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베라 - 부회의 방랑자-145화 (145/155)

< --   - 13.   -- >         * 145화 *

페레나시의 패커즈샵에 도착한 진석은 그렇게 르마쿠르 자매와 재회했다. 지젤과 아네트를 따라 가게 지하의 공방으로 내려가자, 지젤은 그간 진석을 위해 만들어둔 무구를 자신있게 꺼내보였다. 지젤이 준비한 것은 새로운 단검 한 자루와 갑옷 한 벌이었다. 우선 가죽 검집에서 번쩍번쩍하게 벼려진 검은날의 크리스를 뽑아보이며 설명하는 지젤.

"자 우선 이거. 예전에 만들었던 란비언과 완전히 똑같은거야. 이건 내가 만들 수 있는 가장 높은 품질의 단검이기도 하고, 게다가 러셀은 단검 두 자루를 페어로 쓰잖아? 기왕이면 똑같은 무기를 쓰는게 좋지 않을까 싶어서."

지젤에게서 두번째의 란비언을 건네받은 진석. 벨트에 꽂혀있던 원래의 란비언과 함께 양손에 든채 두 자루의 무게나 밸런스를 가늠해 보았다. 첫번째 란비언이 그간 사용한 손때나 흔적이 묻어있다는것만 제외하면 두 자루는 그야말로 틀에 찍어낸 듯 완전히 똑같았다. 양손에 들린 두 자루의 란비언을 휘리릭 돌려보이다 벨트 앞춤에 처척 꽂아보이며 고개를 끄덕이는 진석.

"좋은걸. 그리고 다음은 갑옷이라고?"

물론 더 좋은 무기를 쓰고 싶은 생각이 없는건 아니었지만 란비언 정도면 충분히 좋은 무기였다. 딱히 마법이나 추가적인 기능이 붙은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만하면 그저 그런 수준의 마법무기들보단 월등히 좋은 무기니까. 많은 여윳돈과 충분한 시간이 있다면 경매장을 돌면서라도 더 좋은 무기를 찾아 볼 수 있을테지만 지금은 무기를 고르는데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 한시 바삐 데오그라즈에 가서 레오노르를 만나야했으니까. 그리고 진석의 말에 큼직한 상자의 뚜껑을 열며 고개를 끄덕이는 지젤.

"응. 몸통과 팔다리의 각 파츠들로 나뉘어진 세트야. 하지만 달리 무겁거나 움직임에 지장을 주진 않을거야. 합금처리를 한 흑철에 경량화 및 강도향상의 주문을 건 특제 금속으로 만들었으니까."

그리고 뒤에서 지켜보던 아네트가 끼어들며 한 마디 거들었다.

"그래그래, 저거 정말 끔찍할정도로 비싼거야. 재료 준비만으로도 러셀이 언니랑 나한테 준 돈을 대부분 써버렸으니까."

"그런 말을 뭐하러 해."

아네트의 발언을 타박하는 지젤. 하지만 진석은 아네트의 말에 꽤나 놀랐다. 진석이 르마쿠르 자매에게 건넸던건 개당 금화 천닢 상당의 금괴 두 개. 그걸 재료 준비만으로 거의 다 써버렸다면 이건 정말 공을 들인 물건이라는 이야기다. 지젤은 상자를 기울여서 들여보이며 진석에게 안쪽을 보여줬다. 상자의 안쪽엔 그녀의 말대로 세트로 된 검은 빛깔의 갑옷이 들어있었다.

"이름은 라 찬. 재료가 워낙 좋아서일까, 내가 생각해도 상당히 튼튼한 물건이 만들어 졌다고 생각해. 자화자찬 같지만 이만하면 아버지가 만들었던 물건에도 필적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그러고보니 지젤은 아버지한테 대장 기술을 배웠다고 했었지? 그보다 어디어디.'

상자째로 건네받고 안쪽의 갑옷을 꺼내보는 진석. 갑옷은 분명 여러 파츠로 나뉘어 있었다. 우선 가장 큰 파츠이자 상체를 가리는 흉갑. 스커트가 내려와 있어 복부까지 어느정도 가려졌다. 그리고 팔꿈치 아래부터 손목까지의 부분을 보호하는 호구. 그 다음은 무릎받이와 금속부츠였다. 부츠는 정강이 부분의 전면을 보호하는 형태였고 연결부위인 발목쪽은 가죽과 사슬이 교차되어 연결되어 있었다.

