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10. -- > * 122화 *
토너먼트는 끝났다. 우승자와 준우승자인 진석과 비렐만이 시합장에 남아 브래들리 왕세자에게 직접 상금과 부상을 수여받았다. 금화 삼천닢을 어떻게 주려나 했는데, 손잡이가 달린 작은 케이스에 금괴 세개를 넣어 건네주었다. 개당 금화 천닢어치의 값어치가 있는 눈에 익은 금괴였다. 물론 부상이었던 영록의 반지도 함께 주어졌다. 영록의 반지가 대체 뭔가 했던 진석. 받아들고 살펴보자니 정확한 재질은 몰라도, 뭔가의 마법금속으로 만들어진 물건이었다. 디자인 자체는 수수했지만 착용시 스테이터스 전반을 약간 올려주는 효과가 있는듯 했다. 한 손에 케이스를 챙겨들고 영록의 반지는 주머니 깊숙이 쑤셔넣은 진석. 시상식이 마무리 된 뒤 브래들리 왕세자는 진석과 비렐에게 다가와 함께 안쪽으로 가서 따로 잠시 이야기를 나눌것을 청해왔다.
하지만 우승자인 진석 자신만이라면 모를까, 비렐까지 함께 부른것은 의외였다. 게다가 비렐은 어째서인지 감격스러운 태도로 브래들리 왕세자의 제안을 즉시 승낙했다. 반짝거리는 눈동자로 브래들리 왕세자를 바라보는 비렐의 태도를 보아하니... 아무래도 비렐은 개인적으로 브래들리 왕세자를 좋아하거나 존경하는 모양이었다. 설마 비렐이 토너먼트에 참가한 이유는 단지 이 시합이 브래들리 왕세자가 주최했기 때문인걸까? 브래들리 왕세자는 먼저 성큼성큼 걸어 안쪽으로 향했고, 그의 호위인 두 명의 고위기사와 진석, 비렐 역시 그 뒤를 따랐다.
'젠장. 당연히 일대일로 이야기를 하게 될 줄 알았는데... 어쩐다.'
브래들리 왕세자와 단 둘만 남게되면 뭐 더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뭐 라파가라도 써서 단번에 목을 치고 창염의 검을 빼앗아 달아날 생각이었으니까. 하지만 비렐이라는 혹이 붙은 이상... 상황은 조금 골치아파졌다. 어떤 식으로건 비렐을 떼어놓고 왕세자와 단 둘이 될 상황을 만들거나, 혹은 동시에 둘을 처리해야 했다.
'브래들리 왕세자의 실력은 모르겠지만 비렐 이놈은 목숨을 걸고 싸우면 그렇게 금방 제압할 상대가 아니라서... 게다가 의료진들이 이미 깔끔하게 치료를 해준 상태라 체력도 다시 완전한 상태고. 더군다나 브래들리 왕세자에게 개인적으로 호감이라도 가지고 있는 모양이니 내가 왕세자에게 해를 끼치려 든다면 당연히 가만히 있지 않을테지. 시클론을 건 나와도 호각으로 검을 겨룰 수준의 상당한 검사니... 아 이거 미치겠네.'
어쩔 수 없었다. 우선은 브래들리 왕세자의 이야기를 응낙하는 척 가장하며 어떻게든 기회를 살필 수 밖에. 그리 길지않은 복도를 지나고 계단을 올라 한쪽의 방으로 안내된 진석과 비렐. 2층 맨 안쪽의 이곳은 아마도 브래들리 왕세자의 개인실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왕세자가 쓰는 방이라기엔 별 다른 장식없이 지극히 실용적인 내장으로 구성된 방. 그나마 한 가운데에 놓여진 멋들어진 원목 탁자가 아니었다면 정말로 평범한 집무실 정도로 보였으리라. 기사들은 문 밖에서 대기했고 방 안으론 브래들리 왕세자, 진석, 비렐 이 셋만이 들어섰다.
"자, 편히 앉게나."
먼저 의자에 앉으며 웃는낯으로 자리를 권하는 브래들리 왕세자. 권유에 따라 진석과 비렐도 서로 맞은편에 앉았다.
"좀 살풍경한 곳이라 미안하군. 궁이 아닌 투기장이다보니 딱히 시중을 들어줄 하녀를 두고 있는것도 아니라서. 손님을 불러다 놓곤 달리 차를 내올 사람조차 없군."
