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베라 - 부회의 방랑자-106화 (106/155)

< --   - 9.   -- >         * 106화 *

교단으로 돌아온 진석은 첫날은 다음 임무를 위한 약품의 준비나 장비를 구입하며 하루를 보냈고, 둘째날은 노예들을 구입했다. 그리고 사흘째. 진석은 셀린과 케이트, 두 노예를 대동하고 아침 일찍부터 거리로 나섰다.

'노예를 산다고 거기서 끝이 아니고... 먹이거나 입히고 쭉 관리하면서 데리고 다녀야 하니 이거저거 필요하겠지.'

우선 적당한 식당에서 아침식사부터 해결 한 후 마차부터 새로 구입했다. 미리안에게 받았던 일만 골드 중 잔금 사천골드가 남아있었으므로 돈 걱정은 없었다. 이전에 타고다니던건 데오그라즈의 마차역에서 적당히 훔쳤던 이두마차였지만, 이번엔 제대로 돈을 주고 근사한 사두마차를 구입했다. 장거리 여행용으로 만들어진 마차로 승용칸도 훨씬 널찍했고, 승용칸 아래쪽과 뒤쪽에 각기 화물칸이 따로 만들어져 있어 많은 짐을 싣기에도 용이했다. 마부석 위쪽에도 방수천으로 된 접이식 차양이 달려있어 비가 올때도 젖을 염려 없이 운행을 계속 할 수 있었다. 그 외에 세세한 부분도 이래저래 잘 만들어진게, 자동차로 치자면 풀옵션이라는 느낌이었달까.

마차 다음은 노예들의 옷과 장비였다. 현재 셀린과 케이트는 경매장에서 팔릴때 입고 있던 옷을 그대로 입고 있었다. 둘을 데리고 여성복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고급 상점으로 간 진석. 앞으로 어딜 돌아다니게 될지 모르니 실용적인 옷을 우선적으로 몇 벌 구입하게 했다. 그리고 셀린의 귀나 케이트의 뿔은 확실히 사람들의 눈에 띄었기에 셀린에겐 헌팅캡을, 케이트에겐 플로피 햇을 사주었다. 그 외에 속옷이라던가 나머지 필요한 것들은 둘의 취향대로 고르게 했다. 셀린은 활동적이고 스포티한 옷을, 케이트는 왠진 모르겠지만 어두운 색상의 드레스 타입의 옷을 주로 골랐다. 그리고 덤으로 양산을 사길래 왜 그런가 해서 물어보았다.

"저희 영마족은 직사광선엔 약합니다. 본디 낮에 자고 밤에 일어나 활동을 하는것이 기본이라... 어두운 곳에서나 해가 떨어진 밤에는 본신의 능력을 한껏 발휘 할 수 있지만, 일광 아래에서는 아무래도 괴로워져서..."

혹시나 싶어 케이트의 스테이터스를 확인해봤더니, 낮이라 그런지 실내임에도 능력치가 아주 약간이지만 저하되어 있는걸 볼 수 있었다.

'이것 참... 햇빛에 약하다니. 이런건 또 생각을 못했는데.'

하지만 이건 그녀의 타고난 종족 특성인 모양이니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어두운 색상은 빛의 흡수율이 높아서 더울텐데? 진석은 그 점을 지적했지만 케이트는 그럼에도 어두운 옷을 사고 싶어 했기에 그냥 그녀가 원하는대로 구입하게 했다. 그렇게 속옷이라던가 여러가지 필요한 것들의 구입을 마치고 가게를 나왔다. 셀린이 자청해서 짐꾼이 되어 양 손 가득 쇼핑백들을 들었고, 케이트는 바로 양산을 펼쳐들어 햇빛에서 몸을 가렸다.

"그나저나 셀린. 네가 익힌 묘람권이라는건 무슨 기술이야?"

"냐하! 우리 일족만의 권각술이다냐. 어지간한 사냥감은 한두방에 샤샥 끝낼 수 있다냐! 주인님 내 기술 보고싶냐?"

