가 함께 끌려왔는데 머리가 하얗게 샌 작은 체구의 노인이었다. 그는 눈이 가려진채 직원들이 이끄는대로 다리를 절며 마법진 위로 끌려왔다. 두번째의 마법도 첫번째와 동일하게 이루어졌고, 역시 같은 과정을 거쳐 잘 마무리 되었다. 마족 노예와 시체가 밖으로 나간 뒤 마법사들이 퇴실했고 진석은 맨 마지막으로 직원의 안내를 받아 옆방으로 갔다. 거기서 계약이 무사히 이루어 졌음을 확인하는 인수증에 서명하고 영수증을 건네받았다.

'뭐 이런건 필요없긴 하지만.'

그래도 구입한 노예의 권리와 가치를 공식적으로 증명하는 문서니 받아두기로 했다. 문서작업까지 마치고 1층으로 올라가니 새로 얻게 된 노예 둘이 진석을 기다리고 있었다. 직원들은 그녀들을 진석의 곁에 붙여주고, 공손한 태도로 물어보았다.

"가지고 오신 말이 한 필 뿐이신데 자택까지 이동하실 마차라도 준비해 드릴까요?"

그러고보니 그도 그렇군. 말 한 필에 셋이 타서 갈 순 없는 노릇이니. 진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바로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그럼 다음번의 방문도 진심으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첫 방문에 두 건의 낙찰, 한 건은 최대가를 갱신한데다 총액 4만 골드가 훌쩍 넘는 초거액을 써서일까. 진석을 대하는 직원들의 태도는 유독 조심스러웠다. 블랙 옥션에 출입할 정도라면 다들 어디가서 VIP도 대접받을 귀족이나 부호들이긴 하지만, 그 중에서도 나는 한층 격이 높은 VVIP쯤은 되겠지. 그렇게 생각하는 진석. 허리가 굽어질듯 성심성의껏 고개를 숙여보이는 직원들을 뒤로 하고 저택을 나섰다. 그러자 저쪽에서 곧바로 마차와 더불어 한 일꾼이 진석이 타고 온 말을 몰고 나왔다. 진석은 마부에게 엘리야의 집 주소를 일러준 다음 노예들과 함께 마차에 올랐다. 마차가 출발하고 나서도 두 노예들은 아무말 없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만 있었기에, 진석이 먼저 입을 열었다.

"뭐... 말 안해도 잘 알테지만 오늘부터 내가 너희들의 주인이다. 뭐든 자기 소개라도 해봐."

"냐! 내가 먼저 하겠다냐!"

진석의 말에 기다렸다는 듯 팔을 들어보이는 묘인족 노예. 진석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신이 난듯한 태도로 속사포처럼 빠르게 말을 쏘아냈다.

"나는 마르텐 산맥 출신이다냐. 응~ 일족이 있는곳에서 멀리 나갔다가 어쩌다보니 인간들에게 붙잡혀 여기까지 끌려와서 화가 났었지만... 이젠 그런거 상관없다냐! 주인님이 있으니까 그거면 충분하다냐. 에헤헤~"

그게 다야? 이쪽 묘인족녀의 첫인상을 좋게 표현하자면 솔직 단순하다는 느낌이고... 나쁘게 말하자면 어째 좀 머리가 가벼워 보이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그녀는 짧은 자기 소개를 마치곤 진석의 옆자리로 건너와 오른쪽 팔을 껴안고 어깨에 볼을 슥슥 부벼대기 시작하는거 아닌가? 머리위의 두 귀가 연신 쫑끗거리고 엉덩이 위쪽으로 난 꼬리가 탁탁 마차의 좌석위를 두드리는게 왠지 기분이 좋아 보였다. 진석은 메뉴를 열고 그녀의 스테이터스를 확인해 보았다.

- 이름

******

- 종족

묘인족 펠레스/여성

- 스테이터스

통솔 11 / 무력 27 / 민첩 41 / 지력 8 / 정치 4 / 매력 33

- 액티브 스킬

수인화[S랭크] / 묘람권[B랭크] / 미행[C랭크]

- 패시브 스킬

마냐마냐어[S랭크] / 사냥꾼의 감각[A랭크] / 지식 - 야생동물[B랭크] / 은밀[B랭크] / 관찰[D랭크]

'수인화나 묘람권이 전투용 스킬인것 같고. 민첩은 쓸만하지만... 확실히 머리는 좀 나쁘구나. 근데 다른건 대충 알겠는데 이름은 이게 뭐야? 그리고 마냐마냐어?'

