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10. -- > * 111화 *
캐버너로 돌아간 진석 일행. 중심가의 시장에서 이것저것 장을 봐가지고 돌아가 저녁 식사를 마쳤다. 식사 뒤 진석은 셀린과 케이트를 데리고 저택의 지하실로 내려갔다. 부엌 바로 옆에 딸려있던 이 지하실은 보존용 식품이나 기타 등등을 보관해둘만한 공간이었다. 지하실 하면 흔히 갖는 지저분하고 습한 이미지 따위완 거리가 먼데다가 제법 넓고 깔끔했다. 사람이 살던 집이 아닌지라 특별히 보관되어 있던 물건도 없이 휑했다.
'석회로 방수시공이라도 한건가? 곰팡이 같은것도 안 슨데다 깔끔해서 좋군. 아무튼 이전 클립튼 일행과 마주쳐서 도망갈때나, 오늘 아침에 참가 신청을 하며 병사들을 쓰러트릴때도 느꼈지만... 뭔가 다른게 필요해. 더 이상 바일리 델 비엔토 하나만으론 힘들것 같아.'
자신의 스테이터스는 높다. 그것도 무지막지하게 높다. 단순히 무력과 민첩 스테이터스만 놓고 보면 상대할만한 자가 별로 없을것이다. 하지만 그저 능력치가 높다고해서, 그게 모든일을 다 해낼 수 있다는 의미인건 아니었다. 뭔가 좀 더 다른것이 필요했다.
'어차피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머리가 아닌 몸을 쓰는 일. 그렇다면 무기가 없는 상황에서도 대응 할 수 있을만한 능력을 키워둬야 할 것 같아.'
진석은 무기가 없을때도 바일리 델 비엔토의 기술을 응용해 여러차례 상황을 극복해오긴 했지만, 무기가 있는것과 없는 것의 차이는 당연히 컸다. 라파가만 하더라도 쌍단검을 들고 숏대시 후의 수평베기를 해야 스킬의 랭크에 따른 추가 데미지가 더해지는건데, 무기 없이는 숏대쉬까지 밖에 쓰지 못하는데다가 추가 데미지의 보정 같은것 역시 전혀 없었다.
'마법을 익히는것도 생각해봤지만 마법은 조금이라도 쓸만할 정도로 랭크를 올리려면 시간이 많이 걸리는데다 딱히 적성에도 안 맞고... 그리고 어차피 돈주고 책을 사서 익힐 수 있는 마법이래봐야 죄다 화염화살 수준인걸. 그냥 지금 익힌 화염화살이나 확실히 S랭크를 만드는게 낫겠지.'
그래서 생각한것이 셀린에게 몸을 쓰는 기술을 배우는 것이었다. 셀린이 쓰는 권각술인 묘람권. 아마도 묘인족 고유기에 가까운 능력이겠지만 어차피 토너먼트때까진 시간이 남으니 뭐라도 해볼 생각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나는 투척이라는 기술이 없었음에도, 싸움 와중에 단검 투척을 반복하다보니 결국 투척이라는 스킬을 얻었었지. 마찬가지로 의미 없을 것 같아도 셀린과 함께 무술이나 싸움법을 연마하다보면 뭔가 스킬이 얻어질수도 있고... 그게 아니라면 스테이터스라도 오를지도 모르지.'
현실이라면 그저 무의미한 행동일지 몰라도 이것은 게임. 특정한 행동을 반복하고 되풀이하다 보면 경험이 누적되어 뭔가가 얻어지기 마련이었다. 지하실 한복판에 선 진석은 자신을 따라 내려온 셀린과 케이트에게 지금부터 하려는 수련의 목적과 이유에 대해 간략히 설명했다. 케이트는 가볍게 박수까지 치며 진석을 감탄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자기 단련을 잊지 않으시다니 훌륭하십니다. 하지만 저는 셀린과는 달리 몸을 쓰는 기술도 없고, 제가 익힌 질루에트는 영마족의 고유 능력이라 달리 도움이 되어드릴 수 없다는게 안타깝습니다. 미술품을 보는 방법에 대한것이라면 알려드릴 수 있습니다만..."
