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베라 - 부회의 방랑자-108화 (108/155)

< --   - 10.   -- >         * 108화 *

셀린과 케이트는 진석이 시킨대로 기세좋게 저녁거리를 사러나왔지만 한참을 헤멨다. 셀린은 인간의 도시에 익숙치 않은 묘인족이었기에 애당초 어디로 가야할지도 종잡지 못했다. 그나마 케이트는 예전부터 쭉 읽어오던 책을 통해 인간들의 사회에 대해 제법 알고 있었고 어디로 가야할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납치당해 경매장에 올려져 진석에게 팔리기 얼마전까지만 해도, 영마족의 명문가 스토웰 가문의 규중처녀였던 그녀. 결국 셀린과 다를바없이 마찬가지로 함께 이리저리 헤멨다.

그녀가 살던 마족들의 지하도시 살루아는 인간의 도시와는 많이 달랐고 그나마도 가문의 저택내에서 그다지 벗어나는 일이 많지 않았던 케이트다. 책을 통해 여러가질 읽었다고 한들 활자를 통해 알게 된 것과 실제로 접하는것은 확실히 많은 차이가 있었다. 더군다나 이곳은 오늘 처음 온 도시 아니던가. 능숙한 여행자인 진석처럼 목적지까지 빠르게 찾아가는 요령따윈 전혀 없었다. 결국 그녀들은 도보로 10분 정도면 갈 수 있는 중심가에 도착하는데만도 무려 30여분 이상을 소모했다.

중심가에 도착하고 보니 그건 또 그거대로 문제였다. 물론 이전에 의복이나 간단한 잡화의 쇼핑을 하기도 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진석의 뒤만 졸졸 따라다니며 했던 쇼핑. 막상 직접 온갖 상점과 식당들이 즐비한 중심가로 오니 어디로 가야할지 난감해졌다. 사람들이 잔뜩 오가는 거리 한켠에 멀뚱하니 선 셀린과 케이트. 케이트는 셀린에게 물었다.

"셀린. 고기 먹고 싶다고 했었지?"

"응. 하지만... 어디로 가면 좋을지 모르겠다냐. 킁킁. 고기 냄새가 여기저기서 난다냥. 고기 파는 곳이 너무 많다냐."

그냥 적당한 식당 아무데나 들어가 사면 될것을, 둘은 좀체로 결정하질 못하고 한참이나 중심가를 구경하며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이 둘이 진석과 함께 한지는 얼마되지 않았고 그나마도 여태까진 주로 마차에 타서 움직이고 잠자코 진석의 뒤만 졸졸 따라다녔던터라, 이렇게 스스로 거리로 나와 돌아다니니 확실히 여러가지 신기한 것 투성이었다. 특히 셀린은 온갖 종류의 생고기를 파는 정육점에, 케이트는 각종 서적이 가득한 서점에 시선을 빼앗겼다.

"고, 고기다냐. 피가 뚝뚝 떨어지는 신선한 고기... 먹고싶다냐."

"아아. 온갖 종류의 책이 저렇게 많이... 읽어보고 싶지만."

케이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정신을 차리곤, 어느 정육점 앞에 걸린 돼지다리를 넋놓고 바라보며 군침을 질질 흘리는 셀린을 잡아끌었다. 중심가까지 나오는데만도 이미 너무 오래 지체되었다. 한 눈을 팔며 언제까지고 주인님을 기다리게 할 순 없었다. 고작해야 저녁식사를 사오라는 간단한 명령 아니던가. 이런 간단한 심부름조차 빠릿하게 하지 못해서야 어쩌겠다는 말인가.

"어디가 좋은 식당인진 잘 모르겠지만 저기면 되지 않을까?"

결국 케이트는 셀린에게 근처의 대중식당을 가르켜보였다. 손님이 꽤 자주 들락거리는게 성업중인듯 했다. 셀린은 헤에 하며 그저 고개를 끄덕거렸다.

"난 역시 잘 모르겠으니까 케이트한테 맡기겠다냐!"

"그래. 그러면 들어가볼까."

그리고 기운차게 식당으로 들어가려 하는데 길 한쪽에서부터 빠르게 다가온 한 사내가 케이트와 부딪혔다. 사내는 대충 사과하고 서둘러 길 반대편으로 사라지려고 했다. 그 모습에 셀린의 눈이 가늘어졌다.