그렇게 말하며 쇼핑백들을 내려놓곤 두 손을 들어보이고 제자리에서 탁탁 뛰는 셀린. 손가락에 힘을 주자 손끝에서부터 단단하고 날카로운 손톱들이 두 치 쯤 쑤욱 솟아나는게 보였다. 손 자체는 사람과 다를것 없는 모양인데 손톱만이 고양이와 같은 수납식 발톱이라니, 꽤나 신기했다. 셀린의 손을 붙잡고 살펴보니 손톱임에도 그 강도나 날카로움이 어지간한 칼날수준이었다. 이거라면 휘두르는 것 만으로도 확실히 상대에게 치명상을 입힐수도 있을것 같았다.

"아니 사람들 오가는 길거리니까 시범같은건 됐고... 그보다 필요한 장비같은건 없어? 직접 맨몸으로 싸운다면 뭐 글러브라던가 하다못해 몸을 지킬만한 호구라거나. 그리고 케이트 너도. 어제 쭉 이야기 해줘서 알테지만 날 따라다니면 앞으로 얼마든지 목숨 내놓고 싸울일이 생길거야."

진석의 말에 긴장감없이 에헤헤 웃으며 고개를 젓는 셀린과, 마찬가지로 가볍게 고개를 한 번 흔드는 케이트.

"나는 이 팔다리가 무기다냐. 쓸데없는걸 몸에 걸쳐봐야 걸리적 댄다냐."

"저는 무기는 다를 줄은 모르오나, 몸을 지킬 최소한의 기술은 익히고 있습니다. 인간의 기준으로는 마법과 비슷한 기술입니다만... 주인님의 말씀대로 길거리에서 선보일만한 것은 아니기에."

그런가. 그럼 뭐 됐다. 본인들이 저렇게 말하는데 억지로 뭘 사서 장비시킬 필요는 없겠지. 진석은 마차의 짐칸에 구입한것들을 싣고 엘리야의 집으로 돌아갔다. 엘리야의 집으로 돌아가서 마당 한켠에 마차를 세워두고 안으로 들어가니 그새 엘리야가 돌아와 있었다. 뭘 하고 온건진 몰라도 얼굴이 헬쓱한게 한 눈에 보기에도 피로에 절어 엉망진창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쇼파에 반쯤 늘어져있다가, 진석이 셀린, 케이트와 함께 들어오자 깜짝 놀랐다.

"에... 오셨... 엇? 러셀씨. 뒤쪽의 두 사람은 누구...?"

"아, 인사해. 어제 옥션에서 구입한 노예들. 이쪽 황갈색 고양이... 아니, 묘인족이 셀린. 뿔이 돋은 시커먼쪽... 아니, 마족은 케이트. 너희도 인사해. 쟤는 엘리야. 이 집 주인이야. 실은 내가 잠시 신세를 지고 있는 상황이라서."

진석의 엉망진창인 소개에도 둘은 화를 내거나 토를 달지 않았다. 그저 시키는대로 엘리야에게 인사를 건넬뿐. 엘리야는 아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까먹고 있었어요. 블랙 옥션 회원이 됐었죠... 응. 둘 다 예쁘네. 하지만 그... 역시 제시씨에게 괜찮겠어요? 제시씨 성격이라면 보나마나 엄청 태클 걸텐데. 그리고 아르데나도..."

"에잇, 노예 하나 둘 쯤 샀다고 칭얼거리는 속 좁은 여자는 이쪽이 필요없어. 맘대로 떠들라지."

"참... 러셀씨 다운 대답이네요. 그보다 저는 좀 잘테니까... 으으. 철야를 해서 죽겠어요. 무슨 일처리가 이따위인지... 으하암."

크게 하품을 한 엘리야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크서클이 드리워진 눈가를 슥슥 부비며 비틀비틀 힘없는 걸음걸이로 침실로 향했다. 진석은 셀린과 케이트에게 소파에 앉아 기다리라고 명령한 후 엘리야를 잡아채 함께 침실로 들어갔다.

"엑... 나 피, 피곤하다니까요? 정말로 이럴 기분 아니에요!"

"아니 적당한 성행위는 숙면에 도움이 된다던데."

"그런게 하고 싶은거라면 저기 노예가 두 명이나 있잖아요?"

