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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베라 - 부회의 방랑자-136화 (136/155)

< --   - 12.   -- >         * 136화 *

하룻밤새 몇십명이나 되는 숫자가 사상당하고 연구 시설 하나가 정체불명의 인원들에게 완파되는 대형사고가 터졌지만, 낮의 도시는 새벽의 소란따윈 전혀 없었다는 듯 지극히 평화로웠다. 흰색 제복의 사내들 역시 아무문제 없다는듯 시민들 사이에서 태연히 순찰을 돌고 있었다.

'이거이거 이쯤되니 되려 무섭구만. 여긴 여유롭게 머물면서 괜히 여기저기 기웃댈 동네가 아니겠어.'

진석은 며칠간 머물며 조사해보려던 생각을 바꿔먹고, 점심 무렵 옐 프라나에서 빠져나갔다. 뭐 세금 걷어서 이딴 이상한 실험 나부랭이나 하는데 썼나보지 뭐. 그리고 성광의 반지 스플렌도르를 손에 넣고 클립튼 일행이 이곳에 있었다는걸 안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이딴 기분나쁜 도시에선 더 이상 머물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도시를 빠져나와 가도를 타고 남쪽으로 향하며 진석은 생각에 잠겼다. 어젯밤 여자아이를 구해내 사라졌던 클립튼 일행은 그 이후 대체 어디로 갔을까 하는것이었다.

'일단 놈들도 당연히 도시에서는 빠져나갔을테지. 게다가 디에스 교단과 정면으로 부딪히는 대형사고를 쳤으니... 일단 해외로 빠져나가는 루트를 타지 않을까 싶은데?'

가장 가까운 타국이라면 북으로는 올린스턴 왕국. 서쪽으로는 애거스트 공화국. 그리고 남쪽으로는 헤세스모데우스 교단의 본산이 자리잡고 있는 소국 메디니아가 있다.

'애당초 놈들과 처음 마주쳤던게 애거스트 공화국에서 였으니... 또 다시 애거스트로 돌아가진 않았겠지? 그렇다고 뜬금없이 북으로 갔을리도 없을것 같고. 그렇다면 놈들 역시... 메디니아로 향했으려나?'

만약 지금 이 추측대로 클립튼 일행이 자신과 같은 남쪽 루트를 선택했다고 가정한다면, 만에 하나 도중에 우연히 마주치게 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다. 물론 클립튼 일행이 메디니아로 향했을지도 모른다는건 어떤 근거에 기반한게 아닌 지극히 단순한 추측일뿐이니 그렇지 않을 확률도 높지만...

'하지만 뭐 이젠 마주쳐도 상관없지. 에그레기움으로 디에스신의 신성력을 빌어서 놈들을 한순간에 전부 박살내버릴테니까.'

원래 은혜는 쉽게 잊어도 원한은 삼대를 간다던가. 무심코 같은 가명을 쭉 쓰던 실수로 정체가 들통나 붙잡힐뻔했던 수모는 아직 잊지 않았다. 게다가 이번 게임을 진행하며 그렇게까지 궁지에 몰려본건 그때가 유일했으니, 아직까지도 기억에 생생히 새겨져 있었다.

'남자놈들은 필요없으니 전부 모가지를 날려버리고... 에이미라는 신관 아가씨랑 비엔족 궁수 스텔라 이 둘만 남겨두면 되겠지. 붙잡기만 해봐라. 꽁꽁 묶어놓고 미약으로 아주 푹 절여가며 진득하니 괴롭혀줄테니. 특히 스텔라 이 년은... 감히 내 어깨에 화살을 박아줬겠다? 진짜 넌 잡히기만 해봐라. 답례로 다리사이에 더 좋은걸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박아줄테니!'

진석은 차라리 클립튼 일행과 마주쳐서 결판을 내고 싶다는 생각을 품은채 마차를 몰았다. 하지만 며칠간 남하하는 동안 별 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결국 클립튼 일행과는 마주치는 일은 없이 옐 프람을 벗어나 메디니아의 변경 마을에까지 다다를 수 있었다. 어디 걸리기만 해봐라 하는 심정으로 내심 클립튼 일행과의 운명적인 조우를 기대하고 있었는데... 아무 일 없이 메디니아에 도착하니 어쩐지 좀 허무했다.

'쯧. 아무리 하던 짓도 멍석 깔아주면 안한다지만... 놈들을 다 때려잡을만한 수단을 얻은판에 코빼기도 볼 수 없었으니 뭔가 괜히 섭하구만.'

