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13. -- > * 150화 *
"아차. 이런이런, 그만 실수를."
재밌다는듯 한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눈웃음을 짓는 드레비안. 그의 목소리는 어느샌가 원래 드레비안의 것으로 되돌아가 있었다. 하지만 방금 그게 실수일리가 없었다. 진석을 놀라게 하기 위해 일부러 한 짓이 틀림없었다.
'도,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거야? 금방 원래의 목소리로 되돌아가긴 했지만... 어째서 드레비안에게서 미리안의 목소리가?'
전혀 예상 밖의 사태로 인해 진석의 머릿속은 혼란스러워졌다. 하지만 혼란한 와중에도 한 가지 가정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설마... 미리안의 영혼이 드레비안의 몸속에? 하지만 어떻게 그런 일이?'
당황해하며 사태파악에 여념이 없는 진석을 실실 비웃는 드레비안. 이내 안되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뭐, 일의 전후 따위는 그쪽 좋을대로 생각하시지. 그보다 자아. 여기 보여?"
엄지손가락을 펴서 자신의 등 뒤 너머를 가르켜보이는 드레비안. 진석의 시선은 자연히 그쪽을 향했다. 하녀에게 붙들려 있는 레오노르와 그 주위를 둘러싼 네 명의 근위기사들. 허나 레오노르를 붙잡고 있는 하녀나 근위기사들이나, 어째 하나같이 얼굴에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자신이 알던 원래의 드레비안과 같은 무감정한 얼굴. 레오노르만이 입을 꾹 다문채 진석을 바라보며 겁먹은듯한 표정을 띄우고 있었다. 드레비안은 옆구리에 끼고 있던 단창을 휘릭 요령좋게 돌려보이더니 창대끝을 바닥에 쿵 내리찍었다.
"그래. 레오노르는 내가 잡고 있다. 잘 알다시피 네 아이를 가진 여자다. 게다가 이 나라의 여왕이기도 하고."
그렇게 말하곤 잠시동안 말없이 진석을 노려보는 드레비안. 그러더니 저쪽에 무릎을 꿇은 자세 그대로 피투성이가 된 클립튼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흥, 저런 꼴이 되고도 아직 살아있는건가? 명줄도 긴 놈이군. 뭐 좋아. 좌우지간 레오노르를 살리고 싶다면... 우선 저놈부터 마저 죽여."
"뭐?! 안돼!"
드레비안의 요구에 반대편에서 들려온 외침. 기절한 아르데나를 붙들고 있던 모데로가 깜짝 놀라며 소리를 지른것이다. 모데로는 드레비안과 진석을 번갈아 노려보며 외쳤다.
"그, 그렇겐 안 돼! 너! 클립튼씨에게 더 이상 손 하나라도 댔다간... 이 아이도 죽는거야!"
품안에서 여기저기 큰 상처를 입고 축 늘어져 기절한 아르데나를 들어보이며 그녀의 목에 단검을 들이대는 모데로. 드레비안이 레오노르의 안위를 쥐고 진석에게 클립튼을 죽이라는 요구를 해온것처럼, 모데로 역시 아르데나의 목숨을 가지고 진석을 협박해왔다. 하지만 드레비안은 하찮다는듯 흥 콧방귀를 뀌며 다시 말했다.
"시끄럽군. 레오노르를 살리고 싶다면 어서 클립튼을 죽여."
"안 돼! 그딴짓을 했다간 진짜로! 진짜로 이 애를 죽일거라고!"
"큭큭. 이쪽은 뱃속의 아이까지 더해서 합이 둘이라고. 하나를 포기하고 둘을 구하는게 낫지 않겠어? 설마 이렇게 간단한 덧셈 뺄셈조차 못하는건 아니겠지?"
진석을 향해 클립튼의 목숨을 끊을것을 요구하는 드레비안과, 아르데나의 목숨을 인질삼아 그것을 필사적으로 제지하는 모데로. 그리고 주변 모두의 이목은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하는 진석에게 쏠려있었다.
'아니 이거 참... 개같은 상황이군.'
