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13. -- > * 154화 *
"우후후, 하하하하!"
광기서린듯 웃어제끼며 미친듯이 창을 휘두르는 드레비안. 그 기세가 보통 강맹한게 아니라 진석으로서도 맞서기가 꽤나 버거웠다.
"거 시끄럽다고!"
"왜지? 대체 왜에에!"
시끄럽다는 진석의 외침을 무시하듯 더욱 큰 고함을 지르면서 스냅을 주어 강하게 내찌른 드레비안의 단창. 파카앙! 진석은 란비언을 교차시켜 공격을 막아냈지만 너무 거친 기세에 뒤로 서너걸음 물러나버리고 말았다. 드레비안은 단창을 휘리릭 돌려보이다 처척 꼬나쥐며 진석을 노려보았다. 드레비안의 눈동자는 그야말로 활활 불타는 것 같았다.
"분명 모든것을 주겠다고 약속했거늘... 어째서 날 배신하려든거지?"
"...모든걸 준다고? 웃기고 있네. 어차피 그런식으로 끝까지 네놈들을 따랐다간 세상이 몽땅 다 망했을텐데."
어차피 이건 게임. 진석으로선 이 세상이 몇 번이고 거듭해 망해도 아무 상관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교단의 계획을 박살낸데다가 실상 최후의 싸움에 임한 상황. 이제와서 미리안의 추궁이나 자신의 답변 따윈, 아무래도 좋을 것이었다. 아무렇게나 대답하며 숨을 고르는 진석. 중요한건 자신이 이기면 모든것은 여기서 끝난다는 것. 반대로 진다면? 살아남은 미리안이 또 다시 어둠속에 숨어 교단을 재건해 나가겠지. 물론 진석은 자신이 패배한다면 즉시 로드해서 다시 도전해올테니 뭐 그렇게는 안되겠지만서도. 하지만 진석의 빈정거림에 드레비안은 발끈하며 휘릭 창을 내질러왔다.
"망하는게 아니야! 영구한 평온이란 진정한 낙원이다!"
"아아, 원래 사이비는 다들 그러더라. 하나같이 자기네들은 진짜라고 하지!"
채챙! 단검과 창날이 교차하며 지하실이 쩌렁 울릴 정도의 금속음이 울려퍼졌다. 대치한채로 드레비안의 어깨 너머 지하실 저 끄트머리에 묶여있는 레오노르를 바라보는 진석. 그녀는 의자에 단단히 묶이고 재갈까지 물려져 한 마디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분명히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진석은 드레비안의 어깨너머를 향해 턱짓을 하며 말했다.
"게다가... 의도했던건 아니지만 네 덕에 아버지가 됐잖냐? 아버지씩이나 돼서 자식에게 망해버린 세상을 물려 줄 순 없잖아!"
"크으으윽! 되도 않는 역겨운 소리를 잘도 지껄이는구나!"
짜증난다는 듯 그 즉시 창을 연속으로 휘둘러오는 드레비안. 물론 진석으로서도 마음에 하나 없는 낯부끄러운 소리긴 했다. 단지 지금은 뭐든간에 핑계를 가져다 붙여 미리안의 복장을 뒤집어 놓고 싶었을 뿐. 상대를 흥분시켜 거칠거나 무모한 공격을 유도하고 그 빈틈을 찌르는건 지극히 기본적인 도발이었으니까.
"인질을 붙잡은데다가 이딴 더러운 함정까지 파놓고 날 유인한 주제에 누가 누구보고 역겹다는거야? 게다가 네 몸뚱아리도 아니고 남의 몸을 빼앗아쓰는 처지에? 주제파악이나 하시지!"
그렇게 외치며 적극적인 공세로 나서는 진석. 검날이 미친듯이 춤추며 파공음을 내었으나 유효타는 하나도 없었다. 드레비안이 내찌른 창날은 당장이라도 진석의 몸을 꿰뚫을듯 종이 한 장 차이로 몸통을 스쳐나갔다. 둘은 아무말도 없이 서로에게 근접한채 상대방을 향한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열 합, 스무 합, 몇십합이나 되는 공방이 순식간에 오고갔다. 그야말로 위태롭고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보는듯한 모습. 허나 둘은 완벽한 평수를 이룰 뿐. 양쪽 다 적중하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진석은 슬슬 공격을 피하거나 막아내는게 버거워진다고 느끼고 있었다. 마치 숨참기 대결에서 진 사람마냥, 거친 숨을 몰아쉬며 검을 세차게 흩뿌리고 뒤로 물러서는 진석.