하지만 클립튼 일행과 자신의 관계는 이걸로 끝나지 않으리라. 허신의 교단에 몸담고 있는 한 언젠가 또 다시 마주치게 될거라는 확신에 가까운 예감이 들었다. 아직 해가 떨어지려면 멀었지만 진석은 일부러 마을에서 하루 머물렀다 가기 위해 일찍 여관을 잡았다. 앞으로 하루 정도 꼬박 이동하면 갈론까지 갈 수 있었지만 여정을 별로 서두르고 싶은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진석은 방에 들어와 짐을 풀었다. 자신의 짐배낭과 대량의 약품이 남아있는 약가방, 그리고 창염의 검. 이 세 가지 귀중품은 마차에 남겨놓을 수 없었으니 매번 방까지 옮겨놓는것도 나름 일이었다. 가방들을 방안에 옮겨 둔 후 한 켠의 의자에 걸터앉으며 한숨을 돌리는 진석.

"후우... 그나저나 그것도 괜히 걱정이네."

문득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진석. 막상 메디니아까지 오고 보니 셀린과 케이트를 제이스와 아르데나에게 대면시킬일이 걱정스러워 졌던 것이다. 으음, 처음엔 그냥 뭐 어떻게든 되겠지~ 했는데 실제로 대면시킬 순간이 다가오니 쓸데없이 신경쓰인다. 진석을 따라 옆에서 창염의 검을 옮겨왔던 케이트는 검을 한쪽에 조심스레 내려놓곤 곁으로 다가오며 물었다.

"무슨 신경쓰이는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음? 어... 아니 좀."

이거...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설명하기가 좀 껄끄럽다. 한편 셀린은 아주 자연스레 침대로 다가가 벌렁 드러눕더니, 사지를 쭈우욱 펴며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하이고. 쟤는 참 생각없이 태평한게 부럽구만. 속편해서 좋겠다 야. 진석은 케이트를 데리고 침대가로 다가가 셋이 함께 둘러앉았다. 흠흠 헛기침을 두어번 하고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두 노예들을 향해 말을 꺼내는 진석.

"에 그러니까..."

어... 이거 뭐, 뭐라고 설명하지? 사실 나에게는 너희들 말고도 가깝게 지내는 여자들이 있는데 걔들 성격이 좀 독특해서 다 함께 만나게 되면 무슨일이 생길지 모른다~ 라고 해야될까?

'되, 되긴 뭐가 돼. 진짜 무책임한 설명이구만.'

진석이 운을 띄워놓곤 말을 잇지 못하고 머뭇대자 셀린은 침대위에 누운채 옆으로 뒹굴 한바퀴 구르며 말했다.

"으응. 주인님 답지 않게 뭘 그렇게 고민하고 있냥?"

그러자 옆에서 케이트가 고개를 끄덕이며 한 마디 거들었다.

"그렇네요, 편하게 말씀해 주세요. 무슨 말을 하시더라도 저흰 주인님을 따를테니까."

아니 뭐 그렇게까지 심각한건 아니거든? 하지만 계속 어버버 할 수 만은 없는 노릇이니 진석은 우선 제이스의 이야기 부터 꺼냈다. 단 제이스와 어떤 경위로 얽히게 됐는지는 적당히 생략하고, 지금 자신이 몸담고 있는 이 교단에 들어와서 어쩌다보니 서로 가까워진 상대 정도로 설명했다. 물론 육체관계를 나누던 가까운 상대라는 이야기도 빼놓지 않고 했다. 그 다음은 아르데나였다. 아르데나와는 처음에 어떻게 만나게 된건지 그 과정을 설명해주고, 자신의 성을 나줘주고 의붓 여동생으로 삼은 사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아르데나가 거기서 만족하지 않고 자신을 너무 좋아해 남녀간의 정까지도 바랬지만, 아직 나이가 어린터라 관계를 갖는건 성인이 된 후로 미뤘다는 그런 낯부끄러운 이야기까지 솔직히 다 털어놨다. 이야기를 다 듣고나서 먼저 말문을 연것은 셀린이었다.

"응? 그래서 이게 무슨 문제가 있는거냐?"

"...엉?"

"수컷... 아니, 힘을 가진 남자가 여자와 최대한 많이 관계하고 싶어하는건... 지극히 당연한거 아니냥? 번식기때 다른 일족과 교류하다보면 흔히 보이는 풍경이었다냐."

