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온 킹-22화 (22/82)

22화

지고 있어도 질 것 같지 않은 경기였다. 어디서 나오는지 모를 이상한 자신감은 현실이 되었다. 경기 종료 직전 승부의 추가 정확히 균형을 맞추며 경기는 연장전에 접어들게 되었다. 승리를 자신하던 이탈리아는 끝없는 허탈감을 느꼈다.

“잘 해줬다. 그렇지만 아직 승부가 끝난 게 아니야. 상대보다 더 많이 뛰는 게 중요하다.”

히딩크 감독은 연장전을 준비하면서 다리가 풀려가는 대한민국 선수들에게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경기가 이렇게 흘러갈 것을 알고나 있었던 것처럼. 혹은 대한민국이 이탈리아를 상대로 선전하는 게 이상하지 않은 것처럼.

자리에 앉아서 물로 입을 헹군 우주는 아까 발등의 감촉을 다시 떠올렸다. 부폰의 손에 맞고도 골망까지 닿을 만큼 강한 슛이었다. 어찌 그런 슛을 시도할 수 있었는지 본인도 알 수 없었다.

그런 슛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런데도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고 생각하니 신기했다. 그러고 보면 이런 순간적인 슛들은 모두 골을 위한 본능적인 움직임들이었다. 본능, 그 본능이란 게 대한민국을 구해냈다.

기분이 좋았다. 이탈리아 수비진에 엿을 한 번 먹이고 나니까 더 대단한 걸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고개를 돌려 저 쪽 이탈리아 벤치를 슬쩍 쳐다보니 트라파토니 감독이 선수들에게 역정을 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이제 연장전을 소화해야 하는 시간이 다가왔다. 우주는 그 시간을 피하지 않고 성큼성큼 자신감 넘치는 걸음으로 피치 위로 들어갔다. 대한민국 응원단의 응원 소리가 한 차례 크게 들려왔다.

[30분. 다 뛰기 싫으면 일찌감치 우리가 선제골을 넣으면 됩니다.]

다음 경기를 위해선 이 경기를 빨리 끝내야 한다. 서든데스 형식의 골든골 제도로 한 골이면 이 경기는 끝난다. 그 골이 누구의 발에서 터져 나오느냐, 선수들은 각자 자신의 발에서 그 골이 터져 나오기를 기원했다.

[적극적일 필요가 있습니다. 프랑스, 아르헨티나, 포르투갈, 이탈리아까지. 이탈리아가 8강 진출에 좌절하는 모습을 우리가 보자구요.]

두 팀 모두 전후반 90분처럼 활발한 움직임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위험 지역에 오면 서로가 서로를 쫓아내려고 애썼지만 공이 오고가는 것을 모두 쫓아가는 선수는 없었다. 그나마 우주를 비롯해서 교체 투입된 선수들이 활력을 불어넣고 있지만 세심한 공격이 나오지는 않았다.

[안정환 주춤주춤, 이천수가 공 잡습니다. 아, 거긴 아무도 없었어요.]

길게 처리하는 패스는 약간씩 모자라는 게 체력이 떨어지니까 집중력도 함께 떨어져서 그런 거다. 우주는 자신에게로 오는 패스들이 정확하지 않은 것을 보고 동료 선수들의 체력이 많이 떨어진 것을 느꼈다.

[잘 끊었어요, 최진철! 토티를 잘 끊었습니다. 토티가 몸이 좀 무거워지는데요.]

[네. 토티는 지금 델 피에로가 교체되어 나가고 난 뒤부터는 전방, 공격수 자리에서 움직이고 있어요.]

이탈리아의 핵심 토티도 점점 움직임이 무뎌졌다. 대한민국 수비진은 최대한 토티에게 공이 가지 않도록 노력했다. 점차 힘을 잃어간다고 할지라도 토티만큼의 위력을 가진 선수라면 어떤 장면이든 만들 수도 있다는 염려 때문이었다. 히딩크 감독도 연장전이 시작되기 전에 그런 점을 강조했다. 누구도 지금부터는 얕봐서는 안 된다고.

[안정환! 피하고! 벗어나기 직전! 터치라인 아웃! 한국의 스로인!]

페널티킥을 실축한 안정환은 연장전에서도 공을 잡으면 기회를 만들려고 상대 수비수와 싸웠다. 그 분투에 동료 선수들도 맞춰 움직이지만 끈질긴 이탈리아 선수들의 수비에 막혀 기회는 만들어지지 않았다.

[이영표에게, 서두를 필요 없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황선홍 쪽으로! 주고! 볼 컨트롤이 좋은 박지성! 주춤주춤!]

[때려야죠!]

페널티 박스 안쪽으로 날아든 이영표의 얼리 크로스, 황선홍이 율리아노를 버텨내며 박스 밖의 박지성에게 패스를 연결했다. 박지성은 자신의 앞을 막아선 선수들을 기민한 양발 드리블 동작으로 피해냈고, 마지막 순간 슛을 하려는 순간 말디니의 슬라이딩 태클에 걸려 넘어졌다.

[승리의 여신이 우리에게 미소를 짓는 것만 같습니다!]

