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11. -- > * 132화 *
옐 프람 성국 최북단의 성채도시, 에노페스에서 하루 머물렀던 진석은 두 노예와 함께 계속 남하했다. 그러길 반나절. 슬슬 해가 산허리에 기울어가는 늦은 오후. 가도를 따라 이동하다보니 그 부근에 여기저기 크고 작은 농촌 마을들이 눈에 자주 띄었다.
'그러고보니... 그란델 왕국은 아예 농작을 위해 수도 부근에 러프야드 같은 대단위 계획도시를 만들어 식량을 생산했었지.'
그란델의 수도 데오그라즈의 경우, 근해에서 어업이 행해져 식량수요를 충당하긴 했지만 대륙 남동부 물류의 거점이다보니 수도 자체의 생산보다는 주로 수출입에 많이 의존하는 편이었다. 물론 여느 대도시들 역시 기본적으로 다 외부에서 식량을 충당해온다지만 데오그라즈는 그 비율이 훨씬 높은편이었다. 그것이 데오그라즈의 물가가 타 도시에 비해 비교적 높은편이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물론 현대적인 유통망이 구축된다면 되려 가격이 내려갈수도 있을테지만, 배나 수레를 이용하는 전근대적인 물류망은 역시 그 한계가 있었다.
게다가 잘 되짚어보면 데오그라즈 근방의 마을들 역시 이곳 에노페스 주변과는 달리 가도부근엔 농촌보단 마차촌들이 더 많이 번성해 있었다. 굳이 데오그라즈와 같은 물류거점의 요지에서 시간도 오래걸리고 기대수입도 시원찮은 경작을 하느니, 오가는 여행자나 상단을 상대로 서비스업을 제공하는게 훨씬 더 좋은 돈벌이가 되었으니 당연한 현상이었다.
'상업에 주력한 나라와 전통적인 농업을 기반으로 한 나라의 차이인가.'
군주나 장수로 플레이할 이전엔 이런 부분을 별로 의식 못했었는데, 자기발로 직접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 보니 이런 풍경만으로도 그 차이점이 느껴졌다. 높은 신분으로 플레이 할때야 뭐 의자에 거만하게 앉아 아랫사람들에게 이래라 저래라 지시를 하고, 전형적인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을 하듯 화면에 떠오르는 숫자들과 수치를 통해 도시나 마을의 발달 정도를 파악했었으니까. 물론 이따금은 직접 현장에 나가 일을 진행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집무실에서 처리하는게 기본이었다. 그 편이 더 본인에게도 편하고 실제로도 효율적이었으니.
진석은 가도를 따라 여기저기 펼쳐진 크고작은 농촌마을들과 경작지를 둘러보며 느긋하게 마차를 몰았다. 9월 중순에서 하순으로 접어드는 늦여름.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수확철이 될터. 농부들은 머지않아 거둘 수 있는 수확을 고대하는지 해가 저물어가는 이 시간까지 다들 땀흘려가며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지극히 평화로운 농촌의 저녁 풍경이었다.
'올린스턴의 패럴 왕자가 어떻게 수습하고 행동할진 모르겠지만 만약 전쟁을 일으킨다면... 이 북부는 바로 전화에 휩싸이겠지.'
하지만 뭐 내 상관할바 아니다. 물론 실제 전쟁이라면 대단한 비극이겠지만 어차피 게임인데 천이고 만이고 죽어나가봐야 까짓 뭐 어떠랴. 그리고 이러니 저러니 해봐야 세상을 멸망시키겠다는 교단의 수하로 충실히 일하고 있는 자신 아니던가. 그런 입장에서 일어날지 아닐지도 모르는 타국의 전쟁따윌 걱정하다니, 우스운 일이다.
'그리고 어차피 미리안도 레오노르 공주를 통해 그란델 왕국을 손에 넣은 뒤엔 인근의 나라와 전쟁을 일으켜 허신의 부활에 박차를 가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걸.'
아참. 그러고보니 이제 그란델 쪽 일은 마무리 되었나 모르겠다? 진석 본인을 제외한 수호자들 전원과 아르데나까지 공작을 위해 따라갔었으니.
