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베라 - 부회의 방랑자-134화 (134/155)

< --   - 11.   -- >         * 134화 *

밤의 거리는 지극히 조용했다. 어둠속에서 낮선 길을 여기저기 해메며 달려나가는 진석. 좁은 골목길을 통해 빠져나갈땐 벽에 자신의 발걸음 소리가 반사되어 시끄럽게 울려퍼졌다. 어째 기분 나쁠 정도의 고요함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폭발음 같은게 울렸으니 어느정도는 사람들이 나와볼법도 한데... 이건 아무리 그래도 너무 조용한걸.'

심야라 한들 엄연히 한 나라의 수도인데 이렇게까지 조용하다니? 낮의 활기가 거짓말 같았다. 디에스교의 문장이 들어간 제복을 입은 자들이 새벽에도 계속 순찰을 돌던것과 시민들이 전혀 보이지 않는게 무슨 관련이 있는걸까? 군주 플레이를 할때 옐 프람 성국과 전쟁해서 승리하고 군대를 주둔시켜 잔존 세력을 완전히 뭉개버린 적은 있었지만, 그렇다고 디에스교의 교리나 규칙에 대해 아는것은 전혀없었다. 그래서 이러한 고요함이 어쩐지 기분나쁘게 느껴졌다. 진석은 묵묵히 밤의 어둠을 계속 달려나갔다. 그리고 한참을 더 달려나가고 나서야 저쪽 방향에서 흰색 제복을 입은자들 몇몇이 한쪽으로 달려나가는것을 발견했다.

'오, 저쪽인가.'

그들이 가는 방향으로 한참 뒤따라간 진석. 그러나 곧 대로가 나왔기에 우선 골목의 어둠속에 몸을 감추고 주변을 살폈다. 한참을 정신없이 따라와서 몰랐는데 이제보니 어느새 도시의 서벽쪽 끄트머리 부근까지 와있었다. 주변엔 창고로 보이는 큼직한 건물들이 많았는데, 한쪽의 창고 건물 사이로 제복을 입은자들과 창을 든 경비병들이 몰려들어가고 있었다.

'뭔 일이야 대체?'

가까이 가보고 싶었지만 주변에 인원이 너무 많았다. 게다가 대로를 통해 디에스교의 흰색 제복을 입은 자들과 경비병들이 계속 증원해오는게 보였다.

'옥상으로 올라가서 볼까?'

몸을 숨기고 있는 건물의 위를 올려다보자니... 3층이다. 2층까지라면 벽을 딛고 손쉽게 라파가로 올라갈만한데, 한 번에 3층은 조금 무리일지도. 그래도 튀어나온 창문턱이 있으니 잡거나 잘 밟고 뛰면 어떻게든 되려나? 한 발 물러나며 벽을 딛고 건물 위로 올라갈 자세를 취하는 진석. 그리고 막 라파가를 쓰려고 하는 순간, 다시 한 번 폭음이 들려왔다. 쿠웅!

'아씨 깜짝이야.'

깜짝 놀라서 발을 헛딛느라 벽에 얼굴 박을뻔했다. 이번에 들려온 폭음은 굉장히 가까웠다. 미약하게나마 땅이 울리는게 느껴졌을 정도니까. 위치는 바로 저 창고건물들 너머였다. 수많은 인원들이 제각기 뭐라뭐라 소리를 내지르는지 요란스런 소란이 들려왔다.

'...안되겠다. 도대체 뭐가 벌어진건지 궁금해서 확인해 봐야겠어!'

진석은 투명화를 걸고 대로로 달려나갔다. 여전히 저 멀리에서 부터 제복의 사내들이나 경비병들이 몰려오고 있었지만 투명화를 걸었으니 괜찮으리라. 3분 뿐인 제한 시간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 진석은 후다닥 창고 건물들 너머로 달려가봤다. 막 코너를 돌아서자, 다시 한 번 쿠웅 하는 폭음과 더불어 눈앞에서 섬광이 번득였다.

'으윽?!'

자신이 코너를 돌아나오는것과 동시에 저쪽 맞은편에 있는 창고건물 벽이 폭발로 와르르 무너지며 그 부근에 서있던 여러명이 나가떨어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벽을 무너트리는 폭발을 보자마자 진석의 머리에 떠오른것은 올린스턴 왕국에서 자폭했던 도노반이 사용한 마정석 폭탄이었다. 하지만 지금 벽을 무너트린 저 폭발은... 그만한 위력은 아니었다. 폭발이 좀 더 국소적으로 한정적인 범위내에서 일어나는게 분명 그 성질이 다른것이었다. 폭탄이 아니라 마법같았달까? 그렇게 벽이 무너지고 포위망이 뒤로 물러난 뒤 흙먼지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것은, 진석에게도 익숙한 얼굴들이었다.

'...크, 클립튼 일행이잖아?! 놈들이 대체 왜 여기에?'

화들짝 놀라는 진석. 선두엔 기사인 클립튼과 그의 친구이자 마법사인 리들리가 서 있었고, 그 뒤로 다른 인원들의 얼굴이 보였다. 솜브라 교단의 일원인 모데로와 에이미, 비엔족의 궁수인 스텔라. 그리고 저번엔 보지 못했던 왠 중년의 남자도 한 명 섞여있었는데... 그의 품엔 왠 어린 여자아이가 축 늘어진채 안겨있었다. 기껏 예닐곱살이나 되었을까? 그들은 주변을 경계하며 건물 밖으로 빠져나왔다.

'아니 저 녀석들 대체 여기서 뭘하고 있는거야? 그란델에 마수를 뻗친 헤세스모데우스 교단을 상대하려던게 아니었어? 어째서 옐 프람에 와서 이러고 있는거지?'