데오그라즈에 도착해 우연히 클립튼 일행의 행방을 알게되어 따라잡고, 실제로 클립튼을 쓰러트린것 까진 좋았는데... 아르데나가 붙잡혀 상황이 고착되나 싶더니 드레비안, 아니. 드레비안의 탈을 뒤집어쓴 미리안이 나타나 상황이 굉장히 골치아프게 되어버렸다. 현재 반송장이나 다름없는 클립튼을 죽이면 레오노르와 뱃속의 아기가 살지만 그랬다간 아르데나가 죽는다. 그렇다고 아르데나를 살리기 위해 클립튼을 내버려두면 레오노르와 아기가 죽는다.
'나에게... 둘 중 어느 한쪽을 고르라는거냐?'
아르데나는 처음부터 자기 손으로 구해내고 또 보살폈었다. 그 덕분일까, 아르데나는 스스로의 안위조차 도외시해가며 자신을 우선하고 따르는 아이였다. 이전 미리안과의 싸움땐 그녀 덕에 목숨을 건지기도 했었다. 실상 아르데나는 아무런 이해관계 없이 순수한 의미에서 자신과 가장 가까운 상대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함께하며 이래저래 정도 많이 들지 않았던가. 그리고 레오노르. 약으로 세뇌시켜 절대적인 사랑을 각인시켜둔 상대. 함께 지낸 시간도 길지 않고 아르데나만큼 정이 깊이 든 상대는 아니지었만... 지금 여기서 그녀를 잃으면 향후 그란델 왕국을 지배할 수단을 잃는다. 게다가 현재 자신의 아이까지 가진 여자. 이러니 진석은 어느 한쪽을 쉽게 포기하거나 선택할 수 없었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의 상황이었다.
'흔히 영화같은걸 보면 인질을 잡은 악당이 주인공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는걸 보면서 에라이, 야 그냥 무시하고 확 다 죽여버려~ 하는식으로 생각하며 답답해 했었는데... 막상 내가 그 입장에 처하고 보니 이거 어느 한쪽의 선택을 내린다는게 결코 쉬운게 아니었군.'
그러면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할까. 여전히 고민됐다. 하지만 시간은 무한하지 않았다. 어떤 결단이건 어서 내려야 했다.
"자 그래서. 대답은?"
채근하듯 질문을 던져오는 드레비안. 진석은 잔뜩 찌푸린 표정을 한채 바닥에 굴러다니던 장검을 하나 집어들고 서서히 클립튼에게 다가섰다. 그 모습에 옅은 미소를 띄우는 드레비안.
"크크큭... 역시, 욕심이 많은 남자 답군. 자신을 따르는 여동생같은 아르데나를 버리고 여왕인 레오노르쪽을 선택한다라. 옳은 선택이야. 말했다시피 이쪽은 뱃속의 아기까지 두 명 몫이니깐. 하나를 구하는것보다 훨씬 가치있지."
그리고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소리를 지르는 모데로.
"너어어! 그만둬! 클립튼씨에게 손대면 이 애도 죽는다니깐!"
하지만 진석은 모데로의 외침은 무시하고 드레비안에게 등을 돌린채 클립튼에게 걸어가며 케이트에게 눈짓을 했다. 진석의 시선을 알아챈 케이트는 진석의 시선을 빤히 마주보았다. 진석은 클립튼을 바라보다, 다시 케이트에게 시선을 옮기고 눈동자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리고 드레비안이 있는 뒤쪽을 향해 아주 살짝 턱짓. 눈치가 빠른 케이트는 그것만으로도 진석의 의도를 짐작했다는 듯 티나지 않을 정도로 아주 미세하게 고개를 까딱였다. 다음은 리들리였다. 리들리 역시 이쪽의 상황에 온 정신을 쏟고 있었다. 진석은 그런 리들리를 마주보았다.
"......"
흥분해서 그만두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모데로와는 달리 입을 꾹 다물고 진석을 노려보는 리들리. 진석은 케이트에게 했던것과 마찬가지로 똑같은 신호를 주었다. 하지만 리들리는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런 젠장. 이 놈은 케이트처럼 내 사인을 바로 눈치채지 못하는구만. 하긴 케이트는 함께 지내며 항시 내 비위를 맞춰주려 노력하는 노예고, 이 녀석은 방금까지도 서로 적이었으니 당연한거지만...'