'아니 잠깐. 생각해보니 나는 폭풍의 지팡이를 훔쳐내곤 대륙 남서부의 아라파까지 가서 왕위를 찬탈하고 대지의 눈을 가져왔지. 그리고 되돌아와서는 곧바로 북동부의 올린스턴에 가서 창염의 검도 무사히 회수했고. 오고가는 이동시간이 상당히 소모되었다곤 해도 이게 고작 3개월여 사이에 한 일이라니. 이래저래 맨땅에 헤딩하듯 고생을 해서 그렇지 결과적으로 보면 나 너무 유능한거 아냐?'
사실 잘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아주 말도 안되는 일을 잘도 해왔다. 맨 처음의 목표였던 폭풍의 지팡이만 해도 정말 어처구니 없지 않은가? 한 나라의 왕실에 잠입해 특정한 물건만 쏙 훔쳐내오라니 이거 내가 무슨 전설의 괴도도 아니고. 대지의 눈 역시 최초엔 왕족인 철통같은 보안으로 보호받는 저택에서 기거하는 알 유세프가 가지고 있는 물건으로 알고 있었던 데다가, 이번의 목표였던 창염의 검 역시 한 나라의 왕세자가 지닌 애병이었다. 이거 순 말도 안되는 물건의 탈환을 명령함에도 시키는 족족 아무 실패없이 잘도 달성해오니... 새삼 미리안이 자신을 좋아하는 이유도 알만했다.
'뭐... 나름 운이 따라주기도 했었지만 참 용케도 해냈었구만.'
폭풍의 지팡이때는 정보상을 찾아 비싼돈을 내고 산 정보로 해안 절벽의 지하통로를 거슬러 올라가고, 레오노르 공주를 만나 지팡이를 받는 조건으로 여느 대귀족의 암살을 대행해주기도 하는등... 그야말로 별짓을 다 했었다. 허나 그 다음 목표인 대지의 눈은 더 황당했었다.
'강제로 팔자에도 없는 여자 행세를 하게 만들고 말야.'
음... 이건 다시 생각해봐도 진짜 굴욕이다 굴욕. 크윽. 아무리 게임이라지만 잘도 그렇게 여자로 변해 팔랑팔랑한 치마 같은걸 입고 다녔구나. 그렇게 아라파에 가는길에 이전에 구해줬었던 창녀 셀린과 우연히 다시 만나고, 여객선을 습격해온 해적들 때문에 르마쿠르 자매와도 또 다시 얽히게 되고...
'그리고 정작 아라파에 도착해서 무희로 신분을 위장하기까지 했는데... 막상 보니 알 유세프라는 인물은 가상의 존재였고 진짜 실체인 알 유세피나는... 여자의 몸에 남자의 막대가 달린 후타나리라니. 무슨 이런 미친경우가 다 있는지 원.'
게다가 그녀가 가지고 있어야할 대지의 눈은 사실 사카르라는 도적단이 훔쳐내었다는 속터지는 상황. 자신의 시덥잖은 잔꾀에 생각이 짧은 라나가 덜컥 걸려준 덕에 어찌저찌 사카르를 찾았고, 그들의 해묵은 은원을 이용해 하디카를 그야말로 발칵 뒤집어 엎고 그 상황을 이용해 알 유세피나의 왕위 찬탈도 용케 성공시켰었다.
'...맞다. 그러고보니 알 유세피나도 임신시켰지. 아니 이건... 그럴 생각이 있던건 아니라 성별이 바뀌는동안 임신 기능이 리셋되느라 제멋대로 ON으로 되어있어서 그런거였지만.'
아무튼 그 이후엔 라케르투스 족 피터슨의 수첩에서 찾은 정보를 따라 중간에 비더하임을 지났었다. 황량한 황무지가 끝도 없이 펼쳐져있던 척박한 땅. 하지만 그곳에서 굉장한 무구를 두 가지나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어깨보호대 에스카마도와 건틀렛 플라메우스.
'게다가 정말 뜬금없이 아이린이라는 유부녀와 팔자에도 없던 불륜도 저질러보고 말이야. 거 참. 다른건 몰라도 아이린의 진공 펠라만큼은 정말 끝내줬는데. 그렇게 입을 잘 쓰는 여자는 처음이었어.'