"케이트."

"응, 알고 있어."

예민한 셀린의 청각엔 사내가 케이트와 부딪혔을때 돈주머니가 짤랑이는 소리가 들려왔었다. 소매치기였다. 그녀가 아무리 인간 도시의 물정에 어둡다지만 소매치기라는 존재도 감지 못할정도로 어수룩한 바보는 아니었다. 케이트 역시 사내가 자신의 허리춤에 메여있던 돈주머니를 슬쩍 빼냈다는것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다. 돈주머니라곤 해도 금화가 제법 들어있던 묵직한 주머니. 돈주머니의 무게때문에 옷매무새가 흐트러질까봐 그림자를 이용해 돈 주머니 아래쪽을 살짝 받쳐들고 있었기에, 사내가 부딪히며 주머니를 슬쩍한걸 바로 감지했던 것이다. 케이트는 인파속으로 모습을 감추려는 소매치기를 향해 오른손을 뻗으며 말했다.

"거기 서세요."

멈칫. 소매치기는 케이트의 명령에 정말로 자리에 못이 박힌듯 굳어버렸다. 물론 그에게 순순히 멈춰줄 생각이 있는건 아니었다. 하지만 갑자기 땅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온듯 자신의 두 다리를 단단하게 옥죄었기 때문이었다. 당황하며 하반신을 내려다보는 소매치기. 땅바닥의 그림자에서부터 덩굴같은 그림자의 줄기가 몇 개나 솟아올라 자신의 다리를 휘감고 있었다.

"이, 이게 무슨...!"

"너어! 소매치기! 혼나고 싶냐!"

"나... 나는 몰라! 이거 놔!"

"나쁜놈! 거짓말 한다냐!"

셀린이 그에게 다가가 거칠게 멱살을 쥐었다. 소매치기는 당장이라도 도망가고 싶었지만 다리가 꼼짝도 안하는데야 어쩔 도리가 없었다. 중심가 도로 한복판에서 실갱이가 벌어지자 주변을 오가던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 그들을 둥글게 에워쌌다. 하지만 셀린은 아랑곳 않고 소매치기의 멱살을 앞뒤로 탈탈 흔들어댔다.

"으, 으윽."

"이 소매치기! 돈 도로 내놓으라냐!"

"이런 썅, 야! 그 손 못놔?"

소매치기가 셀린과 케이트에게 붙잡혀 꼼짝도 못하자 저쪽에서부터 한눈에 보기에도 인상이 더러운 사내 다섯명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이런 불상사를 대비해 소매치기가 작업을 할때 근처에서 뒤를 봐주는 깡패들이었다. 애시당초 소매치기와 이 깡패들은 한 패거리로, 만약 소매치기가 지갑을 훔치다 재수없게 걸리거나 붙잡히면 무력행사로 상대쪽을 겁주거나 몇 대 패서 되려 쫓아내버리는게 이들의 수법이었다. 그야말로 양아치 수준의 너저분한 방법이지만 선량한 시민들 상대로는 지극히 효과적이었다.

'계집년한테 붙잡혀 꼼짝도 못하고. 아주 자알~한다 이 븅신. 나중에 아지트로 돌아가서 정신 차리라고 손 좀 봐줘야겠군.'

그들 중 우두머리는 그렇게 생각하며 앞으로 나서서 셀린이 쥐고 있는 멱살을 탁 쳐서 밀어냈다. 그러는 와중 네 명의 부하들은 주변에서 구경하는 사람들에게 윽박을 지르거나 욕을 하며 겁을 주었다. 구경났나며 험악하게 굴어 모여든 사람들을 쫓아내었다. 상대는 고작 여자 둘 아닌가. 이런 상황은 경비대에 신고당하기도 전에 빠르게 정리할 자신이 있었다. 셀린과 케이트의 눈매가 가늘어지며 살기를 띄었지만 그들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올린스턴 왕국의 제 2왕자 패럴의 취미는 독서였다. 왕세자인 브래들리가 몸을 쓰는데 능하고 무기나 무술을 좋아했던것처럼 책을 좋아하는 것은 패럴의 천성이었다. 어려서부터 책을 많이 읽어온 패럴은 자연스레 속독하는 방법마저 익혔던터라, 그 독서량은 정말 무시무시할 정도였다. 할 일이 없는 날엔 방에 틀어박혀 사전만큼 두꺼운 책을 열댓권씩 읽어대곤 했다. 어려서부터 책을 너무 많이 읽은 덕에 눈이 나빠져 일국의 왕자답지 않게 안경까지 써야했지만, 그렇다고 방에 틀어박혀 바깥출입마저 하지 않는 타입은 아니었다. 자신이 읽을 책을 직접 구입하기 위해 가끔 평범한 신분처럼 변복하고 하인 몇명만을 대동한채 왕궁을 나서는 일도 있었다.

