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베라 - 부회의 방랑자-138화 (138/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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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석은 이후 아르데나를 자신의 방으로 데려가 셀린과 케이트를 소개시켜줬다. 아르데나 역시 뜬금없는 그녀들의 존재에 처음엔 제이스 이상으로 당황해 했다. 하지만 진석은 그녀들이 자신에게 종속된 노예라는 사실을 밝히고, 꼭 필요했기에 곁에 두게 된거라고 차근차근 설명을 해나가니 나름대로 납득해주는 눈치였다. 뭐 바로 곁에 있던 제이스조차 질투하던 아르데나니, 진짜 속마음까진 알 수 없었지만 이만하면 그런대로 원만한게 넘어가는것 같았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안전장치 겸 쐐기를 하나 박아둘 셈으로 진석은 일부러 아르데나의 앞에서 셀린과 케이트에게 이 아이는 피는 이어지지 않았지만 내 여동생이나 다름없는 상대니 그렇게 알고 실례되지 않게 대하라는 지시를 해두었다. 물론 셀린과 케이트는 일전 아르데나의 이야기를 한 번 들어 알고 있었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순순히 수긍했다. 그리고 셀린과 케이트가 아르데나에게 다가가 먼저 친근하게 굴자, 아르데나는 조금 부담스러워 하면서도 그런대로 그들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아르데나는 일전 저주로부터 구해줬던 이래로 나를 전적으로 믿고 따르는데다... 셀린이나 케이트 이상으로 강력한 괴물 변신의 힘도 지니고 있으니 소중한 전력이거든. 어차피 셋 다 곁에 두고 써먹을건데 혹여라도 불화가 생기면 곤란하지.'

그렇게 아르데나에게 셀린과 케이트의 소개를 마칠즈음, 슬쩍 방문이 열리고 제이스 역시 진석의 방에 들어섰다. 진석은 제이스가 찾아온 것을 보곤 속으로 혀를 찼다.

'에이, 넌 또 왜 왔냐? 음 그나저나 별로 크지도 않은 방 안에 남자 하나와 여자 넷이라니... 이거 참 편향적인 성비긴 하군.'

방에 막 들어선 제이스는 아르데나는 그렇다 쳐도, 셀린과 케이트가 진석의 곁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것을 보곤 대번에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곧 태연히 의자를 하나 끌어다 자신 역시 진석의 곁에 마주앉았다. 제이스는 진석을 잠시 빤히 바라보다 한 마디 툭 던졌다.

"...흐응. 어째 묘하게 기분 좋아보이네?"

"뭐 그거야... 이 방안의 성비가 적정 수준을 갖추었으니까? 나는 갓 싹튼 화분마냥 햇볕과 습도에도 민감할 정도로 섬세하지만~ 주변의 성비엔 더더욱 예민하거든. 그런 의미에서 지금 이 방안의 성비는 아주 좋아. 훌륭한 환경이야."

도대체 그게 무슨 헛소리냐는 어처구니 없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결국 피식 웃음을 터트리고 마는 제이스. 이 남자는 여자에 관해선 자신이 뭐라고 해도 듣지도 않을테고 결국 본인 좋을대로 할거라는걸 알고 있으니 제이스는 그냥 한 발 뒤로 물러나기로 마음먹은 모양이었다. 하긴. 제이스에게 있어선 절대적인 존재인 대신관과도 태연히 뭔가의 섬씽을 저질러버리는 남자가 바로 자신 아닌던가. 이제와서 기껏 노예 두 명 정도, 별 대단한것도 아니었다.

"그보다... 그간 있었던 너희들 쪽 이야기나 좀 해봐. 그란델이나 레오노르 공주는 어떻게 됐어?"

진석은 다리를 처억 꼬고 앉으며 제이스와 아르데나에게 그렇게 물어보았다. 진석의 질문에 잠시 서로를 마주보는 제이스와 아르데나. 이내 제이스가 자신이 말 하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보이며 말문을 열었다.

"응 뭐어. 결론부터 말하자면 레오노르 공주는 별 탈 없이 왕좌를 양위받았어. 이젠 공주가 아니라 여왕이 되었지."