왠지 머쓱한 표정을 지어보이는 브래들리 왕세자. 일국의 왕세자 치곤 생각외로 소탈한 성격인 모양이었다. 비렐은 왠지 잔뜩 힘이 들어간 표정과 자세로 그의 말에 대꾸했다.
"괘... 괜찮습니다! 예전부터 조, 존경하고 있던 브래들리 저하 하고 이렇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것만 해도 대단한 영광입니다!"
"하하. 그런가? 그래, 그쪽은 비렐이라고 했지? 음... 난 빙빙 돌려 묻는걸 싫어하니 단도직입적으로 묻지."
"네! 뭐든 답해드리겠습니다!"
바짝 힘이 든 비렐의 태도에 쓴웃음을 지어보이는 브래들리 왕세자.
"아니 그렇게 긴장하지 않아도 되는데... 그보다 어때. 내 휘하로 들어와 일군을 통솔할 생각이 있나? 내 휘하의 1군은 기존의 기사들이나 군관들이 잘 이끌고 있지만, 새로 편성중인 2군쪽엔 지휘관급의 인재가 그닥 없어서 말이지."
직접적인 등용 제안. 패럴 왕자에게 들은 이야기 그대로였다. 전쟁을 준비중인 브래들리 왕세자는 용병들이나 건달패까지 끌어모아 새로운 부대를 조직했고, 토너먼트를 통해 명성을 얻은 자를 뽑아 그를 이 부대를 이끌자로 임명하려고 한다는 것. 그리고 비렐은 브래들리 왕세자의 제안에 입을 함지박만큼 쩍 벌리며 환한 표정을 지었다.
"하, 하겠습니다! 맡겨만 주십시오! 지금까지 용병일을 하며 칼밥을 먹어온터라 싸움이나 전투는 자신있습니다앗!"
"이거 시원스러운 대답 고맙네. 분명 자네 실력이라면 분명 큰 도움이 되겠지."
방이 떠나갈듯 시끄럽게 대답하는 비렐과 시원스레 씨익 웃어보이는 브래들리 왕세자. 브래들리 왕세자는 비렐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곤 악수를 청해왔다. 비렐은 여전히 바짝 힘이 들어간 자세로 그 악수를 받아들였다.
"아아 다행이야. 눈 여겨봤던 다른 참가자중에 도노반이란 사내와 제인이란 아가씨 이 둘은 치료를 받자마자 돌아갔는지 그냥 사라져버렸다고 하더군. 그들에게도 적당한 포상을 주고 군문에 들어올것을 권하려 했었는데... 아깝게도."
으음?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자신이 패퇴시켰던 두 상대. 도노반과 제인도 눈 여겨보고 등용하려고 했다라? 과연... 패럴 왕자 왈, 브래들리 왕세자도 꽤나 실력있는 무인이라더니 그 말대로 사람의 실력을 알아보는 안목이 있는 모양이었다. 진석 역시 예비 소집때부터 그들의 실력을 한 눈에 알아보았으니까. 비렐과의 악수를 마친 브래들리 왕세자는 몸을 틀어 이번엔 진석을 바라보며 말했다.
"자 그럼... 그쪽은 모데로라고 했지. 정말 대단한 솜씨, 잘 봤네. 다들 대단했지만 자네는 더더욱 훌륭하던걸. 우승을 차지할만 하더군. 내가 오늘 식견을 크게 넓혔어."
"...천만의 말씀을."
진석이 간결히 대답하자 겸양하는거라 생각했는지 더더욱 맘에 든다는 표정을 짓는 브래들리 왕세자. 그는 진석쪽으로 좀 더 몸을 기울이며 물었다.
"뭐 자네에게도 사설은 생략하고 직접적으로 묻지. 내 일군을 이끌 사람이 되어주지 않겠나? 나는 솔직히 자네 실력이 엄청나게 탐이 난다네. 돈을 원한다면 오늘 받은 상금보다 몇 배나 되는 돈을, 미녀를 원한다면 당장 곁에 수십명의 여자들을 안겨주고서라도 붙잡아두고 싶을 정도로."