오늘도 그런 날이었다. 적당한 옷으로 갈아입은 패럴은 자신의 전속 하녀인 레나와 함께 자주가던 중심가로 나섰다. 물론 정말로 하녀 한 명만을 대동한건 아니었다. 패럴의 뒤로 이십여보 쯤 떨어진 곳에서 왕궁의 근위기사 둘이 따르고 있었는데, 그들 역시 갑옷이나 무기는 커녕 평범한 복장으로 위장하고 있었다. 패럴은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거나 과시하는 행위를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쪽 중심가에 있는 서점은 크고 작은 곳을 합쳐 총 네 곳. 벌써 두군데의 서점에서 몇십권이나 되는 서적의 배달주문을 해놓고 세번째의 서점으로 가는 중이었다. 배달주문을 하는 주소는 왕궁 근처의 일견 평범해보이는 저택. 하지만 이곳은 왕궁에서 일하는 인력들의 편의를 위해 구입한 숙소 중 하나로, 이곳에 책이 배달되는 즉시 하인들의 손을 거쳐 왕궁에 있는 자신의 방까지 책이 옮겨다 질것이었다. 패럴 왕자는 서점에서 책을 사는 일 정도로 세간에 굳이 자신이 왕자라는 티를 내고 싶지 않았기에 이런 번거로운 일을 기꺼이 감수했다. 실제로 서점주인들에게 그는 젊은 책 수집광 손님 정도로 여겨지고 있었다. 서점이라면 어딜가든 단골 대접을 톡톡히 받았음은 물론이다.

'오늘은 유달리 거리가 혼잡하군.'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가며 그렇게 생각하는 패럴. 하긴 곧 토너먼트가 예정되어 있었다. 주변의 도시나 이웃 나라에서까지 토너먼트에 참가하고 싶어하는 이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으리라. 평소보다 거리의 인파가 확실히 많음을 느끼며 목적지인 세번째 서점이 있는 거리까지 왔는데, 주변이 뭔가 소란스러움을 감지했다. 단순히 인파가 많아서 그런게 아니었다. 거리 저쪽에 사람들이 모여있었는데 웅성거림과 더불어 위협적인 고함이 섞여 들려왔다. 패럴의 뒤를 그림자처럼 따르던 하녀복 차림의 레나는 패럴의 뒤에 다가서며 작게 속삭였다.

"시끄러운것이 뭔가 소란이 일어난 모양입니다. 확인해볼까요?"

단순한 하녀라기엔 젊고 아름다운 용모. 당연하지만 레나는 평범한 하녀가 아니었다. 패럴 왕자의 신변을 지키기 위해 특별히 발탁되어 어린 시절부터 고도의 훈련을 받아온 경호원으로, 하녀의 일은 물론이거니와 각종 전투기술과 간단한 마법까지 익히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온갖 생존술과 더불어 위급시 왕자를 치료하기 위한 의료기술마저 익히고 있었다. 그녀는 그야말로 여간한 근위기사들 조차 가볍게 능가하는 엘리트 중의 엘리트였다. 거기다 여자인만큼 당연히 밤시중에도 대응 할 수 있도록 교육받았었지만, 패럴이 그녀에게 손을 대는 일은 없었다. 여느 귀족이나 왕족들이라면 아름답고 충성스런 그녀에게 손쉽게 손을 댔을테지만 패럴의 관심사는 오로지 책 뿐. 여체와 성에 대한 관심은 전혀 드러내지 않았었다.

"아니. 내가 직접 가보지."