주변의 길목을 가득 메운 제복의 남자들과 경비병들은 클립튼 일행이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자, 제각기 무기를 앞세운채 와아아 소리지르며 그들에게 몰려들었다.

"교단의 시설을 습격한 부정한자들이다!

"죽여라!"

침착하게 어린 아이를 품에 안은 중년남을 중심으로 둥글게 모여서는 클립튼 일행. 클립튼과 모데로가 일행의 선두로 나서자, 리들리와 에이미가 동시에 뭔가의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렐름블론, 리트모 엘 플루마!"

"위고르의 코트! 레프리모의 부츠!"

클립튼과 모데로의 몸 위로 중첩되는 형형색색의 광휘들. 온몸 곳곳이 번쩍번쩍 빛나는것만 봐도 상당한 수준의 보조마법들과 온갖 축복을 받았다는것을 알 수 있었다. 자색의 검날을 지닌 롱소드를 빗겨드는 클립튼과 은빛의 기운이 서려있는 단검들을 역수로 쥐는 모데로. 모데로는 한발짝 앞으로 나서며 크게 외쳤다.

"사정 봐주지 않는다! 죽기 싫으면 비켜!"

하지만 클립튼 일행을 둘러싼 흰색 제복의 사내들과 경비병들은 들은체도 않고 몰아닥쳤다. 칫 하고 혀를 차며 양 팔을 교차시키는 모데로. 저 자세는 분명 몇 번이나 본 기억이 있었다.

"단사 데 라 무에르떼!

후와악! 그야말로 한 줄기 섬전이 되어 쏘아지는 모데로. 모데로는 한 덩어리가 되어 몰려드는 적들의 선두를 벼락처럼 강타했다. 파바바바박! 일순간에 전신에 검상을 입으며 나가떨어지는 십여명의 사내들. 모데로가 달려들어 단박에 십여명을 날려버리자 몰려들던 이들이 멈칫했으나, 이내 큰 기술을 발하고 잠시 멈춰선 모데로를 노리며 검을 휘두르거나 창날을 찔러왔다. 하지만 다음 순간 모데로의 뒤에서 클립튼이 교대하듯 뛰쳐나왔다!

"무익하게 베고 싶지 않으니 목숨을 부지하고 싶다면 물러서라!"

그렇게 외치며 단박에 한 합을 휘두르는 클립튼. 채채채챙! 모데로를 향하던 여러 무기들이 전부 허공으로 나가떨어졌다. 클립튼에 의해 무기를 놓친자들은 질겁하며 뒤로 물러섰지만, 아직도 많은 수가 명백한 적의를 드러내고 공격해왔다. 하지만 클립튼도 경고한 이상 절대로 봐주지 않겠다는듯 그들을 향해 맞서 검을 휘둘렀다. 그대로 검술 교본에 옮겨놓고 싶을 정도로 간결하고 절제된, 그야말로 이상적인 검격! 클립튼은 동선에 한치의 낭비도 없는 깔끔한 움직임으로 주변에 몰려든 상대들을 완벽하게 격퇴해갔다.

'비단 버프를 받아서만이 아니라... 저 녀석 진짜 강한것 같은데?'

클립튼에게 공격을 가한 자들은 무기를 채 한 번 제대로 휘둘러 보지도 못하고 순식간에 몸 여기저기를 두세군데씩 베여 바닥을 나뒹굴었다. 클립튼은 그래도 최소한의 손속은 두고 있는지 목숨에 지장이 생길부위를 베진 않았다. 뭐 어깨나 팔목, 종아리 같은 비치명적인 부위들이었달까. 그야말로 실력차가 어마어마해서 철저히 봐주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전투능력을 상실하기엔 충분했다. 그러나 개중에선 검상을 입고도 아득바득 끝까지 덤벼들려는 자들도 있었다. 허나 클립튼의 배후를 맡은 모데로가 그들의 안면이나 복부에 주먹이나 발차기를 꽂아넣어 가볍게 쓰러트렸다. 클립튼이 전면을 쓸고 나가며 순식간에 포위를 무너트렸고 모데로는 후위에서 그를 착실히 보조했다. 수많은 인원들이 모여있었지만 이 콤비의 상대가 될만한 자는 아무도 없었다.

"이놈들!"

"이야아아!"

그리고 클립튼과 모데로를 피해, 뒤쪽에 있던 나머지 인원들을 노리고 들이닥치는 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궁수 스텔라가 앞으로 나섰다. 허리춤에 메단 화살통에서 단숨에 화살 세대를 꺼내 시위에 메기는 그녀. 그리고 일말의 주저도 없이 단숨에 내쏘았다.

"흥, 꺼져!"

슈슈슉! 빠르게 쏘아져 미간 한가운데나 목덜미와 같은 급소에 정확히 꽂히는 화살들! 화살에 맞은 이들은 마치 걷다가 돌부리에라도 걸린양 그대로 바닥에 픽픽 거꾸러졌다. 그렇게 한 번 더 화살 세대을 재우고 즉각 발사해, 단 두 번의 사격만으로 단숨에 여섯명을 쓰러트린 스텔라.

'허... 진짜 잘 쏘는데?'

하지만 사격을 하는 짧은 새 나머지 인원들이 스텔라의 근처까지 다가왔다.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무기를 휘둘러오는 흰색 제복의 사내들. 스텔라는 대궁을 등에 메여있는 가죽활집에 재빨리 꽂아 넣더니, 화살통에서 화살을 두 대 꺼내어 양손에 하나씩 나눠 쥐었다. 그리고 육박해온 사내들의 간격안으로 되려 빠르게 파고들며 화살의 화살촉을 나이프 쓰듯 휘둘러 그들의 팔꿈치 안쪽을 베었다. 아악 하고 비명을 터트리며 무기를 놓치는 사내들. 스텔라는 경쾌한 몸놀림으로 몸을 빙글 회전시키며 화살촉을 그들의 옆구리에 박아넣고, 어윽 하며 신음하는 사내들의 턱에 힘찬 돌려차기와 엘보 블로우를 연이어 꽂아넣었다. 뻐억하는 경쾌한 타격음과 함께 바닥에 나가떨어지는 남자들.

