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12. -- > * 141화 *
'뭔가 터지나? 다 날아가는거냐? 헐리우드 영화의 라스트신처럼 대폭발하며 끝나는 건가? 크윽. 이제와서 내 한 몸 희생해 악의 수괴와 자폭하는 엔딩이라니. 이딴건 너무 진부하다고!'
그렇게 눈을 질끈 감고 있길 수초. 하지만... 딱히 무슨 일이 벌어지진 않았다. 진석은 감고 있던 눈을 슬쩍 떠보았다.
"...허어?"
너무 강한 기세로 번쩍해서 뭔가 터지는걸까 싶던 빛은 이미 사라져 있었다. 그리고 기둥 안에 있던 시커먼 액체들은 플라메우스에서 옮겨붙은 불에 활활 불타나 싶더니... 마치 정화되듯 새하얀 색으로 기화되어 자신의 몸으로 흘러들고 있었다.
'이, 이게 무슨?'
화면 하단 구석에서부터 버프를 적용받고 있음을 알리는 온갖 아이콘들이 하나 둘 떠오르고 있었다. 자신이 알고있는 익숙한 버프들을 비롯, 지금 처음 보는것들까지 포함해 버프효과들은 연속적으로 계속 떠올랐다. 아마도 게임 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류의 버프가 다 나타나는게 아닐까 싶었다. 아이콘이 너무 많이 떠올라 상태표시줄이 몇줄이나 밀려내려가 포화상태가 되었다.
'아니 도대체...'
그뿐만이 아니었다. 셀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종류의 버프를 받은 스테이터스가 어떻게 되었나 확인해보니... 체력이나 SP, 그리고 무력이나 민첩같은 각 스테이터스가... 리미터가 고장난 속도계처럼 미친듯이 상승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수십 단위로 오르다가, 점차 그 속도가 높아져 단번에 수백, 수천 단위로 뛰어오르고, 이내 수만에서 수십만까지 올라가나 싶더니... 이내 하나 둘 '무한'으로 표시되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엔 내가 지금 뭔가를 잘못본건가 싶었는데 아니었다. 분명히 각 표기 구간이 숫자 8을 옆으로 뉘어놓은 것 같은 ∞ 표시로 바뀌어 있었던 것이다. 이게...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야?
"아... 아아아! 아아아아아아!"
쉴새없이 떠오르는 버프들과 무한으로 변해버린 스테이터스들에 어리둥절해 정신을 빼앗겼던 진석은 갑자기 들려온 처절한 비명에 깜짝 놀라 그쪽을 돌아보았다. 비명을 지른것은 미리안이었다. 그녀는 절망이란 글자를 그대로 표현한 것 같은 표정을 지은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 안 돼... 내가 백여년 가까이 공들여 모아온 영혼들이..."
넋이 빠진것 같은 목소리. 그새 바닥에 흘러넘친 액체들은 빠르게 타올라 이미 거의 다 기화되어 자신의 몸에 흘러든채였다. 도대체 이것들이 어떤 작용을 일으킨건진 모르겠지만... 아마도 자신이 이 에너지를 전부 흡수한 모양이었다. 게다가 스테이터스가 무한이라니. 이거 이래도 되는건가? 아무리 그래도 스테이터스가 무한으로 표기되다니, 이거 혹시 오류나 버그가 아닐까? 그런데 다음 순간 띠링하며 눈 앞에 메시지창이 하나 떠올랐다.
'이런 상황에 뭐야 이건. 패시브 스킬 어웨이크닝을 습득했다고?'
그게 뭔지 확인해보려는데 눈앞에 번쩍 한 줄기 보랏빛 섬광이 날아들었다. 악귀같은 몰골이 된 미리안이 자신쪽으로 손을 뻗고 있었던 것이다. 진석은 가볍게 뒤로 뛰어서 피해야지 생각하곤 가볍게 발을 딛었는데... 다음 순간 자신의 몸체는 저 멀리 뒤쪽으로 순간이동해 있었다. 공격을 가한 미리안이나 순간이동을 한 진석이나 둘 다 깜짝 놀랐다.
'어, 어어어?! 가볍게 뒤로 피하려고 했는데 뭐야 이건?!'
