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10. -- > * 109화 *
"그래서. 대체 뭘 했길래 이렇게 늦은건지 이야기나 들어보자."
그리고 저택안에선 진석의 추궁이 이어졌다. 처음엔 이렇게나 늦게 돌아온게 괘씸해서 무작정 화부터 냈지만, 잘 생각해보니 분명 도중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늦은거겠거니 하고 생각됐다. 셀린과 케이트는 그제서야 겨우겨우 사정의 설명을 했다. 셀린 자신은 길을 전혀 찾을 줄 몰라 케이트에게 전적으로 맡겨두었고, 케이트는 인간의 도시 구조엔 익숙하지 못해 이래저래 헤멨다는것. 그리고 중심가에 도착해 거리를 구경하며 잠시 돌아다녔던것과 도중에 소매치기 일당과 얽혀 싸웠던것. 마지막으로 돌아오면서까지 또 다시 길이 헷갈려 이리저리 헤메다가 늦었다는것까지.
'...막상 설명을 듣고나니 그렇게 화낼일도 아니었군.'
지금까진 자신이 쭉 옆에서 데리고 다녀서 그렇지, 이 둘은 인간이 아닌 묘인족과 마족이다. 당연히 인간의 도시에 익숙하지 못할거라는것을 생각했어야 했는데... 그냥 간단한 심부름을 보냈다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생각하지도 못한 부분때문에 이런일이 벌어지기도 하는구나. 진석은 괜시리 허탈해졌다.
'이놈의 게임, 난이도가 높은거야 아니면 현실적인거야? 정말 쓸데없는 부분까지 신경을 써놔서는... 에잉.'
진석은 게임을 탓하며 음식이 든 바구니를 들고 일어섰다. 묵직한 바구니 안엔 여러가지 음식들이 차곡차곡 들어있었고, 지시한대로 술도 한 병 딸려있었다. 다 식어서 굳은터라 그냥 먹기도 그러니 부엌에 가져가 조금 손을 볼 생각이었다. 머쓱한 태도로 두 노예에게 말하는 진석.
"뭐... 잘 모르는게 있다면 앞으론 명령이라고 무조건 따르려고 하지말고, 모르는건 처음부터 그렇다고 확실하게 말을 하도록 해. 잘 모르는 일이라면 나도 너희들을 타박할 생각따윈 전혀 없으니까. 지금 화를 낸것도 너희들이 생각이상으로 너무 늦어서 걱정하고 있었던 거니까. 다음부턴 주의해. 알겠어?"
"심려끼쳐드려 면목없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
여느때처럼 공손한 태도로 고개를 숙여보이며 대답하는 케이트. 셀린도 헤쭉 웃어보이며 대꾸했다.
"헤헤... 알겠다냐. 주인님... 참 상냥한 사람이다냐."
어... 뭐? 내, 내가 상냥해? 음식 바구니를 들고 부엌으로 향하려던 진석은 셀린의 말에 멈칫했다.
'상냥하다니? 뭔 소리야 이게. 나의 어디의 어느 부분이? 얘 뭐 잘못먹었나?'
셀린은 발딱 일어나더니 진석에게 쪼르르 다가와 음식 바구니를 대신 뺏어들며 쑥스럽다는듯 얼굴을 살짝 붉히며 설명했다.
"주인님은 배에서 케이트랑 내가 멀미로 누워있을때도 불만 한마디 않고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돌봐줬다냐. 지금도 제대로 심부름을 못한 우리가 잘못한건데 되려 걱정하고 있었다냐. 명령을 무조건 따르는게 아니라 모르는게 있으면 확실히 말하라고 세심하게 신경도 써줬다냐... 역시 주인님은 상냥한 사람이었다냐."
셀린의 말에 공감한다는 듯 응응 거리며 고개를 끄덕이는 케이트. 진석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너희들을 돈주고 노예로서 구입했다는 부분에서부터 상냥함~ 같은거하곤 이미 거리가 백만광년쯤 떨어진 인간이라는 증명이거든? 이것 참, 복종마법의 위력이 대단하달까. 얘들에겐 내가 뭘 하더라도 그저 믿고 따라야 할 주인님으로 보이나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녀석들을 일부러 학대하거나 괴롭힐 생각은 없다만...'