"바람화살!"

뒤에 있던 마법사 리들리도 빠른 캐스팅과 연사가 가능한 초급 공격 마법을 사용해 나머지 사내들을 공격하거나 견제했다. 앞에선 클립튼과 모데로가 대다수의 제복의 사내들과 경비들을 쓰러트리지, 뒤쪽에선 스텔라와 리들리가 그 둘에게서 벗어난 상대들을 어렵잖게 무너트리니... 수십명이나 되는 인원들이 눈깜짝할 사이에 대부분 바닥에 뻗어있었다. 이래서야 이보다 몇배가 되는 숫자가 몰려온다고 해도 아무도 이들을 막을 수 있을것 같지 않았다.

'개개인 능력들도 상당한데 하나로 뭉쳐서 싸우니 보통이 아니군. 아, 아니. 이렇게 구경하면서 감탄할때가 아니지!'

그 잠깐 사이에 투명화의 잔여시간이 거의 다 되어가고 있었다! 이제 겨우 20여초나 남았을까? 진석은 허둥지둥 바닥에 쓰러진 사내들을 건너뛰어가며, 클립튼 일행이 빠져나왔었던 건물 뒤쪽으로 몸을 숨기고 투명화를 풀었다. 투명화의 잔여시간은 이제 겨우 십여초 남아있었다.

'아 젠장. 그거 구경한다고 멍청하게 서서 투명화를 낭비해버렸네. 그나저나... 이젠 어쩐다?'

슬쩍 고개를 옆으로 내밀어 보자니... 그새 포위한 인원을 싹 쓸어버린 클립튼 일행은 여자아이를 안아든 중년 사내를 지키며 자리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저 멀리, 대로쪽에서 사람들이 뛰어오는 발소리나 고함소리 따위의 외침이 들려오는걸 보니 여전히 증원이 오고 있는 모양이었지만 몇명씩 따로 와봐야 전부 각개격파나 당하리라.

'으그극, 젠장. 거 잘도 싸우고 도망치는구만. 하긴 뭐 이까짓 잔챙이들에게 당할 녀석들이 아니긴 하지만서도... 그나저나 이렇게 눈 앞에서 순순히 보내줘야 하나?'

하지만 지금 혼자서 저들에게 덤벼들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혹 덤빈다고 해봐야 또다시 저번같은 꼴이나 당할터. 게다가 상대들은 현재 클립튼과 모데로에게 온갖 보조마법을 걸어준 전투준비 만반의 상태고 자신은 여전히 혼자다. 만약... 지금 자신의 옆에 셀린과 케이트가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아니, 안돼. 셀린과 케이트 정도로는 잠깐 시간을 끄는 정도밖에 안될걸.'

셀린과 케이트로는 저 일행 중에서 아마 스텔라 하나 정도 겨우 상대할 수 있을까? 분하지만... 그냥 도망가는 꼴을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길 저쪽으로 사라지는 클립튼 일행의 모습을 끝까지 지켜본 진석도 건물 뒤에서 슬쩍 빠져나왔다.

'그나저나 어린 여자애를 안고 있던 그 중년남은 뭐야? 분명 저번엔 못 봤던 얼굴인데. 클립튼 일행이 여기서 여자아이를 구해내도록 그 남자를 도운걸까?'

고개를 돌려 벽이 다 무너져내린 창고 건물을 바라보는 진석. 외관이나 벽 너머로 보이는 일부만 보면 지극히 평범한 창고 같았지만... 그 안쪽에서 무언가가 보였다.

'한 번 들어가볼까.'

슬쩍 주변을 둘러보는 진석. 사방엔 시체나 부상자들이 즐비했다. 최초의 단사 데 라 무에르떼를 맞은 자들은 깔끔히 즉사했었고 스텔라의 화살을 맞았던 자들도 이미 절명해있었다. 그나마 살아남은 자들은 클립튼이 상대한 자들 뿐이었는데 그나마 기운이 있던 자들은 모데로가 두들겨 패서 기절시켰고, 정신이 붙어있는 자들은 제각기 고통스런 신음성을 내며 바닥에서 허우적대고 있는꼴들이 그야말로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기량 차이도 가늠하지 못하고 무작정 덤벼들었으니 저 모양이지. 하긴 뭐 그렇게 널부러져 배경역할이나 하는게 너희같은 엑스트라들 숙명 아니겠냐만. 좌우지간 저들 중에서 그림자속에 몸을 감춘 자신에게 신경을 쓰는 자는 분명 아무도 없을터. 진석은 슬쩍 무너진 창고 벽 안쪽으로 스며들듯 들어가보았다.

'여긴...'

창고 안엔 중갑으로 무장한 사내들 십여명이 쓰러져 있었고 더 안쪽으론 지하로 내려가는 문이 열려있는것이 보였다. 지하로부터 희미한 빛과 뭔가 타는지 매캐한 냄새와 더불어 연기가 몽실몽실 흘러나오는게, 저 아래에 분명 뭔가 있는 모양이었다.