"후우, 후, 하아... 헉."
슬쩍 언홀리 베네딕션의 상태를 확인해 보자니... 마이너스 수치는 그새 훌쩍 높아져 -30을 한참이나 넘어서고 있었다. 이제 자신의 무력은 40대 초반, 민첩은 30대 후반으로 접어들었다.
"왜 그러지? 벌써 지치는건가? 응? 스스로 아버지라느니 뭐라느니 했으면서, 고작 이게 전부인건가?"
한편 히죽거리며 여유로운 태도로 창을 휘리리 돌려보이는 드레비안. 언웨이크닝을 얻기도 한참 전의 이야기긴 하지만, 드레비안은 자신과 대련할때 평수를 이루는 실력자였다. 그렇다는건 드레비안의 능력치가 그때와 변함없이 그대로라고만 해도... 이미 지금 자신의 능력치를 능가하고 있다는 이야기. 게다가 지금 드레비안의 몸을 움직이는건 미리안 아니던가? 저택에 준비해놓은것들만 봐도 무슨 꼼수를 더 부려올지 몰랐다. 진석은 숨을 가다듬고 손등으로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내며 대꾸했다.
"아니 뭐, 평소라면 야식을 먹을 시간인데 걸렀더니 배가 고픈게 힘이 없어서 그래. 그런 의미에서 이거 하나 맛보는건 어때?"
태연스레 말을 잇다 등 뒤의 단검을 한 자루 뽑아 휙 집어던지는 진석. 하지만 드레비안은 가벼운 고갯짓 만으로도 진석의 단검 투척을 피해버렸다. 엄한 구석으로 날아가 챙강하고 바닥을 나뒹구는 단검. 드레비안은 쓸모없는 기습을 걸어온 진석의 태도를 비웃으며 말했다.
"변변찮구만, 사양하지. 메인디쉬를 먹기전에 쓸데없는걸로 입을 더럽히고 싶진 않으니까!"
그리고 진석을 향해 직선으로 달려드는 드레비안. 바위라도 박살낼 것 같은 매서운 기세의 창날이 한줄기 질풍이 되어 찔러졌다. 이를 악 물며 겨우겨우 그 공격을 피해내는 진석. 반면 진석을 쫓는 드레비안의 눈은 광기로 번들거렸다.
"아하하하하하! 좀 더 몸부림 쳐봐!"
애당초 미리안은 어째서 죽지 않고 드레비안의 몸 안에 존재 할 수 있었는가? 그것은 드레비안이 처음부터 만약을 대비한 미리안의 보험이었기 때문이다. 조직이 커지며 모든일을 직접 나서서 처리할 수 없게 되자 미리안은 장래를 준비하는 의미에서 스스로 수호자로 부릴 네 명의 아이를 끌어모았었다. 미리안은 그 중 자질이 가장 뛰어난 드레비안을 눈여겨 봐두었다. 그리고 미리안은 어느날 드레비안을 사원의 지하로 데려가 육체에서 혼을 뽑아버린 후, 그를 단순히 자신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는 충실한 인형으로 개조해 두었던 것이다. 즉, 지금까지 드레비안을 움직이는 것은 그 스스로의 자아가 아닌 단순한 학습에 의한 반응이었을 뿐이었다.
이전, 진석이 제이스에게 드레비안에 대해 물었을때 그녀는 진석에게 드레비안은 어렸을때부터 저렇게 무뚝뚝하고 스스로 나서는 일이 없었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하지만 수호자 넷 중 드레비안이 학습 성취만큼은 가장 뛰어났다고 했다. 그야 당연했다. 자아를 제거하고 모든 욕구를 거세한채 명령에 충실한 인형으로 만들어 두었으니, 가진바 자질과 재능을 학습받은대로 전력투구 하는것이 당연. 그러니 옆에서 보기엔 타인과 어울릴 줄은 모르지만 성적만큼은 지극히 우수한 상대로 보일 수 밖에 없었다.
