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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베라 - 부회의 방랑자-151화 (151/155)

< --   - 13.   -- >         * 151화 *

그란델 왕국의 수도 데오그라즈의 서쪽에 위치한 대도시 해밀턴. 어지간한 술꾼들도 그만 자리를 파하고 집으로 돌아갈 야심한 시각. 다각다각, 포장된 도로를 따라 한 필의 말이 어둑한 도심의 거리를 걷고 있었다. 말은 주택가 골목 이곳저곳을 한참이나 헤매며 돌아다니다가 겨우 어느 한 지점에서 겨우 멈춰섰다.

"맞아. 바로 여긴가..."

말에서 훌쩍 뛰어 내리며 주변을 슥 둘러보는 검은머리의 사내. 그의 어깨엔 진홍색 망토가 둘러져 있었고, 전신엔 어깨보호대나 건틀렛, 갑옷을 비롯한 온갖 무구들이 걸쳐져 있었다. 그리고 허리에 찬 벨트엔 여러자루의 단검들과 도구를 수납할 수 있는 파우치가 걸려있는것이 제법 숙련된 모험가 냄새가 났다. 그 사내는 다름아닌 진석이었다.

"그렇지. 아마 여기서 맨 처음 게임을 시작했던것 같은데."

혼잣말을 하며 고개를 까딱거리는 진석. 이 주택가의 골목은 자신이 이번 회차의 게임을 맨 처음 시작한 자리였다.

"막 시작했을땐 거의 무일푼이나 다름없는데다가 장비라곤 꼬질꼬질 낡은 청동단검이 전부였는데. 일단 돈 벌 궁리부터 하느라 강도질 하겠답시고 돌아다니다... 충동적으로 혼자 집에 들어설던 왠 아가씨, 그러니까 에나를 먹잇감으로 삼았었지. 음~ 하지만 너무 오래 되서 그런가. 솔직히 이젠 에나 얼굴도 가물가물하네."

그랬다. 처음엔 고작 동화 몇닢에 그냥 떠돌이나 다름없는 볼품없는 행색으로 시작했었지만, 지금은 그간 많은 일을 겪으며 꽤나 많은것을 손에 넣어왔다. 문득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는 진석. 우선 아라파에서 일을 하며 입수했던 암살자의 망토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피터슨의 수첩에서 발견한 정보를 따라 비더하임의 동굴에서 얻었던 어깨보호대 에스카마도와 적룡의 건틀렛 플라메우스. 올린스턴에서의 토너먼트 우승 부상으로 받고, 옐 프라나에서 새로운 힘을 얻게 된 성광의 반지 스플렌도르. 마지막으로 지젤이 만들어준 크리스 페어 란비언과 세트아머 라 찬까지.

"읏샤."

잠시 서서 감회 비슷한것에 잠겨있던 진석은 다시 말등에 올랐다. 그리곤 말을 몰아 주택가를 빠져나가 대로쪽으로 향하며 지금 이 자리에 없는 셀린과 케이트, 그리고 르마쿠르 자매와 클립튼 일행을 떠올렸다. 그쪽은 잘 하고 있으려나?

어제. 미리안이 진석에게 해밀턴시로 오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진 직후. 엉망진창이 된 왕궁은 클립튼의 주도하에 신속하게 수습했다. 원래 클립튼 일행을 막으러 나왔던 근위기사대 중에선 예전부터 클립튼과 개인적으로 아는 기사들이 많았던 데다가, 그들도 방금전 미리안이 저지른 일을 똑똑히 목격했기에 의외로 별다른 반발이나 저항같은건 없었다. 기사들과 병사들은 레오노르가 정체불명의 세력에게 납치됐으며 클립튼은 그것을 저지하러 온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왕궁내에 이 상황을 수습할만한 권한을 지닌 고관이나 다른 왕족이라도 있어야 했다. 하지만 레오노르가 여왕에 오른 뒤에 친족들의 왕궁 출입을 금하거나 각자의 영지로 쫓아냈고, 메디니아를 향해 병력을 전개시킨 이후엔 귀족들과 관리들조차 정말 필요 최소한 업무 이외의 왕궁출입은 불허했기에 현재 왕궁엔 달리 책임을 지거나 상황을 수습할 이가 존재하지 않았다. 즉 여왕인 레오노르를 제외하곤 궁내의 시종들과 수비병력만이 머무르고 있었기에 클립튼이 대표로 나서서 그럭저럭 상황을 수습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클립튼 일행이 왕궁에 난입하긴 했었지만 병사를 죽이지 않고 기절만 시켰다는 점도 주효했다. 그것만으로도 이들이 악의를 가지지 않았다는건 명백했기 때문이다.

