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13. -- > * 153화 *
'3층엔 또 뭐가 있을라나.'
저택의 정원에 들어서면서부터 미리안이 설치한 방해물이 하나씩 차례대로 튀어나오니 이젠 내심 다음에 뭐가 나올지 기대가 될 지경이었다. 게다가 아이템과 액티브 스킬의 사용을 막은 결계 같은것만 빼면 별로 대단한 것도 없었다.
"어디... 흠. 아무것도 없나?"
계단을 올라 빼꼼히 3층의 복도를 둘러보는 진석. 하지만 조용한게 딱히 눈에 띄는것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신중하게 주위를 살펴보는 진석.
"이 중 어느방엔가에 숨어있는건가?"
그럴지도 모른다. 현관에 설치해둔것처럼 뭔가의 함정을 문 안쪽에 깔아두고 들어서는 순간 불시의 습격을 해올지도 모르지. 진석은 복도 맨 끝에서부터 조심스럽게 방문을 하나씩 열어보며 확인을 해나갔다. 그러나 복도 양쪽으로 쭉 이어진 여러 방들을 확인해봐도 생각과는 달리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뭐야 이거, 잘못 짚었나? 벌써 3층 방들의 절반 이상을 뒤져봤는데 아직 아무것도 없... 헉?!'
속으로 투덜거리며 서재에서 복도로 돌아나오던 진석의 눈에, 복도 저 반대편 어느 방의 문이 삐걱 소리를 내며 저절로 열리는것이 보였다. 방심하고 있었는데 아무도 없는 곳에서 갑자기 문이 열려버리니 화들짝 놀라는 진석.
"어우씨 깜짝이야."
방심하고 있던터라 이건 좀 놀랬다. 아니 아까부터 이게 무슨 놀이동산의 귀신의 집 같은것도 아니고 자꾸 이상한 연출을 넣기는? 진석은 지체없이 복도를 건너뛰어 문이 열린 방으로 향했다. 방으로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 안쪽에서부터 웃음소리인지 노래소리인지, 좌우지간 뭔가 알아듣기 힘든 기묘한 목소리가 흘러나오는걸 들을 수 있었다. 내심 긴장하며 방 안쪽을 슬쩍 들여다보는 진석.
'그래서 대체 뭐냐? 쓸데없이 잔뜩 분위기 잡기는... 흠?"
아주 어린 아이의 방, 혹은 육아실이라는 느낌이랄까. 방 안엔 목마나 커다란 봉제인형, 공이라던가 나무로 된 블럭 장난감 같은게 여기저기 굴러다니고 있었다. 창가 부근엔 요람과 바로 그 위쪽에 매달린 모빌 따위가 보였고, 바로 그 앞에선 요람을 천천히 흔들고 있는 드레스 차림의 여자가 한 명 보였다. 어두운 방안임에도 눈에 확 띌 정도로 붉고 화려한 드레스였다. 이쪽으론 등을 돌리고 있어 얼굴을 확인할 순 없었지만 흥얼흥얼 알아듣기 힘든 노래 소리같은것을 내고 있는것은... 저 여자임이 분명했다.
'저 여자는 또 뭐야? 설마 저게 레오노르... 일리는 없지. 키가 엄청 크네.'
쭈삣거리며 방안으로 조심스레 몇 걸음 들어서는 진석. 그런데 방 안으로 들어서고 나니 갑자기 등 뒤에서 철커덕 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니 열려있던 방문이 어느새 저절로 닫혀 있었다. 기가차다는 표정을 짓는 진석.
"하, 이게 뭐 자동문이냐? 지 맘대로 열렸다 닫혔다 하게."
무심코 중얼거린 진석의 한 마디. 마치 그게 방해가 되었다는듯 창가쪽에서 요람을 흔들며 뭔가를 흥얼거리던 여자의 목소리가 뚝 그쳤다. 왠지 모르게 기분이 나빠진 진석은 여자의 뒤통수를 향해 한 마디 쏘아붙였다.
"에라이. 야. 똥폼 그만 잡고 어서... 으엑."
