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13. -- > * 146화 *
그리고 남하해서 러프야드 방향으로 향하던 진석 일행은 도중에 저녁이 되었기에 중간의 마차촌에서 하루 머무르기로 했다. 르마쿠르 자매는 당연히 오랜만에 재회한 진석과 밤을 보내고 싶어했지만, 진석은 방을 무려 세 개나 빌리면서 그녀들의 접근을 원천 차단했다. 우선 르마쿠르 자매가 방을 같이 쓰고, 그 다음은 셀린과 케이트, 마지막으로 진석과 아르데나가 한 방을 쓰기로 했다.
진석은 엄청나게 불만스러워 하는 지젤과 아네트에게 지금 자신이 데오그라즈로 가는것은 이전에 얘기 해준것과 관련한 굉장히 중요한 일 때문이라며, 지금은 힘이나 시간을 낭비할 때가 아니고, 그녀들이 원하는건 이번 일을 끝낸 뒤에 얼마든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녀들은 진석이 세계멸망을 획책하는 허신의 교단에 단독으로 들어가 그들의 계획을 저지하려 하는것이라 알고 있었으므로 불만스러워 하면서도 울며 겨자먹기로 어쩔 수 없이 수긍했다. 반면 아르데나는 진석과 단 둘이 방을 쓰게 된것에 내심 여러모로 기대를 했지만 당연하게도 아무일도 없었다.
그렇게 마차촌에서 하루밤을 머물고 출발하여 진석 일행은 다음날 정오가 조금 안되어 러프야드에 도착했다. 이제 데오그라즈까진 고작 몇시간인 지척 거리. 서둘러 가고 싶긴 했지만 끼니까지 거르면서 움직일 필요는 없었으므로 말들도 잠깐 쉬게 할 겸 적당히 점심을 사먹고 가기로 했다. 진석은 일행을 이끌고 러프야드로 들어가 이전에 들렀었던 식당에서 적당히 식사를 했다. 헌데 진석이 기억하는 이전의 러프야드는 소작농들 뿐이라 그다지 활기가 없는 도시였는데, 지금은 정 반대로 상인들이나 용병으로 보이는 이들이 득시글 했다.
'이곳 러프야드는 전장과 가까운것도 아니고 보급거점이 되다보니... 되려 일시적인 특수를 누리는 모양이군. 물자 보급을 위해 움직이는 상인들이라던가, 혹은 이때다 싶어 군에 고용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한 용병들까지 몰려든건가.'
분위기가 안좋은쪽으로 어수선한 페레나시와는 그 모습이 대조적이었다. 여긴 수도 근교의 보급거점이라 일단은 안전하다 이건가? 하긴, 누군가에게 전쟁이란건 그저 큰 돈이 오고가는 사업수단일수도 있겠지. 그런데 진석 일행에 워낙 미녀들이 많다보니 식사를 하는 동안 추파를 던져오는 간 큰 용병들도 몇 있었다. 하지만 딱히 진석이 나설것도 없이 지젤이나 아네트가 말 몇 마디만으로 전부 쫓아버렸다. 대충 이런식이었다.
"휘이, 이야 이거 꽃밭인데? 물 줄 남자 모자라지 않아?"
"흐응~ 무슨 자신감으로 개도 안 물어갈 그딴 화석 같은 멘트를 던지는거야? 그보다 우리랑 놀고 싶은거야?"
"오오, 그거야 물론이지. 그쪽 정도의 미인들이라면 언제든 환영이야."
"그런데 그 전에 하나 확인하고 싶은게 있거든.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볼께. 너희들, 거시기는 커?"
"...뭐?"
"왜냐하면 나는 길~고 굵~다란걸 맛보는걸 정말 좋아하거든? 입 안이 넣었을때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정도로 꽉 차다 못해 목구멍 깊숙히까지 닿는 그 감촉이 너무너무 좋아. 하지만 입 안에 그걸 넣었을때 가득 찰 정도가 아니라면... 왠지 모를 허전함에 화가 나거든? 그럼 나도 모르게 도중에 콱! 깨물어버리게 되어버려서."
"아아- 언니. 제발 그만둬. 그래서 언니 이빨에 거시기 잘린 남자만 벌써 한 다스잖아? 고향마을에선 남자들이 언니 얼굴만 봐도 식겁해서 도망다니는 형편이라 할 수 없이 떠나온거면서. 앞으로 얼마를 더 작살내놔야 성에 차겠어? 우리 귀염둥이들 거시기는 소중하니까 아껴줘야지."
