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베라 - 부회의 방랑자-118화 (118/155)

< --   - 10.   -- >         * 118화 *

그는 곧바로 시합장에 훌쩍 뛰어올라가더니 진석을 향해 손짓을 했다. 마치 아랫사람이나 애완동물이라도 부르는것 같은 비아냥이 가득 담긴 손짓이었다.

"큭큭. 전부 시시하구만 시시해! 어이, 빨랑 올라와라 애송이!"

"......"

제인의 정체에 대해 생각하는건 일단 뒤로 미뤄두고, 저 떡대부터 처리해야겠다. 진석은 시합장으로 걸어 올라가며 시합장 한쪽 심판석에 세워진 큼직한 대진판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보니 지금 이 시합이 오늘의 마지막 시합이었다. 모데로라는 자신의 가명 옆에 쓰여진 드렉이라는 이름. 그게 저 거한의 이름인 모양이었다. 그는 진석이 올라오길 기다리며 목과 손가락을 풀며 우드득거리고 있었다. 터질것 같은 승모근과 이두박근이 불끈거렸다. 얼굴에 띄운 표정도 아주 자신만만한게, 체구부터가 한참 차이나는 진석 정도는 순식간에 끝장내주겠다는 의지가 충만하게 느껴졌다.

'뭐 현실이라면 총이라도 쓰지 않고서야 내가 저런 괴물같은 근육덩어리를 이길 방법이 없겠지만... 이건 감사하게도 게임이란 말이지.'

시합장에 올라 드렉의 앞에 마주선 진석. 심판이 잽싸게 둘 사이로 다가와 손을 내밀어 보였다.

"준비... 시합 개시!"

손을 휙 위로 쳐들며 재빨리 시합장 아래로 내려가는 심판. 진석은 드렉이 워낙 기세가 등등하길래 화끈하게 달려들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의외로 천천히 한걸음씩 다가오고 있었다. 딱히 싸울 자세를 취한것도 아니고 그냥 자연스레 저벅저벅 다가올 따름이었다.

'그러고보니 아까 이 자식 예선때도...'

분명 이렇게 상대 선수에게 다가가, 그대로 번쩍 집어들어 시합장 아래로 장난감처럼 집어던져 버렸었다. 아무리 힘이 세도 사람 무게라는게 결코 만만한건 아닌데, 이 놈은 어찌나 힘이 좋은지 어어 하고 당황하는 상대를 무슨 장난감처럼 머리위로 가볍게 들어 내던졌었다. 힘껏 던져지는 바람에 바닥에 떨어지는 자세가 안좋았던 그 상대는 손목이 분질러지며 심판의 선언에 의해 그대로 패배. 아마 이번에도 똑같은 방법으로 끝장내려는 모양이었다.

"하! 웃기지 말라고!"

진석은 땅을 박차고 드렉에게 뛰쳐나갔다. 그러고보니 자신 역시 아까 전의 예선전때도 딱히 무기는 커녕 간단한 기술 하나조차 쓰지 않고 승리했었다. 슬쩍 선수 대기석을 보니... 제인은 무표정한 얼굴로 시합을 관람하고 있었다. 딱히 자신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눈 앞에서 시합이 치뤄지고 있으니까 본다는 느낌.

'...아!'

그제서야 진석의 머리속을 스치는 생각이 하나 있었다. 클립튼 일행을 속여 달아나려고 거짓말을 꾸며댈때, 모데로의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던 성직자 에이미라는 여자가 했던 이야기. 솜브라 교단엔 오래전 떨어져 나간 배신자들이 있다는 것. 혹시 저 제인이 바로 그 배신자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더더욱 바일리 델 비엔토를 쓸 수 없잖아!'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며 있는 힘껏 드렉의 복부에 오른손으로 정권을 날리는 진석. 하지만 드렉은 그 덩치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몸놀림으로 진석의 주먹을 슬쩍 피하며 되려 정권을 질러 반격해왔다.

'이 자식?!'

