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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베라 - 부회의 방랑자-121화 (121/155)

< --   - 10.   -- >         * 121화 *

결승이 시작하기 전에도 잠깐의 휴식시간이 주어졌다. 진석은 의료진에게 등의 상처를 깔끔히 치료받은 후, 잠시 볼일을 보고 오겠다는 핑계로 화장실을 가는 척 복도로 빠져나왔다. 이쪽의 복도는 이전과 같이 병사들이 중간의 길목을 차단하고 있었기에 일반인이 오갈 염려는 없이 조용했다.

'어디보자...'

그리고 따로 창문이 나 있는것도 아닌데다 조명을 설치해두지도 않아 조금은 어두침침한 한쪽 통로 앞. 창고라고 쓰여진 방이 하나 있었다. 그 안쪽으로 슬며시 들어가서 선 진석. 여기라면 확실히 아무의 눈에도 띄이지 않을곳이었다. 진석은 파우치에서 SP회복제를 한 병 꺼내어 마셨다. 제인과 싸우며 SP를 너무 많이 소모했기 때문에 보충해둬야 했다. 딱히 문제가 될만한 물건은 아니니 다른 사람들이 보는데서 마셔도 상관없긴 할테지만... 따로 준비해온 회복제를 마시는걸 보고 혹 진행요원들이 오해라도 해서 파우치에 뭐가 들었나 확인해보자며 번거롭게 굴 수도 있었으니, 귀찮아도 남이 보지 않는곳까지 와서 마신것이었다. 금새 다 마신 빈 병을 파우치에 찔러넣고 시합장으로 돌아가려는데 순간 창고 안쪽에서 뭔가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 같았다.

'...응?'

토너먼트의 열기가 최고조까지 달아오른 결승 직전. 이런 어둑한 창고안에서 누가 일이라도 하고 있는걸까? 대수롭지 않게 넘길수도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호기심이 일었다. 창고 문 앞에 귀를 대고 안쪽에서 들려오는 대화에 귀를 기울여보는 진석. 하지만 생각처럼 안쪽의 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다. 분명 누군가가 안쪽에서 뭔가의 이야기를 나누는건 분명한것 같았는데 그 내용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에이. 기껏해야 창고잖아? 일꾼들이라도 있는거겠지. 내가 지금 뭐하는 거람.'

결국 별거 아니겠거니 하고 생각한 진석은 흥미를 잃어버리고 복도를 거슬로 시합장으로 돌아갔다. 시합장으로 돌아가니 마침 결승전의 준비도 다 끝나, 진석의 상대인 비렐이 막 시합장에 오르려던 참이었다. 그가 입은 푸른 브레스트 메일이 왠지 모르게 조명에 빛나보이는 느낌이었다. 진석이 돌아온걸 본 진행요원이 이쪽으로 다가와 정중한 태도로 진석을 인도했다. 그의 뒤를 따라 천천히 시합장에 오른 진석. 최후의 2인이 시합장에 오르자, 장내에선 귀가 따가울 정도의 함성이 계속 이어졌다. 진석이 시합장에 올라와 자리를 잡는것을 바라보던 비렐이 문득 먼저 말을 걸어왔다.

"여어, 시합은 잘 봤어. 대단한 실력이던데."

씨익 웃으며 진석을 칭찬하는 비렐. 조롱이나 비아냥이 아닌가 했지만... 상쾌하게 웃는 얼굴을 보아하니 진심으로 하는 말인것 같았다. 진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아 뭐 피차, 그쪽도 마찬가지던데."

"헤헷. 별 말씀을. 아무튼 시합 잘 부탁 한다고. 여기까지 올라온 이상 나도 꼭 우승을 하고 싶으니 말이야."

진석의 건성인 대답에도 부끄러운지 코밑을 쓱 훔치며 부끄럽게 웃어보이는 비렐. 이 녀석 의외로 좋은 녀석일지도? 진석의 머릿속엔 일순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심판이 시합장으로 올라오자 금새 웃음기를 싹 지우고 칼을 뽑아드는 모습을 보니... 역시 인사는 그냥 인사일 뿐이고, 그가 시합 자체에 대단히 진지하게 임하고 있다는것을 잘 알 수 있었다.