'어차피 지금 나 혼자서 클립튼 일행을 따라잡거나 상대하는건 무리고, 이 안에 뭐가 있는지 확인해보면... 잘하면 놈들의 목적이나 차후의 행방을 파악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진석은 망설임 없이 문 안쪽으로 들어서 빠른 걸음으로 지하로 내려가보았다. 아래쪽엔 철판이 덧대어진 커다란 강화문이 있었는데, 무언가가 바로 앞에서 폭발했는지 문 뿐만 아니라 주변의 벽 일부까지 걸레짝이 되어 완전히 부서져 있었다.

'이 문짝을 마법으로 터트리고 안으로 진입했던걸까?'

너덜너덜해진 강화문을 지나 안쪽으로 들어선 진석. 내부는 뭔가의 연구를 하던 곳인지, 수많은 실험 기구 같은것들과 대량의 서류 따위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바닥엔 백색의 코트를 입은 연구원으로 보이는 자들이 십여명가량 쓰러져 죽어있었고 여기저기서 서류더미가 불타고 있었다.

'뭐 하는 곳이야 여긴?'

실험 기구들은 그 상당수가 박살나 망가져 있었고 서류들도 누군가 일부러 한데모아 불태운 것 같았다. 이거 분명 클립튼 일행이 한 짓이겠지? 진석은 바닥에 쓰러진 연구원들의 시체를 지나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가봤다. 짧은 통로를 지나다보니 도중에 창고가 눈에 들어왔다. 크고 작은 대량의 나무 상자나 오크통이 쌓여있었는데 이곳 역시 불이 질러져 활활 타고있는 참이었었다.

'참 신나게도 저질러 놨구만 이 자식들.'

창고를 지나쳐 통로 끝에 다다르니 또 다른 커다란 문이 보였다. 그리고 문 앞엔 무장한 사내 둘이 바닥에 쓰러져 죽어있었다. 둘 다 미간 한복판에 화살을 박고 있는것이, 틀림없이 궁수 스텔라의 솜씨인듯 했다. 시체를 지나쳐 안으로 들어서니... 기묘한 시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게... 대체 뭐야?"

배양 시설. 안쪽의 풍경을 본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단어였다. 사람 한 명이 들어갈만한 커다란 원통형의 수조 수십여개가 방안 가득 늘어서 있었고, 각 수조 옆엔 계기판이나 레버가 달린 기계 장치, 그리고 수조와 연결된 호스들 따위가 잔뜩 늘어져 있었다.

"도대체..."

희푸르고 말간 액체가 들어찬 수조들. 그 안엔 사람들이 들어있었다. 성인 남성, 성인 여성. 노인, 그리고 아이들. 남녀노소 가리지 않는데다가 발달중인 태아같은것으로 보이는 작은 살덩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수조들과 그 수조에 연결된 장치들의 대부분은 깨지거나 부숴져 파손되어 있었으며 안에 들어있는 사람들 역시 그냥 축 늘어져 있는게... 이미 다들 숨이 붙어있지 않은듯 했다. 바닥이 수조에서 흘러나온 액체로 흥건히 젖어 있는게 걸을때마다 철벅거리는 소리가 났다. 진석은 방안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이 자식들... 여기서 무슨 연구를 했던거야?"

확실한건 디에스교가 분명 뭔가 심각한 실험을 실시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한 교단임에도 각기 파벌이 갈려 지향하는 노선이 서로 다른 디에스교니, 이것이 디에스교의 실체다! 라고 단언 할 순 없을테지만... 파벌이 다르다고 해도 어쨌든 이들 역시 디에스교. 즉 교단 전체로 보자면 책임이 없다고 할 순 없는것이었다.

"...뭔진 몰라도 클립튼 패거리가 왜 여기 처들어왔고 뭘 했었는진 대충 짐작이 가는구만. 거참 오지랖도 넓으셔."

신을 따른다는 신의 종놈들이 괴이쩍은 실험을 하니 그걸 파훼하고자 잠입했던게 아닐까. 이놈들... 정말로 정의의 용사 흉내라도 내고 다니는거냐? 하긴. 리들리가 자기들 스스로를 일컬어 불의를 타도하는 일행이라고 했었지. 참 어처구니가 없다. 그래서 결국 여기서 무슨 실험을 했는지, 또 구해간 아이가 누구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제 자신이 이곳에서 볼일은 없었다. 놈들이 용사놀이에 흠뻑 빠져있다는걸 알 수 있었던게 유일한 수확이었다.

'그래. 그렇게 열심히 세상 사람들 돕고 다니던가. 그 와중에 나는 나대로 일을 진행할테니까.'

발걸음을 돌려 방에서 빠져나가려고 하는 진석. 그런데 저 안쪽에서 철퍽하고 뭔가 무거운게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음?"

그냥 부숴지고 깨진 수조나 장치의 조각이 바닥에 떨어진건가 했는데... 계속 철벅철벅하고 뭔가가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막 방에서 빠져나가려던 진석은 뭔가 싶어 발길을 돌려 안쪽으로 다시 되돌아갔다.

"분명 별거 없었는데? 뭐가... 엇?"

여자아이. 아까 클립튼 일행에 끼여있던 중년 남자가 품에 안고 구해갔던 여자아이와 비슷한 또래의 어린 아이였다. 일곱에서 여덟살이나 먹었으려나? 알몸뚱이의 소녀는 깨어진 수조에서 막 빠져나왔는지 질척하게 젖은 바닥에서 막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실험체중에 생존자가 더 있었나?'

하지만 잠시 지켜보자니 왠지 그 동작이 굉장히 뻣뻣하고 관절이 로봇마냥 삐걱거린다는 느낌이 드는게... 뭔가가 좀 이상했다. 어째 산사람 같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진석은 젖은 머리카락을 늘어트리고 고개를 바닥에 떨구고 있는 소녀에게 말을 걸어보았다.

"어이 꼬마야. 너 괜찮니?"

