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13. -- > * 149화 *
'...호오?'
검을 맞대자마자 진석이 느낀건, 확실히 클립튼은 만만치 않다는 것이었다.
'아니 뭐 왕국 제일의 기사라느니, 완전무결의 기사라느니. 그런 호칭으로 불리던 놈이니 당연히 약할리는 없겠지만... 이건 그래도 예상하던것 이상인데? 정말 강하네 이 놈.'
서로 검날을 맞대고 상대를 밀어내는 단순한 힘겨루기. 방금전, 모데로조차 진석의 힘 앞에선 얼마 버티지 못하고 쉽게 밀려났었다. 허나 클립튼은 그리 순순히 물러서지 않았다. 우위를 점하고 있는것은 분명 진석이었지만 클립튼은 그가 쓰는 검에 무슨 특별한 힘이 있는건지, 혹은 상대의 힘을 받아넘기는 밸런싱 능력이 뛰어난건지, 안면 근육에 힘을 팍 준채 좀체 물러서지 않고 용케도 버텼던것이다.
'그나저나 저 장검... 저거 어째 신경쓰이는구만. 분명 뭔가 특별한 무기인건 확실한데... 에라, 일단은 가벼운 견제부터 해볼까?'
진석은 슬쩍 힘을 빼서 클립튼의 검날을 이쪽으로 끌어당김과 동시에 아래로 흘려보내려 했다. 팽팽한 대치중에 완급을 주어 상대의 자세를 무너트린 후 빈틈을 노리려는 수법. 그러나 클립튼 정도의 기사가 그런 유도에 걸릴리가 없었다. 클립튼은 진석의 손에서 힘이 빠지는걸 느끼곤 되려 뒤로 슬쩍 물러나나 싶더니 순식간에 몸을 반회전 시키며 검을 휘둘러왔다.
"이크크!"
채앵! 란비언 페어로 검을 받아내는 진석. 하지만 클립튼은 자신의 공격이 막힐걸 예상했다는 듯 지체없이 몸을 또 다시 반대편으로 회전시키며 원심력을 담은 두번째 일격을 가해왔다.
'얼씨구? 이 자식 무슨 패링하듯 공격을 해대네?'
하지만 진석도 고작 이 정도의 공격에 당할리 없었다. 클립튼의 연이은 검격을 걷어내고 되려 전진해서 달려들며 란비언을 찔렀다. 그러나 클립튼은 피하거나 막는게 아닌, 마찬가지로 한 발 앞으로 딛었다. 그리고 자신의 흉갑으로 진석의 란비언을 받아내더니 순간적으로 몸을 틀어 갑옷의 곡면으로 검날을 절묘하게 흘려보내곤 박치기로 반격을 해왔다.
'허! 이놈 보게?'
단검이 무기라 간격이 짧은 진석이 품안까지 파고들어 공격을 걸어오니, 어줍잖게 막거나 피하기보단 놀라울정도로 능숙한 임기응변으로 대응해온다. 하지만 진석도 지지않고 곧바로 머리를 내질러 클립튼의 박치기에 맞섰다. 쿠웅! 두 사람의 이마가 묵직한 소리를 내며 강하게 부딪혔지만 어느 한쪽도 물러서거나 눈 하나 꿈쩍하지 않고 서로가 서로를 노려보았다. 문득 씨익 웃음을 짓는 진석.
"기사님 치곤 너무 거친데?"
"검만이 무기인건 아니니까."
주르륵. 그렇게 대답하는 클립튼의 이마에서 가느다란 선혈 한 줄기가 흘러내렸다. 진석과 부딪힌 탓에 이마가 찢어진 모양이었다. 그 모습에 진석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랍쇼. 이거 같이 부딪혔는데 한쪽만 찢어졌다는건... 잠깐, 그럼 내가 더 돌머리라는 건가?"
"하앗!"
진석의 말을 무시하곤 확 밀쳐내며 장검을 휘두드는 클립튼. 힘이 실린 내려치기였다. 허나 진석은 클립튼이 자신을 밀쳐내는 순간 벨트에 란비언을 꽂고 자연스레 뒤로 물러서며 백덤블링으로 회피했다. 그리고 허공에 뜬 상태로 허리 뒷춤의 투척용 단검을 뽑아내곤, 착지하기 직전의 순간 클립튼에게 절묘하게 단검을 집어던졌다.