"네가 나한테 그런 말 할 처지야? 그런 너는 저번에 어떤 녀석 알주머니를 손으로 쥐어 터트렸으면서."
"에이. 그거야 뭐- 기껏 서너번하고 뻗어버리는 허접한걸 뭐하러 달고 다녀? 사람이 겨우 흥이 날만한데 흐느적 하면서 늘어져버리니... 내가 무슨 무료로 봉사활동 해주는 건 줄 알아? 나오는게 없으면 쥐어짜서라도 힘내라는 의미로 그랬었지."
"어... 이, 이야기 즐거웠고 우리는 그럼 이만..."
"어라? 다들 어딜가려고? 같이 잠깐 한적한데가서 서로 진한 이야기를 나눠보자고? 응?"
하지만 용병들은 표정이 딱딱하게 굳은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식당 밖으로 내빼버렸다. 하긴. 누구라도 이런 제정신이 아닌것 같은 여자들하곤 절대 상종하고 싶지 않겠다. 물론 이건 지젤이나 아네트가 상대들을 쫓아내려고 한 거짓말. 허나 그걸 알고 있는 진석으로서도 그녀들의 말을 듣고 있자니 왠지 모르게 거시기가 움찔 오그라드는 느낌이 들었으니... 초면인 저들은 진짜로 지뢰밟았다 싶었으리라. 그러나 그녀들의 대화가 거짓말이라는 걸 모르는 아르데나, 셀린과 케이트의 안색은 도무지 뭐라 형용 할 수 없이 변해버렸다.
'근데 왠지 재미있으니까 굳이 나서서 오해를 풀어주진 말아야지.'
속으로 코웃음을 치며 그렇게 생각하는 진석. 그리고 허둥지둥 도망가버린 용병들의 뒷모습을 재밌다는 듯 바라보며 키득거리는 르마쿠르 자매와, 그런 그녀들을 질렸다는 표정으로 곁눈질 하던 아르데나. 아르데나는 문득 진석에게 조심스러운 태도로 물어왔다.
"오, 오빠. 저기 뜬금없지만 거기... 아니! 모... 몸은 괜찮은거에요?"
아르데나가 그렇게 질문 해오자 셀린과 케이트의 시선도 왠지 모르게 힐끔거리며... 진석의 아랫도리를 향했다. 아... 아니 잠깐. 왜 그렇게 봐? 내 물건은 지극히 멀쩡하거든? 갑자기 뭣 때문에 사람을 그렇게 고자보듯 하는데? 그 안쓰럽다는 시선들은 뭐냐고? 특히 셀린이나 케이트. 너희들은 대체 뭐 때문에 날 그렇게 쳐다봐? 아직 구경도 못해본 아르데나라면 몰라도 너희들은 내 물건 성능을 틀림없이 몸으로 직접 확인 해봤으면서! 아오 이거 여기서 뒤집어 까서 보여줄수도 없고! 결국 무안함을 이기지 못한 진석은 쓸데없는 질문을 해온 아르데나의 이마에 촙을 먹이고 말았다.
그렇게 러프야드에서 잠시간의 휴식과 식사를 마친 진석 일행은 재차 남하해 데오그라즈로 향했다. 그렇게 쉼없이 서너시간을 꼬박 달려 드디어 데오그라즈에 도착한것까진 좋았는데, 이제와서 생각해보니 이번엔 왕궁에 들어갈 일이 문제였다. 마음만 급해서 무작정 사원을 떠나왔지 왕궁에 들어갈 방법에 대해선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차차. 나는 진짜 멍청인가? 사원에서 출발하기 전에 왕궁에 들어갈 수 있을만한 신분증명이라거나, 아무튼 뭐든간에 레오노르를 대면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준비를 해왔어야 하는데. 이런 젠장.'
레오노르를 만난다면 모든게 해결되긴 하지만, 왕궁에 출입하는 방법 만큼은 분명 별개다. 이맛살을 찌푸리며 뒤통수를 벅벅 긁는 진석.
'에이씨. 그냥 다 귀찮은데 왕궁 정문을 정면돌파 해버... 릴 순 없겠군.'
