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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베라 - 부회의 방랑자-142화 (142/155)

< --   - 12.   -- >         * 142화 *

"이걸로 끝인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으며 한숨을 내쉬는 진석. 그럼 이제 엔딩인걸까? 원래 리베라는 게임을 진행하다 특정한 엔딩의 요건을 달성하면 엔딩을 보겠냐는 메시지가 떠오른다. 하지만 잠시 기다려봐도... 아무런 메시지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 시커먼게 분명 허신의 사념체쯤 되는거였을텐데, 이 두 주먹으로 직접 패서 없애버렸는데도 아직 안 끝났다고?"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다음 순간 띠링 하고 뭔가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오, 그럼 그렇지. 이제 이걸로 엔딩이겠지? 하지만 아니었다. 여러 스킬들이 랭크업을 했다는 단순한 알림 메시지였다.

"아니 이제와서 스킬들 랭크업이 문제가 아닌데..."

혀를 쯧 차며 메뉴를 열어 직접 퀘스트 창을 확인해보는 진석. 하지만 허신 헤세스모데우스 교단의 퀘스트는 아직 클리어되지 않은 상태였다. 진석은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나며 이상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왜지? 대신관인 미리안도 죽었고 제단도 파괴되었는데? 아직도 뭔가 더 남았단 말인가?"

그야 미리안이 길러냈던 수호자들과 잔여 세력들은 여전히 남아있지만... 이 모든 조직을 관리하고 이끌어오던 수뇌 미리안이 죽었으니 그냥 내버려두면 언제고 자연히 와해되거나 분열될터. 게다가 허신을 강림시킬 수단인 마법진과 제단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그런데 이러고도 끝나지 않는다는건...

"...그렇다는건 분명 뭔가 더 남았다는 이야기군."

아. 그러고보니 헤세스모데우스가 소멸되면서... 잘 들리진 않았지만 무언가 두고보자는 듯한 뉘앙스의 말을 남겼었다. 흐음 하며 잠시 생각에 잠기는 진석.

'이 허신 헤세스모데우스 교단이라는 퀘스트는 허신의 강림을 저지하면 세계를 구원하는 쪽으로 결말이 나는걸텐데... 이런 상황임에도 퀘스트 클리어가 안됐다는건, 아마도 뭔가의 조건 달성이 덜되었다는 이야기.'

이건 게임이다. 고로 특정한 조건을 달성하지 못하면 일을 마무리 지을 수 없다. 중간과정을 생략하고 보스나 다름없는 미리안만을 처치해서일까. 클리어가 안 된다는건 한 마디로 뭔가를 놓쳤거나 빼먹었다는 이야기다. 그럼 뭐가 부족한걸까? 설마, 모든 신도들을 말살시켜야 한다던가? 아니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런 종류의 조건은 아닐거다. 그렇다면 대체 뭐지?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는 진석. 문득 진석의 시야에 바닥에 굴러다니던 폭풍의 지팡이와 대지의 눈, 그리고 창염의 검이 들어왔다. 더불어 이 모든일이 시작된 키 아이템인 시커먼 나뭇가지까지. 미리안은 이 보잘것 없는 나뭇가지가 세계수의 가지라고 했었다.

'맞다. 이것들이 남아있었지? 음... 그럼 누군가 또 다시 이걸 모아 허신을 다시 강림시킬지도 모른다는 의미인걸까?'

좋아. 그럼 부숴두자. 어차피 지금 자신의 스테이터스는 무한. 이딴 아이템들 별로 아까울것도 없다. 진석은 폭풍의 지팡이의 머리부분에 달린 보석을 파괴하고, 대지의 눈을 박살냈으며, 창염의 검 역시 검날을 쳐서 동강동강 부숴버렸다. 마지막으로 세계수의 가지는 화염화살로 깔끔히 태워버렸다. 이만하면 어느것도 다시 복구할 수 없으리라. 하지만 퀘스트는 아직도 클리어되지 않았다.