"쟤들은 앞으로 쭉 데리고 다닐거지만 엘리야 너랑은 곧 헤어지면 또 언제보게 될지도 모르니까. 그러니 할 수 있을때 한 번이라도 더 해둬야지. 자자, 어차피 서로 알거 다 아는 처지에 야박하게 굴지 말고."

"아이~ 정말! 러, 러셀씨 바보!"

진석은 힘없는 저항을 하는 엘리야를 침대 위에 쓰러트리고 능숙한 손놀림으로 그녀의 옷을 벗겨나갔다. 훤히 드러난 엘리야의 가슴을 주무르고 입술을 마주했다. 앙 다물어져 있던 입술은 스르륵 열려 진석의 혀를 받아들였고 타액과 함께 뒤얽혀 물기 어린 소리가 났다.

"응, 음... 하아."

가슴을 쓰다듬던 손은 배꼽을 지나쳐 다리사이로 들어갔다. 살풋 돋은 음모를 넘어작은 돌기같은 클리토리스를 만지작거리는 손길. 힘을 주어 음순 위를 문지르자 엘리야의 입에선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좁은 구멍 안쪽에서 질척한 애액이 배어나오는덴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러셀씨..."

끈적하게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엘리야의 부름에 아무 대답 않고, 곧바로 그녀의 깊은곳에 창처럼 꼿꼿해진 음경을 찔러넣는 진석. 이만하면 이제 익숙해질때도 되었건만 엘리야는 허리를 한껏 세우며 진석의 것을 힘겹게 받아들였다. 좁은 질내에서 전해지는 압박감. 그리고 맞닿은 점막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체온과 물기어린 마찰감은 쾌감이 되어 하반신을 타고 중추신경으로 올라갔다.

"으. 아으."

엘리야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몸에 억지로 파고든 사내의 물건의 이물감을 진한 쾌감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진석이 허리를 움직이자 엘리야는 완전히 몸을 맡긴채 헐떡거리며 좋아했다. 하지만 행위에 들어간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엘리야는 금새 절정에 이르더니 정말로 기절하듯 스르륵 잠들어버렸다.

'엑... 어째 얘랑 할땐 꼭 이런식으로 실신시키면서 끝나는군. 익숙하다못해 친숙한 패턴인데.'

진석은 아직 한 번의 사정도 하지 못했지만 완전히 뻗어버린 엘리야를 놔두곤 이불을 잘 덮어준 뒤 옷을 챙겨 침실을 나왔다. 진석이 알몸인채 애액으로 젖어 번들거리는 거시기를 덜렁거리며 침실에서 나오자, 소파에 앉아 서로 뭔가의 이야기를 나누던 셀린과 케이트가 깜짝 놀라 진석을 바라보았다.

"냐아~ 주, 주인님 야하다냐."

"...어머."

두 손으로 눈을 가리는 셀린과 한 손을 들어 입가를 살짝 가리는 케이트. 하지만 셀린의 손가락은 다 벌어져 있어 그 틈으로 진석의 몸을 훤히 바라보고 있었고 케이트 역시 살짝 얼굴을 붉힌채 그대로 진석을 빤히 쳐다보았다.

"뭘 봐, 욘석들."

"그치만 주인님꺼... 우람하다냐. 발정난 수컷들 물건을 두어번 본 적 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냐..."

"과연... 남성의 실물을 보는건 처음이지만 훌륭하십니다."

얼굴을 붉히며 그렇게 떠드는 둘. 이것들이 주인님 거시기를 품평하고 있네. 진석은 둘에게 명령해서 너희들도 당장 벗으라고 할까 하다가... 그만두고 옷을 주섬주섬 챙겨입었다. 아까 엘리야에게 말했던대로 이들과는 한참이나 같이 다닐터. 급할건 없었다.

'그리고 둘 다 아직 미경험자잖아? 이런 너저분한 소파위에서 첫경험을 가지게 하는건 역시 좀 그렇지. 나중에 적당한데서 천천히 하자.'

언제든지 손에 넣을 수 있는 상대들이다 보니 되려 신기할정도로 그쪽의 욕심이 안났다. 참 사람 마음이 묘하기도 하지. 안 주려는 상대는 억지로 빼앗고 싶고, 정작 언제든 취할 수 있는 상대는 별로 탐나지 않다니. 이게 뭔 청개구리 같은 심보냐? 옷을 다 챙겨입은 진석은 집 마당으로 나가며 손짓을 해서 셀린과 케이트를 불러내었다.

