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10. -- > * 110화 *
'...으히힛.'
진석이 모데로의 이름을 사용한데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 미리안의 설명으로는 분명 창염의 검이 브래들리 왕세자의 애병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온건한 방식으로는 창염의 검을 빼앗을 수 없을것이 확실했다. 일국의 왕세자가 아끼는 무기인데 설득으로 얻거나 돈을 주고 산다는것 따윈 생각해 볼 수도 없었다. 애당초 그렇게 얻어낼 수 있는거라면 미리안이 자신에게 이 일을 지시하지도 않았겠지. 결국 훔쳐내거나 강탈하는 수를 쓸 수 밖에 없을터였다. 그래서 이번엔 폭풍의 지팡이때처럼 왕궁에 몰래 잠입한다거나, 대지의 눈때처럼 신분을 위장한다던가 하는 방법 말고 그냥 가장 간단한 방법을 쓰기로 했다. 직접적인 강탈. 브래들리 왕세자와 마주하게 된다면 그냥 대놓고 실력행사를 해서 그가 지니고 있을 창염의 검을 빼앗아 도망칠 생각을 한 것이다.
'그것도 모데로놈의 이름을 대놓고 사칭하면서 말이지.'
마지막으로 클립튼 일행을 봤었던 것은 애거스트 공화국이다. 그들에게서 도망친지는 대략 2주 가량이 지났지만, 그들이 아무 이유도 없이 이 북동쪽 끝의 올린스턴 왕국까지 오진 않았을 것이다. 그란델 왕국을 교단의 음모에서 구하려는 이들이 무엇때문에 올린스턴 왕국까지 오겠는가? 설령 이곳에 온다 하더라도 진석이 모데로의 이름을 사칭한채로 브래들리 왕세자에게 해를 입히고 창염의 검을 강탈해 달아난다면 그때부터 모데로란 존재는 범죄자가 된다. 적어도 올린스턴 왕국의 영향권 안에선 모데로가 빼도박도 못할 수배자가 되는것이다.
일국의 왕세자에게 해를 끼치고 그의 소유물마저 강탈해서 도망갈 정도의 중요 범죄자라면 올리스턴 왕국 측에서 주변 나라들에 체포와 수배의 협조를 요청할 가능성도 있었다. 국경을 바로 인접한 두 나라, 유곤 왕국이나 옐 프람 성국. 비록 전쟁의 기미가 높아져있다곤 하지만, 주전파인 브래들리 왕세자가 진석의 손에 부상이라도 입는다면 전쟁 따윈 한동안 흐지부지 될것은 분명. 그럼 유곤 왕국이나 옐 프람 성국은 올린스턴 왕국과 가능한 척을 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모데로라는 범죄자의 체포에 적극 협력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게 되면 대륙 북동부 일대가 클립튼 일행에겐 지뢰밭이 되는것이다.
'모데로 놈도 나와 마찬가지로 쌍단검을 주무기로 쓰는데다, 머리카락의 색이 검다는 특징도 같지.'
물론 매력 스테이터스는 진석이 모데로보다 압도적으로 높다는 차이는 있었지만, 어차피 경비대들은 사소한 요소 몇가지 만으로도 쉽게 범죄자를 특징하곤 했다. 진석이 창염의 검을 강탈해서 도주한 후 정말 만에 하나라도 클립튼 일행이 어정어정 대륙 북동부에 오기라도 했다간 모데로가 붙잡혀 곤욕을 치르게 될 수도 있는것이다. 물론 브래들리 왕세자 본인이라거나, 혹은 진석의 얼굴을 본 자들과 직접 대질심문을 한다면 누명이야 쉽게 벗겨지겠지만 애당초 클립튼 일행도 이유도 모를 체포에 순순히 응해 모데로를 내어줄리는 만무. 백퍼센트 트러블이 발생할 것이다. 이런식으로 아무리 사소한 거라도 클립튼 일행에게 엿을 먹일 수 있다면 진석은 앞으로도 뭐든 시도할 생각이었다.