"에... 뭐 됐어. 그보다 너 낮에 산 책중에 요리책이 있지 않았던가?"
"네. 어제처럼 음식을 사오는 심부름을 하려다 주인님께 걱정을 끼쳐드리는 일도 있었으니... 가능하면 사다 먹는 음식이 아니라 적어도 제 손으로 뭔가를 해드리고 싶다는 생각에."
그렇게 말하며 진석을 바라보고 환하게 웃어보이는 케이트. 기, 기특하다! 사소한 거긴 하지만 말로만 주인님~ 하는게 아니라 스스로 공손하게 모시려는 마음가짐이 전해졌다. 진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음. 그래 그럼. 나랑 셀린이 단련하고 있는 동안에 케이트는 책을 읽거나 주방에서 요리 연습을 하면 되겠군."
"알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진석과 셀린은 지하실에서 연무를, 케이트는 한쪽 구석에 의자를 가져다 놓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하지만 막상 셀린에게 무술을 배우자니 그녀의 떨어지는 지력이 문제였다. 그녀의 지력은 꼴랑 8. 모든 능력치의 평균은 10을 기준으로 하고 있으니 평균보다도 약간 낮은것이다. 아주 바보라고 할 정도까진 아니지만 머리회전이 어느정도 둔한것은 사실. 셀린은 자신이 기술을 쓰는 묘리나 요령을 좀체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니까아~ 이렇게 촤악 파악 하면..."
"아니 그래서 그 촤악 파악이라는게 뭔데?"
"으냐응! 으으, 그러니까 팔을 이... 이렇게?"
"이렇게?"
"그거 아니다냐! 좀 더 뭐랄까, 힘이 들어간 이런! 이런 느낌이랄까냐? 주인님 되게 못한다냐... 실망이라냐..."
"...야, 네 설명이 더 엉망진창이야."
셀린의 묘람권은 어떤 원리를 듣고 보거나, 타인에 의한 학습으로 습득한것이 아닌 그저 스스로 몸으로 체득한 것이기에 전혀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한참을 씨름하며 질문하고 되물어도 결국 제대로 된 설명을 들을 수 없었기에 세세한 것은 다 포기하고 만쇄격에 대한것만 집중적으로 물어보았다.
"에이. 다 됐으니까... 그 만쇄격이라는걸 어떻게 쓰는지만 알려줄래?"
"만쇄격은 보기보다 어렵다냐! 나도 자칫 방심하면 실패할 수도 있다냐. 하지만 맞추기만 한다면 바위도 깨트릴 수 있다냐!"
"실전에선 한 번도 성공시켜 본 적 없다며?"
"에헤헤... 그렇다냐. 하지만 위력이 강력한건 분명하다냐! 내 삼촌이 이걸로 회색곰의 상체를 터트려 날려버리는걸 본 적이 있었다냐."
고... 곰의 상체를 터트려? 뭔가 충격파가 터져나가는걸 보긴 했었지만... 그게 거의 폭약급의 위력이 나오는 기술이었단 말이지? 하지만 범위가 좁고 자세를 잡아서 쓰는 기술인데다가 타이밍을 맞춰야 한다는점이 역시 어려울 것 같았다. 셀린은 진석에게서 몇발자국 떨어지더니 시범을 보이려는듯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양 손을 허리 옆으로 모았다. 진석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셀린의 행동 하나하나를 자세히 관찰했다.
"숨을 크게 쉬고, 힘을 모아서... 단번에!"
눈을 부릅뜨며 쌍장을 내지르는 셀린. 그러자 터어엉하고 뭔가 터지는듯한 강렬한 소리가 울려퍼지며 지하실에 메아리쳤다. 허공엔 저번과 같은 무형의 충격파가 뿜어져나왔음은 물론이다.
"...후우. 이렇게 하는거다냥."