"소용없다!"
하지만 클립튼은 몸을 옆으로 돌리고 어깨를 내민채 돌진해왔다. 몸을 옆으로 돌려선 탓에 한 자루는 아슬아슬하게 빗나갔고 다른 한 자루는 어깨보호대에 부딪혀 튕겨나갔다. 클립튼은 갑옷을 걸쳤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민첩함으로 재빨리 달려들며 아래로 빗겨들었던 장검을 위로 화악 올려치며 힘껏 외쳤다.
"트라켓!"
아래에서부터 위로 올려쳐지는 사선의 검궤. 그 검격을 정면에서 마주하는 진석으로선 흡사 어두운 늪지를 걷는 도중 발치에서부터 거대 아나콘다 같은것이 솟아올라 목덜미를 물어뜯으려 드는 착각이 들 지경이었다. 클립튼이 휘두른 검의 호선을 따라 자색의 검날에서부터 액화질소를 흩뿌리는것 같은 시린 한기가 쫘악 뿜어져 나왔다.
"허?"
보통 무기는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빙속성을 지닌 무기였던건가? 진석은 오른주먹을 꽉 움켜쥐며 마치 망치로 못을 박듯 아래에서 솟구쳐오르는 검날을 강하게 내리쳤다. 타아앙! 불꽃이 뿜어져 나오는 주먹과 한기가 솟구치는 검날이 충돌하며 무형의 충격파가 퍼져나갔다.
"아리아 풘!"
진석의 반격에 막혀버린 검날을 아주 자연스럽게 회수한 클립튼. 검을 쥔 오른손을 자신의 가슴팍 부근까지 끌어당겼다. 그리고 지체없이 용수철이 튀어나가듯한 찌르기를 시도했다. 순식간에 쇄도해오는 클립튼의 공격. 게다가 검날에서 뿜어져 나오는 새하얀 한기가 휘리릭 소용돌이 치는게 클립튼은 손목으로 스냅을 걸어 찌르기의 위력을 높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진석도 물러나지 않았다. 재빨리 란비언 페어를 뽑아들었다.
"흥, 라파가!"
서로 근접한 거리였지만 라파가를 발하며 그 찌르기에 맞서는 진석. 채애앵! 서로의 검이 불꽃을 일으키며 맞부딪혔다. 진석은 그대로 자세를 낮추며 몸을 빙글 회전시켰다.
"남자끼리지만 어디 같이 춤이나 춰볼까? 오에스테!"
마치 팽이처럼 팽그르 돌며 하단에서부터 중단, 상단으로 점차 올라가며 원무의 연타를 가하는 진석. 그러나 유효타는 하나도 없었다. 양손으로 검을 단단히 거머쥔 클립튼은 최소한의 검놀림 만으로 진석의 공격을 전부 막아냈다. 그리고 진석의 오에스테가 끝나는 순간, 머리위로 검을 치켜든 클립튼이 좌우상단을 대각으로 연달아 내리치며 폭풍같은 반격을 가해왔다.
"꾸 드 테바!"
챙챙챙챙챙! 하지만 공격을 전부 막아내는것은 진석도 마찬가지였다. 진석은 양손에 든 란비언을 역수로 쥔채 번갈아 휘두르며 클립튼의 연타를 전부 튕겨내어버렸다. 그리고 클립튼의 기술이 끝나는구나 싶은 순간, 이번엔 진석이 최대한 상대와의 거리를 좁히며 주저없이 자신의 장기를 펼쳐놓았다.
"주고받기 재밌는데? 그럼 기어를 한 단계 높여보지! 토르멘타!"
다음 순간, 진석의 간격 안쪽으론 완벽한 죽음의 결계가 펼쳐졌다. 간격안에 든 모든 대상에게 초고속의 연속공격을 가하는 난무, 토르멘타. 하지만 클립튼은 물러서지 않고 토르멘타에 맞서듯 자신 역시 또 다른 기술을 사용해 맞섰다.
"부클리에!"
