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10. -- > * 119화 *
아침 일찍 저택을 나서 근처의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기분 전환 겸 하루 종일 도시를 돌아다닌 진석. 날이 저물때쯤 되어 마지막으로 말로스 상사의 포먼에게 들러 자신의 계획에 대해 마지막 이야기를 나누고, 곧 시간이 되어 위장용 가발을 뒤집어 쓴채 어슬렁 어슬렁 대투기장으로 향했다. 분명 정시에 맞춰 도착했음에도 다른 참가자들은 이미 다 모여있던 참이었다. 왠지 모르게 싸늘한 제인의 시선을 받으며 대기실로 들어가니 진행요원이 따라 들어와 생각지도 않던 공지를 하나 전달해주었다. 바로 8강 시합의 대진은 추첨으로 정해진다는 것이었다.
'추첨이라...'
추첨이라면 어차피 운. 누가 외적으로 어떻게 개입할 여지가 있는게 아니니 다들 납득했다. 진행요원들은 선수들마다 돌아가며 한 번씩 상자를 내밀었다. 숫자가 적힌 공이 든 상자였다. 진석이 자신의 차례에 뽑은 나무공에 쓰여진 숫자는 8이었다. 그렇게 각 선수들이 뽑은 번호에 따라 눈 앞에서 바로 대진표를 작성하는 진행요원들.
'아, 아니 잠깐. 이게 뭐야?'
8번을 뽑은 진석의 대진표는 실로 운이 없는 구성이었다. 첫 상대는 차분한 인상의 사내, 중갑을 입고 프레일에 라운드 실드를 쓰던 바로 그 남자였다. 대진표에 적힌 이름을 확인해보니 그의 이름은 도노반이라고 적혀있었다. 만약 진석이 이 도노반을 꺾고 4강에 오르면... 제인과 싸우게 되어 있었다. 물론 제인이 백퍼센트 이기고 올라오리란 보장은 없었지만, 상대 참가자는 그냥 딱 봐도 별다른 기도가 느껴지지 않는게 딱히 제인의 상대가 될 것 같지 않았다. 그렇게 4강에서 제인을 꺾고 결승까지 오르면...
'...결승에선 비렐하고 만나겠군.'
8강이긴 했지만 진석은 사실상 이 토너먼트가 4파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우선 진석 자신. 그리고 푸른색 브레스트 메일을 입은 용병 비렐. 검은색 레오타드로 몸매를 드러내고 하프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제인. 마지막으로 중갑과 프레일로 무장한 도노반. 다른 나머지 네 참가자들은... 그냥 떨거지들이었다. 한 눈에도 기량이 변변찮아 보였달까?
'근데 대진이 뭐 이따위냐고! 예상대로라면 나는 저 셋하고 차례대로 다 싸워야 하잖아? 에이씨.'
기왕이면 저 떨거지들과 붙어서 편하게 올라가고 싶었는데. 하지만 이미 결정된 사항, 어쩔 수 없었다. 대진표를 확정지은 대기실의 참가자 전원은 진행요원의 인도에 따라 밖으로 나가 시합장으로 향했다.
'어, 벌써 함성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군.'
복도를 따라 시합장까지 나가는 그리 길지 않은 동안에도 경기장 내를 쩌렁쩌렁 울리는 환호성이 들려왔다. 관객들은 아직 선수들이 등장하지 않았음에도 흥분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복도를 빠져나와 시합장으로 나서니... 장관이었다.
'진짜 빽빽하네.'
어제도 분명 관객석이 만원이었지만, 오늘은 더했다. 그야말로 초만원이랄까. 선수들이 모습을 드러내자 그야말로 콩나물 시루처럼 빽빽히 들어선 관객들이 소리를 지르고 박수를 치고 팔을 휘두르며 난리를 쳤다. 선수들이 시합장 옆 단상앞에 정렬하고 서자, 저 안쪽에서부터 이 토너먼트를 주최한 장본인인 브래들리 왕세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패럴 왕자와 레나는 어제와 같은 특별 관람석에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와아아아! 브래들리 저하 만세!"
"올린스턴 왕국에 영광을!"
