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10. -- > * 123화 *
한편, 난장판이 된 곳은 브래들리 왕세자의 개인실 뿐만이 아니었다. 방금전까지 관객이 빈틈 하나 없이 가득 들어차 있던 대투기장의 관람석. 시상식이 끝나도 안에 있던 사람들의 숫자가 워낙 많다보니 그들이 빠져나가는데는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특별 관람석의 귀빈들 역시 사람이 출구에 몰리는 것을 알고 있으니, 조금 느긋히 기다리며 시간을 두고 천천히 빠져나가려고 서로 한담을 나누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곳에 있던 패럴 왕자도 아직 돌아가지 않은 채 레나와 함께 대기하고 있었는데, 단순히 사람이 몰려서가 아니라 진석이 실행할 왕세자 암살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건 현장에 제일 먼저 다다라 손을 쓰기 위해선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는 편이 나았다.
그런데 갑자기 사람들 사이에서 소란이 일어나나 싶더니 누가 저지른 것인지 몰라도 대투기장 여기저기서 불꽃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관객석이나 통로, 대투기장 안팎을 가리지 않고 이곳저곳에서 동시다발적인 방화가 저질러진 것이었다. 그 뿐만이 아니라 후드를 뒤집어쓴 무리들이 시민들 사이에서 뛰쳐나와 병사들과 사람들을 마구 죽이기 시작했다. 토너먼트가 잘 마무리되고 각자 돌아가려던 시민들은 삽시간에 벌어진 예상밖의 사태에 공포와 경악에 휩싸여 여기저기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아직도 상당수의 시민들이 내부에 남아있던 상태다보니 혼란은 순식간에 극에 달했다.
"히이익, 사, 살인이다!"
"아아아악! 뭐야!"
"사... 살려줘! 불이! 불이이이!"
정말로 뜬금없이 여기저기서 후드를 쓴 무리들이 나타나 마구잡이로 살인을 저지르고, 더불어 방화까지 저질러지자 눈에 띄게 당황하는 패럴 왕자.
"이... 이게 갑자기 대체 무슨 일이야?!"
주변의 귀빈들이나 그 호위들 역시 웅성거리고 당황해 하면서도 본인들의 주인을 지키기 위해 주변을 막아섰다. 패럴 왕자의 호위로 따라와 있던 두 명의 기사들 역시 무기를 뽑아들고 근처를 막아섰다. 하녀복 차림이던 레나는 치맛자락 속에서 호신용으로 지니고 있던 단검을 뽑아들고 패럴 왕자의 곁으로 다가서며 말했다.
"...경기가 끝나자마자 방화가 벌어진 점이나, 저기 군데군데 보이는 후드를 쓴 자들이 병사들이나 사람들을 공격하는것을 보면... 정체는 알 수 없지만 이 사태는 분명 저들이 의도하고 저지른 소행이 아닐까 싶습니다."
조금전까지만 해도 경기의 열기와 그 여운이 남아있던 대투기장 내부는, 순식간에 방화의 불꽃과 무차별적으로 벌어지는 살인행각으로 인해 전쟁터같은 꼬락서니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이 특별 관람석에서 정확히 파악하긴 어렵지만 일단 눈에 보이는 후드를 쓴 무리들의 숫자는 대략 30 남짓. 서넛 정도씩 뭉쳐다니며 온갖곳에 불을 지르거나 몰려다니며 도망가려는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살해하고 있었다.
이따금 내부의 경비나 치안을 담당하던 병사들이 급히 달려와 그들을 제압하려는 시도를 했지만 제압은 커녕 대부분 역으로 무력하게 당하고 말았다. 대투기장 내부에 남아있던 병사들도 적은 숫자는 아니었지만, 주변의 시민들이 워낙 혼란한채로 사방에 넘쳐나는 탓에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데다가 다함께 모여서 후드를 쓴 무리와 대적하지 않았던 탓이 컸다. 겨우 몇명씩 덤벼들다 그야말로 각개격파 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후드를 쓴 자들이 싸우는 모습을 보니... 그들은 단순한 폭도가 아니라 분명 뭔가의 훈련을 받은 무리 같았다.
'이대로 여기서 계속 있을 순 없어... 저 자들이 어디서 나타난 무리인진 몰라도, 불이 더더욱 번질때까지 가만히 앉아서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이니... 이대로 있어봐야 험한꼴만 볼뿐!'