'으음~ 이것도 아닌가? 그럼 뭐지? 또 뭐가 남은거야?'

진석이 생각에 잠겨있는 사이 복도 저 멀리에서부터 누군가가 다급하게 달려오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앗차차. 누군가 오는건가. 하긴, 이 부근 전체가 지진이 난듯 흔들릴 정도로 힘을 써댄데다가 이래저래 요란을 떨며 싸웠으니... 아무리 여기가 지하라고 해도 누군가는 눈치를 챘겠지.'

누가 오는건진 모르겠다만 그나저나 이거 미리안의 시체는 어쩐다? 어차피 물리쳐야 할 교단의 대신관이었던데다가, 자신의 배신을 눈치채고 이쪽을 먼저 죽이려 들었으니 분명 제거해야 했다. 하지만... 시체 정도는 수습해 줘도 되겠지? 일단 미리안의 시체 곁으로 다가가 벽에 박힌 그녀의 유해를 꺼내려는 진석. 하지만 미리안의 시체는 진석이 손을 대자마자 푸스슥 하더니 그냥 한줌 재로 화해버렸다.

"어?"

조금 놀란 진석. 허나 글자 그대로였다. 미리안의 시체는 다 타서 재만 남은 땔감마냥, 그대로 먼지가 되어 허공에 흩어져버린 것이다. 아무런 잔해조차 남지 않았다. 아니 시체가 이런식으로 사라질수도 있는건가? 진석이 잠시 벙쪄있는 사이, 반파된 석실안으로 누군가가 들어섰다.

"이... 이게 뭐야? 대체 무슨일이야?"

톤이 높은 익숙한 목소리. 굳이 뒤를 돌아 확인해볼 필요도 없었다. 제이스였다. 진석은 그렇게 벽을 보고 선 자세로 꼼짝않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제이스... 흥. 뭐 이제와서 쟤 하나쯤 없애는건 일도 아니지. 으음. 그럼 혹시 퀘스트 클리어를 위해선 수호자들도 다 죽여야 하는걸까? 설마... 전 대륙 여기저기 퍼져있는 원로라던가 하는 조력자들까지 전부 죽여야하는건 아닐테지. 걔들까지 어느세월에 다 죽여? 아마 그것도 아닐테고.'

진석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석실의 입구엔 도무지 상황파악을 못하겠다는 표정의 제이스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에나의 원수이자 자신을 허신의 교단으로 이끈 장본인. 화염계열의 비전마법을 구사하는 붉은 머리의 여마법사, 제이스 스콧필드.

'그래도 나름대로 미운정이라도 들었다만, 너도 역시 여기서 죽... 아니. 아니지. 잠깐만.'

어쨌거나 퀘스트의 클리어에 뭔가의 조건이 더 남은건 사실이다. 그렇다면 당장 제이스를 죽이기보다, 퀘스트를 클리어 하는데 그녀를 효과적으로 이용할만한 방법은 없을까? 진석은 순간적으로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여태까지 그래왔듯, 또 다시 거짓말을 해서 제이스를 속일 생각이 떠올랐던 것이다. 순간적으로 판단을 내린 진석은 최대한 무게감있는 표정을 지으며 천천히 제이스에게 다가갔다.

"러, 러셀? 이게 다 어떻게 된거야? 그렇게 입다물고 있지만 말고 뭐라 설명 좀 해봐!"

묵묵하게 안쪽에서부터 걸어나오는 진석을 향해 질문을 쏟아내는 제이스. 하지만 진석은 자리에 멈춰서더니 제이스를 잠시 하찮다는 듯 바라보았다.

"러셀...?"

"시끄럽다."

슈슉! 진석이 순간이동을 하더니 삽시간에 제이스의 목을 움켜쥐고 벽에 몰아붙였다. 뭐가 뭔지도 모르고 목덜미가 붙잡힌채 벽에 처박힌 제이스.

"커헉! 러, 러셀?! 이... 이게 무슨! 쿨럭!"

