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12. -- > * 140화 *
"안돼에에에!"
그야말로 피를 토하는 것 같은 절규. 이미 게임오버를 각오하고 있던 진석은 느닷없이 들려온 외침에 깜짝 놀라 눈을 떴다. 입구쪽엔 어딘가 익숙한 실루엣의 누군가가 서있었다.
"엇... 아, 아르데나?"
아니, 아르데나가 어째서 여기에?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아르데나의 표정은 필사적인데다 눈빛에는 활활 타오르는 것 같은 붉은빛이 도는게... 그녀는 이미 진석 자신이 위험한 상황임을 파악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호오?"
진석에게 내민 손을 거두지 않은채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어보이는 미리안. 그 얼굴은 '마치 네가 뭘 할 수 있는데?'하고 반문하는 것 같았다. 아르데나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더니 곧바로 거대한 문짝을 붙잡고 힘을 쓰기 시작했다.
"오빠에게서..."
마치 늑대가 사냥감의 목덜미를 물고 숨을 끊기 위해 좌우로 흔들어대듯, 아르데나 역시 단단히 붙잡은 문짝을 양 옆으로 마구 흔들어댔다. 와득, 뿌드드득! 콰지직! 어찌나 힘이 좋은지 문을 고정시키는 경첩들이 단숨에 부숴져 나가버렸다.
"떨어져-!!!"
안쪽으로 한 발 내딛으며 벽에서 완전히 떼어낸 커다란 나무문을 화악 집어던지는 아르데나. 큼직한 문짝은 마치 대포알같은 기세로 이쪽을 향해 날아들었다. 미리안은 기가차다는듯 코웃음을 치며 손을 떨쳤다. 그러자 미리안의 모습이 안개처럼 흐려지나 싶더니... 다음 순간 20여미터쯤 떨어진 저 뒤쪽에서 나타났다.
'좌, 좌우지간 기회다!'
진석도 몸을 일으키며 뒤로 몸을 날렸다. 다음 순간 진석과 미리안이 서있던 자리로 아르데나가 뜯어던진 문짝이 날아와 콰자작 하고 부숴졌다. 진석에게서 미리안을 떨어트린 아르데나는 허둥지둥 진석을 향해 달려오며 외쳤다.
"오빠! 괜찮아요?!"
하지만 진석은 진석대로 아르데나를 향해 손을 내저으며 다급하게 외쳤다.
"들어오지마! 밖으로 나가!"
이 석실 안쪽은 헤세스모데우스의 성역. 밖이라면 혹시 모를까, 이 안에서는 미리안을 상대로 싸워서 절대로 승산이 없다! 아르데나는 진석의 외침에 제자리에 멈춰서면서 곤혹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 하지만!"
"설명은 나중... 으아악!"
순간 뒤에서 뭔가 날아와 등에 맞았다! 마치 총격이라도 당한 듯 그대로 앞으로 팩 나자빠지는 진석. 뭘 맞은건진 모르겠지만 체력이 단번에 위험수준까지 줄어들고 시야가 흐려지는것이... 빈사상태가 되어버렸다! 위, 위험해! 빈사효과로 인해 정말로 목숨이 경각에 달린 사람마냥 팔다리가 제대로 말을 듣지 않았다. 크윽 하고 신음성을 뱉으며 뒤를 돌아보자니... 이쪽으로 손을 뻗은 미리안이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또박또박 앞으로 걸어나오고 있었다.
"어째서 여기까지 따라 들어온건진 모르겠지만 잘 됐군요. 귀찮게 따로 손을 써야 할 필요없이 여기서 둘 다 한꺼번에 치워드릴테니까."
"너어어어어!"
눈 앞에서 진석이 공격당하자 아르데나는 순간 이성을 잃은듯 미리안을 향해 폭주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두 눈동자에서 폭사된 붉은 안광이 마치 자동차의 테일라이트처럼 길게 이어졌다.
"이... 이런 젠장..."
아르데나는 여기까지 느껴질정도로 흉흉한 살기를 팍팍 내뿜고 있었지만, 그래봐야 성역안에 있는 미리안에게 이길 순 없을것이다. 자신조차 아무것도 하지 못했는데 아르데나가 뭘 어쩌겠는가? 이대로라면 자신을 구해주려한 아르데나쪽이 먼저 살해당하고 말 터!