레나는 우왕좌왕하는 귀빈들과 그 호위들의 앞으로 나서며 그들에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여러분, 당황하지 마시고 침착하게 대응하셔야 합니다. 저기 저쪽! 동문쪽 출구 부근이 그나마 저 신원미상의 무리들 숫자가 적습니다. 그만큼 시민들이 많이 몰려있긴 하지만 그래도 여기 가만히 앉아서 타죽거나 습격당할 순 없는 노릇. 다같이 하나로 뭉쳐서 빠져나가도록 하죠. 귀빈들은 안쪽으로, 호위들은 각자 무리의 앞 뒤로 나뉘어 전원을 보호하며 빠져나가도록 합시다."
갑작스레 저질러진 방화, 그리고 후드를 쓴 무리들의 난동. 너무 뜬금없는 상황이라 혼란스럽긴 했지만 레나의 말은 분명 맞는 소리였다. 대부분은 레나의 의견에 동의를 표하고 하나로 뭉쳐 빠져나갈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패럴 왕자도 귀빈들 무리에 다가가 섞였고, 패럴 왕자의 호위 기사 둘 역시 그에게 다가가 바짝 붙어섰다. 귀빈 십여명에 그 호위만 삼십여명. 설령 저 후드를 뒤집어 쓴 무리 전원이 덤벼온다 쳐도 일대일의 교환비로 싸울 수 있는 숫자였다. 그런데 레나는 제자리에 서서 그것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패럴 왕자가 당황해선 꼼짝않고 서 있는 레나에게 손을 뻗었다.
"뭐하는거야 레나? 너도 이쪽으로 와야지."
"이만한 숫자와 함께 움직인다면 몇 명의 습격쯤은 간단히 막고 빠져나가실 수 있을겁니다. 제가 없어도 괜찮겠지요. 저는 여기 남아서... 뒷일을 확인하겠습니다."
차분한 눈빛으로 패럴 왕자를 바라보는 레나. 패럴 왕자는 그제서야 아차 하며 자신들이 이곳에 남아있던 이유를 떠올렸다. 브래들리 왕세자의 암살. 그것을 패럴 왕자 본인이 직접 확인해야만 이후의 사태를 유리하게 주도할 수 있었다. 아마 그럴리는 없을테지만 만에 하나라도 이쪽에 불리한 증거가 현장에 남아있다면 바로 파기해야 할테고, 진석과의 거래조건이었던 가짜 암살자의 지목이라는 증언 역시 이 현장에 남아있어야만 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생각치도 못하게 느닷없이 이상한 무리들이 나타나 불을 지르고 사람들을 무차별로 공격하는 상황. 레나의 입장으로선 이 위험한 상황에 패럴 왕자가 계속 여기 남아있도록 할 순 없었다. 그러니 왕자의 하녀인 자신만이라도 남아 왕세자 암살의 뒷처리를 마무리 하겠다고 자처하는 것이었다.
"...안돼! 너 혼자만 남겨두고 갈 순 없어!"
막 출구를 향해 움직이려던 무리에서 빠져나오는 패럴 왕자. 그러자 주변의 모두가 당황스러워 했다. 그도 그럴것이 일국의 왕자가 아닌가. 이만한 신분의 상대를 버려놓고 갈수도 없는 노릇. 하지만 패럴 왕자는 자신은 신경쓰지 말고 계속 가라는 듯 손짓을 하곤 레나의 곁으로 달려왔다. 두 호위 기사들 역시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되돌아왔다. 패럴 왕자는 레나를 마주보고 그녀의 손을 꽈악 움켜쥐며 말했다.
"나는... 나는 아바마마와 다르다. 너는 내 사람이다. 내 사람은 무슨일이 있더라도 버리지 않아!"
"패럴 왕자님..."
패럴 왕자는 진심어린 눈빛으로 레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레나는 내심 기뻤지만 다른 한 편으론 답답했다. 지금은 이런것을 따질 상황이 아닌데. 하지만 이 왕자님은 자신이 충심으로 섬기는... 아니. 이 남자는 자신이 사랑하는 상대. 여기서 티격태격 실갱이를 하는게 더 시간 낭비였다. 그렇다면, 이렇게 된 이상...
"...알겠습니다. 그럼... 함께 브래들리 저하의 '안전'을 확인해 보러 가시겠습니까?"
브래들리 왕세자의 암살건은 패럴 왕자와 레나, 그리고 그것을 실행할 진석밖에 모르는 일. 두 호위 기사는 말 그대로 호위일 뿐. 이 일에 대해 아는것이 없었으므로 레나는 그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말을 그렇게 돌려서 표현했다. 패럴 왕자도 레나가 말하는 의미를 알아채곤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래. 우리만 빠져나갈것이 아니라 형님 저하의 안위도 확인해 봐야겠지. 자, 너희도 가자!"