그 반격이 지극히 신속하고 자연스러운게 보통 부드러운 몸놀림이 아니었다. 이 남자가 격투기를 구사한다면 힘과 덩치를 앞세워 주먹질을 해올줄 알았는데 그것은 자신의 착각이었다. 한동안 셀린과 대련하느라 상대의 자세를 살피는게 눈에 익은 진석은 이 정권 하나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이건 숙련된 무술가의 반격이었다! 진석은 허공으로 내뻗은 자신의 주먹을 되돌리며 왼손바닥으로 드렉의 팔뚝을 밀어내 공격을 빗나가게 만들고 허리를 축으로 몸을 빙글 회전시키며 상대의 상단에 돌려차기를 가했다.

"호오!"

드렉도 진석의 능란한 공방에 놀랐는지 갑자기 바닥에 달라붙듯 납작 엎드리며 하단에서 발목을 노리는 하단쓸기를 걸어왔다. 이런걸 원앙퇴라고 하던가? 드렉의 기술에 감탄하는 진석. 돌려차기를 가하던 진석은 허릿심으로 억지로 다리를 뒤로 당기며 백덤블링으로 전환해 드렉의 하단쓸기를 피했다. 하지만 뒤로 한 바퀴 돌아선 진석의 정면으로 재차 드렉의 일권이 날아들었다.

'호락호락 하지 않은데!'

오른손으로 드렉의 권을 옆으로 쳐내고 그의 품안으로 파고들며 왼손을 펴 몸통에 장타를 먹이려는 진석. 하지만 드렉은 턱밑까지 파고든 진석의 안면에 무릎을 질러왔다. 몸통을 치려던 진석은 할 수 없이 왼손으로 드렉의 무릎을 아래로 밀어내며 그 반동으로 뒤로 훌쩍 물러났다. 지근거리에서 빠른 공방을 주고 받은 둘은 각자 몇발짝 물러선채로 서로를 노려보았다. 정말 눈깜짝할 사이 벌어진 치열한 공방에 관객석에선 와아아 하고 커다란 함성이 터져나왔다.

"어이 대머리. 제법인데?"

비웃음을 띄우며 드렉을 도발하는 진석. 하지만 드렉은 손바닥으로 자신의 머리를 슥 쓸어넘기더니 기분좋다는 듯 히죽 웃어보였다.

"이건 대머리가 아니라 직접 밀어버린거다. 귀찮아서 말이지. 그나저나 너도 제법이군? 후다닥 끝내버리려고 했더니만... 하긴, 이 정도 재미는 있어야지!"

그러면서 진석에게 휙하니 달려든다! 워낙 키가 크고 다리가 길어서 그런지 얼마 안되는 간격이 삽시간에 줄어들며 체중을 실은 무시무시한 권격이 안면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맞으면 그대로 머리가 산산조각으로 터져나가지 않을까 싶을정도로 강맹한 기세의 일격이었다. 주먹이라기 보단 흡사 슬레지 해머가 날아드는 느낌이었달까? 하지만 진석은 방심하지 않고 드렉쪽을 충분히 경계하고 있었기에 그의 급습은 별 의미가 없었다. 진석은 즉시 다리를 어깨 너비보다 좀 더 넓게 벌리며 무게 중심을 허리 부근으로 내리고 오른손을 편채 허리뒤쪽으로 당겼다.

'벌써 쓰기엔 좀 아깝긴 하지만... 까짓 좋아, 실전 테스트다!'

저택에 틀어박혀 있는동안 진석은 관둘까 말까 하면서도 결국 셀린을 데리고 나름대로의 수련을 계속 했었고, 결국 원하는대로의 성과를 하나 얻어냈다. 드렉이 코앞에 주먹을 날리는 급박한 상황이므로 짧게 호흡을 들이마시곤, 그렉의 권격에 맞춰 오른손바닥을 빙글 반회전시키며 장타를 내질렀다.

"열격장!"

그리고 중간지점에서 드렉의 주먹과 진석의 손바닥이 격돌했다. 살과 살이 부딪히는 것임에도 무슨 쇳덩어리가 부딪히듯 쩌엉하는 큰소리가 울려퍼졌다. 바닥의 먼지가 후욱 뒤로 흩날리는 기세만 보아도 양쪽의 공격이 모두 보통 위력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었다. 장과 권의 격타 후, 고통에 찬 신음을 흘리며 뒤로 물러난 것은 드렉쪽이었다.

"크윽... 이자식!"