"따라나와라. 너희들이 가진 능력이나 한 번 보자고."

"알았다냐! 나 강하다냐, 주인님한테 실력 보여준다냐!"

왠지 신이 나서 팔을 붕붕 휘두르며 마당으로 뒤따라나오는 셀린. 하지만 지가 강해봐야 얼마나 강하다고, 진짜 강한 녀석이면 붙잡혀서 경매장에 끌려나오지도 않았을텐데.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진석. 케이트도 양산을 펴고 뒤따라나오며 진석에게 말했다.

"저기 주인님. 아직 해가 떠있는 시간이라 제 기술은 완전한 상태로 발휘 할 수 없습니다만..."

"괜찮아. 할 수 있는데까지만 해봐. 네 기술은 셀린쪽을 먼저 보고 그 다음에 보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공손히 고개를 숙여보이는 케이트. 마당으로 나간 셋은 나무가 심어진 마차를 세워두었던 구석쪽으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의자대신 마부석에 걸터앉은 진석은 셀린을 향해 턱짓을 했다.

"먼저 해봐."

"헤헤~ 눈 크게 뜨고 지켜봐달라냐."

셀린은 통통 튀듯 발을 구르며 넓은 자리로 가서 서더니, 방금전까지 얼굴에 가득한 웃음기를 지우고 자세를 낮추었다. 머리위에 돋은 귀나 꼬리의 털이 쫘악 곤두서는게 보였다. 그녀에게서 마치 맹수가 쏘아내는것 같은 거친 살기가 쏘아졌다.

'호오, 기세만은 제법인데.'

"샤악-!"

위협적인 소리를 내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뒤로 5연 백덤블링을 하는 셀린. 마지막 백덤블링은 위로 껑충 높이 뛰더니 몸을 둥글게 말아 휘리릭하고 허공에서 몇바퀴나 돌다 바닥에 착지했다. 마치 기계체조 선수의 유연한 움직임을 몇배속으로 빨리 돌려 보는것 같은 굉장한 움직임이었다.

"캬아앗-!"

그러더니 안광을 폭사시키며 손끝에서 뽑아낸 손톱으로 허공을 세차게 할퀴고, 몸을 빙글빙글 옆으로 몇차례나 회전시키며 연속발차기를 가했다. 중간중간 손톱으로 상중하단을 가리지 않고 페인트를 섞어가며 공격을 하는데 실제로 그녀와 싸운다면 어지간한 상대는 삽시간에 손톱에 찢겨 피투성이가 될 것 같았다. 그렇게 몇번이고 변칙적이며 재빠른 움직임을 선보이던 셀린은 날렵한 전신의 탄력을 살려 고무공이 튀듯 뒤로 샥샥 백스텝을 하며 물러나나 싶더니, 한곳에 멈춰서선 자세를 잡고 양 손을 허리춤으로 모았다.

'뭔가의 기술을 쓰려는건가?'

"냐! 만쇄격!"

그리고 한발을 앞으로 내딛어 묵직한 진각을 밟나 싶더니 양 손바닥을 모아 정면으로 쏘아내듯 발출했다. 그러자 터어엉!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무형의 충격파가 터져나가는게 똑똑히 보였다. 범위는 약 전방 1미터 뿐이었지만 그 기세가 자뭇 강력한게 적중당한다면 치명적인 일격이 될듯했다.

'허!'

셀린의 기술에 감탄하는 진석. 그냥 민첩성과 빠른 몸놀림을 살린 손톱공격과 발차기 정도가 전부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저런 종류의 기술도 쓸 수 있다니. 그녀의 근접전 능력은 진석이 예상하던것보다 꽤 높은것 같았다. 만쇄격까지 선보이고 난 셀린은 후우웃 하고 호흡을 한 번 가다듬더니 머쓱하게 웃으며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에헤헤. 근데 이건 한박자 쉬고 호흡을 모아야 해서 실전에서 적중시켜본 적은 없다냐."

"그... 그래? 아무튼 됐어. 잘했다. 이쪽으로 와."