진석은 뒤에선 보이지 않도록 검지 손가락을 하나 살짝 펴서 클립튼을 가리켜 보이곤, 손가락을 좌우로 저었다. 그리곤 엄지 손가락으로 뒤쪽의 드레비안을 가리키는 사인을 해보였다. 그렇게까지 하고나서야 겨우 이쪽의 의도를 이해한건지 아 하며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진석을 바라보는 리들리. 그렇게 둘에게 신호를 주고 나니 이제 진석은 클립튼의 바로 앞까지 다가서 있었다. 지체없이 오른손에 든 장검을 높이 쳐드는 진석. 하지만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모데로의 입에서 절규가 터졌다.
"그만둬어어어!"
아아, 정말 시끄럽구만 저 멍청이는. 진석은 검을 내리칠 듯 몸을 비튼면서 슬쩍 왼손을 내밀어 클립튼에게 성광의 반지 스플렌도르의 회복주문 메델라를 사용했다. 그리고 연이어 암살자의 망토를 이용한 투명화를 걸었다. 한순간에 허공에서 훅 하고 사라져버리는 진석. 그리고 회복주문 메델라를 받은 클립튼의 주위로는 빛무리가 나타나 몸을 타고 흘러내리며 그를 빠르게 회복시켰다.
'시클론, 그리고 화염화살!'
시클론을 걸고 드레비안쪽으로 달려나가며 화염화살을 내쏘는 진석. 다섯발의 불화살이 나타나 네 명의 근위기사와 하녀에게 제각기 쏘아져 나갔다. 동시에 행동을 개시한건 케이트와 리들리도 마찬가지였다. 리들리 역시 드레비안과 기사들을 향해 가장 빨리 발동 가능한 주문인 바람화살을 시전했고, 케이트는 드레비안에게 그림자의 손아귀를 불러내는 클라우를 걸었다.
"이익, 끝까지 이런 하찮은 짓거리를 잘도!"
분노의 외침을 내지르며 단창으로 그림자의 손아귀를 후려치는 드레비안. 그 사이 빠르게 날아간 화염과 바람의 화살들은 제각기 기사들과 하녀에게 적중해 그들의 행동을 순간적이나마 봉쇄했다. 기사들은 무기를 들어 마법공격을 방어했고, 혹 맞았더라도 갑옷을 입고 있었기에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지만 레오노르를 붙들고 있던 하녀쪽은 달랐다. 바람화살은 어깨를 스쳤고 화염화살은 그녀의 복부에 명중했다. 아윽 하고 고통에 찬 신음을 토하며 휘청이는 하녀. 하지만 막 그림자의 손아귀를 단창으로 찔러 소멸시킨 드레비안이 하녀를 향해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뭐해? 어서 레오노르부터 죽여!"
그 외침에 이를 악물고 몸을 추스리며 손에 든 단검으로 레오노르의 복부를 찌르려 하는 하녀. 푸우욱. 커다란 파육음이 났다.
"커... 헉."
하지만 칼을 맞은 상대는 레오노르가 아니라 하녀였다. 쩍 벌어진 하녀의 입에선 맥빠지는 단발마가 새어나왔다. 단검이 레오노르를 찌르기 직전, 진석이 집어던진 장검이 날아들어 하녀의 관자놀이에 정확히 적중했던 것이다. 머리에 커다란 장검이 꽂힌채로 제자리에 풀썩 무너지는 하녀. 하지만 그 다음은 주변의 기사들이었다. 마법으로 그들을 방해할 수 있던건 어디까지나 일순간 뿐. 기사들은 드레비안의 명령대로 제각기 손에 쥔 무기를 높이 쳐들고 레오노르를 죽이기 위해 다가섰다. 새하얗게 질린 표정을 지으며 바닥에 주저앉고 마는 레오노르.
