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11. -- > * 130화 *
'올린스턴 왕국하고 옐 프람 성국의 국경은 다른 나라들 처럼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거나 공백지가 있는게 아니라, 아마도 대충 한나절 정도면 다다를 수 있으니... 뭐 이거저거 많이 필요하진 않겠지. 간단한 식료품만 조금 살까.'
작은 마을이긴 했지만 두 나라를 오가는 여행자들이나 고정적으로 상단들이 지나는 길목이라서일까, 마을의 규모 치곤 의외로 가게가 여러곳 성업중이었다. 진석은 혹시 모르니 셀린과 케이트 몫의 모포 두 장과 램프에 넣을 기름, 그리고 간단히 갈아입을 옷가지나 수건 등의 잡화들을 좀 구입했다. 그리고 식당에 들러 간단한 먹거리들과 음료를 보급했고 술도 몇 병쯤 구입했다.
'역시 마차가 좋다니까. 짐이 많아도 왕창 다 때려 실을 수 있고. 옛날에 타던 마차보다 크고 좋은데다 짐칸도 따로 있어 물건을 싣기도 좋고.'
준비를 마친 진석은 승차칸 안에 타 있던 셀린과 케이트에게 점심밥으로 구입한 빵과 음료를 건네주었다. 흔히 핫도그 번으로 쓰이는 기다란 쿠페빵 같은것에 훈연 소시지를 넣은 간단한 식사. 다진 양파와 절임 조각 같은것들이 곁들여 들어있었는데 새큼하면서 아작아작한것이 짭짤한 맛의 소시지와 어울리는게, 뭔가 하고 살펴봤더니 사탕무로 담근 피클이었다.
'어 의외로 맛있네 이거.'
뭐 공복도만 채우면 뭘 먹어도 상관없긴 하지만, 가상의 음식이나마 그래도 조금이라도 더 맛있는걸 먹는쪽이 기분 좋긴 했다. 입에 빵을 물며 그대로 마부석에 올라 마차를 출발시키는 진석. 한 입씩 빵을 베어먹으며 마을을 벗어날때 즈음, 마을 남쪽방면 출구에 왠 마차 두대와 시커먼 차림새의 인원 십여명이 진을 치고 있는것이 눈에 들어왔다.
'...어랍쇼? 뭐야 저거. 왠지 눈에 익은 모양새들인데.'
벌건 대낮에 뜬금없이 마차 두 대와 검은 색의 옷을 입은 십여명의 인원이 마을 출구쪽에 모여있으니 주변을 지나던 마을 사람들도 삼삼오오 모여 뭐지뭐지 하면서 그쪽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진석은 쳇 하고 혀를 차며 뒷통수를 벅벅 긁적였다.
'이거이거... 또 케이트의 가족들이 쫓아온건가. 재주도 좋지. 게다가 수가 두 배로 늘었네.'
하지만 마차를 몰고 거침없이 길을 나아가는 진석. 진석의 마차가 다가오니 그쪽에서도 마차를 움직이더니 바로 정면을 막아섰다. 그리고 즉시 주변을 둘러싸는 인원들. 의상을 맞춰입기라도 한 것 처럼 다들 하나같이 검은옷에 머리를 가리는 모자를 쓰고 있었다. 게중엔 저번에 케이트의 둘째 오빠 웨런을 추격했을때 봤던 수하들의 얼굴들도 섞여 있었다.
'아아. 협박이 제대로 안 먹힌건가. ...아니, 아니지. 하긴 내가 오빠 같았어도 여동생이 납치되었는데 협박 한 두 마디 듣는다고 순순히 물러나겠냐? 이게 정상이겠지.'
그리고 뒤쪽에 물러나 있던 두 명의 사내가 진석이 탄 마차 앞으로 다가왔다. 둘 다 귀족적이고 호사스런 차림. 개중 한 명은 웨런이었다. 진석을 보곤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 얼굴엔 나름대로의 결의가 담겨있었다. 진석이 생각했던대로 이번엔 반드시 여동생을 되찾겠다는 뭐 그런 종류의 결심이라도 다졌으리라. 그리고 또 다른 한쪽의 사내는...
'호오? 이건 제법...'