호흡을 가다듬으며 진석을 바라보는 셀린. 진석은 흐음 하고 고개를 끄덕여 보인다음 아까 셀린이 했던것과 똑같은 자세를 취해보았다.
'호흡을 크게 들이마시면서 양 손을 허리옆에 모으고... 진각을 내딛으면서 양 손을 동시에!'
파팟! 허공에 장타가 가로지르는 파공음이 났지만...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양 손을 내지른 자세로 멍청히 서있는 진석과 그 모습을 실망스럽게 바라보고 있는 셀린. 지하실 내엔 잠시 썰렁한 침묵이 감돌았다.
"주인님~ 왜 못하는거냐~ 주인님은 몸치였던거냐?"
어딘가 모르게 타박하는듯한 셀린의 말투. 이 쉬운걸 왜 못하는거냐는 듯한 느낌이었다. 진석은 에잇 하고 땅바닥을 팍 걷어차며 퉁명스레 대꾸했다.
"아니 그러니까 좀 더 기술의 원리라더나 방법을 제대로 설명해 보래도? 그럼 넌 이런거 할 수 있어?"
손바닥 위에 화염화살 세발을 파파팍 띄워보이는 진석. 그러자 셀린은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헛. 주인님은 마법사였던거냥...?"
"뭐? 마법사? 쓰으. 야 셀린. 너 꼼짝 말고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어."
화염화살을 지워버린 진석은 시클론을 걸며 라파가의 스텝으로 순식간에 셀린에게 달려들었다. 몇미터 앞에 떨어져 있던 진석이 순간이동을 하듯 코앞으로 다가오자 셀린이 자지러지게 놀라며 귀와 꼬리의 털들이 바짝 곤두서는게 보였다. 평범한 상대라면 진석의 움직임을 보지도 못했을테지만, 셀린은 민첩만큼은 높다보니 그 움직임을 눈으로 쫓을 수 있는듯 했다. 진석은 빠르게 셀린을 스쳐지나가며 그녀의 엉덩이를 스윽 더듬었다. 예상못한 손길에 햐악 하고 어깨를 흠칫하며 엉덩이를 감싸쥐는 셀린. 진석은 초고속의 숏대쉬로 셀린을 스쳐지나간 다음 그녀를 돌아보며 말했다.
"어때. 이래도 내가 몸치로 보여?"
예상치 못했던 진석의 몸놀림에 놀란표정이 되어 대답하는 셀린.
"아... 아니다냐. 주인님 엄청나게 빠르다냐. 눈으로 쫓는게 고작이었다냐... 이거 만약 진짜 싸움이었다면 나 틀림없이 주인님한테 당했을거라냐."
응응. 그렇지. 이제서야 주인님의 훌륭함을 좀 알아보는 모양이군. 셀린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주인님 만쇄격은 못쓴다냐."
"......"
그리고 진석의 눈엔 구석에 앉아서 책을 읽던 케이트가 입가를 가리며 조용히 쿡 하고 웃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것들이 정말. 좋게 좋게 대해줬더니 주인님을 우습게 봐!'
하지만 이런것도 나름대로 재미있었다. 어차피 딱히 할 일도 없었는데 뭐 어떠랴. 발가벗고 무작정 섹스나 하면서 뒹구는것 보단 이렇게 몸을 단련하며 건전한 땀을 흘리는것도 꽤 괜찮았다. 진석은 셀린과 함께 한참이나 더 이렇게 저렇게 새로운 기술을 익히기 위한 연습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다음날 오전. 레나는 평범한 차림으로 갈아입고 왕궁을 나섰다. 레나가 패럴 왕자의 전속이라고는 하지만, 이따금 1년에 몇 번 정도 별다른 일이 없을땐 이렇게 하루 이틀쯤 휴가를 받아 사적인 용무를 보거나 개인적으로 필요한 물건들을 구입하러 나가곤 했다. 딱히 평범한 하녀들처럼 하녀장의 지휘를 따르는게 아닌, 패럴 왕자의 전속의 하녀였으므로 왕자만 허가한다면 외출의 허가 정도는 얼마든지 받을 수 있었다. 패럴 왕자는 여느때처럼 평범한 휴가 요청이라고 생각하고 레나의 요구를 허락했다. 레나가 없는 동안 임시로 레나의 일을 맡아줄 하녀의 인선은 하녀장에게 따로 잘 부탁해두었다.