"시끄럽다고 했다. 나는 러셀이되, 러셀이 아니다."

"무... 무슨... 큭, 이 목 좀... 숨이... 커억."

목이 졸려오자 진석의 손을 붙잡고 필사적으로 발버둥치는 제이스. 진석은 흥 코웃음을 치곤 무슨 물건을 버리듯 제이스를 바닥에 떨어트렸다. 간신히 진석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제이스는 그대로 바닥에 넙죽 엎드린채 쿨럭쿨럭 기침을 토하며 숨을 몰아쉬었다. 진석은 그런 제이스를 무심히 지나치며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이 몸안에 든 나는... 헤세스모데우스. 이 세상을 허무와 정적으로 이끌 허신이로다..."

"헉, 허억... 뭐... 뭐라고?!"

경악을 금치 못하는 제이스의 목소리. 물론 일부러 다 들으라고 흘린 말이다. 진석은 무게를 잡느라 어색한 나머지 웃음이 터져나올것 같은걸 필사적으로 참으며 복도를 걸어나갔다. 신비롭게 보이기 위해서 몇걸음에 한 번씩은 순간이동을 하며 복도를 쉭쉭 건너뛰었다. 뒤에선 겨우 숨을 가다듬은 제이스가 자리를 추스리고 일어나 필사적으로 자신을 따라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진석은 제이스가 다가오는 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복도 중간쯤에 멈춰섰다.

'그래그래. 어쨌거나 가장 큰 난관이었던 미리안을 제거하는데 성공했고, 교단의 세력을 내 손에 넣을 수 있는 상황이 되었으니... 좋다고. 기왕 이렇게 된거 내가 헤세스모데우스를 연기해주지. 게다가 미리안을 지배하고 있던 헤세스모데우스의 사념체보다 내가 훨씬 더 세기도 하니 말이야. 원래 역사는 승자가 쓰는거라잖냐. 이긴놈 마음이지!'

그랬다. 진석은 어떻게해야 퀘스트를 클리어 할 수 있는지 아직 그 잔여 조건을 알지 못하는 이상, 마치 자신이 헤세스모데우스가 된것 마냥 제이스를 속이고 끝까지 그녀를 이용할 생각이었다. 우선 제이스를 통해 자신이 아직 알지 못하는 교단에 관한 정보를 모조리 캐낸다. 그래서 퀘스트 클리어에 지장이 된다 싶은것들을 싸그리 제거한 후, 마지막으로 제이스를 포함한 다른 수호자들도 한 곳으로 불러모아 한꺼번에 해치울 생각이었다.

'뭐 그렇게까지 마무리하면 퀘스트가 클리어 되겠지. 에휴. 교단의 정점인 대신관을 제거하고 허신의 강림 수단 역시 파괴했는데도 아직 안 끝나니 원. 이게 뭔 수고람.'

그 사이 진석의 지척까지 다가온 제이스는 방금 전 목이 졸린것 때문에 겁이 나는지 가까이 다가오진 못하고 한참을 머뭇거리다 겨우 말을 걸어왔다.

"저기... 러셀. 아, 아니아니! 그... 헤, 헤세스모데우스님?"

"무엇이냐."

최대한 근엄한척 대답하는 진석. 역시 어색했다. 하지만 제이스는 평소와 다른 진석의 모습에 긴장했는지 말을 고르며 잠시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그게... 다른게 아니라 헤세스모데우스님이 여기 계시다면... 미리안님... 아니, 대신관과 러셀은 도대체 어떻게 된건지?"

스윽 뒤돌아서는 진석. 진석에게서 뿜어지는 무시무시한 기운과 압력에 제이스가 겁을 집어먹은 기색이 역력했다. 당장 무슨 불호령이 떨어질까 두려워하는 모습이었달까? 진석은 고개를 가볍게 좌우로 저으며 말했다.

