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12. -- > * 139화 *
지하로 내려가는 문은 사원의 맨 안쪽 구석에 있었다. 처음엔 너무 허름해 보여서 그냥 창고나 쓰이지 않는 방 정도인줄 알았다. 좌우지간 문을 열고 보니, 지하로 내려가는 나선형 계단이 나타났다. 진석은 앞장 선 미리안을 따라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생각보다 깊은데?'
계단은 생각보다 긴것이, 대강의 길이로 어림짐작 해보건데 보면 거의 한 5-6층 깊이쯤 될 것 같았다. 계단을 끝까지 내려가고나니 엄중해 보이는 철문이 나타났다. 튼튼해 보이는 자물쇠가 달려있었지만 잠궈놓진 않은 모양이었다. 미리안이 끄응 하고 힘주어 묵직한 철문을 잡아당기길래 뒤에서 지켜보던 진석이 한 발 앞으로 나서 대신 문을 잡아당겨 열어주었다.
'오, 이 문 진짜 제법 무거운데.'
진석이 대신 문을 열어주자 미리안이 뒤를 돌아보며 미소지었다.
"고마워요."
"아니 뭘. 천만의 말씀을."
그러고 안으로 들어서려고 했는데, 철문의 안쪽은 아무런 광원도 없는지 어두침침했다. 진석이 달리 횃불이나 램프를 가지고 오지도 않았는데 화염화살이라도 쓸까 하고 생각할때쯤 미리안이 먼저 안으로 들어서며 손가락을 딱 튕겼다. 그러자 진석과 미리안이 서 있는 입구에서부터 복도 저 끝까지 차례대로 천장과 벽에 불이 타다닥 켜지기 시작했다. 아니 딱히 조명이 될만한게 있는것도 아닌데 뭐가 빛을 내는건가 호기심이 들어 자세히 살펴보자니... 손바닥 만한 크기로 가공된 야광석 패널이 벽과 복도에 규칙적으로 붙어 조명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야광석 패널의 옆엔 자그마한 마정석 조각들이 함께 붙어있는것이, 아마도 야광석에 마법적인 가공을 거쳐 특정한 신호를 주면 빛이 들어오게끔 만들어둔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빛은 야광석이 기본적으로 낼 수 있는 빛보다 훨씬 밝았다. 거의 일반적인 전기등을 켜놓은 수준의 밝기랄까?
'야광석을 이용한 조명이나 가구를 본 적은 있지만... 이런건 또 처음인데. 신기하군.'
그리고 복도를 따라 이어진 양쪽으론 두터워 보이는 철문이 잔뜩 늘어서 있었다. 문 마다 엄중해보이는 자물쇠가 달려있고 사람 눈높이쯤 되는 부분엔 작은 여닫이 창이 달려있는것이, 딱 봐도 감옥이나 수감시설을 연상시켰다. 진석은 미리안을 바라보며 물었다.
"여긴 뭐지? 설마 감옥?"
미리안은 미소를 띄운채 양팔을 벌리고 한바퀴 빙글 돌며 복도 안쪽으로 걸어들어갔다.
"네. 보시다시피 필요한 재료들을 가둬두기 위한 수용시설이에요. 지금은 전부 비어있지만요. 복도 왼쪽은 독방. 그리고 오른쪽은 최대 10인까지 가둬둘 수 있는 다인실이에요."
재료를 가둬두기 위한... 수용시설? 진석은 미리안의 말을 의미심장하게 새겨들으며 그녀의 뒤를 따랐다. 미리안은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계속 설명했다.
"아실런지 모르겠지만 인간의 영혼이란 것은... 굉장히 효율적이고 좋은 소재니까요. 한때는 이곳이 가득차 빈 자리가 없을 정도로 재료들을 채워두고 여러가지 일에 쓰기도 했었지요."
길고 조용한 복도엔 미리안의 천연덕스런 설명과 건조한 걸음소리만이 울렸다. 방금전까진 천사만큼이나 귀엽다고 느낀 미소였지만, 창백한 야광석의 빛을 받으며 긴 복도를 걸어가는 미리안의 미소는 이제 어쩐지 섬뜩하게 느껴졌다. 진석은 아무 대꾸없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이거 뭐... 악의 실체에 접근해가는 공포영화의 주인공이라도 된 기분이구만.'