브래들리 왕세자의 파격적인 등용 제안에 잠시 생각에 잠기는 진석. 만약 허신의 교단과 마주치지 않고 평범히 세상을 떠돌다 토너먼트에 참가해 우승을 거두고 이런 제안을 받았더라면... 분명 승낙했을것이다. 출신도, 배경도 모호한 일개 방랑자가 단숨에 군대를 이끌 장수로 등용된다는건 정말 어마어마한 파격적 출세였으니까. 게다가 브래들리 왕세자는 전쟁을 준비하는 자. 그의 곁에 있으면 공적을 쌓고 출세할 기회도 많을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진석은 입신양명을 노리고 토너먼트에 나선 떠돌이가 아니었다. 왕세자 본인을 시해하고 그의 검을 강탈하러온 암살자일뿐. 잠시 뜸을 들이던 진석이 천천히 입을 열자 브래들리 왕세자와 비렐은 진석을 주목했다.
"저는..."
그리고 그때였다. 콰장창! 문짝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열렸고, 누군가가 안으로 밀려나듯 쓰러졌다. 머리에서 피를 왈칵 쏟으며 쓰러진 그는 문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브래들리 왕세자의 호위 기사였다. 깜작 놀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진석, 브래들리 왕세자, 그리고 비렐. 쓰러진 호위기사를 훌쩍 뛰어 넘으며 방 안으로 처들어온것은... 진석도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도노반?!'
피투성이가 된 프레일과 어디서 났는지 튼튼해 보이는 오각형의 금속 방패를 들고온 도노반. 그리고 도노반을 따라 들어온 정체 미상의 네 사내. 그들은 갑옷을 입고 있는것은 아니었지만 하나같이 후드를 뒤집어 쓰고 있었고, 도노반과 마찬가지로 각자 무기와 방패로 무장하고 있었다.
"네놈들은 대체..."
브래들리 왕세자가 당황한 표정이 되어 중얼거리자, 도노반은 지금까지 차분해 보이던 인상이라곤 믿을 수 없을정도로 분노로 일그러진 표정을 지으며 방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크게 외쳤다.
"우리들은 위대한 일륜성신 디에스 신의 종사자! 디에스 신의 축복을 받은 성토 옐 프람을 전쟁의 겁화에 휩싸이게 하려는 네놈에게 천벌을 내리기 위해 찾아왔다!"
그 말에 뒷통수가 띵한 느낌을 받는 진석. 옐 프람 성국. 이 올린스턴 왕국의 남쪽에 자리한 나라였다. 옐 프람 성국은 태양신 디에스를 섬기는 디에스교가 그 국교로, 디에스교의 대주교는 왕의 곁에서 조언자로서 머물며 국무총리나 다름없는 위치에 앉아 내정에도 막강한 권한을 행사했다. 하지만 여느 종교가 다 그렇듯, 디에스라는 한 명의 유일신을 섬기는 종교임에도 디에스교 내엔 여러갈래의 교파가 나뉘어 있었다.
'애당초 가톨릭도 구교 신교가 나뉘어져 있고... 이슬람쪽도 시아파니 수니파니 나뉘어 그 성격이 많이 다르지.'
그리고 이 디에스교 역시 크게 보자면 둘로 나뉘어져 있었다. 첫번째는 평화로운 방법으로 교리를 설파하며, 신성력으로 어려운이를 돕고 봉사하는 방법으로 신도를 늘리고 감화시켜야 한다는 프로파가티오 파. 이들은 지극히 전형적인 평화노선 지지자들이었다. 또 두번째는 그간 디에스교가 옐 프람 내에서 축적한 힘을 강경하게 활용해서라도 자신들의 세를 외국에까지 적극적으로 뻗어나가야 한다는 강경주의의 체르비카투스 파. 도노반은 체르비카투스 파에서도 특히나 극단노선에 속한다는 소수 파벌 케뤼카투스 파의 신관전사였다.
진석 역시 군주 플레이를 할때, 옐 프람 성국을 정벌하며 디에스교의 극단주의자들 때문에 조금 고생했던 기억이 있었기에 잘 알고 있었다. 저항세력을 만들고 공공시설에 습격이나 방화같은 테러를 가해오는 그들을 진석은 가장 간단한 방법으로 소탕했었다. 도시 안팎에 병사들 밖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군대를 잔뜩 쑤셔넣어 관련자는 삼대를 넘어 구족까지 싸그리 몰살. 거의 도시 전체를 피로 물들이다시피 대학살극을 벌이고 나서 강제로 안정을 되찾게 만들었었다. 그 덕에 당연히 인근의 치안이나 민심은 바닥을 기었고, 충격을 먹어 하야하는 장수들도 있었지만 그런걸 신경써서야 빠른 대륙 통일을 하긴 힘들었었다.