두어발짝 뒤로 딛었을 뿐인데 몸이 저절로 공간을 뛰어넘어 스르륵 이동해버렸다. 문득 미리안쪽을 바라보자니, 그녀는 입술을 꾹 깨문채 혼자 입속으로 뭔가를 씹어뱉듯 중얼거리며 이쪽을 죽일듯 노려보고 있었다. 이게 뭘 씨부렁거리는거야?
'...그보다 어디. 지금 내 능력이 무한이라면... 방금의 순간이동도 그것 덕인가? 그럼 한 번 시험해볼까?'
진석은 방금 자신이 한 순간이동이 현재의 스테이터스와 관련이 있을거라 생각하곤 일부러 미리안쪽을 향해 몇걸음 내딛어봤다. 그러자 방금과 같이 자연스레 공간을 뛰어넘으며 미리안의 바로 앞에 도약해 나타났다. 전조도 없이 눈 앞에 진석이 나타나자 경악에 찬 표정을 짓는 미리안. 하지만 곧바로 반응해 손을 뻗는것이 공격을 하려는 모양이었다.
"그렇겐 안 돼."
손날로 미리안의 손을 탁 쳐내는 진석. 정말로 그냥 가볍게 툭 쳤다고 생각했는데... 미리안의 팔목은 우드득 소리를 내며 부러져 버렸다.
"아아악!"
아, 아니. 뼈가 무슨 무슨 수수깡도 아니고 툭 쳤는데 왜 부러져? 미리안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며 뒤로 물러섰다. 그녀의 몸체가 안개로 변하며 자신이 했던것처럼 저쪽으로 순간이동을 했다. 원래대로면 눈에 보이지도 않을 회피기술일테지만 진석의 눈엔 그녀의 몸 입자 하나하나가 변환하는 과정이 전부 똑똑히 보이고 있었다.
'어차피 이 안에서 어디 도망갈데가 있다고.'
진석은 공간을 뛰어넘어 안개로 변해 순간이동중인 미리안의 멱살을 잡아챘다. 허어, 세상에. 순간이동중인 상대를 그보다 빠른 순간이동으로 잡아채다니? 자신이 해놓고도 믿기지 않았지만... 엄연히 현실이다! 진석이 자신을 잡아채자 순간 경악으로 물드는 미리안의 얼굴. 진석은 미리안의 작은 몸체를 높이 쥐어들며 말했다.
"우선 이건 아르데나의 몫."
미리안의 명치께에 일격! 주먹을 온힘을 다해 내질렀다간 끔찍한 꼴이 날 것 같아 일부로 장타로 쳤다. 그것도 정말 힘을 살살 조절해서. 하지만 미리안의 작은 몸체는 살살 치다 못해 툭 건드린 수준의 장타로도 거대한 풍선이 퍼어엉 터지는 것 같은 격타음을 내며 저 멀리 벽까지 날아가 그대로 부딪히고 말았다. 콰아앙! 대포알처럼 날아간 미리안의 몸체가 벽과 격돌하며 돌조각이 마구 튀고 흙먼지가 휘날렸다. 벽에 호되게 처박혔다 바닥에 툭 떨어진 미리안은 꺼어억 하는 숨 넘어가는 소리를 내며 입에서 피를 왈칵 토해냈다.
'아무리 그래도 아까까진 아르데나나 나나, 일방적으로 당하다 못해 아무것도 할 수 없던 상대였는데... 저 기둥을 부수고 에너지를 흡수한 것 만으로 상황이 이렇게 바뀌다니.'
게다가 딱 한 대. 그것도 힘을 엄청 살살 조절한 공격만으로 저렇게 되다니. 이건 뭐 자기가 해놓고도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진석은 마법진쪽으로 돌아가 왼손으론 바닥에 굴러다니는 폭풍의 지팡이를, 그리고 오른손으론 창염의 검을 쥐었다. 그새 미리안은 스스로에게 뭔가의 회복주문을 쓰며 몸을 회복시켜 일어나고 있었다.
"크으윽. 머릿속에 온갖 추악한 욕심뿐인 하찮은 쓰레기가... 감히 내 노력의 결정체를 멋대로...!"
진석을 노려보며 분노를 담아 중얼거리는 미리안. 벌겋게 충혈된 두 눈은 분노로 맛이 가 있었다. 말투도 평소의 여유넘치는 존대가 아닌, 그야말로 활활 불타는 증오가 담겨있다는게 느껴질 정도다. 하지만 지금 자신의 힘은 압도적 아닌가. 그러거나 말거나 우습지도 않았다. 지지않고 대꾸하는 진석.