별 다른 기도가 느껴지지 않던 웨런과는 달리, 이쪽의 사내는 그야말로 얼음장 같은 차가운 기세가 뿜어져오고 있었다. 케이트를 블랙 옥션에서 처음 보았을때 말로는 표현 못할 미묘한 요사스러움을 느꼈었는데, 이 사내에게서도 역시 그와 비슷하면서도 뭔가 더 묵직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에, 그리고... 되게 잘 생겼네. 생김새나 느낌이 웨런쪽과 꽤 비슷하긴 하지만 웨런보다 좀 더 잘생겼다.'
잠시 그들을 살피고 있자니 띠링 하면서 퀘스트의 알림이 떠올랐다. 저번 케이트를 되찾아올때와 거의 같은 내용에다 비슷한 보상을 담고 있는 퀘스트 알림이었다. 이 퀘스트 이거...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 거였구나. 진석은 휴우 한숨을 내쉬며 마부석에서 내려와 그들과 마주섰다.
"너. 내가 두 번 다시 내 눈 앞에 나타난다면... 어쩌겠다고 했지?"
웨런을 보며 씨익 웃어보이는 진석. 웨런은 흠칫하고 겁을 먹은 표정을 지어보이면서도 곧 이이익 하며 회색날의 검을 뽑아들었다. 하지만 손과 검날이 덜덜 떨리는게 그대로 보이고 있었다.
"또, 또 속을 것 같냐! 저번의 그건... 분명 환상이나 가짜 마법이었겠지! 인간이 진짜로 용의 힘을 다룰리가 없어!"
"얼씨구?"
웨런이 부들거리자 옆에 있던 다른 사내가 손으로 그를 제지하며 한발짝 앞으로 나섰다. 가까이서보니 웨런과는 달리 체격도 탄탄해보이고 눈빛에도 힘이 서려있었다. 그는 잠시 진석을 노려보다 입을 열었다.
"나는 스토웰 가문의 장남이자 케이트의 첫째 오빠인 카일이라고 한다. 그쪽의 인간, 단도직입적으로 부탁하지. 케이트를 우리에게 돌려주게."
"......"
묵직하면서도 낮은 저음. 그야말로 사내다움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진석이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려는 찰나, 마차가 한참 멈춰서있고 나아가지 않자 이상하게 생각한 케이트와 셀린이 마차에서 내렸다.
"케, 케이트!"
마차에서 내린 케이트를 알아 보고 그 이름을 부르는 웨런. 케이트는 자신의 둘째 오빠인 웨런과 더불어 첫째 오빠 카일, 그리고 주변을 포위하고 있는 가신들의 모습에 적잖이 당황해하는 모습을 보였다. 셀린은 주변을 한바퀴 돌아보더니 상황을 눈치채곤, 샤아악 하고 짐승의 경계음 같은 소리를 토해내며 손톱을 길게 뽑아내고 케이트의 앞을 막아섰다. 그리고 잠시간의 대치. 서로의 사이엔 아무말없이 긴장감만이 흘렀다. 먼저 침묵을 깬것은 카일이었다.
"...인간과는 아무 접점이 없이 평범히 자라온 케이트가 어째서 지금 당신의 곁에 머물고 있는건가... 그리고 케이트가 당신과 함께 보내는동안 무슨일이 있었는가... 그런것따윈, 모두 불문에 붙이겠네."
"혀, 형님! 그게 무슨!"
깜짝 놀라는 웨런과 호오? 하며 재밌다는 듯 입가에 미소를 띄우는 진석. 카일은 감정이나 톤의 변화가 없는 일정한 음성으로 계속 말을 이어갔다.
"실제로 용의 힘을 구사하는지 아닌건지는 내 눈으로 확인한게 아니니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그쪽의 실력이 보통이 아니라는건 잘 알겠네. 가급적 서로 온건한 방향으로 해결했으면 좋겠군. 우리가 원하는건 케이트를 되돌려 받는것 뿐이야. 돈을 원한다면 돈을 주지. 그러니 케이트를 놓아주게."
케이트의 첫째 오빠라는 이 카일은... 확실히 웨런과는 달리 여간 내기가 아닌것 같았다. 소중한 여동생을 납치한건지 꾀어낸건지 모를 상대를 앞에 두고도 이렇게 아무 감정의 흔들림 없이 침착하게 나올 수 있다니. 보통은 웨런같은 반응을 보이는게 정상일터. 상대가 이렇게 나오니 진석 역시 저절로 어떻게 대답해야 할 지 한층 신중해졌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말을 고르고 있는데 케이트가 셀린과 함께 이쪽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돌아가세요! 저는 여기서 오라버니들과 돌아갈 생각은 전혀 없으니까요."