클립튼이 검을 들고 방어자세를 취하며 그렇게 외치자 검날에서부터 푸르스름한 기운이 마치 날개처럼 뻗어져나와 클립튼의 전면을 감쌌다. 그 위를 미친듯이 두들기는 진석의 토르멘타. 하지만 흡사 묵직한 방패위를 때리듯 캉캉거리며 단단한 소리가 날 뿐, 클립튼에겐 아무런 피해도 입히지 못했다.
'쳇. 저놈의 검 별게 다 되네!'
그렇게 토르멘타로 아무런 피해도 입히지 못한 진석. 토르멘타가 끝나자마자 뒤로 재빨리 너댓걸음 물러났고 클립튼도 진석의 어마어마한 연격을 바로 눈앞에서 지켜봐서인지 조금 신중해진 표정을 한 채 뒤로 두세발짝 물러섰다.
'일단은 평수인가... 하긴, 지금의 사기적인 스테이터스인 나와 맞상대를 할 수 있다는 것만 하더라도 엄청난거지. 이것만으로도 왕국 제일의 기사라는 칭호를 받을만 해.'
진석은 내심 그렇게 생각했다. 한창 싸움의 와중이니 여유롭게 클립튼의 스테이터스를 정확히 확인해 볼 순 없어도... 아마 클립튼의 능력치는 모데로와 비슷하거나 그보다 조금 높은 정도일거다. 만약 무력과 민첩 양쪽이 50을 찍었다고 한들 자신보다 한참 못미치는 능력. 그럼에도 쉽사리 밀리지 않고 이만큼이나 버티며 싸울 수 있다는건... 분명 그의 기술과 실력이 놀랍도록 뛰어나다는 이야기. 모르긴 몰라도 클립튼은 분명 검에 대해선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는걸로 설정되어 있으리라.
'뭐 이렇게 칼싸움하는것도 나름 흥이 나고 나도 좀 더 놀고 싶은 생각이 없는것은 아니지만...'
스윽 주변을 둘러보는 진석. 일대일로 싸움을 벌이고 있는 다른 일행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선전하는 쪽도 있었고, 반대로 밀리는 쪽도 있었다. 그리고 그 주위에 잔뜩 둘러선 근위기사들과 병사들의 모습. 게다가 쓰러진자들 중 어벙벙한 표정으로 기절에서 깨어나는 이들도 이따금 하나둘 눈에 들어왔다. 아무리 왕궁의 수비병들이 일시적으로 이렇게 무너졌다지만 언제까지 세월아 네월아 하며 결투놀이나 하고 있을 순 없었다. 진석은 이죽거리는 웃음을 지어보이곤 뒤로 몇걸음 더 물러나 클립튼과의 간격을 좀 더 벌리며 말했다.
"자아. 잠깐이긴 했지만 어차피 서로 기본적인건 다 선보였지? 이래저래 서로 바쁜 몸, 괜히 질질 끌지 말고 피차 확실한걸로 끝을 내볼까?"
"...그러지."
클립튼은 박치기때문에 이마에서 흘러내리던 핏줄기를 손등으로 훔쳐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더 이상 시간 끌것 없이 서로간에 가장 강력한 장기를 선보여 끝내자는 진석의 제안에 동의한 클립튼. 눈을 감고 후우우 길게 심호흡을 하더니 검을 정단 자세로 들어올렸다. 언뜻 보기엔 지극히 평범한 자세였지만, 그에게선 마치 팽팽히 당겨진 활시위마냥 힘이 응축된듯한 무언가의 기세가 느껴졌다. 뭐랄까. 흡사 폭발 직전의 폭탄을 보고 있는 느낌이 들었달까?
'허어. 겉으로 드러나는 기도만으로도 저 정도라니. 이거 확실히 만만치 않겠군.'
그냥 보기만 해도 뭔가 찌릿한 기세가 전해져오는게 클립튼이 준비한느것은 진짜로 일격필살의 기술이라는걸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나 역시 보통의 기술로는 안되겠지. 손에서 란비언 페어를 핑그르르 돌려보인 진석은 처척 하고 팔을 교차시키며 자신 역시 비기를 발휘할 준비자세를 취했다.