브래들리 왕세자가 등장하자 노골적으로 왕세자 본인과 왕국을 찬양하는 환호가 여기저기 섞여서 쏟아졌다. 관객석을 슥 훑어보는 진석. 브래들리 왕세자나 왕국을 연호하는 자들의 모습이 자연스럽지 못하고 뭔가 과장해서 연기하는 느낌이 드는게... 평범한 시민이 아닌, 프로파간다용으로 의도적으로 심어놓은 왕세자의 수하들인듯 했다.
'시민들 사이에 가득 찬 토너먼트의 열기를, 왕국과 왕세자 본인을 위한 찬양과 고무로 은근슬쩍 돌리겠다 이건가? 하긴. 곧 왕세자 본인의 주도로 전쟁을 일으킬 참이라고 했으니 이런 대중 선동 정도는 당연한건가. 무기수집가에 무골이라고 해서 어떤놈인가 했는데 마냥 아무 생각 없는자는 아니었군.'
단상에 오른 브래들리 왕세자는 한참이나 주변을 향해 손을 들어보이며 뜨거운 환호에 답례를 했다. 그러길 수 분. 이윽고 환호성이 어느정도 잦아들자 그는 장내를 휙 돌아보며 쩌렁쩌렁 울리는 힘있는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자랑스런 왕도 캐버너의 시민들이여! 그대들이 오늘밤 이 여덟 맹자들이 펼칠 무의 제전을 관람하기 위해 온 것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에 앞서 모두가 알아둬야 할 것이 있다. 유서깊은 우리 올린스턴 왕국은 사실 유래없는 국난에 처해있다! 서쪽으로는 유곤 왕국이, 남쪽으로는 옐 프람 성국이 가로막고 서로 협심한채 우리를 정치적, 외교적으로 핍박하고 있다!"
...유곤 왕국과 옐 프람 성국이 서로 손을 잡고 올린스턴을 핍박하고 있다고? 글쎄. 그건 근거도 뭣도 없는 일방적인 이야기 아닌가? 뭐 진석은 현재 방랑자 신분으로 교단에 속해있기에 정확한 수치나 규모까지 알 순 없었지만, 분명 영토 크기만 봐도 올린스턴 왕국쪽이 다른 두 나라보다는 국력이 어느정도는 우위에 있을것 같았다. 하지만 시민들 사이에 섞인 브래들리 왕세자의 바람잡이들이 유곤 왕국이나 옐 프람 성국을 욕하기 시작하자 시민들에게서도 웅성임이 일어났다.
'그보다 이 안에도 틀림없이 유곤 왕국이나 옐 프람 성국 출신들이 있을텐데... 저런 말 함부로 해도 되나?'
하지만 진석의 생각과는 관계없이 브래들리 왕세자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하지만 우리는 자유국가! 평화와 전통을 수호하는 기치를 높게 걸고, 외국의 불합리한 요구나 태도는 단호히 거부할것을 선언한다! 우리는 어떠한 고난에도 굴복하지 않을것이다. 오늘의 토너먼트야 말로 그 의기의 증명! 거듭해 싸우고도 꺾이지 않고 끝내 승리하는 순수한 무도의 도리를 모두에게 보이고자 주최한 시합이다! 시민들이여. 그대들 역시 단순한 관람만이 아닌, 본인들 개개인의 마음속에도 이렇게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하는 자세를 깊이 새겨주기 바란다!"
아니 이거 뭐... 가만히 듣고있자니 그냥 말도 안되는 헛소리다. 대체 뭐라는건지 원. 하지만 목소리에 힘이 실려 있고 태도가 시원시원 한데다 왠지 모르게 그럴듯한 단어들을 섞어 줄줄 읊다보니 관객들은 그저 좋아서 난리였다. 굳이 바람잡이들이 호응을 이끌어 내지 않아도 우레같은 환호성이 그에게 쏟아졌다. 시원스런 웃음을 띄운채 한참이나 환호성을 음미하던 브래들리 왕세자는 손을 펼쳐보이며 바로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선수들을 가리켜 보였다.
"그리고 지금 여기서, 토너먼트의 최종 8강전이 시작됨을 선언한다! 선수들은 앞으로!"
각자 한 두 발짝씩 앞으로 나서는 참가자들. 진석도 팔짱을 낀채 한발짝 앞으로 나섰다. 브래들리 왕세자 뿐만 아니라 진석을 포함한 이 여덟명에게도 박수나 갈채가 쏟아졌다. 브래들리 왕세자는 단상을 내려오더니 선수들을 둘러보며 그들에게만 들릴 정도의 목소리로 말했다.