'이 녀석도 나름 뭔가를 이루기 위해 토너먼트에 출전한걸까... 하긴 도노반의 태도도 왠지모르게 필사적이었고, 제인도 뭘 노린건진 알 순 없었지만 분명 자신의 일을 방해하지 말라고 했었지.'

그에 비하면 토너먼트의 주최자인 브래들리 왕세자를 죽이고 그의 애병을 강탈하겠다는 자신은 참 파렴치한 악당이다.

'뭐 어쨌든 이 녀석이 마지막이다. 이제 이 사내만 꺾고나면 브래들리 왕세자와 가까이에서 대면할 기회가 생길테고, 잽싸게 해치운 뒤 투명화를 이용해 최대한 빠르게 빠져나가면 되겠지.'

그럼 이번 일도 끝이다. 브래들리 왕세자에게 접근을 하기 위해 부득이 토너먼트에 출전 했다는것만 빼면 폭풍의 지팡이나 대지의 눈때에 비해 그래도 간단한 편이었던것 같다. 곧 심판이 둘 사이에 끼어들어 손을 내밀었고, 진석과 비렐 양쪽을 한 번씩 번갈아 본 뒤 고개를 끄덕이며 결승전의 시작을 알렸다.

"시합 개시!"

"타아아아앗!"

심판이 시합 개시를 외치자마자 양 손으로 쥔 롱소드를 치켜들며 달려드는 비렐. 동작이 신속하고 한치의 낭비도 없는것이, 왜 다른 참가자들이 그를 검술의 달인이라고 칭했는지 알 것 같았다. 정말로 평범한 타돌임에도 어딘가 모르게 위압감마저 느껴졌다.

'뭐야 이 녀석? 간격이... 감이 안 오는데?'

게임 상이지만 수많은 상대와 셀 수 없이 많은 싸움과 전투를 치뤄온 진석. 마법같은건 당연히 불가능하지만, 상대의 무기와 움직임을 보면 아 이 녀석의 간격은 이쯤이겠구나 하고 대강의 공격범위를 가늠할 수 있었다. 하지만 비렐의 움직임은 어째선지 그 간격의 감이 오지 않았다. 왠지 모르게 위험하다고 느껴져 곧바로 시클론을 걸고 측면으로 회피하는 진석. 하지만 비렐은 놓치지 않겠다는 듯 신속하게 방향을 전환해 진석에게 달려들었다.

'시클론을 건 내 움직임을 이렇게 쉽게 따라잡아?'

이래서야 피하는건 글렀다. 진석도 잽싸게 란비언과 흑철단검을 꺼내쥐며 비렐에게 맞섰다. 바로 코 앞까지 육박하며 내려치기를 가하는 비렐. 진석은 두 자루의 단검을 교차시켜 내려치기를 받아내려고 했다. 하지만 가한 비렐의 검날에는 전혀 힘이 실려있지 않았다.

'엇...?'

진석이 당황하는 사이 마치 동영상을 거꾸로 감듯 내려쳐졌던 궤도를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는 비렐의 롱소드. 아니, 내리쳐졌던 검날이 다시 위로 올라가는건 그 도중까지였다. 되돌아가는가 싶던 검날은 호선을 그리며 진석이 막아낸 정면이 아닌 무방비한 대각선 방향으로 내리그어졌다. 몸통을 노리고 가해지는 사선베기!

"뭣?!"

최초의 내려치기 자체가 그냥 페인트였다. 처음부터 단검으로 막아낼걸 감안하고 방어의 방향만을 유도했던것. 그리고 내려치려던 검날을 도중에 손목의 스냅으로 재빨리 되돌린 후 비어있는 몸통을 향한 사선베기! 진석은 혼비백산하여 뒤로 백스텝을 해 아슬아슬하게 직격을 모면할 수 있었다. 비렐의 검끝이 뒤로 물러나는 진석의 가죽 흉갑 끄트머리를 지이이익 하고 스쳤다. 거기서 멈췄더라면 좋았을 테지만, 비렐은 빗나간 검을 고쳐잡으며 찌르기로 진석을 추격해왔다.