합이 4만 4천골드짜리 노예들을 재미삼아 학대해? 정신 나갔냐. 그 값어치를 할때까진 데리고 다니면서 써먹어도 시원치 않은걸. 하지만 자신을 향해 절대적인 신뢰의 눈동자를 빛내고 있는 둘을 보자니... 괜히 머쓱해졌다.
"쓰, 쓸데없는 소리는... 그거나 들고 따라와. 너희들도 배고플텐데 얼른 준비해서 먹자."
"알겠다냐! 사실 진즉부터 배가 고팠다냐. 얼른 고기 먹고싶다냐... 헤헤, 고기."
고기타령을 하며 입가에서 진짜로 한줄기 침을 주륵 흘리는 셀린. 얼핏 멍청해 보이는 모습이지만 예쁘장한 외모를 하고있다보니 그런 모습 조차도 어째 귀여워보였다. 그리고 케이트도 자리에서 일어나 이쪽으로 따라왔다.
"저도 준비를 돕겠습니다."
"그... 그러던가."
그리고 함께 부엌에 들어가 저녁 식사의 준비를 하는 셋. 식기를 준비하고 식은 음식을 다시 데우는것 뿐인 간단한 일이었지만 진석은 어째 나름대로 즐겁다고 느껴졌다. 두시간전만 해도 이 노예들을 상대로 이런저런 야한짓이나 할 생각에 머리가 가득차 있었지만, 밝게 웃으며 사소한 것이라도 자신의 일을 열심히 돕는 둘을 보고 있자니... 왠지 모르게 그런 생각이 머릿속 한쪽으로 스르륵 사라져버렸다. 게임을 진행하며 엮인 수많은 여자들과 육체관계를 나누었던 진석이었지만 가끔은 이런것도 나쁘진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시당초 마법으로 나에 대한 호감과 애정을 강제한 노예들이지만.. 그래도 누군가 날 전적으로 믿고 따르며 좋아해준다는게... 싫진 않구만.'
문득 피터슨과 그의 노예였던 세이라가 떠올랐다. 그 둘도 이런 느낌의 관계였던걸까? 더불어 간만에 아르데나도 보고 싶었다. 우연히 마주쳐서긴 하지만 자신이 저주를 깨트리고 구해줬던 소녀 아닌가. 아직 어려서 편리한 장기말 겸 여동생 정도로나 삼으려 했지만 결국 자신에게 남녀의 정까지도 바래오던 아이. 2년 뒤라던가 뭐라던가 얼버무리며 얼렁뚱땅 넘기긴 했었지만... 진석은 이런저런 생각을 떠올리며 셀린, 케이트와 함께 테이블에 둘러앉아 저녁 식사를 시작했다. 결국 식사 후엔 그녀들에게 손대는 일 없이 평범하게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오전. 아침 일찍 시장에서 적당히 장을 봐온것으로 식사를 마친 진석은 셀린과 케이트를 집에 놔둔 채 혼자서 대투기장을 찾아갔다. 대투기장 입구 부근 한쪽에는 임시 천막과 간이 경기장이 세워져 있었는데 아무래도 그쪽에서 토너먼트의 참가 신청을 받는 모양이었다. 사람이 많지 않을까 했는데 휑하니 썰렁한게 의외로 접수 신청을 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 모양이었다. 대투기장에 시합을 보러 들어가는 이들은 있어도 천막쪽으로 가는 이들은 하나도 없었다. 앉아서 쩍쩍 하품을 하고 있던 접수원은 진석이 다가가자 건성거리는 태도로 말을 해왔다.
"에, 혹시 토너먼트 참가접수 하시려고?"
"네. 어떻게 하면 되죠?"
"흐... 저기 보이쇼? 안쪽에."
오른손 엄지를 들어 자신의 등 뒤, 천막 안쪽을 가리키는 접수원. 뭔가 해서 안쪽을 바라보니 튼튼한 금속제 중갑을 차려입은 건장한 체구의 전사가 네 명이나 대기하고 있었다.
"참가신청을 하시려면 최소 저 중 한 명은 꺾어야 하는데. 단 무기 금지. 맨손으로."