말디니는 아무래도 박지성의 돌파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던 것 같다. 그렇지만 결국 무리한 태클은 대한민국에 기회를 줬다. 페널티 아크 바로 앞, 슛팅을 때리기엔 더없이 좋은 위치였다.

[감아차서 때리기엔 좋은 위치인데요.]

프리킥을 준비하던 황선홍의 쉼호흡이 끝나자 휘슬이 울렸다. 프리킥, 벽을 이루고 서있는 선수들이 슛을 막기 위해 점프하는 순간 그들의 발 아래로 공이 지나갔다.

“!”

벽이 뛰어오르는 순간 생기는 아래 공간을 노리고 깔아찬 슛팅에 완전히 의표를 찔렀다. 부폰은 다급히 몸을 날렸다.

[아아! 이걸 걷어냅니다!]

부폰의 손에 맞고 측면 쪽으로 공이 굴러갔다. 부폰의 완벽한 선방이었다. 우주는 코코와 몸을 맞붙이며 부폰이 쳐낸 공을 쫓아갔다.

지친 코코를 뒤로 하고 먼저 공을 잡아낸 우주는 몸을 붙여오는 코코를 등으로 버텨냈다. 그리고는 몸을 돌려 박스 쪽으로 공을 차냈다. 예상했던 대로 코코의 다리에 맞고 공이 골라인 밖으로 나갔다. 의도한 코너킥이었다.

[박지성! 코너킥 높게 가는데요! 헤딩! 뒤로 흐른 볼. 자, 안정환이 따라갑니다.]

[황선홍을 노렸는데요.]

[이영표! 슛하나요! 슛!]

[아.]

[네. 힘이 좀 실리지 못했어요.]

코너킥이 막히자 이영표가 공을 이어받고 바로 슛팅을 시도했다. 슛은 부폰의 정면으로 갔다. 이영표는 아쉬워하며 돌아서서 얼른 대한민국 진영으로 달렸다. 공격에만 집중하다 수비에서 실수하지 않기 위해 미리 자리를 잡으려는 것이었다.

[우리가 압도하고 있습니다.]

공은 뺏기지 않아야 하고, 골은 상대 문전에 가야 넣을 수 있는 모 유명 캐스터의 말에 따르면 연장전의 대한민국은 이탈리아보다 더 승리에 가까운 팀이었다. 숨을 가쁘게 쉬는 와중에도 선수들은 승리를 향한 집중력을 잃지 않았다.

[위기에 빠졌던 대한민국, 김우주가 살려냈습니다. 코코! 길게 패스!]

왼쪽 수비 코코는 공을 받아내고 바로 전방으로 긴 패스를 시도했다. 비에리가 수비수들을 이겨내고 공을 뒤로 흘려주었다.

[자 위험합니다 토티!]

페널티 박스 앞에서 공을 잡아낸 토티는 송종국을 등지고 있으면서도 기어코 힘으로 밀어내며 골문 방향으로 돌아섰다. 그래도 송종국이 끈질기게 앞을 막아내고 있자 페널티 박스 안으로 공을 치고 들어갔다. 송종국은 토티를 막기 위해 발을 뻗었다. 송종국 말고는 토티를 막을 선수가 아무도 없었다. 대한민국 응원단은 넘어지는 토티를 보고 긴장하며 숨을 죽였다. 주심이 송종국의 태클에 넘어진 토티를 보고는 휘슬을 불었다.

[아 이거 휘슬을 부는데요...!]

멀리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우주는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다시 방금 장면을 곱씹었다. 송종국의 태클에 토티가 걸리긴 했지만 그 전의 토티의 몸동작. 공을 쫓아가는 사람의 모습이 아니라 이미 넘어질 준비를 마친 사람 같은 느낌이었다.

[지금, 저건 경고를 받을 거에요!]

[네, 시뮬레이션 액션! 네!]

[토티, 경고 받습니다. 토티 선수는 이미 경고 받은 게 있거든요.]

[네! 토티가 빠지면은, 수맥이 완전히 끊겨요!]

[퇴장입니다!]

[퇴장입니다! 퇴장입니다! 토티의 퇴장! 승리의 여신은 우리 쪽으로 미소를 짓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주심은 시뮬레이션 액션이라 판정하며 토티에게 두 번째 카드를 꺼내들었다. 곧 퇴장을 의미하는 빨간 카드까지 나왔고, 응원단이 환호성을 질렀다.

[연장 전반전이 종료됩니다.]

이탈리아가 10명이 된 상태로 연장 전반전을 끝마쳤다. 이것도 수확이라면 큰 수확이었다. 이탈리아 선수들은 정신적으로도 큰 충격을 받았고, 남은 경기 시간 동안 토티의 몫만큼 선수들이 더 뛰어야 하니 체력적으로도 큰 부담이 될 터였다. 대한민국이 여러모로 유리해진 연장 후반전이었다. 우주는 승리를 예감하며 진영을 맞바꿨다.

[세계 축구사를 다시 쓰고 있어요. 이탈리아가 16강에서 쩔쩔매고 있습니다.]