"인간은 욕심이나 욕망이 있으니 인간인거지! 너처럼 허신인지 잡신인지 모를것에 홀려 백년이나 그런 꼴로 살아오며 세계멸망을 획책하는게 정상인줄 아냐?"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입만 살아서 잘도 나불나불! 죽여버리겠다! 공허의 심무!"
미리안은 진석을 향해 두 손을 뻗었다. 그러자 순식간에 허공에서 어마어마한 양의 안개가 나타나 이쪽으로 몰려들었다. 아르도르의 브레스와 아르도르 그 자체마저 지워버렸던 괴이쩍은 안개. 그것이 주변을 온통 덮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진석은 자신이 질거라는 생각따윈 도저히 할 수 없었다.
"하, 오빠한테 말이 험하시구만? 못된 아이에겐 벌을 주겠어!"
왼손에 든 폭풍의 지팡이를 내미는 진석. 원래대로라면 사용의 댓가로 능력치를 빨아먹는다는 물건이지만, 어차피 지금 자신의 능력은 무한! 처먹으려면 얼마든지 처먹어라! 지팡이 끝에 달린 푸른색 보석에서부터 영롱한 빛이 발해지며 원래대로라면 바람 한 점 불지 않을 석실 안에 엄청난 기류가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 정도의 강풍. 하지만 진석만큼은 태풍의 눈에 서 있는 것 처럼 아무 일 없이 평온했다. 폭풍의 지팡이가 영향을 미치는것은 오직 사방에 가득한 안개와 미리안 뿐이었다. 넘어질듯 휘청이는 미리안. 그리고 사방에서 몰려들던 안개는 폭풍의 지팡이가 일으킨 기류에 허무할 정도로 산산히 흩어지고 말았다.
"큭! 네놈?!"
진석이 폭풍의 지팡이로 공허의 심무를 너무나 허무히 흩어버리자 당황하는 미리안. 이를 악물며 다시금 두 손을 뻗었다.
"침잠무!"
허공에 안개의 구체 십여개가 파바밧하고 떠올랐다. 무서운 흡입력으로 주변의 모든것을 빨아삼키려는 안개의 구체 침잠무. 이것들은 진석이 일으킨 기류를 무시하며 이쪽으로 너울너울 다가오고 있었다. 진석은 이번엔 오른손에 든 창염의 검을 치켜들었다. 이것 역시 NPC가 사용한다면 수명을, 플레이어가 사용한다면 능력이 영구 대폭 감소시키는 물건이지만 능력치가 무한인 지금은 아무 상관 없었다.
"나와라 창염이여!"
푸화악! 진석의 부름에 검에서부터 폭발하듯 뿜어져 나오는 푸른 불꽃. 예전 브래들리 왕세자가 사용했을때처럼 몸을 얇게 감싸는 정도가 아니었다. 몸체에서부터 무려 수미터까지 뻗어질 덩도로 무시무시한 불길이었다. 진석은 근처까지 다가온 침잠무들을 향해 검을 휘두르며 외쳤다.
"창염옥!"
진석이 휘두른 검의 궤도를 따라 푸른 불꽃의 구체 십여개가 생겨났다. 제각기 침잠무를 향해 뻗어지는 창염옥. 양쪽이 서로 부딪히곤 퍼엉하고 작은 폭발을 일으키며 깔끔히 소멸되었다. 자신의 공격들이 너무나 허무하게 무위로 돌아가자 분노로 치를 떠는 미리안. 하지만 포기하진 않은듯 손을 뻗으며 또 다시 뭔가의 주문을 쓰려고 했다. 하지만 진석은 폭풍의 지팡이와 창염의 검을 내던진 후 순간이동을 해서 그녀의 앞에 나타났다.
"힉?!"
"이번엔 내 차례다."
진석의 반격. 하지만 귀찮게 기술을 쓸 필요도 없었다. 그냥 일권을 날리는 것 만으로도 충분했다. 내질러진 정권은 무슨 두부를 으깨듯 아무 저항없이 미리안의 가슴을 꿰뚫고 등쪽까지 튀어나왔다. 선혈이 사방으로 철퍽 튀어올랐다.
"끄... 으윽..."
믿을 수 없다는 듯 진석의 얼굴과 자신의 가슴을 꿰뚫은 주먹을 번갈아 바라보는 미리안. 진석은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말했다.