'아무튼 도노반은 디에스교의 강경파벌인건가... 하긴, 놈들도 바보가 아니니 올린스턴 왕국의 브래들리 왕세자가 유곤 왕국이나 옐 프람 성국 둘 중 어딘가에 전쟁을 걸거라는것쯤 짐작하고 있었을 터. 신을 위해서라면 뭐든 저지를 준비가 되어있는 광신도들이 이웃나라에서 착착 진행되는 침략 전쟁 준비를 손 놓고 볼리가 없지. 당하기 전에 먼저 치겠다 이런건가.'
저 도노반은 케뤼카투스 파에서 암살자로서 선발되어 파견된 자가 분명하리라. 겉은 멀쩡해 보여도 엄청난 광신자일터. 도노반이 진석 자신과 시합하기 직전 불쾌한 표정을 짓고 있었던 이유도 이제 알 수 있었다. 브래들리 왕세자가 토너먼트 시작 전 했던 짧은 연설. 그것을 듣고 속이 뒤집어 졌었겠지. 그리고 그 뒤의 후드를 쓴 자들. 그들도 이제야 기억이 났다. 예선전때 복도 너머 관객들 사이에서 봤던 그자들이 분명할터. 아까 결승전 직전 창고에서 났던 말소리도 사실 이 자들이 숨어있던거라 생각하면 아귀가 맞는다. 도노반은 피로 젖은 프레일을 높이 치켜들며 외쳤다.
"디에스님의 이름으로! 네놈들을 모조리 심판하겠다! 쳐라!"
도노반의 명령대로 와아아아 하며 덤벼드는 네 사내. 비렐은 즉시 자신의 롱소드를 뽑으며 그들을 막아섰고 브래들리 왕세자 역시 허리춤에 메고 있던 검을 뽑아들었다. 비렐의 롱소드보다 조금 더 긴 검신. 사용하기에 따라 한손검으로, 혹은 양수검으로도 전환 가능한 바스타드 소드였다. 얼핏 대단할게 없는 평범한 검처럼 보이지만 그 검날에서 왠지모르게 대단히 강력하고 알 수 없는 힘이 느껴지는게, 진석은 저것이 분명 창염의 검이라 확신했다.
'아니 그보다 잠깐. 그럼 나는 어떻게 해야되지?'
여기서 곧바로 도노반을 도와 브래들리 왕세자를 죽여? 아니... 아니다. 도노반과 그 수하들은 광신도들. 자신이 그들과 굳이 협력할 이유 따위가 있을까? 게다가 방금 도노반은 네놈들을 모조리 심판하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저들에게 자신은 왕세자의 곁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도 그냥 죽여 없애야할 장애물 정도로 보일터.
'이런 씨. 뭐 이딴 놈들이 튀어나와서...'
안되겠다. 그냥 브래들리 왕세자 곁에 있었던 것 만으로도 한패 취급받아 공격당하는 판이니 일단은 이 놈들부터 어떻게 해야할터. 왕세자를 죽이는것도 죽이는거지만 당장 내 목에 칼이 디밀어지는 판이니 할 수 없었다. 흑철단검과 란비언을 꺼내들고 그들과 맞서려는 진석. 그런데 그 때였다.
"베놈 팽!"
와장창! 무언가 검은 인영이 창문을 깨고 안으로 뛰어들며 주문을 발했다. 브래들리 왕세자의 바로 지근거리에서 튀어나오는 거대하고 반투명한 독사의 머리. 쩍 벌어진 입은 송곳니를 날카롭게 빛내며 브래들리 왕세자를 물려고 덤벼들었지만, 반사적으로 펼쳐진 브래들리 왕세자의 검격이 더 빨랐다. 일격을 먹은 독사는 찍소리도 못하고 반으로 쪼개져 천천히 사라져갔다.
"...제인?!"