"쓸데없는 사설이 길었군. 미안한걸. 다들 오늘 좋은 시합 부탁하네. 뭐 상금만을 생각하고 토너먼트에 참가한 사람도 있을지 모르지만, 각자의 시합 내용에 따라 임관제안을 할 생각도 있으니... 가능하다면 응해주길 바라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이쪽은 자네들같이 유능한 인재들이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라서. 그리고 임관에 응한다면 내 직속군에 편성되고 대접 역시 섭섭찮게 해줄테니까."
그렇게 말하며 사람좋게 씨익 웃어보이는 브래들리 왕세자. 확실히 호남형의 미남 왕세자가 친근한 태도로 저런 이야기를 해오니 없던 설득력도 어디선가 막 솟아나는 느낌이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아까부터 별 대단한 이야기를 하는게 아닌데도 그의 말이나 태도엔 어쩐지 쉽게 주목하게 되고, 가까이에서 보니 브래들리 왕세자 자체가 어딘가 빛나보이는 느낌마저 드는게... 이게 타고난 카리스마라는건가 싶었다.
'아니 거, 확실히 패럴 왕자보단 얘가 더 왕세자 감이 맞는데? 패럴 왕자도 나름 의기는 있어보이긴 하지만 이쪽하곤 격 차이가 너무 크다 커. 레나가 패럴을 그렇게 좋아라 섬기는 이유를 모르겠네? 내가 여자라 치고, 둘 중 한 남자를 고르라면 무조건 이쪽을 고를텐데.'
좌우지간, 이렇게 해서 토너먼트의 8강 시합은 곧바로 개시되었다. 첫 시합은 오늘도 푸른 브레스트 메일을 입고 나타난 비렐과 별 관심도 안가던 어느 떨거지 참가자의 대전이었다. 시합은 비렐이 결승에 올라갈거라는 진석의 예상대로 일방적으로 진행되었다. 비렐은 본 실력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도 간단히 상대를 제압해, 그의 무기를 저멀리 쳐날려 버리고 목에 칼날을 들이대며 항복을 받아내었다. 장내엔 비렐의 이름이 한참이나 연호되었고 상대 선수는 터덜터덜 불쌍한 모양새로 복도 안쪽으로 사라졌다. 그렇게 두 시합이 더 치뤄치고, 8강의 마지막 시합인 진석과 도노반의 경기만이 남았다.
'방금 전 시합에서 제인도 상대를 어렵잖게 꺾으며 이겼고... 이제 내 차례인가.'
철컥철컥, 중갑의 파츠들이 부딪히는 쇳소리가 났다. 옆을 돌아보니 진행요원의 인도로 자리에서 일어나 시합장으로 올라가는 도노반의 모습이 보였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얼굴은 미묘하게 찌푸려진게, 짜증이랄까 분노같은 기색이 슬쩍 배어나오고 있었다. 진석도 시합장으로 올라가며 생각했다.
'...뭐야? 설마 나같은 상대와 싸워서 기분 나쁘다는건가? 딱히 그런건 아닐테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좁혀진 미간과 치켜뜬 눈매만 봐도 도노반이 무엇인가 때문에 불쾌해하고 있는것은 사실. 하지만 그것이 상대와 싸우는데 문제가 될 이유는 없었다. 진석 자신도 자신의 목적에 따라 일을 할 뿐이었으니, 상대의 기분따위 신경 쓸 거리도 안되었다. 진석과 도노반은 나란히 시합장에 올라섰다. 이십보 가량의 간격을 두고 선 둘. 그 사이에 심판이 손을 내민채 끼어들었다.
"그럼 준비하고... 시합 개시!"
심판이 시합 개시의 선언을 외치며 시합장에서 물러나기 무섭게 도노반이 라운드 실드를 내세우며 진석에게 달려들었다.
'방패를 앞세운 차징이라... 중갑을 입고 용케도 저렇게 잘 달려오는걸 보니 분명 저 도노반이란 남자, 상당히 단련된 전사라는 증명이겠지. 그렇다면!'
왼팔에 든 라운드 실드로 상체를 가린채 오른팔로는 프레일을 붕붕 휘두르며 달려드는 도노반. 진석은 도노반의 차징을 피해 측면으로 선회하며 그에게 손바닥을 내밀었다.