'호오. 그냥 한 눈에 보기에도 품질이 높아보이는걸? 세세한 부분의 마감도 좋고...'

흉갑을 꺼내들어 살펴보는 진석. 흉갑은 전면만을 가리게 되어 있으며, 몸 위에 덧댄후 말가죽끈 벨트를 당겨서 간편히 조절하는 형태였다. 그리고 각 파츠들의 안쪽은 부드러운 면피가죽이 덧대어져 있었다.

- 세트아머, 라 찬

방어력 : 104

설명 : 세트로 구성된 흑철 소재의 갑옷. 더할 나위 없이 튼튼해 보인다. 완성도가 높아보인다. 착용하는 것 만으로도 추가방어력을 적용받는다. 모든 파츠를 착용했을시 세트효과로 추가방어력을 적용받는다.

특징 : [내구극한], [완성도 높음], [경량], [추가방어력(5%)], [세트효과 - 추가방어력(15%)]

지젤은 분명 장인이자 전사지, 무구에 마법기능을 부여하는 인챈터는 아니다. 비록 라 찬은 어깨보호대 에스카마도나 적룡의 건틀렛 플라메우스처럼 특별한 기능이 달린것은 아니지만 갑옷으로서 가져야 할 가장 기본적인 성능인 방어력이 무지하게 뛰어난 세트아머였다. 한 파츠만 입어도 5%의 추가방어력을 적용받는데... 모든 파츠를 챙겨 입으면 세트효과가 발동해 무려 15%의 추가방어력이 적용, 총 합계 20%의 방어력이 상승했다. 즉 그냥 입는것 만으로도 상당히 강력한 수준의 방어마법으로 버프를 적용받는거나 다름없는 물건. 지젤의 말대로 확실히 튼튼함 면에선 일품인 방어구였다.

'그리고 금속갑옷이지만 경량이 적용되어 있는데다 부위별로 파츠가 나눠져 있는만큼 딱히 민첩에 패널티가 먹을 일도 없고.'

원래 금속갑옷은 무겁고 불편한만큼 민첩에 약간의 패널티가 미치는것을 감수하고 입는 방어력을 중시하는 물건. 하지만 이것은 경량이 적용되어 있어 금속소재임에도 활동성을 해치는일은 없었다. 게다가 전체 방어력도 여느 풀플레이트 아머를 뛰어넘는 수준. 갑옷의 성능을 확인한 진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했다.

"이거 아주 좋은데? 고마워, 지젤."

진석은 지젤에게 감사인사를 하고 곧바로 갑옷의 파츠들을 하나하나 입기 시작했다. 지젤은 말없이 미소를 지어 보이며 그런 진석의 곁에서 갑옷을 입는것을 도와주었다. 그리고 갑옷은 정말 자로 잰듯 몸에 딱 맞았다. 부츠조차 불편함 없이 아주 편하게 신을 수 있었다. 금속 소재임에도 자신의 몸에 빈틈없이 딱 맞춰진 갑옷의 구성에 감탄하는 진석.

"이야, 이게 무슨 맞춤 천옷도 아닌데 어떻게 이렇게 내 몸에 딱 맞췄어?"

"뭐어... 그야 그동안 서로 알몸으로 많이 뒹굴었잖아? 러셀의 몸은 구석구석까지 다 파악하고 있었으니깐."

배시시 웃으며 구석구석이라는 단어에 강세를 두어 대답하는 지젤. 뒤에서 그 대화를 듣고있던 아르데나는 혼자 가만히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 조금 답답해하는 표정을 지으며 진석을 빤히 바라보는것이, 아르데나에게 있어 진석은 정말 본인만 빼고 주위에 있는 여자란 여자와는 다 관계를 갖는걸로 보였으리라. 우선 제이스부터 시작해서 엘리야, 레오노르, 셀린과 케이트. 거기에 아르데나로선 오늘 처음 만난 이 르마쿠르 자매까지. 그녀가 아는 것만도 벌써 이만큼이다. 아르데나가 아는 진석이란 남자는 그야말로 주변의 여자들 대부분과 몸을 섞은것이다. 어찌보면 이렇게까지 자유분방히 하반신을 흔들고 다님에도 정나미 떨어지는 일 없이 여전히 자신을 좋아해주는 아르데나쪽이 더 대단하다고나 할까?