'게임오버도 각오했는데 어째서 갑자기 튀어나와가지고선... 그렇다고 쟤를 죽게 내버려두고 혼자 도망갈수도 없잖아? 빌어먹을!'
진석은 손을 뻗어 파우치에 들어있던 체력회복제를 꺼내 마셨다. 약효는 즉시 발휘되어 빨간색으로 점등하던 체력게이지가 서서히 차오르는것이 보였다. 대체 뭘 맞았는진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번건 정말 위험했다. 조금만 더 위력이 셌다면, 혹은 급소쪽에 맞았다면 틀림없이 즉사했으리라. 운이 좋았다. 아니, 악운이랄까. 체력을 어느정도 회복하고 바닥에서 몸을 일으킨 진석은 미리안에게 덤벼들어 공격을 펼치고 있는 아르데나를 바라보았다.
"감히 오빠를! 죽일거야! 죽여버리겠어!"
이성을 잃고 폭주해서 마구잡이로 공격할 줄 알았더니... 허리춤에 차고 있던 단검을 뽑아들고 일정한 형과 태에 따라 움직이며 공격하는것이, 이미 몸에 익은 단검 격투술인 비페라를 펼치고 있었다. 괴물의 힘을 끌어낸 아르데나의 스테이터스는 거의 진석 본인에 육박하는 수준. 어지간한 상대라면 저런 맹공앞에서 얼마 버티지 못하고 찔려 죽을테지만 미리안은 장난치는 아이처럼 천진한 웃음을 띄우고 있었다.
'허...?'
미리안은 흡사 유령같은 몸놀림으로 슥슥 움직이며 아르데나의 필사적인 모든 공격을 무위로 돌리고 있었다! 마치 어디로 어떻게 공격할지 다 알고 피한다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설령 합을 짜고 일부러 저렇게 하려고 해도 과연 가능할까 싶은 기막힌 움직임이었다. 그리고 진석은 미리안의 몸놀림을 잠시 살펴보고, 저것은 어떠한 마법이나 신성력을 사용하지 않은 그냥 그녀 본연의 움직임이라는걸 간파했다.
'미리안은 대신관으로서의 신성마법뿐만이 아니라... 근접전에서의 싸움도 능하단 말인가?'
진석의 추측을 긍정하듯 다음 순간 미리안은 큰 동작의 공격을 헛되이 허공에 흩뿌린 아르데나의 간격안으로 스텝인하며 명치에 주먹을 꽂았다. 그야말로 기가막힌 카운터. 별로 힘이 실린것 같지도 않았는데 뻐어억 하고 묵직한 소리가 나며 아르데나는 그대로 뒤로 날아가 등이 벽에 부딪혔다.
"하으윽!"
벽에 등을 세게 부딪힌 아르데나는 고통스러운 소리를 내며 바닥에 양 무릎을 꿇은채 주저 앉고 말았다. 아르데나에게 카운터를 먹이고 제자리에서 빙글 한바퀴 돌아보인 미리안은 양 손으로 짧은 원피스의 치맛자락 끝을 착 펼쳐보이며 무릎을 굽혀 무대 위의 연극배우처럼 장난스레 인사해왔다.
"우후후. 러셀 오빠쪽보단 아르데나 쪽이 더 필사적이라 왠지 즐겁네요. 헛된 발버둥이라고 해도 이 정도로 진심이라면 조금은 받아줄 기분이 나니까."
미리안은 자신의 머리 끝을 묶은 빨간리본의 자락을 쥐고, 그것을 조물조물 풀어내며 아르데나가에게 다가섰다. 가슴을 움켜쥐고 쿨럭쿨럭 몇 번이나 괴로운 기침을 토해내던 아르데나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을 들어 진석을 바라보았다.
"오, 오빠... 어서..."
뒷말은 생략한채 간절히 출구쪽을 향하는 아르데나의 눈빛. 뭐야 지금. 너, 나보고... 도망가라고?