복도끝에 다다른 미리안은 또 다시 안쪽으로 이어진 문을 열었다. 또 다시 어두운 복도가 나왔다. 손가락을 튕기자 야광석 패널들이 재차 복도를 밝혀주었다. 짧은 복도는, 좌우와 정면의 세갈래로 갈라져 있었다. 총총 걸어가 갈림길의 한가운데 선 미리안은 왼쪽과 오른쪽의 복도를 각기 가리켜보이며 말했다.
"왼쪽은 실험실. 그리고 오른쪽은 정제실. 헤세스모데우스님이 하사한 인간의 영혼을 다루는 능력을, 저는 오랫동안 여러모로 유용하게 쓸 수 있도록 연구해왔거든요."
실험실에다가... 정제실? 방금 미리안은 인간을 재료라고 표현한데다가 영혼이 좋은 소재라고 말했었다. 게다가 그걸 유용하게 쓸 수 있도록 연구해왔다니. 그럼 복도 양 끝에 있는 저 두 방 안에서 무슨일이 있었는지는... 굳이 더 듣지 않아도 대충 짐작이 갔다. 보나마나 저 안엔 끔찍한 무언가가 들어차 있으리라.
'항상 웃는낯에 존대를 하고... 오빠~ 하면서 친근하게 애교를 떨어왔던터라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렇지. 얘는 세계를 말아먹으려는 사교집단의 장이었어.'
미리안은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진석의 손을 붙잡아 이끌고 정면으로 이어진 복도 안쪽으로 향했다. 복도 안쪽엔 커다란 나무문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그 부근에서부터 미묘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아니, 이건 위화감 따위가 아니라... 분명 저 안에 들어가서는 안된다는 위기감이랄까? 직감이나 육감. 말로는 표현못할 그런 무언가가 저 문 안쪽이 위험하다는 경고를 날리고 있었다. 하지만 진석은 미리안의 손에 이끌려 어쩔수없이 문 앞까지 다다르고 말았다. 미리안은 한 손으론 진석의 손을 마주 쥔 채 다른 손은 문 손잡이에 올렸다.
"그리고 이 문 안쪽엔 이 사원에서 가장 중요한 시설이 위치하고 있답니다."
벌컥. 미리안은 활기찬 표정으로 망설임없이 문을 열어제꼈다. 문을 열자 안에서부터 피부를 찌를듯한 사이한 공기가 화악 밀려나오는것이 느껴졌다. 안은 돔처럼 반원형의 천장을 가진 넓은 석실이었다. 음습한 석실의 벽면엔 의미를 알 수 없는 괴이한 문양이나 그림들이 빼곡하게 음각되어 있었다. 진석은 미리안의 인도에 따라 함께 안쪽으로 들어섰다.
'이건... 제단인가.'
바닥 한가운데엔 보는것 만으로도 현기증이 날 정도로 복잡한 오망성 형태의 커다란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마법진을 구성한 선이나 문자들이 바닥에 시커멓게 말라붙어 있는것이... 이 마법진은 아마도 피로 그린것 같았다. 게다가 한 번에 그린게 아니라 그 위로 몇 번이나 반복해가며 덧칠한것 같았다.
'이만큼 대량의 혈액을 사용해 몇번이고 반복해서 마법진을 덧그렸다면 최소 사람 몇 명분의 생피를 몽땅 비틀어 짜냈겠군.'
그리고 오망성의 각 끄트머리 다섯 곳엔 두 뼘 정도 되는 높이의 작은 단이 설치되어 있었고 그 중 네 곳엔 기물들이 올려져 있었다. 대부분 눈에 익은 것들이었다.
'폭풍의 지팡이, 대지의 눈, 그리고 창염의 검.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뭐야 저거. 나뭇가지인가? 아님 막대기? ...아!'
한참을 보고서야 겨우 떠올랐다. 저 막대기 같은 물건은 자신이 오래전 빅 본의 데오그라즈 지부를 털때 래스커를 쓰러트린 후 금고에서 돈과 함께 훔쳐내었던 물건이었다. 저걸 챙겼다가 이 모든 일이 시작되었던거 아니던가. 그땐 단순히 뭔지 모를 퀘스트의 키 아이템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저것 역시 뭔가 중요한 물건이었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오망성이 그려진 이 마법진의 다섯 모서리에 올려놓을 물건 중 이미 네 가지가 채워졌으니... 이제 남은건 예상대로 물을 상징할만한 물건뿐인가보군.'