하긴. 싸우다 말고 힘을 모으며 기술을 발할 자세를 취하면 바보가 아닌 이상 순순히 맞아줄리는 없을테지. 셀린은 깡총깡총 뛰듯 진석에게 다가가 마부석 옆자리에 앉아 진석의 팔을 꼬옥 끌어안았다. 팔 너머로 셀린의 두근거리는 심박과 조금 거칠어진 호흡이 느껴졌다. 태연한척 하지만 방금전의 시범이 어느정도는 힘들었던 모양이었다. 진석은 옆에서 양산을 편채 대기하던 케이트에게 명령했다.

"다음은 너. 말했다시피 무리할건 없으니까 간단하게 해봐."

"알겠습니다. 그럼 부족하나마..."

양산을 쓴채로 방금전 셀린이 연무를 펼치던 자리로 가서 선 케이트. 손을 뻗어 맞은편의 나무를 가리키더니, 눈을 감은채 잠시 정신을 집중했다. 그리곤 허공에 오른손을 펼친채 들어보였다. 뭘 하는거지 하고 생각할 찰나 오른손을 힘껏 움켜쥐며 아래로 끌어내리는 케이트.

"클라우!"

그러자 케이트가 가리킨 나무의 그림자에서부터 시커먼 그림자의 손이 솟아올라 다무등걸을 움켜쥐었다!

'헛!'

흡사 무슨 마귀의 손처럼 기다랗고 끝이 뾰족한 손. 거인의 팔만큼이나 커다란 그 시커먼 그림자의 손은 나무등걸을 강하게 움켜쥔채 손톱으로 나무껍질을 바각바각 긁어내리며 지면의 그림자 속으로 서서히 스며들어갔다. 잠시 후 그림자의 손이 완전히 사라지고 난 나무의 모습은 정말 처참했다. 마치 큼직한 칼날로 긁어내린것 같은 다섯개의 선이 나무에 길고 거칠게 패여있었다. 사람의 맨몸이 저 그림자의 손아귀에 붙잡혔다면 정말 전신이 너덜너덜한 걸레짝이 되었으리라.

'케이트의 힘은 그림자를 다루는 능력인건가... 전투 와중에 자기 그림자에서 저런게 솟아나와 공격을 가한다면 정말 식겁하겠군. 이거 얘도 의외로 쓸만할지도?'

케이트는 가슴에 손을 얹은채 가볍게 한숨을 내쉬곤 진석을 돌아보며 말했다.

"일단은 이런 기술입니다만... 더 보여드릴까요?"

"아니아니, 이거면 됐어. 잘했다."

진석이 칭찬하자 그제서야 안심했다는 듯 미소를 지어보이는 케이트. 진석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면 이 둘은... 음, 셀린이 정면에 나서서 싸우며 버티는동안 케이트가 뒤에서 방금같은 기술로 협공하면 나름 괜찮은 콤비가 되겠는걸.'

셀린이 속도를 살려 적을 상대하고, 케이트가 틈을 노려 그림자에서 솟아나오는 클라우라는 기술로 적을 제자리에 묶어놓은채 피해를 주고, 재차 셀린이 만쇄격같은 큰 기술로 마무리. 진석의 머릿속엔 그런 콤비네이션의 조합이 떠올랐다. 앞으로 전투가 벌어질 상황일때 둘을 잘 부리면 전술의 폭이 크게 넓어질듯 했다.

'그리고 여기에 제이스와 아르데나까지 더해지면 클립튼 일행과도 한 판 붙어볼만 하겠는데?'

진석과 제이스, 아르데나와 셀린, 케이트의 조합이라면 그야말로 공격력 과잉의 파티였다. 비록 후방이나 지원을 맡아줄 서포터는 없었지만 이쪽엔 헤세스 약품 통상에서 무한정 공급가능한 최고급의 치료약들이 있었다. 게다가 교단의 챔피언인 창의 명수 드레비안, 중장갑의 강력한 방어력을 자랑하는 맥, 그리고 마법사인 머서까지 가세한다고 가정하면 틀림없이 이쪽의 우세.

'거기에 바보 자매까지 더할 수 있다면 열 명! 다섯뿐인 클립튼 파티와는 두 배 차이. 아무리 그쪽의 기량이 뛰어나도 머릿수 앞에선 장사 없는법이지.'