패럴은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소란이 일어난 곳으로 향했다. 레나는 잠자코 패럴의 뒤를 따랐다. 하지만 무슨 일이 일어난다면 언제라도 대응 할 수 있도록 전신의 근육을 긴장시킨채 왕자의 신변에 모든 감각을 집중했다. 사실 이렇게 사람이 많은곳에서의 호위는 불리. 물론 그가 왕자라는걸 아는 이나 딱히 그의 목숨을 노릴 자는 없을테지만 경호란 항시 최악의 상황을 상정하고 그것을 대비하기 위해 움직이는 것이었으니까. 레나가 뒤쪽을 향해 눈짓을 하자 뒤를 따르던 근위기사들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왕자쪽으로 좀 더 가까이 따라붙었다.

"이 소매치기! 돈 도로 내놓으라냐!"

"이런 썅, 야! 그 손 못놔?"

패럴이 가까이 다가가서 보자니 헌팅캡을 쓴 황갈색 머리칼의 젊은 여성이 한 얍실해 보이는 사내의 멱살을 쥐고 흔들고 있었는데, 저쪽에서 다가온 험악한 인상의 사내가 그 손을 쳐서 밀어내는 참이었다. 뿐만 아니라 네 명의 사내가 주변에 몰려든 사람들을 윽박지르며 강제로 흩어내고 있었다. 가까이 서서 상황을 지켜보던 패럴의 앞에도 한 사내가 들이대며 욕설을 해왔다.

"샌님같이 생긴게 뭘 쳐다봐 씨, 그냥 콱! 구경났어? 빨랑 안꺼져?"

안경을 써서 얌전해 보이는 인상의 패럴이었지만 엄연한 일국의 왕자. 책벌레라고 불릴 정도로 방에 틀어박혀 책을 읽는게 그의 취미였다고는 하지만 고작 거리의 깡패 따위에게 위협당하고 물러날 정도로 순순한 인물은 아니었다.

'하아, 아무리 경비대를 늘리고 치안을 강화한다고 해도 이런 녀석들은 좀체 사라지지 않는군. 보나마나 멱살을 잡혀있던 저 소매치기가 헌팅캡을 쓴 아가씨의 돈을 훔치다 걸렸을테고 그 뒤를 봐주는 깡패들이 나선거겠지.'

범죄조직에 대한 생리를 연구한 책 따윈 몇 권이나 읽어본 패럴이었다. 이런 상황쯤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굳이 나서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선량한 시민들에게 피해를 준다면 이야기가 달랐다. 패럴은 레나에게 명령하기 위해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레나가 갖춘 능력은 패럴도 잘 파악하고 있었다. 저런 너절한 깡패들 몇 정도는 그녀 혼자서도 눈깜짝할 새에 정리할 수 있으리. 그런데 다음 순간, 갑자기 사람들 사이에서 놀라움의 탄성이 흘러나왔다.

'엇?'

레나에게 명령하려다 말고 다시 앞쪽을 바라보는 패럴. 그곳엔 생각 외의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헌팅캡을 쓴 아가씨가 깡패들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의 안면을 주먹으로 쳐서 날리고 있었고, 그녀의 일행인지 큼직한 플로피 햇을 쓴 검은색 드레스의 또 다른 여성이 앞으로 나서며 양손을 허공으로 뻗고 있었다. 그러자 바닥의 그림자들에서 부터 십수개나 되는 그림자 주먹이 솟아올라 주변의 행인들을 겁주던 깡패들의 전신을 강타해 나가떨어지게 만들었다.

"이... 이건?!"

깜짝 놀라는 패럴. 겉보기엔 평범한 두 여성인데 이렇게 가볍게 깡패들을 제압하다니? 헌팅캡 아가씨에게 맞은 우두머리는 코를 부여쥐고 일어나려 했지만 재차 날아온 매서운 돌려차기가 그를 저 멀리까지 나가떨어지게 만들었다. 길바닥을 따라 주우욱 밀려나 대자로 뻗어버린게 그 일격으로 확실히 실신한듯 했다. 무술엔 문외한인 패럴의 눈으로 보기에도 저 아가씨의 몸놀림은 보통 예사로워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그림자의 주먹에 얻어맞았던 자들이 비틀비틀 일어나려 하자 검은 드레스의 여성이 재차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깡패들의 그림자에서 제각기 길고 두꺼운 동물의 꼬리같은것이 솟아올라 채찍처럼 휘둘러져 그들을 강하게 쳐날렸다. 깡패들이 사방으로 나가떨어지자 사람들은 놀란 소리를 내지르며 깡패들을 피해 간격을 벌리고 뒤쪽으로 물러섰다. 방금 패럴에게 욕설을 하던 깡패 역시 그림자 꼬리에 치여 옆으로 부웅 나가떨어졌다.