아직 그란델군이 이동중이니 메디니아와의 사이에서 직접적으로 전쟁이 발발한건 아니지만 곧 벌어질것이 사실. 그런 위태위태한 와중에 왕궁에 정면으로 공격을 거는 정체 미상의 집단이 나타난다면... 수도 전체의 병력이 몰려나와 맞서겠지. 레오노르를 만날일이 급선무긴 하다만, 데오그라즈 전체를 그런 난장판으로 만들어서야 본말전도다.
'그렇다면 할 수 없구만. 나는 왕궁으로 들어가는 또 다른 길을 하나 더 알고 있으니... 다시 한 번 그쪽을 쓸 수 밖에.'
오래전 라케르투스 족 정보상 피터슨에게서 돈을 주고 그 위치를 알아냈던 왕궁의 지하 통로. 기껏 왕궁을 코 앞에 두고 또 다시 지하 통로를 이용해야 하다니? 답답하긴 했지만 조용히 왕궁에 들어가기 위해선 이것이 최선이었다. 힐끗 고개를 돌려 뒤에서 자신을 따라오는 다섯명의 일행을 바라보는 진석.
'그리고 이 녀석들은... 굳이 왕궁까지 같이 데리고 들어갈 필요는 없겠지. 흐음. 내가 왕궁에 들어가 레오노르를 만나기만 하면 되는거니까. 뭐 왕궁에 가 있을 잠시 동안만 어디서 기다리라고 하면 될텐데.'
기껏 몇 시간이면 충분할테니 방이라도 잡자니 그건 괜히 쓸데없는 짓이고. 아 맞다. 그러고보니 이 도시엔 진석이 잘 아는 인물이 하나 있지 않았던가.
'여기엔 카야가 있었지? 뭐 적당히 녀석들이 운영하는 술집에서라도 기다리고 있으라고 하면 되겠구나. 어디 카야가 일은 잘 하고 있나 겸사겸사 얼굴이라도 한 번 보고... 좋아. 그럼 우선 빅 본의 사무실로 가볼까.'
헤세스모데우스 교단이 힘과 마약공급이라는 수단으로 지배하는 폭력조직 빅 본. 그리고 데오그라즈의 지부를 담당하는 빅 본 두목의 딸 카야. 예전, 진석은 카야와 가까운 사이인 래스커를 살해했었고 그 사실은 알게 된 카야는 진석을 원수로 여기고 술에 약을 타는 방법으로 이쪽에 복수를 하려 했었다. 하지만 진석은 카야의 속내를 간파하고 되려 폭력과 협박을 동원해 그녀를 강제로 굴복시켰었다.
즉 서로가 썩 유쾌한 관계라곤 할 수 없었지만, 진석은 카야에게 그녀의 가족과 빅 본이라는 조직 그 자체를 인질로 삼아 저항 못하도록 확실하게 쐐기를 박아뒀었다. 힘의 차이가 명백한데다가 상하관계 역시 분명한 상황. 카야도 바보가 아닌 이상 마약을 공급해 주는데다가 가족이나 조직원들의 안위를 생각한다면 이쪽에게 쓸데없이 반기를 드는 일은 절대 없을터. 서로 웃으면서 이야기를 나눌만한 관계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진석이 부담감을 느낄 입장은 아니었다. 부담감은 카야가 일방적으로 느낄 관계지. 진석은 그렇게 일행을 이끌고 익숙한 길을 따라 도시의 동쪽, 선창가 방향으로 향했다.
'...그런데 이게 뭐야. 쟤들 꼬라지가 왜 저래?'
선창가의 어느 골목 안쪽. 눈에 익은 2층 짜리 목조 건물. 문 앞엔 호되게 얻어터지기라도 했었는지 얼굴 반쪽이 팅팅 부은 사내 둘이 문지기 겸 보초를 서고 있었다. 그들은 여러명의 일행을 이끌고 나타난 진석을 보곤 흠칫하며 대단히 경계하나 싶더니, 둘 중 한 명이 진석의 얼굴을 알아봤는지 왠지 모르게 안도의 한 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진석은 말에서 내려 그들에게 다가서며 말을 걸었다.
"어이. 너 나 알지?"
"아, 예에. 알고 있습니다. 분명 예전에 페레나시에서 이쪽으로 모실때 뵈어서..."
"그래그래. 그보다 카야... 아니, 지부장을 만나러 왔는데. 안에 있어?"
"있긴 합니다만..."