아마도 그럴일은 없을테지만, 미리안은 만에 하나, 정말로 만에 하나라도 자신의 신변에 무슨 변고가 생길 경우를 대비했다. 혹시 자신이 죽게 된다면 그 영혼만이라도 드레비안의 육체에 전이되도록 술법을 걸어두었던 것이다. 우수한 자질을 지닌 드레비안의 영혼을 제거하고 충실한 인형으로 탈바꿈해둔건 그걸 위해서서였다. 그리고 절대 없을거라 생각했던 그 만에 하나는 진석에 의해 실제로 벌어진데다가 긴 세월에 걸쳐 준비해온 강림의 준비는 모두 엉망진창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진석에 의해 한차례 패배한 후 자신이 시킨 임무차 사원의 바깥에 나가있던 드레비안의 몸으로 전이 된 미리안. 복수심에 미쳐버릴 것 같았고, 당장이라도 사원으로 돌아가 진석을 찢어 죽이고 싶었지만... 애당초 진석 정도쯤 언제든 손쉽게 제압할 수 있다고 방심하다 이렇게 당한것이 아니던가? 미리안은 분노를 가라앉히고 신중하게 움직이기로 했다. 그 즉시 그란델로 향한 미리안은 레오노르와 맥, 머서를 부려 메디니아를 공격케 하고 대역들을 준비한 후 자신은 레오노르를 데리고 해밀턴의 공작가로 가서 진석을 끌어들일 밑준비를 했다.
물론 멍청하게도 진석이 대역인 가짜 드레비안과 가짜 레오노르에게 속아넘어가서 제거할 수 있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하지만 생각치도 않게 클립튼 일행이 먼저 왕궁에 난입하는 바람에 대역을 이용한 노림수는 흐지부지 되었다. 하지만 예정대로 레오노르의 목숨을 인질로 잡고 있음을 알리고 진석을 홀몸으로 함정으로 끌어들이는데는 성공했다. 미리안은 확실한 제압을 위해 저택의 가병들이나 하인들의 영혼을 소재로 이용해 무려 세 종류의 결계를 준비했다. 우선 온갖 성가신 무구들의 사용을 할 수 없도록 막았고, 껄끄러운 기술들 역시 펼칠 수 없도록 강제했다. 그리고 마지막은 진석의 동향이나 속마음을 투시할 수 있도록 걸어둔 세인트 베네딕션이었다. 미리안은 세인트 베네딕션을 역전시켜 언홀리 베네딕션이라는 저주로 바꿔버려 그 본인의 능력마저 침식당하도록 만들었다.
준비는 완벽했다. 진석은 저택에 들어서면서부터 자신의 의도대로 움직였다. 저택의 3층까지 올라갔다가 허겁지겁 쫓기듯 지하까지 내려왔지만 그의 힘은 이제 반토막, 아니 그보다도 더 아래로 떨어진 채였다. 직접 무기를 맞대고 있으니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레오노르 뒤에 있는 협탁. 그 위에 준비해둔 세 종의 결계석을 부수지 않는 한 이 결계들은 절대로 풀리지 않을것이었다. 이미 무력해져가는 진석은 아무것도 모른채 곧 자신의 손에 갈기갈기 찢겨지리라. 자신은 그 후 레오노르를 이용해 그란델의 어둠에서부터 다시 준비를 해나가면 그만이었다. 메디니아쪽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나 그 나라의 모든것은 원래 자신이 쌓아올렸던것. 조금의 시간만 있으면 얼마든지 별 어려움 없이 수습 할 수 있었다. 연원역행진의 제단을 다시 준비하고 영혼을 모으기 위해선 또 다시 오랜 준비가 필요하겠지만... 그래도 이 자만 죽인다면 모든것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이제 그만 슬슬 죽어!"
화아악! 순간적으로 내질러진 드레비안의 일격. 이미 능력치가 20대까지 떨어진 진석으로선 도저히 막거나 피할 수 없는 공격이었다. 창은 진석의 옆구리를 왕창 뜯어내었고 강맹한 일격을 먹은 진석은 대량의 피를 흩뿌리며 그대로 뒤로 나동그라졌다. 쿠당탕!