이 묘인족 노예의 이름이 어째 제대로 표시되어 있지 않았다. 그리고 패시브 스킬중에 마냐마냐어라는 묘한게 눈에 들어왔다. 이게 대체 뭘까. 진석은 자신의 어깨에 부비작거리고 볼을 문질러대는 그녀에게 물었다.

"너, 이름은?"

"이름? ~~~다냐."

"...뭐?"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말할때 마치 고양이가 요란하게 우는것 같은 야옹 냐옹 하는 소리를 내어 발음했다. 이, 이게 지금 대체 뭐라는거야? 잠시 벙쩌있던 진석은 곧 아하 하며 마냐마냐어라는 스킬이 뭔지 겨우 알아챘다.

'뭔가 했더니... 마냐마냐어 라는건 묘인족 고유의 소통언어인가 보군. 그러고보니 정보상 피터슨도 라케르투스 족 언어로 쪽지를 적어놓는 바람에 해독할 학자를 구한다고 아라파에서 며칠동안 시간을 잡아먹기도 했었지. 내가 이런 묘인족의 말 따윌 알아들을리가 있나. 그래서 이름도 이런식으로 표기되어 있는 모양이지? 나 원 참...'

진석은 피식 웃곤 그녀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으며 말했다.

"마냐마냐언지 뭔지 나는 묘인족 말 같은건 못알아 듣겠으니까 이름을 새로 지어주마. 오늘부터 네 이름은... 으음, 어..."

그러고보니 난 작명같은거 잘 못하지. 그렇다고 동네 길고양이 마냥 나비야~ 같은 이름으로 부를수도 없고. 잠시 고민하던 진석은 겨우 입을 열었다.

"...셀린이다. 네 이름은 오늘부터 셀린이야."

"알았다냐! 주인님이 그렇게 정했다면 지금부터 내 이름은 셀린이다냐."

에헤헤 하고 환하게 웃어보이는 셀린. 이전 자신이 두 번이나 목숨을 구해줬던 왕가슴 창녀의 이름이었지만, 진석은 그녀의 이름을 멋대로 빌려다 자신의 노예에게 가져다 붙였다. 게다가 원래 셀린의 가슴은 엄청 컸었지만, 이쪽 묘인족 셀린의 가슴은 한 손에 쏙 들어올만큼 아담한 크기였다.

'에이 알게 뭐냐. 뭐 본인이 따지러 올것도 아닌데.'

다음은 마족의 아가씨 차례였다. 그녀는 마차에 탔을때부터 시종일관 공손한 자세로 손을 모은채 진석을 바라보고 있었다. 진석이 자신을 바라보자 가볍게 미소지어 보이는 그녀. 새하얀 피부와 비단결같은 암청색 머리칼, 그와 대비되는 듯한 붉은 입술이 도드라진 아름다운 모습에 진석은 왠지 모르게 살짝 두근하는걸 느꼈다.

"어... 흠흠, 다음은 너. 자기 소개 해볼래?"

"알겠사옵니다. 저는 살루아 출신으로 스토웰 가문의 삼녀, 케이트 마고 스토웰이라고 하옵니다. 미력한 몸이오나 성심을 다해 모시겠사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옵니다."

그러면서 천천히 머리를 숙여보이는데... 얘는 또 말투가 왜이래? 어디서 사극이라도 찍다 온것도 아니고. 그리고 살루아는 또 어디야? 진석은 케이트에게 휘휘 손을 내저어 보이며 말했다.

"아니 그렇게 너무 격식 차려 말할건 없고... 부담스러우니까 적당히 편하게 말해도 돼."

"삼가 명을 받들겠사옵... 실례, 알았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고개를 들어보이며 가볍게 미소짓는 케이트. 머리에 난 한쌍의 뿔이 독특하다 뿐이지, 확실히 미인은 미인이었다. 메뉴를 열어 케이트의 스테이터스도 확인해 보는 진석.

- 이름

케이트 마고 스토웰

- 종족

영마족/여성

- 스테이터스

통솔 20 / 무력 10 / 민첩 11 / 지력 30 / 정치 24 / 매력 40

- 액티브 스킬

영체현신[B랭크] / 감정안 - 미술품[B랭크] / 가창[B랭크] / 질루에트[C랭크] / 사교댄스[C랭크]

- 패시브 스킬

예법[A랭크] / 교섭[C랭크]

'이건 또... 흐으음.'

케이트는 말투나 행동거지도 그렇고, 어째 좋은 집안 출신의 여식이라는 느낌이 팍팍 들었다. 게다가 스킬중에 미술품에 대한 감정안이나 예법등이 있는것도 그랬다. 영체현신이나 질루에트는 뭔진 잘 모르겠다만... 그래도 전투용 스킬인것 같긴 했다.