덜덜 떨리는 오른손을 감싸쥐며 뒤로 너덧발짝 물러나는 드렉. 이마에서 삽시간에 식은땀이 배어나오고 미간을 잔뜩 찌푸린게 꽤나 고통스러운 듯 했다. 반면 진석은 여유만만한 표정을 지으며 내민 손을 거두었다. 진석의 머릿속엔 토너먼트가 개최되기 전까지 계속해서 의미없어 보이는 수련을 반복하던 과정이 떠올랐다.

'내가 지금 이게 뭐하는건가 생각하면서도... 결국 계속 반복했지. 셀린하고 케이트를 조교하는것조차 뒤로 미뤄두고 노오오오력을 했단말이다!'

예비 소집 통지를 받고 왔던 날 저녁. 저녁 식사 이후로도 한참 늦게까지 수련을 계속하다보니 어느샌가 새로운 스킬을 입수했다는 메시지가 툭 떠올랐다. 옆에서 자신을 돕던, 영문을 몰라하는 셀린을 끌어안고 한참을 기뻐했다. 그것이 바로 이 열격장이었다.

'원래 내가 얻고 싶었던 셀린의 만쇄격은, 내 바일리 델 비엔토의 라파가처럼 묘람권이라는 액티브 스킬에 속한 하위 스킬. 이 열격장도 원래대로라면 어떤 권법에 속한 하위 스킬일테지만...'

진석은 그냥 이 열격장만을 덜렁 얻어버렸다. 열격장을 얻고 뛸듯이 기뻐하다 스킬을 직접 사용해보니, 진짜로 만쇄격과 여러모로 굉장히 비슷했다. 마보를 취하고 호흡을 들이마시며 힘을 모아 장타를 내지르는 것. 물론 세세한 부분은 좀 달랐다. 만쇄격은 진각을 밟으며 두 손을 직선으로 내민다는것, 열격장은 진각은 생략하고 허리의 반동을 이용해 한 손만을 반회전 시키며 내지른다는 것 등등. 하지만 기술을 발하기 전에 호흡을 축적하며 힘을 모으면 모을수록 그 위력이 더 상승한다는 점은 양쪽이 같았다.

'뭐 최초의 예상대로 만쇄격을 얻지 못하더라도 비슷한 동작의 기술이라도 있다면 뭔가 얻지 않을까 했는데 진짜로 그렇게 되었으니...'

열격장을 얻은 이후엔 며칠 안되는 시간이었지만 열격장의 랭크업에 주력했다. 권법 그 자체가 아닌 단일 하위 스킬뿐이라 그런지, 랭크는 의외로 쭉쭉 상승했다. 토너먼트가 시작되기 전까지 진석은 열격장을 무려 A랭크까지 끌어올릴 수 있었다. 게다가 열격장 자체가 기본적으로 강력한 스킬인건지, 아니면 쓰는 진석의 스테이터스가 높아서인지, 위력도 아주 발군이었다. 위력이 어느정도인가 궁금해서 셀린을 시켜 큼직한 곡물자루를 사다놓고 시험해 보았다. 수십킬로그램이나 나가는 사람 몸통만한 묵직한 포대자루. 그것에다 완전히 힘을 모은상태의 열격장을 써봤다. 포대자루는 열격장에 강타당하자 미친듯 회전하며 벽에 처박혀 산산히 찢어졌고, 그 바람에 사방팔방 흩어진 자루 속의 콩을 치우느라 지하실의 대청소를 했었다.

'방금건 빨리 쓰느라 기껏 2~3할 정도밖에 힘을 안모은 상태의 열격장이었는데도 저렇게 고통스러워 해서야...'

진석은 부들거리는 오른팔을 부여쥔 드렉을 향해 슬쩍 비웃음을 띄우며 손을 까닥거려보였다. 아까 시합이 시작하기 전 드렉이 진석을 향해 한것과 마찬가지의 도발이었다. 드렉은 고통스러운 기색이 역력함에도 이를 드러내고 히죽 웃어보이더니, 바닥을 쿵 박차며 힘을 모으기 시작했다.

"좋아! 정말 맘에 든다 너! 여기서 이 수를 쓰게 될거라곤 생각 못했지만... 흐아아압!"

양주먹을 꽉 모아쥔채 기합을 지르며 힘을 모으는 드렉. 그렇지 않아도 터질듯 울끈불끈하던 그의 몸이... 일순 더 크게 부풀었다! 큰 덩치때문에 몸에 딱 맞던 그의 상의는 부풀어 오른 근육들 때문에 이제 거의 터질지경이 되었다.