"케이트! 대체 무슨 말이야? 애당초 마족인 우리가 인간들 따위와 어울려 살아갈 수 있을것 같아?"
자신의 가슴을 탁탁 두드리며 답답해 하는 웨런. 카일은 케이트를 잠시 쏘아보더니 여전히 변화없는 톤으로 툭 던지듯 말했다.
"네가 사라진 후, 어머니가 쓰러지셨다. 아직도 병상에 누워계시지."
"아... 어, 어머니가."
그 한 마디에 깜짝 놀라는 케이트.
"가족을 다 버리고 갑자기 사라져 버릴만큼 이 사내가 너에게 가치가 있는건가."
"......"
억지로 누가 붙들어놓은것도 아니고 스스로 진석을 따르는것 같은 모습에 카일은 케이트가 가족과 집이 아닌 진석을 택한거라 판단한 모양이었다. 사실은 납치되어 노예로서 진석에게 팔려온것인데 이렇게 멀쩡한 모습이니 눈치채지 못할만도 했다. 케이트는 시선을 내리깐채 잠시 대답을 주저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얼굴을 들어 카일을 마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비록 종은 달라도... 이분은 제가 모든것을 바쳐 섬겨야 할 진정한 주인. 어머니가 쓰러지셨다는건 괴롭지만... 그래도 전 이분을 떠날 수 없습니다. 저는 무사히 지낸다고, 모든게 괜찮다고 전해주세요."
아 이것 참. 가운데에 끼어있는 진석은 내심 꽤 곤혹스러웠다. 사실 케이트와 자신간의 사이엔... 아무것도 없다. 가족까지 내버리고 자신을 택할만한 진정한 유대라던가 사랑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복종마법으로 강제한 무조건적인 충성심과 애정만이 자리할뿐.
'이거 진짜 이 상황은 어떻게 생각해봐도 내가 그냥 나쁜놈이네. 내 말 한마디면 케이트가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순순히 돌려보내 줄 순 없는 노릇이고.'
카일은 한참이나 케이트를 마주보다가 하아 한 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어라. 깔끔히 포기해 주는건가? 의외인데? 하지만 다음 순간, 번쩍 하고 진석의 눈 앞에 한줄기 검광이 내리쳐졌다. 카일이 허리춤에서 회색날의 검을 뽑으며 거합술을 펼친것이다!
"이 자를 제거하고 강제로라도 끌고가겠다!"
"오라버니이이!"
"샤아아아아!"
얼음같이 싸늘한 냉정함을 유지하던 카일의 얼굴엔 분노가 깃들어 있었다. 그리고 깜짝 놀라 절규하듯 소리를 내지르는 케이트와, 반사적으로 이쪽으로 뛰어드는 셀린.
'냉정한 타입인 줄 알았더니 꾹 참고있던것 뿐이었군. 하지만 이렇게 당할 수 있겠냐!'
진석은 시클론을 걸며, 코앞으로 날아드는 검날을 그야말로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해냈다. 근거리에서 기습적으로 펼쳐진 발검을 피해내자 눈을 크게 치켜뜨며 놀라는 카일. 진석은 쭉 뻗어진 그의 검면을 발로 걷어차 옆으로 흘리며 뒤에서 무작정 뛰어들던 셀린의 허리를 붙잡고 끌어당겼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 기습은 무위로 돌아갔고 진석은 유유히 공격을 피하며 셀린을 이끌고 함께 케이트의 곁으로 물러났다.
"과연... 대단한 솜씨."
아랫입술을 꾹 깨물며 씹어뱉듯 말하는 카일. 어찌보면 비겁하게 불시의 기습까지 가했음에도 공격이 가볍게 파해되었다는 사실에 조금 충격을 먹은것 같았다. 웨런 역시 카일의 검격이 헛되이 막히자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케이트는 분노와 슬픔이 반반씩 뒤섞인 복잡한 표정을 한채, 진석에게 다가와 옷깃을 붙잡으며 카일을 노려보았다.