모처럼 아이린을 다시 떠올려보자니 아랫도리가 묵직해지는 기분이었다. 셀린하고 케이트에게도 꼭 그런 기술을 가르쳤으면 좋겠는데... 하지만 어떻게 가르치면 될까? 직접 시범을 보일수도 없는거고. 그런쪽의 기술을 가르치고 싶다면야, 어느정도 규모가 있는 창관에 가면 막 창녀일을 시작한 초심자들을 상대로 섹스에 관한 테크닉을 지도해주는 기교사들이 있기도 하다. 잠시 으음 하고 궁리하다 이내 절레절레 고개를 젓는 진석.
'에이 뭐 애들 자주 입에 물려주다보면 자연히 늘겠지. 거 뭐라고 그런걸 가르쳐? 별 쓸데없는 생각을.'
그러고보니 아이린 이외에도 파나히라고 거인족 소녀도 만났었는데 지금쯤이면 내 소개장을 가지고 아라파에 도착했겠지? 그러나 지금 생각해도 왜 그냥 그렇게 보내줬는지 모르겠다. 솔직히 한 번쯤은 손을 대어도 됐을텐데.
'하지만 파나히는 거인족 기준으로 미성년에다가... 아무것도 걸지 않고 하는 승부에서는 승자가 패자의 목숨을 갖는 거인족의 관습이 있다나 뭐라나. 그걸 모르고 이긴데다 되려 치료하고 돌봐주기까지. 그래서 어쩌다보니 파나히는 이쪽을 존중하는 태도를 보여서... 막상 손을 대기 좀 껄끄러운 상황이기도 했고. 그러니 내심 우쭐해져선 어른행세 해보겠답시고 말과 여비도 내어주고 소개장 같은것까지 써줘버렸네.'
아무튼 자신의 배려대로 파나히가 전 사카르의 두령이자 현 재무차관 겸 상담역에 오른 론소를 통해 알 유세피나의 곁에 머물게 되고, 앞으로 몇 년정도 무탈히 성장한다면... 아라파의 여왕 알 유세피나를 철벽처럼 지키는 강력한 호위무사가 되리라. 거인족은 그 거대한 육체만으로도 평범한 인간과는 비교가 불가능한 전력이었으니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해는 뉘엿뉘엿 산등성이로 넘어가고 있었고, 저 멀리엔 오늘 묵어갈 목표지인 번화한 마을이 보였다. 진석은 가볍게 기지개를 켜곤 고삐를 휘둘러 마차의 속력을 좀 더 내었다. 하루 종일 앉아서 마차만 몰았더니 가상현실임에도 엉덩이와 허리가 다 뻑적지근한 기분이었다. 사실 하루종일 멍하니 앉아 마차만 몬다니, 그 얼마나 지루한 일인가? 그나마 승차칸에 탄 셀린과 케이트는 책을 읽는다거나 서로 수다를 떨거나, 간간히 낮잠을 자며 그런대로 보내는 듯 했다. 진석은 어서 마을로 들어가 여관방을 잡은다음 식사와 목욕을 하고 푹신한 침대 위에서 귀여운 두 노예와 뒹굴고 싶었다. 매일 저녁 두 노예를 안는게 이 지루한 여행길의 유일한 낙이었으니까.
그런식으로 며칠간에 걸쳐 평범한 여행자들처럼 이동한 진석 일행. 어느덧 옐 프람의 수도 옐 프라나에까지 도착했다. 옐 프라나까지 오며 공통적이었던 것은, 어느정도 규모가 있는 도시라면 통행세나 주세, 소비세 같은 여러 종류의 간접세를 꽤나 걷고있다는 것이었다. 특히 상점에서 필요한 물건을 구매하다 느꼈었는데, 물가가 올린스턴 왕국보다 은근히 높다는 것이었다. 한 번은 가게 주인과 잠시 이야기를 하다보니 그렇지 않아도 최근 유통세도 추가로 신설되어 장사하는 입장에서도 세부담이 꽤 늘어났다는 말을 했었다. 처음엔 상인이 왠 허튼소리를 하는 줄 알았는데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이야기를 듣다보니 사실이었다.