'기, 기합만으로 벌크업이라도 하는 거냐?!'

게다가 몸만 커진게 아니라 드렉에게서 느껴지는 기세도 분명 더 강해졌다! 그 모습에 순간 직선의 머릿속엔 라케르투스 족 정보상 피터슨이 떠올랐다.

'아오, 그때 도마뱀 새끼도 뜬금없이 근육맨으로 변신하더만 체력이랑 방어력이 미친듯이 올라가서 상대하느라 꽤나 고생했었는데... 너도냐?'

하지만 가만히 보고 있을수만은 없지! 진석 역시 즉시 열격장을 쓸 자체를 취하며 호흡과 힘을 모았다. 그리고 여기서 하나 더, 열격장이 만쇄격과 서로 다른 점이 또 있었다.

"타아앗!"

파앗! 드렉이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쏜살같은 기세로 진석에게 달려들었다. 도저히 저 곰만한 덩치라곤 생각 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아무래도 방금 전 드렉이 기합을 모으며 몸을 부풀린건 진석의 시클론과 같은 자체 버프기인 모양이었다.

'시클론, 라파가!'

진석은 시클론과 라파가를 동시에 걸며 측면으로 몸을 날렸다. 바로 앞으로 달려들던 드렉의 눈이 흡 하고 부릅떠지는걸 보았다. 분명 시야에서 진석 자신을 놓친 모양이리라. 시클론과 라파가의 조합으로 드렉의 옆으로 순간이동 하듯 돌아선 진석은, 재차 바닥을 박차며 라파가를 사용했다. 드렉의 옆구리를 향해 총탄처럼 쏘아지는 진석.

"그리고 여기서... 먹어라, 열격장!"

만쇄격은 진각을 밟고 양손으로 발하는 기술이라 그런지 제자리에서 고정된채 쓸 수 밖에 없었지만 열격장은 움직이면서도 쓸 수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이렇게 전혀 다른 종류의 스킬과 연계가 되기까지! 진석은 무방비로 드러난 드렉의 옆구리에 미리 준비해두었던 열격장의 장타를 힘껏 꽂아넣었다. 시클론과 라파가의 가속을 받은 회심의 일격!

"흐아아아악-!!!"

퍼엉하는 격타음이 터지며 드렉의 거체가 핑그르 돌며 십수미터 밖으로 부웅 날아가 선수대기석의 빈 의자들 위로 내리꽂혔다. 콰당탕탕! 나무로 된 몇몇 의자들은 형편없이 박살나며 파편이 되어버렸다. 바닥에 떨어진 드렉은 한참을 더 데굴데굴 구르며 주변의 의자들을 잔뜩 엉망진창으로 만들고 나서야 겨우 멈췄다. 그런데 그렇게 축 늘어진 꼴이...

'...으앗! 서, 설마 죽은건 아니겠지?'

열격장을 얻고 난 진석은 짧은 기간이지만 실전에서 써먹기 위해 바일리 델 비엔토와의 조합을 연습했었다. 레나가 혼자 찾아왔을때, 다른때였다면 무리를 해서라도 자신이 패럴 왕자보다 먼저 레나의 순결을 빼앗았다는 사실을 꼬투리 잡아 그녀를 저택에 끌어들여 능욕하고 괴롭혀줬을 테지만... 그러지 않고 그냥 레나를 순순히 보내줬던것도 그저 두 스킬을 조합한 기술의 연습에 정신이 팔려 있어서였다. 실전에서 사용해보니 생각보다 위력이 발군인점은 맘에 들었지만 지금 상대가 죽어버려서야 토너먼트 탈락이다!

'그... 그 덩치를 해가지고 겨우 한 대 맞고 죽거나 하지 말라고!'

안색이 나빠지는 진석. 심판은 장외로 날아가 쓰러진 드렉에게 허겁지겁 달려가 그의 상태를 살펴보았는데... 다행히도 숨은 붙어있는 모양이었다. 심판은 머리위로 손을 붕붕 휘두르며 의료진을 부름과 동시에 진석의 승리를 선언했다. 곧 장내에서 어마어마한 환호가 진석에게 쏟아져내렸다.