'우선은... 시클론.'
파아앗. 눈 앞에 익숙한 섬광이 퍼져나간다. 스스로의 신체능력과 사고속도가 가속되는게 분명히 느껴졌다. 진석은 한 걸음 내딛고 전방으로 몸을 날리며 오른손 건틀릿 안에 끼워진 성광의 반지에 신경을 집중했다.
'그리고 다음은... 에그레기움!'
총알처럼 앞으로 달려나가는 진석의 몸에서 황금빛 광휘가 뿜어지기 시작했다. 다음 순간 진석의 모든 스테이터스가 두 배로 뛰어올랐다. 진석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뒤이어 라파가의 수법으로 대쉬를 걸었다. 찰나조차 짧게 느껴지는 가속. 진석은 글자 그대로 한줄기 섬광이 되어 쏘아져나갔다. 그리 멀지 않던 클립튼과의 거리는 한순간에 좁혀졌다. 그리고 클립튼 역시 기다렸다는 듯 앞으로 몸을 날리며 머리위로 치켜든 검을 내리쳤다.
"타아아앗! 아플롬-!!!"
클립튼이 쥔 자색의 검에서 청백의 오라가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여태까지 진석과 검을 부딪힐때마다 찔끔찔끔 흘러나오던 한기 정도가 아니었다. 마치 거대한 눈폭풍의 에너지가 검 한자루라는 비좁은 출구를 통해 뿜어져나오는듯한 느낌이었달까. 지금 저 검에서 터져나오는 맹렬한 오라는, 그야말로 태산조차 때려부술것 같은게... 스치기만 해도 죽겠다 싶은 생각이 절로 들 정도였다. 하지만 최후의 비기를 쓰는것은 클립튼만이 아니었다. 진석 역시 교차시켰던 팔을 힘껏 휘두르며 바일리 델 비엔토의 마지막 기술을 발했다.
"단사 데 라 무에르떼-!!!"
죽음의 춤! 진석은 이 기술을 두 번이나 직접 맞아본적이 있었다. 한 번은 모데로에게. 그리고 또 다른 한 번은 올린스턴 왕국의 토너먼트에 참가했던 이디스에게. 진석은 제인이라는 이름으로 기억하는 바로 그 여자 암살자였다. 그리고 지난 미리안과의 싸움 이후 대량의 경험치를 얻은덕에 진석의 바일리 델 비엔토는 S랭크로 승격되어 있었다. 진석은 드디어 손에 넣은 최후의 기술을 여기서 최초로 사용한 것이었다. 게다가 진석의 기술은 모데로나 이디스가 썼던것과 같은 지극히 평범한 단사 데 라 무에르떼가 아니었다. 시클론의 가속과 라파가의 대쉬, 거기다 에그레기움의 스테이터스 증폭까지 더한 복합기술! 눈폭풍처럼 맹렬한 한기를 담아 뿜어지는 청백의 오라와 한줄기 벼락처럼 똑바로 질주한 황금빛 광휘는 그렇게 충돌했다.
- 쩌어엉!
단지 검을 휘두르는 두 사람이 충돌했을 뿐인데, 그 일대엔 눈을 뜨지 못할만큼 강렬한 섬광과 무형의 기류가 발생해 광풍처럼 휘몰아쳤다. 둘의 싸움을 지켜보던 모든 이들은 망막을 찌르는 빛과 휘몰아치는 바람에 움찔하며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잠시 후. 광풍이 지나간 그곳엔... 십여미터쯤 떨어져있는 진석과 클립튼이 서로에게 등을 돌린채 그대로 서 있었다. 클립튼은 검이 바닥에 닿을듯 끝까지 내려친 채였고, 진석은 양 팔을 교차시킨 자세였다.
"...누, 누가 이겼지?"
넋놓고 둘의 싸움을 지켜보던 한 병사가 자기도 모르게 그런 말을 중얼거렸다. 그리고 마치 그 말이 신호가 되기라도 한 듯, 진석의 이마에선 한줄기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진석은 입속으로 혼잣말을 읊조렸다.
"과연. 왕국 제일의 기사라는 이름이 허명이 아니었군. 대단한데."