접수원은 진석이 허리에 찬 단검 벨트를 가리키며 손가락을 좌우로 흔들었다. 가만 보니 저들은 중갑뿐만 아니라 허리에 목검을 차고 있었다. 목검이라고는 하지만 그것도 엄연한 무장이다. 숙련자의 손에서 휘둘러지는 목검이라면 사람 뼈 하나둘 쯤 분지르는건 일도 아니다. 게다가 중갑까지 두른 전사를 맨손으로 꺾으라고? 이거야 원. 평범한 수준의 사람이라면 절대 이길 수 없는 핸디캡이 분명했다. 실제로 많은 수의 참가희망자들이 저들의 손에 일방적으로 얻어터져 쫓겨났다. 접수원의 얼굴엔 뭐 네 놈도 마찬가지겠지 하는 표정이 서려있었다.
"한 명만 꺾어도 참가 가능하지만... 인원 수는 자기 맘대로 지정 가능. 한 번에 많이 꺾으면 꺾을수록 윗쪽 시드에 배치되니까. 자, 몇 명이나 상대할 자신이 있으신지?"
진석을 바라보며 이죽거리는 접수원. 진석도 지지않고 히죽 웃으며 응수했다.
"네 명 전부 다."
"허? 하아, 이보쇼. 내가 도발한거긴 하지만 객기 부리면 못써. 저들은 브래들리 저하의 직속군에 속한 정예병이라고. 저들 두셋이면 어지간한 기사와도 견줄 수 있는 실력자들이란 말이지. 거 젊은 양반이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물론 지금까지 한두명 정도와 겨뤄서 이기고 출전자격을 획득한 참가자들도 있었다. 비록 그 숫자는 적긴 했지만 정말 강한자들도 있긴 있었던 것이다. 그런 참가자들과 상대했던 정예병들 역시 부상을 당했기에, 몇차례 이쪽의 인원이 교체되기도 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맨손으로 중갑을 걸친 정예 네 명 전부를 상대한다니. 말도 안되는 이야기다. 접수원의 충고에 진석은 깜짝 놀랐다는듯 호들갑을 떨며 대답했다.
"어이구, 그래요? 그렇군요. 그건 또 몰랐네요. 그런 의미에서 역시 네 명 전부 다."
"...거참. 사람이 생각해서 말을 해주면 곧이 곧대로 받아들일 줄도 알아야지. 후회하지 마쇼! 어이, 자네들! 일이야. 나와."
접수원의 부름에 안쪽에서 잡담을 나누며 대기하고 있던 병사들 중 한 명이 고개를 빼며 반문했다.
"어? 몇 명? 한 명?"
"아니. 자네들 전부 다라는데?"
그리고 잠시간의 침묵. 이내 병사들 사이에선 폭소가 터져나왔다.
"푸하하하! 뭐? 전부?"
"아침부터 원... 자살희망자인가?"
낄낄거리며 비웃었지만 일은 일. 병사들은 진석의 지명대로 네 명 전원이 목검을 빼어들며 천막 옆의 간이 경기장으로 올랐다. 진석도 가볍게 몸을 풀며 그들의 뒤를 따라 경기장으로 올라갔다. 근처를 지나던 행인들은 간이 경기장에 심사를 위한 병사들과 진석이 오르는 것을 보곤 정말 잠깐 사이에 수십명이 모여들어 구경을 하기 시작했다. 개중엔 노름꾼이라도 섞여있었는지 그새 서로서로 돈을 걸고 내기하는 소리도 들려왔다. 그 태도들이 지극히 자연스러운게 아무래도 대투기장 바로 앞이라 그런지, 이런 시합을 가지고 하는 내기나 돈놀이가 일상화 되어있는듯 했다.
"브래들리 왕자님의 정예병들쪽에 걸지."
"아, 나도."
"에이. 다 그쪽에 걸면 내기가 안되잖아?"
"그래그래. 내기란 유리해 보이는 쪽에 걸기만 해선 재미없다고. 그러니 난 저 청년쪽에 은화 한 닢."
"맞어. 뭔가 한가닥 할 자신이 있으니 저렇게 호기 부리는거 아니겠어? 나는 두 닢!"
사람들은 제각기 왁자지껄 떠들며 서로서로 돈을 한쪽에 모아놓고 내기를 했다. 겉으로 보이는 모양새만 봐선 진석이 압도적으로 불리하지만, 비교적 꾼처럼 보이는 이들은 이따금 진석에게 걸기도 했다. 하지만 역시 유리한건 정예병 쪽으로, 대충 병사쪽 8에 진석 2정도의 비율이 형성되었다. 잠시 손목과 발목을 풀어주며 흥정이 오가던것을 지켜보던 진석. 대충 몸풀기를 끝내곤 자신을 사방에서 에워싼 병사들을 둘러보며 턱짓을 했다.