'그럼 올린스턴 왕국내에서 머무는 동안은 아예 셀린이랑 케이트에게도 가명을 쓰게할까? 셀린은 그 비엔족 궁수의 이름이었던 스텔라로, 케이트는 모데로 놈의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던 신관 에이미의 이름으로. 아니면 돈만 주면 뭐든 하는 용병들이라도 고용해 클립튼 일행이 움직일만한 경로에서 범죄라도 저지르게 하는게 좋을지도 모르겠군. 가능한 클립튼 일행과 비슷한 구성으로 인원을 맞추고 가명을 쓰게한채로 말이야. 그렇게 하면 클립튼 일행은 본인들이 하지도 않은 범죄의 누명을 쓰게 되고 더더욱 경비대에게 쫓기게 될테지. 그러면 현상금을 거는데에도 더 확실한 당위성이 생기고... 경비대와 더불어 현상금을 노리는 모험가, 용병들, 거기다 현상금 사냥꾼 따위들에게 동시에 쫓기게 된다면 정말 대륙 동부 전체에선 발 붙이기도 힘들겠지.'
아무튼 이름은 그렇다 치자. 하지만 주소. 이게 걸린다. 순진하게 지금 머무는 안가의 주소를 적어낼 순 없었다. 안가를 제공해준 포먼도 바보가 아닌이상 자신의 명의로 이 저택을 구매했을리는 없지만, 저택의 주소를 그대로 적었다간 진석이 창염의 검의 강탈에 성공해 도주했을 경우에 문제가 될 수도 있었다. 확률은 희박하다고 해도 그 주소를 역추적해 포먼의 신원이 드러나거나 붙잡히게 될 수도 있었다. 물론 포먼 따위가 잡히거나 죽더라도 교단의 궁극적인 목표인 허신강림엔 아무 지장 없을테지만... 자신의 행동 때문에 괜히 쓸데없는 손실을 초래할 순 없었다. 지금까지도 이래저래 좌충우돌하면서 일을 해왔지만 결과만으로 보자면 완벽했는데, 여기서 망치고 싶진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진석은 머리를 살짝 굴렸다.
"음, 아직 숙소는 안 정했는데. 이 근처에서 가장 가까운 숙소가 어디죠?"
진석이 접수원에게 그렇게 묻자 접수원은 잠시 어어 하고 생각하더니 남쪽 방향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쪽 대로로 한 10분쯤 쭉 가시다 보면 길 우측편에 꽤 큰 여관이 하나 있습니다. 랜섭 인 이라는 여관인데, 가격도 그런대로 저렴한 편인걸로 알고 있고 대투기장도 가까우니 아직 머물곳을 안 정하셨다면 적당히 거기서 묵으시는것도..."
"뭐 그럼 거기로. 그 여관 주소는 모르니 대신 적어주시죠."
"아,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접수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진석에게 서류를 넘겨받고는 주소란에 랜섭 인이라는 여관의 상호를 대신 써넣었다.
"일단은 됐습니다만, 다음주 주말에 접수가 끝나고나면 에... 다다음주 초쯤에 한 번 모든 참가자들에게 예비소집 통지가 갈겁니다. 그때 확실히 참석해주지 않으시면 참가가 취소될수도 있으니 그것만 주의해주시면 됩니다."
"으음. 알았습니다, 뭐 그럼."
진석은 참가접수를 마친 후 천막을 벗어나 방금 그가 알려준 랜섭 인이라는 여관 방향으로 향했다. 물론 진짜로 그 여관에서 묵을 생각이 있는건 아니었다.
'훨씬 편하고 좋은 저택을 놔두고 내가 뭐하러 여관따위에서 묵어? 뭐 연락통지 따위야 간단히 해결할 수 있지.'
길을 따라 잠시 걷다보니 머지않아 접수원이 알려준 여관 랜섭 인이 눈에 들어왔다. 3층 건물인 이 여관은, 과연 제법 큼직했다. 창문들만 봐도 객실수가 꽤나 많은것 같았다. 거침없이 안으로 들어서 카운터에 앉아 있는 중년의 여관 주인에게 다가간 진석. 여관 주인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싹싹한 태도로 이쪽에게 물어왔다.