미리안의 지시로 데오그라즈에 향한 수호자들은 계획대로 해밀턴 공작을 죽이고, 클립튼에게 그 누명을 뒤집어 씌운 다음 공작가의 실권을 레오노르의 손에 쥐어주는 작업에 들어갔다. 레오노르가 공작위를 계승하는데 방해가 될만한 가문의 가신들이나 다른 친족들은 온갖 방법으로 제거하거나 혹은 여러 핑계를 내어 본가에서 멀찍이 떨어지게 만들었다. 드레비안과 맥, 머서 이 셋이 가문의 내부에서 레오노르의 도움을 받아 한꺼번에 밀약했으니 공작가 안쪽의 교통정리는 별로 어려울게 없었다.

해밀턴 공작가를 정리한 뒤엔 귀족 연맹과 접촉을 했다. 이쪽이 내세운 조건은 이것이었다. 현재의 왕당파는 해산한다. 차후의 이권이나 새로운 제도, 법의 제정에 있어 귀족연맹 측에 유리한 조건을 수용해줄테니 레오노르 공주를 차기 여왕으로 올리는데 협력하라는 제안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가네딘 후작이라는 대표자가 어처구니 없이 목이 떨어져 내부적으로 불안한 조짐이 보이던 귀족 연맹은 쉽사리 이쪽의 제안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여기에선 엘리야가 활약을 했다. 귀족연맹 내 주요 인물들이 데오그라즈에 가진 이권에 대한 뒷조사를 해서, 사소한것은 불륜에서부터 시작해 굵직한 건 탈세라던가 허가받지 않은 비합법 사업체를 운용하는 등등. 귀족이라는 남부러울것 없는 신분임에도 잘도 저런짓을 했구나 싶을 정도로 온갖 추한 부분들이 주렁주렁 딸려나왔다. 그리고 그것을 교섭 재료로 들고 그들을 회유했다. 진석이 피터슨에게서 훔쳐내왔던 대량의 수표나 권리서들 역시 여기서 매우 유용하게 쓰였다.

애써 귀족 연맹의 전부를 만나볼 필요도 없었다. 나름 귀족 연맹 내에서 영향력이 있는데다 확실한 약점을 쥔 몇명만을 이쪽으로 끌어들인걸로 충분했다. 약점이 될만한 것들을 충분히 쥐고 있음에도 그것을 묵인한데다가 되려 더 큰 선물을 안겨주고나니, 적어도 이쪽이 적은 아니라는것을 인지한 그들은 무거운 엉덩이를 들어 이쪽을 지지하기로 노선을 전환했다. 그렇지 않아도 흉흉하던 귀족연맹내에서 새로운 움직임이 일어날 조짐이 보이니 이권에 눈치가 밝은 이들은 앞다퉈 알아서 레오노르 공주측을 찾아오기 시작했고 차후 이쪽을 지지해주기로 약속했다. 그와 더불어 도시 내 여러 유력자들을 회유하거나 협박, 제거하는 작업도 계속했다. 그렇게 한달 가량 지나니 귀족 연맹 전체가 레오노르 공주를 가네딘 후작에 이은 자신들의 대표자로 추대하고 있었고, 도시내의 유력자들 역시 그 태반이 향후 레오노르 공주를 지지하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모든 사전 작업이 마무리되고 레오노르 공주, 아니 이제 공작이 된 레오노르는 대전에서 당당히 자신이 왕위를 계승해야 함을 주장했다. 사유는 현 스테인필드 국왕의 실정. 레오로느는 자신의 아버지 해밀턴 후작과 가네딘 후작이 죽은것은 사실 스테인필드 국왕의 짓이었다고 밝혔다. 자신이 정체모를 괴물에게 납치당했던 것 조차 실은 조작이며 자신의 아버지 해밀턴 공작을 협박하기 위한 국왕의 음모였다고 했다. 모든것은 왕당파와 귀족연맹을 서로 충돌시켜 양측의 세력을 소모시키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음모였다고 주장한 것이다.

사실 현재 그란델의 국왕인 스테인필드는 현상유지를 하며 국고를 늘리는데만 관심이 있다보니 그닥 훌륭한 왕이라고 할 순 없었지만 그렇다고 나쁜 왕이라고 할만한 부분도 딱히 없었다. 하지만 레오노르는 그에게 자신의 납치 및 두 대귀족의 암살에 대한 누명을 씌우고, 작은 흠결들을 크게 부풀려 자신의 숙부인 스테인필드 국왕을 원색적으로 비난하며 왕위 계승의 정당성을 외쳤다. 아무리 레오노르가 왕과 가까운 왕의 친족이라고 한들 왕위를 내놓으라니. 정말 뜬금없는 요구였지만 귀족 연맹의 전원이 그 의견을 대대적으로 지지하고 나서니 이건 우습게 여길 일이 아니었다. 도시내의 세력가들 역시 레오노르 공주를 지지하는 여론을 형성하니 진퇴양난이었다.