스윽 고개를 돌려 진석쪽을 바라보는 붉은 드레스의 키가 큰 정체 미상의 여자. 그런데 놀랍게도 그녀의 얼굴엔 이목구비가 없었다! 아니, 없는것이 아니었다. 있는것이라곤 단 하나뿐이었다. 입. 얼굴 한 복판에 자리잡고 있는 커다란 입. 그랬다. 저 여자의 얼굴에 있는거라곤 오직 입 하나뿐이었다. 게다가 그 입술은 립스틱이라도 칠해놓은건지 드레스 만큼이나 붉게 물들어 있었다.
"...아니 저기 순수하게 궁금해서 하는 질문인데 눈이랑 코는 어디다 팔아먹었냐?"
진석의 질문에 커다란 입을 쩌억 벌리며 기묘한 소리를 질러오는 여자. 그녀의 목청에선 마치 여러명의 사람이 동시에 서로 다른 높낮이로 비명을 지르는 것 같은 기묘한 음색이 퍼져나왔다. 평범한 목소리도 들어있었지만 쉰 것 같은 소리도 섞여있었고, 가래 끓는 듯한 그르르 하는 소리도 들려오는데다 어린아이 특유의 새된 음역도 포함되어 있었다. 정말로 기묘하다는 표현 밖에 할 수 없는 목소리였다.
"우웃?!"
그리고 진석은 그 외침과 동시에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힘이 날아든다는것을 직감했다. 주저없이 옆으로 몸을 날리는 진석. 다음 순간 문가 근처에 쌓여있던 책무더기가 퍼억하고 갈기갈기 찢겨져 흩날리는 모습이 들어왔다.
"하... 요거 봐라?"
진석이 아슬아슬하게 공격을 피해내자 입밖에 없는 드레스의 여자는 양 손을 가슴팍 앞으로 모아쥐고 허공을 올려다보며 마치 기도하듯 또 다시 뭔가의 외침을 내질렀다. 그러자 진석의 주변에서 퍼퍼펑하고 무형의 힘이 폭발하며 나무로 된 마루바닥을 깨부수기 시작했다. 자신의 발치가 폭발하기 직전 앞으로 몸을 내던지며 란비언 페어를 뽑아드는 진석.
"흥! 야간에 민폐잖냐! 소음공해라고!"
여자는 진석이 달려들자 이쪽으로 양 손을 펼치며 또 다시 뭔가를 소리질렀다. 마치 그것에 응하듯 허공에 두둥실 떠오르는 방안의 집기들. 허공에 뜬 집기들은 지체없이 하나 둘 진석을 날아들기 시작했다. 진석은 자신의 정면으로 날아드는 목마나 곰인형 따윌 란비언으로 쳐서 동강내며 외쳤다.
"틀림없이 염동력 계열의 능력이군! 폴터가이스트 흉내냐?"
지금의 난 기술이 봉인된데다가 저쪽에서 염동력으로 무슨 기괴한 장난질을 더 걸어올지 모르니... 길게 가면 불리해! 여기선 단번에 끝낸다! 그렇게 생각한 진석은 자세를 바짝 낮춰 날아든 물건들을 흘려보내며 순식간에 여자에게 접근했다. 그러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진석을 향해 입을 쩌억 벌려오는 여자. 그 커다란 입 안쪽에 검붉은 빛의 입자가 모여드나 싶더니, 지체없이 진석을 향해 쏘아져 나왔다.
"뭔 더러운걸 토하고 지랄이야?"
몸을 옆으로 확 틀며 직선으로 뿜어진 검붉은 광선을 피해내는 진석. 여자의 바로 앞까지 근접한 진석은 그대로 주먹을 휘둘러 여자의 턱을 아래에서 위로 올려쳤다. 크헙하고 고개가 뒤로 확 젖혀지며 크게 휘청이는 그녀. 진석은 순간 무방비가 된 상대를 향해 란비언 페어를 힘껏 내찔렀다. 구불구불한 검날들이 몸통을 파고들며 시커먼 색의 피가 튀어올랐다.
"아아아! 아아아아아!"