"히... 히익."

그림자 덩굴에 붙잡혀 있던 소매치기는 다섯명이나 되는 자기편이 너무나 손쉽게 당하자 놀라서 덜덜 떨었다. 좋은 옷차림의 젊은 여자 둘이 거리 이곳저곳을 한참이나 헤매고 다니는 폼이, 아주 간단한 먹잇감이라 생각하고 허리춤에 차고 있던 돈주머니를 슬쩍 한건데... 되려 이렇게 몽땅 당하다니? 싸움에 익숙한 우두머리를 펀치와 킥 각 한 방씩으로 날려보낸것도 대단했지만, 검은 드레스를 입은쪽은 아예 무슨 마법사라도 되는 모양이었다. 그림자에서 뭔가가 솟아올라 네 명이나 되는 동료들을 순식간에 두들겨 쓰러트렸는데 겨우 소매치기인 자신이 이걸 무슨 수로 당하랴? 그는 겁에 질린채 품에서 돈 주머니를 꺼내어 내밀었다.

"죄, 죄송합니다! 여... 여기! 돌려드리겠습니다!"

"거봐라냐, 너 소매치기 맞잖냐! 이 거짓말쟁이!"

셀린은 소매치기가 내민 돈주머니를 확 나꿔채며 몸을 빙글 돌려 그의 머리 측면을 뻐억 걷어찼다. 허공으로 팽이처럼 팽그르르 돌며 나가떨어지는 소매치기. 그리고 뒤이어 케이트가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바닥의 그림자에서부터 거대한 발이 솟아올라 막 땅으로 떨어지던 소매치기의 등짝을 뻐엉 올려찼다. 흡사 무슨 공처럼 채여 저쪽 골목으로 부웅 날아가 볼썽사납게 쓰레기 더미에 콰악 처박히는 그. 합이 짝짝 맞는 멋진 콤비네이션이었다. 주변의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한채로 그 모습을 똑똑히 지켜보았다. 패럴 역시 처음보는 모습에 정신을 팔았다.

'대투기장에서 칼부림 따윈 지겹도록 봤었지만... 이, 이건 정말.'

이런 싸움 방법도 있다니. 유쾌했달까 신기했달까. 아니, 둘 다 였다. 모험 소설 같은것 역시 많이 읽어본 패럴이었지만 확실히 책으로 보는 이야기와 실제로 눈 앞에서 보는것은 많이 달랐다. 마법과 격투기의 조합이라니. 쭉 책만 끼고 살아오던 패럴에겐 놀라울 정도로 신선한 모습이었다. 게다가 왠지 모르게 패럴의 눈길을 끄는것은 검은드레스쪽의 아가씨였다. 플로피 햇이 펄럭이며 그녀의 얼굴이 순간 이쪽으로 똑똑히 드러났는데, 패럴은 두근하고 가슴을 때리는 충격을 느꼈다. 새하얀 순백의 피부와 가녀리게 흩날리는 기다란 암청색 머리칼, 그리고 진부한 표현이지만 정말로 앵두같이 붉은 입술까지.

'아... 아름답다.'

레나에게도 별다른 충동을 느끼지 못했던 패럴이었지만 저 아가씨는... 딱히 집어 설명할 순 없지만 어딘가 달랐다. 얼굴을 똑바로 마주한건 그야말로 순간이었지만 너무나 아름다워 묘하게 요사스러움마저 느껴지는 외모랄까. 어딘가 사람같지 않은 그런 종류의 매력마저 느껴졌다. 좀 더 가까이서 보고 싶었다. 목소리를 듣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그녀가 누군지 알고 싶었다. 패럴의 나이 열아홉. 이성에게 이런 감정을 느끼는것은 생전 처음이었다. 그리고 패럴은 자신이 생면부지의 여성에게 첫눈에 반했다는것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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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희들한테 뭐 어려운 일 시켰냐아아아!"

진석은 팔짱을 낀채 소리지르며 소파에 앉은 셀린과 케이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대꾸는 커녕 고개를 들지도 못하는 둘.

"아니 겨우 저녁밥 사오라는게 그렇게 어려운 심부름이디? 물론 여기는 주택가. 근처의 중심가까지 걸어서 오가는 시간도 있으니 삼사십분 정도야 생각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두시간이 뭐야 두시간이."