'거두절미하고, 우선은 직접 가볼까.'
왕궁을 나선 레나는 지체할 것 없이 바로 고급 주택가로 향했다. 그리고 지난번 패럴 왕자의 뒤를 따랐던 기억을 되살려, 두 여자가 들어갔었던 저택을 어렵잖게 찾았다. 저택 건너편의 골목쪽에 기대어 선 레나는 그쪽을 찬찬히 살폈다.
'평범한 단층 단독주택.'
일단 외관상으론 적당히 아담하고 잘 꾸며진 좋은 저택이다. 그렇게 넓은건 아니지만 담벽 너머론 마당과 정원이 딸려 있었고, 그 한켠엔 마차가 대어져 있는것도 보였다.
'마차라... 확실히 그녀들은 여기 출신은 아닌것 같았으니. 직접 마차를 몰고 올만큼 어디 먼곳에서 온 것일까?'
저택 밖에서 알 수 있는 정보는 더 이상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낯선 대상에 대해 뭔가를 알아내기 위한 방법은 두 가지가 있었다.
'첫번째는 직접 접촉하는 것.'
가서 문을 두드리고 뭔가 용무가 있는걸로 가장해 그들에게 접근하는 것. 하지만 이건 곤란했다. 딱히 둘러댈만한 거짓말이나 신분을 위장할 도구, 혹은 의상같은것도 없었다.
'게다가 이건 적진에 침투하는 정탐꾼이나 사기꾼의 수법이잖아. 너무 과한가.'
레나는 고개를 저었다. 상대는 패럴 왕자에게 해를 끼치는 상대도 아니고 하물며 적도 아니다. 그러긴 커녕 패럴 왕자가 호감을 가진 상대라 이쪽에서 일방적으로 그쪽에 대한 정보를 캐내려 하는 것 뿐. 그런 노골적인 방법까지 쓸 필요는 없었다.
'그렇다면... 몰래 잠입하는 것 뿐인데.'
저들이 뭔가의 용무로 집을 비운다면 그때 잠시 숨어들어 집안의 물건이나 짐 등을 뒤져 신원이나 관계등을 파악하는 방법. 그것뿐이었다.
'하지만 언제 외출할 줄 알고? 후우. 하루종일 잠복이라도 해야하나.'
그리고 이곳은 주택가 한복판. 이렇게 한 자리에 못박힌듯 서서 한 집만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면 자신을 수상하게 여긴 누군가가 경비대에 신고라도 할 수 있었다. 이럴땐 차라리 자연스럽게 주변을 걷는 행인처럼 보이는게 나았다. 레나는 느긋한 발걸음으로 근처의 골목을 빙빙 돌며 진석이 머무는 저택 안쪽의 상태를 차분히 살폈다. 하지만 역시 외부에서 담벽이 있는 집 안쪽의 동향이 어떤지는 전혀 파악할 수 없었다. 딱히 누군가 자신을 도와줄 누군가가 있는것도 아니니, 오늘 하루종일은 혼자서 이렇게 행인으로 가장한채 주변이나 돌며 저 집을 살필 수 밖에 없겠구나 싶었다.
'어떻게 보면 나도 참 사서 고생이네.'