란비언 페어에 찔리자 굉장히 고통스러운지 다급히 양 팔을 내저으며 뒤로 도망가려는 여자. 하지만 진석은 멈추지 않았다. 한 발 더 내딛으며 그야말로 상대를 다져버리듯 검을 내리치고 마구 찔러댔다. 파바바바박! 검은 피가 튀고 여자가 입은 드레스는 촥촥 찢겨져 삽시간에 걸레짝처럼 변했다.
"내가 쫄아서 겁이라도 먹길 바랬나본데! 공격이 통한다면 귀신이고 괴물이고 겁날게 없거든?"
순식간에 전신이 너덜너덜하게 난도질 당한 여자. 부들거리며 쓰러질듯 뒤쪽의 요람에 걸터섰다. 잠깐 사이 무려 몇십군데나 베여 저항할 힘을 잃은 것 같았다. 진석은 손에 든 란비언 페어를 탈탈 휘둘러 피를 털어낸 다음 벨트에 꽂고, 무력화 된 상대에게 다가섰다. 마치 살려달라는 듯 덜덜 떨리는 손이 내밀어졌지만 진석은 그녀의 손을 탁 쳐버렸다. 그리곤 양 손을 뻗어 여자의 얼굴을 단단히 거머쥐는 진석.
"가만히 있어봐. 해보고 싶은게 있어."
그리곤 여자의 입을 잡고 그대로 위아래로 잡아당기는 진석. 진석은 이 커다란 입을 양쪽으로 벌려 통째로 잡아 찢을 심산이었다. 괴물같은 악력으로 입이 당겨지니 여자의 목구멍에선 그야말로 귀가 째지는 것 같은 비명이 터져나왔다. 그녀는 진석을 밀어내려 했지만 너덜너덜할 정도로 다져진 몸체엔 도무지 힘이 들어가지 않는지 꿈질거리는 몸부림이 저항의 전부였다. 그녀가 고통에 몸을 뒤틀때마다 온 몸에 새겨진 무수한 상처에서 검은 피가 울컥울컥 쏟아져 내렸다. 그리고 이내 찌지직 하며 여자의 입이 양쪽으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처참한 비명이 터져나왔다.
"그래! 원래 처음은 아프고 피도 나오는거야! 조금만 참어!"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며 팔에 더 힘을 주는 진석. 한 번 찢어지기 시작한 입은 결국 버티지 못하고 쫘아악 무식한 소리를 내며 두쪽으로 갈라지고 말았다. 부르르 떨다 추욱 늘어지는 여자의 몸체와, 진석의 손에 들려있는 여자의 머리통 반쪽. 생으로 잡아 찢겨진 부분들에선 피가 찍찍 솟구쳤다. 흔히 무력이 높은걸 표현할때 사람도 맨손으로 찢을 정도라는 표현을 쓰긴 했지만, 그게 실제로도 될 줄이야. 진석은 흥 하고 코웃음을 치며 창문을 향해 손에 들린 머리통 반쪽을 집어던졌다. 쨍그랑! 유리창이 산산히 부숴지며 반쪽짜리 머리는 저 멀리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한 건 했다는듯 손을 탁탁 터는 진석.
"자 또 하나 잡긴 했는데, 그래서 레오노르는 어디... 응?"
주변을 둘러보다 문득 요람쪽에 멈춘 진석의 시선. 요람의 안엔 옷이 입혀진 갓난아기 모양의 인형이 눕혀져 있었는데, 그 품안엔 작은 쪽지가 하나 들려있었다. 곧바로 쪽지를 집어들어 펼쳐보는 진석. 그 안엔 짧고 간략한 문장 하나만이 적혀있었다.
"흠... 뭐야. '지하로 내려오라', 고?"
인상을 찌푸리며 쪽지를 구겨 아무렇게나 휙 집어던지는 진석.
'제길. 이거 내 움직임을 처음부터 예상하고 있었던 모양이군. 이 정도는 쉽게 해치울걸 알고 있었단 말이지?'