"......"

말없이 고개를 들어 진석을 바라보는 소녀. 핏기없이 창백한 피부. 생기나 온기가 한 점도 느껴지지 않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두 눈동자의 안쪽만은 기묘한 황금색 색채로 빛나고 있었다. 소녀는 진석을 그냥 바라보는것이 아니라... 적의를 담아 노려보고 있었다!

"캬아아아아!"

자기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진석을 향해 괴성을 지르는 소녀. 그러자 허공에서 퍼퍼펑 하고 마치 풍선이 터지는 것 같은 소리가 나며 무형의 충격파가 발생해 진석의 몸뚱아리를 강타했다. 그대로 쭈욱 뒤로 밀려나는 진석.

"크윽?! 무, 무슨!"

충격파가 흑철판이 덧대어진 가죽 갑옷 위쪽에 명중한 덕일까. 위력은 생각보다 그닥 강하지 않았지만 갑작스런 공격이라 깜짝 놀랬다. 지이이익 하고 뒤로 밀려나면서도 바닥을 짚으며 자세를 추스리는 진석.

"야! 이게 무슨 짓이야?!"

"아아아! 아아아아악!"

하지만 소녀는 진석의 말따윈 듣지 않은채 양 손으로 머리를 감싸쥐고 비틀거리며 괴로워하고 있었다. 정말로 고통스러움이 뚝뚝 묻어나는 처참한 절규였다.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이해 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말로 어찌 해 볼 상황이 아니라는것은 분명했다.

'젠장... 이게 대체 뭐야? 그냥 죽여야하나?'

이성을 찾지 못하고 자신에게 방금과 같은 공격을 계속 해온다면 당연히 죽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어린 여자아이인데 죽여야 한다니, 심정적으로 대단히 껄끄러웠다. 혀를 차면서도 자세를 낮추고 조심스레 경계하는 진석.

"빌어먹을. 야 꼬마야, 정신 좀 차려봐. 가능하면 도와줄테니까. 응?"

진석이 조심스레 말을 걸자 재차 이쪽을 노려보는 소녀. 그 두 눈동자는 또다시 불길한 황금색 빛을 발했다.

"꺄아아아아!"

지이잉. 소녀의 허공 앞에서 지름 1미터 가량 되는 황금빛의 동심원이 생겨났다. 그 빛이 그려낸 동심원 한 가운데의 문장은... 원 안에 역삼각형이 들어간 눈에 익은 문장. 바로 디에스교의 표식이었다.

'허?'

츄와아앗! 동심원에선 그대로 지름 1미터짜리의 황금빛 빛줄기가 쏘아져 나왔다. 거대한 빛의 줄기가 쏘아지고 그 기세에 바닥에 깔려있던 수조 속 액체가 촤아아악 흩날리며... 그대로 수증기가 되어 증발한다?! 휘릭하고 지체없이 옆으로 빠른 덤블링을 하며 자리를 회피하는 진석. 그리고 그와 동시에 진석이 서있던 공간으로 황금색 빛줄기가 통과했다. 아주 조금만 더 머뭇거렸거나 피하는 동작이 늦었다면 그대로 맞았으리라!

"큭!"

바로 옆을 스쳐지나가는 그 빛줄기에선 피부가 후끈해질 정도의 열량과 거대한 에너지가 느껴졌다. 그대로 쏘아져 저 뒤쪽의 벽에 명중하는 빛의 줄기. 기세만으로는 뭔가 요란한 폭음이라도 나지 않을까 했는데 그냥 우르릉 하고 주변을 한 번 진동시키고 마는것이... 빛줄기가 지나간 후 뒤쪽의 벽을 돌아보자니, 그곳엔 지름 1미터짜리의 시커먼 구멍이 뚫려있었다. 도대체 어떤 종류의 힘이 담겨있었던건진 몰라도 소녀가 쏘아낸 그 빛의 줄기는 그대로 두터운 돌벽을 녹이며 뚫고 지나간 모양이었다. 시커멓게 탄 돌벽의 구멍에선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무슨 이딴게..."

다시 소녀를 돌아보자니 그녀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이마를 움켜쥔채 으으 신음하며 고통스러워 하고 있었다. 진석은 허리 뒤춤에 꽂혀있던 투척용 단검 네자루 중 두자루를 꺼내어 양 손에 쥐었다.

'안되겠다. 뭔 말만 걸면 공격을 해오니... 용서해라!'

손 안에서 단검을 휘리릭 돌려 손끝으로 검날을 쥐는 진석. 그리고 양 팔을 뒤로 한 껏 당긴 다음, 허리를 튕기며 반동을 주어 온힘을 다해 단검을 집어던졌다. 피리릭 하는 파공음을 내며 화살만큼 빠르게 날아가는 단검들! 단검은 소녀의 가슴팍과 복부에 퍼퍽 꽂혀들어갔다. 단검을 맞은 충격에 휘청하며 뒤쪽으로 한껏 허리를 꺾는 소녀. 그대로 동작이 멈추는게 단숨에 절명한건가 싶었지만... 다음 순간, 소녀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허리를 원래대로 되돌리더니 또 다시 삐걱거리는 동작으로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어랍쇼?'

어린아이의 몸이다. 게다가 칼날이 거의 손잡이 부분까지 전부 박혀 들어갈 정도인데 아무렇지 않은 듯 일어날 수 있다니? 평범한 상대라면 이거 한 방으로 절명할만한 일격인데? 그러나 단검에 맞은 소녀의 복부에선 피 대신 정체를 알 수 없는 진한 푸른색 액체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저거... 큭. 예상은 했었건만 처음부터 산 사람이 아니었구나! 에이!'