"넌 이미 죽어있다."
그리고 미리안의 가슴을 꿰뚫은 주먹을 뽑아내며, 동시의 반대쪽 손으로 그녀의 이마를 툭 쳐서 밀었다. 아무 저항 없이 뒤쪽으로 풀썩 쓰러져버리는 미리안의 몸체. 주먹 크기로 뚫려버린 가슴팍에선 선혈이 콸콸 쏟아져 바닥에 피웅덩이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경련하듯 부르르 떨리던 미리안의 몸은... 이내 힘없이 축 늘어졌다. 방금전까지만 해도 타오르듯 맹렬한 증오를 담아 진석을 노려보던 두 눈동자엔 이미 빛이 사라져 있었다. 진석은 자신이 쓰러트린 미리안을 잠시 내려보다, 곧 몸을 돌려 저쪽 구석에 늘어져 있는 아르데나에게로 다가갔다. 미리안과 싸우는 잠깐의 사이 어느새 변신이 풀렸던지 평소의 그녀로 돌아와 있었다. 하지만 미리안이 폭발을 일으켜 입혔던 가슴팍의 상처는 그대로인데다가 출혈도 상당했다.
"이런. 어서 치료를..."
파우치에서 체력회복제를 꺼내어 아르데나에게 먹이려고 하는 진석. 하지만 의식이 없어서인지 전혀 삼키질 못했다. 할 수 없이 있는대로 약을 꺼내 상처위에 뿌리는 진석. 하지만 역시 직접 먹이는것만 못해서 아무는 속도가 매우 더뎠다.
'할 수 없지. 데리고 나가서... 응?'
갑자기 뒤에서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뭔진 모르겠지만 대단히 위험한 느낌이다. 진석은 아르데나를 안아들고 재빨리 뒤로 몸을 날렸다. 공간을 도약하며 멀찍이 이동하는 진석. 그리고 다음 순간 방금전까지 자신과 아르데나가 있던 자리에서 콰아앙 하며 보랏빛 폭발이 일어났다.
"뭐야?!"
뭔가해서 주변을 살펴보자니... 미리안이 다시 일어서 있었다! 게다가 방금전 자신이 가슴에 뚫어준 구멍은 어째서인지 이미 깔끔히 메워져 있었다. 분명 죽은거 아니었던가? 아니... 잠깐. 미리안의 움직임은 뭔가 기묘했다. 뚝뚝 끊어지는 꼭두각시 같은게... 저런 느낌의 움직임은 분명 본 기억이 있었다.
'옐 프라나의 어느 지하 연구시설에서 싸웠던 여자애... 머리에 마정석이 박혀 폭주하던 그 애의 모습이랑 비슷한데.'
진석은 미리안의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분명 두 눈을 뜨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긴했지만 표정에 생기라곤 전혀 찾아 볼 수 없었다. 눈동자도 지극히 무감정했다.
'...그렇구만. 미리안의 목숨은 어렵잖게 끊을 수 있었지만... 그녀를 구속하던 허신의 힘은 아직도 유효하다 이건가?'
품에 안겨 축 늘어진 아르데나를 바라보는 진석. 아르데나도 어서 치료를 해줘야 할텐데. 진석은 일단 손을 뻗어 화염화살을 내쏘았다. 그러자 허공엔 평소대로와 같은 자그마한 화살크기가 아닌, 거의 무슨 대들보 만한 불기둥들이 생겨나 미리안에게 쏘아졌다. 그 틈에 출구쪽으로 몸을 날리는 진석. 순간이동으로 단숨에 계단가까지 이동한 다음, 아르데나에게 스플렌도르의 회복주문 메델라를 사용해 보았다. 과연 석실 안에서 빠져나와서인지 주문은 정상적으로 사용되었다. 단숨에 회복되는 아르데나의 상처. 얼굴에도 핏기가 돌아오는것이 이제 괜찮을 것 같았다.
"좋아. 여기서 기다리렴. 이 오빠는 아직 할 일이 남았으니까..."
회복시킨 아르데나를 한쪽 벽에 잘 기대어놓은 진석은 다시 순간이동을 하여 석실 안으로 돌아갔다. 고개를 한쪽으로 꺾은 기묘한 자세로 선 미리안의 주변엔 불꽃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아마도 방금 쏘아낸 화염화살의 잔재이리라. 하지만 당연하게도 그것만으론 지금의 미리안에겐 어떠한 피해도 주지 못한 것 같았다. 미리안은 고개를 틀어 재차 나타난 진석을 노려보았다. 공허한 두 눈동자에선 말로 형용못할 괴이함과 섬뜩함이 느껴졌다.