"이유는 모르겠고 정확한 정황도 알 수 없으나... 불완전한 강림의식이 일어났다. 내 충실한 주구였던 미리안은 그 여파로 소멸되었고, 그 와중에 이 세계에 소환된 나의 파편은 이 러셀이란 인간의 안에 깃들었다. 즉 지금의 나는 완전한 상태가 아닌 본신의 일부분. 그 일부가 이 러셀이란 인간의 의식과 융합된 상태다."

"그... 그런...?!"

예상치도 못한 설명에 입을 쩍 벌리고 경악을 금치 못하는 제이스. 진석은 눈을 감고 손을 들어 관자놀이를 짚으며 말을 이었다.

"나도 미리안을 잃은것은 안타까우나... 이미 지난 일은 되돌릴 수 없다. 제이스 스콧필드. 너를 지금부터 미리안을 대신할 대신관으로 임명할테니, 곁에서 나의 일을 돕거라."

딱히 고전이나 문학에 소양이 있는건 아니지만 워낙 유명해서 기억하고 있는 문구가 하나 있다. '괴물과 싸우는 자는 그 싸움 중 스스로도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괴물의 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보면, 그 심연 역시 우리를 들여다 본다.' 였던가. 분명 니체의 문구였었지?

'뭐어, 그 의미가 이 상황에 딱 걸맞는 말이라곤 할 순 없지만...'

미리안의 방. 등을 돌린채 창밖을 내다보고 있던 진석은 혼자 조용히 실소했다. 허신의 교단에 들어와서 이들을 물리치려 마음먹었다가, 졸지에 허신 그 자체를 연기하게 되어버린것이다.

'이래도 되는걸까? 음 아니 뭐. 언젠 돼서 했나. 그냥 하다보니 된거지.'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아르데나를 품에 안은채, 제이스를 이끌고 지하를 벗어난 진석은 계단 중간참을 때려부숴 지하를 폐쇄해 버렸다. 아르데나의 간호는 셀린과 여신도들에게 맡겨둔 다음, 제이스, 그리고 케이트와 함께 미리안의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제이스에게 우선 현재 교단의 상황에 대해 알고있는 모든것을 최대한 상세히 말해보라고 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제이스가 아는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진석도 이미 알고있는 교단에 대한 기본적인 구성과 메디니아의 왕족들이나 귀족들, 그리고 헤세스 약품 통상 및 엠퍼슨 메디컬 아카데미에 대한 소소한 정보들 약간 정도? 예상보다 그녀가 알고있는 정보는 대단히 적었다.

즉, 제이스도 명색만 수호자였지 실상은 철저히 미리안이 부리던 한낱 장기말이었던 것이다. 모든 정보는 정점에 위치한 미리안만이 쥔채 아랫쪽엔 일방적인 명령만을 부여한 것이었달까. 수호자라고 해봐야 더 많이 안다거나 하는것이 아니라 그냥 측근에서 좀 더 은밀한 일을 직접적으로 지시받아 실행하던것 뿐이었다. 더군다나 교단의 본산과 주요 세력은 메디니아에 있다지만, 미리안은 전 대륙에 걸쳐 크고 작은 정보망이나 세력들을 운영하고 있었으니 제이스가 아는것만으론 별 도움이 될게 없었다. 제이스도 아는게 별로 없고 모든것은 미리안만이 주도하고 있었던걸 새삼 깨닫고 나니, 왜 그녀가 언제나 서류더미에 파묻혀 일을 하고 있었는지 확실히 납득이 갔다. 진석은 제이스에게 일단은 교단내의 혼란을 막기 위해 잠시간은 미리안의 죽음을 감춰두겠다고 말했다. 신도들에겐 그녀가 중요한 일로 지하에 내려가 있으니 아무도 방해말라는 말을 해두면 충분할거라고 했다.