어디 앞으로 두고 보자고. 진석은 셀린과 케이트를 바라보며 음후후 웃어보였다.

다음날 오후. 진석은 가도를 따라 마차를 몰고 있었다. 아직 따가운 여름의 햇살이 내리쬐었지만 차양을 쳐놔서 그런대로 괜찮았다. 바로 옆자리에선 셀린이 좌석에 기댄채 태평하게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케이트는 아마 안쪽에서 물자를 구입할때 덤으로 몇 권 샀었던 책이라도 읽고 있으리라. 오후의 햇살속에서 느긋하게 말을 몰며 바로 몇시간 전 미리안과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리는 진석.

"지금까지의 일도 쉽지 않았습니다만... 이번일은 한층 더 어려울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이번의 일까지 마무리 지어주신다면, 헤세스모데우스 님의 강림은 정말로 코앞까지 다가오게 됩니다. 이번에 향해주실 행선지는 바로 북쪽의 올린스턴 왕국입니다."

미리안의 방. 미리안은 자신의 책상에 앉은채 앞쪽에 마주앉은 진석에게 이번의 일에 대한 설명을 시작했다.

'올린스턴 왕국이라...'

대륙 동북단에 위치한 나라로, 북부의 산맥에서 질 좋은 철이 나고 인근 해역의 풍부한 어장을 가지고 있으며 현재 대륙의 여러 나라들 중 가장 군사력 증강에 열을 올리고 있는 나라였다.

"올린스턴 왕국엔 두 명의 왕자가 있습니다. 동생쪽인 둘째 왕자 패럴과, 이번의 목표인 무투파 왕세자 브래들리."

"무투파 왕세자?"

진석이 반문하자 미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올린스턴 왕국에서 운영하는 공영 대투기장의 총 책임자가 바로 브래들리 왕자입니다. 이따금 본인 스스로 투기장의 경기에 참가하기도 하며, 국정 부분에서도 강력한 확장노선 지지파라고 하는군요. 현재 올린스턴 왕국은 상시로 모병을 실시하고 있으며 브래들리 왕자 자신의 휘하엔 용병이건 건달패건 전력만 된다면 누구든 끌어들여 병력의 수를 늘리는데 집중하고 있다고 합니다. 덕분에 국경이 인접한 이웃나라인 유곤 왕국과 옐 프람 성국은 전전긍긍하고 있다고 하네요."

"뭐야 그게. 대놓고 전쟁이라도 하겠다는건가?"

"네, 그럴거에요. 그간 대륙은 오랫동안 각 국가간에 별다른 분쟁없이 평화로웠지만, 아무래도 이대로 둔다면 올린스턴 왕국이 긴 침묵을 깨고 전쟁의 봉화를 일으킬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 '눈'들이 보내오는 보고도 그렇구요. 엄연히 왕이 건재함에도 굳이 왕세자의 주도로 전쟁을 일으키고 싶어하는 속내까지야 모르겠지만... 실제로 준비는 착착 진행중이라고 합니다."

왕세자가 무투파에 대놓고 전쟁준비 중이라. 이건 또 희한하군. 올린스턴 왕국에 대해 모르는건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이번회차의 올린스턴 왕국은 자신이 알던것과는 달리 뭔가 다른 변수가 작용한 모양이었다. 이전까진 그냥 현상유지 노선을 타는 평범한 나라였던걸로 기억하는데... 이것도 뭔가 패치의 영향일까? 미리안의 설명은 계속 이어졌다.

"또한 브래들리 왕자는 대단한 무기 수집광이자 무인으로 다루지 못하는 무기가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에겐 언제, 어떠한 경위로 입수한건지는 불명이지만 유독 아끼고 있는 애병이 하나 있다고 합니다. 그 무기의 이름은... 창염의 검."

"창염의 검?"

"창염의 검의 또 다른 이명은 블레이즈 헤일로. 이 검이 진정한 힘을 발휘하면 푸른 불꽃을 뿜어내어 인간의 영혼마저 태워버린다고 합니다."