"아이고, 어서오십시오. 혼자이십니까?"
"아니. 방을 얻으러 온게 아니라... 부탁을 하나 드리러 왔습니다만."
뭐야, 손님이 아닌가? 여관 주인의 낯은 대놓고 찌푸려졌다. 하지만 진석이 주머니에서 금화를 열닢이나 꺼내 카운터 위에 올려놓자 여관 주인의 눈은 대번에 번쩍 뜨여졌다.
"아주 간단한 부탁입니다만."
진석이 작게 속삭이며 금화를 여관 주인쪽으로 슥 밀자 그는 금화와 진석의 얼굴을 두어번쯤 번갈아 보더니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며 돈을 받아 챙겨넣었다. 여관 주인은 에헴 하고 헛기침을 한 번 하곤 진석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역시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말씀만 하시죠.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아니 뭐 위험하거나 어려운 부탁은 아니고... 아참. 그전에 하나만 묻죠. 이 근처에서 일찍 열고 늦게까지 영업하는 식당이나 술집이 있습니까?"
"아, 네. 바로 이 길 건너편 사거리쪽에 토박이들이랑 대투기장 도박꾼들 상대로 장사하는 식당이 하나 있는데 거기가 거의 하루 종일 영업하죠. 거기 주인이 삼형제인데 새벽에 영업준비 하느라 너댓시간쯤 닫는거 빼면 교대로 종일 장사 합니다."
좋아. 딱 좋은 가게가 있었구만. 진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주인에게 금화를 두 닢 더 건네었다.
"앞으로 한 2주... 정확히는 토너먼트가 끝날때까지만 숙박명부에 모데로라는 이름을 올려놔주시죠. 물론 방을 쓰겠다는건 아닙니다. 그냥 명부에 이름만 올려두시면 됩니다. 안 그래도 방금 토너먼트에 참가 접수를 하고 오는 길인데, 참가자들 주소를 요구하더군요. 내가 여기 캐버너에서는 애인집에서 머무르고 있는데... 이게 나름 사정이 좀 있어서 그쪽으로 연락 통지가 오게 할 수 없거든요. 그래서 이쪽 여관으로 거처를 적어놓은터라."
"예예. 아이고 뭐 그러실수도 있지요, 허허허."
여관 주인은 진석이 금화를 또 두 닢이나 더 건네자 고개를 끄덕이곤 헤죽거리며 돈을 받아 챙겼다. 진석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저, 모데로를 찾는 통지가 오면 제가 잠시 외출했다고 둘러댄 다음 통지를 대신 접수하세요. 그리고 그 통지내용을 아까 저한테 일러준 식당쪽에 사람을 보내 알려주시면 됩니다."
"아니... 왜 하필 식당쪽으로? 머무르신다는 애인댁으로 사람을 보내 알려드릴 수 있습니다만..."
"말했잖습니까. 복잡하다고. 그... 이런말하기는 쪽팔리지만 양다리를 걸치고 있어서 괜히 사람이 오고가다 들통나면 골치 아파지거든요. 대신 부탁대로 식당쪽에 사람을 보내 통지 사실을 일러주면 제가 나중에 여기 다시 들러 금화 열닢을 더 드리도록 하죠."
진석은 자신의 매력이 높아 NPC들에겐 대단한 미남으로 보인다는 점에 착안해 일부러 자신을 여자에게 양다리나 걸치는 난봉꾼처럼 가장해 여관 주인에게 그런 거짓말을 했다. 이 중년의 여관 주인은 돈 앞에서 태도가 싹 바뀌는걸 보아하니, 이런식으로 얼버무려두면 자신의 이야기따윈 별로 깊게 생각하지도 않고 돈을 받기 위해 시킨대로 행동할게 분명했다. 과연, 여관 주인은 금화 열 닢을 더 준다는 이야기에 맡겨두라는 듯 웃는낯으로 열성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믄요. 혹 제가 자리를 비우더라도 종업원들에게 일러둘테니 그쪽 앞으로 뭔가 통지가 오면 바로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제가 실은 여기 묵지 않았다거나, 부탁한 내용들에 대해선... 아시죠?"