그리고 진석은 제이스와 케이트가 지켜보는 가운데 미리안의 방을 뒤져보았다. 책상 아래에 작은 금고가 있었지만 이곳에 들어있는것은 오직 서류들 뿐이었다. 물론 금고에 넣어둘만큼 중요한 서류들이긴 했지만, 지금 당장 진석이 쓸 수 있는 종류의 물건은 아니었다. 방 안에 특별한 물건이 없음을 확인한 진석은 제이스와 케이트에게 지금까지 미리안이 해오던 업무를 파악할것을 지시했다. 언젠가 제거할 제이스에게 단독으로 모든 일을 전부 맡겨둘 순 없었던 데다가, 미리안이 처리하던 업무량은 어마어마했으므로 겸사겸사 케이트를 붙여준 것이었다. 케이트는 나름 눈치도 빠르고 머리 회전도 어느정도 되는편이니 이 둘에게 맡겨둔다면 일단은 어떻게든 될 것 같았다.

그렇게 둘에게 미리안의 일을 파악해둘것을 지시한 후 혼자 창가로 다가간 진석은 창 밖의 밤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오늘밤은 어째서인지 별도 보이지 않고 달도 흐릿했다. 시커먼 밤 하늘은 말 그대로 심연같았다. 니체의 말 따윌 떠올리며 잠시 생각에 잠겨있는데, 다음 순간 갑자기 머리가 아찔하며 현기증이 일어났다. 그리고 몸에서 힘이 쭈욱 빠져나가기 시작하는게... 셀 수 없이 걸려있던 버프들이 느닷없이 하나 둘 사라지기 시작했다.

'읏... 무, 무슨?'

진석이 창틀을 붙잡고 심하게 휘청거리자 한참 서류들을 늘어놓고 종류별로 분류하고 있던 제이스와 케이트가 깜짝 놀라 곁으로 다가왔다.

"주인님? 괜찮으신가요?"

"헤세스모데우스 님?"

대답없이 괜찮다는듯 손을 휘휘 내젓는 진석. 이건... 자신의 몸에 문제가 생겼다던가 하는것은 아니었다. 그저 뭐랄까, 충만해있던 무언가가 빠져나가는 극도의 허탈감? 그랬다. 끝도 없을것 같은 무한한 힘이 구멍나 바람빠지는 풍선마냥 스르륵 쪼그라들고 있었다.

'아니... 어째서? 영혼들인가 뭔가를 흡수해 이제 내 힘은 무한이 된거 아니었나?'

급히 스테이터스 창을 열어보는 진석. 무한궤도를 그리고 있던 스테이터스들은 하나 둘 수십만단위의 숫자로 변하더니, 이내 만단위씩 빠르게 하락하기 시작했다. 수십만이던 숫자는 곧 수만이 되고, 다시 수천으로 줄었으며, 결국엔 두자리까지 떨어지고 말았다.

'이게 뭐야! 으그극... 남은게 고작 이거?'

모두 두자리까지 떨어지고 나서야 변동없이 완전히 멈춘 숫자들. 하지만 하락한 숫자라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진석의 스테이터스는 이전에 비해 대폭 늘어있었다. 매력을 제외한 모든 스테이터스들이 정확히 30을 더한만큼 늘어있었다. 즉 무력과 민첩만해도 각기 80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수치. 매력만을 빼고 모든 능력치가 기본적인 한계 스테이터스 50을 전부 초월한 상태였다. 하지만 무한 그 자체인 능력을 지니고 있다가 이렇게까지 능력치가 하락하고 나니... 마치 엄청나게 강력한 거대로봇에 타 있다가 몽땅 발가벗겨져 길 밖에 내쳐진 기분이 들었다.

'으으... 예전같으면 능력치 2~3 정도만 올라도 충분히 좋아했을테고, 매력을 뺀 나머지 스텟들 전부가 무려 30씩이나 올랐으니 엄청나게 대단한거긴 하지만... 무한이다가 요렇게나 똑 떨어진거니 이건 낙폭이 심해도 너무 심하잖냐! 80년대 후반 뉴욕 증권가가 무너졌던 블랙 먼데이의 주가 하락폭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고! 아니... 그런데 잠깐. 세인트 베네딕션... 이거 아직 살아있네?'