이, 인간의 영혼을 태워? 거참 별 희한한 무기도 다 있다. 아니 잠깐. 그보다... 불꽃이라?

'그러고보니 지금까지 미리안이 가져오도록 명령했던 물건은... 첫번째가 폭풍의 지팡이. 두번째는 대지의 눈. 그리고 세번째가 창염의 검이면... 뭐야 이거. 바람에 땅, 그 다음이 불이면...'

설마 나에게 4대 원소에 속하는 진귀한 물건을 하나씩 모아오도록 시키고 있었던건가? 이번이 불이니 다음번에 뭔가 물과 관련된걸 가져오게 한다면 확실하다.

'그러면... 각 원소에 해당하는 네가지를 다 모으면 강림 준비도 끝나는걸까? 아, 아니 잠깐. 그럼 이거 좋답시고 희희낙락하며 명령을 따를게 아닌데.'

폭풍의 지팡이와 대지의 눈. 거기에 창염의 검까지 미리안의 손에 넘겨준다면 4대 원소 네가지 중 무려 세가지의 준비물을 그녀에게 쥐어주는 꼴이다. 그럼 남는것은 물을 상징하는 단 하나뿐. 물론 이것은 그저 진석 자신의 추측일 뿐이고 4대 원소를 상징하는 네가지 물건 이외에도 뭔가 다른게 더 필요할지도 모르지만... 미리안 그녀가 말한대로 허신의 강림이 한 발자국 더 가까이 임박할거라는건 확실할터.

'쓰, 이거 뒤통수를 치고 말고가 아니라 이러다 그냥 게임 끝나게 생겼네. 어쩌면 좋을까나...'

하지만 진석이 머릿속으로 뭘 고민하는지와는 관계없이 미리안의 말은 계속되었다.

"틈이라면 역시 브래들리 왕자 그 자신이 직접 투기장에 자주 모습을 드러내거나 참가한다는 걸까요. 머지않아 큰 토너먼트를 개최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니 거기에 참가하시는것도 한 방법일지 모르겠습니다. 토너먼트에 참가하시면 어쩌면 브래들리 왕자와 직접 대면할 기회가 생길지도 모르니까요. 폭풍의 지팡이나 대지의 눈을 훌륭히 회수해 오셨던것처럼 이번에도 어떤수를 써서건 창염의 검을 제게 가져다 주십시오. 그리고 올린스턴 왕국의 수도 캐버너에 도착하시면 말로스 상사라는 곳에 찾아가 포먼이란 자에게 이것을 전달해주세요."

작은 편지봉투 하나를 내미는 미리안. 진석은 그 편지봉투를 받아들어 바로 품에 넣었다.

"포먼 역시 아라파의 미겔슨처럼 교단의 일을 돕는 원로 중 한 사람입니다. 이번 일을 하시면서 필요한 모든 지원은 포먼을 통해 받으실 수 있을겁니다."

미리안은 지원은 현지에서 받을 수 있을거라며 그렇게 세번째 임무에 대한 전달을 마쳤다. 진석은 즉시 사원에서 나와 밖에 대기시켜 두었던 마차를 몰고 가도를 따라 동쪽으로 향했다. 도시를 벗어나 길을 떠나자 셀린은 처음엔 진석의 옆에 달라붙은채 마냥 좋아했지만 묵묵히 마차를 몰기만 하는 것이 지겨웠던지 얼마 지나지 않아 쿨쿨거리곤 잠들었다. 진석은 한 손을 뻗어 좌석위로 길게 늘어져있는 셀린의 보드라운 꼬리를 조물거리며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그나저나 노예를 둘이나 데리고도 결국 난 또 마부 신세인가. 에휴 내 팔자야.'

마차정도는 셀린이나 케이트 어느쪽에게 맡겨도 상관없을테지만 이동중에 무슨일이 생길지 모르니 역시 그냥 자신이 고삐를 쥐는게 속 편했다. 목적지인 올린스턴 왕국의 수도 캐버너까지 육로로는 약 보름 가량이 걸리니, 이전 아라파로 향했을때처럼 갈론 동쪽의 항구도시인 에베스에 들러 거기서 배를 잡아타고 빠르게 이동할 생각이었다. 야트막한 언덕을 넘어서자 저 멀리로 에베스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