아니아니. 저기 말이다, 그렇다고 그 무슨 흡사 동물의 왕국 같은 논리로 납득해버리면 어떻게 하냐? 슬쩍 케이트를 바라보니... 그녀는 진석을 향해 생긋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런 부분은 주인님의 사생활이니까요. 무슨일이 생긴다 하더라도, 저는 그저 주인님 곁에 함께 할 수만 있다면 아무 상관없습니다."

진석은 셀린의 태도와 케이트의 대답에 어째 허탈감마저 느꼈다. 하긴. 이 둘은 절대적인 애정과 충성을 강제하는 복종마법이 걸린 노예들이었지. 이 둘에겐 자신이 어떤말을 하고 무슨짓을 하더라도 전부 용납된다. 실상 마법으로 자유의지를 거세하고 주인인 자신만을 맹신하게 만든게 아니던가. 일일이 제이스나 아르데나와의 관계에 대한 설명따위, 처음부터 이 둘에겐 하나도 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어째 입맛이 썼다.

'옆에 끼고 다니면서 수발 들게 하거나 밤일 치르기는 좋지만서도... 그러고보니 난 클립튼 일행을 보고 용사놀이나 하고 있다고 내심 비웃었지만, 생각해보면 나 역시 이 둘을 데리고 인형놀이나 주인님놀이 비슷한걸 하고 있었던 셈이군.'

게다가 애당초 노예를 구입하려 했던 이유는 전투상황시 보조나 도움을 받고자 했던거였다. 그래서 전투노예를 구입하려 갔었건만... 결국 아랫도리 욕심이 동해 이 둘을 구입해서는, 여행길에 데리고 다니며 전투는 커녕 신나게 섹스나 하고 있으니 이 뭔짓이냐? 진석은 허탈감에 자조적인 웃음을 띄우며 침대위에서 굴러다니는 셀린의 볼따구를 양손으로 꽉 꼬집어 당겼다.

"아흐으 아흐다냐아~"

진석이 볼을 잡아당긴 바람에 얼빠진 발음으로 고개를 저으며 버둥거리는 셀린.

'하지만 인형이건 뭐건. 어쨌건 이 둘은 내가 책임져줘야 할 대상이니... 모든게 끝날때까진 곁에서 쭉 데리고 다녀야겠지.'

문득 미리안 생각이 났다. 지금은 순순히 그녀의 밑에서 시키는 일을 따르고 있었고, 딱히 대항할만한 수단이나 힘이 없었기에 이대로 허신을 소환해 세계를 멸망시키는 루트를 밟아야 하는건가 싶었다. 솔직히 뒷통수를 치는 일 따윈 내심 포기하고 있었다. 애시당초 허신의 교단에 들어오고자 결심했던건 제이스를 통해 교단에 접근해 에나의 복수를 이루고자 했던거였다. 그러나 미리안이라는 존재의 저력을 도무지 헤아릴 수 없었기에, 스스로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복수는 접어두고 수호자라는 명목상의 지위까지 받아 지금까지 시키는 일을 수행해왔다. 그렇다. 그냥 솔직히 말하자면 미리안을 꺾을만한 자신도, 그럴 방법도 없어서 전전긍긍 해온거였지만... 이젠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었다.

'성광의 반지라는 강력한 대항수단을 손에 넣은 이상 굳이 허신 따윌 강림시킬 필요는 없지. 뭐 당장은 아니더라도... 상황을 지켜보다 보면 언젠가 반드시 한 번쯤은 판을 뒤집을 기회가 생길터.'

긴 시간. 선택의 기로에서 어느 한 쪽 길을 택하지 못하던 진석은 드디어 결심을 굳혔다. 미리안을 배신하고 헤세스모데우스 교단을 내부에서부터 무너트린다. 그것이 최종적인 자신의 선택이었다. 제이스? 더 이상 필요없다. 다른 수호자들? 그들도 함께 제거한다. 그리고 그 뒤에 남겨질 교단의 막대한 유산은... 가능한 자신이 전부 손에 넣는다. 이제와서 딱히 물질적인 것이 욕심나거나 필요한건 아니었지만 내버려뒀다 공중분해되어 엉뚱한 놈 손에 들어가느니 차라리 자신이 직접 갖는것이 나았다. 뭐 돈과 세력이야 가능한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거니까.

'세계 멸망을 지향하는 사교단에 들어와 재차 뒷통수를 치겠다니. 나도 참 이만한 악당이 없구만. 아니, 이건 악당이 아니지. 엄연히 세계를 구하는 일이니... 이거야말로 진짜 용사라고 할만한 행동이 아닐까?'