"여부가 있겠습니까. 입단속 정도는 알아서 하겠습니다."
여관 주인 입장에선 손해볼것도 뭣도 없는 너무 좋은 돈벌이 이야기였다. 그냥 숙박 명부에 이름만 잠시 올려두고 통지가 오면 근처 식당에 이야기를 전달해 주는 댓가로 금화를 열닢이나 준다니. 딱히 법을 어기는 일도 아니고 위험이 따르는 것도 아니었다. 정말로 사소한 부탁 수준의 일. 안 그래도 방금전엔 금화를 열두닢이나 받았다. 손님을 한참이나 받아야 벌수있는 이런 거금을 그저 간단한 말 몇마디로 벌었으니 그의 입장에선 이런 부탁을 해온 진석이 사랑스러워 보일 정도였다. 진석은 여관 주인에게 다짐을 받아두곤 다시 거리로 나섰다. 돈에 쉽게 넘어가는 여관 주인이라 뭐 딱히 믿을만한 상대는 아니었으니 또 다른 준비가 필요했다.
'좋아. 그 다음엔...'
진석은 다음엔 여관 주인이 일러준 식당으로 찾아갔는데, 그 식당의 부근에서 푸른 나무집이라는 이름의 또 다른 여관을 하나 눈 여겨 봐두었다. 식당에 들어간 진석은 식당의 주인을 붙잡고 랜섭 인의 여관 주인에게 한 것과 똑같은 부탁을 했다. 혹시 가게에 모데로라는 사람을 찾아와 뭔가의 통지 내용을 일러주려는 사람이 있으면, 그 내용을 대신 접수해둔 다음 푸른 나무집 여관에서 묵고 있을테니 그쪽에다 알려달라고. 삼형제 중 둘째라는 그 식당 주인은 기묘한 부탁에 미심쩍어 했지만 역시 손에 금화를 한움큼 쥐어주자 어려운 부탁도 아니니 반드시 그렇게 하겠다며 대번에 승낙했다. 부탁한대로 역시 푸른 나무집 여관쪽에 묵고 있을 자신에게 통지 사실을 일러주면 금화를 더 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비밀을 지켜줄것에 대한 확언도 받았다. 어차피 여관이나 식당 주인들의 비밀 엄수 약속따위 믿을게 못되었지만 자신이 캐버너에 머무는 동안만 입을 다물고 있으면 충분했다. 차후 금화를 더 주겠다는 약속을 해두었으니 그 돈을 받기전까진 이들도 입단속 정도는 잘 할것이다.
'그럼 마지막은 포먼에게 가볼까. 이거 바쁘군.'
그 다음 진석은 말로스 상사의 포먼에게 찾아갔다. 그리고 그에게 상황에 대해 간략히 설명한 후, 믿을 수 있고 입이 무거운 사람을 하나 빌려달라고 했다. 진석은 포먼에게서 사람을 빌려 그를 2주간 푸른 나무집 여관에 모데로라는 명의로 숙박시킬 생각이었다. 이렇게 하면 최초의 통지는 참가접수서의 주소대로 랜섭 인 여관으로 가게된다. 랜섭 인 여관에선 다시 식당쪽으로 통지를 전해주고, 식당측에선 또 다시 푸른 나무집 여관으로 통지를 전달하게 된다. 푸른 나무집 여관에 실제로 머무르고 있는것은 모데로라는 명의를 사용해 대신 머물고 있는 포먼의 부하. 포먼의 부하는 이쪽 사람이므로 진석이 진짜로 머무르고 있는 안가의 주소가 노출되는 일 없이 조용히 찾아와 통지의 내용을 전달해 줄 것이었다. 이렇게 하면 차후 모데로라는 가상의 인물을 추적하려 해도 중간에 그 흐름이 끊기게 될것이다.