"화염화살!"
파파파파팟! 허공에 다섯발의 화염화살이 나타나 한 발 한 발이 제각기 다른 궤도의 궤적을 그리며 도노반의 몸 곳곳으로 날아들었다. 하지만 도노반은 차징을 풀지 않은채 방패와 중갑으로 화염화살을 받아내며 계속 달려들었다. 두 발은 방패에 막히고 두 발은 중갑에, 나머지 한 발이 갑옷의 틈새에 적중하긴 했지만 갑옷 안쪽 파츠를 연결하도록 덧대어진 두꺼운 가죽 부분에 맞은터라 별 피해는 없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진석의 진짜 노림수는 화염화살이 아니었다.
'겨우 8강 첫시합에서 질질 끌수 없지!'
도노반에게 화염화살을 날려 그쪽으로 시선을 빼앗아두곤 열격장의 자세를 취하며 힘을 모으는 진석. 화염화살로 도노반의 발을 잠깐이라도 묶을 수 있을거란 생각과 달리, 그가 차징을 계속하며 화염화살을 받아낸터라 열격장의 힘을 극성까지 모을 순 없었다. 하지만 중갑을 걸친 그의 행동은 그렇게 민첩하지 못해서 잠깐 사이에 3, 4할 가량의 힘은 모을 수 있었다. 진석은 방패를 앞세우고 달려드는 도노반에게 마주 달려들며 그 위에 열격장을 때려넣었다.
"열격장!"
"으, 크으읏?!"
진석의 장타가 반회전하며 방패위를 때리자 그 회전력이 고스란히 라운드 실드에 전달되었다. 방패가 옆으로 휘익 돌아가며, 방패를 쥐고 있는 주체인 도노반의 팔 역시 틀어지며 몸 전체의 자세가 흔들렸다. 방패위를 때렸음에도 강렬한 예상외의 위력에 당황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진석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방패를 힘껏 걷어차서 도노반을 뒤로 물러나게 만들었다.
"큿..."
최초의 기세좋은 차징이 무색하게 몇 발자국 뒤로 물러나버린 도노반. 하지만 이내 자세를 다잡고 재차 달려들었다. 이번엔 방패는 옆으로 빗겨들고 프레일을 든 오른손을 노출한게 공세로 나설 생각인 모양이었다. 붕붕 소리가 날 정도로 프레일을 힘차게 휘두르며 달려드는 그. 진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도발했다.
"좋아, 덤벼봐!"
"이 놈!"
짧게 외치며 진석을 향해 대각선으로 프레일을 휘두르는 도노반. 부웅하며 쇠사슬에 이어진 사각의 철추가 진석의 상체를 향해 휘둘러졌다. 저렇게 온힘을 다해 휘두르는 철추를 맞는다면 어디 한군데쯤 바로 부러지겠지. 머리에라도 맞으면 두개골이 깨진다던가, 좌우지간 치명상일테다. 하지만 진석이 궤도가 뻔한 프레일을 맞을리 없었다. 시클론을 걸며 뒤로 너덧발짝 빠르게 물러났다가, 프레일이 허무히 허공을 가른후 라파가를 걸며 정면으로 돌격해 나아갔다.
"이익!"
하지만 도노반도 진석의 반격을 예상했는지, 왼손에 든 방패를 앞으로 내밀며 그 돌격을 저지하려고 했다. 그러나 시클론에 라파가의 가속까지 받은 진석이 훨씬 빨랐다. 도노반의 품속으로 뛰어들듯 근접한 진석은 단단한 갑옷 위로 빠르게 열격장을 내질렀다. 힘이나 호흡을 전혀 모으지 않아 위력이 미미한 열격장이었지만, 그냥 맨주먹으로 갑옷을 때리것보단 훨씬 나았다. 게다가 진석의 기본적인 스테이터스가 워낙 강했기 때문에 갑옷안쪽까지 충격이 가해져 도노반에게 어느정도의 충격을 입힌 모양이었다. 크흡하고 숨을 삼키며 밀려나는 도노반. 그는 이를 악물고 재차 프레일을 치켜들어 코앞의 진석을 후려치려 했다.
"아직 시작도 안했어!"