믿을 수 없다는 어조로 상대의 이름을 곱씹는 브래들리 왕세자. 창문으로 뛰어들어 왕세자를 공격한것은 바로 제인이었다. 창문으로 뛰어들어 바닥에 착지한 자세였던 그녀는 말없이 몸을 일으키며 이쪽을 노리고 서서히 다가왔다.
'이런! 설마 쟤도 브래들리 왕세자를 노리고 온 암살자였던거냐?!'
제인. 물론 그것은 가명이었다. 그녀의 본명은 이디스. 오래전 솜브라 교단에서 떨어져 나갔던 파벌은, 세파에 찌들어 돈을 받고 솜씨를 파는 암살단으로 변질해 있었던 것이다. 암살단 앙귀스. 이디스는 바로 그 앙귀스의 가장 강력한 살수 중 하나였다. 그리고 이디스를 고용한것은, 바로 유곤 왕국 측이었다.
유곤 왕국의 왕실은 기본적으로 평화 노선을 고수하고 있기에 올린스턴 왕국과의 어떠한 마찰도 피하고 싶어했다. 하지만 왕가의 일원 모두가 그런 말랑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것은 아니었다. 성정이 불같으며 정치나 외교문제에서도 늘 강경파에 속하던 햄스워드 후작. 유곤 왕국의 현 국왕 에버딘 2세의 작은 아버지였던 그는, 올린스턴 왕국에서 전쟁을 준비하는것을 대놓고 드러내고 있음에도 아무 대처도 하지 않는 에버딘 2세에게 실망하고 스스로 대처법을 찾아 강구하기 시작했다.
생각같아선 스스로 병력을 이끌고 전선에 나서 국토를 침범하는 적을 격멸하고 싶어했지만, 후작가의 재력이나 사병만으로 올린스턴 왕국 전체와 맞설수는 없는 노릇. 고심하던 햄스워드 후작은 가신들에게 의견을 구하고 결국 앙귀스라는 암살단의 이야기를 접하게 된다. 암살! 비열하다는 소리를 들을지언정, 성공만 한다면 상대측을 매우 확실하게 제압하는 수단이었다. 고래로부터 내려온 가장 치명적인 모략이 아니던가. 그리고 암살단 앙귀스는 의뢰의 실행을 위해 어마어마한 거액을 요구하지만, 단 한 번의 실패도 없이 표적이 된 타겟은 반드시 살해한다는 완벽한 실적을 자랑했다.
결국 햄스워드 후작은 큰 돈을 내고 올린스턴 왕국 주전파의 선봉장인 브래들리 왕세자의 살해를 의뢰하게 된다. 그리하여 올린스턴 왕국에 파견된것이 바로 이디스였다. 그녀 역시 브래들리 왕세자에게 확실히 근접할 수 있는 기회를 얻기 위해 토너먼트에 참가했고 4강까지 올랐으나, 어처구니없게 같은 바일리 델 비엔토를 쓰는 진석을 만나 패배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디스는 허리춤의 숏소드를 뽑아들더니 자신의 손바닥을 그어 피를 낸 후, 그것을 바닥에 강하게 내리꽂았다. 그리고 상처를 낸 손을 꽉 쥐어 바닥에 꽂힌 숏소드 위로 피를 후두둑 흩뿌린 후, 양 손으로 빠르게 인을 맺으며 주문을 시전했다.
"웨네눔의 작!"
이디스가 양 손을 펼치며 주문을 발하자 숏소드를 중심으로 허공에 2~3미터 가량의 마법진이 생겨나더니 거기에서 보랏빛의 불길한 마탄 십수개가 나타나 느릿느릿 전진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 마탄은 대략 사람의 주먹만한 크기였지만 왠지 모르게 흉흉한 기세가 찌를듯 느껴지는게, 절대로 보통의 주문이 아님이 확실했다. 정면에서는 도노반과 그 수하들, 뒤에서는 이디스의 마법. 양면으로 포위당한 브래들리 왕세자는 그야말로 진퇴양난에 처해있었다.
"이 자식들이이잇!"
