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베라 - 부회의 방랑자-124화 (124/155)

< --   - 10.   -- >         * 124화 *

겁에 질려 사방팔방 우왕좌왕하는 시민들. 여기저기서 솟구치며 주변으로 번져나가는 불꽃.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살해하는 후드를 쓴 집단과, 혼란한 상황에서도 그들에게 맞서는 병사들. 하지만 병사쪽은 그들에게 밀리고 있었다. 저 후드를 쓴 자들은 전부 도노반과 같은 디에스교의 케뤼카투스 파의 신관 전사들이었다. 스스로를 디에스의 검이라 명명한 극단적인 광신도 집단. 총원 50여명. 그들은 대투기장 안팎으로 서너명씩 흩어져 방화와 무차별 살육 같은 계획적 테러행위를 시도하는 중이었다.

원래의 계획대로라면 도노반이 우승을 차지한 후, 시상식의 순간 모두의 이목이 집중되어 있을때 시상을 위해 가까이 다가온 브래들리 왕세자를 죽이려 했었다. 브래들리 왕세자의 사망으로 혼란을 일으킨 다음 잠복해 있던 인원들이 시민들을 죽이며 방화를 일으켜 소요를 야기한다는 계획. 하지만 도노반이 토너먼트 도중에서 진석에게 패배했기에 그들은 계획을 수정했다. 시합이 끝난 후 도노반을 포함한 소수의 정예가 브래들리 왕자를 살해, 나머지 인원은 예정대로 방화 후 소요 사태를 일으킨다는 것으로 선회했다.

관람석을 지나 대투기장 안쪽의 복도로 들어서는 패럴 왕자 일행. 주변에서 비명을 지르거나 겁에 질려 도망다니는 시민들이 있었지만, 패럴 왕자의 곁에서 살기를 뿜으며 호위중인 기사들의 모습을 보곤 감히 이쪽으로 다가올 엄두를 내지 못했다. 선두에 선 레나는 가능한 사람들이 적은 방향으로 지나가며 익숙하게 길을 안내했다. 그리고 복도로 들어서서 모퉁이를 도는데, 후드를 쓴 세 명의 사내와 딱 마주치고 말았다!

"...!"

장검이나 메이스 등의 무기로 무장한 디에스의 검 소속 신관 전사들. 무기가 피에 젖어 번들거리는 것이, 대투기장 안쪽을 돌아다니며 흩어진 사람들이나 병사들을 이미 잔뜩 살해한듯 싶었다. 선두에 선 신관 전사가 무기를 치켜들며 뭐라고 말하려는 순간, 레나는 본능적이라고 할만치 신속하게 그에게 달려들며 마법주문을 발했다.

"스파크 샷!"

파지지직! 레나의 손에서 뿜어진 주먹만한 전격의 구체. 선두의 신관 전사는 무심코 장검을 들어 막았다가 감전되고 말았다.

"흐어어어억?!"

순간 빠르게 몸을 타고 말단까지 퍼져나가는 전류. 실신하거나 목숨을 위협할 정도의 전압은 아니었지만, 일시적으로 행동을 멈추게 만들정도의 위력이었다. 레나는 짧은 감전 후 놀라서 몸이 굳은 사내의 목덜미에 단검을 찔러 꽂은 후, 두 손으로 강하게 비틀어 뽑아내며 가슴팍을 발로 걷어차 밀어냈다. 목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그는 삽시간에 대량의 피를 쏟으며 절명해버렸다. 하녀복 차림새의 여자가 갑자기 달려들어 자신들의 동료를 무참히 쓰러트리자 깜짝 놀란 다른 두 사내. 욕설을 내뱉으며 레나에게 달려들었다.

"이 년이 감히!"

"머리통을 부숴주마!"

각기 장검과 메이스를 치켜들고 덤벼드는 그들. 그 흉흉한 기세에 패럴이 반사적으로 외쳤다.

"레나!"

하지만 레나는 피가 묻은 단검을 한 손으로 휘리릭 현란하게 돌려보이다 역수로 처억 쥐어보이며 차분히 대답했다.