"어딜 감히이! 전부 꺼져엇! 단사 데 라 무에르떼!"
파아앗! 기사들이 레오노르에게 다가서는 순간, 바로 그 근처에서 투명화를 풀고 모습을 드러낸 진석이 노호성을 토하며 뛰어들었다. 이것이야말로 폭풍처럼 전진하며 앞을 가로막는 모든 상대에게 필살의 검궤를 흩뿌리는 죽음의 춤! 진석은 레오노르를 중심으로 그 주위를 반바퀴가량 질풍처럼 달려나가며 네 명의 근위기사들을 글자 그대로 썰어버렸다. 엄청난 피보라가 휘몰아쳤다. 팔을 교차시킨채 멈춰선 진석의 주위론 조각난 기사들의 팔다리가 사방으로 흩날렸다.
"너어어어어!"
그 모습에 분노에 찬 외침을 내지르는 드레비안. 그는 잔뜩 일그러진 얼굴을 한채 손에 쥔 단창을 번쩍 들어올렸다. 앞으로 한 발 내딛으며 이것을 집어던지면 무방비상태의 레오노르는 그대로 꼬치처럼 꿰어지리라. 하지만 리들리와 케이트의 보조가 끼어들었다.
"클라우!"
"바기아모스의 뱀!"
드레비안의 발 아래에서부터 재차 그림자의 손아귀가, 그리고 리들리의 지팡이 끝에서부턴 붉은색의 열선이 뿜어져 급격한 곡선을 그리며 먹이를 쫓는 뱀처럼 드레비안에게 빠르게 날아들었다.
"이 쓰레기들이!"
창을 던지려다 말고 발을 번쩍 들어 그림자의 손아귀를 콰악 내리찍듯 짓밟는 드레비안. 그것만으로도 무형의 파동이 일어나며 그림자는 소멸되어 버렸다. 그 사이 리들리가 발한 열선의 마법이 드레비안의 몸통을 노리고 똑바로 날아들었다.
"카앗!"
붉은 열선의 마법을 향해 마치 괴성같은 기합을 내지르는 드레비안. 그러자 코앞까지 날아들었던 마법은 꺼져버린 촛불처럼 훅 하고 사라져 버렸다. 자신들의 공격이 너무나 허무하게 무위로 돌아가자 케이트나 리들리의 얼굴엔 당혹감이 서렸다. 그러나 그 다음 순간, 어느새 드레비안에게 육박한 모데로와 안톤의 공격이 섬전같이 뻗어졌다.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의 흐름을 파악한 모데로와 안톤 역시 곧바로 드레비안을 노리고 달려왔던것이다.
"라파가!"
"비연주익!"
우측에서 좌측으로 수평베기를 가하며 드레비안을 스쳐지나가는 모데로와, 좌측에서 우측으로 무수한 권격의 연타를 날리며 반대로 지나가는 안톤. 둘이 함께 펼쳐낸 절묘한 합격기가 드레비안에게 적중했다. 방금까지 케이트와 리들리의 공격을 상쇄시키느라 제대로 된 방어자세조차 취하지 못하고 있던 드레비안은 그야말로 무방비로 베이고 얻어맞으며 뒤로 주우욱 밀려났다. 그런 드레비안의 등 뒤에서 기다렸다는듯 달려든것은 진석이었다.
"이거나 먹어라, 토르멘타!"
파바바바바박! 진석의 간격안에 들어간 드레비안의 등뒤에서부터 무수한 검격이 쏟아지며 피보라가 퍼져나갔다.
"크아아... 악..."
엄청난 연격에 거의 다져지다시피하는 드레비안의 몸통. 연달아 입은 커다란 데미지에 창을 놓치고 입을 쩌억 벌리며 크게 휘청였다. 수초간 이어진 토르멘타로 드레비안을 너덜너덜하게 갈아놓은 진석. 손 안에서 빙그르르 돌려보인 란비언 페어를 벨트에 처척 꽂은 후, 드레비안에게 아주 가까이 스텝인하며 오른주먹을 꾸우욱 감아 쥐었다. 적룡의 건틀렛 플라메우스는 마치 그에 호응하듯 화르륵 강렬한 불길을 뿜어내었다.