'이렇게까지 대비를 할 필요는 없지만... 조심해서 나쁠건 없겠지.'
이러한 내용을 설명하니 그렇지 않아도 조심성이 많은 성격이었던 포먼은 진석의 아이디어를 대단히 맘에 들어했다. 어찌보면 사소한 부분이었지만 이렇게 함으로서 차후 저택의 주소를 통해 포먼 자신이 노출될지도 모르는 연결고리를 미연에 차단할 수 있었던 것이다. 포먼은 바로 부하를 푸른 나무집 여관으로 보내서 진석이 부탁한 그대로 지시해두겠다고 대답했다. 그렇게 일을 마무리하고 말로스 상사를 나와 보니 해가 중천에 뜬게 슬슬 점심때였다.
"후... 애들 기다리고 있겠군. 그럼 일단 돌아가서 밥이나 먹을까."
오늘은 오전부터 참 열심히 일했군. 진석은 스스로의 일처리를 대견해하며 셀린과 케이트가 기다리고 있는 저택으로 돌아갔다.
저택으로 돌아간 진석은 점심을 먹은 뒤에 셀린과 케이트를 데리고 마차에 타서 밖으로 나갔다. 그녀들에게 제대로 도시의 구경을 시켜주고 근방의 지리를 익히게 할 생각이었다. 대충 하루이틀 머물다 떠날거라면 모르겠지만 토너먼트때 까지는 머물러야 할 듯 했으니 둘에게도 근방의 길 정도는 익히게 하는게 낫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셀린이 마부석에 함께 타려는것까진 예상했는데, 이번엔 왠일인지 케이트도 같이 마부석에 타길 원했다. 의외였지만 안될것도 없으므로 진석은 쾌히 승낙했다.
마부석은 이름 그대로 말을 몰 사람이 타는 자리로, 그렇게 넓거나 편한 자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들의 희망대로 가운데엔 진석이, 그리고 그 왼쪽엔 셀린이, 오른쪽엔 케이트가 앉았다. 셋은 나란히 마부석에 앉은채로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며 중심가쪽으로 이동했다. 저택 부근의 길을 차근차근 둘러보며 그녀들에게 일대의 지리를 익히게 했다. 과연 어젯밤 실수를 했다는 기억에서인지 셀린과 케이트는 진석이 일러주는대로 착실히 주변의 지리를 머릿속에 새겨넣었다.
중심가쪽으로 나가선 천천히 둘러보며 간단한 쇼핑도 했다. 잠시 후 셀린의 손엔 커다란 꼬치구이가, 케이트의 손엔 몇 권의 책이 들려있었다. 그리고 진석은 검은색 가발과 머리띠를 하나 샀다. 나중에 토너먼트에 출전할때 이 가발을 눌러쓰고 나갈 생각이었다.
'그러면 장발이었던 모데로 놈과 조금이라도 더 비슷해 보이겠지. 내 대신 창염의 검 강탈범이라는 누명을 제대로 씌워줄테니까 기대하라고.'
머리띠는 자신의 빠른 몸놀림 때문에 도중에 가발이 벗겨지지 않도록 머리에 묶어서 고정할 용도였다. 그렇게 저택 부근의 지리와 중심가 일대의 필요한 가게들을 일러준 진석은 도시의 구획을 나누는 주요 대로와 대강의 도시구조에 대해 일러준 후 남문을 통해 도시 밖으로 나갔다. 셀린과 케이트는 당연히 의아해 했다.
"주인님. 그런데 도시 밖에는 왜 나가는거냥?"
"좋은 질문.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려고."
"만약의 사태라고 하시면...?"