'이제와서 혼자 도망가봐야 뭘 어쩌라고?'
뭐 아라파 같은곳까지 도망간다면 알 유세피나의 곁에서 호의호식 할 수 있을테지만... 미리안이 암살자를 보내지 말라는 보장도 없거니와, 어차피 얼마못가 세계는 멸망하게 될터! 그럼 아르데나의 희생이나 지금 벌인 모든 행동이 다 허사가 된다.
'무엇보다 등 뒤에 여자애를 남겨두고 혼자서 도망갈 수 있겠냐!'
하지만... 분명 이 성역 내에서는 미리안을 당해낼 수 없다! 당장 손에 쥔 무기도 란비언 하나 뿐. 급한대로 집어 던졌던 흑철단검은 안개속으로 사라져 버렸었다. 허리 뒷춤엔 투척용으로 준비한 단검들이 몇자루 꽂혀있긴 하지만, 이딴 싸구려로 미리안을 잡을 수 있을거란 기대는 당연히 할 수 없었다. 그러는사이 아르데나에게 다가선 미리안은 땋아져있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좌우로 흔들어 풀어젖혔다. 금사같은 플래티나 블론드가 찰랑찰랑 물결쳤다.
"지금 아르데나가 쓰는 기술인 비페라... 분명 내 소개로 엠퍼슨 메디컬 아카데미의 포겔먼 교수에게서 배웠었죠? 응?"
비틀거리면서도 어떻게든 일어서서 반격하려는 아르데나. 하지만 미리안은 아르데나의 서툰 공격을 가볍게 흘리곤 한 손으로 그녀의 목덜미를 움켜쥔 채 벽에 내리꽂았다. 쿠웅!
"커허억!"
"그런데 이거 알려나 모르겠네요. 온갖 근접격투술에 능통한 포겔먼 교수를 맨 처음 지도해준건... 바로 나라는 것을. 아르데나의 서투른 비페라를 보니 옛날 생각 나더군요."
뭐?! 아니 잠깐. 아르데나를 상대하는 동작만으로도 뭔가 보통이 아님을 짐작하긴 했다만... 아르데나에게 단기간에 전투 기술을 주입했을 정도로 솜씨 좋은 고수를 길러낸게 미리안 본인이었다고? 아니지. 그러고보니... 수호자들을 길러내고 그들을 가르친것도 미리안이지 않은가.
'저, 적당히 해라. 허신의 대신관으로써 무시무시한 신성마법을 구사하는데다 완벽한 근접전능력까지? 무... 무슨 이런 사기캐릭터가 다 있어?'
미리안은 벽에 몰아붙인 아르데나의 복부에 바디블로를 먹이고, 어억 하며 상체를 굽히는 그녀의 목에 빨간 리본을 휘릭 휘감았다. 왜 머리를 풀어내렸나 했더니 리본으로 아르데나의 목을 조르려고 한거였냐?! 목이 졸린 아르데나는 켁켁 거리며 괴로워했고 미리안은 아르데나의 다리를 걸어 땅에 엎어지게 만든 후 등 뒤에 올라타 양 손으로 리본을 꽈악 조였다.
"미리안-!!!"
더는 두고 볼 수 없다. 진석은 앞으로 달려나가며 단검을 한자루 내 던지고 화염화살을 내쏘았다. 하지만 미리안이 이쪽을 바라보며 코웃음을 치는 것 만으로도 허공에 안개의 벽이 생겨나며 그 공격은 허무히 사라져버렸다!
'제길! 그럼 그렇지. 이 안에선 절대로 못 이긴다니까!'
그때 진석의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바닥에 피로 그려진 오망성. 그리고 그 각 귀퉁이에 올려져있는, 지금껏 자신이 모아온 기물들. 폭풍의 지팡이, 대지의 눈, 그리고 창염의 검. 잠깐. 혹시 이걸쓰면... 미리안에게 이길 수 있지 않을까?
'아, 아니... 하지만! 이걸 쓴다고 반드시 이길거라는 보장도 없거니와... 먹히지 않는다면 패널티를 퍼먹을 나만 똥되는건데?'