"옛!"
패럴 왕자가 명령하자 두 호위 기사들도 알았다는 듯 짧게 대답하곤 패럴 왕자의 곁에 바짝 붙어서 주변을 적극적으로 경계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레나가 선두에, 패럴 왕자가 가운데에, 뒤쪽에선 두 호위 기사들이 따라붙은 상태로 그들은 브래들리 왕세자의 개인실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불은 서서히 여기저기로 번져나가기 시작했고 후드를 쓴 무리들은 더 많은 시체를 쌓아가고 있었다. 각 출구쪽은 너무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몰려 병목현상이 일어나 서로 깔리거나 밟혀서 죽는 사람들도 속출하고 있었다. 수십분전만 하더라도 환호성이 가득하던 대투기장은 비명과 단발마가 가득 들어찬 지옥같은 곳으로 뒤바뀌어 있었다.
"트라이건트!"
쉬이익! 너무 빨라 흡사 한 합처럼 보이는 비렐의 3연격이 펼쳐졌다. 터터텅! 제각기 방패로 검격을 막아내며 휘청이는 후드의 사내들.
"젠장...!"
나직히 욕설을 내뱉는 비렐. 이래서야 끝이 없었다. 상대들은 이미 뭔가의 주문으로 몸을 강화한데다 방패를 앞세워 지극히 수비적으로 나오고 있었다. 이따끔 방어를 뚫고 부상을 입혀봐야 즉시 뒤로 빠져 다른 이들이 막아주는 사이 도노반이 신성 마법으로 회복을 시켜주고 있었다. 이건 뭐 부질없이 용만 쓰는셈이아닌가. 자신은 하나. 상대는 다섯. 이렇게 헛된 칼질을 계속 해봐야 성과없이 체력만 낭비하는 꼴이었다. 비렐은 이를 악물고 그들의 한가운데로 펄쩍 뛰어들며 지금껏 감춰주고 있던 절기를 발했다.
"루나 피에나!"
팔을 가능한 쭉 뻗어 간격을 최대한 넓게 만든채 허공에서 한바퀴 빙글 돌며 주위의 사내들에게 초고속의 회전공격을 발하는 비렐. 검의 궤도가 순간 반짝하고 빛나보일 정도인것이, 비렐 그 자신을 중심으로 펼쳐진 검격은 흡사 만월을 연상시켰다. 공중으로 몸을 띄운채 발한 일격은 그대로 사내들의 머리와 목을 노리고 날아들었고, 순간적인 공격에 미처 방패를 들어올리지 못한 두 명은 그대로 눈과 목덜미에 검격을 적중당하고 말핬다. 비명을 지르며 무기와 방패를 놓치고 뒤로 나가떨어지는 둘. 큰 모션의 공격을 시도하고 제자리에 착지한 비렐은 순간 완전한 빈틈투성이가 되었으나, 상대들은 갑작스런 검격에 너무 놀라 빈틈을 보면서도 쉽사리 덤벼들지 못했다.
"아아아악! 내, 내 눈이이잇!"
"컥! 크륵... 끄르르륵..."
그리고 눈이 베인 사내는 양 손으로 얼굴을 감싸쥔채 바닥에 넘어져 마구 뒹굴며 절규했고, 목을 베인 자는 목을 틀어막은채 입으로 왈칵왈칵 넘어오는 피거품을 토하며 그륵거리는 듣기싫은 소리를 냈다. 삽시간에 두 명이 당하자 다른 둘이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방패를 들며 막아섰고, 도노반은 그 둘을 치료하기 위해 허둥지둥 손을 쓰려했다. 우선 급한쪽은 목을 베여 치명상을 입은 쪽. 신성 마법이라고 해도 만능은 아니다. 1초라도 빨리 치료하지 하지만 그대로 절명할터! 하지만 지금까지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진석이 드디어 나섰다.
"화염화살!"
쉬쉬쉬쉬쉭! 다섯발의 화염화살이 목을 베인 사내의 전신에 꽂혀들었다. 막 그를 치료하려던 도노반은 화염화살을 맞고 나가떨어지는 동료의 모습에 깜짝 놀랬다. 바닥에 쓰러진 그는 온몸에 화염화살을 맞은채 부르르 떨다... 이내 풀썩 고개를 꺾었다. 목이 베인 치명상과 화염화살의 타격으로 더 버티지 못하고 숨이 끊어진 것이다. 분노에 가득찬 얼굴로 진석을 돌아보는 도노반. 진석은 히죽 웃으며 재차 주문을 시전했다.