허나 클립튼 일행과 달리 진석은 병사들을 왕창 날려버리며 도중에 난입했었다. 하지만 여왕이 근위기사로 위장하고 있던 정체모를 자에게 납치된 초유의 사태다보니 딱히 그 점을 문제삼는 이는 없었다. 게다가 문제삼는다 한들 어쩌겠는가? 왕국 제일의 기사라는 클립튼마저 어마어마한 무위로 꺾어버리는 진석의 힘을 보지 못한이는 아무도 없었다. 마음만 먹으면 혼자서도 수비병들을 몰살시킬 수 있을텐데, 그러지않고 클립튼 일행과 원만하게 상황을 풀어나가는 것을 보며 다들 내심 다행으로 여겼다.

모두는 우선 병영쪽으로 자리를 옮기고 양측의 부상자부터 치료했다. 그리고 진석은 클립튼 일행과 근위기사대의 대표들, 그리고 자신의 일행들을 모아놓고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자신은 헤세스모데우스라는 허신을 섬기는 사교단에 소속되어 있으며, 그들의 목적은 허신을 소환해 이 세계를 멸망시키려 한다는 것. 그리고 그 계획의 일환으로 그란델 왕국을 지배하기 위해 레오노르를 납치했고, 대신관 미리안이라는 자가 그녀를 뭔가의 마법으로 조종해 온 것이라 설명했다. 또한 자신은 우연히 교단과 얽히게 되었고, 그들에게 동조하는 척 단독으로 잠입하여 호시탐탐 교단의 계획을 망가트릴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고 했다. 자신의 행동은 실제로 성과가 있어 대신관 미리안을 직접 제거했다고도 밝혔다. 사실 레오노르를 납치한것은 그냥 우연의 산물이었고 그녀를 지배한 방법 역시 마법이 아닌 약물이었지만 진석은 그 부분은 자기 편의대로 거짓말을 했다.

물론 이들이 이 모든 이야기를 쉽게 믿어주진 않았다. 우선 스텔라가 진석에게 물었다. 당신은 애시당초 왜 이런 교단에 들어갔느냐고. 이런 수상한 조직에 몸을 담은것 부터가 믿을 수 없다고 떠들었지만 진석은 짐짓 분노한 척 가장하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 모든것은 자신의 애인이 살해당한것에 대한 복수라고 운을 띄웠다. 자신은 에나라는 애인과 함께 대륙 남부를 여행하던 중 세계수의 가지라는 것을 우연히 손에 넣었으나... 어째서인지 빅 본이라는 조직이 그것을 빼앗기위해 애인인 에나를 납치해 버렸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자신은 에나를 구하기 위해 세계수의 가지와 그녀의 신병을 맞교환하기로 했지만... 교섭 도중 일이 꼬여 에나가 제이스라는 교단의 수호자에게 살해, 그리고 분노한 자신은 빅 본의 조직원들을 살해하고 제이스를 쓰러트렸으나 소란때문에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비병들에게서 도망쳐 도시밖으로 내뺐다고 했다.

그리고 무사히 도망친 후엔 에나를 죽인 원수인 제이스를 곧바로 죽여버리려 했지만... 필사적으로 자신을 회유해오는 그녀의 태도에 설득당한것처럼 가장하곤 일부러 교단에 들어갔다고 했다. 제이스 하나만을 죽이고 마느니, 이런 정신나간 교단따윈 아예 그 근본부터 완전히 무너트리는게 진정한 복수라는 생각을 했다고 털어놓았다.