'아 다행이군. 휴우우. 정말 십년 감수 했... 으엑?!'

고개를 돌리다 무심코 선수 대기석에 있던 검은 레오타드 차림새의 여자, 제인과 눈이 마주쳤다. 시합이 시작되고도 여전히 무감정한 눈으로 진석을 바라보던 그녀였지만... 지금은 왠지 모를 적의를 담아 진석을 노려보고 있었다!

'으아악! 까, 까먹고 있었어. 난... 새대가리냐?!'

싸움에 몰두해서 제인 앞에선 써선 안될 바일리 델 비엔토를 써버리고 말았다! 시클론만이라면 모를까, 라파가를 선보였으니 빼도박도 할 수 없었다. 만약 제인의 정체가 추측대로 솜브라 교단에서 갈라져 나온 반대측 파벌이라면... 제인이 보기에 바일리 델 비엔토를 사용하고 있는 진석 자신은 당연히 원 솜브라 교단 측의 인간으로 여겨질터! 양측은 서로 원수 아니던가? 그녀가 적의를 담은 시선으로 노려보는것도 당연했다.

'화... 환장하겠네. 아니 그렇다고 토너먼트 내내 바일리 델 비엔토를 아예 안 쓰고 이겨나갈 수도 없었을테지만... 이래서야.'

이렇게 해서 B조의 8강 진출자도 모두 결정되었지만, 따끔따끔할 정도로 느껴지는 제인의 시선에 진석은 어쩔 줄 몰라했다. 저 눈초리를 보아하니... 당장은 아니더라도 틀림없이 언제고 덤벼들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와 굳이 얻을것도 하나 없을 무익한 싸움을 해야 되나?

'...아니지 아니야. 그럴 필욘 없지. 저 여자 제인은 아직 내 정체를 의심은 해도 확실히는 모르고 있을테니... 혹시나 접근해온다면 잘 속여서 이용해주겠어.'

진석은 제인이 자신을 노리려 든다면 지금까지 다른 이들에게도 해온것처럼 거짓말로 속여넘길 궁리를 하며 시합장을 내려갔다. 한 두번 한것도 아니고, 그 정도 말재간으로 상대를 속일 자신은 있었다. 그리고 특별 관람석에서 진석의 시합을 지켜보고있던 패럴 왕자와 레나는 처음 본 그의 어마어마한 솜씨에 내심 감탄하면서, 계획이 예정대로 진행되고 있음을 확신했다. 브래들리 왕세자 역시 대단한 무골이긴 하지만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의 속도로 움직이며 저만한 거한을 일격에 날려보낼 정도의 실력이라면 아무 문제없겠다 싶었다. 이제 내일이면 브래들리 왕세자는 저 자의 손에 숨이 끊어지고 공석이 된 왕세자의 자리는 자연히 패럴 자신의 손에 들어오게 되리라! 패럴 왕자는 흥분해서 시합내용을 떠들어대는 브레들리 왕세자의 장단에 맞춰주며 안면에 거짓 웃음을 띄워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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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밤 혹시나 제인이 자신을 노리고 찾아올지도 모른다. 진석은 그런 생각에 수면을 취하지 않고 밤새 저택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제인은 찾아오지 않았다. 허무했다. 진석은 늘어지는 하품을 하며 창문 너머로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았다.

'아니 그렇게 무섭게 노려보더니만. 어차피 토너먼트이니 시합장에서 때려눕히겠다 이건가? 아니면... 정체모를 나따윌 찾아오는것보다 뭔가 더 중요한 할 일이 있었다거나?'

쩝하고 입맛을 다시는 진석. 그녀가 자신을 솜브라 교단의 일원이라 착각하고 이쪽을 일방적으로 적대한다는 느낌을 풍겼다지만... 피차 험악해질 방법으로 척을 지고 싶진 않았다. 바일리 델 비엔토라는 기술을 익힌 자들끼리 서로 전력을 다해 싸우게 된다면 반드시 어느 한쪽이 피를 봐야 끝날게 분명하거니와, 솔직히 그녀는 죽이기엔 꽤 아까운 미인 아닌가? 하프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눈만 드러내고 있었지만 그녀가 대단한 미인이라는 것 쯤, 분위기만으로도 어렵잖게 짐작 할 수 있었다. 게다가 짝 달라붙는 검은 레오타드 위로 드러나는 훌륭한 몸매까지. 그래서 자신을 찾아오면 적당히 거짓말로 속여넘겨보려 한건데 뭐 예상과 달리 아예 오질 않았으니 어쩔 수 없었다.