"걱정 마십시오. 이런 쓰레기들 쯤, 서둘러 치우겠습니다."

이 신관 전사들은 나름대로 강력한 상대들이었다. 하지만 신성력을 빌어 쓰는 강화마법과 치료마법 양쪽을 자유자재로 구사 가능한 진정한 신관 전사는 이중에서 도노반 하나 정도 뿐. 나머지 대다수는 보통 한두가지의 신성 마법정도이나 극히 미약한 치유마법 밖에 쓰지 못했다. 그러나 다들 전사로서의 수련만큼은 톡톡히 받았기에, 그 개개인이 여느 정예병 수준의 근접전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기에 한두가지나마 스스로에게 강화마법을 걸고, 조를 이뤄 움직이며 대투기장 내에 있던 병사들을 쉽게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레나는 이들과는 애당초 그 격이 달랐다.

"스파크 샷!"

양쪽에서 동시에 덤벼드는 신관 전사들. 레나는 장검을 쓰는 우측의 상대에게 스파크 샷을 던져놓고 왼쪽으로 몸을 날리더니 그 짧은거리에서 요령도 좋게 슬라이딩을 해서 상대의 공격을 피하며, 동시에 상대의 왼다리 무릎 안쪽을 확 베어버렸다. 어억 하며 불에 덴 듯 고통스러운 외침을 토하는 신관 전사. 레나는 땅에 양 손을 짚어 자신의 무게를 지지하며 그의 오른쪽 복사뼈 부근을 힘차게 걷어찼다. 왼다리는 무릎 안쪽이 베였고 오른 발목은 체중이 실린 발차기에 걷어차이자 속절없이 바닥에 쓰러지는 그. 레나는 소리도 없이 바닥에 넘어진 그의 등에 올라타더니 양손으로 쥔 단검을 척추 사이에 힘껏 쑤셔박았다.

"꺼허윽!"

척추가 쑤셔지는 고통에 전기에 감전된듯 고개를 치켜들고 팔다리를 파르르 떠는 신관 전사. 레나는 찔러넣은 단검에서 손을 떼곤, 그의 머리를 양 손으로 콱 쥔 다음 비틀듯 세차게 잡아돌려 목을 꺾어버렸다. 뿌드득 하고 뼈가 어긋나는 소리가 나며 그의 눈에선 순식간에 생명의 빛이 꺼져버렸다.

"너... 너어!"

레나가 날린 스파크 샷에 스쳐 감전되었던 다른쪽 신관 전사.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도 무기를 치켜든채 막 내리치려 하고 있었다. 레나는 그대로 몸을 옆으로 굴려 그의 간격에서 벗어났다. 신관 전사는 한 발 늦게 검을 내리쳤고, 애꿎게도 시체가 된 동료의 몸을 내리치고 말았다. 옆으로 몸을 피했던 레나는 자신이 목을 꺾어 죽인 자가 떨어트린 메이스를 쥐고 주저없이 눈 앞의 상대에게 힘차게 휘둘렀다. 아직 감전의 영향이 채 가시지 않은데다 엉뚱하게도 동료의 시체에 칼을 박아넣고 당황해하던 그는 피하지도 못하고 관자놀이께에 그 메이스의 일격을 허용하고 말았다. 뻐걱하고 뼈가 깨지는 소리가 나며 피가 튀었다.

"케헥...!"

혀를 빼문채 옆으로 나동그라지는 그. 레나는 양 손으로 메이스를 움켜쥐더니, 펄쩍 뛰어 체중을 실어서 그대로 메이스를 내리쳤다. 퍼걱! 바닥에 쓰러진 사내의 머리통이 완전히 박살나며 붉은 피와 허연 뇌수가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레나의 얼굴에도 피가 투둑 튀어 올랐지만 개의치 않는다는듯 소매자락으로 슥슥 닦아내곤 메이스를 버린 뒤 시체의 등에 박혀있던 자신의 단검을 뽑아내었다.

"정리했습니다. 그럼 계속 가시죠."