그리하여 교단에 충성하는듯 오랫동안 이들과 일하며 교단을 핵심부터 무너트리려는 계획을 실행해왔으며 실제로 얼마전 대신관 미리안을 처치하는데까지 성공했으나... 생각과는 달리 죽지 않고 저런 형태로 살아남아 있었던거다 설명하니 스텔라는 더 이상 아무말도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게다가 실제로 근위기사들 중엔 몇개월전의 일이긴 하지만 베이머스 호텔에서의 사건을 기억하고 있는 이도 있었기에 진석의 이야기는 순 자기 좋을대로 꾸며낸 거짓말임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그럴듯한 진실성이 붙어버렸다.

그 다음은 리들리였다. 그렇다면 애당초 애거스트 공화국의 변경 도시에서 처음 만났을때 정체를 밝히고 손 잡으려 하지 않았느냐는 당연한 지적이 날아들었다. 하지만 진석은 아주 태연한 태도로 그땐 너희들을 믿을 수 없으니 그랬다고 답했다. 자신은 자신 나름대로 목숨을 걸고 이런 조직에 들어가 신용을 쌓으며 지위를 얻고 교단을 무너트릴 수 있는 핵심에 근접했는데, 이제와서 섣불리 정체모를 자들과 손을 잡았다간 일을 망칠 수 있기에 그랬다고 답했다. 애당초 자신이 모든걸 있는 그대로 털어놓았어도 그쪽 역시 절대 자신의 이야기를 곧이 곧대로 믿어주지 않았을거라는 말을 하니 리들리는 하긴 그도 그렇다는듯 고개를 끄덕였다.

세번째는 중년의 격투가, 안톤이었다. 그는 드레비안이 레오노르의 뱃속에 든 아이가 진석의 아이라고 하던 말은 도대체 무엇이냐고 물어왔다. 그 질문엔 아르데나도 눈빛을 빛냈다. 진석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그것은 대신관 미리안이 자신의 손을 확실히 더럽히기 위해 강제로 그녀와 동침할것을 명령한것이라고 설명했다. 교단에 들어간지 얼마 안되었던 자신은 교단의 신용을 얻기 위해 할 수 없이 명령대로 레오노르를 범했고, 그녀가 임신한 아이는 자신의 아이가 분명하며 책임을 지고싶다는 의사도 분명히 밝혔다. 하지만 한 나라의 여왕이 가진 아이의 아버지가 이런 애매한 신분의 남자라는 사실에 방 안엔 한동안 불편한 느낌의 침묵이 감돌았다.

마지막은 모데로였다. 그럼 도대체 진석의 진짜 정체는 무엇이냐 하는 질문이었다. 진석의 정체가 솜브라 교단에서 배신하고 나간 자들의 동료가 아니었다면... 도대체 어디서 바일리 델 비엔토를 익힌것이냐 하는 것이 그의 의문이었다. 진석은 솔직히 말해서 자신은 솜브라 교단의 그런 사정따윈 몰랐으며, 당시엔 에이미의 말을 받아 그냥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아무렇게나 둘러댄것 뿐이었다고 답했다.

그리고 바일리 델 비엔토를 배운것에 대해선 예전 제이스에게 했던것과 똑같은 거짓말을 써먹었다. 자신은 고아에다 대륙 북부 도적길드 출신의 암살자라는 거짓말. 바일리 델 비엔토는 그곳의 암살자에게 교육받는동안 직접 전수받았으며 자신을 가르친자의 사정이나 출신따위 자신은 전혀 몰랐다고 둘러댔다. 그리고 올린스턴 왕국에 갔을때 토너먼트에 참가했던 제인의 이야기를 꺼내며,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솜브라 교단을 배신하고 도망쳐 나간 진짜 배신자들은 아마 대륙 북동부에 자리를 잡고 있는것 같다는 정보도 일러주었다. 진석은 전혀 의외의 정보를 접한 모데로와 에이미의 눈빛이 변하는것을 놓치지 않았다.