"토, 토르멘타!"

당황해선 자신을 추격해오는 비렐을 상대로 토르멘타를 써버리는 진석. 진석이 토르멘타로 자신의 간격내에 난무를 펼치자 비렐은 추격을 멈추고 뒤로 몇걸음 물러났다. 애꿎은 허공에 실컷 헛손질만 날린 진석. 이맛살을 찌푸리며 비렐을 노려보았지만 그는 덤덤히 검을 고쳐쥐고 재차 싸울태세를 취할 뿐이었다.

'뭐야 이거. 초장부터 왜 이리 밀리지? 안돼. 내 페이스를 되찾자.'

투레질을 하며 정신을 차리고 우선 손바닥을 내밀어 화염화살을 내쏘는 진석. 다섯발을 한꺼번에 내 쏜 뒤 그 뒤를 따라 달려들며 라파가를 걸었다. 하지만 비렐은 여유 만만하게 검을 치켜들며 자신의 기술을 발했다.

"트로이건트!"

파팟! 순식간에 펼쳐진 비렐의 2연격. 단 두 번의 칼질로 다섯발의 화염화살을 요령좋게 몽땅 베어버린 비렐은 그 검끝을 멈추지 않고 곧바로 진석에게 휘둘러왔다. 그 검격은 시클론으로 가속한 진석의 눈으로도 굉장히 빨라, 흡사 단 한 합으로 화염화살을 몽땅 베고 자신에게까지 검을 휘두르는게 아닌가 할 정도의 느낌이었다.

'이 자식이 진짜!'

라파가의 수평베기로 비렐의 공격을 튕겨내고, 발끈해선 연이어 오에스테를 펼치는 진석. 품안을 깊숙히 파고드는 원무엔 비렐도 조금 당황했는지 뒤로 한걸음 물러나며 진석의 공격을 막아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뿐, 비렐은 진석의 오에스테를 막아낸 후 재차 자신의 기술을 펼쳤다.

"메잘루나!"

허리를 축으로 몸을 틀며 펼치는 예리한 섬격! 검날을 따라 초승달 같은 빛의 궤적이 펼쳐졌다. 두 자루의 단검을 겹쳐, 몸통을 노리고 뻗어지는 섬격 메잘루나를 막아내는 진석. 채애앵! 란비언과 흑철단검처럼 튼튼한 무기가 아니었다면 검째로 잘려나가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여간 만만찮은 위력의 기술이 아니었다. 힘겹게 메잘루나를 막아낸 진석은 이를 악 물고 비렐의 급소를 향해 검을 휘둘러 보았으나 그는 현란하게 롱소드를 휘둘러 진석의 공격을 모두 차단하곤 되려 틈을 노려 반격을 가해왔다. 그 반격을 차단하고 재반격으로 응수하는 진석. 허공에서 둘의 검이 쉴새 없이 부딪히며 글자 그대로 불꽃이 마구 튀었다. 잠깐사이 수십합을 주고 받은 둘은 동시에 뒤로 풀쩍 물러나며 서로를 노려보았다. 진석의 눈엔 은근한 분노가, 비렐의 눈엔 호승심이 깃들어 있었다.

'이놈... 진짜 순수한 정통파 검사다!'

이렇게 한차례 검을 나눠보고 느낀것은, 비렐이 정말 다른것은 다 제외하고 순수히 검만 단련한 검사라는 것이었다. 이 남자는 아마도 자신의 모든 재능을 롱소드를 다루는데 모조리 투자했으리라. 극한까지 검술 하나만 연마한 그 솜씨는 정말 잘 벼려진 명검과도 같아서 상대하기가 여간 쉽지 않았다.

'차라리 이런 순수한 검사를 상대론 마법들이 잘 먹힐텐데...'