그리고 마법진의 한 가운데엔 제단이라고 할만한 커다란 단상이 자리잡고 있었다. 단상의 바로 뒤쪽엔 단상과 연결된 사람 키높이만한 원통형의 유리 기둥 같은것이 있었는데, 그 안엔 검은색의 걸쭉한 액체같은것이 절반가량 채워져 있었다. 미리안은 진석의 손을 놓고 마법진쪽으로 다가서며 설명했다.
"이곳이 바로 헤세스모데우스님을 소환하기 위한 제단입니다. 만물의 근간인 4대 원소를 상징하는 강력한 기물들. 그리고 그것을 하나로 묶을, 세계를 창성했다는 세계수의 가지 일부. 그것들을 이 세계를 구성하는 것들을 연원역행진을 유지할 바탕으로 삼아... 국소적이나마 시공의 균열을 일으켜 경계를 무너트린 후, 그 틈새에 허차원과 연결되는 통로를 열겁니다."
미리안은 뒷짐을 진채 바닥에 그려진 둥그런 마법진의 주위를 천천히 걸어나가며 계속 떠들었다.
"그러나 인위적으로 열 수 있는 타차원과의 통로래봐야 아주 작고, 또 그리 오래 지속되지도 못합니다. 왜냐하면 이 차원통로를 설계한 기본 개념 역시 마법을 쓰는 원리와 그닥 다를 바 없으니까요. 러셀 오빠 역시 간단하나마 마법을 사용할 수 있으니 아마도 아실테지만... 마법을 쓰는 방법은 자연중에 흩어진 무형의 에너지를 끌어모아 마력으로 치환해, 특정한 공식과 흐름에 따라 4대 원소라는 형태로 변형시켜 발현하는 거지요. 그렇게 몸 밖으로 투사되어 사용된 마력은 결국 자연중에 환원되기에, 궁극적으로 이 세계의 에너지는 그 절대적인 총량을 오롯이 유지하죠. 이 연원역행진으로 열 차원통로 역시 다른 마법들과 마찬가지로 그 자체로도 끊임없이 소진되며 자연적으로 흩어지게 되어있습니다."
말을 빙빙 돌려서 좀 알아듣긴 힘들었자만... 이거 분명 열역학 제 2법칙 비스무리한 소리잖아? 진석은 쉽사리 이해하기 힘든 미리안의 말에 집중했다.
"더 큰 문제는 현세를 유지하고 있는 구심력이죠. 그 구심력이란 일종의 관성과도 같은것이라, 언제나 이 세계 자체를 원형 그대로 유지하려고 한답니다. 다른 차원간의 경계같은게 생겨나면 자체적으로 구멍을 메우고 그 틈을 수복 하려 들테죠. 즉 차원통로를 연다 한들 그 자체로도 빠르게 소진되는데다 세계를 유지하려는 구심력의 수복능력까지 더해져서... 차원통로는 정말로 금세 닫힐겁니다. 하지만 헤세스모데우스님을 이 세계에 강림시키는데엔 그 찰나만으로도 충분하답니다. 한 번 차원통로를 열면 그 이후엔 헤세스모데우스님의 힘으로 통로가 유지되고 더욱 크게 넓혀지며 이 세계에 허무 그 자체를 가득 채워나가겠죠. 그것이 내가 바라는 진정한 미래, 영구한 평온... 그러나 이 모든것에 앞서 차원통로를 만들어낼 연원역행진을 가동하기 위해선 아무리 찰나뿐이라 하더라도 상상도 못할 정도의 어마어마한 기반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이것."
미리안은 중앙의 제단을 지나 그 뒤쪽으로 다가가 정체모를 검은 액체가 들어차있는 유리기둥의 겉면을 한 번 쓰윽 쓰다듬었다.
"이쯤되면 짐작하시겠죠? 이 안에 들어있는 액체는... 인간의 영혼을 에너지화 한 것입니다. 한 사람의 영혼을 변환시키면 겨우 두세방울이나 나올까 말까 할 정도랄까요."
유리기둥의 지름은 거의 어지간한 드럼통만한 둘레다. 그것이 사람의 키 높이. 내용물은 절반가량 차 있으니...
'고작 몇방울이 한 사람의 영혼이라면... 저 안엔 도대체 얼마만큼의 사람을 쥐어짜 넣었다는거야?'