'에, 글자 그대로 난봉꾼이구만. 하지만 여러 여자들과 있는대로 잠자리를 하고 다닌건 분명 사실이니 딱히 변명의 여지도 없고.'

그리고 아르데나는 모르는 일이지만 첫 시작은 에나였다. 게다가 여자의 몸일땐 창녀 셀린과, 그리고 아라파에 가서는 알 유세피나와 관계를 갖다못해 임신까지 시켰으며, 돌아오는 도중엔 아이린이라는 유부녀와도 관계를 가졌고, 거기다 올린스턴 왕국에 갔을땐 패럴 왕자의 전속 하녀인 레나라는 여자에게까지 손을 댔었다. 새삼 숫자를 세어보자니 정말 많이도 하고 다녔구나! 앞으로도 기회가 생길때마다 빼놓지 않고 열심히 해야지~ 하며 마음속으로 쓸데없는 결심을 다지는 진석. 아무튼 이렇게 해서 새로운 무기와 갑옷을 손에 넣은 진석은 위층으로 돌아와 르마쿠르 자매에게 적당한 사례를 하고 가게를 떠나려 했다. 아네트를 향해 미리 준비해둔 돈 주머니를 내미는 진석.

"이게 뭐야?"

고개를 갸웃하며 주머니를 바라보는 아네트. 진석은 태연히 대답했다.

"금화 이백닢. 뭐 전에 준것에 비하면 얼마 안되는 액수지만..."

현재 진석이 가지고 있던 현금은 대략 금화 3천닢. 그중 일부를 떼어 수고비로 르마쿠르 자매에게 건네려 했다. 하지만 아네트는 이건 아니라는듯 강경히 고개를 저으며 진석의 품에 안겨들었다.

"싫어! 이걸로 퉁치고 또 떠나버리려고? 돈 따윈 아무래도 좋으니까 절대로, 절대로 따라갈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떨어질 수 없다는 듯 진석의 옷자락을 단단히 거머쥐며 달라붙는 아네트. 그러자 옆에 있던 지젤이 쯧쯧 혀를 차며 진석의 손에 들려있던 돈 주머니를 자연스레 받아들었다. 호오, 지젤은 이걸 받는걸로 만족해 주는건가? 의외인데? 하지만 지젤의 입에서 흘러나온 대답은 기대와 달랐다.

"아네트. 역시 넌 멍청하구나. 기왕 주는거니 돈은 돈대로 받고 러셀도 그냥 따라가면 되는거잖아?"

"아, 그렇구나! 그래 그렇게 하자! 에헤헤-"

...그, 그럼 그렇지. 이 변태자매가 그렇게 쉽게 떨어져줄리는 없나. 에라 모르겠다. 뭐 맘대로 해라! 진석은 좋을대로 하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고 뒤에 서있던 아르데나는 아무도 모르게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진석 일행은 지젤과 아네트 둘이 더 늘어 총 여섯이 되었다. 지젤과 아네트는 가게 밖에서 쭉 기다리고 있던 셀린과 케이트를 보곤 이미 또 다른 일행, 정확히는 또 다른 여자들이 더 있다는 것에 적잖이 놀라는 눈치였다. 일행이래봐야 여동생인 아르데나 하나뿐이라고 생각하고 앞으로 재차 진석을 따라다니며 그간 밀린 섹스나 잔뜩 해댈 생각이었는데, 또 다른 경쟁자들이 둘이나 더 있었을 줄이야? 허나 정작 셀린과 케이트는 르마쿠르 자매를 그닥 별로 신경쓰지 않아하는 눈치였다. 복종마법으로 마음속 깊은곳까지 완전히 진석을 따르는 그녀들인만큼 진석이 새로운 여자들을 더 늘리건 말건, 주인의 행동에 일말의 불만조차 가질리가 없었던 것이다.