진석은 그렇게 외치며 오에스테의 원무로 빙글돌며 그의 품 안쪽으로 뛰쳐들어가 도노반의 양팔을 타탁 튕겨내었다. 으윽하고 양팔이 쩍 벌어지며 가슴팍이 무방비하게 노출되는 도노반. 진석은 원무의 원심력을 살린채, 손바닥을 펴서 재차 그의 갑옷 위로 열격장을 꽂아넣었다. 원무인 오에스테에 회전력을 실은 장타인 열격장을 합친 콤비네이션 어택!
"그으윽!"
이번의 열격장 역시 아까전의 것처럼 전혀 힘을 모으지 않은 기본상태의 공격이었지만, 오에스테의 원심력을 실은덕인지 중갑을 걸친 도노반의 무거운 몸체가 그대로 지이익 뒤로 밀려났다.
'아 이거 진짜 좋은데? 오에스테와 조합을 했다곤 해도, 힘을 안 모은채 쓴다고 해도 단순히 주먹이나 발로 치고 패는것보다 훨씬 나아!'
열격장의 효과에 만족하며 여유만만한 표정으로 도노반을 바라보는 진석. 그 반대로 도노반의 표정은 굴욕감과 분노가 뒤섞여 엉망으로 일그러져있었다. 그는 뿌드득 소리가 날 정도로 이를 악물더니, 이내 양 손을 가슴앞으로 모으고 갑자기 뭔가를 웅얼거리기 시작했다.
'뭐야? 뭘 하는... 아니?!'
뭐하는건가 싶어 잠시 지켜보고 있자니... 갑자기 도노반의 무기와 갑옷이 은은히 빛나기 나기 시작했다. 허공에서부터 빛무리가 나타나 그의 팔과 다리에도 스며들듯 사라져갔다.
'저건... 버프주문들?! 저, 저자식 설마... 성직자였냐?'
주문의 종류만 봐도 대충 알 수 있었다. 마법사들에게도 버프 주문이 없는건 아니지만, 버프주문을 사용 할 수 있을정도의 고명한 마법사가 굳이 이렇게 무거운 중갑까지 걸치고 싸울리가 없지. 이 도노반이란 자는 분명 성직자가 틀림없었다. 그걸 모르고 바로 코 앞에서 여유롭게 버프를 걸도록 방치하다니. 이런 젠장! 진석은 라파가를 발하며 그에게 허겁지겁 달려들었다. 도노반은 조금 전 같으면 진석의 빠른 속도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을테지만, 지금은 진석의 움직임이 어느정도 보이는지 방패를 내세워 그 진로를 차단해왔다. 진석은 급히 멈추며 방패위로 앞차기를 질러넣었지만 뒤로 밀려나던 아까완 달리 이번엔 전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흡사 묵직한 기둥이라도 찬 느낌이었다.
"핫!"
버프를 통해 능력치를 일시적으로 상승시킨 도노반. 방패위에 발을 얹은 진석을 밀어내곤 기합을 외치며 프레일을 휘둘렀다. 그 기세가 어찌나 센지, 아까와는 달리 부웅 정도가 아니라 씨잉 소리가 나는게 쇠사슬에 달린 철추가 보이지도 않을 지경이었다. 진석은 할 수 없이 뒤로 물러나며 공격을 피했다. 도노반은 그런 진석을 놓치지 않겠다는듯 재차 방패를 내밀며 추격해왔다.
'아 이 자식 싸우는 스타일 진짜 짜증나네!'
중갑을 두르고 방패까지 들어서 움직임 자체는 좀 느리지만 여간한 공격은 방패로 다 막는데다가, 갑옷이 튼튼하니 역시 가벼운 타격도 그냥 다 무시해버린다. 거기다 버프로 스스로 능력치를 높이고 덤벼들기까지!
'게다가 성직자라면 혹 어느정도 피해를 입힌다고 해도... 잠깐 틈을 주면 치료주문 같은걸로 곧바로 체력을 회복해버리겠지? 그리고 갑옷과 방패덕에 방어력이 높아서 어중간한 공격으론 별 피해도 못주니... 그렇다는건 결국 뭔가 강력한 한 방을 먹여 죽... 아니 죽이면 탈락이지. 기절이라도 시켜야 한다는걸까.'
진석이 현재 사용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공격은 역시 토르멘타였다. 자신의 간격안에 든 상대를 확실한 죽음으로 안내하는 검격의 난무. 하지만 상대가 방패를 들고 중갑까지 입었으니... 어쩌면 단검의 난무만으론 단번에 끝장내기 조금 힘들지도 모르겠다 싶었다.