"크윽! 으으... 아, 아프잖냐."
옆구리를 움켜쥐며 신음하는 진석. 드레비안은 흡사 쓰레기를 내려다보듯 하는 눈으로 진석을 깔아보며 말했다.
"애당초 능력만을 보고 교단에 받아준게 실수였다. 교단에 대해 의구심이나 반심을 품고 있다는건 처음부터 어느정도 가늠하고 있었지만... 네 안에 들끓는 욕망이라면 끝까지 대업에 충실히 협력할 종이 되어줄거라 생각했거늘."
진석은 고개를 숙인채 큭큭 하고 자조적으로 웃다 드레비안을 올려다보며 대꾸했다.
"뭐 나도 도중까진 네 목적에 끝까지 협력할까도 생각했었지만... 남자의 마음은 갈대라서 말이지. 이게 대체 내가 뭘 하고 있는건가 싶은게 도중에 그만 질리더라니깐? 그보다... 이제 이 언홀리 뭔지 좀 풀어주면 안될까? 족쇄 풀어주고 제대로 한 판 붙어보자고. 딱 적당한 상처도 입었겠다, 핸디캡으로 충분하잖아?"
심각한 상처를 입었음에도 태연자작한 대꾸를 해오는 진석의 모습에 잠시 멍한 표정을 짓다 파안대소하는 드레비안.
"하... 아하하하하! 이런 상황이 되어서도 아직도 포기하지 않는건가? 지금은 저번처럼 널 도와줄 사람도 없는데! 하지만... 뭐 좋아. 어차피 죽을 목숨,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는 셈 치고 알려주지. 레오노르의 뒤쪽 보여? 거기에 이 결계들을 구성하는 결계석들이 있지. 그것들을 파괴하면 널 구속하는 제약은 사라질테지만... 그럼, 답을 알려줬으니 어디 한 번 날 넘어서 저것들을 재주껏 부숴보시지!"
드레비안은 그렇게 외치며 단창을 내질렀다. 바닥에 쓰러진 진석은 급히 피하려 했지만 미처 도망가지 못하고 허벅지에 창을 찔리고 말았다. 푸욱 깊숙히 찍혀져 나오는 창날을 따라 바닥에 흩뿌려지는 선혈.
"커으윽!"
드레비안, 아니 미리안은 고통스러워하는 진석의 모습을 보며 만족스럽다는 미소를 띄워보였다. 또 다시 내찔러진 창날. 이번엔 진석의 어깨가 꿰뚫렸다. 그리고 또 다시 한 방. 또 한 방. 연달아 몇번이나 찔려 삽시간에 피투성이가 되어버린 진석. 바닥을 나뒹굴며 고통에 신음했다.
"듣기 좋은걸? 소프라노의 노랫소리만큼이나 감미로워!"
"크... 으흐흐흐! 그래? 그거... 황송하구만. 그러니까 이거나... 먹어!"
부상당한 몸을 이끌고 엉거주춤 일어나며 뒷춤에서 마지막 두 자루의 단검을 뽑아 내던지는 진석. 한 자루는 드레비안에게 정확히 날아들었지만 다른 한 자루는 겨냥이 완전히 빗나가 저 멀리 한참 뒤쪽으로 날아가고 말았다. 빗나간 단검은 무시하고 자신에게 날아든 단검은 가볍게 튕겨내며 코웃음을 치는 드레비안.
"하찮군. 정말 하찮아... 내가 이딴 자에게 농락당했었다니... 스스로가 너무 한심한걸. 정말로 헤세스모데우스님에게 면목이 없어..."
힘을 다해 던진 단검 투척이 무위로 돌아갔지만 진석은 드레비안을 노려보며 히죽거리는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이상하군. 과도한 고통에 정신이 나가기라도 했나? 능력치도 바닥까지 떨어진데다 이미 치명상도 몇 군데나 입은 상황. 이제 곧 저 자에게 닥쳐올 미래란 오직 죽음뿐이었다. 그런데도 웃음이 나온단 말인가? 역시 실성했다고 밖엔... 아니, 그건 아니었다. 저 웃음은... 아직도 뭔가를 믿고 있는자의 얼굴이었다. 대체 뭐지? 순간 의아한 표정을 떠올리는 드레비안.