'하긴... 안 그래도 내가 해놓고도 너무 쉽게 끝난다 싶었다니깐. 그래도 미리안은 분명 보스격의 캐릭터일텐데 그렇게 허무하게 죽고 이겼다 게임 끝! 이럴리가 없잖아?'
진석은 미리안을 도발하듯 손을 내밀어 까닥거렸다. 카아악 하는 괴성을 지르며 자세를 낮춘채 달려드는 미리안. 모든 스테이터스가 무한인 지금의 자신이 보기에도 미리안의 움직임은 상당히 빨랐다. 게다가 그녀의 몸에선 정체모를 흉흉한 검은빛의 기운까지 풀풀 뿜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물러서지 않고 그에 맞서듯 마주 달려드는 진석.
"카아!"
마치 목덜미를 움켜쥐어 뜯어내버리겠다는 듯 살벌한 기세로 오른손을 휘둘러 오는 미리안. 그 손엔 검은 기운이 잔뜩 서려있는게, 그냥 막아선 안될것 같았다. 진석은 왼쪽 어깨의 에스카마도로 공격을 가볍게 튕겨내고, 오른손의 플라메우스로 미리안에게 정권을 내질렀다. 진석의 정권은 미리안의 이마 한 복판에 명중해 빠각하고 두개골이 깨지는 무시무시한 소리를 내었다. 진석에 정권에 직격당하곤 그대로 저 멀리 나가떨어지는 미리안. 작은 몸체가 바닥을 엉망진창으로 굴렀다.
"...끝났나?"
잠시 기다려봐도 꼼짝하지 않길래 그냥 이걸로 허무하게 끝난건가 싶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주변에 서려있는 검은 기운이 미리안의 몸체로 흡수되듯 빨려들었고, 미리안의 몸체는 간질 환자처럼 부들부들 떨렸다. 그리고 이내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는 미리안. 입과 코에선 검은피가 지르르 흘러내리고 있었고 눈동자는 완전히 뒤집혀 흰자위 뿐이었다. 머리칼 역시 다 헝클어져 엉망진창이었다.
'멀쩡할때는 천사만큼이나 귀엽다고 생각될 정도였는데... 저런 꼴이 되니 정말 끔찍하구만.'
미리안은 앞으로 두어발 내딛더니 진석을 향해 손을 뻗으며 짐승같은 괴성을 질렀다. 그러자 허공에 크고 작은 마법진 수십개가 생겨나더니, 일제히 보랏빛 광선을 발사했다!
"웃!"
어렵잖게 석실 밖으로 순간이동하여 그 공격을 피해내는 진석. 안쪽, 진석이 서 있던 자리엔 광선이 꽂혀들어 예의 보랏빛의 폭발을 일으켰다.
"아 거 젠장. 그냥 좀 죽을일이지 성가시게 구네."
혀를 차며 재차 석실안으로 뛰어드는 진석. 미리안은 그런 진석을 기다렸다는 듯 마주 달려들며 입을 쩍 벌렸다. 입 안쪽에서부터 기이잉하고 빛의 입자가 집중되더니 붉은 빛의 광선이 주우웅 하고 발사되었다!
"이게 무슨 SF도 아니고 광선빔 같은거 자꾸 쏘지 말라고!"
어렵잖게 순간이동으로 공격을 피해낸 후, 미리안의 측면으로 달려들어 무방비로 노출된 옆구리에 열격장을 꽂아넣는 진석. 묵직한 타격음과 함께 미리안의 몸체는 소용돌이에 휘말린 듯 화라락 회전하며 그대로 석실의 벽까지 날아가 부딪혔다. 마치 빨간 물감이 들어찬 물풍선이 터지듯, 강렬한 충격으로 인해 미리안의 몸체의 구멍이란 구멍에선 피가 쫘악 뿜어져버렸다. 거의 대포알이 발사되는 것 같은 기세로 벽에 날아가 처박혔으니 아주 내장이고 뼈고 엉망진창이 되었으리라.
"끄... 으으..."