그렇게 데오그라즈의 왕궁에선 뜬금없이 왕위를 놓고 집안싸움이 벌어진셈이다. 아무리 레오노르가 공작위를 가진데다 귀족 연맹의 지지를 업었다 한들 스테인필드 역시 한 나라의 국왕. 수도 데오그라즈와 그 부근의 병권은 전부 스테인필드에게 있었다. 말 한 마디면 즉시 병력을 소집해 실력행사로 들어갈수도 있었으나... 그렇다고 어린 생질을 상대로 내전을 일으킬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물론 스테인필드 역시 화가나지 않는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대로 집안싸움을 벌린다 한들... 결국 최후에 가선 귀족연맹 전체의 지원을 등에 업고 있는 레오노르가 이길 가능성이 더 컸다. 반대로 자신이 이긴다 한들 남은것은 반쪽이 나고 황폐해진 국토뿐. 더군다나 자신에게 힘을 실어줄 왕당파는 해밀턴 공작이 암살당하며 그 세력 자체가 유명무실해지기도 했다. 애당초 왕당파의 우두머리였던 해밀턴 공작은 자신의 동생 아니었던가. 그렇다고 형제간에 왕위를 놓고 서로간의 다툼이 있던것도 아니었다. 대체 자신이 뭐하러 생질을 납치하고 동생의 암살을 지시한단 말인가? 레오노르의 주장은 말도 안되는 것이었지만 원래 거짓말이란 거짓말을 하는쪽보다, 거짓말이 아님을 증명하는쪽이 더 불리한 법이었다. 게다가 스테인필드 국왕은 여론전에서 완전히 밀려있었다.

사흘밤낮을 꼬박 침식을 잊고 고심하던 스테인필드는 결국 그란델이라는 나라 전체를 온건히 보존하기 위해 레오노르의 퇴위 요구와 양위를 수용하기로 결정한다. 스테인필드가 조금만 더 과격하거나 급한 성정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대로 내전이 발발했을테지만, 그는 지금까지도 현상유지 노선을 고수하던 인물이었다. 그런 그에게 나라가 반쪽이 날만한 내전은 절대 있어선 안될 이야기였다. 차라리 자신이 모든걸 내려놓는 편이 나았다. 이렇게해서 전 국왕 스테인필드의 일가와 친족들은 근처의 작은 섬에 유배되었다.

그렇게 스테인필드가 물러나고 빈 왕좌엔 레오노르가 여왕으로 즉위했다. 모든 일은 미리안의 계획대로 잘 마무리 된 것이다. 진석이 아라파에서 벌였던, 번갯불에 콩 볶아먹듯 후다닥 벌인 피투성이의 쿠테타와는 정 반대인 무혈의 성과였다. 물론 그 이면에선 암살과 협잡같은 온갖 더러운 수단이 오고 갔지만 적어도 외부로 드러나 보이는 결과만큼은 정말로 깔끔했다. 그리고 맥과 머서는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일단 레오노르 여왕의 곁에 남았지만 드레비안과 제이스, 그리고 아르데나는 보고 겸 미리안에게 귀환했다고 했다. 하지만 드레비안은 도착하자마자 또 다시 미리안에게 개인적으로 어떤 임무를 부여받아 사원을 떠났고, 그 직후 진석이 도착한것이라고 했다. 이야기를 다 들은 진석은 팔짱을 끼며 생각에 잠겼다.

'아라파나 그란델이나... 왕위가 친족의 손에 넘어갔다는 결과는 같지만 과정은 정 반대로군.'

하디카에서의 소란과 알 유세피나의 안위를 이용해 왕을 속임수로 궁 밖으로 끌어내고 암살을 한 뒤, 그 누명을 다른자에게 덧씌우고 왕궁을 무력으로 강제 점거했던 진석의 계획. 게다가 한동안은 처절할 정도의 피의 숙청이 뒤따랐었다. 그것와는 달리 철저히 뒷공작과 야합을 이용, 정치적인 수단과 여론을 동원해 적어도 외부에서 보기엔 지극히 온건한 방법으로 왕위를 빼앗은 미리안의 방법. 그야말로 각자의 성격이나 성향이 그대로 드러나는 일처리였다.