사실 가장 큰 불만을 가진것은 아르데나였다. 아무리 겉으론 티를 내지 않으려고 해도 자신을 포함해서 오빠인 진석의 곁에 머무는 여자가 이미 다섯명이나 되는데, 이 중 유일하게 진석과 잠자리를 하지 않은건 자신 하나뿐이지 않은가? 뭔가 굉장히 뒤쳐지는듯한 억울한 기분이었다. 허나 진석이 르마쿠르 자매 앞에서 자신을 여동생이라고 공언한데다가 2년 뒤라는 약속이 있는만큼 이제와서 달리 조르거나 보챌수도 없는 노릇. 아르데나로선 나중을 기약하며 그냥 꾹 참는수밖에 없었다.

진석 일행은 곧바로 시장으로 향해 필요 최소한도의 보급을 하곤 지체없이 바로 남쪽으로 향했다. 그렇게 페레나 시를 벗어나 한 시간쯤 달렸을까? 일행은 러프야드 방향에서 온듯한 소규모의 부대를 마주쳤다. 2개 소대 규모의 병사들이 호위하는 이십여대의 수레들과 여러대의 왜건. 각종 물자가 잔뜩 실려 있는 것이 아마도 북쪽에서 진군중인 부대를 위한 치중대인듯 했다.

'하긴 2천이 넘어보이는 병력이니 소모하는 물자도 상당할테지. 식량은 곡창인 러프야드에서부터 보내는건가?'

진석 일행은 오해를 사지 않도록 치중대에게서 적당히 거리를 두고 떨어져서 이동했다. 처음엔 부대의 진군을 방해하기 위해 이들을 박살내둘까도 생각했지만 역시 그건 그만두기로 했다. 이런곳에서 괜히 엄한짓을 하다 일이 꼬이느니, 조금이라도 빨리 데오그라즈에 도착해 레오노르를 만나보는게 훨씬 근본적이고 신속한 해결법이었으니까. 그렇게 치중대를 지나 계속 남하했는데 가도엔 확실히 평소와 달리 상단이나 여행자들의 통행량이 확 줄어있었다. 이전엔 도시 근교의 가도를 따라 이동하다보면 아무리 적어도 한시간에 최소 두세번은 여행자나 상단의 이동 행렬을 볼 수 있었는데, 지금은 도통 오가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야 뭐... 대규모 병력이 북쪽으로 이동했고 전쟁이 날 판인데 일부러 난리가 날 곳에 가려는 사람은 없을테지. 페레나시에서도 전쟁을 대비해 생필품의 사재기 조짐이 보이는것 같았고.'

규모가 크건 작건 전쟁은 전쟁이다. 그란델에서 2천 이상의 정병이 나갔다면... 현재의 메디니아로선 외부의 도움 없인 그들을 쉽사리 막을 순 없으리라. 메디니아의 총 인구는 약 1만. 그중 전쟁 수행이 가능한 인원을 단순히 추려보자면... 게임을 시작할때 남녀의 성비를 4:6으로 설정했으니 남자가 대략 4천. 그중 생산성 있는 노동 가능 인구 중, 군역에 편입될 수 있을 만큼 젊고 건장한 인원을 총동원 한다고 가정하면... 제대로 따지자면 이래저래 복잡하겠지만 적당히 절반정도인 2천으로 가정해보자. 그럼 머릿수만큼은 그란델의 병력과 대등해진다.

'하지만 이건 그냥 숫자놀음일 뿐이고, 그란델에선 이미 무장하고 훈련까지 받은 정규 병력이 2천. 반면 이쪽은 전 국토에서 동원 가능한 숫자가 2천이라면... 당연히 승부가 안되지. 어느세월에 2천을 소집할것이며 그들을 위한 무장이나 지원은 어떻게 할건데?'