그것도 단순한 공격마법 보다는 혼란을 일으킬만한 환각마법이나 정신마법 계열. 그런걸 쓸 수 있다면 의외로 쉽게 비렐을 무너트릴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진석이 쓸 수 있는 마법이라곤 화염화살 뿐이었고 그나마도 단 두 합에 다섯발 전부를 가볍게 썰어버리는 검놀림을 똑똑히 보았다. 어중간하게 써봐야 SP 낭비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젠장. 그래도 토너먼트 결승이라고 정말 만만치 않네. 시클론까지 걸고 각잡고 칼질을 해봤는데도 평수를 이루다니. 이 놈 정말 강한 검사다. 얘도 최소 교단의 챔피언인 드레비안 급이라는 이야긴가? 그럼 이거 뭔가 강력한 한 방이 필요한데...'

단발성 기술인 라파가나 오에스테는... 잘 먹히지 않으리라. 게다가 토르멘타는 제자리에 서서 펼치는 기술이니 아까처럼 놈이 간격 밖으로 피해버리면 그만.

'그나마 한 방이라고 할만한 기술이라면 열격장이 있긴 하지만 얘 몸놀림을 보니 순순히 맞아줄리 없지. 하지만...'

몸놀림이라면 아까 상대한 제인도 만만찮게 빨랐다. 그럼에도 열격장을 적중시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건 적절한 순간에 투명화를 걸어 허를 찔렀었기 때문. 그러나 투명화는 가능하면 브래들리 왕세자 살해 후 탈출 때 써야하고, 이미 한 번 선보였었기 때문에 또 먹히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지만... 그렇다고 적룡의 건틀렛 플라메우스로 브레스를 써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니 일단은 기대를 걸어볼만한게 투명화 밖에 없었다.

'어디. 이놈이 맨 처음에 나에게 페인트를 섞은 공격을 했던것 처럼 나도 그걸 응용해볼까.'

진석은 아까전과 동일하게 화염화살을 날린 후 라파가를 걸며 비렐에게 뛰어들었다. 단, 라파가의 숏대시로 달려듬과 동시에 투명화를 펼쳤다. 삽시간에 허공에 녹아들듯 사라지는 진석의 몸. 평범한 사람의 눈으론 시클론을 걸고 펼치는 라파가부터가 잘 보이지도 않을 정도의 속도인데, 타이밍좋게 아예 투명화까지 펼쳤으니 정말로 가공할 정도의 속도로 움직여 사라진걸로 느껴지리라.

"웃!"

비렐도 진석의 투명화는 아까 한차례 보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그것이 실제로 눈앞에서 펼쳐지니 적잖이 당황하는 눈치였다. 라파가를 쓴채 비렐의 측면으로 돌아간 진석은 재빨리 두번째의 화염화살을 내쏘고, 그의 후면으로 돌아간 뒤 재차 라파가를 써서 등을 노렸다. 허나 계속 투명화를 펼친채 싸우며 3분 밖에 안되는 제한시간을 헛되이 낭비할 순 없었으므로 비렐에게 근접한 순간 투명화를 풀었다.

"하아앗!"

앞과 옆에서 쏘아진 총 열 발의 화염화살. 그리고 후면에서 찔러들어가는 라파가. 순식간에 펼쳐지는 삼면에서의 공격! 그야말로 빈틈이 없는 완벽한 공격이었다. 이것만큼은 검술의 달인이고 나발이라도 꼼짝없이 당할 수 밖에 없으리! 진석은 자신의 공격이 먹혀들었다고 자부하며 그의 등 뒤에 칼날을 휘둘렀지다. 하지만 다음 순간, 비렐의 입에서 힘찬 외침이 터져나왔다.

"코라자!"

두웅! 비렐의 외침에 호응하듯 그가 입은 푸른색 브레스트 메일에게서 무형의 기운이 퍼져나오며 진석을 뒤로 튕겨내었다. 비렐에게 거의 적중할듯 근접했던 열 발의 화염화살들 역시 허무하게 허공에서 녹아들듯 사라지는게 보였다.