이건 수명을 빨아처먹는다거나 영혼을 태운다거나 하는 그야말로 하나같이 병신같은 물건들이다. 목숨에 여벌이 있는것도 아닌데 이딴걸 쓸 수 있을리가... 아니 잠깐.
'목숨, 생명, 영혼... 여벌이라면 있는데? 여기 엄청 많이.'
진석의 시선이 마법진 중앙에 있는 제단 뒤쪽의 유리기둥을 향했다. 저 안에 가득들어찬 검은색 액체. 저것이 영혼을 에너지화 해놓은거라면... 그걸로 폭풍의 지팡이나 창염의 검을 쓸 수 있지 않을까? 그때 목이 졸려 괴로워하던 아르데나의 몸에서 무시무시한 기운이 뿜어지기 시작했다. 마치 붙잡은 잠자리의 날개를 뜯는것 마냥 천진한 표정으로 리본을 사용해 아르데나의 목을 조르고 있던 미리안은 잽싸게 손을 놓고 연속으로 덤블링을 하며 그녀에게서 멀어졌다.
"크... 너... 쿨럭! 아, 아으아아아아!"
힘겹게 몸을 일으킨 아르데나. 증오에 찬 표정으로 저만치 떨어진 미리안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아르데나의 눈에서 새빨간 안광이 폭사되었다고 느낀 다음 순간. 그녀의 몸에서 저주의 힘이 해방되며 검은 괴물이 현신했다!
"카아아아아-!!!"
4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체구. 늑대를 닮은 머리와 그림자만큼 새까만 전신의 털. 창날같은 이빨과 검날같은 손발톱들. 그리고 분노라는 연료를 바탕으로 붉게 타오르는 눈동자. 괴물의 힘을 끌어낸 아르데나는 콩알만큼 작아보이는 미리안을 노리고 무서운 기세로 덤벼들었다.
"죽여주마아아!"
"아하핫."
재밌다는 듯 웃으며 자신을 덮쳐오는 아르데나에게 손을 휘두르는 미리안. 막 달려들던 아르데나의 가슴팍에서 펑펑하고 연달아 보랏빛 폭발이 일어나며 또 다시 벽으로 나가떨어져 버렸다. 뭐야 이게?! 이건 너무 하잖아? 미리안은 마법진 근처에 서 있는 진석을 한 번 슥 흘겨보곤 바닥에 쓰러진 아르데나쪽으로 다가가며 들으라는 듯 말했다.
"이만하면 알 수 있지 않나요? 분명히 말해두지만 뭘 하더라도 소용없습니다.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죽이지 않고 상대해주는건... 그나마 그간 쌓아둔 정이랄까요. 그래도 오빠는 주제 파악을 금방하고 쉽게 포기했었는데, 아르데나는 조금 질기네요? 뭐 괜찮으니까 어디 직성이 풀릴때까지 계속 해보세요. 그래도 타이밍 좋게 오빠를 구하러 들어온 기세만큼은 좋았으니까. 응, 감동적이었다. 그 장면에 점수를 매긴다면 10점 만점에 10점을 드릴께요."
"......"
이건 뭐 싸움도 아니고... 그냥 일방적인 장난이군. 자신이나 아르데나나, 어떠한 수단을 쓰더라도 미리안에게 피해를 입힐 수 없었다.
'그렇다면 역시...'
재차 폭풍의 지팡이와 창염의 검 쪽으로 눈길을 주는 진석. 진짜로 저걸 써야한단 말인가? 그때 아르데나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다시 저쪽을 바라보니... 미리안이 아르데나의 머리를 밟고 꾸욱 짓누르고 있었다. 겨우 열살짜리 여자아이가 4미터짜리 거체를 가진 괴물을 밟고 있다고 얼마나 아플까 싶지만, 뿌드드득 하는 뼛소리가 여기까지 나는게 정말 엄청난 압력으로 내리누르는 모양이었다. 아르데나의 입에선 형용못할 고통의 신음성이 흘러나오고 있었고 미리안은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자아. 자아자아자아. 왜 그러죠? 좀 더 힘을 내보세요. 소중하다 못해 자신의 목숨을 바칠 정도로 사모하는 오빠를 구하러 왔잖아요? 고작 이 정도로 끝인가요? 여기서 아르데나가 패배해버리면 그 다음은 오빠의 차례인걸?"