사실 둘 다 단점이 있는 방법이었다. 진석의 방법은 사실 급진적인데다 정당성 면에서 떨어지니 반대세력의 격한 저항을 각오해야 한다는게 문제였다. 하지만 진석도 그 정도는 인식하고 있었으니 스스로 앞장서서 적어도 수도 내에서의 반대세력은 전부 힘으로 뭉게버렸었다. 그리고 미리안의 방법은 조력자로 끌어들인 수많은 귀족들에게 실질적인 보상을 해줘야 한다는 것이 문제였다. 약속대로 그들의 요구를 수용해 가진것을 하나 둘 퍼주다보면 레오노르는 서서히 빈 껍데기나 다름없는 허수아비 여왕으로 전락하리라. 그렇게 되면 또 다시 다른 누군가에게 권좌를 빼앗기지 말라는 보장도 없었다.

'물론 미리안은 기껏 빼앗은 그란델 왕국의 실권을 그런 돼지들에게 나눠줄 생각은 없을테지. 전쟁을 일으킬거라고 했으니까.'

미리안은 레오노르를 통해 의도적으로 주변국과의 전쟁을 일으키고, 그 와중에 허신의 강림을 위한 무언가의 이득을 취할터. 더불어 그란델의 수많은 귀족들 역시 아마도 숙청당할게 틀림없었다.

'그리고 미리안은 그 빈자리를 하나 둘 자신의 또 다른 수족들로 채워넣을테지.'

아라파의 창관에서 만났던 미겔슨. 올린스턴에서 상사를 운영하며 조력을 해줬던 포먼. 그리고 엠퍼슨 아카데미에서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아르데나에게 단시간 내에 전투기능을 학습시켜주었다는 포겔먼이란 인물 등. 그녀에겐 진석 자신이 모르는 또 다른 종류의 세력과 수하들이 얼마든지 자리하고 있었다. 게다가 헤세스 약품 통상과 현재 그곳에 속한채 뭔가의 정보 업무로 바쁘게 뛰어다니고 있는 엘리야. 또 수호자들을 통해 지시를 내리고 여러가지 더러운 일을 대행시키는 빅 본과 같은 폭력조직들까지. 이런 산 속의 사원에 틀어박혀 하루종일 서류와 씨름하고 있어서 그렇지... 그녀가 어둠속에서 부리는 수하들과 그 세력의 규모는 도대체 정확히 어느정도일까?

'그리고 그것들이 전부... 허신 하나의 강림을 위해 준비해온 것이라니. 이 메디니아라는 나라도 절반쯤은 미리안의 의지대로 움직인다고 했고...'

미리안의 뒤를 치고 교단의 세력을 자신이 빼앗겠다고 마음 먹긴 했지만 막상 제이스에게 이번일의 이야기를 쭉 듣고나니... 역시 쉽지 않겠구나 싶었다. 교단의 정점에 자리한 미리안을 쓰러트린다면... 아마 대륙 각지에 흩어진 교단의 세력은 그대로 뿔뿔이 흩어지거나 따로따로 와해될 가능성이 더 높을 것 같았다. 자신의 손에 온건히 넣을 수 있는건 아마도 극히 일부가 아닐까?

"아 그나저나... 레오노르 공주. 아니, 이젠 레오노르 여왕이지. 아무튼 그녀 말인데... 그, 음. 배, 배는 많이 불렀어?"

더듬더듬 말을 더듬고 부끄러워하며 제이스에게 레오노르의 안위를 물어보는 진석. 제이스는 지이이 하고 진석을 잠시 노려보다, 가볍게 한 숨을 내쉬곤 대답했다.

"홀딱 벗기고 확인해 보는게 아니라면 아직 그렇게 티가 날 정도는 아니야. 분명 이제 겨우 막 3개월쯤 됐던가? 아랫배가 약간 나오고 가슴도 조금 더 부풀긴 했지만... 딱히 몸매가 드러나는 옷을 입을 일이 있는것도 아니니 나서서 바깥활동을 하는게 아니라면 당장은 누가 알아채는 일은 없지 않을까? 현재 그녀의 곁을 지키고 있는건 맥과 머서고, 수발을 들어주는 하녀들 역시 우리측의 젊은 여자 신도들이라서."