"뭣?!"

알 수 없는 힘에 튕겨져 뒤로 데굴데굴 나뒹구르다 펄쩍 뛰듯 일어나 자세를 잡는 진석. 비렐은 식은땀을 흘리며 뒤돌아 서서 진석을 향해 검을 내밀었다. 조금전 까지만 해도 혈색이 멀쩡하던 비렐은 어째서인지 호흡이 거칠어져 있엇고 지쳐보였다. 진석은 비렐의 지친 모습을 보곤, 방금 전 그의 푸른색 브레스트 메일에게서 뿜어진 무형의 기운이 관계되어 있다는것을 눈치챘다.

'아... 그렇군. 뜬금없이 눈에 보이지도 않는 힘이 날 튕겨내서 어처구니가 없었는데... 저 갑옷은 내 에스카마도 처럼 특별한 힘을 지닌 마법 무구인 모양이지? 시동어를 외치면 주변의 해가 되는 모든것을 강제로 밀어내거나 소멸시키는 타입의...'

그래서 그 푸르딩딩한 갑옷을 그렇게 꼭꼭 챙겨입고 다니셨구만? 이거 꽤 탐나는 물건이다. 하지만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훔쳐내고 어떻게든 호흡을 다잡으려 애쓰는 비렐의 모습을 보니... 갑옷의 힘을 빌어쓰는 대가는 아마도 체력이나 스테미너인듯 했다. 게다가 굉장히 강한 검사인 비렐이 헉헉대며 지친 기색을 전혀 감추지 못하는것을 보아하니, 정말로 상당량의 체력을 앗아가는듯 했다. 진석이 가진 적룡의 건틀렛 플라메우스 역시 브레스 웨폰인 아르도르의 폭염을 소환하는 대가로 무조건 5할의 체력과 SP를 소모했었다. 저 갑옷은 분명 그것과 동일한 타입인 모양이었다.

'뭐 맞고 목숨을 잃는것보단 체력을 좀 잃고 마는게 낫긴 하겠지만... 저래서야 몇 번이나 더 갑옷의 힘을 빌어 쓸 수 있으려나? 잘해야 한 번? 헉헉대는 꼴을 보니 두 번 이상은 확실히 불가능 하겠군. 그랬다간 싸울힘은 커녕 탈진해서 쓰러질 것 같으니.'

비렐이 감춘 한 수는 바로 갑옷의 힘을 빌어쓰는 방어의 힘이었다. 하지만 댓가로 대량의 체력을 잃는 그야말로 양날의 검. 그는 진석의 투명화와 화염화살의 조합을 막아내기 위해 그만 갑옷의 힘을 써버렸다. 아무리 고도로 숙련된 검사라 해도 자신과 필적하는 실력을 지닌 상대가 눈앞에서 갑자기 사라져 버리는것은 그만큼 당황스러운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용병일을 많이 하며 산전수전 다 겪었으나 보이지 않는 상대와 싸운 경험 따위는 당연히 없었으니까. 비렐은 너무 성급한 결정이었나 하고 내심 후회했지만 한 번 벌어진 일은 되돌릴 수 없었다. 비렐은 이렇게 된 이상 스스로 적극적인 공세로 나서 진석을 쓰러트리기로 마음먹었다.

"안라우프!"

최초에 진석에게 시도했던 돌진. 시선의 방향, 무기를 쥔 손, 허리의 방향이나 보폭. 그야말로 전신의 움직임에 미묘한 완급을 주어 상대로 하여금 쉬이 간격을 가늠할 수 없게 만드는 고도의 테크닉이었다. 하지만 진석 역시 비렐과는 정면으로 정정당당히 칼을 섞어선 쉽게 결착이 날 수 없다는걸 깨닫곤, 옆으로 비잉 돌며 화염화살을 마구 난사했다. S랭크에 달한 화염화살의 캐스팅은 상당히 빨라 비렐이 덤벼드는 잠깐 사이에 무려 열다섯발의 화염화살이 흩뿌려졌다. 한 발 한 발은 큰 위력이 없었지만 십수발이 연달아 쏘아지니 비렐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트로이건트!"