'그나저나 이 저택도 오늘이 마지막이군.'

저택은 처음에 왔을때와 마찬가지로 휑뎅그렁했다. 가구같은건 다 갖춰져 있었지만 생활감이나 온기가 없었달까. 그나마 셀린, 케이트와 함께 지내는 동안은 좀 사람 사는 집 같았지만 안전을 고려해 그녀들을 도시 밖에 내보내고 혼자만 남아있자니 금방 다시 썰렁해졌다.

"읏샤."

몸을 묻고 있던 소파에서 일어나는 진석. 어차피 할 일도 없고 하니 그냥 일찍 나설 생각이었다. 어차피 짐도 물건도, 돈도 아무것도 없었다. 그야말로 최소한의 것만 남겨두었던 터라 달리 챙기거나 치워야 할건 아무것도 없었다. 사두마차조차 그녀들을 실어 보내두었으니까. 게다가 혼자 남은 후엔 식사도 계속 밖에서 해결하고 있었다. 지금 여기 있는거라곤 자신의 몸에 두른 장비들과 주머니에 든 약간의 금화 뿐이었다. 우선 자신의 허리에 두른 전투용 벨트. 흑소 가죽으로 만들어져 유달리 튼튼한 이 벨트엔, 주무기인 란비언과 흑철단검, 그리고 투척용 단검 네 자루와 몇가지 회복제가 든 파우치가 메어져 있었다. 그리고 가죽 흉갑. 갈론에서 미리안의 명령을 기다리며 잠시 머무는 동안 구입했던 흑철판이 대어진 가죽 흉갑이었다.

"그리고..."

어깨 보호대인 에스카마도와 적룡의 건틀렛인 플라메우스. 비더하임의 스마이쉬 산에서 얻었던 방어구들. 사실 둘 다 한짝 뿐인 짝짝이었다. 에스카마도는 왼쪽 어깨에, 건틀렛은 오른쪽 손에. 그럼에도 몸에 걸치고 나면 어색하긴 커녕 나름 숙련된 모험자같다는 느낌이 풍겨 마음에 들었다.

"마지막은 이거지."

펄럭. 어깨 위에 머플러나 숄에 가까운 진홍색 천조각을 두르는 진석. 아라파의 전설적인 도적단이었던 사카르. 그 사카르의 노회한 암살자인 바노르에게서 강제로 빼앗았던 물건, 바로 암살자의 망토였다. 이 장비들만 잘 활용해도 어지간한 상대는 자신의 상대가 되지 않으리라. 하지만 오늘 진석이 잡아야 하는 상대는 평범한 자가 아니었다. 무려 일국의 왕세자.

'그러고보니 나도 참 여러나라 왕실 박살내고 다니는구나... 그란델의 레오노르 공주부터 시작해서 아라파에선 아예 직접적으로 알 유세피나의 왕위 찬탈을 돕고, 이번엔 브래들리 왕세자의 암살까지. 이게 참 뭐하는짓인가 몰라. 새삼 돌이켜보자니 내가 진짜 악당놈이긴 하구나.'

진석은 모든 장비가 이상없음을 확인 한 뒤, 쭈욱 기지개를 켜며 집을 나섰다. 비록 꼬박 밤을 새고 나가는 길이었지만 피로도 없었고 아침 공기는 묘하게 상쾌하기까지 했다.

============================ 작품 후기 ============================

병원 때문에 늦게 올리게 되서 정말 죄송합니다. 몸 핑계로 요 며칠새 글 올리는 시간이 일정치 못하고 분량도 적어서.. 면목이 없습니다. 오늘 진료 받고 1차 치료를 받고왔는데 영 죽겠군요. 게다가 앞으로 며칠간격으로 한 3주에 걸쳐 통원치료를 더 받아야 한다고 해서.. 아이고.. 돈도 돈이거니와 너무 괴롭군요. OTL

한 번 리듬이 깨지니 이래저래 엉망진창이 되는군요. 역시 건강이 최고인 것 같습니다. 안 그래도 날이 쌀쌀해지는데 여러분들도 건강 조심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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