"....으, 응."

그 광경을 지켜보던 패럴 왕자의 안색은 왠지 모르게 헬쓱해져 있었다. 레나가 대단한 솜씨를 지닌 호위라는건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이렇게 싸우고 눈 앞에서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걸 보는것은 처음이었다. 자신에겐 그저 헌신적이고 순종적인 레나였는데... 잠깐 사이에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과 태도로 무장한 상대들을 저렇게 쉽게 죽여버리다니!

'레나와 결혼하고 난 뒤에 부부싸움 같은건... 절대로 못하겠군.'

패럴 왕자는 조금 엉뚱한 생각을 하며 레나의 뒤를 따라 복도 안쪽으로 향했다. 사방은 여전히 온갖 비명과 혼란에 빠진 외침, 그리고 화재로 인간 매캐한 냄새와 연기가 가득했다.

한 편. 브래들리 왕세자는 한차례 각혈 후 창백해진 안색으로 바닥에 엎드려 곧 죽을것처럼 헐떡거리다, 진석이 옆으로 다가오자 애써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크윽... 고작 암살자 하나 상대로 이 모양이라니. 부끄럽, 쿨럭쿨럭!"

기침을 하자 입안에 남아있던 피가 여기저기 튀었다. 진석은 그를 붙잡아 일으켜 벽으로 끌고가 등을 기대게 만들었다. 등이라도 기대고 나니 조금 편해졌는지 브래들리 왕세자는 크게 숨을 몇 번 몰아쉬더니 진석에게 말했다.

"저, 저 검. 창염의 검... 내게... 가져다 주겠나."

떨리는 손으로 저쪽에 떨어져있던 창염의 검을 가리키는 브래들리 왕세자. 진석은 그쪽으로 다가가 손을 뻗어 검의 손잡이를 쥐었다.

- 창염의 검

공격력 : 56

설명 : 영혼을 태우는 푸른 불꽃, 창염을 다룰 수 있게 해주는 마검. 창염이 실린 검에 맞은 상대는 굉장히 높은 확률로 즉사하거나 상당량의 수명을 잃는다. 창염은 그 힘을 다루는 자에겐 스스로를 지킬 힘과 능력을 주어주나, 그 대가로 대량의 수명을 소모한다. 플레이어가 사용시 능력치가 영구 대폭 감소한다.

특징 : [마검], [특수 기능 / 창염의 검 - 발동 후 NPC가 적중시 초고확률로 즉사 혹은 잔여 수명 대폭 감소], [특수 기능 / 창염의 갑주 - 발동 시 모든 부정적인 마법 효과에 일시 면역 상태], [플레이어가 사용시 능력치 영구 대폭 감소]

'그렇군... 창염의 검이란 이런 무기였군. 뭐 이래저래 이야기를 들어 대충 알고는 있었지만...'

이건 또 참 흉악한 무기다. 자신의 수명을 깎아 타인의 목숨을 빼앗는 검이라. 이딴걸 제정신으로 쓸 수 있을까? 브래들리 왕세자는 힘 없이 두어번 쿨럭거리다가 말했다.

"쿨럭. 으으... 검을 쥐어본것 만으로도... 눈치 챈건가? 그래. 그건... 나 말고는 써선 안 될 무기야. 돌려주게."

"......"

말없이 브래들리 왕세자를 바라보는 진석. 브래들리 왕세자는 그 시선을 더 이상 이 검을 쥐어선 안된다라는 의미로 받아들인건지 힘없이 자조적인 웃음을 띄어보이며 중얼거렸다.

"크... 내 동생, 패럴이 준 선물... 나는 그것이 수명을 깎아내는 말도 안되는 무기라는것을 알면서도... 받아들였네."

"...?!"

의외의 이야기. 브래들리 왕세자는 아무것도 모르고 이 창염의 검을 휘두르고 있었던게 아니었단 말인가? ...아니. 아니지. 본인의 수명을 깎아내는 무기다. 브래들리 왕세자가 정말 무슨 바보도 아니고, 창염의 검을 직접 휘둘러 본 이상 그것이 자신에게 해가 된다는것을 모를리 없었다.