신속의 3연격. 너무 빨라 흡사 한 합 처럼 보이는 세 번의 검놀림. 트로이건트가 펼쳐지자 허공에 가득 떠있던 화염화살들은 놀랍게도 전부 잘려나가 그 힘을 잃었다. 하지만 진석은 화염화살을 한 번 더 내 쏜뒤, 라파가를 쓰며 또 다시 투명화를 걸었다. 진석이 사라지는 모습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비렐.

'으윽, 또 다시 모습을 감추다니!'

아까 정면에서 검을 섞고 자웅을 겨룰땐 좋았다. 자신과 정면승부를 벌일만한 상대부터가 오랜만이었거니와, 분명 강력했지만 이대로라면 자신이 이길 자신도 있었다. 하지만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된 듯 한순간에 전술을 싹 바꾸어 마법을 난사하며 견제 위주의 싸움을 펼치다니? 게다가 중간중간 이렇게 모습을 감추는 판이니 비렐로선 곤혹스러웠다.

'검의 승부라면 자신있는데...!'

속으로 혀를 차며 화염화살을 베어 없애는 비렐. 그때 뒤에서부터 뭔가의 기척이 날아들었다. 반사적으로 몸을 돌리고 보니 자신에게 무엇을 집어던지곤 모습을 감추는 진석이 눈에 들어왔다. 코앞에 날아든 그 뭔가를 재빨리 검으로 쳐내는 비렐. 챙강 소리가 나며 그 무언가가 시합장 바닥에 나가떨어졌다. 자신의 검격에 바닥에 나가떨어진 그것은... 검날이 시커먼 단검. 상대 남자가 왼손에 쥐고 있던 흑철단검이었다.

'어?'

그리고 재차 옆에서 연달아 뭔가가 접근하는 기척이 느껴졌다. 잽싸게 자세를 바꾸며 돌아보니 상대는 또 다시 자신을 향해 손을 뻗어 다섯발의 화염화살을 쏘곤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그것을 막으려 검을 휘두르려는 찰나, 뒤에서 예리한 살기가 느껴졌다. 비렐은 이것이 아까와 같은 다중공격이라 확신했다.

'아까처럼 코라자를 써서 양면에서의 공격을 막아내고 곧바로 반격을 가하는게 좋겠지만... 안돼, 이 능력은 내 체력을 엄청나게 소모하니까 더 이상은 쓸 수 없어. 어떻게든 검 한자루로 승부를 낸다!'

혼신의 검격을 펼쳐 화염화살을 베어내고, 몸을 회전시키며 섬격 메잘루나를 발하는 비렐. 비렐은 자신의 앞에서 화염화살을 쏘아내고 재차 뒤로 돌아와 접근하는게 상대 본인일거라 확신했다. 모습을 감춰서 눈에 보이진 않지만 이번엔 유독 송곳처럼 예리한 살기가 찌를듯 접근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메잘루나가 적중한것은, 파도처럼 구불구불한 검신을 지닌 단검뿐이었다. 바닥에 부딪혀 챙그랑 소리를 내며 저멀리까지 나뒹구는 단검. 그것 역시 상대가 쥐고 쓰던 무기였다. 저렇게 날이 구불구불한 검은 크리스라고 하던데...

'아, 아니지. 이렇게 해놓고 또 다시 뒤나 옆에서 마법을 써올지도...!'

비렐이 재차 긴장하며 측면이나 뒤에서 날아드는 공격을 의식해 두리번거리고 있을때, 사실 진석은 비렐의 정면에서 당당히 열격장의 힘을 모으고 있었다.

'흥. 투명화를 걸고 모습을 언뜻언뜻 드러내며 앞이나 뒤, 좌나 우를 가릴것 없이 마법을 난사. 거기다 무기까지 다 집어던져가며 몇 번이나 사각에서의 공격에 의식을 집중시켜두었으니... 내가 실은 정면에서 당당히 다가와 공격을 가할거란건 예측 못했겠지!'