그렇다면... 대체 무슨 속셈일까? 이런 쪽지까지 써놓은것만 봐도 자신이 이런 장애물 따윈 쉽게 깨트리고 3층까지 도달할걸 짐작했다는 이야긴데. 이건 단순한 전력 낭비 아닌가? 차라리 자신 같으면 이들을 한곳에 모아두고 한꺼번에 덮치게 하며 함께 상대했을터.
'아무리 미리안이 복수심에 불탄다지만 바보도 아닌데... 이런식으로 쓸데없는 낭비를 할 리 없지. 분명 또 다른 속셈이 있... 응? 이건?'
그때, 불현듯 진석의 눈에 화면 한쪽 구석에 새로 떠오른 아이콘이 들어왔다. 불길한 사신의 모습이 그려진 아이콘. 딱 봐도 분명 또 자신에게 해가 되는 무언가가 분명했다. 지체없이 확인해보자니... 그것은 기절 초풍할정도로 어처구니 없는 것이었다.
"어, 언홀리 베네딕션?!"
어째선지 지금까지 사라지지 않고 있던 세인트 베네딕션. 미리안이 자신에게 일종의 포상으로 걸어주었던 기술. 적으나마 능력치를 올려주는 패시브 스킬이었던 그것이, 이젠 반대로 능력치를 저하시키는 저주 언홀리 베네딕션으로 변해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능력치의 낙폭이 커진다고?! 미, 미친거아냐?!"
처음엔 세인트 베네딕션이 올려주던 능력치 만큼만 저하되는걸로 시작하지만, 술자를 제거하지 않으면 그 낙폭은 시간이 지날수록 무제한으로 올라간다고 되어있었다. 즉 서둘러 지하로 내려가 미리안을 제거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모든 능력치가 0이 될때까지 이 언홀리 베네딕션은 멈추지 않는다는 이야기였다! 언홀리 베네딕션에 대해 확인하는 잠깐 사이에도 -5이던 경감 수치는 -6, 아니 벌써 -7이 되고 있었다!
"으악! 이게 진짜아아아!"
미친사람처럼 파다닥 거리며 방에서 뛰쳐나가는 진석. 복도를 거꾸로 거슬러 계단을 세개, 네개씩 마구 뛰어내려갔다. 최대한 서둘러 지하로 내려가서 미리안과 싸워야했다. 그렇지 않으면 능력치가 엉망진창이 된채 무력하게 당하고 말터! 순식간에 2층까지 뛰어내려간 진석. 하지만 2층의 계단참에는... 아까 전 쓰러트렸던 하녀들이 모조리 다시 일어나 길을 막고 있었다!
"아, 아니?! 그새 전부 기절에서 깨어났단 말야?! 말도 안돼!"
뭔 수를 쓴건진 몰라도 엄연한 사실이었다. 계단에서 뛰어내려오는 진석을 향해 방패로 길을 가로막고 할버드를 내찔러오는 하녀들. 진석은 에이씨 하고 혀를 차며 그 위로 뛰어내렸다.
"다 꺼져! 이젠 여자라고 봐주는거 없다아아아!"
할버드의 창날을 걷어차고 방패 위로 착지해 내리는 진석. 할버드를 쥐고 있던 하녀는 휘청이며 떠밀려 다른 하녀들과 부딪혔고, 방패를 들고 있던 하녀는 진석의 무게에 튕겨나가 듯 떠밀리며 방패를 놓치고 엉덩방아를 찧었다. 진석은 잽싸게 방패를 주워들고 그것을 앞세운채 불도저처럼 막무가내로 돌진했다.
"비켜비켜비켜!"
와르르륵! 진석의 힘에 떠밀린 하녀들이 엉망진창으로 뒤엉키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길을 뚫은 뒤 지체없이 방패를 집어던지고 1층으로 뛰어내려가는 진석. 하지만 계단을 내려가다 도중에 멈춰설 수 밖에 없었다. 1층의 모습은 더 가관이었기 때문이다.
"으윽?!"
좀비들이었다. 자신이 2층과 3층을 탐색하는 사이, 창문을 깨고 들어온 좀비들이 저택으로 기어들어와 1층 안쪽을 가득 메우고 있었던 것이다. 좀비들은 진석이 계단참에서 뛰어내려온것을 눈치채곤 흐어어 멍청한 소리를 내며 이쪽으로 몰려오기 시작했다.