왠지 모르게 조심스레 눈치를 살피는 그. 진석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뭐야? 너희들 얼굴 꼬락서니도 그렇고, 무슨 큰 일이 있긴 있었나보구만?"
그러자 사내는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열렬히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아니 그게 어제 낮에 갑자기 이상한 놈들이 처들어와서 다짜고짜 지부장과 이야기를 하겠다며 막아서는 애들을 전부 떄려눕히는데... 이게 솜씨가 보통이 아니라서... 정말 쪽팔리지만 스물이나 되는 인원이 쪽도 못쓰고 곤죽이 됐습니다. 저도 싸우던 도중에 거하게 얻어맞고 기절해버렸던터라..."
허어.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분명 데오그라즈는 빅 본이 주도권을 잡은 도시 아니었던가? 그 레드라인인가 뭔가 하는 조직을 박살낸 뒤로 빅 본이 그들의 사업장과 세력권을 흡수하며 데오그라즈에서 가장 크고 강력한 조직으로 거듭난걸로 알고 있었는데. 그런 빅 본에게 싸움을 거는 놈들이 있다고? 진석은 심각한 표정을 하며 그에게 재차 질문했다.
"그럼 놈들이 지부장을 노리고 온거야? 그녀는 지금 무사한가?"
"그건... 네, 무사합니다. 지금 안쪽에 계십니다. 제가 알기로 놈들은 지부장에게 가서 잠시 이야기를 하곤 가버렸다는데... 무슨 이야기가 오고갔는지까진 잘 모르겠습니다."
도대체 왠 놈들일까? 수십명이나 되는 조직원들을 때려눕히고 카야를 찾아와 뭔가의 이야기만 하고 가버리다니. 희안한 놈들일세.
"그래? 흐음 알았어. 아무튼 자아, 다들 안으로 들어가자. 너희들은 잠시 말 좀 맡아두고 있어."
"알겠습니다."
진석은 문지기들에게 말을 맡기고 일행과 함께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안에선 십여명 가량의 조직원들이 허리춤에 단검을 차거나 벽 한켠에 몽둥이따윌 쌓아둔채 흉흉한 기세로 대기하고 있었는데, 진석이 일행을 이끌고 들어오자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나며 무기부터 꼬나쥐는 녀석들도 있었다. 하지만 진석의 얼굴을 알아본 웍스턴 부지부장이 앞으로 나서 그들을 제지하며 상대가 적이나 침입자가 아님을 주지시켰다.
"어서오십시오. 오랜만이시군요. 지부장을 만나보러 오셨는지...?"
"아아 그래. 위에 있지?"
"네, 올라가시면 됩니다."
웍스턴에게 고개를 끄덕여보이곤 삐걱거리는 나무계단을 올라 2층으로 들어선 진석. 짧은 복도를 지나 안쪽의 사무실로 들어가자니 책상에 걸터앉아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중절모와 양복 차림의 젊은 여성, 카야가 보였다.
'얘도 되게 오랜만이군.'
진석은 왠지 모르게 조금 반가운 마음이 들어 가볍게 손을 흔들어보이며 방 안으로 들어섰다.
"여어. 잘 지냈어? 오랜만이다?"
"아... 히, 히익! 아... 아으...!"
혼자서 멍 때리고 있다가, 갑작스레 들려온 인삿말에 진석을 바라보더니 안색이 창백하게 질린채 질겁하는 카야. 그녀의 태도는 흡사 귀신이나 괴물처럼 못 볼것을 본 것 같은 형상이었다.
'어랍쇼? 얘 왜이래? 혹시 어제 뭔 일이라도 당한건가?'
진석은 잔뜩 겁을 집어먹은 카야를 의아하게 생각하며 방 안으로 들어가서는 빈 의자를 하나 끌어당겨 책상앞에 앉았다. 아르데나를 포함한 다른 일행들도 따라들어가 진석의 뒤에 모여섰고, 카야는 혼자 어정쩡한 자세로 선채 부들부들 떨며 진석을 바라보았다. 거만하게 다리를 터억 꼬아앉으며 카야에게 질문을 던지는 진석.
"어이 카야. 왜 그렇게 겁 먹었어? 뭐 못 볼거라도 본 사람마냥. 내가 그렇게 무섭게 생겼나?"
자문자답하며 옆에 서있던 케이트를 돌아보는 진석. 하지만 케이트는 절대 그렇지 않다는듯 단호히 고개를 저어보였다. 그러나 카야는 너무 덜덜 떨다못해 안쓰러울 정도의 태도로 겨우겨우 입을 열었다.