[오늘 한국이 이탈리아를 꺾게 된다면 한국의 투혼을 세계가 주목할 거에요.]

박지성은 중앙에서 활발히 움직이며 공격을 할 때는 공격적인 패스로 기회를 노렸다. 이탈리아 선수들의 조직적인 수비는 여전히 한국의 공격을 막는데 유효하지만 경기를 주도하는 팀은 한국이었다.

[비에리! 자, 슛! 정면으로 갑니다.]

[아, 비에리.]

[비에리는 참 황소 같아요.]

힘이 좋은 비에리는 토티가 없음에도 힘으로 수비수를 이겨내고 결국에는 슛을 시도했다. 별 위협적인 슛이 되지는 못했지만 대한민국 선수들은 부담을 느꼈다.

이 부담을 위해서라도 어서 골을 만들고 싶었다. 우주는 한 골을 더 넣는 일이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어떤 두려움도 없었다.

[이제 남은 것은요, 힘을 내야 합니다. 여기 이 4만 관중들도 응원을 보내줘야 합니다.]

[정신 차리라고! 일갈을 합니다!]

[선수들은 판단력도 흐려지고요, 정말 힘들 거든요.]

경기에 집중하면서 주변의 응원 소리가 정확히 들리지는 않지만 그래도 누굴 위한 외침인지는 알 수 있었다. 우주는 대한민국을 연호하는 응원 소리에 눈을 더 크게 부릅떴다.

[송종국이, 김우주에게.]

오른쪽의 송종국이 경기장을 가로지르는 긴 패스를 보냈다. 왼쪽에 있던 우주는 잠브로타와 경합하며 뒤로 넘어져 공을 따내지 못했지만 경기는 계속 진행되었다. 이천수가 튀어가는 공을 터치라인 앞에서 잡아냈기 때문이었다.

[이천수, 이천수, 이영표에게.]

우주가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날 때 공은 이영표의 발에 있었다. 공격에 가담한 이영표는 바로 골문 앞으로 크로스를 보냈다.

[안정환! 헤딩!]

이탈리아 수비수들이 제대로 자리를 잡기도 전의 일이었다. 안정환은 공을 위해 높이 뛰어올랐다. 이 이후의 모습은 그의 본능적인 움직임처럼 보였다. 날아오는 공을 이마로 방향을 틀어냈고, 공은 절묘하게 골문 구석으로 날아들었다. 오늘 여러 차례 선방을 보여준 부폰으로서도 더는 손을 쓸 수 없는 슛이었다.

[골!!!]

[고오올!!!]

[한국이!!!]

[골골골!!! 골이에요!!!]

[한국이!!! 8강에 진출했습니다아아!!!]

[안정환!!! 안정화아아안!!!]

[한국이 이겼습니다!!!]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해낼 거라고 스스로를 믿었지만 정말로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큰 일이라도 벌어진 듯 미친 듯 심장이 두방망이질쳤고 몸이 떨려왔다. 계속 경기를 소화했던 탓에 달아오른 몸은 소름으로 차갑게 식어갔다.

[역전승입니다!!!]

[한국이 이탈리아를 물리쳤습니다아아!!!]

주위에 있는 선수들은 모두 자신들의 연봉의 10배는 더 받는 선수들이었다. 그런 선수들을 대한민국이 이겼다.

[한국이 세계 축구 역사를 새로 씁니다아아!!!]

더 이상의 생각은 불필요했다. 우주는 승리에 마음 놓고 소리 지르며 안정환을 뒤쫓아갔다. 경기장에 모여있는 대한민국 사람들은 모두 같은 마음인 듯 소리치며 난리를 쳤다.

[8강! 꿈에도 생각 못했던 8강을! 오늘 우리는 8강 진출을 해냈습니다!]

[신문선씨 한 번 꼬집어 볼까요! 아픕니까!]

[아픕니다!]

이게 꿈이라도 수긍할 수 있을 만큼 환상적인 순간이었다. 그런데 꿈이 아니다. 그래서 더 기뻤다. 8강, 월드컵 8강,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팀들만이 모이는 월드컵에서 무려 8강이다. 우주는 끝없는 기쁨을 선수들과 나누며 경기장 이곳저곳을 뛰어다녔다. 마치 어린아이가 되어버린 듯, 월드컵이 주는 환희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의 기쁨을 우주에게 안겨다 주었다.

============================ 작품 후기 ============================

이 경기는 쥐세페 트라파토니를 낳고 쥐세페는 황은후를 낳고 황은후는 최현을 낳고 최현은 강소중을 낳고 강소중은 한미르를 낳고 한미르는 신현성을 낳고

이들이 모두 모여 엑조디아처럼 경기에서 승리를 ㅇㅅㅇ

그럼 대한민국이 월드컵 우승 ㅇㅅㅇ

비상을 썼던 시절은 행복했네요 월드컵을 앞두고 썼던 글이라서 월드컵 우승이라는 주제로 글을 쓸 수 있어서 지금의 축구를 보자면 월드컵 우승은 소설로도 쓰기 죄스러울 정도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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