국민이 아닌 외지인들에겐 파격적으로 높은 통행세를 걷긴했지만, 그래도 자국민들을 대상으로 한 세금이라는건 그렇게 고무줄처럼 마구 늘릴 수 있는게 아니므로... 여러가지 간접세를 신설했다곤 해도 그래도 어디까지나 상식적인 선에서 세율을 메긴 모양이었다. 도시 한 곳의 신설세만 놓고 본다면 뭐 그렇게까지 큰 액수라고 할 순 없겠지만, 옐 프람 전국의 도시를 놓고 모아보면 상당한 액수일터. 좌우지간 시민들과 상인들은 갑작스레 여러가지로 늘어난 세금들에 당연히 불만을 품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옐 프람 왕실측에선 일시적인 재정압박을 해소하기 위한 극히 한시적 조세 조치라고 공표한데다가, 옐 프람 전역에 널려있는 디에스교의 사원들측에서도 시민으로서 납세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 궁극적으론 평화롭게 신을 따르는 일과도 귀결된다며 적극적으로 편을 들어주고 있었으니... 대놓고 불만을 토로할 자는 없는 모양이었다.
'이 나라의 국고와 디에스교의 재원은 별개라고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구만. 니돈이 내돈이라 이거인가. 아니 그래서, 이놈들 수개월째 이렇게 따로 돈을 더 걷어다 대체 어디다 쓰고 있는건데?'
뭐 그거야 알 수 없었다. 옐 프라나까지 오며 본 바로는 딱히 징병이나 모병을 하는 전쟁 준비의 징후는 보이지 않았다. 그럼 대체 그 돈은 어디에 쓰고있는거란 말인가? 대외적으로 드러나지 않을 내부적인곳에 쓰는건가? 설마 교단이나 왕실의 누군가가 흥청망청 허튼짓을 하고 낭비하느라 그거 메꾸려고 걷는건 아니겠지. 진석은 그런생각을 하며 마차를 옐 프라나의 북쪽 성문 근처까지 몰아왔다. 통행인들을 검문하며 성문을 경비하던 경비대 중 일부가 진석의 마차를 발견하곤 이쪽으로 다가왔다.
"마차 정지. 여행자입니까?"
젊은데다 어딘가 빠릿해보이는 느낌의 청년 경비병. 손에 쥔 창을 어깨에 기대든채 진석에게 다가오며 질문했다. 진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돈 주머니에 손을 뻗었다.
"네. 통행세 내야하죠?"
이미 다른 도시들을 지나면서도 몇번이나 있었던 일. 익숙하게 은화 세 닢을 꺼내어 내미려는 진석. 하지만 경비병은 돈을 받아드는 대신 승차칸으로 다가가 문을 열어 안쪽의 인원을 확인해 보고, 짐칸을 열어 그 안까지 한 번 둘러보고 나서야 진석에게 다시 돌아왔다.
"뒤쪽 여자 두 분까지 합쳐서 셋. 은화 세닢입니다."
짐칸에 실린 물건들에 대한 말은 없는걸 보니 그냥 절차상 열어본걸까? 아니 하긴 뭐, 그냥 열어봤자 딱히 트집잡힐만한 물건이 보이진 않을터. 짐가방과 약가방, 그리고 식료 약간과 천으로 둘둘 말아둔 창염의 검 정도였으니. 대량의 약이나 3천닢이나 되는 금화는 의심을 부를 수 있을만한 물건이었지만 가방안에 들어있었으니 가방을 일일이 열어보지 않는 한은 그저 지극히 평범해 보일 짐일터. 진석은 손에 미리 쥐고 있던 은화들을 내밀었다.
"자아 여기."
"음. 은화 세닢 받았습니다. 통과하셔도 좋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길을 열어주는 경비병. 젊어서 그런걸까, 아니면 훈련이 잘 되어 있는걸까. 어째 고지식하고 융통성 없다는 느낌이었다.
'아니 여태까지 돌아다닌 대부분의 도시들은 통행세도 안 걷었거니와... 특별히 수상한 행색이라도 한 게 아니라면 기본적으론 그냥 다 무사통과였는데. 여긴 뭐 흉내만 내는 수준이긴 하지만 그래도 검문 비슷한걸 하고 있고...'