"한 방 더어어!"
뻐어억! 진석의 어퍼컷이 드레비안의 옆구리에 작렬했다. 갑옷이 와지끈 우그러지고 뼈가 우드득 분질러지는 소리가 울려퍼지며, 그대로 허공에 붕 떠오른 드레비안의 몸체. 건장한 성인의 몸체가 줄 끊어진 연처럼 날아가는 그 모습은 주먹에 맞았다기 보단 흡사 차에 치여 나가떨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드레비안을 날려보낸 진석은 내지르고 있던 오른손을 촥 펼쳤다. 그 손바닥엔 빛의 입자가 모여들어 주먹만한 크기의 황금색 광구를 생성했다.
"이제 그만 저승으로 꺼져! 새기타!"
진석의 손에서 지체없이 발사된 황금색 광구는 막 바닥으로 떨어져내리는 드레비안의 몸체에 정확히 직격했다. 퍼어어엉! 수류탄의 폭발만큼이나 강렬한 폭음이 울려퍼지며, 산산조각난 드레비안의 사지가 사방으로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철퍽철퍽. 내장과 피가 끈적한 소리를 내며 산산히 흩어졌다.
"......"
그리고 침묵. 그야말로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클립튼을 죽이려는가 싶던 진석이 갑자기 사라지고, 여태까지 싸우던 진석쪽의 케이트와 클립튼의 일행들이 갑자기 힘을 합쳐 난입해온 드레비안을 공격. 그리고 모습을 감췄던 진석이 갑자기 나타나 레오노르를 위협하는 하녀와 기사들을 제거. 그와 동시에 모데로와 안톤의 힘까지 더해져 진석은 결국 드레비안을 쓰러트렸다. 크게 한 숨을 내쉬며 고개를 뒤로 젖히는 진석.
"흐아아아. 어떻게든... 잡았나."
하지만 이거... 두 번 하라면 못하겠다. 순간적으로 정신없이 날뛰며 드레비안과 기사들, 하녀까지 다 잡긴 했지만 어찌 보면 운이 좋았다고 밖에 할 수 없었다. 클립튼의 동료인 리들리나 모데로 등이 타이밍 좋게 어시스트를 하지 않았더라면... 케이트만으로는 분명 무리였으리. 진석은 다시 한 번 길게 안도의 한 숨을 내쉬었다.
"...으으."
그리고 그런 진석을 바라보는 모데로는 그야말로 똥씹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방금전까진 서로 죽어라 싸우다, 갑자기 협력해서 드레비안을 해치워버린 모든게 급변한 상황. 모데로는 자신이 진석을 도와 드레비안을 공격해놓고도 굉장히 멋쩍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워낙 급박한터라 생각은 뒤로 미루고 무조건 뛰어들긴 했지만... 이거 참 굉장히 어색한 상황이 아닌가? 머뭇대던 모데로가 말문을 열려는 찰나, 갑작스레 분명히 죽었을거라 생각한 드레비안의 머리통에서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아... 이거 너무하는걸. 갑자기 사이좋게 힘을 합쳐 합공이라? 큭큭, 눈물이 날 것 같은데."
드레비안의 몸통은 진석의 새기타로 폭발에 휘말려 무려 네쪽이 나있었다. 우선 상하체가 찢겨졌고, 찢겨진 상하체는 또 다시 두 동강이 나서 마치 퍼즐조각마냥 바닥에 흩어져있었다. 그렇게 엉망이 되어 당연히 죽었을거라 생각한 시체의 머리에서 말소리가 흘러나오다니? 주변 모두가 기절할듯 놀라는 것은 당연했다.
"...아, 아직도 살아있어?"
무심코 중얼거리는 진석. 그러자 드레비안의 머리통은 진석을 비웃었다.
"역시 멍청하군. 잊었나? 나는 처음부터 헤세스모데우스님에 의해 새로이 부활했던 몸. 죽음따윈 진즉 경험했었다. 이런 잔재주로 날 제거했다고 생각하면 곤란하지."