"그렇다면... 대체 왜?"

궁금해진 진석이 무심코 질문을 던지자, 손등으로 입가에 흘러내린 피를 닦고 숨을 고르는 브래들리 왕세자. 그는 천천히 입을 열며 대답했다.

"나는... 이 나라의 왕위 따위엔 관심이 없어. 나처럼 무술이나 싸움에 정신이 팔린 망나니보단... 책도 많이 읽고 머리도 좋은 패럴이 왕위를 이어받는게 왕국의 장래를 위해서라도 백 번 낫겠지... 애당초 나는 왕좌에 오를 자격도 없는것을. 알런가 모르겠지만 내 어머니는 본디 후궁. 원래의 비는 패럴의 어머님이였네. 그리고 오로지 나의 존재 때문에 패럴의 어머니가 목숨을 잃은것이나 다름없으니... 패럴이 그 때문에 얼마나 절망하고 괴로워했는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네."

진석은 그제서야 브래들리 왕세자의 내심을 눈치챌 수 있었다. 브래들리 왕세자는 결국 자신때문에 원래 왕비였던 패럴의 어머니가 죽은것에 대해 오래전부터 커다란 부채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지금 자신에겐 그간의 사정을 축약해, 아무렇지 않은 듯 몇마디의 이야기를 건넸을 뿐이지만... 그간 이 이복형제 사이엔 입 밖으로 내지 못할 얼마나 많은 감정의 교차가 오갔을까? 허나 단지 자신의 존재만으로도 누군가 원망끝에 죽어갔고, 그로 인해 서로 증오와 죄책감을 느끼고... 참 어처구니 없는 이야기긴 하다. 왕이 정실의 아들인 둘째 패럴을 왕세자로 책봉했다면 이렇게까지 되지 않았을테지만 장자상속제라는 법도가 있었기도 하니... 그리고 브래들리 왕세자가 패럴 왕자에게 이러한 죄책감이나 부채의식을 느낀다는건, 사실 왕세자가 그만큼 선량한 인물이라는 반증이리라. 브래들리 왕세자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패럴이 창염의 검에 대해 알면서도 내게 이것을 선물 했건 아니건... 상관없어. 나는 이 검의 힘을 바탕으로 우선 유곤 왕국을 정벌. 그 공으로 아버지에게서 왕위를 양위받은 후, 연이어 옐 프람 성국을 차례대로 정복하고 제국을 세워... 이후 반석위에 올린 이 나라를 패럴에게 양도한다는 최소한의 속죄를 계획하고 있었지만... 역시 이 검은 다루기 너무 힘들군."

머리를 뒤로 기대며 하아 하고 긴 한 숨을 내쉬는 브래들리 왕세자. 그나마 앉아서 휴식을 취해서인지 조금 혈색이 돌아오고 있었다.

"이 검을 쓸때마다 느끼고 있네. 내 영혼이 타들어간다는 것을. 한 번 휘두를때마다 휘몰아치는 창염은 사실 내 수명을 태워 없애는 불꽃이라는 것도. 이건 패럴도 모르고 있을테지만... 나는 지금까지 여기저기서 이 창염의 검을 제법 많이 휘둘러왔어. 왕국의 총의를 강제로 전쟁으로 끌고가기 위해 외부만이 아닌 내부의 적과도 싸워와야 했으니까... 앞으로 창염의 검을 전혀 휘두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나는 기껏 몇년밖에 더 살지 못할터."

조금전까지 피를 토하거나 고통스러워 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당장 죽을것 같더니만 아직 몇 년이나 수명이 더 남아있다고? 할 수 없군 하며 결심을 굳히는 진석.

'뭐 궁금하던 전후사정도 대충 들었으니 이쯤에서 끝내주지. 최소한의 자비는 두어 고통은 없도록...'

진석은 슬쩍 허리춤에 꽂힌 란비언에 손을 뻗었다. 힘없이 축 늘어져 있는 브래들리 왕세자. 그야말로 무방비한 상대였다.