하지만 주변에서 검은 기류가 나타나 바닥에 늘어진 미리안의 몸에 재차 빨려들어갔다. 미리안은 한층 처참한 몰골이 되었음에도 또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흉측한 모습에 이맛살을 찌푸리는 진석.
'이거... 이래선 끝이 안나겠구만. 가만. 그러고보니 이 안은 허신 헤세스모데우스의 성역이라고 했지? 그렇군. 허신의 지배력이 미치는 공간 안쪽이라 저렇게 계속 부활하듯 일어나는건가?'
그렇다면... 우선 미리안보단 이 석실을 어떻게든 할 필요가 있겠다. 진석은 후우 호흡을 가다듬곤, 바닥을 향해 힘차게 오른발을 꽂아넣었다. 콰자작! 바닥의 돌이 왕창 부서지며 진석의 발이 쿠우웅 깊에 박혀들어갔다. 그러자 마치 지진이라도 일어난듯 주변의 땅이 순간 흔들거렸다.
'...호오. 역시 스테이터스가 무한인 덕분인가? 이거 되겠는데?'
다시 한 번 오른발을 높이 들어 바닥에 찍었다. 천장에서 흔들거리며 우수수 흙먼지와 작은 돌조각들이 떨어져 내렸다. 미리안은 진석이 무슨 짓을 하려는지 눈치챘다는 듯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가아아아!"
"시끄러워! 넌 저리 꺼져있어!"
순간이동으로 막 덤벼들려던 미리안의 머리채를 붙잡아 허공에 내던진 다음 떨어지는 그녀의 몸체를 발로 뻥 걷어차버리는 진석. 축구공처럼 걷어차인 미리안은 석실 구석까지 날아가 그대로 벽 틈새에 박히듯 끼어버리고 말았다. 팔다리가 엉망으로 꺾인채로 벽틈새에 꽂혀버린 미리안의 모습. 참담하긴 했지만, 저런 꼴이 되었으니 잠시간은 방해하지 못하리라. 진석은 미리안을 날려버린 후 재차 바닥에 발을 쿵쿵 꽂아넣었다.
"성역이고 지랄이고 때려부수면 그만이지!"
뭐 이것만큼 알기 쉽고 간단한 해결법이 또 있으랴? 발을 굴러 주변을 무너트리고 벽을 쳐서 부술때마다 바닥에 넓게 그려진 마법진 역시 이리저리 쪼개지며, 어쩐지 주변에 가득차 있던 사이한 공기가 실제로 엷어지는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고 있자니 벽에 끼인채 한참 버둥거리던 미리안의 몸이 그냥 축 늘어지며... 그녀의 몸 안쪽에서부터 검은 기운이 몰려들어 진석의 근처로 다가왔다! 깜짝 놀라며 경계자세를 취하는 진석. 그런데 그 검은 기운에서부터 머릿속에 직접 울리듯 웅웅거리는 느낌의 말소리가 전해져왔다.
- 인간! 너는 어째서 나의 일을 방해하는가?
"...어? 지금 나한테 한 소리야?"
깜짝 놀라 반문하는 진석. 말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 나의 종을 해하고, 그간 준비해온 것들을 망치다니. 감히... 죽음이 두렵지 않은가?!
검은 기운이 머릿속에 직접 전달하는 말소리에선 어마어마한 분노가 느껴졌다. 하지만 이제와서 그런걸 신경쓸 진석이 아니었다.
"에이씨. 뭐래는거야."
검은 기운을 무시하고 쾅쾅거리며 바닥의 마법진을 중점적으로 파괴하는 진석. 그러자 검은 기운이 당황하며 외쳤다.
- 그만두지 못할까! 멈추란 말이다!
"허허. 원래 낯선 사람에게 뭘 요구할땐 부탁합니다~ 라고 하는거야. 자 말해봐. 부탁합니다 그만둬주세요~ 하고."
- 이... 이 무례한! 잘못을 깨닫고 뉘우친다면 대신 나의 종으로 삼고 권능을 하사해 줄수도 있었거늘! 네놈따윈 필요없다, 죽어라!
화악 커지더니 마치 사람의 형상처럼 변하며 기습적으로 주먹을 휘둘러오는 검은 기운. 진석은 순간이동으로 공격을 피하곤 돌려차기를 해서 검은 기운을 걷어차려 했지만 자신의 공격은 허무히 검은 기운의 몸체를 통과할 뿐이었다.