세인트 베네딕션. 미리안이 자신에게 걸어주었던, 전체 스테이터스를 일정량 상승시켜주는 패시브 스킬. 스킬을 사용했던 주체인 미리안이 죽었으니 당연히 사라졌을거라 생각했는데, 어째서인지 그대로 남아있었다.

'왜지? 이건... 술자가 죽어도 유지되는 타입의 기술이었던건가? 그게 아니라면 혹시...'

...설마. 미리안이 살아있다? 아니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럴리가 없잖냐! 자신의 손으로 목숨을 끊어놓은데다가 시체는 한 줌 재로 화한걸 똑똑히 봤는데?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다. 그냥 한 번 걸어주면 쭉 유지되는 타입인가보지. 그렇게 짐작한 진석은 여태까지 붙잡고 있던 창틀에서 손을 떼고 후우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걱정스러운 표정을 한 케이트가 바로 곁으로 다가와 안부를 물었다.

"주인님...?"

"아, 괜찮아. 나는 괜찮으니까... 하던 일 계속해."

"엇. 그 말투는... 혹시 러셀?"

역시 곁으로 바짝 다가서며 진석의 안색을 살피는 제이스. 제이스도 진석의 몸을 채우고 있던 어마어마한 힘이 사라진걸 어느정도 짐작한 모양이었다. 케이트에게 무심코 평범하게 대답한걸 보고 분위기가 변했다고 지레 짐작한걸까?

'그 말투는 러셀~ 이 뭐냐? 나는 그냥 원래부터 나였구만.'

그보다 필요에 의해서 속이는거긴 하지만 이거 익숙치도 않은 연기를 하려니 귀찮은걸.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며 답하는 진석.

"음... 그래. 지금은 헤세스모데우스가 아닌 원래의 나야. 왠진 모르겠지만 힘이 잠깐 안으로 사라졌는데..."

에... 이런 젠장. 무슨 이중인격자 마냥 굴려니 괜시리 낯이 다 뜨겁다. 신의 힘을 내면에 봉인해서 인격이 오락가락 해요~ 라는 느낌의 설정이라니. 이게 무슨 중증의 중2병 환자 같은 꼬라지냐? 에라이 씨발. 짜증나는데 그냥 제이스 죽이고 다 때려엎은 다음 나가버릴까.

'아니지 아니야. 진정하자 진정. 후우... 미리안을 쓰러트렸으니 퀘스트 클리어는 거의 다 된 밥인데 괜히 욱해서 코 빠트리지 말자고.'

진석이 마치 헤세스모데우스에게 몸을 빼앗겼다 이제와서 제정신을 찾은듯 연기하자 제이스는 울먹울먹 하더니 이쪽으로 와락 안겨왔다.

"러셀! 나... 나는 러셀마저 어떻게 되어버린줄 알고! 으흑, 다행이야!"

그러더니 다짜고짜 품에 얼굴을 묻고 엉엉하며 우는게 아닌가? 그리고 옆에서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케이트. 방에서 가만히 대기하다가 다짜고짜 불려나온 케이트에겐 지금의 이런 모습이 도무지 이해못할 상황이겠지만, 교단에 돌아오기 전 이야기 해둔게 있어서인지 아무 티도 내지 않고 그저 가만히 대기하고 있었다.

"흑, 느닷없이 미리안님이 잘못되어 버리고... 훌쩍! 러셀마저 어떻게 됐었다면. 나... 나는!"

진석은 대답없이 품에 안긴 제이스를 몇 번 토닥이며 케이트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품에 안긴것은 언제고 죽여야 될 상대지만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며 눈물을 흘려주는 이. 그리고 곁을 지키는건 실상 자신의 의지는 거세된채 명령에만 충실한 인형이나 다름없는 노예. 진석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이 모든게 게임이라지만... 퀘스트 클리어라는 목적을 위해 남을 속이며 이용하고, 또 누군가는 일방적으로 도구처럼 부리고... 이거... 어쩌면 나도 미리안과 별 반 다를게 없을지도 모르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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