"아 이런 망할..."
게다가 바로 위쪽 계단에서 우르르 하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하녀들이 몰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좀비나 하녀들이나, 이들은 수만 많지 별로 위협적인 상대가 아니다만... 지금은 정말로 한시가 급하다! 여유롭게 이들을 상대하고 있을때가 아니었다.
"제기랄! 지하! 지하는 어디야?!"
이 계단이 바로 지하로도 연결되어있으면 좋으련만 그렇지가 않았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은 아마 1층 안쪽 어딘가 다른곳에 있는 모양이었다. 진석은 좀비떼 사이로 몸을 날리며 마구잡이로 주먹을 휘두르고 발길질을 했다. 진석의 공격에 얻어맞고 뒤로 쭉쭉 밀려나는 좀비들. 하지만 수가 워낙 많다보니 일일이 뚫고 지나가는것도 고역이었다. 좀비들 사이를 헤치고 지나가는 잠깐 사이 2층에서 내려온 하녀들도 진석의 추격에 합류했다.
"젠장! 니들끼리는 안 싸우는거냐?!"
만에 하나 좀비들과 하녀들이 서로 몰라보고 싸운다 같은 상황을 기대했건만... 그런일은 절대 없다는듯 양쪽은 서로를 공격하지 않고 오직 진석만을 붙잡으러 덤벼들었다. 진석은 길을 가로막는 좀비를 걷어차서 날려보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디야, 어디로 가야하지? 그때 진석의 눈에 어둑한 복도가 눈에 들어왔다. 아까 어느 하녀가 티세트 카트를 밀고 나왔던 바로 그 복도였다. 지체없이 그쪽으로 달려들어가는 진석.
'에라 모르겠다. 제발 이쪽이기를!'
어두컴컴한 복도를 마구 달려나가는 진석. 한참 달려나가 모퉁이에서 딱 꺾어지고 보니, 저 안쪽에 빛이 새어나오는 문이 보였다. 망설임 없이 그쪽으로 달려들어가 안쪽으로 뛰어드는 진석. 이거저거 따질 새 없이 문을 닫고 빗장을 잠궜다. 후우 하며 한숨을 돌리고 안쪽을 둘러보자니... 이곳은 음식을 만드는 주방인 모양이었다. 여기저기 널린 식재와 요리도구, 뭔가가 끓고 있는 솥 같은게 보였다.
"...아니 근데 이게 뭐다냐."
자세히 보자니... 주방안의 식재가 전부... 사람의 시체였다! 하지만 성한 시체는 하나도 없었다. 전부 여기저기 해체당해 고깃덩이 마냥 굴러다니는 사람의 파편들 뿐. 도마나 칼은 내장과 피로 질척하게 젖어있었고 솥 안에서 끓고 있는것도 토막난 팔다리 같은것이었다.
"아이고, 또 뭔 짓거리냐고 이건..."
그때 주방의 저 안쪽으로 연결된 또 다른 방에서 누군가가 불쑥 걸어나왔다.
"...허어. 이거 보게. 댁이 주방장이신가?"
주방장의 옷차림을 한 거대한 괴물. 아까 티세트 카트를 밀고 나왔던 하녀와 비슷한 생김새의 거한이었다. 2미터가 넘어보이는 거대한 덩치. 터질듯 부푼 불룩한 배. 눈알은 시커멓게 물들어 있었고 치열은 전부 송곳니 뿐. 다리는 문어다리같은 시커먼 촉수들이었다.
"갸아아아아!"
그는 침입자를 용서치 않겠다는듯 양손에 든 도살용 칼을 마구 휘두르며 이쪽으로 쿵쾅쿵쾅 달려오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한숨을 내쉬는 진석.
"하아... 진짜 가지가지 준비해놨구나."