그리고 그에 대답하듯 클립튼은 들고있던 검을 내리며 흘깃 뒤를 돌아보았다.
"훌륭하군. 승부는... 내가 졌다."
콰드드득! 클립튼이 스스로 패배를 인정하자마자 그의 갑옷에선 두꺼운 얼음판이 갈라지듯 거미줄같은 크랙이 퍼져나갔다. 그리고 클립튼의 몸 곳곳이 갈라지며 깨어진 갑옷 틈새로는 피보라가 뿜어졌다. 그대로 바닥에 검을 떨구며 제자리에 무릎을 꿇는 클립튼. 진석은 자신의 이마에 새겨진 작디 작은 검상을 매만지며 클립튼이 무너져내리는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만약 내게 스테이터스를 대폭 높여준 어웨이크닝이나 에그레기움을 쓸 수 있게 해준 성광의 반지, 이 둘 중 어느 하나라도 없었다면... 졌을지도.'
그만큼 클립튼이 최후에 발한 기술은 대단했다. 겨우 스치는 수준의 작은 상처긴 했지만 그의 검은 에그레기움의 광휘를 뚫고 자신에게 닿았던 것이다. 물론 그 댓가로 클립튼은 죽음의 춤을 고스란히 얻어맞아 갑옷이 저렇게 다 부스러질 정도의 치명타를 입고 말았지만서도. 허나 능력치 차이가 확연함에도 이만큼이나 자신에게 맞설수 있다니. 적으로써 맞아 싸운 상대긴 했지만 분명 클립튼의 명성은 헛된것이 아니라는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진 것은 진 것. 클립튼은 패자였고 승자는 자신이었다. 진석이 나머지들은 어떻게 되었나 둘러보려는 찰나, 피투성이가 된 채 무릎 꿇은 클립튼을 발견한 모데로는 찢어지는듯한 비명을 내질렀다.
"클립튼씨이이!"
비통하게 소리지르는 모데로쪽의 상황은 이쪽과 비슷했다. 피투성이가 된 채 바닥에 무릎을 꿇고 거친 숨을 몰아쉬는 아르데나의 모습이 보였던 것이다. 아르데나의 눈빛만큼은 아직 살아있었지만...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부상만도 이미 상당했다. 그리고 모데로의 비명에 놀란 에이미가 그쪽을 돌아본 순간, 찰나의 빈틈을 놓치지 않은 셀린이 잽싸게 달려들며 에이미의 복부에 주먹을 꽂았다.
"컥...!"
셀린이 휘청이는 에이미의 목덜미를 쥐려하자 옆에서 중년의 격투가, 안톤이 달려들었다. 저 먼치엔 아네트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젠장! 아르데나나 아네트 둘 다 졌구나. 셀린이 에이미를 잡긴 했지만 저 중년남이...!'
그리고 반대쪽에서 또 다시 누군가의 비명이 들려왔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는 진석. 몸 여기저기에 화살을 맞은 지젤이 이를 악 문채 막 언월도의 장대끝으로 스텔라의 관자놀이를 후려치고 있었다. 머리를 얻어맞고 바닥을 구르는 스텔라. 그녀가 쥔 대궁은 분명 진석쪽을 향하고 있었다. 클립튼이 패배한걸 발견하고 순간적으로 이성을 잃어버린 스텔라는, 클립튼을 쓰러트린 진석을 노리고 사격을 하려다 지젤에게 일격을 당하고 있는게 분명했다.
"너어어! 바람화살!"
클립튼이 진것을 깨닫고 이성을 잃은것은 스텔라만이 아니었다. 케이트는 의외로 지금까지 리들리와 평수로 겨루고 있었는데, 클립튼이 패배한것을 발견한 리들리가 진석에게 주문을 내쏘며 무작정 이쪽으로 내달려온 것이다. 하지만 케이트가 진석의 앞쪽을 가로막으며 그림자를 사용해서 주문을 막아내었다. 그 와중에 셀린은 캬오오하고 분노서린 소리를 내지르더니, 몸 이곳저곳에서 털이 돋고 덩치가 부풀기 시작했다. 손톱이나 송곳니고 한 층 날카롭게 솟아난것이 마치 커다란 야생 짐승처럼 변해버린 셀린. 여태까지 볼 기회가 없었던 수인화였다. 셀린은 최후의 수단인 수인화까지 써가면서 에이미를 구하기 위해 덤벼든 안톤과 일진일퇴의 공방을 주고 받았다.