이래서야 손속에 미련을 두는것 따위 바보짓이다! 남은 투척용 단검 두자루를 꺼내어 잽싸게 던진 뒤, 뒤를 이어 화염화살도 발사하는 진석. 먼저 날아간 단검은 소녀의 가슴과 오른팔에 각기 꽂혀들어갔다. 단검을 맞는 충격에 퍽퍽 하고 몸을 휘청이는 소녀. 하지만 다음 순간 치켜뜨는 소녀의 두 눈 틈새론... 또 다시 황금색의 광휘가 빛나고 있었다!

"아아아아아!"

퍼퍼퍼퍼펑! 소녀를 중심으로 무형의 충격파가 퍼져나가며 주변에 있던 수조들이 폭탄에라도 맞은듯 차례대로 펑펑 터져나갔다! 수조 파편이 사방으로 흩날리고 그 안을 채우고 있던 액체들 역시 넘쳐흘렀다. 그리고 수조속에 들어있던 시체들 역시 산산히 으깨져 부숴졌다. 소녀에게 쏘아지던 화염화살은 충격파에 부딪히자 그대로 증발하듯 볼품없이 사라져 버렸다. 소녀는 젖은 머리칼을 좌우로 마구 흔들어대더니 재차 괴성을 지르며 진석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아아아! 아으아아아!"

자신을 향해 뻗어진 가녀린 소녀의 손. 그 주위에선 어른 주먹만한 황금빛 구체 십수개가 떠오르더니 빠르게 쏘아져오기 시작했다!

"에이 진짜!"

뭐 이딴게 다 있냐? 분명 디에스 교단의 놈들이 뭔가 실험을 해서 불쌍한 소녀를 이런 괴물로 만들어 놓은 모양인데 그 뒷처리는 자신이 해야한다니? 진석은 시클론을 걸고 구체들을 향해 화염화살을 쏜 다음 박살난 수조들쪽으로 몸을 날려 피했다.

'병신같은 클립튼 놈들! 저 애도 제대로 처리하고 갔어야 할 거 아냐?! 왜 내가!'

퍼어엉! 퍼퍼퍼펑! 화염화살과 부딪힌 황금색 구체는 흡사 수류탄이 터진것 같은 강렬한 폭발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 폭발에 휘말린 다른 구체들 역시 연쇄적으로 폭발하며 주변일대를 초토화 시켰다. 후와악 하고 열풍과 파편들이 미친듯이 튀었다.

"크윽!"

어느 수조의 기계 장치 뒤에 숨어 폭발을 견뎌내는 진석. 한차례 폭발이 지나간 후,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보았는데... 소녀는 또 다시 자신을 노려보며 손을 내밀고 있었다. 이번엔 아까보다 두 배는 많은 숫자의 황금색 구체가 나타났다.

"아니 이런 씨발."

이래서야 가까이 갈수도 없잖아? 진석은 식겁하며 몸을 일으켜 뒤쪽으로 화염화살을 휙 흩뿌리고 마구 내달려 자리를 피했다. 그리고 다른쪽의 기계장치뒤로 몸을 숨긴 직후, 등뒤에서부터 퍼버버벙하고 아까보다 더욱 강력한 폭발이 일어나며 빛과 폭음이 사방을 진동시켰다. 방안에 방향음이 웅웅 울리며 벽과 바닥이 우르르 진동했다. 연속적인 폭발로 인한 흙먼지가 후욱 밀려나와 주변을 자욱히 감쌌다.

"...콜록."

코로 먼지가 들어가 가벼운 기침을 하며 몸을 일으키는 진석. 주변에 먼지가 가득해 방 안의 시야가 영 좋지 못했다. 게다가 와르륵 하며 천장에서 돌과 흙더미가 여기저기서 우수수 쏟아져내리는게... 이러다간 이 지하 전체가 무너져내릴 판이었다.

'에이씨. 그냥 신경끄고 도망나갈까?'

문은 바로 저쪽 뒤다. 그래, 괜히 여기서 이렇게 영문도 모른채 싸울게 아니라... 그냥 도망가는쪽이 낫겠어. 쓸데없는 고생은 사양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한 걸음 내딛는 순간, 취이잉 하고 흙먼지가 화악 밀려나며 눈앞에 황금색 빛줄기가 가로질러왔다!

"윽?!"

반사적으로 고개를 옆으로 트는 진석. 지름 한뼘 정도 되는 황금색 빛줄기가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곧이어 귀가 불에 덴것같은 강렬한 고통이 몰려왔다.

"아으윽! 망할! 뜨거워!"

머리통이 날아갈뻔한걸 고작 귀끝이 스치는걸로 대신했지만 아픈건 아픈거였다. 욕설을 내뱉으며 귀를 붙잡고 껑충껑충 뛰는데, 먼지가 가라앉은 저편에서 소녀가 눈을 빛내며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것이 보였다. 그리고 또 다시 이쪽을 향해 오른손을 뻗는게 아닌가? 아니 이게 진짜?

"너어어!"

이젠 어린애고 뭐고! 자신이 너무 물렀다! 진석은 이를 악물며 한 발 먼저 소녀에게 화염화살을 쏘아내고 벨트에서 흑철단검과 란비언을 뽑아들며 달려나갔다. 자신을 향한 소녀의 오른손바닥에서 지름 한뼘 가량의 동심원이 생겨나더니 방금전과 같은 강렬한 빛줄기가 쏘아졌다! 재빨리 사이드로 스텝을 밟으며 피해내는 진석. 저 빛줄기는 분명 강력하긴 했지만 직선 공격이니 피하는게 어렵진 않았다. 공격을 피해내며 순식간에 소녀에게 근접한 진석. 하지만 소녀는 다음순간 왼손바닥을 들어올렸다.