이럭저럭 자신의 사정을 설명해준 후엔 향후의 방침에 대한 논의였다. 우선 진석의 목표는 교단을 무너트리고 레오노르를 구하는 것 이었다. 그리고 클립튼의 목적은 진실을 파헤치고 왕국을 위기에서 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중 진실쪽은 진석이 일러줬다. 그럼 남은것은 왕국을 위기에서 구하는 것. 그러기 위해선 일단 레오노르의 구출이 필수였다. 즉, 진석이나 클립튼이나 레오노르를 구해야 한다는 목적은 이제 서로 동일했다. 그리하여 모두는 레오노르를 구하기 위해 앙금을 털고 서로 협력한다는데 동의했다.

그 후 레오노르로 가장한 채 진석을 찔렀던 여자를 데려와 아는것이 있는지 심문해 보았지만, 애당초 그녀의 신분은 평범한 하녀로 요 며칠간의 기억이 아예 아무것도 없다고 답했다. 분명 미리안이 심령제압이라도 걸어서 그녀를 조종했던게 분명했다. 그리고 앞서 진석이 레오노르 역시 그저 마법에 조종당하고 있는 희생자라고 밑밥을 깔아뒀었으니 다들 그런가보다 하며 순순히 하녀의 말을 믿어주었다. 그리고 근위기사들을 통해 원래 레오노르의 곁에 머물던 맥과 머서의 행방을 물어보았는데, 그들은 드레비안. 정확히는 드레비안으로 위장한 미리안의 지시로 군을 이끌고 메디니아로 향했다고 했다. 즉 진석이 데오그라즈로 오는 도중 마주쳤던 그란델 군과 그 군을 지휘하고 있는게 바로 그 둘이라는 이야기였다.

이렇게 해서 당장의 목표는 두 가지가 되었다. 레오노르 여왕을 구출하고 메디니아로 진격한 군을 멈추게 하는 것. 우선 레오노르는 납치당해서 해밀턴시의 해밀턴 공작가에 끌려가 있는 상태. 게다가 미리안은 레오노르를 구하고 싶으면 진석에게 단독으로 올 것을 요구했었다. 어디에 감시의 눈이 붙어있는지 알 수 없었으므로 레오노르를 구출하는것은 그 요구대로 진석이 단독으로 나서기로 했다. 클립튼은 혼자서 가는건 너무 위험한게 아니냐는 이야기를 했고 다른 이들 역시 우려를 표했지만, 진석은 나는 지금까지도 혼자 정체를 감추고 교단내에서 일을 해온데다가 이미 한 번 대신관을 쓰러트린적이 있으므로 괜찮다는 대답을 하며 넘겼다.

그리고 그란델의 군대를 멈추는건 클립튼 일행에게 일임했다. 그들은 근위기사대와 협력해 임시로 만든 군령장과 최소한의 병력을 이끌고 최대한 빨리 움직여 군을 멈추기로 했다. 그리고 진석은 군을 이끌고 있을 맥과 머서의 능력에 대해 아는대로 설명해준 다음, 르마쿠르 자매에겐 클립튼 일행과 동행할것을 부탁했다. 아무리 서로 협력하기로 했다지만 조금전까지만 해도 험악하게 싸우던 상대들과 동행하라는 말에, 그녀들은 당연히 불만을 토로했다. 하지만 진석은 이것은 서로가 확실히 협력한다는 의미라며 르마쿠르 자매를 그쪽에 붙여주는 대신 모데로를 이쪽에 빌려줄것을 요구했다.

진석의 요구에 모데로 본인이나 에이미는 탐탁치 않아했지만 일행을 이끄는 클립튼과 리들리는 의외로 나쁘지 않은 이야기라며 이 제안에 동의를 표했다. 이렇게 해서 양측의 당사자들은 썩 내켜하진 않았지만 르마쿠르 자매는 일시적으로 클립튼 일행에 합류하게 되었고, 반대로 모데로의 신병은 이쪽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진석은 모데로에게 셀린과 케이트의 안내를 받아 그녀들과 함께 교단의 총본산인 사원에 가서, 임시로 대신관직을 맡아 교단을 유지하고 있는 수호자 제이스를 제거해달라는 부탁을 했다. 원래 교단은 수뇌인 대신관 미리안이 홀로 모든 업무를 맡아가며 유지하던 조직. 하지만 대신관은 진석이 한차례 물리쳤기에,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 수호자 제이스가 업무를 대행하고 있다고 했다. 이제 제이스마저 해치우고 관련 서류들을 폐기한다면 대륙 각지에 퍼진 교단의 세력들은 분단되어 저절로 무너져갈거라 설명했다.