'지젤은 많이 다치긴 했지만 스텔라를 잡았고, 케이트는 의외로 리들리를 잘 막아주고 있는데다가 셀린도 어떻게든 맞서고 있으니... 우선 아르데나부터 구해볼까!'
역시 지금 가장 도움이 급한것은 아르데나였다. 아네트야 패배하고 기절한듯 했지만 중년남이 셀린에게 간 이상 일단은 둘이 싸우도록 내버려둬도 괜찮았다. 리들리도 클립튼의 용태를 걱정해서 이쪽으로 달려오긴 했지만 케이트가 제법 잘 상대하고 있었으므로 역시 차순위였다. 지젤은 용케 스텔라를 잡았지만 본인도 부상이 상당하므로 일단은 더 싸우거나 움직이기 힘들터. 그리고 아르데나는 부상이 심각한데다가 아직도 팔팔한 모데로가 상대이므로 그에게 당하지 않도록 자신이 도와줘야 했다.
"큿... 이렇게 된다면!"
하지만 상황을 파악한건 모데로도 마찬가지였다. 모데로는 진석의 시선이 자신을 향한다는걸 깨닫고 비틀비틀 일어나는 아르데나에게 달려들어 복부에 주먹을 한 방 먹였다. 우윽 하고 휘청이는 아르데나. 모데로는 몸을 가누지 못하는 그녀를 뒤에서부터 붙잡곤 팔을 비튼 다음 목덜미에 칼을 들이대었다.
"꼼짝마! 허튼짓하면... 가만두지 않을테니까!"
그렇게 아르데나를 인질로 잡아버린 모데로. 그러자 주변의 이목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그야 진석이 클립튼을 쓰러트릴만치 강해졌다는걸 알게 됐으니, 모데로로선 어떻게 해서라도 상황을 반전시킬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클립튼뿐만 아니라 에이미도 쓰러졌고 스텔라 마저도 기절해 붙잡혔다. 에이미쪽이야 안톤이 급히 나섰다지만,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를만큼 크게 다친 클립튼과 스텔라의 목숨이 저쪽의 손에 달려있다는건 분명했다. 그나마 안톤이 강철 건틀렛을 무기로 쓰는 델 그로도 격투가 여자를 한 명 쓰러트리긴 했지만 멀리 떨어져 있어 자신이 손을 쓰긴 애매했다. 그러니 바로 자신의 앞에 있는 이 소녀라도 인질로 잡는게 모데로가 순간적으로 떠올린 최선의 방도였다.
"하."
진석은 기가 차다는듯한 표정을 지으며 혀를 찼다. 예전, 애거스트 공화국의 변경 도시에서 마주쳤을때와는 완전히 반대 입장이 되어있었다. 그땐 진석이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에이미를 인질로 잡았었는데 지금은 모데로가 아르데나를 인질로 잡은 상황이 아닌가? 허나 그렇다고 아르데나를 이대로 내버려 둘 순 없었다. 진석은 천천히 모데로에게 다가서며 빈정대듯 말했다.
"이야, 이거 어째 익숙한 풍경이군. 배운걸 써먹는건가? 학습능력 좋은데?"
"...다, 닥쳐. 나도 이러고 싶어서 이러는건 아니니까."
다급해서긴 하지만 비겁하게도 인질을 붙잡았다는 사실이 부끄러워 얼굴을 붉히는 모데로. 아르데나는 조금전 배를 맞은것 때문에 몇 번 콜록거리다가도 고개를 들어 진석쪽을 바라보았다.
"콜록. 오... 오빠. 저는 아무래도 상관없으니까..."
"시끄러! 쓸데없는 말 하지마!"
아르데나가 뭐라고 말하려하자 반사적으로 그녀의 뒷덜미를 내려치는 모데로. 아르데나는 헉 하며 그대로 의식을 잃고 기절해버렸다. 아르데나가 모데로에게 붙들린채 축 늘어는걸 보며 점차 험악해지는 진석의 표정.