"꺄아아아!"

그리고 비명을 지르자 왼손을 중심으로 무형의 충격파가 퍼퍼펑 터져나가며 소녀에게 거의 근접해있던 진석에게 명중했다. 터어엉 하고 흑철판이 울리는 소리와 함께 가슴팍에 커다란 충격을 느끼는 진석. 말에 걷어치인듯 그대로 몸이 뒤로 밀려났다.

"큿!"

촤아아악! 무게중심을 낮추며 버텨서는 진석의 발치로 흥건히 고여있던 수조 속 액체들이 튀어올랐다. 곧바로 자신의 가슴께를 내려다보는 진석. 덧대어진 흑철판은 그 전면이 불규칙하게 우그러져 있었다. 체력치 자체는 별로 줄지 않았지만 그것도 다 갑주덕이었다. 별것 아닌것 같아도 이걸 입지 않았더라면 저 무형의 충격파를 맞고 흉골 골절이라도 당했으리라. 진석은 이를 갈며 한차례 더 화염화살을 쏘아내고, 뒤이어 바닥에 굴러다니던 주먹만한 돌덩이를 걷어차 소녀에게 날린 뒤에 뛰쳐나갔다.

"적당히 해!"

"아아아아아!"

고개를 내밀며 소리를 지르는 소녀. 그러자 그녀에게 날아들던 화염화살들은 촛불처럼 후욱 꺼져버렸고 돌덩이 역시 무형의 충격파에 퍽석하고 부서지며 가루가 되어버렸다. 그렇게 소녀의 주의를 화염화살과 돌덩이쪽에 돌린 다음, 찰나의 빈틈을 노려 두 자루의 단검을 들고 뛰어드는 진석!

"라파가!"

"아아... 카학!"

소녀는 재차 소리를 지르며 충격파를 쏘려는 듯 했지만, 라파가로 순간적인 가속을 건 진석이 살짝 한 발 빨랐다. 진석의 수평베기는 소녀의 목줄기를 반토막 내며 스쳐지나갔다. 그렇게 잘려나간 목으론 두 번 다시 아무 소리도 지르지 못할터! 하지만 소녀는 소리가 나지 않는 입술을 쩍 벌린채, 자신을 베고 지나간 진석을 향해 양손바닥을 내밀었다. 그리고 두 손바닥을 향해 빛의 입자가 잠시 모여드나 싶더니, 곧 두다다다 하고 마치 머신건처럼 빛의 구체들이 연속적으로 쏘아져나왔다! 콰앙, 퍼엉! 퍼퍼퍼펑! 빛의 구체에 적중한 사방의 사물들이 전부 박살나고 터져나갔다. 식겁하며 물러서는 진석. 하지만 소녀는 진석을 향해 공격을 하는것을 멈추지 않았다.

"으아아악!"

쾅! 콰콰콰쾅! 진석의 움직임을 뒤쫓듯 쭉 연이어지는 폭발. 발치로 날아들어 연속적으로 터지는 빛의 구체들을 아슬아슬하게 피해나가며 몸을 날리는 진석. 잠깐사이 방은 그야말로 초토화되기 시작했다. 단 십수초사이에 방안은 온전히 남아있는 물건이 없을 지경이 되었다. 이, 이거 어떻게 해야되지? 이런 폭발에서 달리기 만으로 몸을 피하는건 한계가 있다. 이렇게 계속 도망다닐수만은 없다. 당장 어떻게든 해야... 그런데 다음 순간 폭발에 의한 진동때문인지 우르르 하고 천장이 무너져, 소녀의 몸 위로 수박만한 돌덩이가 하나 떨어져 내렸다. 콰자작! 소녀의 등짝을 강타하고 산산히 부서져나가는 무거운 돌덩이. 일순 소녀의 공격이 멈추며 그녀의 가녀린 몸체가 쓰러질듯 휘청였다.

"찬스다! 으오오오옷!"

즉시 방향을 선회해 소녀에게 달려드는 진석. 일순간의 행운이 불러온 찬스, 이걸로 끝을 내야한다!

'몸통에 단검을 몇자루나 맞고도, 그리고 목을 절반이나 베어도 죽지 않는다고? 그럼... 이건 어떠냐!'

순식간에 소녀에게 쇄도한 진석. 낙석에 얻어맞고 목이 덜렁거릴 정도로 심하게 베인데다가 몸 여기저기에 단검이 꽂힌 소녀의 모습은 참담할 지경이었지만 어차피 그녀는 멀쩡한 산 사람이 아니었다. 뭔진 몰라도 실험에 의해 만들어진 괴물일 뿐, 알량한 동정심따윌 가질때가 아니다! 진석은 단검을 쥔 손을 펼치며 자신의 간격에 들어온 소녀. 아니, 정체모를 괴물을 향해 기술을 발했다.

"토르멘타!"

퍼버버버벅! 소녀의 자그만한 몸체가 난도질당했다. 피 대신 주입되어있던 시퍼런 액체가 튀어올랐다. 자그만한 몸뚱이는 검격이 스치고 지나갈때마다 부서질듯 휘청였다. 자신의 손에 거의 해체당하는 소녀의 몸뚱아리. 그야말로 끔찍한 몰골이었다. 하지만 진석은 이를 악물며 두 단검을 되돌려 벨트에 차착 꽂아넣었다.

"토르멘타의 캔슬 후 이어지는..."

오른손을 펼친채 뒤로 끌어모으는 진석. 아직 토르멘타의 여운이 남아있는 소녀의 몸뚱이. 아니, 이젠 갈기갈기 찢겨진 고깃덩이에 가까운 그것은 당장이라도 뒤로 넘어갈것 같았다. 하지만 벌려진 두 눈틈새로는... 여전히 황금색의 기운이 불길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오싹.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느낌이었다.