그런가. 그런쪽으론 또 꼼꼼하구만. 그나저나 벌써 임신 3개월이라.

'으음... 내가 아, 아빠인건가. 이거 비록 게임상에서긴 하지만... 꽤나 낯부끄러운걸.'

하긴 거의 열흘 가까이 붙들어놓고 그렇게까지 쉼없이 자궁이 넘쳐날 정도로 사정을 해댔으니 애가 안 생기면 그게 더 이상하지. 어쨌거나 애가 생겼다니 뭔가 미묘하게 두근거린달까 기대가 됐달까. 복잡미묘하면서도 조금은 흥분되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앞으로의 일이 미리안의 계획대로 흘러간다면 곧 전쟁이 날테고, 허신의 강림을 위한 매개물을 모으는 작업도 앞으로 기껏 한 번 정도면 끝나지 않을까 싶으니. 미리안을 도와 허신을 강림시킨다면... 잘해봐야 애가 태어나자마자 세상 쫑나겠군.'

반대로 미리안을 물리치고 레오노르가 자신의 아이를 무사히 낳아 기른다면... 이래저래 논란이야 있겠지만 어쨌든 그 아이는 그란델 왕국의 후사가 된다. 허나 대외상으론 클립튼이 레오노르를 강간하려다가 드레비안과 맥, 머서에 의해 발각당해 붙잡혔다가 리들리와 모데로를 비롯한 조력자들의 도움으로 탈출한걸로 알려져 있으니... 어쩌면 레오노르가 아버지 모를 아이를 낳는다면 클립튼의 아이로 생각할 호사가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뭐 기간도 얼추 맞을테니. 진석이 그런식으로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있자, 이번엔 제이스가 진석에게 질문했다.

"저기. 그보다... 러셀은 그간 무슨 일을 했던거야? 분명 성별 전환의 팔찌로 위장한채 아라파로 떠났을때가 마지막이었는데. 거기선 무슨 일이 있었던건지 한 번 이야기 해봐."

제이스의 질문에 아르데나도 궁금하다는 듯 몸을 기울여오며 눈을 빛냈다. 그러고보니 이 3개월간 대륙을 서에서 동으로 해로와 육로로 각기 왕복하고 북쪽에도 가서 한 바탕 난리를 치르고 왔군. 진석은 고개를 끄덕이곤 제이스와 아르데나에게 그간 있었던 일을 적당히 가감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셀린과 케이트 역시 진석과 만나기 전, 자신들이 모르는 주인의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점점 빠져들어갔다.

적당히 앞뒤를 더하거나 잘라낸 이야기를 들려주고 나니... 어느새 창 밖으론 해가 기울고 있었다. 하긴 3개월간의 이야기였으니 적당히 정리했다고 해도 나름대로 꽤나 길었다. 하지만 르마쿠르 자매에 대한 이야기는 생략했다. 그녀들도 아라파에서 있었던 일들 중 나름대로 중요한 한 축을 담당하긴 했지만 여자로 변해있던 경험이 매우 짜증났던 일인것처럼 둘러대며 의아하게 여길수도 있는 세세한 부분은 싹 축약해버렸다. 새로운 무구를 얻었던 비더하임의 스마이쉬산에 갔던 이야기도 했지만, 그 황무지 지역 유일한 레인저의 아내인 아이린과 재미를 봤다던가, 파나히라는 거인족 소녀를 만났던 이야기도 쏙 빼버렸다.

반면 애거스트 공화국에서 만난 클립튼 일행에 대한 이야기는 아주 상세히 해주었다. 그들의 면면이나 구성, 무장이나 실력 수준에 이르기까지 기억나는 모든걸 설명했다. 제이스는 의문의 인물들이 나타나 탈출시킨 클립튼이 그곳까지 도망쳐 진석과 만나 한바탕 충돌을 벌였다는걸 깨닫곤 적잖이 놀라는 눈치였다. 진석의 이야기가 올린스턴 공화국에까지 이른 다음, 올린스턴에서의 일을 거쳐 옐 프람의 수도 옐 프라나에서 놈들을 또 다시 만났다는 부분에까지 이르렀을땐 제이스 뿐만 아니라 아르데나도 제법 심각한 표정이 될 지경이었다. 셀린과 케이트 역시 그날 새벽 주인인 진석이 왜 밖에 나갔고 또 무슨일이 있었던건지 상세한 설명을 듣곤 자신들이 몰랐던 주인의 실체를 깨달으며 상당히 흥미로워 하는것 같았다. 물론 성광의 반지 스플렌도르에 대한 이야기는 당연히 꺼내지 않았다.