뿌듯한 표정이 되어 잠시 인간의 영혼이 채워진 유리기둥을 바라보던 미리안은 연원역행진을 지나 진석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진석에게 다가온 미리안의 얼굴엔 조금전까지 자연스레 지어보이던 미소따윈 어쩐지 깔끔히 사라져 있었다.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인형같은 표정. 진석은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걸 직감했다. 하지만 금세 코앞까지 다가온 미리안은 진석을 빤히 올려다보며 물었다.
"그런데 어째서일까요. 저는 러셀 오빠가 여러모로 고민하면서도 결국은 끝까지 이 대업을 도와줄거라 믿었는데. 그 능력을 높이샀기에 원하는건 모두 들어줄 생각이었고, 또 얼마든지 더 내어줄수도 있었는데. 대체 무엇 때문에 어리석은 생각을 품게 되었을까요?"
순간 진석의 사고가 정지했다. 척추를 타고 얼음조각이 흘러내리는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그야말로 영점 몇초의 찰나. 진석은 반사적으로 성광의 반지 스플렌도르를 통해 에그레기움을 사용했다. 아니, 사용하려 했다. 하지만 스플렌도르는 묵묵부답이었다. 스플렌도르에선 어떠한 반응도 일어나지 않았다.
'어... 어째서?!'
믿고 있던 성광의 반지가 반응하지 않자 당황한 진석은 자리에 그대로 굳어 선채 어쩔줄 몰라했다. 그리고 미리안은 그런 진석을 동정하는듯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하, 다른 신의 성물이라니. 대충 알고 계시지 않았나요? 이래보여도 저에겐 사람의 감정을 읽거나 사물의 본질을 간파하는 능력이 있다는걸. 그런 제가 다른 신의 성물씩이나 되는걸 눈치채지 못했을거라 생각하셨던 건가요? 그리고 내 입맞춤. 단순히 힘을 나눠주기 위한 장난같았나 보죠?"
마, 망할. 그렇다면 미리안은... 처음부터 자신이 성광의 반지를 지니고 있던걸 알고 있었단 말인가? 입맞춤 역시... 단순히 세인트 베니딕션이라는 축복을 걸어주기 위한것만이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그것이 정확히 어떤 작용을 했는지는 몰라도 분명 자신의 생각이나 마음을 미리안에게 완전히 노출시켰다는 의미. 미리안의 기세에 눌린 진석은 주춤거리며 자신도 모르게 뒤로 두어걸음 물러나버렸다. 진석이 당황해하자 미리안은 무표정한 얼굴 위로 풍부한 감정이 담긴 미소를 아주 자연스레 지어보이며 양 팔을 펼쳤다.
"다른곳에서라면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었을테죠. 하지만 이곳은 '성역'. 이 공간만큼은 헤세스모데우스님의 절대적인 가호가 서려있는 곳입니다. 다른 신의 힘이 함부로 침범할 수 있는 곳이 아니지요."
그래서... 그래서 이 안에 들어오기 전부터 말로는 표현 못할 위험한 기분이 들었던걸까. 미리안은 원피스의 치맛자락을 쥐고 그 끝을 팔락팔락 장난스레 흔들며 진석을 비웃었다.
"절 죽이고 싶었던 건가요? 세계를 멸망시키고 싶지 않아서? 아니면 달리 무슨 헛된 욕심이라도 있었던걸까요? 응? 뭐라고 말 좀 해보세요."
"......"
글렀다... 다 틀렸다. 다른 신의 힘이 침범하지 못하는 성역이라. 애당초 자신에겐 스플렌도르를 통한 에그레기움이 유일한 승부수였는데 지금 여기서 그걸 사용하지 못한다면... 미리안에게 대적할 수 있을리가 없었다! 진석은 이마에 식은땀이 맺히는걸 느끼며 이를 악물고 흑철단검과 란비언을 뽑아들었다.
"호오. 순순히 포기할거라 생각했는데 저항을 할건가요? 허신의 힘이 서려있는 성역에서! 그 모든 가호를 받는 대신관인 나를! 진심으로 상대할 수 있을거라 생각했단 말이죠? 온갖 말도 안되는 일들을 쉽사리 척척 처리해오던 러셀 오빠의 능력 만큼은... 정말이지 대단히 높이 사고 있었는데. 이런 상황에서도 항복하지 않고 무기를 뽑다니. 정말 무모하네요. 실은 사리 판단조차 제대로 못하는 얼간이였던건가요? 하긴. 눈꼽만한 힘을 손에 넣었다고 날 배반하겠다는 어리석은 생각을 품은걸 보니, 분명 바보가 맞나보군요."