"뭘 꼴아봐? 화염화살!"
또 다시 나타난 다섯발의 화염화살. 이번엔 눈에 베여 바닥을 뒹굴고 있던 자의 머리와 목덜미에 집중적으로 꽂혀들어갔다. 그는 머리와 목을 때리고 찌르는 화염화살의 고통에 크하악 하고 크게 단발마를 내지르더니 추욱 늘어져 버렸다. 아무 손도 쓰지 못하고 또 다시 다른 동료를 하나 잃은 도노반의 얼굴은 분노가 가득하다 못해 흡사 무슨 성난 짐승처럼 일그러졌다.
"네노오오오옴-!!!"
"이크 무서라."
도노반이 자신을 노리고 미친듯이 달려들자 슬쩍 비렐의 뒤쪽으로 몸을 피하는 진석. 비렐은 두 명의 사내를 상대하고 있다가, 갑자기 도노반이 폭주하는 기관차같은 기세로 덤벼들자 깜짝 놀라서 검을 들어 방어했다.
"비켜어어어어!"
"뭐, 뭐야 이 자식?! 비킬 수 있겠냐!"
도노반은 진석을 공격하고 싶었지만 비렐에 의해 막히니, 그 울분을 비렐에게 토해내듯 프레일과 방패를 광전사처럼 휘둘러댔다. 옆에 있던 다른 두 동료는 끼어들수도 없을 정도의 매서운 기세였다. 도노반의 공격은 내내 공세로 일관하던 비렐조차 한풀 꺾여 뒤로 밀릴 정도였다. 히죽 웃으며 슬쩍 브래들리 왕세자쪽의 상황을 확인 하는 진석.
"크으읏, 창염이여!"
브래들리 왕세자는 창염의 검을 휘둘러 연신 푸른 불꽃을 일으켜 이디스를 공격하고 있었다. 하지만 시클론으로 가속한 그녀의 몸놀림은 보통 민첩한게 아니었기에 번번히 허공만 때리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잠깐 사이 브래들리 왕세자는 호흡이 엄청나게 거칠어져 있었고 몸에 둘러진 불꽃도 꽤나 엹어진게... 그냥 보기에도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브래들리 왕세자의 몸에 둘러진 저 창염... 제인의 이상한 마법들을 깡그리 무시해버리는건 분명 대단했지만, 아무 댓가 없이 쓸 수 있는 물건인건 아닐테지. 체력을 흡수하는건가? 아니. 검에서 느껴지는 묘한 기운이... 단순히 체력보다는 뭔가 좀 더... 아 맞다 참.'
아차하며 그제서야 미리안과 패럴 왕자의 말을 떠올린 진석. 더 창염의 검에서 발해지는 푸른 불꽃, 창염은 적중한다면 그야말로 적의 영혼을 태워버릴 정도의 피해를 주고 반대로 사용자에겐 온갖 마법이나 사이한 것들에게서 몸을 지켜줄테지만... 그 댓가로 사용자 스스로의 영혼조차 불태우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자신의 수명을 태워가며 쓰는것이 바로 저 창염의 검이었다.
'그러니 잠깐 사이에 저렇게 헐떡거리지. 체력이 아니라 수명이 쪽쪽 빨려나가고 있으니. 그럼 이거 뭐 내가 손을 쓸 필요도 없이 저러다 죽겠는데?'
브래들리 왕세자의 목숨이야 어차피 자신도 노리고 있던 것이니 저대로 죽건 말건 진석은 이대로 상황을 관망만 하고 있어도 될 판이었다. 그렇게 이디스와 전투를 벌이던 브래들리 왕세자는 극도로 지쳤는지 어느새 몸에 둘러진 창염도 희미해졌고, 검을 지팡이처럼 짚은채 끝내 한쪽 무릎을 꿇고 말았다.
"으윽... 헉, 허억..."
브래들리 왕세자의 전신에서 그야말로 비오듯이 쏟아지는 땀. 사실 싸운 시간 자체는 채 얼마 되지 않았다. 단련한 무인인 그가 칼 좀 휘둘렀다고 전력달리기를 연속으로 한 사람 마냥 저렇게 지친다는건 있을 수 없었다. 즉 저건 단순히 지친것이 아닌, 창염의 검이 브래들리 왕세자의 수명을 빨아들여 태워 없엔 반동이 오고 있음이 확실했다. 이디스는 이만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는지 기묘한 마법들을 쓰던것을 그만두고, 양팔을 휙 뻗어 히든블레이드를 뽑아내었다. 차창! 팔뚝의 보호대에서부터 솟아나는 검날. 그 검날의 면엔 시합때와는 달리 뭔가 시커멓고 끈적한 점액질 같은것이 잔뜩 발려있었다.