그렇게 긴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나니 어느새 저녁 식사 시간이 되었다. 저녁 풍경은 이전과 별 다를것 없었다. 사원내의 모두가 함께 모여 식사하는 지극히 평화로운 모습. 식사 도중, 미리안이 다른 신도들의 앞에서 셀린과 케이트를 지목하며 그녀들은 수호자들의 일을 돕는 조력자들이니 앞으로 편하게 대하라는 소개를 해주기도 했다. 식사가 끝나고 두 노예와 함께 방에 돌아온 진석. 잠시 쉬고 있자 낯이 익은 여신도 하나가 문을 두드리곤 대신관님이 호출했다며 셀린과 케이트는 놔두고 혼자서 그녀의 방으로 오라는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진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대로 두 노예를 방에 머무르게 하고 홀로 미리안의 방으로 향했다. 방문 앞에 다가가 가볍게 노크를 하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지체없이 미리안의 대답이 들려왔다.

"네, 들어오세요."

끼익.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서류가 쌓여있는 자신의 책상 앞이 아닌, 응접용 테이블의 의자에 앉아있는 미리안의 모습이 보였다. 평소처럼 새하얗고 품이 넉넉한 법복이 아닌 평범한 소녀의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저건 분명 기억에 있는 복장이었다. 분명 진석이 맨 처음 이곳에 방문했을때 자신을 떠볼 겸 속이기위해 가장하고 있던 검은색 원피스 차림이었다. 머리도 그때와 똑같이 한 갈래로 땋은데다, 그 끄트머리는 빨간 리본으로 묶은채였다. 진석은 방안에 들어가 테이블 위에 슬쩍 걸터앉으며 물었다.

"...어째서 그 차림을?"

"그냥요. 이따금 기분 전환이랄까요? 솔직히 이쪽 복장이 편하기도 하고."

그렇게 말하며 생긋 웃어보이는데... 그야말로 잡티 한점 없는 밝고 환한 미소다. 정말로 외모만 보자면 천사가 따로없다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평소의 법복 차림이 아닌 평범한 아이같은 차림새를 하고 있으니... 도무지 자신이 타도해야 할 대상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하지만 진석은 내심 마음을 다잡았다.

'안 돼. 더 이상 넘어갈 순 없지. 얘가 애들한테 약한 내 성격을 이용해 이리저리 휘둘러 이용해 먹고 있다는 건... 누구보다 나 스스로도 잘 알고 있거든.'

하지만 티를 낼 순 없지. 진석은 가볍게 웃어보이곤 손을 뻗어 미리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대꾸했다.

"음음, 그래. 귀엽네."

"아, 아이참~ 이래뵈도 오빠보다 내쪽이 훨씬 나이 많은데! 하지만 뭐 싫다는건... 아니지만요."

얼굴을 슬쩍 붉히며 수줍게 대꾸하는 미리안. 어... 소, 솔직히 무진장 귀엽다. 끌어안고 볼이라도 부비고 싶을 정도였다. 허나 뱃속엔 구렁이가 수십마리는 들어앉은 주제에 잘도 이렇게 평범한 아이처럼 굴다니... 정말 요물이 따로없구나. 진석은 평정을 유지하며 그녀에게 질문했다.

"에... 그래서. 이번의 용무는?"

"응. 그렇네요. 다른게 아니라 이제 오빠에게도... 이 사원의 '지하'에 대한것을 알려드려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요."

그렇게 태연히 진석을 올려다보며 배시시 웃는 미리안. 허어, '지하'라? 분명... 예전 레오노르 공주를 납치해서 이 사원까지 데려왔을때 한 번 들은기억이 있었다. 궁금하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딱히 캐물을만한 핑계도 없어서 그냥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이제와서 그게 뭔지 알려주겠다 이건가? 진석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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