패럴 왕자는 레나 본인이 왕자를 위해 이런일을 하고 있다는걸 짐작하지도 못하고 있으리라. 하지만 레나는 이것이 마땅히 섬기는 자를 위해 해야할 충성이자 도리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한시간쯤 지났을까? 아무리 인내를 가지고 오늘 하루는 이들의 정보를 캐내기 위해 쓰자고 마음먹었지만 지겨운건 지겨운거였다. 아무리 천천히 걸었다지만 한시간째 계속 걷고있자니 약간은 피곤하기도 했다. 중심가쪽의 가까운 찻집이라도 가서 뭐라도 한 잔 마시며 목이라도 축이고 올까 생각하며 저택의 앞을 지날때, 저택 안쪽에서 한 남자와 두 명의 여자가 뒤를 따라 나오는것이 보였다. 앞서서 나오는건 검은 머리의 미남자. 그가 모데로이리라. 그리고 그 뒤로는 저번에 봤던 헌팅캡의 여성과 플로피 햇에 검은색 드레스를 입은 여성이 있었다.
"...!"
운이 좋구나. 겨우 한시간만에 전부 집 밖으로 나오다니. 슬쩍 멈춰서서 그쪽을 바라 보자니 저 셋은 마차에 타는게 외출할 심산인 모양이었다. 잘 됐다! 저들이 외출한 사이에 안으로 잠입해 생각해두었던 대로 여러가지를 살펴보면 되리라. 그런데 희안하게도 그들은 셋이 함께 마부석에 탄채였다.
'왜 굳이 마부석에 셋이 함께 앉는거지?'
게다가 두 여자가 딱 달라붙은 폼을 보자니 그녀들은 분명 가운데의 검은 머리 남자에게 호감이라도 가진 모양새였다. 마차는 곧 저택 밖으로 빠져나왔다. 대문을 닫곤 이내 길 저편으로 사라지는 마차. 레나는 골목으로 들어가 주변에 길을 지나는 행인이 없는것을 확인한 다음, 날렵한 움직임으로 단번에 담벽을 넘어 저택 안쪽의 마당으로 뛰어들었다.
'이 정도쯤.'
어려서부터 요인의 호위를 위해 고강도의 수련을 쌓아왔고 지금도 실력이 녹슬지 않도록 자는 시간까지 줄여가며 틈틈히 몸을 단련하는 레나다. 담벽 하나 넘는건 일도 아니었다. 저택으로 다가간 그녀는 주머니에서 챙겨나온 락픽 세트를 꺼냈다.
'문따기는 오랜만이지만... 까먹진 않았으니까.'
레나가 배웠던것중엔 암습이나 잠입을 위한 기술까지도 있었다. 몸을 숨기는 법, 은밀히 잠입하는 법, 보초의 행동패턴 파악이나 동선을 확보하는 법. 그리고 이렇게 문을 따는 기술까지도. 문은 별다른 잠금장치가 된것이 아닌 그저 평범한 자물쇠였기에 어렵지 않게 따고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어제 받은 보고로는 남자 하나, 여자 둘이 머무르고 있다고 했었지만 혹시 누군가가 더 있을지도 모르는 법. 만약이란게 있을지도 모르니 빠른 도주을 위해 문을 완전히 닫지 않고, 수센티쯤 열어둔채로 안으로 들어섰다.
'안은... 별거 없네.'
멋진 가구들로 잘 꾸며진 평범한 집안이었다. 단, 생활감이 없었달까? 사람이 살며 자연스럽게 묻어나는 흔적같은게 그닥 느껴지지 않았다. 막 새로 이사온집에 들어온 것 마냥 지나치게 깔끔했다.
'확실히 이들 소유는 아니고 일시적으로 집을 빌렸던가 그런 모양이군.'
레나는 발걸음 소리를 줄인채 조심조심 안쪽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집 안쪽은 고요했다. 어떠한 인기척도 나지 않았다. 침실이나 방들, 부엌까지 둘러보았지만 확실히 집안에 머무는 사람은 없는것 같았다.
'다행이군. 자 그럼 뭔가 정보가 있을만한걸 찾아볼까.'
마음 놓고 집 여기저기를 살펴보던 와중, 레나는 침실에서 큼직한 가방 두개를 발견했다. 하나는 여행자들이나 쓸법한 주머니가 많이 달린 타입의 여행용 배낭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냥 평범한 천가방이었다.