"자 그럼. 관객들도 준비가 된 것 같고... 우리도 슬슬 시작해볼까?"
"젊은 친구가 건방지구만. 생긴거 만큼의 실력이 있다면 좋겠는데."
"하, 말만 번드르르 해가지고선. 실전 경험이나 있나?"
진석을 포위한 그들은 한마디씩 던지며 목검을 꽉 쥐고 단단히 싸울태세를 취했다. 병사들은 튼튼한 중갑을 두르고 있어 어지간한 타격으로는 피해도 줄 수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머리만큼은 별다른 보호구를 착용하지 않은채였다. 맨손타격으로 그들을 쓰러트리려면 반드시 머리를 노려야 했다. 하지만 이들도 정예라고 불릴정도의 실력자들. 나름대로 검술의 수련을 쌓았기에 순순히 머리를 노출시킬리 없었다. 하지만 진석에겐 고작 네 명쯤, 갑옷을 입었거나 말거나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진석 자신의 힘으로 가하는 일격이라면 머리건 갑옷위건 어차피 치명적인 공격일테니까.
'애시당초 나는 이번 플레이에선 거의 매번 다수의 적과 싸워왔는걸? 네 명쯤이야 여유지. 그리고 나름 실력이 있다고 해봐야 일개 병사들. 무기도 진검이 아니라 겨우 목검. 게다가 날 죽이려고 덤비는것도 아니고 그냥 몇대 두들겨서 쫓아내겠다는 정도의 마음가짐으로 덤빌테니...'
선수필승이다. 방심하고 있을때 단번에 끝내주마. 그렇게 생각한 진석이 자세를 잡자 간이 경기장 위엔 긴장이 흘렀다. 생각외로 병사들은 상대가 진석 혼자임에도 방심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실제로 병사들과 상대해 그들을 쓰러트리고 참가자격을 얻은 자들도 적지만 분명 있긴 있었으니, 이들이 방심을 하지 않는건 당연한 태도였다. 그리고 먼저 움직인것은 진석 쪽이었다.
'시클론!'
시클론을 걸며 라파가의 스텝으로 정면의 병사에게 총알처럼 튀어나갔다. 일부러 앞을 맡은것을 보니 아마도 이 병사가 넷 중 가장 실력자일터. 센 상대부터 먼저 쓰러트려두는게 싸움을 편히 풀어가고 기선을 제압하는 방법! 과연 그 병사는 순식간에 눈 앞에서 사라진 진석의 모습에 당황했다. 아니, 갑자기 스슥하고 없어졌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샌가 다시 나타나 턱을 노리고 주먹을 휘두르는게 아닌가? 급한대로 목검을 세워 막으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콰작! 진석의 펀치는 목검을 얇은 송판처럼 부숴버리고 병사의 턱을 후려갈겼다.
"크어!"
턱이 덜컥 돌아가고, 그 병사는 단번에 눈이 풀린채 무릎을 꿇고 바닥에 쓰러져버렸다. 너무 순식간의 일이라 지켜보던 구경꾼들이나 천막 안쪽의 접수원, 그리고 진석을 상대중인 병사들 역시 무슨일이 일어난것인지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뭐..."
"수, 순간 사라졌어?"
진석은 그들의 반응을 무시하고 재차 라파가의 숏스텝을 밟으며 두번째의 병사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화들짝 놀라며 엉겹결에 목검을 찔러왔지만 이건 그저 당황해서 내지르는 평범한 직선 공격. 아니 공격이라기보단 몸에 배어있는 반사적인 행동에 가까웠다. 가볍에 피하고 파고들며 무릎으로 그 병사의 복부를 올려쳤다. 중갑을 입은 건장한 체구의 병사의 허리가 반으로 접히며 허공에 떠올랐다. 몸을 빙글 돌려 허공에 뜬 그의 옆구리에 발차기를 내지르는 진석. 퍼억하고 갑옷이 찌그러지며 병사의 몸이 경기장 밖으로 나가떨어졌다. 질겁하며 흩어지는 구경꾼들.