"야 이 새끼야. 그 애 한 번만 더 건드리면 너희 다 죽는다? 특히 에이미라는 저 여자애는 두고두고 고통을 주면서 아주 갈기갈기 조각을 내버릴줄 알어."
"...크윽."
진석의 위협에 기세가 눌렸는지 움찔하는 모데로. 그 사이, 저쪽에서 캬앙하는 새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안톤이 막 셀린의 복부에 장타를 먹여 저 멀리 날려보내고 있었다. 그 일격에 의식을 잃었는지 바닥을 데구르르 구르곤 축 늘어져버리는 셀린. 진석의 눈가가 대번에 찌푸려졌다.
'젠장. 저 중년남... 보기보다 엄청 강한 모양이군. 물론 아네트나 셀린이 그렇게까지 강한축에 속하는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렇게까지 손쉽게 쓰러트리다니!'
허나 셀린이 안톤에게 패배했어도 상황이 근본적으로 변하는건 없었다. 지젤이 스텔라를 쓰러트린채 붙잡고 있었기에 양쪽의 대치는 결과적으로 동등했다. 리들리와 케이트도 양측의 상황을 눈치채곤 싸움을 멈춘채 서로의 일행쪽으로 갈라섰다. 자, 그럼 이제... 이 상황을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까? 진석이 잠시 고민하는 사이, 본성에서부터 나온듯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병사와 기사들을 헤치고 이쪽으로 다가왔다.
'뭐야 이런때에? 누가 나온거... 아니?!'
뭔가 하고 그쪽에 시선을 돌린 진석은 깜짝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본성에서부터 몇 명의 일행을 이끌고 나온것은... 다름아닌 드레비안이었다! 교단의 수호자 중 한 명이며 챔피언의 직위를 지닌채 대련에선 자신과 평수를 이룰만큼 강력한 실력자였던 그. 옆구리에 단창을 꼬나쥔 그는 언제나와 같은 무표정한 얼굴을 한채 병사들을 헤치고 이쪽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그의 뒤엔 네 명의 기사와 두 명의 여자가 동행하고 있었다. 다름아닌 레오노르 여왕과 그녀의 곁에 바짝 붙어선 하녀였다. 하지만 진석은 레오노르가 겁먹은 표정을 짓고 있으며 하녀의 손에 작은 단검이 들려있다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단검은 하녀의 옷 소매에 가려져 있긴 했지만 레오노르의 복부 부근에 바짝 닿아있었던 것이다. 갑자기 레오노르를 데리고 나타난 드레비안의 등장에 이래저래 당황해 하는 진석. 그리고 잠시 그런 진석의 모습을 바라보던 드레비안은 여태까지 고수하던 무표정을 지우고 환하게 웃어보였다.
"아니... 너, 너. 웃을수도 있는거야?"
드레비안이 웃기도 하다니? 드레비안이 표정을 지을 수 있다는것에 깜짝 놀라는 진석. 그야 진석이 아는 드레비안은 지극히 무감정한데다가, 대화조차 딱 필요 최소한도의 것만 하는 로봇같은 놈이었다. 같이 지내는 동안에도 사적인 감정표현을 하는걸 한 번도 보지 못했었거늘... 분명 미리안의 명령을 받고 어디론가 떠났었다는건 들었지만, 여기서 뜬금없이 레오노르를 데리고 나타나 저렇게 환하게 웃어보이기까지 하다니? 이제 진석은 당황스럽다 못해 혼란스러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한참을 말없이 웃어보이던 드레비안은 주변을 스윽 돌아보며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이것 참, 한 보름만인가요? 그간 잘 지냈나보군요... 오빠."
"...뭐?!"
경악하는 진석. 문제는 드레비안이 한 말이 아니었다. 목소리였다. 드레비안의 입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진석이 아는 그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목소리는... 틀림없는 어린 여자아이의 목소리. 그랬다. 저것은 바로 미리안의 목소리였다.
============================ 작품 후기 ============================
정각에 올리고 싶었는데 조금 늦었군요. OT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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