"카일 오라버니... 어째서 이런..."
"주인님을 공격하다니이! 가만두지 않을거다냐아아!"
그리고 그 옆에서 씩씩대며 열을 내는 셀린. 송곳니를 드러내고 발톱을 한껏 뽑아낸대다 눈을 부릅뜨고 있으니 진짜로 성난 고양이과 동물을 보는것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진석은 손을 저으며 앞으로 한 발 나섰다.
"뭐... 좋아 그럼. 이렇게 하자고. 카일이라고 했지? 당신이 나를 일대일 승부로 꺾는다면 케이트를 그쪽에 돌려주겠어. 하지만 그쪽이 진다면 여기서 곧바로 물러나도록. 그리고 두 번 다시 나와 케이트를 찾아오지마."
"뭐라고? 저, 저런 뻔뻔한!"
웨런은 진석의 제안에 발을 탕탕 구르며 열을 내었고 케이트는 의외의 제안에 걱정섞인 표정으로 진석을 올려다 보았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싼 스토웰 가문의 가신들은 어느새 각자 무기를 뽑아든채 신호만 내려준다면 한꺼번에 치겠다는듯 빈틈없이 전투 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미간을 좁힌채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카일은 눈을 지긋이 감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그렇게 하지."
"좋아. 승부가 나면 피차 서로간에 두 말 없이 약속은 깔끔히 지키자고."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자 웨런이나 셀린은 마구 투덜대었다. 웨런은 카일에게 이쪽의 숫자가 훨씬 많으니 그냥 힘으로 결판을 짓자고 떠들었고, 셀린 역시 이번에는 쉽게 당하지 않을거라며 주인님에게 칼을 들이댄 카일을 혼쭐내겠다고 씩씩거렸다.
"아 거 시끄러. 넌 그냥 가만히 있어."
좀처럼 분을 삭이지 못하고 파닥거리는 셀린의 이마에 촙을 먹이는 진석. 그리고 손을 뻗어 근심 가득한 얼굴이 되어있는 케이트의 볼을 쓰다듬었다.
"괜찮아. 뭐 이런 상황이긴 하지만... 케이트의 가족이잖아, 목숨을 빼앗거나 하진 않을테니까."
"...감사합니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이런 상황이 되어서... 주인님을 위험에 빠지게 만들기나 하고... "
금세 울상이 되어버리는 케이트. 진석은 으이구 하며 케이트의 볼을 가볍게 꼬집곤, 옆에서 안달나 있는 셀린을 잡아 끌어 케이트의 곁에 밀어주었다.
"됐으니까 너희들은 거기서 가만히 지켜보기나 하라고."
진석은 여유만만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저쪽 한켠에서 이미 준비 만전인 카일에게 다가갔다. 카일은 회색날의 검을 다시 검집에 꽂아넣은채였는데, 이제 막 싸움을 할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검을 넣어둔채 자연체로 서 있는 자세를 보아하니... 아까와 같은 거합술이 그의 장기인 모양이었다.
'안 그래도 얼마전엔 팔자에도 없던 토너먼트를 하느라 별별 녀석들 하고 다 싸웠었는데... 이거 또 묘한 기술을 쓰시는구만.'
카일의 근처에 다가가서 선 진석. 그리고 그 주변엔 스토웰 가문의 가신들이 마치 경기장을 구성하듯 주변에 원형으로 쭉 둘러서 있었다. 나름 위압감을 주려는 행동일까?
'하지만 그래봤자지. 저번에 케이트의 둘째 오빠인 웨런의 부하들 실력을 보니 이런 녀석들 쯤 한 트럭이 몰려와봐야 별로 어렵지 않게 상대할 수 있는걸. 비록 셀린이 연수합격에 엉망진창으로 당하긴 했었다지만 나야 뭐 나보다 많은 숫자를 상대로 하는 싸움에 노상 익숙해져 있어서... 조무래기들 따위 차례대로 한 번에 한 명씩 각개 격파하면 그만인걸.'