"그... 제, 제가... 모든건 제가 잘못했습니다! 겨... 결코 수호자님에 대해 발설하고 싶어서 한 게 아니라... 혀, 협박당해서 할 수 없이...!"
"...흐음?"
잠깐. 이게 무슨 소린가. 협박당했다고? 협박당해서... 수호자에 대해 발설했다? 아니 그렇다면 어제 처들어와 조직원들을 두들겨패고 카야를 찾아와 뭔가를 물어봤다는 놈들은... 다름이 아니라 나나 제이스의 정체에 대해 뒤를 캤다는 이야긴가? 진석의 얼굴이 급격히 굳어지자 카야는 이쪽의 눈치를 살피며 식은땀을 비오듯 흘리는 등 그야말로 어쩔줄 몰라했다.
'수십명을 손쉽게 때려눕힐 수 있을정도로 뛰어난 실력에, 이쪽의 정체를 캐는 놈들이라면... 이거 설마.'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진석은 카야를 지긋이 노려보다 질문을 던졌다.
"혹시 어제 널 찾아왔다는 놈들말야... 남녀가 섞인 다섯명의 일행이었나?"
"아니, 그... 여, 여섯명이었습니다."
여섯명? 설마 어제 찾아왔다는게 클립튼 일행인가 했는데 여섯명이라면 수가 하나 더 많다. 아니, 아니지. 놈들을 마지막으로 본 게 옐 프라나였고 그들이 왠 중년 남성을 도와 어떤 여자아이를 구출하는걸 봤었으니... 그 이후 누군가 한명쯤 일행이 더 늘어났을지도 모르는 일. 진석은 꼬고 있던 다리를 풀고 양 손으로 턱을 괴며 카야를 노려보았다. 잔뜩 긴장했는지 진석의 시선만으로도 마른침을 꿀꺽 삼켜넘기는 카야.
"갑옷 차림의 미남. 지팡이를 든 마법사. 검은 장발의 남자와 양갈래 머리를 한 신관 아가씨. 마지막으로 비엔족의 여궁수.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은 누군지 모르겠다만... 어제 널 찾아왔다는게 대충 이런 구성의 인원 맞지?"
카야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역시... 그랬구만. 상대는 클립튼 일행이었다! 놈들이 그간 대체 어떤 경로로 어떻게 움직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이쪽의 정보에 대해 이만큼이나 접근한 모양이었다. 뭐 카야가 아는 정도래봐야 교단의 실체하곤 거리가 멀었지만 그래도 여러나라를 떠돌던것 치곤 나름대로 상당한 진전이다.
'그나저나... 그렇다는건 클립튼 일행 역시 데오그라즈에 와 있다는 이야긴데? 그럼 놈들은 단순히 나나 교단에 대한 정보를 캐내기 위해서 카야를 찾아온걸까?'
흐음 하며 잠시 여러가지를 생각하던 진석.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카야에게 터벅터벅 걸어갔다. 진석이 한걸음씩 다가올때마다 어깨를 흠칫거리며 심하게 불안해하는 그녀. 틀림없이 카야의 머릿속엔 이전 진석에게 엉망진창으로 당하고 굴복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고 있으리라. 진석은 카야의 코앞까지 다가간 다음, 어쩔줄 몰라하는 그녀를 벽에 밀어붙인채 얼굴을 바짝 들이대며 물었다.
"호오. 이거 재밌구만. 어제 널 찾아와서 나에 대해 캐물었다는 놈들은... 다름아닌 내 적인데 말이야? 내 적에게 나에 대한걸 이것저것 죄다 떠들어댔다 이거지? 너. 그러고도 계속 살기를 바라나?"
진석의 싸늘한 말에 카야의 두 눈동자엔 짙은 절망이 서렸다. 그녀는 진석의 옷자락에 매달린채 필사적으로 빌었다.
"제가! 제가 잘못했습니다! 놈들의 협박에 그만 넘어가서... 주, 죽여주십시오! 모든 책임은 저 혼자서 다 질테니... 부디, 부디 용서를!"