결국 르마쿠르 자매에게 둘러대려고 했던 거짓말을 현실로 바꾸게 되는구만. 그나저나 용사라... 이제 자신이 미리안을 타도하기로 결정했으니 현재의 용사 포지션인 클립튼 일행과 손을 잡을 수도 있을테지만... 됐다. 그까짓 놈들 필요없다. 어차피 그들도 진석 본인을 믿어주지 않을것이다. 뭐 자신 같아도 이런 상황에서 손을 잡자고 다가오는 놈은 절대로 안 믿어줄테니까. 이제와서 뭐라고 한들 놈들이 자신을 신용해주지도 않을테고, 정말 백번 양보해 일이 잘 풀려 서로 협조하기로 했다고 해도... 그들이 옆에 있으면 차후 교단의 세력을 손에 넣는데 방해가 될 수도 있었다.

'더군다나 레오노르 공주는 내가 직접 세뇌를 한 상대다보니... 클립튼과 손을 잡아봐야 괜히 차후의 교통정리만 더 복잡해진단 말이지.'

진석은 한참이나 붙잡아 당기고 있던 셀린의 볼을 이제서야 겨우 놓아주고 등을 기대었다. 빨갛게 물든 볼을 주무르며 아으으 눈물을 찔끔이는 셀린. 진석은 턱을 괴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대로 그냥 미리안에게 협력해 세계 멸망의 엔딩을 보는게 훨씬 편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렇게 빨리 이번 게임을 끝내놓고 새게임을 하는게 나을수도 있지.'

게다가 이제와서 성광의 반지를 손에 넣었다고 한들... 미리안의 뒤를 치는 일이 반드시 잘 되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신의 광휘를 몸에 둘러 모든 능력을 두배로 끌어올리는 신성마법 에그레기움은 분명 일시적으로 자신을 무적에 가깝게 만들어줄 힘이다. 하지만 그 제한시간은 단 1분! 그야말로 한순간만 사용가능한 아슬아슬한 줄타기같은 능력이다. 게다가 절대적인 아군이라고 할 수 있는 아르데나와 셀린, 케이트의 힘은... 허신에게 선택받은 주구인 미리안에게 비교하자면 너무나도 보잘것 없을터. 배신이라는 선택은 이래저래 분명 고생스런 길이 될것이다.

'하지만 뭐... 그래봐야 어차피 게임이잖아? 에라이 그래, 어디 갈때까지 가보자.'

그야말로 올 오어 낫띵, 위너 테익스 올이로소이다. 진석은 그렇게 배신을 결심하며 말없이 주먹을 꾹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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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후. 정오를 넘긴 시간. 진석의 마차는 헤세스모데우스 교단의 사원에 도착했다. 문 앞을 지키고 있던 남자신도들은 마차를 몰고 나타난 진석을 알아보곤 고개를 숙여보이며 인사를 건넸다. 진석은 그들의 인사를 대충 받아넘기곤, 마차를 몰고 사원 안쪽으로 들어갔다. 한쪽에 마차를 잘 세워두곤 셀린과 케이트를 대동한채 창염의 검을 가지고 곧바로 사원안으로 들어가는 진석. 복도를 지나는 동안 다른 신도들을 몇명 마주쳤지만 그들은 자신에게만 공손히 인사를 해올뿐, 뒤에서 따라오는 셀린과 케이트는 흡사 투명인간처럼 취급 했다. 자신이 제이스를 따라 이 사원에 처음 왔을때와 마찬가지의 태도였다.

'거 이 인간들도 참... 이런걸 배타적이라고 해야할라나.'

좌우지간 몇 명의 신도들을 지나쳐 익숙한 복도를 따라 대신관의 방 앞까지 다가섰다. 가볍게 문을 두드리며 노크를 하니 안에선 들어와도 좋다는 미리안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열고 두 노예와 함께 안으로 들어서는 진석. 안쪽엔 미리안 이외에 오랜만에 보는 익숙한 얼굴이 하나 있었다. 깔끔한 정장차림에 붉은 머리. 날카로운 눈매를 해서 자칫 신경질적으로도 보이는 인상의 젊은 여자. 제이스였다.

"러셀? 돌아온거야?"