'이건가.'
그 앞에 쪼그려 앉아 우선 천가방부터 열어보는 레나. 안에는 의외의 물건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뭐야 이건? ...약?'
벌려진 틈새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헤세스 약품 통상의 로고가 박힌 초고가의 약품 상자들이었다. 여러가지가 많아 하나하나 자세히 살펴보진 않았지만 맨 위쪽에 있는 상자만해도 가장 상등의 최고급 회복약이었다.
'이 약상자 몇 개만 해도 금화 수백닢, 아니 천단위도 가볍게 넘어가겠는걸... 이런걸 이렇게 많이 가지고 다니다니. 모데로라는 남자, 실은 굉장한 부자인건가?'
약이 든 가방을 닫고, 이번엔 그 옆의 여행용 배낭을 열어보는 그녀. 이쪽의 안엔 굉장히 여러가지의 물건들이 들어있었다. 레나는 배낭에서 꺼낸 물건들을 옆에 하나하나 늘어놓아 보았다.
'이건... 옷가지와 속옷. 밧줄, 램프, 기름병... 그리고 단검? 아니 무슨 단검을 이렇게 많이... 이 시험관과 비커같은건 또 뭐지? 아아. 약품 제조 키트? 이만한 약품을 들고다니는데다가 어째서 또 이런걸... 그리고 맨 안쪽의 이 커다란건... 어라. 돈 주머니? 읏, 어... 엄청 무거워! 세상에. 몇천닢은 되겠어. 이런걸 배낭에 넣어가지고 다닌단 말야?'
소지품을 하나하나 살펴볼수록 의문만이 늘어갔다. 이 남자는 대체 뭐지? 처음 옷가지와 램프, 기름병 따위가 나왔을땐 역시 단순한 모험가일까 싶었지만... 막대한 양의 금화가 든 돈 주머니나 약품 가방을 생각해보면 뭔가 이상했다. 이만한 돈과 약품을 가지고 돌아다니는 이유가 뭘까? 이곳엔 그냥 토너먼트의 상금이라도 노리고 출전한걸까? 레나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심에 휩싸인채 가방의 다른 주머니들도 하나하나 뒤져보았다. 그리고 한쪽의 주머니에서 뭔가의 서류 두 장을 찾아내었다.
'서류라. 어디 보자. 음... 엇?'
여기 올린스턴 왕국보다 훨씬 남쪽에 위치한 소국 메디니아의 수도 갈론, 그곳의 노예 경매장에서 발행된 영수증이었다. 두 장의 영수증은 각기 묘인족 노예와 마족 노예를 거액의 액수를 받고 팔았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리고 노예를 구입한 대상의 이름은... 러셀 헤이든.
'러셀 헤이든? 아니 어떻게 된거지? 모데로라는 이름이 아닌데?'
게다가 그 두 여자는 역시 노예였단 말인가? 더 황당한건 그들이 인간도 아닌 묘인족에다 마족이라는 사실이다. 마족은 잘 모르겠지만 묘인족이라면 아마도 머리에 귀가 달려 있을터. 설마 그녀들이 쓰고 있던 모자는 멋이 아니라 귀를 가리기 위해 쓰고 있었던건가? 그리고 구입 금액이... 세상에, 묘인족은 1만 4천 골드! 그리고 마족은 무려 3만골드!?
'이게 무슨...'
너무 황당해서 이해할 수가 없었다. 레나는 잠시 침착하고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이 모데로라는 남자는... 아니. 모데로가 아니다. 가명이겠지. 토너먼트에 출전하면서 대는 이름 따윈 얼마든지 가짜를 댈 수 있을테니까. 그럼 이 러셀이라는 남자는... 메디니아에서 두 명의 노예를 구입하고 올린스턴 왕국까지 이동했다는 이야기다. 영수증의 날짜는 비교적 최근이었다. 즉 노예를 구입하자마자 곧바로 배라도 타고 캐버너까지 직행했다는 이야기.