이런이런. 진석은 필사적으로 빌어대는 카야의 멱살을 콱 움켜쥔채 잠시 노려보다 흡사 무슨 쓰레기를 버리듯 바닥에 홱 팽개쳐 버렸다. 진석의 힘에 떠밀려 바닥에 와당탕 넘어졌다가 발딱 일어나는 카야. 빠르게 진석의 발치로 다가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빌기 시작했다. 진석은 그런 카야를 한심하다는 듯 내려다보며 책상가에 슬쩍 걸터앉은채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쯧... 언젠 뭐든 다 하겠다더만 역시 말뿐이었군. 한낱 깡패년의 말을 신용해준 내가 병신이지. 뭐 됐다. 놈들과 무슨 일이 있었으며 네가 뭘 떠벌였는지나 빼놓지 말고 말해봐."
"아... 알겠습니다. 그러니까... 그게 어제..."
카야는 더듬거리면서도 고분고분 어제 있었던 일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어제 진석이 페레나 시에서 르마쿠르 자매와 재회하고 있을 무렵, 클립튼 일행은 카야가 있는 빅 본의 사무실에 처들어왔다고 했다. 사무실과 인근에서 대기하던 조직원들이 막아섰지만 그들은 너무 손쉽게 조직원들을 쓰러트리고 카야를 몰아붙였다.
그리고 그들 중 호리호리한 체격의 마법사가 카야에게 물은것은, 래스커라는 사내를 아느냐는 이야기였다. 그거야 당연히 알고 말고! 자신에겐 삼촌같던 사람이 아니던가. 허나 교단의 수호자인 진석에게 살해당해 이미 존재하지 않는 사람. 어째서 그를 찾는걸까? 하지만 이들이 말하는 인상착의는... 절대로 자신이 알던 래스커가 아니었다. 검은 머리에다 눈에 번쩍 띌 정도의 미남. 그리고 쌍단검을 사용하는 남자. 카야의 머릿속엔 자연스레 진석의 모습이 떠올랐다. 하지만 어째서 래스커라는 이름을? 분명 그는 앤커니라는 이름을... 아니, 그렇구나. 카야는 앞뒤의 정황을 지레 짐작했다. 수호자인 그는 아마도 래스커의 이름을 가명으로 사용했으리라. 카야의 추리는 정확했다.
카야가 그에 대해 안다고 대답하자 그들은 반색하며 이 빅 본이라는 조직이 그에게 협력하는 것도 다 알고 있으니 상대에 대해 아는것을 모두 털어놓을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진석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혀 있던 카야는 좀체 쉽사리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없었다. 입을 꾹 다물고 추궁에도 끈질기게 버티던 카야. 그때 클립튼 일행 중 중년 사내가 앞으로 나서며 카야의 모습을 가만히 살펴보았다. 잠시 카야의 눈을 들여다보던 그는 일행에게 카야가 강한 공포를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일러주었다. 그리고 카야는 상대가 자신의 마음을 읽었다는데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대체 어떻게 한걸까?
그리고 카야가 공포를 느끼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클립튼 일행은 추궁하듯 묻던 태도를 바꿔 그녀를 설득해오기 시작했다. 자신들은 그 래스커란 남자와 그가 속한 조직을 타도하려는 일행이며, 이 빅 본 이라는 조직이 아무리 폭력조직이라도 그들에게 협박당해 이용당하고 있는거라면 자신들이 도움을 주겠다는 말을 해왔다. 도움을 준다고? 그 무시무시한 남자를 당신들이? 카야는 이들을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하지만 그것은 분명 자신이 듣고 싶은 말이기도 했다. 비록 카야가 진석의 폭력과 협박에 굴복하긴 했었지만 그것은 힘에 눌려 억지로 굽혔을 뿐. 마음속 깊이까지 상대를 인정한것은 당연히 아니었다.
그렇게 클립튼 일행의 설득에 마음 한 켠이 느슨해진 카야. 결국 클립튼 일행에게 자신이 아는 교단의 수호자들에 대한 모든 정보를 털어놓았다. 그들이 최초로 어떤 경위로 조직에 접근했는지, 그리고 마약을 공급해 주며 그 대가로 이따금 자신들을 이용하고 있다는 사실. 또 진석과 제이스, 그리고 아르데나에 대해 알고 있는 것들을 전부 털어놓았다. 하지만 카야가 아는것은 그게 전부였다. 빅 본 측이 교단쪽에 접촉할 수단은 따로 없으며 항시 저쪽에서 먼저 나타나 이런저런 명령을 내려오므로 그들의 진정한 실체에 대해선 자신도 아는 바가 없다는 말로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모든것을 털어놓은 카야가 정말 그들을 물리칠 수 있냐고 묻자 클립튼 일행은 자신있다며 이전에도 그를 한 번 격퇴한적이 있으니 믿어달라는 말을 남긴채 떠나갔다.