"열격장!"

진석은 아직 절반밖에 못 모았지만 불길한 예감이 들었기에 지체없이 소녀의 관자놀이를 향해 열격장을 때려넣었다. 퍼어억! 자그마한 머리통은 해머로 내리친 수박처럼 산산히 터져나갔다. 두개골이 깨져나가며 뇌수와 피대신 들어차있던 푸른색 액체가 사방으로 촤악 흩뿌려졌다. 그제서야 겨우 소녀의 두 눈에서 빛이 사라지며,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고 무너져 내렸다.

"...헉헉. 마, 마지막에 뭔진 모르겠지만 섬뜩했다."

바닥에 고인 액체속에 머리를 박고있는 소녀는... 이제 완전히 정지해 있었다. 온몸이 갈기갈기 찢겨나가고 머리통 마저 절반이 으깨어졌으니 아무리 불사신 같은 존재라도 이젠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리라. 토너먼트를 위해 올린스턴 왕국의 캐버너에서 머물때 상대를 확실히 끝장내기 위한 콤비네이션의 하나로 토르멘타 캔슬에 이어진 열격장을 연습했었고, 이거면 반드시 쓰러트리지 못할 상대가 없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도중에 캔슬한 토르멘타라도 그걸 맞고도 열격장을 모으는 찰나의 순간 눈을 빛내며 끝까지 뭔가의 반격을 해오려고 하다니. 서둘러 열격장을 쓰지 않았다면 거꾸로 자신이 당했을지도 몰랐을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오 그나저나... 진짜 쓸모없는 싸움이나 했네."

빌어먹을. 입맛이 쓰다. 아무리 산 사람이 아니더라도, 어린 소녀를 칼로 쑤시고 찢어댄대다 머리통까지 박살을 내놨으니 기분이 유쾌할리 있겠는가? 한숨을 내쉬며 발길을 돌려 서둘러 빠져나갈까 하다가, 왠지 모를 예감에 되돌아와 소녀의 시체를 살펴보는 진석.

"......"

작은 체구에 가해진 자신의 공격이 어찌나 사나웠던지, 그야말로 걸레짝이 따로 없었다. 흉곽이나 복부가 다 찢어지고 벌어져 안의 장기가 다 드러나 있었고 팔다리 역시 심하게 잘려 뼈가 다 드러나 있었다. 이런 몸뚱아리로도 끝까지 움직이며 공격을 해오려 하다니. 대체 이놈들 무슨 실험을 어떻게 해놓은거야? 그런데 머리카락이 축 젖어 늘어져있던 소녀의 이마사이로 무언가 반짝이는것이 보였다.

"음? 이건 뭐지?"

손으로 머리칼을 해집어 이마 한복판을 살펴보는 진석. 여태까지 젖은 머리카락이 들러붙어있어서 몰랐는데, 소녀의 이마 한 가운데엔 손가락 한마디쯤 되는 마정석이 박혀있었다.

"마정석을... 이마에?"

뭔진 몰라도... 분명 이게 소녀를 괴물처럼 만든 원흉중에 하나가 아닐까? 거기에 생각이 미친 진석은 손으로 마정석을 쥐고, 뽑으려 했다. 하지만 안쪽으로 단단히 박혀있는건지 마정석은 생각처럼 잘 뽑히지 않았다.

"...끄응. 할 수 없지. 미안하다."

벨트에서 흑철단검을 뽑아든 진석. 그리고 칼 끝으로 이마와 마정석의 틈새를 찔러넣어 후벼팠다. 덜걱거리며 칼끝이 파고드는 느낌이 나는게 아마도 이렇게 해서 뽑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누더기가 된 소녀의 시체에 또 다시 칼을 대고 있자니 기분이 참... 더러웠다.

"에익. 이거... 아. 겨우 뽑았다."

거의 손가락 하나 깊이로 박혀있던 마정석. 아니 이게 뭐야. 그러니까 이 미친놈들은 이 여자아이의 이마 한복판에 작은 말뚝같은 마정석을 박아넣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무슨 실험을 한건진 몰라도 이딴짓을 했으니 제정신을 유지했을리가 있나? 뇌수가 흥건히 묻은 마정석을 뽑아낸 진석은 어쩔까 잠시 고민하다가 그것을 그냥 주머니에 넣었다. 그런데 주머니에 마정석을 집어넣을때, 손끝에 금속성의 뭔가 단단한 것이 닿는걸 느꼈다.

"뭐지?"

뭔가해서 집어넣으려던 마정석과 함께 도로 끄집어 내보니... 반지였다. 아무 장식이나 가공도 없이 그냥 밋밋하게 생긴 백은색의 반지. 아차 하며 그 반지의 정체를 깨닫는 진석.

'이거 토너먼트의 우승 부상으로 받은 영록의 반지이라던거 아냐? 분명 마법금속인가 뭔가로 만들어졌다는 물건. 착용하면 스테이터스가 아주 조금 올라갔던걸로 기억하는데... 가방안에 처박아 두었던 이 바지 주머니에 안에 그냥 찔러넣어두고 잊어버리고 있었군.'

그런데 손에 꺼내쥔 영록의 반지가 갑자기 덜걱덜걱 하고 저절로 움직이는게 아닌가? 그러더니 마치 자석처럼 마정석과 함께 철썩 달라붙어 부르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어엉?!"

자신의 손바닥 위에서 벌어지는 뜬금없는 상황에 깜짝 놀라는 진석. 하지만 마정석과 반지는 제멋대로 달라붙어 마구 진동하더니... 이내 화악 하고 눈을 뜨지 못할 정도의 강렬한 빛을 내었다. 이건 또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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