어제까지 물건을 팔던 장사꾼이나 땅을 갈던 농부들처럼 평범한 시민을 데려와 창 한 자루 쥐어준다고 제대로 된 병력이 될리 없었다. 징집병과 달리 정규 상비군이란 돈과 물자를 엄청나게 퍼먹지만 분명 그만큼 강력한 존재였다. 결국 그란델의 군이 각 마을이나 도시 규모로 소규모로 항전을 벌여오는 장애물들을 슥슥 건너뛰고, 수도까지 종심작전을 전개한다면 메디니아로선 단박에 무너지는 일만 남을터! 허나 메디니아측의 수뇌도 생각이 있다면 그들이 수도에 이르기 전 한 도시나 마을을 선택해 방어거점으로 삼고 그곳에 최대한 병력을 집중해 적의 진격을 막고 장기전으로 끌며 그 사이 추가 병력을 소집하거나 외부의 도움을 끌어들이는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란델측에 정병이 많다고 해서 무작정 유리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란델에게 불리한 점이라면 타국의 영토로 진입하는 쪽이기 때문에 사방이 적이라는 것. 즉 장기전이 되면 될수록 당연히 군대를 움직이는 진군로의 선택부터가 부담이 걸릴테고 진군하면 할수록 보급선 역시 더 길어진다는게 단점이었다. 적지에서 싸운다는건 아무리 상대가 약하다 해도 그리 쉬운일은 아니었으니까.

그와 반대로 메디니아에게 유리한 점이라면 자국 영토라 보급이나 이동이 용이하고 대륙 제일의 약품회사인 헤세스 약품 통상이 있다는 점이랄까? 직접적인 전투는 피하고 성벽 등을 방벽삼아 최대한 방어적으로 상대에게 소모전을 강요한다면, 메디니아측엔 대량의 약품 을 징발해 지원할 수 있는 한 병사들의 사망률은 그란델과 달리 현저히 낮을터. 또 많은 자산을 축적한 부국이라는 점을 활용해 시간을 끄는 동안 용병대라도 왕창 고용해 그들로 하여금 유격전을 벌이게 하여 낮밤을 가리지 않고 도처에서 기습을 가한다면 적지라서 상시 경계해야하는 그란델군의 피로도는 급격히 누적될것이다.

'즉 그란델측에선 종심작전을 상정한 단기 결전을, 메디니아측에선 중간 어딘가에서 상대의 발목을 붙들고 최대한 늘어지는 방어전을 펼쳐야 한다는 이야기.'

만약 메디니아가 인근국가인 애거스트 공화국이나 옐 프람 성국에 여러가지 이권을 내주기로 하고 동맹이라도 맺은 후 병력지원을 끌어온다면, 그란델 역시 현재의 병력만으론 이기기 힘들터. 하지만 애거스트 공화국은 민의를 반영하는 공화정인만큼 동맹 결정이 단시일내에 나긴 힘들테고... 옐 프람 성국은 수도 내에서 이상한 실험을 벌일만큼 맛간 놈들이 득시글 거리는 종교국가라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다는게 문제랄까. 게다가 옐 프람측이 현재 적국으로 상정하는 것은 아마도 올린스턴 왕국일테니 메디니아엔 힘을 빌려주지 않을 가능성도 높았다. 아니 애당초 메디니아에서 타국에 동맹 제안을 할지 어떨지도 모르는일이고.

'어쨌거나 이건 전적으로 다 내 가정일 뿐이니 일이 어떻게 될 진 모르겠군. 현재 움직이는 그란델 군의 전략 목표도 모르거니와, 메디니아의 왕족들이나 수뇌들의 성향이나 그들이 얼마만큼 유능한지도 알 수 없으니...'

군주와 장수의 플레이 경험이 많은 진석이다 보니, 말을 타고 이동하는 와중에도 그런식으로 여러가지 상황을 상정하여 혼자서 온갖 추론을 해보았다. 허나 그래봐야 전부 자기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탁상공론일 뿐. 어떤 추론이나 가정을 해보더라도 결론만큼은 똑같았다. 결국 자신이 데오그라즈에 도착하여 레오노르를 만나야 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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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각. 데오그라즈의 선창가의 어느 뒷골목. 열명이 넘는 건장한 사내들이 검은 장발을 휘날리는 한 명의 젊은 청년에게 일방적으로 얻어맞고 있었다. 사내들은 청년의 앞뒤나 양옆에서 동시에 덤벼들었지만 그는 바람같은 몸놀림으로 샥샥 빠져나가며 역으로 상대의 안면이나 복부에 매서운 반격을 가해왔다. 게다가 지금 청년을 둘러싸고 덤벼드는 이들은 전부 빅 본에 속한 하부 조직원들이었다. 즉 주먹질로 밥벌이를 하는 직업 깡패들이라는 이야기. 몇 대 얻어맞는다고 뻗어버린다면 이 일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어찌된 것인지 저 청년의 주먹은 그 차원이 달랐다. 한 대 한 대가 숫제 무슨 몽둥이로 후려치는 것 같은게, 주먹밥을 먹는 이들로서도 잘해봐야 두 대 까지였고 세 대 이상을 버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아홉명의 사내가 전부 바닥에 뻗은채 신음성을 흘리며 나뒹굴었다. 혼자 남은 마지막 한 명의 사내는 손등으로 코피를 훔치며 뒤로 몇발짝 물러났다. 하지만 그의 등에 닿은것은 싸늘한 벽의 감촉뿐. 도망갈데는 아무데도 없었다.