하지만 하루가 지난 오늘. 카야의 앞엔 놀랍게도 진석이 지극히 태연한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붉은머리의 여마법사 데이나, 즉 제이스는 없었지만 아르데나를 포함 다섯명이나 되는 많은 일행을 이끌고 나타났다. 게다가 그 면면이 전부 평범해 보이지 않는것이... 카야는 어제 자신이 클립튼 일행에게 모든걸 털어놓은게 들통났구나 싶어 지레 겁을 집어먹었던 것이다. 자신있다더니, 전에도 격퇴한적 있다더니. 이게 무언가. 이 남자는 자신 앞에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나타났거늘. 카야는 이제 자신이 입을 함부로 놀린 배신의 대가를 치르겠구나 싶어 죽음마저 각오하고 있었다. 그리고 카야를 통해 모든 사정을 전해들은 진석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스윽 쓸어올렸다.
'그래. 엄한데서 딴짓을 하고 다니는가 싶더니... 이제서야 교단에 접근해보겠다 이건가? 이 병신들. 교단의 핵심인 대신관 미리안은 내 손으로 장사지냈다. 아무것도 모르는놈들이 이제와서 어정어정 나타나서 엉뚱한곳이나 들쑤시고.'
아무튼 잘 됐다. 어제까지 이곳에 있었다면 아직 놈들은 도시안에 남아있을 가능성이 높을터. 이번에야말로 그들을 찾아서 끝장을 내주기 좋을 타이밍이었다. 게다가 혼자였던 이전과 달리 지금 자신에겐 힘을 보태줄 일행들이 있었다. 그 수도 쌍방이 서로 같은 6 대 6. 카야의 마음을 짐작해 냈다는 중년남에게 어떤 능력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도 이전과 달리 어웨이크닝을 익혀 훨씬 강해진데다가 여러가지 무구도 완전히 갖추었으니 한 번 붙어볼만 했다. 어떻게 하면 놈들을 찾아낼 수 있을까 잠시 고민하는데, 복도에서부터 다다닥 하고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오더니 조직원 한 명이 사무실 안쪽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지, 지부장님! 큰일이... 어, 어랏."
바닥에 무릎을 꿇고있는 카야와 방안에 잔뜩 둘러서 있는 여자들, 그리고 책상에 걸터앉아 있는 진석. 조직원은 방안의 상황을 쉽하리 이해하지 못하고 어리둥절해 하는 눈초리였지만 진석이 카야 대신 그에게 턱짓을 하며 질문했다.
"뭐야? 무슨일인데. 괜찮으니 말해봐."
"아니 저... 그게... 지금 왕궁쪽에서 난리가 났다고 전해들었습니다. 듣기로는 남녀 혼성의 대여섯명 정도 되는 일행이 왕궁의 정문을 박살내며 안으로 처들어가서 엄청난 싸움이 벌어졌다고..."
뭐? 순간 진석과 카야의 시선이 서로 교차했다.
'설마... 설마 이놈들. 왕궁으로 처들어간거야? 하, 하하하! 이런 또라이들!'
이 자식들... 병신짓만 하나 싶었는데 이거 생각외로 하는짓이 엄청 화끈한데? 클립튼 일행이 어떤 경위로 왕궁에 처들어갈 결심을 한건진 몰라도... 이건 분명 기회였다! 그들을 잡고 왕궁에도 들어갈 일석이조의 기회! 진석은 일행을 이끌고 서둘러 방 밖으로 나서며 그대로 뒤도 돌아보지 않은채 한 마디를 남기고 사라졌다.
"입을 함부로 놀린 대가는... 나중에 돌아와서 톡톡히 받도록 하지. 기대하고 있으라고!"
"......"
방 밖으로 사라지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말없이 고개를 떨구는 카야. 그녀로선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건지 자세히 알 순 없었지만... 기왕이면 어제 나타났던 클립튼 일행의 승리를 간절히 바랬다. 진석이 치르게 해주겠다는 대가라는게 뭔진 몰라도 벌써부터 무서워서 견딜수가 없었던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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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오랜만에 9시 정각에 올려봅니다. OT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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