제이스는 방으로 들어오는 진석을 보곤 금세 만면에 화색을 띄우다가, 뒤따라 들어오는 두 노예를 발견하곤 순식간에 우거지 죽상이 되었다. 일그러지는 눈가엔 '저 인간이 그새 또...'하는 의미가 담겨있는 것 같았다. 진석은 제이스의 시선을 가볍게 무시하며 안으로 들어가 테이블 위에 천으로 둘둘 만 창염의 검을 얹어두곤 의자에 앉았다. 셀린과 케이트는 그런 진석의 뒤에 얌전히 시립했다.

"아이고 힘들어라. 아무튼 무사히 다녀왔습니다~"

"뭐가 무사히 다녀왔습니다야?! 뒤의 저 둘은 또 뭐야?"

진석이 너스레를 떨자 손바닥으로 테이블을 탕 내리치며 곧바로 화를 내는 제이스. 오오, 이 성질머리도 참 오랜만이구만. 간만에 들으니 어쩐지 감회마저 느껴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제이스가 성질을 내건 말건 이제와서 그런걸 신경 쓸 진석이 아니었다. 팔짱을 끼고 어깨를 으쓱하며 히죽거렸다.

"글쎄? 뭘까나."

"어, 어떻게 잠깐만 못보면 그새 새로운 여자를 달고 나타나는건데? 엘리야를 데리고 나타난것도 어처구니 없었지만... 이번엔 둘이나? 어처구니 없어 진짜. 이것도 재주라면 재주겠지만... 정도껏 해야지, 아 정말!"

이거 누가 들으면 뻑하면 이 여자 저 여자와 바람피우는 남편 바가지 긁는 여편네 원성인줄 알겠다? 진석은 제이스의 항의를 깔끔히 무시하며 자신의 책상에 앉아있는 미리안을 향해 천으로 감싼 창염의 검을 가리켜보였다.

"자 여기 이거. 이번의 목표물이었던 창염의 검."

잠자코 진석과 제이스의 모습을 지켜보던 미리안은 그제서야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리안은 진석이 뒤에 달고 있는 이 둘이 저번에 돈까지 빌려가며 구입한 노예라는걸 짐작하고 있을터. 그래서인지 별 상관하지 않고 곧바로 일 이야기를 꺼냈다.

"이번에도 수고하셨습니다. 역시 매번 실망시키지 않는군요. 그나저나 전서구를 보내온 포먼의 말에 따르면... 토너먼트의 마지막 날, 테러를 일으킨 '정체미상의 집단' 덕에 꽤나 여러가지로 요란스러웠었다고 하던데. 별 문제는 없으셨나요?"

아아. 도노반과 디에스교의 떨거지들 이야기군. 하지만 진석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뭐 예상외의 일들이 좀 있긴 했지만 대충 다 죽었으니까. 별거 아니었어."

"그런가요. 후후, 역시 오빠에게 맡겨두길 잘했어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테이블로 다가와 창염의 검을 감싼 천을 풀어제끼는 미리안. 그리고 검을 검집에서 뽑고 마치 감정하듯 이리저리 한참을 돌려보며 살폈다. 그 사이 제이스는 여전히 화난 표정을 지은채 진석에게 말했다.

"그보다! 대체 뒤의 그 둘은 누구야? 확인도 안된 상대들을 대신관님의 방에 함부로 데리고 들어오기나 하고!"

셀린과 케이트의 정체를 모르는 제이스는 진석의 능청스런 태도나, 그 둘의 존재에 대해 아무말도 하지 않는 미리안의 태도가 내심 불만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진석은 대답대신 히죽 웃으며 뒤에 서있는 케이트에게 까닥까닥 손짓을 했다. 곧바로 곁으로 다가서는 케이트. 진석은 몸을 돌려서 가까이 다가온 케이트의 턱을 잡곤, 자신을 향해 끌어당기며 제이스의 눈 앞에서 그녀와 키스를 나눴다.

"아... 으, 러, 러셀... 너어어어어!"

제이스의 두 눈이 질투와 분노로 화르륵 불타올랐다. 하긴 제이스 입장에선 자신을 애인같은 상대로 여기고 있었을텐데, 눈 앞에서 정체모를 다른 여자와 쪽쪽 키스를 하고 있으니 거 확실히 열받긴 하겠다. 진석은 케이트를 뒤로 물리고 뭐 어떠냐는듯 태연하게 웃어보였다. 약이 오를대로 오른 제이스가 막 입을 열어 뭐라고 하려는 찰나 창염의 검의 확인을 마친 미리안이 검을 검집에 되돌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하군요. 창염의 검... 듣던대로 좋은 물건이네요."