진석을 한껏 비웃은 미리안은 천천히 오른손을 뻗었다.
"그럼 어리석은 바보에게는 그에 걸맞은 대접을 해드리죠. 침잠무."
"시클론, 라파가!"
미리안이 뭔가의 힘을 발하는 것과 동시에 진석 역시 시클론을 사용해 자신의 속도를 가속하며 미리안을 노리고 라파가를 걸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미리안과 자신의 사이에 희뿌연 안개의 구체가 갑자기 생겨났다.
'뭔진 몰라도 저거 틀림없이 위험하다!'
직감적으로 라파가의 궤도를 틀어 안개의 구체를 피해가려는 진석. 하지만 다음 순간 안개의 구체는 파앗 하고 두 배로 커지며 고오오오 하는 낮은 소리를 내며 주변의 모든것을 진공청소기처럼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크으읏?!"
어찌나 흡입력이 좋은지 화살만큼이나 빠르게 달려나가던 자신의 몸체가 그대로 안개의 구체쪽으로 끌려들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겨우 몇미터 떨어져 있는 미리안은... 지극히 멀쩡했다. 옷자락 하나 흔들리지 않는것이, 저 구체의 흡입력이 적용하는대상은 오로지 자신뿐인듯 했다.
'이런 젠장!'
상체에 두른 암살자의 망토가 당장이라도 찢어질듯 미친듯 펄럭였다. 마치 몰아치는 강풍에 저항하듯 무게 중심을 한껏 낮춘 진석의 몸체는 애쓰는 보람도 없이 서서히 안개의 구체쪽으로 질질 이끌려갔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아무것도 못해보고 이렇게 단 한 방으로 끝이란 말인가? 아니... 그럴순 없어!'
진석은 필사적으로 이를 악물고 미리안을 향해 온힘을 다해 흑철단검을 투척했다. 하지만 진석의 강력한 힘으로 던진 단검 조차 채 얼마 날아가지 못하고 그 도중 안개의 구체에 휘말려 빨려들듯 사라져 버렸다. 진석의 몸체 역시 점점 더 끌려가 이젠 거의 구체에 휩쓸릴 지경이 되어있었다.
"큿, 이런식으로 끝날수는...!"
에라 모르겠다! 성광의 반지를 쓸 수 없다면, 이건 어떠냐!
"나와라 아르도르여! 불태워버려!"
진석은 건틀렛을 낀 오른주먹을 불끈 움켜쥐며 아르도르를 소환했다. 석실은 그런대로 넓은편이긴 하지만 이 안에서 적룡의 브레스가 발해진다면... 이 공간 전체에 불길이 가득 차버릴터! 그렇게되면 플라메우스의 효과로 화염에 대한 피해를 절반밖에 받지 않는다 한들, 자신 역시 무사하지 못하리라. 하지만 당장 안개의 구체에 빨려들어 소멸될 판인데 그런거 가리게 생겼냐? 혼자 죽느니 차라리 같이 죽자!
"쿠오오오!"
다른 신의 힘을 빌어오는 성물인 성광의 반지는 쓸 수 없었지만, 플라메우스는 신력이 아니라 그저 용의 브레스 웨폰을 소환하는 힘이라 그런지 다행히 정상적으로 작동했다! 거대한 아르도르의 머리가 나타나 석실 천장 한켠을 빈틈없이 채웠다. 미리안은 눈살을 찌푸리며 브레스를 쏘기위해 힘차게 숨을 들이마시는 아르도르를 노려보았다.
"이런... 그러고보니 그런게 있었지요. 발버둥을 치는군요."
"카아아아아-!!!"
아르도르의 거대한 입이 벌어지며 석실 안쪽을 향해 폭염을 내뿜으려던 순간, 미리안은 두 손을 뻗어 새로운 주문을 발했다.
"공허의 심무."
사아아악. 순식간에 아르도르의 머리 주위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만치 짙은 안개가 둘러쳐졌다. 평소대로라면 모든것을 녹일듯 뿜어졌을 아르도르의 폭염은... 고작 수미터밖에 안되는 안개를 통과하지 못하고 그냥 안개속으로 허무히 흩어져 사라졌다! 게다가 안개가 서서히 움직여 아르도르를 감싸자 아르도르의 머리 역시 안개속에 그대로 집어삼켜져 없어지고 말았다.