'그리고 토르멘타로는 기절처럼 깔끔한 무력화를 성공시키기 어려워. 설령 놈이 토르멘타를 맞고 어느정도 다쳤다 해도 포기하지 않고 치료주문을 써서 스스로를 회복시키면 그만. 그럼 난 헛수고만 하는셈이지. 거기다 애당초 이건 상대를 무력화시키는게 아니라 철저히 죽이는 기술이다보니...'
역시 안되겠다. 그럼 방법은 열격장 뿐인가? 어제 자신의 신체를 강화한 드렉도 열격장의 일격으로 날려보냈었으니... 중갑을 입은 도노반에게도 마찬가지로 먹히겠지? 하지만 호흡을 모으고 힘을 축적시키려면 몇초라도 좋으니 틈을 만들어야 했다. 어젠 드렉이 먼저 근육을 불끈거리며 몸집을 불리는 틈을 만들었었는데.
"타아아아!"
방패로 진석을 저 끝까지 밀어붙이겠다는듯 돌진하는 도노반. 진석은 빠른 몸놀림으로 옆으로 피해버렸지만, 도노반도 멈추지 않고 계속 추격해왔다.
"거 더럽게 끈덕지게 달라붙네! 남자가 남자 꽁무니를 쭐레쭐레 쫓다니, 너 혹시 호모냐?"
진석의 시덥잖은 도발에 눈살을 찌푸리는 도노반. 그가 뭐라고 대꾸하려는 찰나, 진석은 뒷춤에서 단검 두 자루를 빼내어 그의 갑옷 틈새를 노리고 던졌다. 스스로가 생각해도 놀랄정도로 자연스럽고 재빠른 투척! 그리고 단검을 던지자마자 연이어 화염화살의 주문을 쏘았다. 다섯발의 불화살이 단검의 뒤를 이어 날아들었다. 깜짝 놀라며 자리에 멈춰서서 방패를 들고 자세를 낮추며 공격을 받아내는 도노반. 방패위로 두 자루의 단검이 터텅 꽂히고 그 뒤를 이어 불꽃화살이 연속으로 쏟아졌다. 두두두두두! 그리고 마지막 화염화살이 방패위를 때린 순간, 진석의 공격으로 충격이 누적되어 있던 목제 라운드 쉴드의 한쪽 부분이 겨우 한 치 정도긴 하지만 팍삭 깨져나갔다.
'좋아. 그럼 이 틈에!'
그 사이 진석은 자세를 취하고 호흡을 들이마시며 최대한 빠르게 열격장의 위력을 극성까지 끌어올렸다. 어제 드렉을 날려버렸던건 대략 7할 정도 힘을 끌어모았던 열격장. 하지만 이번것은 완전한 풀차지. 그야말로 전력을 다한 열격장이었다.
'이걸 맞으면 죽을지도 모르지만... 방패를 들고 갑옷을 입은데다 뭔가의 버프로 신체까지 강화했으니 괜찮겠지. 네 능력을 믿고 마음껏 후려쳐주마!'
단검 투척과 화염화살의 세례를 버텨낸 도노반은 눈을 부릅뜨며 재차 진석에게 달려들었다. 정말 뚝심이 느껴지는 한결같은 돌진이었다. 그리고 정면을 향해 똑바로 달려가던 도노반이 입속으로 뭔가의 주문을 외자, 그의 몸 주위로 빛의 입자가 휘날리기 시작했다. 또 다시 뭔가의 주문으로 스스로를 강화한 모양이었다.
"그래 좋아. 덤벼! 갈길이 먼데 여기서 계속 티격태격 할 순 없으니 이걸로 피차 끝장을 보자고!"
진석도 방패를 앞세워 달려드는 도노반을 향해 라파가를 걸고 섬전처럼 쏘아져 나갔다. 마치 장전된 총의 방아쇠처럼 뒤로 당겨둔 오른손엔 해방되기를 기다리는 극성의 열격장이 준비되어 있었다. 진석과 도노반. 서로를 향해 달려드는 두 사내가 맞부딪히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윽고 서로가 서로의 간격에 겹쳐진 순간, 둘의 입에선 힘을 실은 외침이 터져나왔다.
"임프레그너블 차징!"
"열격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