그가 식은땀을 흘리며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는 사이, 동료들을 다 때려눕힌 젊은 청년은 뒤로 물러났고 지금까지 뒤에서 상황을 관망하던 이들이 앞으로 나섰다. 기사마냥 갑옷을 차려입고 장검을 찬 훤칠한 미남과 로브차림에 긴 지팡이를 들고 있어 마법사로 보이는 호리호리한 사내. 그리고 비엔족의 젊은 여궁수와 사제복 차림에 양갈래 머리를 한 아가씨, 마지막으론 건장한 체격을 한 짧은 머리의 중년 사내였다. 그 중 마법사로 보이는 사내가 앞으로 나서며 능글능글 웃는 낯으로 물어왔다.

"이런이런. 우리들은 그냥 몇가지 물어보려고 했을 뿐인데... 먼저 덤벼온것은 그쪽이니 이런 결과를 원망하진 않겠죠?"

"...퉷. 씨발, 너희들 대체 뭐야?"

사내는 바닥에 피가 섞인 피를 퉷 뱉으며 그렇게 씹어뱉듯 되물었다. 그러자 마법사는 얼굴에서 웃음기를 싹 지우고 이쪽으로 다가와 지팡이의 끝을 사내의 목에 찌르듯 콱 들이댔다.

"알 거 없습니다. 더 이상 다치고 싶지 않다면 이제 그만 그쪽의 두목에게 안내해 주시죠? 처음부터 밝혔다시피 우린 그저 당신네들의 두목에게 몇가지 물어보고 싶은게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그쪽에게 위해를 가할 생각이 있었다면... 이런 번거로운 짓은 생략하고 그냥 다 죽여버렸겠죠."

"......"

뭐, 뭐냐 이 마법사놈은? 마법사들은 그리 흔하지도 않거니와 일반적인 편견대로 비리비리한 족속들이라고 생각해 온게 사실인데... 이자는 눈빛에 담긴 기세가 보통이 아니다. 폭력이나 협박이 일상화 된 삶을 사는 자신조차 한 수 접어줘야할 강렬한 눈빛이다. 이건 뭐랄까, 그야말로 산전수전 다 겪었다는 느낌이랄까? 그렇다고 순순히 두목에게 안내해 줄 수 있겠냐만... 잘 생각해보니 어쩔 수 없었다. 어차피 자신이 거부한다고 해봐야 또 다른 동료들이 이와 같은 꼴을 당할뿐. 실력차가 압도적임에도 목숨을 빼앗는것도 아니고 이렇게 안내만을 요구한다는건 이쪽을 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말로 뭔가를 묻기 위해서 왔을 확률이 컸다.

게다가 애시당초 저들은 일관적으로 안내만을 요구했었고 가당치도 않은 소리라며 먼저 공격한건 분명 자신들 쪽이었으니까. 하지만 결과는 이랬다. 열 명이 단 한 명을 당해내지 못하고 전부 퍼져버린것이다. 저만한 솜씨를 가진 이들이 두목이나 조직을 노리고 공격하러 온거라면... 확실히 이런식의 번거로운 방법을 쓸 필욘 없을테지. 빅 본의 하부 조직원인 사내는 결국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고 그를 설득하는데 성공한 리들리의 얼굴엔 다시 능글능글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랬다. 클립튼 일행은 진석 일행보다 한 발 먼저 그란델의 수도 데오그라즈에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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