처음 에노페스시에서 통행세를 낼때만 해도 그러려니 했었는데, 이쯤되니 뭔가 묘한 낌새가 느껴졌다. 그래봐야 이들은 말단 경비병 아니던가? 이런 말단들이 아무 이유없이 저렇게 열심히 일할리가 없었다. 확언할 순 없지만, 분명 옐 프람 왕실이나 교단 상층부에서 무언가 어떤 일을 추진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을터. 그정도 추측은 진석도 어렵잖게 할 수 있었다.
'...한 번 파볼까?'
도시 안으로 마차를 몰고 들어가며 진석은 좀 엉뚱한 궁리를 했다. 토너먼트에서 도노반과 싸우긴 했지만 그건 말 그대로 토너먼트에서의 대전일 뿐이었고, 그의 부하들에게 공격을 받기도 했었지만 어차피 놈들은 닥치는대로 다 습격해 죽이던 상황이었으니 딱히 그런 일로 원한이나 앙심을 품은건 아니었다. 뭐 도노반이 마정석 폭탄을 터트려 죽을뻔 하긴 했지만서도 이미 죽은 상대고 다 지난일이었다. 아무튼 옐 프람 왕실이나 디에스교와는 자신이 얽힐 이유도 없고 조사를 할만한 목적도 없었지만... 이대로 그냥 순순히 메디니아까지 돌아가자니 왠지 그건 싫었다. 좀 더 자유롭게 자신이 하고싶은대로 게임을 즐기고 싶었달까.
'상황상 미리안의 명령을 따르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내가 다른 수호자들처럼 진심으로 걔한테 복종하고 있는것도 아니고. 어차피 메디니아의 국경까진 닷새나 엿새정도 거리밖에 안 남았으니... 여기서 뭐 잠깐 더 시간을 보낸다고 큰 일이 생기거나 하진 않겠지.'
아니. 어쩌면 자신은 그냥 교단으로 빨리 돌아가기 싫은 핑계거리를 만들어내고 있는건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직까지도 미리안에 대해 어떻게 대처할지를 결정하지 못했었으니까. 하지만 하나 확실한것은, 자신이 열심히 일하면 일 할 수록 허신의 강림은 앞당겨지고 게임이 끝날 순간도 그만큼 빨라진다는것. 그래서 결정했다. 진석은 한 이삼일 정도쯤 옐 프라나에서 머무르며 전반적인 분위기를 한 번 살펴볼 생각이었다. 딱히 명확한 목적이 있는것도 아니고, 현재로선 노예 두 명 달고 다니는 일개 떠돌이 신분. 그런 처지로 한 나라 상층부에 대해 파고들려고 해도 그게 얼마나 가능하겠냐만...
'다른 나라에도 단신으로 가서 막 왕실도 털고 쿠테타도 잘만 일으켰었는데 뭘.'
그리고 다른때처럼 장황하게 왕실에 잠입한다거나 그럴것도 아니다. 그냥 왜 각종 간접세를 신설해가며 재원을 마련하는건지, 그리고 그걸 어디에 쓰고 있는지 정도만 알면 충분했다. 어디까지나 단순한 호기심 차원이랄까? 괜히 귀찮거나 위험한 일에 관여되고 싶진 않으니 뭔가 일이 골치 아플 기미가 보인다 싶으면 바로 떠나면 그만이다.
'그리고 겸사겸사 보급도 하고... 경매장 있나 경매장? 당연히 있겠지. 안 그래도 요새 전투 할때마다 장비 덕을 톡톡히 보고 있으니 뭔가 쓸만한게 있다면 좀 사야겠어.'
그러고보니 르마쿠르 자매의 언니인 지젤에게 무구를 부탁하기도 했었는데... 그건 완성되었을까? 어쨌건 페레나시에도 한 번 들러보긴 해야 할텐데.
'아... 그런데 그 전에 제이스와 아르데나에게도 셀린과 케이트를 소개하긴 해야할텐데. 엘리야가 괜찮겠냐고 물어볼땐 분명 그까짓거 상관없다는식으로 호기롭게 대답했지만 막상 생각해보니 괜히 걱정되네.'