'먼 남쪽의 나라에서 수만골드 어치의 노예를 구입하고... 곧바로 이곳에 와서 토너먼트 출전 신청이라. 그리고 가방안에 든 수천골드의 돈과 대량의 약품.'
뭘까. 대체 무엇일까. 역시 그냥 상금을 노리는 모험가일까? 보고받은 쪽지의 내용으론 이 남자가 대단한 실력자라고 되어있었다. 이곳저곳을 떠돌며 모은 큰 돈으로 노예를 사고 다음 상금을 벌기 위해 올린스턴 왕국을 찾아왔다거나...
'그렇게 생각하면 대충 앞뒤는 맞지만... 그래도 뭔가 이상해. 노예 구입에 수만골드를 썼다고 해도 여기 수천골드나 더 있는 부자인데 굳이 이런 토너먼트에 출전할 필요가 있을까? 진짜 이유가 뭘까. 정말로 상금에 대한 욕심? 아니면 강적과 싸우고 싶다는 호승심?'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머릿속만 복잡해졌다. 얼추 앞뒤가 맞는것 같다가도 잘 생각해보면 역시 뭔가 이상했다. 이런 저런 가설을 세워봤지만 중요한 무언가가 빠져있는것 같았다.
'...아니 잠깐. 나는 왜 계속 토너먼트만이 목적이라고 생각한거지? 토너먼트는 이 러셀이란 남자의 목적이 아니라... 어떠한 과정의 일부일수도 있어.'
정말로 호승심이나 상금 욕심에 출전했다면 굳이 가명을 쓸 필요가 없다. 당당히 자신의 실력을 드러내고 이름을 알리면 되는법이니까. 그럼에도 가명을 썼다는건... 남에게 자신의 진짜 정체를 드러내고 싶지 않다는 이야기. 그렇다면 토너먼트 출전은 역시 목적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를 노린 중간 단계일 가능성이 있었다.
'그럼 토너먼트에 출전해서 얻을 수 있는게 상금이나 명성 말고 또 뭐가 있지? 잘 생각해보자.'
손에 쥔 영수증 서류들이 완전히 구겨지는것도 모른채 추리에 몰두하는 레나. 너무 깊게 생각에 잠겨있어서일까, 뒤에서 누군가가 다가오는것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그 뒤에선 잔뜩 구겨진 표정의 진석이 다가서고 있었다.
'뭐야, 누구야 이 여자는?!'
시간을 잠시 되돌려 잠시전. 마차를 몰고 두 노예와 함께 집을 나섰던 진석이지만, 골목을 두 개쯤 지났을때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었다.
"아아 이런."
"왜 그러시죠?"
진석의 중얼거림에 곧바로 돌아보며 고개를 갸웃하는 케이트. 진석은 허전한 돈주머니를 들어보이며 대답했다.
"돈이... 어제 잔뜩 썼던걸 깜빡하고 채워오질 않았네."
어제 랜섭 인 여관과 식당 주인들에게 금화를 잔뜩 쥐어주는 바람에 돈 주머니에 덜어 두었던 돈이 얼마 남아있지 않았던 것이다. 내일 나가기전에 채워둬야지~ 하고 있었는데 그냥 까먹곤 그대로 나와버렸다. 지금 주머니에 남아있는건 은화 몇 닢 뿐. 어제처럼 길을 익히게 할 겸 거리를 둘러보며 간단한 쇼핑 후 점심식사나 하고 들어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은화 몇닢뿐이라서야 원... 뭐 쇼핑은 아이쇼핑으로 참고, 밥도 저렴한데서 먹는다면 은화 몇닢으로도 충분하겠지만 주인님의 위엄을 위해서라도 노예들 앞에서 굳이 궁상스러운 모습을 보이고 싶진 않았다. 그렇다고 진짜 돈이 없는것도 아니었으니.
"어이 셀린, 케이트. 여기서 잠깐 기다려. 금방 갔다올테니까. 그냥 고삐 쥐고 가만히 있으면 돼."