조금전 진석은 비렐의 뒤에서 화염화살을 쏘곤, 재빨리 반대쪽으로 돌아와 란비언을 집어던지곤, 그대로 비렐을 향해 조심스레 다가갔다. 간격 밖에 서서 그가 란비언을 튕겨내는것을 보곤 유유히 열격장의 준비를 했다. 비렐이 느낀 유독 찌를듯한 살기는 진석이 바로 코앞에서 기술의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으니 진석이 앞에 있을거라곤 꿈에도 생각 못하고 있는 비렐.

'5할 정도면 충분할까? 간다!'

열격장을 준비한 진석은 라파가를 써서 여전히 옆이나 뒤를 경계하는 비렐의 정면으로 치고 들어갔다. 공격이 거의 근접한 순간 투명화를 풀며 그의 갑옷위로 준비한 열격장을 때려넣었다. 아무리 검술의 달인이라도 앗 하는 사이 눈 앞에서 나타나며 가해진 일격엔 무방비로 적중당할 수 밖에 없었다.

"으아아아앗?!"

생각치도 못하게 정면, 그것도 바로 코 앞에서 상대가 나타나 장타를 질러오니 혼비백산하는 비렐. 열격장에 맞은 비렐은 자신의 몸이 확 뒤집히며 강제로 공중에 부웅 뜨는 부유감을 느꼈다. 그리고 한 발 늦게 가슴이 먹먹해지는 묵직한 충격이 밀려들었다. 갑옷이 타격의 상당량을 흡수해 준 것 같았지만, 그래도 흡사 망치나 몽둥이로 후려친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십여미터를 붕 날아간 비렐은 그대로 바닥에 엉망진창으로 나뒹굴었다. 콰당탕!

"크으으으읏...! 아, 아야야..."

가슴이 욱신거렸다. 게다가 중간중간 섞여 찌르는듯한 통증까지. 이건... 흉골에 금이라도 간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 정도라면... 아직은 더 싸울 수 있었다. 물론 아프고 고통스럽긴 했지만 지금껏 용병일을 해오며 이 정도는 고난은 예사였다. 그렇지만...

'...아직 저 남자는 팔팔한 것 같고... 또 저런 수를 써서 계속 공격을 가해온다면 버티거나 막아낼 자신이 없으니... 부상을 입은채로 무리해서까지 싸울 자리는 아니니... 할 수 없나.'

비렐은 으윽 하고 가슴을 움켜쥔채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가떨어지며 워낙 바닥에 험하게 구른탓인지 온몸 여기저기가 다 욱신거렸다. 바닥에 떨어진 단검을 주섬주섬 회수하고 있던 진석은 몸을 일으킨 비렐의 모습에 흠칫 놀라는 표정을 지었지만, 비렐 본인은 더 이상 싸울 생각이 없었다. 비렐은 나가떨어지는 와중에도 끝까지 놓지않고 있던 검을 검집에 되돌리며 양손을 슬쩍 들어보였다.

"하아, 하아... 저기 심판? 내가 졌습니다. 항복입니다."

단검을 회수하던 진석은 깜작 놀랐었다. 5할 짜리에 갑옷 위로 친거라지만 열격장을 정통으로 먹고도 일어나다니? 하지만 곧바로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는 모습에 속으로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게 문제가 아니라 비렐을 상대하며 투명화의 제한 시간을 꽤나 많이 소모했던 탓이었다. 이 이상 투명화를 낭비하면 탈출때 필요한 순간에 모습을 감추지 못하게 될지도 몰랐다.

"아야... 준우승인가. 뭐 할 수 없지. 으으."

애써 바로 일어났던게 힘에 겨운지 가슴께를 부여잡으며 바닥에 풀썩 주저앉는 비렐과,  어정쩡한 자세로 우승자가 되어 관객들의 환호를 받아들이는 진석. 토너먼트의 결승전은 이렇게 비렐의 기권으로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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