허나 지금 교단의 업무를 맡고 있는 제이스를 죽이고 서류들을 폐기한다는것은 실상 진석이 교단의 세력을 손에 넣길 포기한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미리안이 드레비안의 몸을 빌리는 형태로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안 이상, 그것들을 내버려 둘 순 없었다. 놔뒀다간 미리안이 무슨짓을 저지를지 몰랐다. 또 여태까지 복수때문에 교단을 무너트린거라 장황하게 설명했는데 이제와서 남은 교단의 세력을 먹겠다고 손을 쓰는것도 매우 어려웠다. 그리고 애당초 교단의 신도들이나 세력은 미리안을 절대적으로 따르던 이들. 이 들의 믿음을 유지해가며 자신이 이용할 수 있게끔 틀을 바꿔가는 일은 시간도 오래걸리고 너무 골치아플 것 같았다. 물론 아깝긴 했지만 그렇다고 이게 무슨 희생을 치루든 꼭 손에 넣어야 할 절대적인 것도 아니고 하니, 진석은 그냥 이쯤에서 교단의 세력을 손에 넣는걸 포기하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그렇게 논의를 마친 진석과 클립튼 일행은 총 셋으로 나뉘어 움직이게 되었다. 우선 단독으로 해밀턴시로 향하는 진석. 그 누구보다 진석의 역할이 가장 중요했다. 그리고 두번째는 르마쿠르 자매를 포함한 클립튼 일행. 이들은 군을 막고, 군을 지휘하는 맥과 머서를 제거하기 위해 소수의 근위기사대와 함께 북상하기로 했다. 마지막으로는 모데로. 그는 셀린과 케이트의 안내를 받아 교단의 사원으로 향하기로 했다. 사실 교단의 사원은 그녀들도 한 번 밖에 가보지 않은 곳이긴 했지만 그래도 길 안내 정도는 별 무리 없이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셀린과 케이트에겐 모데로와 협력해서 제이스를 죽인 후, 앞서 지시한대로 모든 서류를 폐기한 뒤 사원도 불지르라고 일러두었다. 사원뿐만 아니라 산 초입에 있는 타마엘 초 농장까지도 불태우라고 명령했다. 물론 교단의 세력과 자산은 엠퍼슨 메디컬 아카데미나 헤세스 약품 통상 같은것도 있었지만... 그것들은 표면상으론 지극히 평범한 아카데미와 공기업이니 당장 어떻게 제거하긴 힘들었다. 하지만 마약의 원료가 되는 타마엘 초 농장만큼은 이참에 없에버리는게 나았다. 놔뒀다간 이 농장이 누구의 손에 들어갈지도 모르거니와 그곳에 모여사는 교단의 신도들을 와해시키는데 있어선 꼭 필요한 조치였다. 단 농장을 불태워 없엘때 평신도들은 가능한 죽이지 않되, 이쪽의 목숨에 위협이 될 정도로 방해가 된다면 죽여도 좋다고 일러두었다.

이렇게해서 진석은 클립튼 일행과 협력하여 허신의 교단을 분쇄하기 위한 마지막 여정에 접어들었다.

"후우... 여긴가."

다그닥. 해밀턴시 북동쪽, 다른 저택들과는 한참 떨어져 약간 외딴곳에 위치한 해밀턴 공작가. 그 부근에 멈춰선 한 필의 말. 말 위에 탄 진석은 주변을 기웃거리며 주변 일대에 한참이나 둘러진 높은 담벽부터 살펴보았다.

"허, 아무리 공작가의 저택이라곤 하지만 정말 어마어마하게 크구만. 이건 뭐 거의 작은 왕궁 수준인데."