카일과 마주선 진석은 잠시 칼을 뽑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했다. 아까의 거합은 사실 꽤 위험했었다. 기습적이기도 했고 정면에서 발한 검격이 아니라 처음부터 보고 있지 못했더라면 분명 자신이 베였으리라. 확실히 카일은 상당히 실력이 있는 검사 같은데... 케이트에겐 목숨을 빼앗거나 하진 않는다고 했었으니 굳이 검을 빼어들어 피를 보게 하는것도 볼썽사나운 것 같았다. 그럼 역시 맨손으로? 진석은 오른손에 낀 적룡의 건틀렛 플라메우스를 내려다 보았다.
'음 하긴 이걸로 검날을 쳐서 부러트리기도 했지. 맨손으로 해볼까?'
진석이 잠깐 이것저것 생각하는 사이, 카일이 문득 진석에게 말을 걸어왔다.
"그런데 당신. 이름이 뭐지?"
"...내 이름? 러셀."
"그렇군. 러셀인가... 그보다 믿긴 어렵지만... 당신 정말 용의 힘을 쓸 수 있는건가?"
진중한 표정으로 질문을 던지는 카일. 진석은 히죽 장난스레 웃으며 대꾸했다.
"왜, 보고 싶어? 내가 진짜 마음 먹고 이 용의 힘을 쓴다면... 당신 뿐만 아니라 부하들, 그리고 케이트까지 다 죽을지도 몰라."
표정과 말투는 장난스러웠지만 그 속에 담긴 내용만큼은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실이었다. 브레스 웨폰인 아르도르의 폭염은 분명 그만한 위력이 있었다. 주변을 한바퀴 휘 둘러 브레스를 방사하게 하면 정말로 모두가 싸그리 불타 전멸하리라. 진석의 대답을 들은 카일은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다,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용의 힘이라. 그것이 정말로 존재한다면... 지금 이 싸움과 관계없이 보고 싶긴 하지만... 우선은 이 승부부터 결판내기로 하지."
"좋아 그럼. 아깐 선수를 빼앗겼었으니, 이번엔 이쪽이 먼저 간다!"
시클론과 라파가의 조합으로 총알처럼 쏘아져나가는 진석. 게다가 카일과 문답을 나누는 그 짧은 사이 오른손에 조용히 열격장의 힘을 모아뒀었다. 약 7에서 8할쯤 될까? 카일은 진석이 여간해선 눈으로 따라잡기도 힘들 빠르기로 달려들었지만 당황하지 않고 무릎을 굽히고 오른손을 허리춤으로 내렸다.
"쉐이먼 슈나이든!"
번쩍! 마치 섬광처럼 느껴질정도의 거합이 진석에게 펼쳐졌다. 마치 통나무나 바위라도 그대로 베어버릴 것 같은 강렬한 일격! 진석은 자신에게 휘둘러지는 검날을 끝까지 눈으로 쫓으며, 그 검면 한 가운데에 정확히 열격장의 일장을 날렸다. 파카캉! 산산히 깨어지며 허공으로 산탄처럼 흩어지는 검의 파편. 웨런의 당혹스런 외침이 들려왔다.
"바... 바보같은! 야장 코버가 만든 검이 이렇게 쉽게 깨어지다니!"
어째 카일이 쓰는 검이나 웨런이 쓰는 검이나, 검날이 묘한 회색을 띄고 있길래 뭔가 사연이나 특색이 있는 무기인가 했더니 나름 이름있는 야장이 만든 검이었나? 하지만 그런것 치곤 너무 약한걸! 진석은 한 발 앞으로 내딛으며 무기를 잃은 카일에게 펀치라도 한 방 먹여 쓰러트리려고 했다. 하지만 빠르게 부서진 검의 손잡이를 내던지며 이쪽으로 손바닥을 뻗어오는 카일.
"클라우!"
그러자 카일의 손바닥 그림자에서부터 거대한 그림자의 손이 쭈욱 뻗어져 진석을 움켜쥐려고 들었다. 일전 케이트가 자신에게 시범 보여줬던것과 똑같은 기술이 아닌가?! 멀리 떨어져 그림자에서 솟아나게 하는것 뿐만 아니라 이거 자기 자신의 그림자에서부터 뻗어낼 수도 있었구나! 깜짝 놀라며 그림자의 손을 향해 반사적으로 꽉 움켜쥔 오른주먹을 휘두르는 진석. 적룡의 건틀렛으로 감싸진 오른주먹의 틈새에선 불길이 화르륵 솟아올랐다.
"멍청한 인간! 질루에트를 맨주먹질로 막아낼 수 있... 으헤엑?!"