저택에서 쭉 기다리던 진석은 이 둘이 어디서 뭘 하다 온건진 몰랐지만 사실 걱정을 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것이, 한 30분째까지는 희희낙락하며 야한생각이나 하고 있었지만 한시간이 넘어가도 좀체 올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걱정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얼마나 걱정되었는지 이전 데오그라즈에서 엘리야를 붙잡았을때 미약을 써서 범할 생각에 제이스와 아르데나를 은행에 심부름 내보냈던 일마저 떠올랐다.

'아오 씨. 앞으로 심부름이고 나발이고 내 눈 밖에 벗어나는 곳엔 보내질 말아야지. 이거 걱정되서 뭘 시킬수가 있나? 귀찮아도 무조건 직접 데리고 다녀야겠다.'

물론 그런 최악의 일까진 벌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셀린과 케이트는 내보낸지 두시간이 다 되어서야 식어빠진 음식바구니를 든 채 돌아온 것이다. 진석이 노발대발 했음은 물론이다. 둘이 합쳐 4만 골드가 넘어가는 노예들인데 고작 이런 잔심부름 하나 빠릿빠릿하게 못하다니!

"...죄송합니다.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주인님... 미안하다냥..."

둘은 별다른 변명도 않고 진석의 질책을 받아들였다. 분명 자신들의 주인인 진석이 내린 명령은 저녁식사를 사오라는것. 하지만 멍청하게도 길을 헤맨데다, 소매치기들과 싸워 소동에 휘말렸다. 게다가 음식을 구입하느라 기다리는 동안 경비대가 출동했는데 싸움의 당사자인 셀린과 케이트에게 다가와 조서작성을 위해 동행할것을 요구해왔다. 아무리 정당방위라지만 도시내에서 소란을 일으켰으니 전후관계를 명확히 하기 위한 응당한 조치였다.

하지만 묘인족과 마족인 둘은 경비대의 요구에 당황했다. 이것은 주인이 내린 명령 이외의 사태. 어떻게 대처해야 할 줄 몰라할때 옆에서 그녀들을 지켜보던 패럴 왕자가 조용히 끼어들었다. 처음엔 패럴 왕자의 신분을 몰라 무시하려던 경비대였지만, 뒤쪽의 근위기사가 그들에게 조심스레 신분을 증명하는 명패를 보이고 사정을 설명하자 되려 당황해서는 곧바로 물러났다. 일국의 왕자가 그녀들의 무고를 입증하겠다는데 일개 경비대가 무슨 권한이 있겠는가?

패럴은 그녀들을 도왔지만 딱히 나서서 말이라도 걸어볼 생각도 못하곤 그냥 조용히 뒤로 물러났다. 셀린이나 케이트 역시도 패럴이 자신들을 도와줬다는것 따윈 알지도 못했다. 경비대가 소매치기와 깡패들만을 체포한채 순순히 물러나자 그냥 그런가보다 하며 주문한 음식이 나오길 기다릴 뿐이었다. 그리고 패럴을 뒤에서 지켜보던 레나는 자신이 호위하는 대상인 패럴 왕자가 저쪽의 검은 드레스를 입은 아가씨에게 마음을 빼앗겼다는걸 어렵잖게 짐작 할 수 있었다. 레나 자신이 알고 있는 패럴 왕자는 신분이나 직위를 내세워 일을 처리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몰래 그녀들을 돕는 태도나 좀체 시선을 떼지 못하는 모습은 누가봐도 상대에게 관심, 아니 호감을 가진 자의 태도였으니까. 하지만 레나는 그 모습에 되려 안타까워 했다.

'도와줬으면 이걸 빌미로 가서 말이라도 걸면 될것을...'

충심을 다해 패럴 왕자를 전력으로 수행하고 있던 레나는 언제라도 패럴 왕자의 모든 요구에 응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게다가 남자 나이 열아홉이면 한창 혈기가 넘칠 나이. 그럼에도 아직까지 자신에게 손을 대지 않는것은 신기하게 생각될 정도였다. 그런 점잖은 왕자가 지금 처음으로 이성에게 흥미를 보이고 있는것이다. 하지만 이성과의 교제 경험이나 전혀 없어서일까, 혹은 단순히 부끄러워서일까. 왕자는 그녀들을 몰래 돕고 멀찍이 떨어져 지켜볼 뿐. 그 이상의 무언가를 하려고 들진 않았다. 답답해서 한마디 거들고 싶었지만 그것은 하녀의 본분을 벗어나는 일. 표면상 어디까지나 자신의 직위는 왕자의 편의를 돕는 일개 하녀. 주인에게 함부로 조언을 하는것은 자신의 역할이 아니었다. 레나는 하고 싶은 말을 속으로 꾹 삼켜넘겼다.