"너... 아직도 뭘...?"
허리를 쭉 펴고 제자리에 꼿꼿히 선채 드레비안에게 엄지를 편 오른주먹을 내밀어보이는 진석. 이게 뭐하는건가 싶은데 다음 순간, 진석은 엄지가 아래쪽으로 향하도록 확 꺾으며 외쳤다.
"그래. 나불나불 결계석에 대한걸 떠벌여줘서 고맙다 멍청아! 아르데나! 그 망할것들 다 깨부숴버려!"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는 드레비안. 그리고 파아앗! 저 뒤쪽, 방금전 자신을 빗나가 뒤쪽 멀리까지 날아갔던 단검. 바닥에서 뒹굴고 있던 그 단검에서 미약한 빛이 퍼져나오나 싶더니... 어느새 그 단검은 아르데나의 모습으로 바뀌어버렸다!
"알았어요 오빠! 지금 바로!"
"너... 너! 너어어어어!"
진석은 처음부터 혼자 오지 않았다. 그야 별 다른 대비없이 어정어정 온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비장의 한 수 마저 준비하지 않을정도의 바보는 아니었다. 다른 일행들은 전부 군대를 막거나 제이스를 죽이기 위해 떠나보냈지만 아르데나만큼은 곁에 남겨두었었다. 진석은 아르데나에게 모든 이해관계를 떠나 이 세상에서 자신이 끝까지 믿을 수 있는건 오직 너뿐이라며, 자신과 동행해줄것을 부탁했다.
아르데나는 진석이 그녀를 구해주는 퀘스트를 클리어 한 시점부터 전적으로 진석을 따르게 된 대상. 당연히 거부할리가 없었다. 세상에서 믿을 수 있는게 너뿐이라는 고백에 가까운 말엔 내심 뛸듯이 기뻐하기까지 했다. 허나 또 어디에 미리안이 깔아둔 감시의 눈이 도사릴지 모르는 일. 진석은 불편하더라도 감수해달라며 아르데나를 단검의 모습으로 변하게 한 뒤 데오그라즈에서부터 평범한 무기처럼 위장시켜 동행해왔던 것이다. 그 어떤일이 있더라도 절대로 자신이 명령하기 전엔 꾹 참고 평범한 단검처럼 위장해야 한다고 지시했었다. 완벽을 기하기 위해 정신을 통해 말을 거는것 조차도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해뒀었다. 아르데나는 그 지시를 충실히 이행했다. 그리고 지금 여기서 그녀는 완벽한 외통수가 되었다.
"안돼에에에!"
당황해서 허겁지겁 달려가며 소리지르는 드레비안. 하지만 이미 늦었다. 협탁에 다가선 아르데나의 검은 눈동자에 붉은 빛이 서렸다. 괴물의 힘을 한껏 이끌어낸 아르데나는 온 힘을 다해 협탁위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세 개의 결계석을 향해 주먹을 내리쳤다.
"이딴건! 몽땅! 부숴져버렷!"
파자작, 와지끈! 결계석과 협탁이 한꺼번에 박살나며 바닥으로 산산히 흩어져갔다. 그리고 다음 순간, 피를 흘리며 힘겹게 버티어 서있던 진석은 언홀리 베네딕션의 효과가 단박에 사라지고 전신에 급속히 힘이 돌아오는것을 느꼈다. 진석의 안면엔 이걸 기다렸다는듯한 미소가, 드레비안의 얼굴엔 그와 반대의 경악이 서렸다.
"잘 했어! 정말 잘 했어, 아르데나! 나중에 뽀뽀해줄께!"
파아앗! 진석은 스스로에게 메델라를 걸어 회복시킴과 동시에 시클론, 에그레기움을 걸며 황금빛 섬광이 되어 쏘아져 나갔다.
"으, 으아아악! 저 계지이이입! 다 됐는데! 또 다시! 또 다시 네가 방해르으을!"
발광하듯 입가에 거품을 물며 아르데나를 향해 단창을 집어 던지려는 드레비안. 하지만 곧바로 진석이 뒤에서 달려들었다.
"너! 미리아아안!"
"크윽, 이! 이 쓰레기이잇!"