담벽 너머로 펼쳐진 안쪽의 정원만 해도 무지막지하게 컸다. 이 안쪽 사방 백여미터 가까이가 전부 정원이었다. 즉 이 공작가는 정문을 지나고도 백미터를 더 걸어들어가야 겨우 저택에 도착한다는 의미.

"길이 백미터짜리 앞마당이라니. 이야 이거 집안에서 축구를 해도 되겠는데?"

그렇게 긴 정원을 지나야 닿을 수 있는 길의 끝엔 정원 못지 않게 커다란 저택이 보였다. 3층 높이의 유서깊어 보이는 호화저택. 하지만... 야간임에도 불이 켜진 창은 하나도 없었다. 마치 아무도 살지 않는곳처럼 작은 불씨 하나 없이 어두컴컴했다. 칠흑처럼 어두운 저택의 모습을 확인한 진석의 표정이 조금 굳어졌다.

'이만한 규모의 대저택이라면 공작가의 일원들을 시중들거나 호위하기 위해 상주하는 인원도 많을텐데... 작은 등불조차 켜있지 않은데다, 기척하나 없이 조용한게 이거 을씨년스럽다 못해 섬뜩할 정도구만.'

게다가 원래대로라면 저택 외곽에서부터 순찰하며 지키는 가병들도 있을테지만, 그런 인원은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 정문도 그저 굳게 잠겨있을뿐 문지기는 커녕 주변엔 개미새끼 한 마리조차 보이지 않았다.

'하긴. 미리안이 뭔가 수를 썼을테지. 얼핏 밖에서 봤을땐 아무도 없는것처럼 보여도... 안엔 뭔가 함정같은게 있을터.'

말에서 내린 진석은 담벽 부근으로 다가갔다. 벽의 높이는 약 3미터 가량. 높긴 했기만 지금 자신의 다릿심이라면 어렵잖게 뛰어넘을 수 있었다. 딱히 라파가를 쓸 필요도 없이 간단한 발돋음만으로도 훌쩍 담벽의 위로 올라선 진석. 지체없이 안쪽 정원으로 뛰어내렸다. 그리고 정원으로 들어서자마자 이 저택 안쪽의 분위기는 담벽 밖과는 정 딴판이라는걸 곧바로 눈치챘다.

'이건... 뭔가 있구만. 사원의 지하 제단이 있던곳과 비슷한 느낌인데? 아니아니, 그곳만큼 강렬한 느낌은 아니지만... 그래도 뭔가 끈적하고 불쾌한 느낌이 강하게 드는게...'

혹시 저택 안쪽 지역에 뭔가의 결계 같은거라도 쳐놓은걸까? 내심 긴장하며 천천히 한걸음씩 저택을 향해 걸어나가는 진석. 그런데 몇걸음 지나지도 않아 바로 앞쪽 수풀 그림자속에서 뭔가가 꿈질꿈질 움직이는것이 눈에 띄였다.

'뭐야?'

멈춰서서 그쪽을 살펴보는 진석. 그리고 그림자속에선 몇몇 인영들이 흐어어어 낮은 신음성 같은것을 내며 하나 둘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이내 비척거리며 그림자를 벗어나 달빛 아래에서 진석을 향해 한걸음씩 다가오는 그들. 가문의 문장이 들어간 갑옷을 입은 가병들이나 하인들로 보이는 차림새의 남자들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초점이 맞지 않는 눈동자를 한채 입을 벌리고 낮은 신음을 흘리며 진석을 향해 거리를 좁혀왔다. 전원이 피부도 창백하고 생기라곤 눈꼽만치도 느껴지지 않는게... 아무리봐도 이들은 산사람 같지 않았다.

"아니 설마. 조, 좀비냐?"

무심코 혼잣말을 내뱉는 진석. 그리고 그 말이 신호라도 된 양, 정원수나 여러 수풀들이 바스락대며 더 많은 인영들이 어둠속에서 하나 둘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 수는 어림잡아도 오륙십은 가뿐히 넘었다. 진석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아 이런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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