퍼어억! 거대한 그림자의 손, 클라우를 그대로 꿰뚫어버리는 진석의 일권. 실체가 있는 대상을 때린것도 아니건만 분명 묵직한 손맛이 느껴졌다. 그 모습을 본 웨런은 진석을 비웃다 말고 기겁했다. 산산히 흩어지는 그림자의 손과 그 한가운데를 꿰뚫은 진석의 주먹. 주먹이 움직인 궤도를 따라 불길이 화라락 펼쳐지는 모습은, 마치 마귀를 물리치는 구마의 의식을 담은 성화의 한 장면 만큼이나 인상깊은데가 있었다. 넋을 놓고 감탄하는 셀린과 케이트. 당황한 것은 카일도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질루에트를... 게다가 손에서 불이... 무, 무슨 마법인가?'
케이트나 카일이 쓰는 이 영마족의 전용기술 질루에트. 이 질루에트 역시 평범한 무기만으로는 어떻게 막거나 대처할 수 없는것이었기에 카일은 자신이 기술이 깨어지자 당황했다. 허나 진석이 오른손에 끼우고 있는것은 적룡의 건틀렛. 평범한 장비가 아니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게다가 그림자에 있어선 천적이나 다름 없는 존재인 강력한 불의 힘이 담긴 건틀렛 아니던가. 그러나 진석은 본인이 클라우를 박살내 버리고도 잠시 벙쪄있었다.
'에... 어떻게 막았네? 그리고 이걸로 주먹쥐고 휘두르면 불 나왔었지. 열격장으로 장타만 써서 까먹고 있었다.'
잠시 멈칫하며 빈틈을 보인 진석. 그 사이 카일은 뒤로 두어걸음 빠르게 물러나며 다시 한 번 기술을 펼쳤다.
"란츠!"
쉬쉬쉬쉭! 매서운 파공음이 나는곳은... 자신의 발치였다! 진석 본인의 그림자에서부터 날카로운 그림자의 창날들이 무릎이나 허벅지를 노리고 솟아오르고 있었다. 식겁하며 펄쩍 뛰어 앞으로 구르는 진석. 기습적으로 솟아났던 창날들은 허공을 찌르곤 빠르게 사라졌고 진석은 정말 아슬아슬하게 공격을 피할 수 있었다.
'와 거참. 그림자에서 솟아나다니. 이거 당해보니 되게 짜증나는 공격일세.'
진석은 손을 뻗어 재차 질루에트를 사용하려는 카일에게 화염화살을 연사하곤 암살자의 망토를 펄럭이며 투명화를 걸었다.
"아니?!"
진석이 눈 앞에서 스르륵 사라지자 당황하는 카일. 게다가 그와 동시에 화염화살이 날아들었으니 일단은 피할수밖에 없었다. 황급히 뒷걸음질을 치며 물러나는 카일. 하지만 진석이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으니 불안해하며 주변을 이리저리 살피고 경계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열격장!"
터어엉! 그새 카일의 뒤로 돌아간 진석. 힘을 모으지 않은 열격장으로 카일의 등을 후려쳤다. 갑작스런 기습에 커헉 하고 그대로 앞으로 날아가 고꾸라지는 카일.
'크윽... 히, 힘 조절을 한건가? 굉장히 아프긴 하지만 그래도 생각보다 강한 타격은 아닌데... 감히 날 상대로 적당히 봐주면서 싸운단 말인가...?'
건방진 인간 같으니. 그 자만심을 꺾어주마. 비록 한 방 먹긴 했지만 아직 얼마든지 싸울 수 있었다. 서둘러 몸을 일으키려는 카일. 하지만 고개를 드니 눈 앞엔... 어느새 다가온 진석이 검은 흑철의 단검을 들이대고 있었다.
"자 이걸로 승부 끝. 뭐 표정은 전혀 납득 못한것 같다만... 그럼 이걸 한 번 보겠어?"
벨트에 검을 도로 꽂아넣은 진석. 뒤로 서너발짝 물러나며 허세스럽게 망토를 양 옆으로 촤악 펼치고, 최대한 폼을 잡으며 힘껏 외쳤다.
"나와라 아르도르여! 내 부름에 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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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이래저래 일이 생겨서 많이 늦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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