이 와중에도 능력치는 계속 줄어들고 있었다. 진석은 이제서야 자신이 함정에 빠졌다는 위기감이 들었다. 게다가 좀비들과 하녀들이 몰려온건지 등을 기대고 있던 문짝이 쿵쿵쿵 하고 부서질듯 두들겨졌다. 앞도 뒤도 전부 괴물이나 적뿐. 이렇게 낙담하고 있을 순 없었다.
"흐흐, 내가 오늘 아주 제대로 엿을 먹는구나."
바로 앞 도마위에 놓인 식칼을 집어드는 진석. 바로 지척까지 달려온 주방장 괴물을 향해 망설임없이 식칼을 집어던졌다. 휘리릭, 푸욱! 빠르게 날아간 식칼은 괴물의 미간을 정확히 파고들었다.
"그, 그억?!"
미간에 식칼이 꽂히자 휘청하며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지려고 하는 괴물. 하지만 진석은 넘어지려는 괴물의 멱살을 콱 움켜쥐고 그대로 솥이 있는곳까지 질질 끌고갔다.
"자자. 주방장이라면 자기가 한 요리의 간 정도는 스스로 확인해 봐야지?"
첨버엉! 솥 안에 괴물의 머리를 그대로 쑤셔 박아버리는 진석. 뜨겁게 끓고있는 솥안에 머리가 처박혀진 괴물은 부그륵 거리며 몸부림을 쳤지만 그것도 한 순간 뿐. 이내 추욱 하고 힘없이 사지를 늘어트렸다. 그러고나니 콰작하며 문짝의 경첩이 부서져가는 소리가 들렸다.
"제길, 쉴 틈이 없구만!"
허나 달리 도망갈 곳이 없는 주방 안. 진석은 지체없이 방금 이 주방장 괴물이 나왔던 안쪽으로 뛰어들어갔다. 그 안쪽엔 온갖 집기들이나 카트들이 늘어서 있는게, 준비한 요리를 여기에 있는 카트를 사용해 옮기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맞은편엔 문이 하나 보였다. 생각하고 자시고 할 틈 없이 문 밖으로 뛰어나간 진석. 문 밖엔 양갈래 복도가 있었는데 나왔는데 오른쪽 복도 끝에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참이 보였다.
"저기구나!"
진석은 문을 닫은 후 지체없이 복도를 달려나갔다. 거의 날듯 계단을 미친듯이 뛰어내려가는 진석. 그런데 내려가며 확인해 보자니 지하 역시 한 층으로 된 게 아닌 모양이었다.
"이런..."
한 층을 내려가니 지하 1층의 복도가 나왔지만 계단은 여전히 아래로 더 뻗어있었다. 그렇다는것은 지하는 1층만이 아니라 2층도 있다는 이야기. 미리안이 이중 지하 1층에 있을지 2층에 있을진 알 수 없었다.
"크윽! 시간 없는데!"
할 수 없이 확인차 우선 지하 1층의 복도로 뛰어드는 진석. 불행 중 다행으로 지하 1층의 복도는 약 20여미터 밖에 안됐다. 문도 단 세 개 뿐이었다. 먼저 복도 양편에 마주보고 있는 문을 열어보는 진석. 하나는 잡동사니가 들어찬 창고, 다른 하나는 오크통이나 와인병 따위가 보관된 술 저장고였다.
"쳇, 아니잖아!"
그리고 복도 맨 안쪽의 마지막 세번째 방문을 열어보는 진석. 그런데 문을 여는 순간 안쪽에서부터 희끄무레한 뭔가가 화아악 쏘아져 나왔다.
"이히히히히!"
"윽?!"
진석은 반사적으로 문 손잡이를 쥔 손을 놓고 뒤로 물러서 그것을 피했다. 그와 동시에 귓속 깊숙히 파고드는 신경에 거슬리는 웃음소리. 진석을 지나친 그것은 허공에서 휘이익 한 바퀴 선회하고 주변을 너울거리며 낄낄거렸다.
"...유, 유령?"
뭔진 몰라도 원혼 계열의 유령을 하나 방 안에 대기시켜놓았던 모양이었다. 멈칫한 진석을 향해 걀걀거리며 달려드는 희끄무레한 유령.