'전투능력이 있다면 어쨌건 다행이군. 돈을 날린게 아니라서.'

그렇게 해서 현재. 진석은 옷가지와 잡동사니로 너저분한 엘리야의 집 안에, 새로이 손에 넣은 두 노예 셀린과 케이트를 데리고 들어와 소파에 마주 앉았다. 하지만 막상 자신에게 종속된 노예를 얻고 나니 어떻게 다루면 좋을지 애매한 기분이 들었다.

'거 옛 속담중에 하던 지랄도 멍석 펴놓으면 안한다는 말이 있는데... 지금 내가 딱 그꼴이군.'

지금까지 강간을 하거나 미약을 써서 여자를 손에 넣는 일도 해왔지만, 처음부터 자신에게 애정도가 맥스 상태인 여자들을 얻고 나니 이건 뭐랄까. 어쩐지 조금 허무했다. 게임하다 치트를 써버리면 재미가 떨어지고 탈력감이 느껴지는것과 비슷했달까? 원래 온갖 수작을 걸어 타락시키고 자신에 손에 떨어트리기 까지의 과정이 재미있는 법인데, 중간과정은 생략하고 결과물만 쏙 얻으니 흡사 소설이나 영화의 결말부터 확인해버린 느낌이었다. 자신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바쳐줄 충성스런 미인 노예 둘을 앞에 놓고도 어째 흥이 나지 않았다.

'이래서야 외모는 훨씬 떨어져도 엘리야를 데리고 노는게 훨씬 재밌겠는데... 가 아니지. 내가 배가 불렀군 불렀어. 돈 없어가지고 해밀턴의 약재상에서 딱 1회분어치 미약 재료 사서 만들어 쓰던 시절을 생각해야지.'

이러니 저러니 해도 자신이 필요에 의해 구입한 노예들 아니던가. 클립튼 일행도 그렇고 지금까지의 일 역시 어찌저찌 해결해왔지만 슬슬 그 한계를 느꼈으니까. 아무리 능력이 좋다한들 역시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엔 한계가 있는법이다. 그러니 앞으로 자신의 일을 도울 그녀들을 구입한건 옳은 행동이었다. 그리고 그녀들은 복종마법덕에 처음부터 자신을 향한 최대치의 애정을 가졌더라도, 진석 자신은 아직 그녀들을 대하기 어색한건 당연. 게임속의 NPC들은 마법이라는 편리한 능력으로 마음과 생각마저 조작해 버릴 수 있었지만 진석은 그저 게임을 즐기고 있을뿐인 현실상의 사람. 만난지 얼마 되지도 않은데다 돈으로 구입한 상대에게 처음부터 깊은 호감을 느낀다는건 당연히 말이 안됐다.

'하지만 정이야 앞으로 차차 쌓아가면 그만이고...'

게다가 이 둘은 지금까지 만나온 상대들처럼 상호 수평관계의 상대가 아닌 수직관계가 명확한 노예. 엄연히 자신의 발 아래에 속한 일종의 도구다. 도구를 사용해야 할 주인이 주눅들어 있으면 어쩌겠다는건가? 게다가 이 둘은 자신의 명령이라면 본인의 의지나 생각과는 관계없이 절대적으로 따를것이다. 무슨짓을 하더라도 용납되고, 또 통용되는 상대들이다. 그녀들을 대할때 부담감을 가질 필요는 요만큼도 없었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은 진석은 크흠 하고 헛기침을 해 목을 가다듬은 뒤 셀린과 케이트를 바라보며 말했다.

"너희들의 주인인 나의 이름은 러셀 헤이든. 허신 헤세스모데우스를 강림시키는 사명을 수행중인 허신의 교단에 속해있는 수호자다... 라는건 그저 표면상의 직책."

진석은 두 노예를 앞에 두고 그녀들에게 자신이 게임을 시작한 시점부터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아무리 도구나 다름없는 노예들이라도 우선 주인인 자신에 대한것을 먼저 이해시켜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에나를 만난 때부터 시작한 이야기는 진석의 주관대로 멋대로 왜곡되어 있었고, 일의 전후나 이해관계가 조금씩 뒤바뀌어 있었지만 셀린과 케이트는 그녀들이 사모하는 주인님의 이야기에 푹 빠져들어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경청했다.

============================ 작품 후기 ============================

요 며칠새 제가 집에 와서 바닥에 등만 대면 뻗어버리는 바람에 글을 별로 못 쓰고 있습니다. 연참은 천상 주말에나.. OTL

그나저나 내용이 또 늘어지는군요. 빨리빨리 진도를 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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