'단숨에 란비언을 뽑아서 목을... 아니, 그래도 자신을 증오하는 동생을 위해 되려 왕국을 확장하고 반석위에 올린다음 양위해주려던 형인데 목은 좀 그런가. 피도 많이 튀고. 그럼 단박에 보내주기 위해 심장을...'

브래들리 왕세자를 죽일 방법을 고민하는 진석. 그때였다. 저쪽에서 도노반의 짐승같은 괴성이 울려퍼졌다. 무심코 시선을 돌리는 진석.

"아아아아아! 너어어어어!"

길어진 격전탓에 여기저기 자잘한 상처를 입은 비렐이 막 도노반의 두 수하를 쓰러트린 참이었다. 언제 쓰러트린건지 몰라도 한 명은 목덜미가 반쯤 잘려 쓰러져있었고 다른 한 명은 지금 막 가슴이 꿰뚫려 뒤로 넘어지는 참이었다. 상황을 보아하니 둘 다 즉사 였으리라. 혼자 남은 도노반은 분노를 주체하지 못한채 마구잡이로 비렐에게 덤벼들었다. 그리고 몸에서 빛의 입자가 휘날리는게... 진석 자신과 싸울때 마지막으로 발했던 무언가의 돌진 기술임이 분명했다. 검을 휘두르고 물러서며 힘겹게 그것을 막아내는 비렐. 하지만 격렬한 싸움때문이었을까, 비렐의 검은 챙강하고 반토막이 나버렸다.

"저... 저런! 이봐, 모데로. 어서 비렐의 지원을!"

당황하며 진석에게 비렐을 도울것을 명령하는 브래들리 왕세자. 진석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저놈들이 싸우다 죽던 말던 내 알바 아니고... 댁은 지금 내 손에 죽을 입장이거든?'

진석은 창염의 검을 왼손에 옮겨 쥐고, 브래들리 왕세자를 끝장내기 위해 오른손으로 란비언을 착 뽑아들었다. 그런데 다음 순간, 갑자기 저편에서 예리한 살기가 느껴졌다.

'음?!'

반사적으로 살기가 느껴진 방향을 향해 란비언을 휘두르는 진석. 챙강! 뭔가가 란비언의 검날에 부딪혀 바닥에 떨어졌다. 바닥에서 또르르 구르며 반짝하고 빛나는 그것은...

'바, 바늘? 끝에 시커먼 뭔가가 묻어있는게... 독?'

깜짝 놀란 진석이 저쪽을 바라보자, 창염이 사그라든 창문 너머로 이디스가 몸을 내밀고 있었다. 창염옥을 맞고 불타 죽은게 아니었단 말인가? 그 짧은 사이에 창문 밖으로 몸을 피했다가 다시 기어올라 왔다고? 다시 나타난 이디스의 모습에 브래들리 왕세자도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니... 어떻게?!"

대답엇이 창문을 타고 넘어와 안쪽으로 내려서는 이디스. 옷이나 머리카락이 잔뜩 불타고 몸 여기저기엔 화상을 입은 자국이 잔뜩 보였다. 특히 좌반신쪽에 입은 화상이 꽤나 심각한게... 고통이 엄청날텐데도 신음소리 하나 내지않고 팔에 두른 보호대 안쪽에서 뭔가를 끄집어 내고 있었다. 가늘고 긴 금속성의 도구들, 방금 진석에게 던진것과 같은 독바늘이었다.

'아니 저년은 브래들리 왕세자나 노릴것이지, 나한텐 왜 저걸 던지고 난리야?'

그야 진석이 이야기를 듣느라 마치 브래들리 왕세자 앞을 지키는듯한 자세로 앉아 있었으니까. 방해가 되기도 하니 우선 독이 발린 암기를 던져 진석부터 제거할 심산이었으리라. 하지만 이디스에겐 마침 진석이 무기를 뽑아든 참이었다는게 참 안좋은 타이밍이었달까. 이디스는 양손에 가득 꺼내쥔 바늘을 이쪽을 향해 휙 뿌리고 히든 블레이드를 내민채 달려들었다.