'와 저거봐라 저거. 틀림없이 지독한 맹독이겠지. 아주 본격적으로 나오는구만.'
자신과 시합할때는 서로의 목숨을 빼앗으면 안된다는 규칙이 있었으므로 저 괴상망측한 마법들이나 독을 안 써서 그렇지... 만약 저런식으로 상대가 모든 수를 다 써가며 덤벼왔다면? 진석은 생각외로 고전했었을지도 모르겠는 생각을 했다.
"큭... 이 내가! 고작 이런식으로 당할것 같으냐!"
잠깐 새 호흡을 추스르고 검을 치켜들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는 브래들리 왕세자. 하지만 몸에 둘러진 창염은 거의 다 꺼져가는 상태였다.
"적어도, 적어도 이 나라를 이어받을 패럴을 위해... 이 땅을 조금이라도 더 크고 부강하게 만들때까지 쓰러질 순 없지! 나는 아직 아무것도 시작도 못했다고! 하아아아아!"
혼자 그렇게 중얼거리다 기합을 내지르며 스스로 기운을 북돋는 브래들리 왕세자. 그리고 브래들리 왕세자의 혼잣말을 들은 진석은 깜짝 놀랐다.
'뭐...?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이 나라를 이어받을 패럴을 위해? 뭐야 이 자식... 설마, 왕위를 이어받을 생각이 없기라도 한건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이디스를 노려보며 힘을 끌어모으는 브래들리 왕세자. 다 꺼져가나 싶던 불꽃은, 삽시간에 부풀더니 더욱 커지기 시작했다. 그가 맨 처음 창염의 검을 뽑아 들었을때보다 훨씬 세차게 타오르기 시작하는 불꽃. 브래들리 왕세자를 마무리 하기 위해 다가서던 이디스는 움찔 하며 제자리에 멈춰서고, 다시 인을 맺으며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이디스가 또 다시 마법을 쓰려는것을 본 브래들리 왕세자는 창염의 검을 높이 쳐들고 그곳에 힘을 집중했다. 그러자 검날 전면에 창염이 몰려들어 둥글게 부풀기 시작했다.
"쓸데없는 잔재주는 질렸다! 내 앞에서 썩 꺼져라! 창염옥!"
이디스는 한 발 먼저 뭔가의 주문을 발동해 브래들리 왕세자에게 내쏘았지만, 브래들리 왕세자가 창염옥이 깃든 검을 휘두르자 거대한 창염옥이 그 주문을 집어삼키며 이디스에게 날아들었다. 이디스는 재빨리 몸을 날려 피하려 했지만, 창염옥은 날아가던 도중 폭탄처럼 화악 터져나가며 사방을 뒤덮어버렸다. 후와악! 그 기세가 어찌나 강렬한지 창염옥의 후폭풍은 진석이 서 있는곳까지 밀려들었다. 방 한켠을 가득 메우는 불꽃에 시야가 백열했다. 손을 들어 눈앞을 가리는 진석.
"으윽!"
화아아아아... 잠시 후 시야를 새하얗게 물들이던 창염이 가라앉고, 눈 앞에 남은것은... 방 한쪽 벽 전체에 걸쳐 활활 불타고 있는 창염뿐이었다. 이디스의 모습은 방안 어디에서도 그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상대가 눈 앞에서 완전히 사라진것을 확인한 브래들리 왕세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나 싶더니, 이내 커헉 하고 피를 토하며 제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브, 브래들리 저하!"
강렬한 창염옥의 빛에 그쪽으로 시선을 빼앗겼던 비렐은 그 모습에 깜짝놀라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악귀같은 형상을 한 도노반이 남은 수하 둘과 함께 어떻게든 비렐을 쓰러트리겠다는 듯 재차 덤벼들었다.
'정말 끈질기네 저놈들도.'
혀를 차는 진석. 비렐은 그제서야 진석이 아무것도 안하고 멀뚱히 서 있는걸 알아채곤 다급히 외쳤다.
"넌 뭐해?! 어서 브래들리 저하의 용태를!"
뭐? 내가 뭐하러? 하지만... 이건 분명 기회. 바닥에 주저앉은채 무력화된 브래들리 왕세자를 죽이고 창염의 검을 빼앗을 찬스였다. 진석은 대답없이 브래들리 왕세자에게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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