정면에서 달려드는 도노반과 수하들을 혼자서 상대하는 비렐. 검격이 그야말로 미친듯이 춤을 추는게 그들에게 방패와 본인들 스스로를 강화한 버프마법이 없었다면 다들 삽시간에 토막나 죽었을 정도였다. 혼자임에도 되려 공세로 나오는 비렐의 기세에 뒤로 밀리는 그들. 한편 브래들리 왕세자는 이쪽으로 흘러오는 마탄들을 보며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는 다급히 진석을 바라보더니 뒤쪽의 비렐과 도노반쪽을 향해 눈짓을 했다.
'...뭐야. 자기는 제인을 상대할테니 뒤쪽은 비렐하고 나에게 맡기겠다 이건가?'
진석에게 눈빛으로 무언의 지시를 내린 후, 창염의 검을 높이 쳐들고 힘이 실린 함성을 한껏 외치는 브래들리 왕세자.
"창염이여-!!!"
푸화악! 브래들리 왕세자의 근처에 서있던 진석은 깜짝 놀랐다. 검에서부터 푸른색의 불꽃이 피어나 그의 몸과 검 전체를 휘감은 것이다!
'저것이 바로... 창염의 검의 능력!'
창염을 소환해 그 힘을 몸에 두른 브래들리 왕세자는 자신을 노리고 집중적으로 날아드는 보랏빛의 마탄들에 힘차게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검의 궤적을 따라 허공에서부터 푸른 불꽃의 파도가 일어나 마탄들을 일거에 퍼퍼퍽 꺼트려 버렸다. 하지만 꺼트려진 마탄들은 무슨 캡슐이라도 되는양 안에서부터 쉬이익하고 음습한 빛깔의 연무가 흘러나오는게, 몸에 닿거나 호흡하게 되면 지극히 치명적인 독성을 유발할 독무 같았다. 하지만 창염을 몸에 두른 브래들리 왕세자에겐 그러한 독무도 아무런 해를 끼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브래들리 왕세자는 검을 높이 쳐들며 독무를 무시하고 이디스에게 달려들었다.
"너도 암살자였단 말이냐!"
분노의 일갈. 하지만 이디스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다음 행동을 취했다.
"카르케르의 사!"
상처를 낸 손에서 재차 피를 쥐어짜 숏소드 위에 뿌리고, 인을 맺으며 새로운 주문을 시전하는 이디스. 그러자 바닥과 천장 곳곳에서 크고 작은 마법진들이 생겨나더니 시커먼색의 뾰족한 창날들 수십개가 마구 솟아올라 브래들리 왕세자의 진로를 노리고 찔러왔다. 그 마법창날들에선 뭔가 저주의 기운이 느껴지는것이, 찔렸다간 그냥 상처를 입는정도로 끝날것 같지가 않았다.
"타아앗!"
그리고 진석이 브래들리 왕세자에게 한 눈을 파고 있던 사이, 도노반의 수하 중 하나가 진석을 노리고 덤벼들었다. 쯧 하고 혀를 차며 발차기로 그의 방패를 걷어차 멀찍이 밀어내는 진석. 진석은 지금의 엉망진창인 상황이 엄청 당황스러웠다.
'아 이거 무슨 이딴... 왕세자는 하난데 목을 따러 온 암살자는 무려 셋이잖아?! 나랑, 도노반과 그 부하들. 그리고 누가 보낸건진 몰라도 저 제인까지!'
도노반은 부하들과 협력해 비렐과 싸우고 있었는데 비렐의 기세가 정말 장난이 아니었다. 아까 시합때와는 완전 다르게 정말 전력을 다해서, 아니 그야말로 목숨을 내 던질 귀신같은 모습으로 검을 흩뿌려대고 있었다. 진석과 맞상대 할 정도의 강력한 검사인 비렐이 그렇게 나오니 신성 마법으로 스스로를 강화하고 전원이 방패를 든 그들이 비렐 하나를 어쩌지 못하고 되려 수세에 빠져 밀리고 있었다. 브래들리 왕세자는 왕세자대로 창염을 몸에 두른채 이디스와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브래들리 왕세자가 휘두르는 창염의 검에선 푸른 불꽃이 솟구쳐 이디스를 추격했고, 그녀는 자신의 민첩함을 살려 그것을 피하며 온갖 사이한 주문들로 왕세자의 목숨을 노렸다. 진석은 치열하게 벌어지는 양쪽의 싸움을 번갈아 보며 순간 고민에 빠져들었다.
'이거... 이제 어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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