"...아오 가지가지하네 정말!"

몸을 옆으로 확 날리며 독바늘 더미를 피하는 진석. 방금까지 진석이 서 있던 자리에 바늘들이 다다닥 날아와 꽂혔다. 딱 한 번만 칼을 휘둘렀으면 브래들리 왕세자의 목숨을 거둘 수 있었을텐데! 너무 여유를 부렸어... 라기보다, 쟤는 이게 대체 무슨 민폐냐?! 저렇게 엉망진창이 되었으면 도망을 가던가 어디가서 치료라도 하던가! 대체 누구 사주를 받고 왔길래 이렇게 목숨 내던지며 열심이야?! 진석은 발치에 창염의 검을 던져두고 흑철단검을 마저 뽑으며 자신의 코앞에 육박한 이디스를 상대했다.

"젠장! 왜 이런 타이밍에 끼어들고 난리냐고?!"

"닥쳐. 죽어."

진석의 말에 싸늘히 답하며 매섭게 히든블레이드를 휘두르는 이디스. 진석과 이디스의 검이 허공에서 미친듯이 교차했다. 채채채채챙!

'이런 젠장! 어째서... 어째서 이렇게!'

그리고 도노반은 분노와 절망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성토를 노리는 배덕자들에게 천벌을 내리러 왔건만, 일은 전혀 생각대로 풀리지 않았다. 토너먼트에서 패배한 것도 그렇거니와 특히 이 눈 앞의 상대. 푸른 갑주를 입은 비렐이란 이 자는 이미 자신의 수하 넷을 죽였고 지금도 검이 반토막 났음에도 전혀 꺾이지 않고 자신과 맞서 싸우고 있었다. 도노반이 스스로에게 걸어둔 신성마법도 그 한계시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크윽...'

애시당초 오늘밤 너무 많은 신성력을 썼다. 신성력도 무한한것이 아니었다. 이 이상 신성력의 힘을 빌어 싸우기도 곤란한 상황. 그렇다고 스스로 비렐이라는 남자를 꺾을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밖엔 아직 많은 수하들이 있을테지만 그들은 혼란을 야기하기 위한 방화나 시민들의 살육에 주력하는 상황일터. 애당초 정예인 이 넷과 자신이면 충분할거라 생각했던건데...

그나마 저쪽에서 왕세자의 목숨을 노리는 것으로 보이는 여자 암살자가 죽지 않고 다시 나타난것 까진 좋았다. 하지만 토너먼트의 우승자인 모데로라는 남자가 맞서고 있는 상황. 이래서야 자신에게 걸어둔 신성마법의 힘이 다하면 비렐에게 밀려 브래들리 왕세자에겐 가까이 가보지도 못한채 패퇴할것이고... 저 여자 암살자 역시 이미 한 번 모데로라는 남자에게 꺾였던 상대가 아니던가? 게다가 심한 부상도 입은것 같으니 그녀 역시 상대를 이기고 왕세자의 목숨을 거두긴 힘들터.

'할 수 없군. 이렇게 된 이상... 만약을 대비해 가져왔던 물건을 쓰는 수 밖엔...!"

애시당초 브래들리 왕세자의 암살이라는 목표를 위해 이곳에 올때부터 도노반은 자신의 남은 삶따위, 진즉 포기했었다. 신을 믿는 자가 고작 현세에 미련이 있으랴? 디에스교를 중흥을 위해 자신의 한 목숨쯤 얼마든 내던질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래서 만약을 대비해 준비해 온 것이 바로 마정석이었다. 옥션에서 노예들을 위한 복종 마법을 걸때 재료로 쓰이기도 하는 바로 그 물건. 하지만 도노반이 준비한 것은 조금 특별한 세공을 거친 마정석이었다.