도시 밖으로 빠져나와 주변에 들을 사람도 없는 터라 진석은 이번 자신이 해야할 일에 대해 그녀들에게 솔직히 설명했다. 이곳 올린스턴 왕국의 브래들리 왕세자가 지닌 창염의 검이 자신에겐 꼭 필요한 물건이며, 그가 주최한 토너먼트에 참가하여 브래들리 왕세자와 만나게 되면 창염의 검을 강제로 강탈해 도시에서 달아날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남들이 들으면 화들짝 놀랄만한 이야기였지만 진석의 노예인 그녀들은 자신들의 주인님이 설명하는 계획을 태연히 받아들였다. 케이트는 진지한 표정이 되어 질문했다.
"저희가 도울 일은 뭔가 없을까요?"
"뭐... 아직까지는. 가능하면 너희들 손까진 빌리지 않았으면 싶기도 하고... 만약을 대비해 따로 떨어져 너희들끼리만 도시에서 탈출해야 될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 지금까지 돌아다니면서 본 도시 내의 길이나 잘 숙지해둬."
창염의 검을 강경한 수단으로 탈취하기로 작정한 이상, 가능한 모든 대비를 해둬야 했다. 예전처럼 예상치 못한 사태로 제이스, 아르데나와 떨어졌었던 일을 또 다시 겪고 싶진 않았다. 진석은 어젯밤 잠자리에 들기 전 지도 창으로 도시 인근을 살펴보다, 도시 남쪽 부근에서 야트막한 동산과 그 일대에 형성된 작은 숲을 발견했던 것이다. 가도에서 조금 떨어진곳에 위치한 그 동산은 도시를 나와 마차로는 약 30분 거리. 도보라면 한시간쯤 걸릴 거리였다. 진석은 그곳까지 마차를 몰고와서 셀린과 케이트에게 유사시 탈출을 명하거나, 도주해야 할 일이 생기면 반드시 남문으로 빠져나와 이곳으로 와서 대기하라고 일러두었다.
'뭐 가도에서 그렇게 멀리 떨어진곳은 아니지만 작지만 숲도 있고. 딱 여기라고 특정해서 수색이라도 하는게 아닌 이상 쉽게 들키지는 않을테지. 유사시 따로 떨어져 행동할 경우 다시 뭉칠 임시 약속 장소 정도로는 충분히 써먹을 수 있을터.'
물론 앞으로 일이 어떻게 풀릴지는 진석도 알 수 없었다. 딱히 이렇게 도망갈 경로나 재집결 장소까지 생각해두지 않아도 될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경험상 일이라는건 언제 어디서 무슨 사태가 생길지 모른다는걸 상정해 둬야 했다. 어쩌면 정말 최악의 경우엔, 어쩌면 브래들리 왕세자를 만나지도 못해 창염의 검을 빼앗을만한 기회 자체가 오지 않을수도 있었다.
'어쩌면... 노예들은 괜히 샀는지도 모르겠군.'
자기 혼자라면 모르겠지만 지금은 노예가 둘이나 딸려있었다. 혼자만이라면 어떤 상황에서건 도망치거나 몸을 뺄 자신이 있었지만, 이 둘은 자신이 신경쓰고 책임져줘야 했다. 싸구려 노예라면 대충 쓰다 버려도 되겠지만 이들은 몸값만으로도 어마어마하지 않던가. 진석은 셀린, 케이트와 함께 잠시 주변의 경치 구경을 하다 마차에 올라 도시로 돌아갔다.
-----
오후. 저녁 식사 밑준비가 한창이던 즈음, 패럴 왕자의 전속 하녀인 레나는 어제 자신이 부탁해둔 보고를 받을 수 있었다. 어제 왕궁으로 돌아오자마자 은밀한 정보 수집에 일가견이 있는 부하들에게 저택의 조사지시를 해두었던 것이다. 한참 패럴 왕자의 저녁 식사 준비를 하던 레나에게, 얌전한 인상의 하녀가 다가와 손에 작은 쪽지를 하나 쥐어주곤 종종걸음으로 복도 저쪽으로 사라졌다.
'어디...'
어제 저녁에 부탁하고 오늘 낮까지 겨우 반나절 가량 조사한 내용이다. 당연히 많은 내용이 적혀있진 않았다.