...좋은 물건? 영혼을 땔감처럼 태워먹는 마검이 좋은 물건이라니. 거 퍽이나 그렇겠다. 창염의 검을 테이블위에 내려놓은 미리안은 자기 자리로 돌아가는 대신, 진석에게 다가와 자연스레 무릎위에 걸터앉았다. 분노와 질투로 귀신같은 형상을 하고 있던 제이스는 그 모습을 보곤 대번에 당황해했다.

"대, 대신관 니임?"

"왜요 제시. 무슨 문제라도?"

빙긋 웃으며 진석의 목에 양 팔을 두르고 포옥 안겨오는 미리안. 허허 얼씨구. 자신은 의도적으로 제이스를 놀리고 있는거였지만, 얘는 아주 한 술 더 뜨는구만.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자 제이스는 거의 울상이 된채 아무말도 못하고 아으아으 거리고 있었다. 미리안은 아주 편안한 미소를 지으며 보란듯 진석의 가슴에 얼굴을 기대왔다. 진석은 피식 웃으며 그런 미리안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이전같으면 미리안의 이런 태도가 좀처럼 대하기 껄끄러웠을 테지만... 미리안을 배신하기로 마음먹어서일까? 이젠 뭐 그러거나 말거나 싶었다. 부담감도 없었고 기분도 되려 편안했달까? 상대를 배신하기로 맘먹고 나서야 태연히 대할 수 있다니. 나도 참. 진석은 그렇게 생각하며 자조적인 웃음을 띄웠다.

"음~ 반응이 재밌긴 하지만 장난은 이쯤할까?"

"후후. 그럴까요? 모처럼 장단을 맞춰볼까 했는데..."

자, 장난? 뭔진 모르겠지만... 이거 지금 자신을 놀리려고 이런거란 말인가? 진석과 미리안의 대화를 들은 제이스의 표정이 조금 침착을 되찾았다. 미리안은 제이스의 그런 표정을 보며 재밌다는듯 눈웃음을 짓다가, 기습적으로 진석의 머리를 끌어당기며 입술을 맞추었다. 그 모습을 본 제이스의 눈이 왕방울만해졌다.

"아으아아아?!"

너무 놀랐는지 제대로 말을 하지도 못하는 제이스. 진석은 갑작스런 행동을 해오는 미리안을 제지하고 싶었지만, 몸이 그대로 굳어 말을 듣지 않았다.

'이건 틀림없이... 저번과 같은 그거구만. 내가 분명 이러지 말랬더니 거 참.'

맨 처음 폭풍의 지팡이를 가져왔을때 미리안이 자신에게 키스를 통해 기본적인 스테이터스를 상승시키는 세인트 베네딕션이란 패시브 스킬을 걸어줬었다. 아마 지금도 같은 짓을 하려는 것이리라. 어차피 몸을 움직일수도 없었으니 진석은 그냥 미리안에게 몸을 내맡겼다. 입술을 통해 전해지는 미리안의 숨결에선 여전히 덜 여문 풋풋한 복숭아 향기같은게 느껴졌다. 곧 미리안의 입 너머에서부터 어떤 힘의 결정같은것이 흘러와 자신의 안으로 넘어가 녹아들듯 흩어지는게 느껴졌다. 미리안은 천천히 입술을 떼었고, 곧 세인트 베네딕션이 A랭크로 상승했다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음- 후후훗."

태연하게 미소지으며 진석의 타액으로 젖은 자신의 입술을 혀로 스윽 핥는 미리안. 틀림없는 어린아이의 모습임에도, 순간 그녀에게선 아찔할 정도의 색기가 느껴졌다.

'...이것 참. 방심할 수 없다니깐.'

키스를 마치곤 진석의 무릎에서 내려온 미리안. 미리안은 제이스에게 장난스레 윙크를 해보이며 자신의 책상으로 돌아갔다.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고 있던 제이스는 입을 벌린채 어버버하며 좀체 말을 하지 못했다. 자신을 키워주고 모든걸 가르친 미리안이 진석에게 대놓고 이런짓을 하는 모습은 처음 보는거였으니, 지극히 당연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미리안은 태연히 잉크병에 꽂아둔 깃털펜을 쥐고 서류철을 펼치며 말했다.

"그럼 일단 다들 돌아가서 쉬고 계셔도 좋습니다. 러셀 오빠나 제시 둘 다 막 돌아왔으니 우선은 푹 쉬시길. 저는 이 서류들 부터 처리해야 하니... 이따가 함께 저녁 식사라도 들고 난 뒤에 이야기를 좀 더 하도록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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