마차를 길가 한쪽에 세우며 그렇게 지시하는 진석. 셀린이 고삐를 받아들며 물었다.
"주인님. 내가 다녀올까냥?"
"에이 됐다니까. 금방 다녀온대도. 마차 잘 보고 있어!"
마부석에서 뛰어내린 진석은 가벼운 몸놀림으로 저택으로 돌아갔다. 중심가까지 나갔다가 깨달았으면 좀 짜증날뻔 했다. 아직 그렇게 멀리까지 멀리 나가지 않은 상태에서 돈 주머니가 빈걸 깨달아서 다행이었다. 진석은 금새 저택으로 돌아와 대문을 따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현관으로 다가가 문을 열려고 보니...
'뭐야 이거. 문이 열려있잖아?'
문이 수센티정도 열려있었다! 아까 집에서 나설때 자신이 분명히 잠그고 나갔었는데? 문 손잡이를 두어번 잡아당겨 확실히 잠겼던걸 확인까지 했었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문이 열려있다는건...
'도둑놈?!'
일단 떠오르는건 그것밖에 없었다. 허, 그거 잘됐다. 감히 내가 머무는 집을 털려고 해? 넌 죽었어! 진석은 최대한 기척을 죽이고 조심스레 집 안으로 들어갔다. 어차피 집 안에는 별달리 가치있는게 없었다. 뭔가 있다면 침실쪽에 놓아둔 자신의 가방들 뿐일까. 특히 해밀턴 시에서 구입한 이후부터 쭉 쓰고 있는 여행용 배낭안엔 금화 수천닢이 그대로 들어있었다. 도둑이 손을 댄다면 역시 그것밖에 없으리. 진석은 지체없이 침실쪽으로 향했다. 침실쪽으로 다가가자 과연 안에선 뭔가 부스럭거리는 인기척이 들려왔다.
'그럼 그렇지. 이걸 어떻게 해줄까나. 콱 죽여? 죽여서 뒷뜰에 묻어버릴까? 앙?'
진석은 주먹을 꽉 쥐며 침실쪽으로 살짝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런데 틀림없이 보잘것 없는 좀도둑이 있을거라고 생각했던 방 안쪽에선 젊고 아름다운 평상복 차림의 여성이 뭔가의 종이조각을 들고 생각에 잠겨있었다. 잘 보니 그 종이조각은... 자신이 갈론의 블랙 옥션에서 산 셀린과 케이트의 영수증이었다.
'왜... 저걸? 좀도둑이 아니었던건가?'
거기다 가방에 있던 물건을 주변에 하나 하나 늘어놓고 살펴본듯한 모양새가 그냥 좀도둑이 아닌 모양이었다. 이건 마치 자신을 뒷조사하러 온 것 같은 꼴이 아닌가.
'이런 씨발. 이거 대체 뭐야? 이번엔 분명 뭔가 누군가에게 꼬리를 잡힐만한 행동따윈 안했는데? 아니 토너먼트 참가 접수장에서 병사들을 다 때려눕히긴 했지만 설마 그 정도로 누군가 내 뒷조사까지 시킬리는 없잖아? 게다가 주소도 신경써서 처리해뒀는데!'
모르겠다. 이 여자가 누구고 대체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자신의 뒤를 캐러 온거라면 어쨌든 그냥 놔둘 순 없었다. 진석은 최대한 조심스레 한발짝씩 그녀에게 다가섰다. 다행히 그녀는 깊은 생각에 잠긴듯 입속으로 뭔가를 웅얼거리고 있었다. 바로 등 뒤까지 다가섰음에도 여전히 자신의 기척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할 수 없지. 자세한 건 일단 때려눕히고 확인해줄테니까.'
퍼억. 진석의 수도가 레나의 목덜미에 내리꽂혔다. 생각이 다른곳에 팔려있던 레나는 자신이 공격을 당했다는 사실도 자각 못하고 그대로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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