"진짜 가지가지 하고 자빠졌네! 안꺼져?!"
정면으로 날아드는 유령을 향해 란비언 페어를 휘둘러 베어버리는 진석. 유령은 메아리치듯 깔깔거리는 웃음소리를 남기며 단박에 소멸되어버렸다. 결국 이 방도 아니었다. 이깟 유령따위, 정말로 별것은 아니었지만 차근차근 진석의 시간을 갉아먹고 있었다. 어느새 언홀리 베니딕션이 주는 디버프량은 -20을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각기 80에 달하던 무력과 민첩은 이미 50대로 떨어진 상태였다. 이를 악물며 복도를 거슬러 지하 2층으로 내려가는 진석.
'이래서야... 미리안을 잡을 수 있을까?'
장담 할 수 없었다. 스스로가 너무 안일했다. 상대는 애당초 만반의 준비를 하고 불러들인걸텐데... 자신은 조금 강해졌다고 아주 자만해서는 어정어정 함정 안으로 기어들어왔으니!
"쳇!"
지하 2층의 복도는 1층보다 조금 더 길었는데, 다행스럽게도 문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복도 맨 안쪽 끝에 위치한 묵직해보이는 석문. 문은 한 뼘 정도 열린채 안에서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진석은 후다닥 달려가 문을 밀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와 동시에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흐음. 이제야 오셨나. 생각보단 늦었는데."
지하실 안쪽은 꽤 넓었다. 여느 농구장 코트보다 더 큰 면적이었달까? 방 구석엔 여러가지 집기나 잡동사니들이 쌓여있긴 했지만 그냥 텅 빈거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방의 맨 안쪽엔 화톳불이 밝혀져 있었고 드레비안과 레오노르가 있었다. 의자에 결박당한채 재갈까지 물려져 옴짝달싹 못하는 레오노르와, 그 옆에서 단창을 지팡이처럼 쥔채 이죽거리는 드레비안. 레오노르의 뒤쪽엔 왠진 모르겠지만 작은 협탁이 있는것 같았는데, 레오노르의 몸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다. 진석은 무거운 석문을 닫고 빗장을 채운 뒤 안쪽으로 천천히 들어섰다.
"하아... 이거 진짜 사람 여러가지로 고생시키는구만."
진석의 투덜거림에 단창을 휘리릭 돌려보이며 대꾸하는 드레비안.
"그 정도로 고생이라고 할 수 있나? 내가 맛 본 수모에 비하자면 새 발의 피도 안 될텐데."
"수모는 지랄. 그보다 빨리 끝내자. 네 장난질 때문에 아까부터 힘이 쭉쭉 빨려나가고 있거든? 힘들어 죽겠다... 고!"
질렸다는 듯 손사레를 치는 척 하며 허리 뒷춤에서 단검을 하나 뽑아들곤 드레비안을 향해 휙 집어던지는 진석. 자연스러운 기습이었지만 드레비안은 단창으로 그것을 가볍게 튕겨내었다.
"하! 그거 미안하게 됐군요, 오빠!"
단검을 튕겨내고 단창을 꼬나쥔 채 이쪽으로 달려드는 드레비안. 진석에게 달려들며 외치는 드레비안의 입에선 미리안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렇지, 몸체만 드레비안일 뿐 알맹이는 미리안이었지. 으엑하고 이맛살을 찌푸리며 란비언 페어를 뽑아드는 진석.
"징그러워! 그딴 꼬락서니로 네 목소리 내지마!"
"아하하하하! 듣기 싫다니 더 해줘야 겠군요! 죽어라!"
드레비안의 목소리와 미리안의 목소리를 번갈아 쓰는데다, 존대에 반말을 섞어쓰니 듣는것 만으로도 혼란이 일어날 지경이었다. 진석은 창을 내찔러오는 드레비안에게 맞서 란비언을 휘둘렀다. 챙챙챙챙! 단창의 창날과 구불구불한 란비언의 검날이 쉴새없이 맞부딪히며 불꽃이 튀었다.
============================ 작품 후기 ============================
네, 짐작하시다시피.. 이제 다음화가 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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