"끄으으... 아아아아아!"
가슴을 쥐어뜯는것 같은 아르데나의 울부짖음이 석실에 메아리쳤다. 더 이상은 안되겠다. 어차피 게임오버를 한 번 각오하지 않았던가. 이제와서 거리낄게 뭐 있으랴? 게다가 자신을 구해주러 몸을 던진 아르데나를 여기서 저런식으로 밟혀 죽게 내버려 둘 수 없었다!
"젠자아아앙!"
진석은 란비언을 벨트에 꽂아놓은 다음, 재빨리 달려가 폭풍의 지팡이와 창염의 검을 쥐었다. 그리고 영혼을 에너지화 해서 저장해둔 유리기둥으로 다가가 그것을 곧바로 발로 걷어찼다. 하지만 터엉 하는 묵직한 소리만이 울릴뿐. 기둥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저쪽에서 아하하하 하고 가벼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아르데나의 머리에서 발을 뗀 미리안은 진석을 비웃고 있었다.
"내가 무슨 바보도 아니고. 그렇게 중요한 영혼 저장 장치에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았을거라 생각했나요? 정말 한심하네요. 그 바보짓이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감탄스러운걸요. 뭔가 더 할 생각이라면 어디 직성이 풀릴때까지 시도해보세요."
이런 썅... 아니 하긴, 무슨 멍청이도 아닌데 이 기둥을 그리 쉽게 깨지게 만들어 놓았을리가 있나. 그 사이 미리안은 피로 물든 아르데나의 가슴팍을 퍽 걷어찼다. 어린아이의 발길질임에도, 4미터짜리 거체가 벽으로 주욱 밀려났다. 몇 번의 공격만으로 그로기 상태가 된 아르데나는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괴로운 신음을 토하고 있었다.
'저게 진짜!'
그렇다고 지금 당장 미리안에게 그냥 덤벼들어봤자 먹히지도 않을터. 반쯤 자포자기한 진석은 창염의 검을 양 손으로 꽉 쥐고 화풀이하듯 유리기둥을 마구 내리쳐댔다. 하지만 흡사 무슨 쇳덩이를 치는 느낌이 들었다.
'뭐가 이렇게 단단해?!'
깡! 깡! 까앙! 석실안엔 진석이 유리기둥을 내리치는 소리가 한참 울렸다. 씨발! 거 깨져라 좀! 그러나 마음과는 달리 꿈쩍도 않는 기둥. 온 힘을 다해 그렇게 수십번도 넘게 검을 내리치고나니... 전신의 힘이 쭉 빠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허탈한 한숨을 내뱉는데 저쪽에서 갑자기 짝짝짝 하는 작은 박수소리가 들려왔다. 의식을 잃은것 같은 아르데나의 몸체 위에 걸터앉은 미리안이 다리를 꼰채 박수를 치고 있었다.
"참 열심히 하는군요. 그런데, 그걸로 끝인가요?"
저년이 정말 사람 성질을 살살... 진석은 손에 들고 있던 창염의 검을 바닥에 내던지고 흠집조차 가지않은 유리기둥을 바라보았... 어? 아니 잠깐! 흠집이... 흠집이 갔다! 53이라는 초월적인 무력으로 미친듯이 내리친 보람이 있었던지, 유리기둥위엔 크고작은 흠집이 잔뜩 가 있었다. 허나 물론 이것만으로 깨트리기엔 무리가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흡집이 잔뜩 생겼다는건... 분명, 분명히 아예 부수지 못할것은 아니라는 이야기! 어느정도 거리가 떨어져 있는 미리안의 시야엔 이 흠집들이 잘 보이지 않는 모양인지, 흠집을 눈치채지 못하고 그저 마냥 웃는낯을 하고 있었다. 진석은 자신을 비웃는 미리안을 마주보며 히죽 웃었다.
"미리안. 저기 말야, 나 기왕 시작한거... 하나만 더 해봐도 될까?"