바로 뒤까지 다가온 진석의 기척에 창을 던지려다 말고 뒤돌아서서 창을 내질러오는 드레비안. 하지만 순식간에 모든 능력을 회복한 진석에게 있어 그런 공격따위 하품이 나올 지경이었다. 이젠 완벽히 서로의 능력이 역전된 상황이었다. 진석은 쭉 뻗어져오는 창의 첨단을 피하며 가장 손에 익은 익숙한 기술을 발했다.
"이젠 내 차례다! 네가 울때까지! 패는걸 멈추지 않겠어! 먹어라, 라파가!"
촤아악! 한줄기 삭풍이 되어 스쳐간 진석. 진석의 수평베기는 드레비안의 갑옷마저 베고 흉골이 드러날 정도로 가슴팍을 몽창 베어버렸다. 드레비안을 순식간에 베고 지나가 배후를 점한 진석은 멈추지않고 연속해서 공격을 가했다.
"또 간다! 오에스테!"
파파파팍! 하단에서부터 중단 상단으로 훑고 올라가는 원무의 연격. 발목의 힘줄을 끊고 무릎 안쪽의 관절을 베었으며 등허리를 찢고 뒷목을 갈랐다. 한순간에 전면과 후면에서 연달아 공격을 당한 드레비안은 고통스런 비명을 지르며 휘청였다.
"카하아아악!"
"검의 결계속에서 춤춰라, 토르멘타!"
스가가각. 진석의 공격이 둥그런 검막을 형성하듯 펼쳐졌다. 그 죽음의 공간 안에 갇힌 드레비안에게선 피보라가 사방팔방 튀어올랐다. 수초사이에 너덜너덜 걸레짝처럼 변해버린 드레비안의 몸뚱이. 그나마 갑옷을 걸치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이미 온전한 형체조차 유지하지 못했을만한 무시무시한 난무였다. 하지만 진석은 어직 공격을 끝낼 생각이 없었다. 진석은 장렬한 연속공격의 여파로 쓰러지려고 하는 드레비안을 몰아붙이며 외쳤다.
"이걸로 끝났다고 생각해? 웃기지마! 하아아아앗!"
고오옹. 순간 진석의 머리 뒤로 오색으로 빛나는 찬연한 헤일로가 떠올랐다. 그것은 흔히 종교화 등에서 볼 수 있는 후광 그 자체였다. 진석이 어웨이크닝의 각성을 사용하자 그것과 같은 무지갯빛의 헤일로가 저절로 나타났던 것이다. 에그레기움으로 이미 2배나 상승해있던 능력치는 제각기 3배에서 10배까지 제멋대로 들쭉날쭉 상승하며 폭발적인 기세를 뿜어내었다.
"단사 데 라 무에르떼!"
시클론, 에그레기움, 그리고 언웨이크닝의 각성에 이은 바일레 델 비엔토의 절기. 사신이 펼쳐내는 죽음의 춤. 진석은 한 줄기 검은 바람이 되어 휘몰아쳤다. 눈을 한 번 깜빡일정도의 앗 하는 사이, 죽음의 춤에 휘말린 드레비안의 몸뚱이는 십수미터 밖으로 순간이동하듯 나가떨어졌다. 그리고 드레비안의 몸뚱이가 저 멀리 날아가 벽에 처박히고 나서야 그 궤도를 따라 피와 살점, 파육음이 한 발 뒤늦게 휘몰아쳤다. 그랬다. 진석의 공격은 순간적으로 음속마저 초월해 작렬했던 것이다.
"가... 그... 커어..."
상식을 초월한 어마어마한 공격. 드레비안의 몸뚱이는 이제 제대로 된 형체를 유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몇 번이나 이어진 압도적인 위력의 맹격에 거의 갈려지다시피 한 것이었다. 전신의 피부와 근육은 너덜너덜해져 골격이 훤히 드러나 보이는 상태였고 내장도 여기저기 엉망진창으로 흩뿌려진채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드레비안은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았다. 금빛의 성광과 오색의 헤일로를 배후에 두른 진석이 그 앞에 다가서자 드레비안의 입에선 기력이 쇠한 미리안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 너, 이런... 힘을... 어떻... 게..."