제이스는 참 시작부터 안 좋게 얽힌 상대긴 하다. 처음엔 에나의 죽음때문에 묘한 복수심 같은걸 품고 있어서 이래저래 집요하게 괴롭혔었다. 사정 안봐주고 막 두들겨 패며 강간도 했었고. 그러나 자신이 제이스를 역으로 꾀어넘긴 후 함께 다니면서 틈나는대로 섹스를 요구했고 그러다보니 몸정이랄까 떡정이랄까. 정말로 어쩌다보니 은근히 사이가 좋아져, 에나의 복수라는 최초의 목적은 흐지부지 해져버렸고 미리안의 화술에 넘어가 어찌저찌 교단의 목적을 따르는 신세가 되었다. 그렇게 한동안을 같이 다니며 거의 본처 행세를 하던 제이스였는데 이 두 노예를 보면... 노발대발 하겠지?
'아르데나는... 음...'
2년 뒤에 안아주겠다느니 하는식으로 얼렁뚱땅 넘겨뒀었는데 역시 모르겠다. 뭐 내 말은 잘 들으니 적당히 말재간으로 에둘러 넘기면 되겠지. 그런데 지젤과 아네트, 이 두 르마쿠르 자매는 어떨까?
'얘들이야 뭐 워낙 방탕하다보니 내가 노예 몇 명 데리고 다녀봐야 별 신경 안쓸것 같은데? 되려 좋아고 같이 하자며 엉겨올지도...'
잠시 르마쿠르 자매와 두 노예를 합쳐 네 명을 상대하는 상상을 해보는 진석. 이종족의 미녀 네 명과 한꺼번에 잠자리를 할 수 있다니. 이야 이거 완전 천국 아니냐?
'...처, 천국은 개뿔! 그러다 죽는다 죽어. 어휴.'
상상만으로도 무섭다. 그냥 상대하기도 힘든 르마쿠르 자매인데 만약 그 꼴을 보고 두 노예가 자극받아 지지 않겠다고 같이 덤벼들면... 어우야. 끔찍하다.
'그렇지 않아도 요 며칠새 셀린과 케이트를 매일밤 몇번씩이나 안아줬더니 얘들이 제법 맛을 들였는지 점점 더 적극적으로 나오고 있어서 슬슬 페이스 조절을 할까도 생각중이구만.'
이래저래 시덥잖은 생각을 한 진석은 마차를 몰아 번화한 중심가로 나아갔다. 옐 프라나는 내륙 안쪽에 자리잡고 있지만 그래도 한 나라의 수도이다보니 지금까지 거쳐온 다른 도시들과는 달리 확실히 번성해 있었다. 거의 모든 국민들이 디에스교의 교리를 따르는 종교적인 도시라서 그런가 거리 풍경부터가 눈에 띄는 쓰레기 없이 굉장히 깔끔했고, 시민들의 얼굴이나 옷차림새도 꽤나 괜찮아 보였다. 일단 겉으로 보이는 도시의 분위기만큼은 상당히 좋고 안정적이었다. 하지만 이따금 시민들 사이에 섞여, 디에스교의 문장이 박힌 제복을 입은 위압적인 느낌의 사내들이 2인 1조로 돌아다니고 있었다.
'뭐야 저놈들은?'
원형을 바탕으로 그 가운데에 역삼각형이 들어간 디에스교의 문장. 왼쪽 가슴팍에 그 문장이 새겨진 흰색 제복을 입은 무장한 남자들. 거리를 천천히 순찰하듯 돌아다니고 있는 그 모습은 흡사 경찰을 떠올리게 했다.
'...거참 별꼴이군. 이거, 교단측에서 도시의 치안에도 관여하고 있는건까?'
종교가 이렇게까지 내정에 간섭해도 되는걸까? 이런 모습만 봐도 옐 프람 성국은 확실히 여태까지 돌아다닌 여러 나라들과는 분명 뭔가가 달랐다. 진석은 그들을 흘깃흘깃 바라보며 대로를 타고 마차를 천천히 몰았다. 저쪽 멀리, 눈에 띄는 큰 석조 건물이 하나 세워져있었다. 창문이 일정하게 쭈욱 나있는것을 보아하니 분명 호텔이리라. 진석은 간만에 여관이 아닌 호텔에서 호사스럽게 묵을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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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글 올라가는 시간이 점점 더 늦어지는군요. OT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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