'저택의 소유주로 등록되어 있는것은 윌슨 배링. 60대의 노인이라... 하지만 저택에 실제 기거중인것은 젊은 남성과 여성 둘. 그리고 남성의 이름은 모데로. 오늘 오전중에 외출해 토너먼트에 참가 신청을 한 것을 확인했으며 대단한 실력자로 파악됨. 여성 둘의 신원은 미확인이라.'
어제 레나가 일단은 최소한의 간단한 사항만 조사하라고 지시해뒀었기 때문에 이 정도의 정보만이 보고된듯 했다. 레나는 손 안에서 번쩍하는 스파크를 일으켜 아무도 모르게 쪽지를 태워버리곤 잠시 생각에 잠겼다.
'실 소유주와 거주자가 다른것쯤은 집을 빌렸거나 세를 치르고 임대한걸수도 있으니 별로 이상할 것 없지만... 이 모데로라는 남자는 좀 이상하군. 젊은 여자 둘과 함께 지내고 있는데다 토너먼트에 참가 신청을? 게다가 대단한 실력자라.'
그럼 이 셋의 정체는 무엇일까? 어제 자신이 봤던것들을 떠올려보는 레나. 헌팅캡을 쓰고 있던 여자쪽은 그냥 괄괄한 무술가 정도로 보였지만, 검은 드레스를 입고 있던 여성은 어째 몸가짐이나 행동에서 기품이 느껴졌었다. 왕궁에서 자주 보는 귀족이나 왕족 여성들과 비슷한 느낌이 풍겼달까.
'혹시 어딘가의 지체 높은 신분? 허나 그렇다면 굳이 중심가의 저렴한 대중 식당에서 직접 음식을 사갈 필요가... 게다가 길을 헤메던것만 봐도 확실히 이곳 출신은 아닌듯 싶고. 분명 독특한 마법같은것도 구사했었지.'
그래도 확실한 것은 있었다. 남자쪽을 자신이 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토너먼트에 참가신청을 하고 통과한 것만 봐도 이들 셋은 분명 평범하거나 정상적인 신분은 아니라는 것. 잘해봐야 모험가, 혹은 좀 특이한 용병 정도 일터. 그게 아니라면...
'어쩌면 이 두 여자는 모데로라는 남자의 동료나 연인일수도 있고... 만에 하나 노예일지도 모르지.'
물론 그 두 여자가 노예라는건 셋의 관계를 확실히 알지 못하는 이상 지나치게 비약적인 가정이긴 하다. 하지만 이 기묘한 셋에 대해 호기심이 일어나는건 사실이었다. 패럴 왕자를 위해, 그리고 자신의 추측이 사실인지 아닌지 알기 위해선 좀 더 조사가 필요했다. 실은 여자쪽이 노예같은 비천한 신분이거나, 혹은 모데로라는 남자의 애인이라 패럴 왕자가 가까이 할만한 상대가 아니었다면 쓸데없는 일이 벌어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자신이 알아둘 필요가 있었으니까. 레나는 다시 한 번 수하들의 손을 빌려 조사의 지시를 명령할까 하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남의 손에 여러번 부탁하다보면 자칫하다 패럴 왕자님의 귀에 내가 쓸데없는 짓을 한다는 이야기가 흘러 들어갈지도 모르니... 차라리 직접 조사해보는게 낫겠군.'
하지만 오늘은 이미 늦었다. 잠시후면 저녁 식사 시간이다. 차라리 저녁 식사 후, 패럴 왕자에게 말해서 내일 하루만 휴가를 받아두자고 생각했다. 어차피 내일은 별다른 예정이 없다. 패럴 왕자 역시 왕궁에서 머무르고 어제 구입한 책을 읽으며 보낼테니 자신이 곁에 없어도 별 상관은 없을터. 모시는 주인을 위해 하는 일이라지만 굳이 휴가까지 신청해서 하려는게 생면부지의 타인을 조사하는 일이라. 나도 참 유별나군, 레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