"아... 아니..."
무, 무슨 이딴게 다 있냐?! 터무니없는 상황에 기막혀하는 진석. 클립튼 일행이나 주변의 병사들 역시 동강난 시체가 떠드는 모습에 경악하고 놀라 아무도 말문을 열지 못했다. 그리고 드레비안의 머리는 저 혼자 멋대로 떠들어댔다.
"뭐 분명 지금 이 상황은 내가 한 방 먹긴 했지만... 이 정도로 벌써 이겼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고? 아직 나는 그쪽에 줄 선물이 남아있는데 말야."
"뭐...?"
선물이라니? 이 자식 또 무슨짓을 하려고? 진석이 긴장하는 찰나 갑자기 푸욱 하고 옆구리에 뭔가 날카로운것이 박혀들어오는 느낌이 들었다.
"...어?"
그대로 옆을 돌아본 진석. 그곳엔 무표정한 얼굴을 한 레오노르가 아까 하녀가 떨군 단검을 쥐어든채 진석의 옆구리를 깊숙히 찌르고 있었다. 그리고 레오노르의 얼굴은 갑자기 그 윤곽이 흐릿하게 뭉게지나 싶더니... 레오노르가 아닌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해버렸다! 진석은 그제서야 눈치챘다. 그랬다. 이것은 처음부터 레오노르가 아니었던 것이다. 광학계열의 마법으로 겉모습을 레오노르 처럼 위장한 가짜였던것!
"이... 이게 무슨...!"
"아하하하하! 잘 들어라, 진짜 레오노르를 돌려받고 싶다면! 러셀! 반드시 너 혼자서 해밀턴시의 해밀턴 공작가 저택으로 와라! 경고해두지만 쓸데없는 수작을 부린다면 그녀의 목숨은 없다!"
그렇게 외치는 드레비안의 얼굴 윤곽도 일순 흐릿하게 뭉게지나 싶더니 마찬가지로 드레비안이 아닌 전혀 엉뚱한 남자의 얼굴로 변해버렸다. 제 할말만을 마치곤 눈을 까뒤집으며 그 움직임을 정지하는 머리. 그리고 진석을 찔렀던, 레오노르로 가장해있던 여자도 실 끊어진 꼭두각시처럼 그대로 기절하듯 자리에 쓰러져 버렸다.
"...젠장. 이 자식... 처음부터 전부...!"
이를 악 물곤 옆구리에 박힌 단검을 뽑아내어 내팽개치듯 집어던지는 진석. 작은 단검이었지만 끝까지 박혀들었던 탓에 제법 많은 피가 울컥 흘러내렸다. 드레비안. 아니, 미리안. 그란델의 군대를 움직여 메디니아를 공격하게 한건... 분명 그녀가 맞으리라. 그리고 진석이 데오그라즈의 왕성으로 찾아올것도 당연히 예상했으리라! 아니... 아니지. 아예 처음부터 자신을 이곳으로 유도하려고 군대를 일으킨 것일거다. 그러니 자신이 올것을 대비해 이런식으로 가짜 대역도 준비해 놓았을테고. 하지만 클립튼 일행이 처들어온것은 미리안에게도 예상외의 상황이었을터. 결과적으로 진석은 클립튼 일행을 따라잡고 이렇게 투닥거린 덕에 미리안의 함정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었다.
"하아..."
진석은 한숨을 내쉬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자신에게 집중된 병사들과 기사들의 시선. 그리고 바닥에 널린 여러 시체들. 상처입고 피를 흘리는 자신을 향해 다급한 표정으로 달려오는 케이트. 그리고... 막 정신을 차리며 깨어나는 클립튼. 그런 클립튼을 보곤 반색하며 달려가는 모데로와 리들리. 그 모든 광경을 바라보던 진석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분명히 해밀턴시랬지. 그렇군. 해밀턴시라..."
해밀턴시. 자신이 이번회차의 게임을 최초로 시작했던 장소. 아무래도... 이제 자신은 그곳으로 되돌아가서 이 모든 일의 결착을 지어야 할 모양이었다. 진석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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