"...세상에."
"가, 갑옷을 입은 장정을 가볍게 날려?"
이렇게 되니 놀라지 않는 이들이 없었다. 뭘 했는지도 잘 모르겠는데 순식간에 두 명이 나가떨어진 것이다. 다들 처음 보는 상황이었다. 남은 두 병사들은 짧게 눈빛을 주고 받더니 동시에 진석의 등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 자식이!"
"타아아아앗!"
소리를 지르며 좌우에서 달려드는 둘. 폼을 보니 한 명은 머리위로 목검을 쳐든게 내려치기로, 다른 한명은 횡베기를 하려는 것 같았다. 좌우 중 어느쪽을 막거나 피하려고 해도 다른 한 쪽 목검의 공격에 당하게 될터, 괜찮은 협공이었다. 문득 진석의 머릿속에 셀린이 보여줬던 만쇄격의 움직임이 떠올랐다. 진각을 밟으며 쌍장을 동시에 내지르던 수법.
'어디, 비슷하게 흉내라도 내볼까?'
진석은 물러나거나 피하기는 커녕 오히려 병사들에게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좁혀지는 거리. 진석은 그들의 간격에 들어가기 직전에 자세를 낮추고 라파가의 숏대쉬로 섬전같이 파고들며 양쪽을 향해 동시에 쌍장을 날렸다. 팔의 간격이 끝나는 거리에서 갑옷위로 정확히 적중하는 장타. 원래 공격이란 운동에너지가 전달되는 마지막 지점에서 적중할때 위력이 가장 큰 법. 주먹을 뻗는 도중에 맞으면 그 위력이 반감되듯, 끝까지 다 뻗어진 지점에서 맞춰야 그 충격을 제대로 전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진석이 펼친 쌍장이 바로 그러했다. 터어엉하고 무언가 묵직한 소리가 울려퍼지며 두 병사는 무슨 대포알에라도 맞은것처럼 각기 좌우로 튕겨져 나가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바닥에 나가떨어져 의식을 잃은 병사들이 입은 갑옷위론 진석의 손바닥 자국이 선명히 찍혀있었다. 그 모습에 주변엔 잠시 쥐 죽은듯한 침묵이 감돌았다. 하지만 사람들을 꿀먹은 벙어리로 만들어 버릴정도로 인상깊은 공격을 펼친 장본인인 진석은 왠지 불만스러웠다.
'아~ 이게 아닌데. 이래서야 뭐 그냥 펀치랑 다를게 없잖아. 주먹대신 손바닥으로 쳤다는 차이밖에는 없구만. 역시 따로 스킬같은게 없으면 셀린이 쓰던 충격파 같은건 안나오는건가.'
손을 휘휘 저으며 간이 경기장을 내려가는 진석. 그리고 그 뒤에서 구경꾼들의 환성이 터져나왔다.
"오오, 뭐야 저녀석! 엄청난데!"
"마지막에 두 명을 한꺼번에 날려버리기 전에 파고드는건 진짜 보이지도 않았어!"
"내기에 이겼구만! 흐흐, 내기란 역시 이런 재미지."
"몇배냐 이거! 어이, 돈 줘 돈!"
구경꾼들의 소란을 뒤로하고 천막으로 돌아간 진석. 조금전까지 건성으로 대하던 접수원의 태도는 180도 달라져 있었다. 그는 약간 겁먹은 표정으로 진석에게 필요한 서류와 펜을 내밀며 설명했다.
"어, 저, 저기. 추... 출전하시려면 성함과 현재 거주하고 계신 곳 주소가 필요합니다만. 여관이나 호텔이라도 상관없으니 차후 통지를 받으실 수 있는 곳을..."
"음, 이름하고 주소라."
이거 또 골치아프군. 안 그래도 지금까지 쭉 써오던 래스커라는 가명은 폐기하기로 마음먹었었다. 여기까지 클립튼 일행이 나타날리는 없을테지만 한 번 책잡혔던 이름을 또 다시 쓰기엔 이래저래 찝찝했었으니까. 잠시 생각하던 진석은 모데로라는 가명을 적었다. 모데로. 일전 클립튼 일행과 마주쳤을때 자신과 마찬가지로 바일리 델 비엔토를 쓰던 솜브라 교단의 젊은 암살자의 이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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