"아하하! 좋아요. 뭐든 좋으니 한 번 더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기회를 드리죠. 하지만 이걸로 끝. 늘 서류업무만 하느라 몸이 굳어있어서 가볍게 몸을 풀 생각이었긴 하지만... 과하면 지겨우니까요. 빨리 끝내주시죠. 적어도 저승길이 외롭지 않게 아르데나도 함께 보내드릴테니까."
그러더니 아주 편안히 팔짱까지 끼고 이쪽의 행동을 지켜보기 시작한다. 이건 뭐 비웃는걸 넘어서 버러지 취급이구만? 진석은 후우 심호흡을 하며 유리기둥 앞에 다가섰다. 오른발을 어깨넓이로 벌리며 마보자세를 취하고, 오른손을 펴 허리 뒤쪽으로 당겼다.
'제발. 이게 마지막이다.'
진석은 전심전력을 다해 오른손에 힘을 집중했다. 열격장. 정말 젖먹던 힘까지 다 끌어모은 혼신의 열격장이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미리안의 표정에선 어느새 웃음기가 사라졌다. 저 기술이 뭔진 알 수 없었지만 진석에게서 자신의 생각 이상으로 강한 힘이 집중되고 있었던 것이다.
"으아아아아-!!!"
콰아앙! 손바닥으로 흠집이 집중된 부분을 때린것 뿐인데도 마치 뭔가가 폭발하는것 같은 소리가 석실내에 울려퍼졌다. 게다가 격타의 순간 쩌엉하며 바닥을 타고 한 차례 진동이 퍼져나가기까지 했다. 그러나... 기둥은 요지부동이었다.
'그... 글렀나. 이걸로도 안되는거냐?'
표정이 굳어있던 미리안도 진석의 열격장이 효과가 없자 다시 빙긋 웃으며 안심하는 표정을 띄웠다. 미리안은 허공으로 손을 들어보였다.
"자 그럼 이제 약속대로..."
드디어 죽는구나. 게임오버다. 망할. 아주 헛짓거리를 거하게 했구만. 포기한 진석은 홧김에 유리 기둥 위를 주먹으로 쿵 내리쳤다. 그런데 다음 순간. 쩌저적 하는 메마른 소리가 들려왔다.
"헛?"
진석이 주먹으로 내리친 부분에서부터, 유리 기둥 위로 쩌적거리며 거미줄 같은 크랙이 퍼져나가고 있었다. 깜짝 놀란 미리안이 다급히 새된 비명을 내질렀다.
"어?! 아, 안 돼! 이 무슨! 안 돼에!"
뭐, 뭔진 몰라도 열격장이... 효과가 있었구나! 흠집을 통해 열격장의 충격이 어떻게든 내부로 전달되어 마치 강철같은 경도의 유리기둥을 파괴한 모양이다! 진석은 갈라지는 유리기둥 위로 다급히 마구 발길질을 해댔다.
"깨져라! 빨리 깨져!"
"그만둬어어어!"
제 정신이 아닌 표정으로 허겁지겁 손을 휘저으며 달려오는 미리안. 그간 유지해오던 평정이나 여유는 갑작스레 벌어진 예상밖의 상황에 단번에 무너진 모양이었다. 진석은 플라메우스를 낀 오른 주먹을 단단히 모아쥐었다. 그러자 주먹의 틈새로 불길이 화르륵 솟아올랐다.
"미리안! 어떤 기분이냐? 상황을 역전당한 기분이! 지금부터! 이 기둥을 부수는데! 1초도 낭비하지 않겠다!"
"너어어어어!"
미리안은 필사적으로 손을 뻗어 무언가의 주문을 시전하려 했다. 하지만 진석은 자신의 선언대로 곧바로 불꽃이 타오르는 오른주먹을 내질러, 금이 가 있던 유리 기둥을 산산히 박살내버렸다. 그리고 안에 잔뜩 들어차 있던 검은 액체가 진석의 주먹에서 뿜어지는 불꽃과 닿는 순간, 번쩍하고 폭발적인 빛이 일어나 사방을 휘감았다. 진석은 갑작스레 눈을 찌르는 빛에 그만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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