"안타깝군, 하지만 스포일러가 되니까 함부로 알려줄 수 없겠는걸."
고개를 저으며 오른손을 허리 뒤쪽으로 끌어 모으며 호흡을 정돈하고 상대를 완전히 끝장낼 마지막 일격을 준비하는 진석. 하지만 드레비안의 입에선 웃음이 터져나왔다.
"아, 하! 하하! 하... 그래... 마지막 선물로... 좋은걸... 알려주지."
엉망진창이 되어 잘 움직이지도 않는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넣더니 뭔가를 끄집어내는 드레비안. 그 손엔 불길한 색으로 빛나는 작은 구슬같은게 들려있었다. 그리고 힘없이 툭 떨어져 바닥을 도르르 굴러가는 구슬.
"...뭐야 이건?"
다음 순간, 우르릉 하고 천장과 바닥이 심하게 흔들렸다. 드레비안의 입에선 미리안의 귀기서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크큭... 뭐냐고? 스위치다...! 이제 이 저택은... 이십여초내로... 폭발한다... 뒷처리용으로 준비해둔거지만 다 글렀으니... 너나 나나! 여기서 모두 다 같이 죽는거다아앗-!!!"
그렇게 외치며 진석을 붙잡겠다는듯 바닥에서 벌떡 일어나 와락 덮쳐오는 드레비안의 몸뚱이. 하지만 진석은 최후의 발악을 해오는 미리안을 향해 눈을 부릅뜨며 마지막 일격으로 준비한 열격장과 새기타를 동시에 내질렀다.
"웃기지마! 이제 그만! 지옥에나 떨어져-!!!"
화아악 회전하며 드레비안의 이마를 강타하는 진석의 장타. 쩌어엉! 그리고 임팩트의 순간, 그를 뒤따르듯 쏘아져나간 황금빛의 구체들이 전방을 향해 몇번이고 연달아 터져나갔다. 퍼퍼퍼퍼펑! 화라락 뒤집히며 폭발해 산화해버리는 드레비안의 몸체. 옆에서 보자면 마치 진석의 손에서 맹렬한 불꽃의 소용돌이가 뿜어져 상대의 몸체를 그대로 소각시켜버리는 듯 했다. 드레비안의 몸체는 그야말로 갈기갈기 찢겨나가며 강력한 폭발에 완전히 소멸해버렸다. 그렇게 미리안은 진석의 손에 의해 진정한 죽음을 맞이했다. 이젠 정말로 이 세상에서 그 존재가 말소당한 것이었다. 어둠속에서 세계를 위협하던 허신의 주구는 이렇게 사라져버렸다.
"...젠장!"
그리고 혀를 차며 각성과 에그레기움을 해제하는 진석. 미리안을 물리쳤지만 그게 중요한게 아니었다. 우르릉! 재차 지하실 전체가 요동쳤다.
"폭발이라니... 이런 망할 것... 정말 끝까지 이딴짓을!"
진석의 시선이 지하실 저 안쪽에 있는 아르데나와 레오노르를 향했다. 진석이 미리안을 물리치는 사이 아르데나가 레오노르의 결박과 재갈을 풀어준 상태였지만, 그녀들을 데리고 십수초 내에 이 저택을 탈출 하는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게다가 이 석문 밖에는 좀비들과 하녀들도 잔뜩 몰려와 통로를 메우고 있을터. 아직 여분이 남은 신성력과 마음의 힘을 써서 순간적이나마 능력치를 최대한 끌어낸다면... 자신만은 어떻게든 아슬아슬하게 저택 밖으로 달아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혼자서 달아났다간 아르데나와 레오노르는 이곳에 매몰되어 그대로 죽는다.
"...그럴수는 없잖아!"
자신의 목숨을 몇 번이나 구해준 아르데나. 그리고 자신의 아이를 뱃속에 품고 있는 레오노르. 무슨일이 있어도 자신은 이 둘을 포기할 수 없었다. 애당초 포기할거였다면 뭐하러 여기까지 왔겠는가? 진석은 이를 악물고 아르데나와 레오노르를 향해 필사적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십여초 후. 해밀턴 공작가는 정원부지까지 다 날아갈 정도로 어마어마한 폭발에 휩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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