'아, 아니... 이건 해도 너무하잖아! 이렇게까지... 이렇게까지 압도적이라니...!'
다음 순간, 미리안이 다 쓴 물건을 치우듯 손을 휙 내젓자 그 즉시 진석을 빨아들이려던 안개의 구체나 아르도르를 집어삼킨 공허의 심무 역시 눈 녹듯 싹 사라져버렸다. 힘을 주고 버티어 서있던 진석은 빨아들이던 힘이 사라지자 자기 힘을 이기지 못하고 옆으로 몇걸음 휘청이다 바닥에 털썩 주저 앉아버렸다. 그야말로 얼빠진 모습이 되어 지친 숨을 헉헉 몰아쉬는 진석. 미리안은 그런 진석을 안쓰럽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고작 이 정도의 힘으로 날 쓰러트릴 생각이었다니. 너무 하잘것 없어 서글플 지경인걸요."
미리안의 비아냥을 들은 진석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순순히 이 석실 안까지 따라들어온 자신의 어리석음을 후회했다.
'아무리 미리안이 강하다고 해도 정상적인 방법으로 적룡의 브레스를 이렇게 깔끔히 지워없앨순 없을텐데... 그, 그렇군. 이 안은 허신의 힘이 서려있는 성역이랬었지. 그럼 허신의 대신관인 미리안은 당연히 이 공간 안에선 그 힘이 끝도 없이 강해진다는 이야기일터. 내가 배신할 마음을 품고 있다는걸 눈치채곤 일부러 날 여기까지 데려온거군. 이 안에서라면 내가 무슨짓을 하건 간단히 제압하고 이길 자신이 있었을테니. 늘 입고 있던 법복이 아니라, 내가 처음 이 사원에 왔을때 날 떠보려 입었던 평범한 복장을 하고 있었던것도... 실은 내 속마음을 눈치채고 조롱하는 의미였던 건가.'
강력한 흡입력으로 움직임을 봉쇄하는 안개의 구체때문에 장기인 바일리 델 비엔토의 빠른 몸놀림은 통하지 않는다. 비장의 한 수 였던 아르도르의 폭염은 봉쇄되었고, 이거면 미리안을 잡을 수 있을거라 생각했던 성광의 반지는 아예 쓸 수 조차 없다. 이제 남은건 암살자의 망토를 이용한 투명화나 화염화살 정도. 하지만 고작 그딴걸로 미리안을 이긴다니. 어불성설이다.
'진짜 한심하구나. 포기하고 항복해야 하나? 아니, 이제와서 항복한들 미리안이 날 살려줄까? 끄응... 여기서 죽고 게임오버 당한다면...'
마지막으로 저장했던 지점은 분명... 케이트를 되찾으려 왔던 그녀의 오빠 카일을 상대하기 직전이다. 이제와서 거기서부터 다시 해야한다고? 하지만 달리 어쩔 도리가 없었다. 지금 자신의 생사여탈권은 전적으로 미리안의 손에 달려있었다. 미리안은 흥 하고 낮게 코웃음 치며 진석에게 다가와 서서히 손을 뻗었다.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이제와서 절 배신하려 한 건 화가 나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여러모로 노력해준건 사실이니, 적어도 최후는 고통없이 보내드리도록 하지요."
...에라이 씨발. 결국 여기서 죽는구나. 하지만 할 수 없었다. 이 성역 내에선 무슨 수를 쓰더라도 미리안을 이길 수 없을터. 이 안에서의 그녀야 말로 진정 무적에 가까운것 같았다.
'미리안의 말대로 고작 작은 힘 하나를 손에 넣었다고 내가 너무 들떠있었어.'
세계멸망을 획책하고 이만큼 실행해온 상대의 뒤통수를 치는일이 그리 쉽게 될리 없지! 스스로가 한심스럽기도 하고 분하기도 했지만... 진건 진거다. 아쉽지만 과거의 지점부터 다시 로드해서 하는 수 밖엔. 진석은 곧 다가올 죽음을 직감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 작품 후기 ============================
로쥬앙7님이 대화가 90~00년대 미연시나 만화같다고 하셨는데..
네 사실입니다. 실제로 저는 PC98이나 도스 시절의 미연시를 하면서 큰, 소위 아재다보니.. 음 이거 나이가 드러나는군요. 안 그래도 요새 잘 안섭니다. 으흐흑.. OT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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