- 하하하! 네놈이 영혼들의 힘을 멋대로 흡수해 일시적으로 강해졌다 한들 그런 헛된 공격이 나에게 통할줄 아느냐!
"흠 그래? 그럼 이건 어떨까."
석실의 내부도 어느정도 파괴했고 안에 가득하던 불온한 기운도 제법 사라져 있는터라, 혹시나 될까하고 스플렌도르의 에그레기움을 사용해보는 진석. 그러자 번쩍하고 빛이 나더니... 몸에서 황금빛의 광채가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무식하게 물리적으로 마법진을 부수고 주변을 파괴한게 허신의 성역을 무너트리는데 어느정도 효과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진석은 전신에 황금빛 광휘를 휘감은채 검은 기운에게 다가서며 말했다.
"자. 이건 어때?"
- 아니... 이 놈! 설마 디에스의 사도였단 말이냐!
크게 당황하는 검은 기운. 아니, 그냥 단순한 검은 기운이 아니다. 저건 분명히... 헤세스모데우스의 사념체라거나 그간 미리안에게 깃들어있던 그의 의지 일부분쯤 될테지. 진석은 몸에 에그레기움을 휘감은채 헤세스모데우스에게 달려들어 펀치를 날려보았다.
"아니 난 무교니까 함부로 다른신의 신도 취급 하지 말라고. 그보다 옛다."
퍼억! 방금전엔 허무히 허공을 가르던 공격이 이번엔 분명히 실체가 있는 대상을 친 듯 묵직한 촉감이 있었다. 진석의 주먹에 얻어맞고 뒤로 벌러덩 나가떨어지는 헤세스모데우스.
- 나... 나에게 타격을?! 너, 너 이노오오옴!
"뭐 임마. 팍 씨."
공격이 통한다면 신이고 나발이고 뭐 별것도 아니지! 애당초 여기 있는건 신의 본체도 아닐테고 그의 일부분일터. 지금 자신보다 힘도 없는것 같은데 겁날게 무어냐? 아예 헤세스모데우스의 위에 와락 올라타서 마운트 자세를 잡고 마구 두들기기 시작하는 진석.
- 으, 으악! 너 이 자식! 아윽!
헤세스모데우스는 진석의 몸에 휘감긴 에그레기움의 광휘에 짓눌린채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펀치에 일방적으로 얻어터지며 꼼짝도 하지 못했다. 헤세스모데우스를 쉴새없이 두들겨패며 빈정거리는 진석.
"왜? 어쩔건데? 응?"
- 가... 가만두지 않겠다! 어서 저리, 윽! 비키, 컥! 그만 두... 으윽!
"신 주제에 머리 나쁘네? 말했지? 남한테 부탁할땐 부탁합니다~ 라고 하래도?"
두두두두! 황금빛을 휘감은 진석의 주먹이 몇십, 몇백발이나 연속으로 쏟아지자 헤세스모데우스는 대답조차 못하고 그야말로 떡이 되듯 얻어맞았다. 게다가 헤세스모데우스를 구성하는 검은기운은 그 힘을 잃어가는지 점차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 그... 그만 두... 부, 부탁...
무식한 공격에 버틸 수 없었는지 질렸다는듯 겨우겨우 항복선언을 해오는 헤세스모데우스. 하지만 진석은 그만 둘 생각이 없었다.
"허나 거절한다."
- 뭐?!
"토르멘타!"
폭풍같은 연타가 힘을 잃은 헤세스모데우스의 몸 위로 쏟아졌다. 지금까지 두들겨대던것 이상으로 초월적인 강타의 연격. 헤세스모데우스는 거의 희미해져 그 실체를 상실해갔고 진석의 몸을 휘감은 에그레기움도 그 제한시간이 다 되어 서서히 엷어지기 시작했다. 헤세스모데우스는 분하다는듯 끊어질듯 희미하게 들려오는 말소리를 남기며 소멸되었다.
- 두고 보... 아직 끝... 아니... 복...
후우욱. 헤세스모데우스의 검은 기운은 산산히 흩어져버렸고, 진석의 에그레기움 역시 동시에 촛불이 꺼지듯 사라졌다. 엉망진창으로 파괴된 석실 내부엔 더이상 불온한 기운따윈 한줌도 남아있지 않았다. 싸늘한 정적과 아직 주먹을 치켜들고 있는 진석, 그리고 벽에 처참한 몰골로 처박혀있는 미리안의 시체가 남아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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