'이름이라도 묻고싶지만... 여, 역시 뜬금없어 보이겠지?'

패럴 왕자는 패럴 왕자 나름대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이미 책을 사러 나왔다는 사실따윈 머릿속에서 까맣게 잊혀진채였다. 저 검은 드레스를 입은 여성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었고 또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지만... 책이나 읽던 그가 그렇게 쉽게 생면부지의 아가씨에게 다가갈 수 있겠는가? 패럴이 책을 많이 읽어오긴 했지만 남녀의 연애에 관한 책은 그닥 읽어본 적 없었다. 물론 연애가 책을 읽는다고 느는것은 아니지만, 원래부터 많은것을 책을 통해 스스로 배우고 익혀왔던 패럴이다. 잘 알지도 못하는 이성에게의 접근을 쉽사리 실천할 정도의 용기는 없었다. 결국 음식을 사서 돌아가는 셀린과 케이트의 뒤를 멀찍이 떨어져 따라갔다.

'그런데... 길눈이 어두운건가? 굉장히 헤매는데.'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한 눈에 보기에도 두 여성은 갈길을 똑바로 찾지 못하는듯 여기저기 헤멨다. 한번 지났던 길을 또 가기도 하고 갑자기 방향을 틀어 정반대로 향하기도 했다. 거리의 풍경이 눈에 익지 않았던 둘은 그렇게 돌아가는데만도 수십분 이상을 소모했다. 그렇게 두시간여가 걸려서야 겨우 진석이 기다리는 저택에 도착했고, 그 뒤를 따르던 패럴 왕자는 그녀들이 집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확인하고 나서야 자신이 뭘 하고 있는건지 깨달았다.

"...레나."

"네, 하명하십시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나 이래도 되는걸까. 초면의 상대를 멋대로 돕고 집까지 뒤를 미행하고."

그야 당연히 안될 일. 그저 돕는것까진 모르겠지만, 함부로 뒤를 캐는건 아무리 호감을 가졌다고 해도 상식적으론 해선 안될일. 하지만 레나는 왕자의 편이었다.

"...괜찮습니다. 호의를 가지고 하신일이니까요. 그렇다고 별달리 무슨 일을 하신것도 아니고 그저 집까지 무사히 돌아가는걸 확인하신거 아닙니까. 그러니, 괜찮습니다."

교묘히 말을 돌려 패럴 왕자의 태도를 긍정하는 레나. 패럴 왕자는 레나가 자신의 행동을 지지하자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렇지. 그냥 그 뿐이었으니까. 응. 그럼... 오늘은 이만 돌아가지."

"알겠습니다."

패럴 왕자는 발길을 돌려 왕궁쪽으로 향했다. 돌아가는 와중에도 몇 번이나 고개를 돌려 그녀들이 들어간 집쪽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을 바로 곁에서 지켜보는 레나는 답답했다. 쑥맥이라고 할까 순진하다고 할까. 일국의 제 2왕자라면 그냥 대놓고 신분을 밝히며 들이대도 어지간한 여자는 다 거꾸러트릴 수 있으련만.

'정말이지 이 왕자님은... 후우.'

안되겠다. 그냥 내버려두면 이 왕자는 백년 천년이 지나더라도 아까 그 검은 드레스의 여성에게 한발짝도 다가가지 못할것이다. 레나는 왕궁에 돌아가면 손을 써서 왕자를 돕기로 마음먹었다. 이래보여도 레나는 왕자의 경호를 전속으로 담당하는 만큼 의외로 높은 신분이었고, 왕궁 내에선 휘하에 부릴 수 있는 부하들도 여럿 있었다. 그들을 시켜 저 저택에 대해 조사하게 할 생각이었다. 저 집에는 누가 살고 있는지, 그리고 두 여성의 정체는 무엇인지. 확실히 조사해서 패럴 왕자를 은연중에 도울 계획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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