'대폭발의 주문이 담긴 마도구를 연결해둔 특제 마정석... 여기에 약간의 신성력만 불어넣어도 뇌관처럼 작동, 마력이 가득찬 마정석과 반응해서 일대를 싸그리 날려버리는 대폭발이 일어날터! 네놈들 모두 길동무로 삼아주마!'

크흐흐 광소를 지으며 자폭의 결심을 다지는 도노반. 조금이라도 더 브래들리 왕세자의 가까운곳에서 폭발을 일으키기 위해, 비렐을 향해 프레일과 방패를 집어던지고 그를 떨쳐낸 뒤 브래들리 왕세자를 향해 내달리며 품에 손을 넣었다. 곧 그의 손에서 마도구가 연결된 주먹만한 마정석이 끄집어 내졌다.

패럴 왕자 일행은 또 다른 신관 전사 무리를 한 번 더 물리치고 나서야 브래들리 왕세자의 개인실 가까이까지 다다를 수 있었다. 또 다시 앞을 가로막았던 신관 전사들 역시 레나가 순식간에 쓰러트렸고, 패럴 왕자는 레나의 능력을 새삼 똑똑히 절감할 수 있었다.

"다 왔습니다. 바로 저기... 음?"

그런데 복도의 끝에 다다르고 보니 문 앞에 브래들리 왕세자의 호위 기사가 피를 흘린채 쓰러져 있었다. 말없이 서로 눈빛을 주고 받는 패럴 왕자와 레나.

'호위가 죽어있다는건... 그 남자가 일을 끝낸걸까?'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것도 잠시. 곧 방 안쪽에서 채채챙 하고 병장기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호위 기사가 쓰러져 있는것을 보고 순간 브래들리 왕세자의 암살이 끝난거라 생각했는데, 아직도 누군가 안에서 싸우고 있단 말인가? 지금 안에선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길래?

"저희가 살펴보겠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패럴 왕자의 뒤에서 쭉 경계만 하던 두 기사가 갑자기 앞으로 나섰다. 여기까지 오며 자신들은 아무것도 한 일이 없었던 것이다. 본인들도 엄연한 고위 기사인데 여자인 레나에게만 전투를 맡겨두고 쭉 뒤만 따라왔으니 좀도 쑤시고 낯부끄럽기도 했던것이다. 그들은 무기를 앞세운채 패럴 왕자나 레나가 제지할 새도 없이 서둘러 방 안쪽을 향해 들어섰다.

"으흐흐흐하하하! 다 죽어버려라 이 불신자놈들!"

진석은 이디스와 격렬히 검격을 주고받으며 싸우는 상황이었음에도, 뜬금없이 바로 뒤쪽에서 들려오는 광기섞인 외침에 한 눈을 팔 수 밖에 없었다. 비렐을 떨쳐내고 이쪽으로 달려드는 도노반이 손에 뭔가 쥔채 미친놈처럼 광소하고 있었다.

'뭐, 뭐야 저 새끼 왜저래? 손엔 뭘 들고 있는거야...?'

진석이 채 상황의 판단을 하기도 전에 도노반은 손에 든 특제 마정석 폭탄을 높이 들며 자신의 생에에서 마지막으로 남길 유언을 외쳤다.

"디에스 신에게 영광으으을!"

그리고 도노반의 손에 빛나는 신성력이 맺히자 이내 갑자기 마정석이 붉게 달아오르며 쿠오오오하고 무슨 비행기 엔진같은 굉음을 내기 시작했다. 이러한 마정석 폭탄은 진석도 처음 보는 것이라 그것이 정확히 뭔진 알 수 없었지만, 대충 분위기만으로 뭔가 위험한짓을 하려든다는걸 눈치 챌 수 있었다. 진석은 다급히 몸을 날리며 발치에서 굴러다니던 창염의 검에 손을 뻗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시계가 하얗게 물들며 고막이 찌잉하고 울렸다. 강렬한 폭발이 도노반을 중심으로 방 전체로 퍼져나갔다.

============================ 작품 후기 ============================

다음회로 10장도 끝입니다. 사실 별 내용도 없는데 쓸데없이 길었던듯.. OTL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